부산강의

말씀의 시공간

아빠와 함께 2025. 9. 9. 21:09

20250908a 부산강의 : [시편]79(63:3)-말씀의 시공간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시편 63편,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다윗이 유다 광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왕궁에 있어야 될 사람이죠. 왕궁 근처에 성소도 있습니다. 여기 광야로 쫓겨난 추방된 거죠. 추방되면서도 여기 11절에 보면,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자기 자신을 왕으로 이야기하면서 나의 왕 됨을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요거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초반부터 어렵게 해도 여러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시공간, 시간과 공간, 시공간이 있고 인간이 거기에 끼어 사느냐? 아니면 인간이 시공간을 만들어내느냐? 그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어렵지요. 인간의 시공간에서 첫 번째, 인간이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이게 맞느냐, 아니면 기존의 시간과 공간이 있는데 내가 들어가서 산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맞겠어요? 상식적으로 어린아이 같으면 ②번이 맞지요. 근데 정답은 인간의 시공간은 인간이 만들어내요. 왜냐 하면 인간은 관찰자기 때문에.

보통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와서 이런 말하지요. ‘오늘 집안 분위기 왜 싸하지?’ 이게 뭔 뜻입니까? 집 안의 가구를 옮긴 것도 아니고 맨 그 자리에 있지만 내가 존재하면서 둘러치고 있는 새로운 시공간이 인간이 자기가 몸에 익혔던 시공간을 일방적이에요. 이게 중요한데 ‘일방적’으로 조성해내는 거예요.

만약에 재벌 2세가, 요샌 3세라 해야겠죠. 재벌 3세가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고기 맛이 자기 마음에 안 맞는 맛이 나왔다. 그래서 셰프 나오라고 하면서 한바탕할 때 그 사람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든지 아프리카 난민 우물도 없는 지역에 한 번 가봐야 돼요. 콩 하나 그리고 곡식 한 알이 얼마나 맛있는 건지 귀한 것인지 그 사람은 생각을 못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실제로 서양동화에 나와요. 비행기가 불시착해서 그 사람이 아프리카에 떨어졌을 때에 스테이크도 아니고 날고기에다 그냥 개구리 잡아먹는다면 그게 얼마나 맛이겠습니까? 동일한 음식, 동일한 스테이크라도 본인이 본인을 의식하면서 평소에 조성해낸 그 시간과 공간이 그 현실에 대해서 분노를 자아내든지 아니면 감사로 이어지든지 그거는 이미 인간이 자기 존재 중심으로 일방적으로 시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거예요.

“나는 어릴 때부터 공주로 키워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공주로 키워서 내가 시집와서 공주 대접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대접 받으려고 시집온 게 아닙니다.” 이렇게 까불다가 이혼숙려에 상담 받고 하잖아요. “나는 이 정도 돈은 쓸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여자에요.” 아직도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외부에서 보면 당신부터 고쳐야 돼, 상담자가 당신부터 고쳐야 된다고. 당신은 공주가 아니야, 자꾸 이야기하는 것. 흥청망청 돈 쓰고 예쁜 옷, 고급 가구, 명품가방 사고 그동안 뭐했던 거예요? 내가 존재할만한 시공간은 내가 알아서 내가 정한다고 모든 인간이게 그게 다 있는 겁니다.

오늘 시편 63편 2절에 보면 단어 하나 나와요. ‘성소’란 단어 나옵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라고 성소 나오지요. 그러니까 성소인데 이 시는 뭡니까? 유다 광야에 있을 때지요. 무슨 사건이겠어요? 왕 되기 전의 문제가 아니고 왕 되고 난 뒤에 누가한테 쫓겨서 광야에 갔던 그때 지은 시라는 것이 나타나지요.

그럼 이 사건은 압살롬의 반란으로 자기가 내전에서 패배해서 광야로 피신할 때 지은 시, 이렇게 되겠지요. 그러면서 그 광야에는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지만 광야에서 뭐가 없다고 강조하느냐 하면, 2절에서 주의 성소는 이 광야에 없습니다, 라고 고백해요. 없으니까 그리워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다윗이 만든 시공간은 뭡니까? 나 혼자 사는 시공간이 아니고 주의 성소에서 주님의 영광과 더불어 내가 왕의 역할을 했던 그 시절을 나는 잊지 못하겠다는 뜻이에요.

우리들의 시공간은 뭐예요? 혼자 사는 겁니다,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까? 이미 혼자 살고 싶어서 환장을 하고 있는데. 다 귀잖아. 교회 왔다, 후딱 집에 가고. 집에선 내가 왕이고 내가 신이니까.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니까 후딱 가는 거죠. 죽어서 천국 가려니 어쩔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의 시공간은 어디에 길들여 있는가? 나 혼자 사는데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럼 나 혼자 사는 시공간에선 눈에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되지 않고 누구 것이 돼요? 내 것이 되겠지요. 결국은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누가 방해하고 있습니까?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내가 방해하고 있으면 하나님은 나를 그냥 방치하겠습니까, 안 그러면 내전이 벌어져야 되겠어요? 내전이 벌어져야 되는 거예요. 내가 갖고 싶은 건 내 것이라 여기는 것에 전부 다 거기서 사고가 일어나요. 문제가 발생되는 겁니다.

문제가 발생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에 대해서 내 시공간을 철폐하고 주님이 만든 시공간으로 강제로 대체되는 것, 이게 복 아닙니까? 예를 들게요. 시편 1편에 뭐라 돼 있느냐 하면, “복 있는 사람은” 이렇게 돼 있지요. ‘복 있는 사람’ 딱 나오면 우리는 저건 나요. 나보고 이야기한 거야, 이렇게 해야 성경을 마음이 생기지요. 저건 나와 상관없어, 하면 성경을 볼 마음이 없잖아요.

‘복 있는 사람은’ 하면 볼 것도 없이 너 빠지고 나야, 이래하고 싶은데 그 환경이 무슨 환경이냐 하면, “날마다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 복 있는 사람의 조건을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복 있는 사람의 시공간은 어딜 봐도 항상 말씀이 활성화돼 있고 말씀과 더불어서 조성된 시공간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시편 1편에 나오는 이야기, 우리가 시편하고 있거든요. 이 동그라미를 시편 1편에 해당되는 시공간이라 합시다. 그러면 복 있는 사람이라 해놓고 나라고 하지 말고 물음표, 미지의 사람이라 합시다. 이 미지의 사람은 뭐를 느끼느냐 하면, 내가 주인공 아니고 말씀이 주인공이다, 라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왜 그러냐 하면 말씀은 나에게서 나온 게 아니죠. 나에게서 나온 게 아니니까 나는 수동적이죠. 나는 피동적이죠. 그런데 말씀이 여기 있으니까 말씀은 내가 안 만들었는데, 내가 만든 법을 자기가 지키지는 않아요, 인간은. 성경에서. 내가 만들지 않은 법인데 내가 순종을 해야 될 책임은 있다, 이런 관계거든요.

창세기의 특징은 뭐냐?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누가 있었다가 창세기 아닙니까. 기쁘지 않습니까? 모든 의문점이 해결 다 되잖아요. 이 세상 학문의 의문점은 내가 있고 어떤 이익을 얻느냐, 이게 골치 아픈데 이건 해결이 안 나요. 결국 학문에서 이 세상은 뭐냐 하면 내가 갖고 싶은데 남이 갖고 있다, 뺏자. 어떻게 뺏느냐? 공부 많이 해서 뺏자. 어떻게 하느냐? 능력으로 뺏자. 열심히 해서 뺏자. 전부 다 이건 뭐냐 하면 내가 갖고 싶은데 남이 가졌으니까 여기서 나와 그 사람과의 투쟁으로 설명하잖아요.

그런데 창세기는 뭡니까? ‘가만히 있어. 내가 다 해줄게.’ 그냥 가만히 있는데 다해줬잖아. 그 다해준 것 중 하나가 에덴동산 아닙니까. 천국도 에덴동산처럼 주어진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럼 에덴동산에 살만한 사람의 조건은 뭡니까? 아무것도 안 하면 되는 거예요. 근데 아무것도 안 하면 되는데 내 육신이 출생한 장소가 말씀이 없는 곳에 출생했거든요.

그러니까 마귀의 사상이 지배하는 각자 신이 되어서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왔던 그 세계에 살다보니까 하나님이 거저 주어도 방해하는 요소가 내 속에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줘도 못 먹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줘도, 왜 주시지?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갑자기 한 26억 주면, ‘이걸 왜 주지? 공짜가? 그러면 감사히 받아야지’ 이래 되잖아요.

그런데 각자에 26억 사기당한 피해를 준다고 하면, 그다음부터 고민이 돼요. 앞으로 어떻게 조심해야 되고 어떻게 회수해야 되고 경찰에 언제 신고해야 되고 갑자기 바빠. 누가 바빠요? 내가 바빠요. 나는 복 있는 사람인데 이건 복이 아니야. 저주받은 것 같아.

성경에서 복 있다는 것은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말씀이 나보다 먼저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이 말씀의 내용을 위해서 내가 초청받았다. 간택 받았다. 이건 택함인데 내가 나를 선택하는 것은, 모든 것을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선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아멘. 예수님이 할 일은 간단해요. 아버지께서 내게 보낸 자를 책임지고 아버지 나라에 데려가는 이게 예수님이 오신 이유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본인이 오는 것은 예수님이 안 받아요. 본인이 알아서 오는 것. 그러니까 아버지한테 묻는 거예요. “아버지, 저 사람을 나한테 오라고 보냈습니까?” 묻는 겁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식은 아까 차이점 이야기했지요. 열두 살 때 예수님의 의식이 점점 더 아버지는 따로 있다는 의식이 발생되지요. 서른 살 때는 요단강에서 의식이 확실해져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아들이요.” 유일하게 하나님이 사랑하는 예수님이, 내 기뻐하는 자다. 동시에 뭐가 왔느냐 하면 아들만 오면 안 되지요. 아들이 아들 값을 하기 위해서 성령이 함께 오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는 성령이 오지 않으면 아들이 될 수 없다고 돼 있어요. 그때 너희는 종이였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이제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로마서 8장에도 나와요.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으니, 그 대목이 있습니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

예수님이 먼저 샘플이 돼야 돼요. 하나님과 천국의 백성에 먼저 모델이 되고 그 모델을 카피를 해요. 성령께서 카피를 해서 아버지의 뜻이 아들과 성령을 통해서 구현되도록 하는 삼인조의 작업, 프로젝트가 이 세상입니다. 그 작업에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굉장히 간단하죠. 이게 간단한 건 맞는데 여기에 주께서 일을 간단하게 하지 않고 인간으로 하여금 복잡하게 만들었어요.

왜냐하면 이미 인간은 마귀로 범죄했기 때문에 간단하게 해버리면 간단한 지식만 확보하고 구원받은 것으로 자부할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이걸 틀어버리는 거예요. 어느 인간도 지식 알아서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것을 차단하는 방법으로 사탄의 활동을 허용해버립니다. 악마의 활동. 악마의 활동을 허락해버리면 악마가 없다고 여기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를 이야기해버리면 간단하지요.

아버지 뜻으로 아들 보내서 자기 백성 위해서, 이게 되는데 만약에 그 말을 듣는 인간 당사자가 이미 악마의 통제 하에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에서 뽑아낸 지식은 누구의 의견이 되지요? 마귀의 의견이 되지요. 악마의 의견이 되는 거예요. 인공지능의 의견이 되는 겁니다. 인공지능에게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라면 줄줄이 다 이야기해요. 성경말씀 동원해서 다 이야기하잖아요.

그래서 천주교에서 실험을 했어요. 고해성사를 하는데 신부 말고 인공지능을 집어넣었어요.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고해성사하게 하는데 고해성사한 사람이 인공지능한테 은혜를 받아서, 그 실험이 중단됐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신부가 필요 없어요. 신부 대신 인공지능이 다하고 신부 모집이 안 돼.

틀어버린 것, 왜곡된 것 이렇게 함으로서 내가 성경이란 지식이 인공지능만큼 많이 알아서 내가 알아서 정리해서 천국 가는 것, 그게 바로 마귀의 모습이죠.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잖아요. ‘입 다물라’고 했다고요, 귀신한테. 이것은 예수님 입장에선 뭐냐? 귀신이 들어있는 인간과 귀신이 뽑아낸 인간과 주님께서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분, 차에서 엔진 뽑아내면 뭐가 돼요? 갈 수 있어요, 못 가요? 가지도 못하는 차체가 흉물처럼 되겠지요. 주님께서는 귀신을 뽑아냄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일은 실제론 누구와 이야기하느냐 하면 인간보고 이야기한 게 아니고 귀신보고 이야기한 거였던 거예요.

그런데 귀신이 인간에 박혀있으니까 하나님이 나보고 네가 알아서 반성하고 회개하면 구원해줄게, 이런 식으로 인간들이 오해할 만반의 준비가 돼 있는 거예요. 교회 나가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겠지요. “오늘은 내가 뭘 할꼬?” 주님께서 “너와 이야기 안 해. 나, 너와 상대 안 해.” “아닙니다. 제가 열심히 뭘 하겠습니다.” “너하고 상대 안 한다니까. 귀신아, 나가라!”

귀신은 알아요. “당신이 오실 자 맞지요. 당신이 메시아 맞지요.” 그래서 귀신이 예수님 활동하기 전에 맨 먼저 누굴 만납니까? 사람 만나지 않아요. 광야에서 누굴 만나요? 성령께서 주선해서 악령을 만나지요. 성령도 영이고 악령도 영이죠. 주님은 인간인데 인간이 주님이 만나러가서 영들밖에 안 만나요.

그때 그 광야서 마귀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감 잡았어. 감 잡았는데 마귀가 할 수 있는 메시아든 하여튼 인간을 자기 손아귀에서 빼도 박도 못하게 붙잡아둘 수 있는 모든 술법, 모든 술책은 예수님한테 전부 다 테스트하는 겁니다. 이게 세 가지 테스트하는 거예요. 여러분 잘 아시지만 후딱 해볼게요.

순서는 ②번, ③번이 바뀔 수 있는데 첫 번째 테스트가 뭐냐 하면, 인간은 육체다. 이거는 어제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인간은 육체다, 끝. 믿을 것은 뭐밖에 없다? 내가 육체가 여기 존재하는 것만 믿는다. 따라서 인간이 죽으면 끝. 왜? 육체가 없어지니까. 육체가 없어지니까 더 이상 나 같은 건 없으니까 그게 가장 정확하게 냉철한 과학적 안목으로 인간은 죽기 전까지만 인간이다.

따라서 내가 인간이라면 죽음 뒤에는 생각하지 말고, 종교 같은 것 생각하지 말고 승부를 보되 내가 여기서 얼마나 성공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았느냐, 그게 인간의 사고방식이 만든,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시간과 공간을 그런 식으로 관찰하는 거예요. 내가 눈으로 목도하고 있는 이 공간과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시간이 있어줘야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이 돼야 될 재료를 다 얻은 거예요. 그게 학교교육 아닙니까.

정신의학에 보면 이런 용어가 나와요. 사회공포증. 바깥에 못 나가요. 심지어 엄마가 노크해도 문 안 열어줘요. 밀폐된 폐쇄된 자기 공간에 점점 더 숨어들어가는 사회공포증이에요. 옛날에도 있었지요. 그런데 요새 부각되는 거예요. 옛날에도 이런 병이 있었는데 왜 유명하지 않았는가? 부모가 팼거든요. ‘이게 어딜 문을 닫고 있어’ 문을 부수고 강제로 끌어내죠.

지금은 자식을 그렇게 안 키우거든요. 자식에게 스스로의 세계를 마련해주는 게 부모가 자식한테 효도한 것으로 섬기는 것으로 만들어놓으니 끝은 어딥니까? 부모도 들어오지 마라, 에요. 돈 벌어준 것, 공부시킨 것 다 필요 없어. 이거는 부모로서 마땅히 할 바고 나는 나다. 사회공포증이에요.

사회공포증에서 문제가 뭐냐 하면 사회에 대해서 뭘 느낀다? 공포를 느끼는데 이 사회는 누가 만든 사회에요? 일방적으로 본인이 만든 사회 속에 갇힌 거죠. 그러면 내가 만든 프레임, 내가 만든 그 세상은 뭐냐? 나를 갇히게 하는 감옥이 되게 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살리려는 대상이 있어요. 육신을 가진 나는 계속 살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마귀가 첫 번째 테스트한 거예요. 사람은 육신이 전부다, 육체가 전부다.

주님이 뭐라 합니까? 그 육신에 필요한 것은 뭐다? 떡이지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존재가 아닌데? 말씀이란 환경을 배제하면 사람이 아닌데? 그걸 줄이면 뭡니까? 사람은 있다, 없다? 주님 보시기에 사람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누가 내 앞에서 사람이래? 누구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에요.

복 있는 사람은 어떤 환경, 시공간이다? 말씀으로 둘러싸인 그 환경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지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묵상하는 거예요. 마치 금붕어가 살려고, ‘물 주세요’ 하는 게 아니고 그냥 물속에서 꿀꺽꿀꺽 물 먹다가 공기 먹다가 그 어항환경에 적응하려고 애를 쓰듯이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먹고 거기에 적응해야 된다는 것, 그게 복 있는 사람인데 복 있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지요.

복 있는 사람은 말씀대로 의인이 되는데 의인될 만한 자격은 아무도 없지요. 왜냐하면 예수님 시험 받을 때 바로 악마가 하는 인간은 육신밖에 없다는 그 테스트를 통과하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 울산강의, 그리고 주일 낮 설교에서도 언급했지만 주일 오후에도 했지만 인간은 혈통중심, 가족중심이에요.

오후설교인지 제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사람들이 모이면 이야기하는 것이 자기 가족이야기라고. 딸이 얘 낳는데 돌봐야 된다. 아아, 혈통, 가족중심. 왜 그럴까요? 지금까지 강의한 데서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사람이라고 인지할 수 있는 환경을 내가 조성하는데 그게 가족뿐이었다. 가족이 있음으로 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스스로 증명해낼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열두 살 때 예수님이 엄마, 아빠 만났는데 엄마, 아빠가 사흘 동안 찾았는데 못 찾았거든요. 그래서 찾고 난 뒤에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자, 예수님의 엄마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뭐로 봤습니까? 가족중심이라는 시공간 속에 하나의 내 아들로 가족의 일원으로 봤지요. 그런데 이미 열두 살부터 자의식이 발생되면서 어떻게 됐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 몰랐습니까?” 새로운 시공간이 열리는 거예요. 집에 있는 아버지와 하늘에 있는 아버지 사이에 노선이 다른 노선으로 변경이 시도되는 겁니다.

그런 예수님이 나중에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는 확실하게 성령이 오셨고요. 그리고 그다음에 누굴 만날 차례다? 악령을 만날 차례지요. 그리고 여러분들이 성령을 받았으면 누굴 만나야 돼요? 트럼프 만나야 돼요. 트럼프 만나서 ‘너 미국에 이민 오면 한 500억 줄게’, ‘사람은 육신이 다야’ 이런 것. 물론 트럼프가 그런 이야긴 안 하겠지만, 그것도 사람보고 이야기하지 별 가치도 없는데 하진 않지….

그런데 악령은 예수님만 막아버리면 계속해서 이 세상은 악마에 속했다는 걸 이미 악마는 알고 있거든요. 그걸 또 누가 알아요? 마귀가 그런 전략이 있다는 것을 누가 압니까? 성령이 알아요. 성령이 알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십 일 금식을 시켰어요. 인간의 육신이 얼마나 생생한가를 말이 아니라 실제로 온 몸으로 배고픔이 얼마나 간절한 끊을 수 없는 욕구인지를 의도적으로 성령께서 예수님을 육식에 대해서 그 한계에 도달하게 만들었어요.

천하의 믿음이라 해도 사람은 밥 못 먹으면 벌써 정신 오락가락한다는 것, 믿음이고 소망이고 사랑이고 간에 입에 들어가는 게 없으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미 인간은 악마에 의해서 정신병자된 겁니다. 육신에서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떤 언어학자가 자기가 그걸 알아요. 치매 아닙니까. 벌써 오십 대에 치매 와서 점점 심해지는 거예요. 고칠 약이 없거든요. 못 고치는 걸 알고 똑똑하니까 그 여교수가 사전에 미리 잊어버릴 단어를 전부 다 냉장고에 보이는 데마다 써놔요.

점점 심해지니까 내가 이 단어, 내 친구, 내 친척, 가족이름 이걸 어디다 써놨는지 잊어버린 거예요. 그리고 이 여자가 얼마나 똑똑한지 내가 만약에 모든 걸 상실했을 때 비참하게 죽긴 싫다. 나는 약을 먹고 자살하도록 혹시 가족들이나 주위사람들이 말리지 말라. 그것도 했어요. 그래서 드디어 자기가 진짜 잠시 정신 돌아왔을 때 내가 자살해야겠다고 약을 먹었는데 우연히 가정부가 와서 실패를 했어요. 실패했으면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합니까? 다음에 또 시도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치매 걸려서 방금 내가 뭘 했는지를 잊어버렸어요.

<스틸 앨리스>(Still Alice, 2015)란 영화에요.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은 스스로 죽는 것조차도 자기에게 권한이 없다. 자살하는 것도 가룟 유다처럼 말씀이 응해야 돼요. 예레미야의 말씀이 응해서 가룟 유다가 자살하거든요. 토기장이의 밭을 샀다는. 그러니까 이거는 말씀을 믿자는 선택사항이 아니고 인간이 말씀을 믿든 안 믿든 예수님을 믿든 안 믿든 인간은 이미 어느 풀장에? 말씀이라는 풀장에 이미 놓여있습니다.

나는 부처를 믿든지 나는 무교를 선택하든 니 마음대로 선택하세요. 백날 선택해도 세상 돌아가는 것은 말씀으로 돌아간다는 이 시공간은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복 있는 겁니다. 말씀의 세계란 인식 자체가 복이에요. 따라서 그 말씀세계 안에서 내가 말씀을 뭘 지켜야 되고 뭘 보태야 되고 이런 게 허용이 안 돼요. 말씀 지킨다고 말씀이 더 살아나는 건 아니고 그냥 말씀이 되어진 것에 끔뻑끔뻑 금붕어처럼 말씀을 먹는 것, 날마다 말씀을 먹는다 해서 먹는 게 아니고 안 먹으면 안 되도록 모든 환경이 새로운 시공간으로 바뀌어져버려요.

시편 63편은 다윗이 왕이잖아요. 왕임에도 불구하고 광야로 쫓겨났잖아요. 시공간이 바뀌었잖아요, 분명히. 시공간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왕의 입장에 있을 때 시공간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 시공간은 광야에 있다할지라도 거기에 대한 시공간은 달라질 게 없다는 그 이야기가 시편 63편입니다.

성도가 한국에 살든 사막에 살든 광야에 살든 성도의 그 위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조기에 죽든지 백 살까지 살다가 죽든지 관계없어요. 부자가 되던 가난하게 되던 성격이 모질던 너그럽던 전혀 무관하게 아무 상관도 없이 성도는 성도일 뿐이다. 그러면 ‘목사님, 그걸 어떻게 확인합니까?’ 이런 질문 하겠지요. 그 확인하는 질문이 바로 쫓겨나는 거예요. 내가 성도다움을 유지하는 환경을 주께서 빼앗아 가죠.

그럼 우리는 어떤 걸 생각하느냐 하면, ‘나는 성도도 아니야. 나는 믿는 사람도 아니야.’ 그렇게 생각되겠지요. 반드시 그걸 겪어야 돼요. 반드시 그런 절차를 밟아야 돼요. 늘 믿음 좋고 늘 싱글벙글하고 늘 활기차고 그런 곳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우리를 들뜨게 만들어요. 심지어 신앙의 이름으로도 들뜨게 만들어요.

신약에서 고난이라는 것이 내가 하는 것은 고생이잖아요. 고난은 어디서 오느냐 하면 주님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서 고난이 오게 돼 있어요. 우리는 뭘 겁내느냐 하면 고생을 겁내요. 이거는 내가 생각한 Ego ideal이라 하는데 자신의 이상형을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모르고 자기 이상형을 세상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하는 겁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 ‘너 뭐하고 싶은데? 네 꿈은 뭔데?’ ‘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이게 전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 시공간이 너무나 일방적인 시공간이라는 사실, 시공간이 뭔가 정답을 주는 게 아니고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때그때 재편되고 재구성되는 너무나 편향적이고 일방적인 편견을 짓는 시공간을 누가 조성해요? 나의 욕심이 나의 욕구가 그걸 조성한다고요.

그럼 여기가 누가 도와주겠습니까? 마귀가 도와주는 거예요. 울고 웃고, 웃고 울다가 작은 것에 삐졌다가. ‘이건 재앙이야, 재앙이야. 나는 절망이야.’ 왜 그런데 하면, 환승할 때 버스 한 번 안 찍었다고. ‘난 칵 죽고 싶어. 세상에 치매 현상인가?’ 천오백 원 날아간 거예요. ‘미쳤어, 미쳤어. 왜 내가 그런 짓을.’ 전부 다 자기한테 환장했어요. 자기 이상형한테 환장했어. 그러면 그 순간 마귀는 뭐냐? 계속 똑같은 거예요. ‘떡이나 먹어. 돈이나 벌어.’ 그런데 예수님은 뭡니까? 사람은 떡이나 돈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그다음의 시험이 뭐냐 하면 시험이 뭐냐 하면 사람과 만난다는 거예요. 사람은 사람 없이 못산다. 아까 사회적 공포증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바라고 내가 딱 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 밀실에 가두는 징벌을 자기한테 내리는 거죠. 내게 딱 맞는 사람, 내가 사귀고 싶은 사람 없을 때는 완전히 자기가 만든 정신적 지하실에 가둬버려요.

어떤 때 그러느냐 하면 바로 선보러 나왔는데 튕겼을 때 ‘나 이제 결혼 안 해. 나 독신주의야. 나 비혼주의. 내가 어때서? 네가 뭐 잘났는데 나를 차?’ 삼십 년 자라온 자존감이 선보는 자리에서 한 방에 딱 삼십오 분 만에 다 박살나버린. 치어리더하고 잘나고 하는데 대기업 입사면접에서 작살나버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면접 보러 오라는 소식도 없어. ‘너희들이 날 안 뽑아? 안 뽑으면 나 너희들 거부해. 나는 나니까.’ 이게 처음에는 다음에 또 이력서 내면 되지, 하는데 그래서 152번 떨어지면 부모는 나이가 서른 다 되도록 무슨 짓이냐, 하고 매일같이 구박을 한다면 안 되죠.

그러면 결국 인간은 사람과 사람 만남에서 나는 뭐 없이는 못산다? 사람이 없이는 못산다. 남이 나를 안 만나준다면 나는 그냥 자살모드로 접어들게, 밀실로 가지요. 그러나 남이 나를 반기고, 너는 우리 회사에 꼭 필요해. 난 당신 같은 사람 만나기 위해서 지금까지 살아왔어, 이런 소리만 들으면 갑자기 뭡니까? 다시 생기가 나고 살 이유가 있지요. 이게 젊은 사람들의 허약성입니다.

바로 마귀가 예수님보고 뛰어내리라 했어요. 뛰어내리면 누가 환호하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유명인사로 받들어주겠지요. 진짜 고대했던 메시아다. 진짜 누가 고대했다? 사람들이 고대하는 메시아, 이것 마귀가 만든 메시아입니다. 큰 교회에 사람들 많이 모이는 이유가 다 있어요. 빈익빈부익부(貧益貧富益富)라는 말이 있잖아요. 많이 사람들 있다는 말은 내가 거기서 섞여도 내가 티 안 날 수 있다는 것과 그리고 많은 데서 놀아야 신앙생활 할 맛이 난다는 사람 등 각종 종류의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오게 되면 가장 큰 이유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된다는 거예요. 조그마한 개척교회 두세 사람 있는 곳에 오게 되면 그 낯짝이 그 낯짝이고 그 얼굴이 그 얼굴이고. “내 너 다 아는데 뭐 좀 새로운 것 없나?” 새로운 사람, 젊은 사람 오게 되면 붙들고 복음 이야기한다고 해서 질려서 그다음 주에 안 나오고. 나를 좀 새롭게 만들어달라는 욕구, 욕망.

이게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사람 만나지 말라. 왜? 아무 관계없으니까. 너는 남과 아무 관계없어요. 예수님 떠날 때 혼자 떠났습니까, 여럿이 데리고 떠났습니까? 혼자 떠났지요. 아무 상관없어요.

성도는 이러한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들인 그 습관, 그 습성에서 광야로 가야 돼요. 나를 찾지 않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나를 정립해야 됩니다. 그동안 하나님과의 정립이 되는데 방해되는 게 뭐냐? 으샤으샤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겠다는 그 욕구가 내가 사는 곳이 주께서 조성한 광야라는 것, 주님께서 시험받았던 이 광야라는 환경을 내가 착각을 해버렸어요. 살만한 세상으로 만든 겁니다.

서울에 있는 자식한테 전화해서, “얘야, 올해 같은 더운 해가 없었다. 그런데 내 걱정하지 마라. 더워도 난 잘 견딘다” 하고 전화 끊는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에어컨 넣어달라는 이야기잖아요. “엄마, 작년에 바디프랜드 넣었잖아요” 하니까 “그거는 거실 차지나 하고 두 번 하다가 허리 아파서 못하겠다. 그것 말고 에어컨. 요새 더운 것 알제” 하고 전화 끊어버린다니까.

이건 뭐냐 하면 바디프랜드, 그거는 처음엔 좋았는데 식상한 거예요. 새로움이 없어. 새로움은 누가 해야 되느냐? 남들이 와서 새로움을 늘 줘야 될 정도로 본인이 일방적인 시공간을 형성한 겁니다, 인간이. 결국 인간의 잡다한 이러한 이야기의 핵심은 뭐냐? 인간은 육체다, 끝. 육체 없어질 때까지 나는 사람처럼 살아보겠다. 악마가 도와줄게.

보세요. 얼마나 무서운 세계입니까? 이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세상인지 누구 눈에만 보여요? 예수님만 보거든요. 예수님만 보는 눈, 마음 그게 뭐냐? 성령이에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자기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의 안목으로 다시 경험하고 해석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오래 살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왜 안 죽이십니까? 왜 계속 살게 하십니까’ 마음으로 그것으로 정리되게 돼 있습니다.

시편 63편 다시 돌아와서요. 3절 누가 읽어볼까요?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아멘. 지금 다윗은 광야에 가면서 내 인생은 종쳤다, 끝났다. 끝났지만 끝내도 괜찮아요. 내 육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광야에서 발견했기 때문에. 왕궁에 있을 때는 왕답다가 광야에선 왕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데 하나님께선 광야로 옮겨놓고 그래도 너는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은혜,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속성에서 말씀 안에 들어있는 다른 시공간에서 제공된 하나님의 비밀이고 하나님의 일하시는 내용이죠.

그러니까 이 육신이 이 땅에 살아 있든 어떤 병에 걸렸든 일찍이 몸이 아프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복은 전혀 지장 없지요. 변화가 없는 거예요. 이걸 이렇게 정리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절에서 4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실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너희’와 ‘예수님’과의 한계를 보여주는데,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너희는 천기는 구별할 수 있다. 천기, 날씨, 기후에 대해서 구분할 수 있다. 너희가 천기는 구별할 수 있으나 그다음에, 그러니까 인간이 천기를 구분하는 이유가 자기 육신이 거기에 소속돼 있기 때문에 육신이 만든 시간과 공간이기 때문에 천기가 자연세계가 전부지요. 그런데 너희가 천기 말고 자연에 가려진 진짜 이 세대를 분간할 줄 모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육신이 파악할 수 천기 말고 또 다른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가 엉망이라는 겁니다. 이 세대는 악하고 음란하다는 사실을 너는 왜 그걸 파악하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고 캐내지 못하느냐. 너는 어디에 속했는가? 네가 파악하는 하늘과 기후, 그 세계에 속한 게 아니고 악하고 음란 세대에 네가 지금 소속돼 있다는 것을 너희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럼 아는 방법은 뭡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또는 예수님께서 행적을 통해서 그들이 정확하게 너는 어디 세계에 소속된 구성원이고 부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망했다는 이야기에요? 나는 못났다는 이야기입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구분해주는 그 환경이 뭐냐? 복된 환경, 우리의 관여 없이 말씀이 자체적으로 활동하는 그 영역에 우리가 속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것, 그게 바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10분 쉽시다.

 

 

 

 

20250908b 부산강의 : [시편]79(63:3)-말씀의 시공간
(강의:이근호 목사)


시공간에 대해서 계속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 때문에 쫓겨났을 때에 해야 될 임무가 있어요. 왕이라는 것이 부귀영화만 누릴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일관되게 쭉 가는 게 왕일까, 아니면 왕이라는 분이 시련과 광야에서 배척받고 적들한테 쫓겨나는 그런 것들도 왕이 왕답게 되는 인생여정 속에 포함이 돼 있는가, 하는 그 문제에요.

그냥 고생이 아니고 고난 받는 왕, 고생은 고생 뒤에 낙이 있지만 고난은 이거는 출입구가 하나님 쪽이 아니면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고난은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고난이란 터널을 통해서 마지막에 옛날 내가 부귀영화로 가는 게 아니고 도착지점은 주님의 영광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예상 못하지요.

다윗은 여기서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그림을 그리면 설명이 더 쉬울 것 같네요. 왕궁 안의 다윗이잖아요. 지금 어디 가 있습니까? 그냥 모래가 있는 광야에 가 있지요. 이 절차, 왕궁에서 광야로 가는 이 절차에서 그동안 율법의 존재 의미는 뭐냐? 말씀의 세계에서는 말씀이 알아서 저절로 다 움직이죠. 그런데 말씀이 지금 나를 어디로 보냈습니까? 왕궁에 있을 나를 광야로 보냈잖아요.

그러면 그렇게 보내게 하는 그 힘, 그 율법, 말씀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레위기 7장과 관련해서 시편 63편 5절을 보면,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골수와 기름진 것은 어디 나오느냐 하면 동물성 제물에서 나오는 거예요. 이거는 제사장이 먹던 음식입니다.

왕이라는 것은 레위지파의 제사장보다 더 높은 것이 왕이에요, 다윗시대에는. 다윗은 제사장보다 더 높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왕의 자리가 무슨 자리냐하면 멜기세덱의 자리에요. 멜기세덱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하면 왕 같은 제사장 자리거든요. 멜기세덱은 왕이고 제사장입니다. 이 말은 제사장의 완성형 또는 모든 제사의 최종상태, 그게 바로 제사기능과 왕기능이 성공적으로 통합이 되는 그런 인물이 바로 멜기세덱이에요.

이 멜기세덱의 노선을 그대로 이어받은 게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이죠. 누가 누구한테 십일조를 줬습니까?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줬지요.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일 거예요(18~20절). 하면서 여기 환경이 어떤 환경이냐 하면 이걸 빼먹으면 안 돼요. 전쟁 환경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복 받은 사람이고, 복 받은 사람은 그냥 일반적인 보통 사람으로 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벌이는 전쟁에다 집어넣었어요. 아브라함은 본의 아니게 정말 전쟁하기 싫어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요. 그런데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주의 이름이, 하나님의 언약이 자체적으로 전쟁을 벌이니까 아브라함은 그 전쟁에 말려들면서 자신의 시공간이 삭제되고 그 현장에 영적 전쟁의 상태로 점차 변해지는 그것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체험케 했습니다. 그 전쟁이 무슨 전쟁이냐? 이게 혈통전쟁이에요.

혈통의 전쟁인데 기존에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의 자아는 인간성은 어디서 나온다 했습니까? 혈육에서 나오지요. 가족에서 나오지요. 혈육이 출발점, 아브라함은 약속이 출발점, 이 전쟁이에요. 혈육의 출발점은 바로 이스마엘, 약속의 출발점은 이삭. 아브라함은 이게 자기 일이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깊이 연구해서 탐구하고 그런 것 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양 키우면서 자기도 가족중심에요.

특히 창세기 24장인가, 이 성경책을 바꾸든지 해야지 좋은 성경책으로, 24장 맞네요. 이제 바꿨으니까 뭔 일 나겠지요? 창세기 24장에서 지금 아브라함이 무리한 도전을 해요. 인간적으로 너무나도 무리한 도전을. 그게 뭐냐 하면 이삭은 컸는데 주위에 여자들이 있잖아요. 그 여자들, 가나안 여자들 아브라함이 거부합니다. 거부하고 자신의 뿌리와 관련된 하란, 자기 고향의 아가씨를 자기 아들의 부인, 며느리로 삼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아브라함의 일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실시하는 며느릿감 구하기에서 자기는 노(no)했어요. 이거는 무리한 겁니다. 첫째, 이삭이 골라야 되는데 이삭의 마음에 들지 말지 모르고, 그리고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친척들 있다하지만 믿을 수도 없고, 거리가 굉장히 긴 거리거든요. 많은 사람들 모르는 입장에서 여자 하나를 데려온다는 것은 진짜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겁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종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 “이거는 아브라함 내 이름을 걸고 너한테 약속한다.” 환도뼈에 손대고 약속을 했어요. “반드시 하나님께서 며느릿감을 주신다. 그걸 믿고 밀어붙여라.” 그때 나오는 단어가 무슨 단어냐 하면, ‘순적히’ 기존 교회에서 아주 좋아하는. 차 이름을 바꿨으면, 순적히. 카렌스 이런 것 말고 순적히. 인생 자체가 순적히, 순적, 순적, 순적. 뻐꾹, 뻐꾹 하는 것처럼 매사가 합력하여 순적히 이뤘으면 좋겠다는.

아브라함이나 아브라함의 종이 무모한 짓을 했어요. 할 때 아브라함의 약속이 아브라함의 종한테 전달이 되어 아브라함의 종이 무리한 짓을 해요. 뭐냐 하면 먼 길 오다보니까 낙타 열 마리와 자기가 목마르잖아요. 자기 마음대로 법을 만들어버려요. ‘낙타한테 물주고 나한테 물주는 여자를 며느릿감으로 삼는다.’ 누군지도 모르고 만나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자기가 목마르고 낙타가 목마른 이유 때문에 여기에 나한테 물주는 아가씨가 오면 무조건 따지지 않고 묻지도 않고 우리 주인님의 며느릿감으로 낙점을 한다. 지 마음대로 법을 만들어버렸어요. 이게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성이에요.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성. 그게 ‘순적히’에 담긴 내용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순적히’란 말을 쓰려면 어떻게 해요? 일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저는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그렇게 결과가 나올 때는 진짜 그 사람은 순적히 된 거예요. 순적히 쓸 수 있는 자격이 되는 사람이에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만약에 여러분의 아들이, “엄마, 나 이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오늘 두 시간 뒤 오후 두시에 집에 찾아올 건데 엄마가 잘해줘” 했을 때 엄마 맘이 어떻겠습니까?

서른 넘은 아들이 며느릿감 데려왔을 때 얼마나 초조하겠어요. 지금까지 봤던 모든 드라마와 <사랑과 전쟁> 다 기억날 게 아니겠습니까? 드라마에 나오는 얼굴 점 하나 찍고 난리 피우는 그것, 그런 드라마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생각하면서 그런 여자한테 걸리면 안 되는데. 이 순진한 아들이 그런 여자 만나서 집구석 난리라는 것 아닌지 얼마나 걱정이 되겠어요.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뭡니까? ‘순적히’가 될 수 없지요. ‘어떤 여자든 나는 잘했군, 잘했어 할 거야.’ 그런 마음이 안 된다니까요? 왜? 아까 첫째 시간에 뭡니까? 나만의 시공간이 있기 때문에 그거 안 되지요. 다시 말해서 뭐 하기 싫으냐? 전쟁하기 싫다는. 난 전쟁에 휘말리기 싫다. 그냥 하나님께 순적히, 순적히 주기만 하면 된다, 말은 그렇게 하는데 막상 아니라면, 내 마음에 안 든다면 그땐 어떻게 하느냐?

지금 아브라함의 종이 아브라함을 대신해서 선을 보고 있고, 그리고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결혼당사자가 이삭이잖아요. 이삭을 대신해서 선보고 있잖아요. 그러면 하청업자가 너무 많아. 당사자가 뭐라고 할지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결국 아브라함이 이 이야기는, 이 전쟁입니다. 없음의 상태에서 벌어지는 전쟁. ‘없다’에요. 누가 없단 말입니까? 내가 있어도 없다. 그럼 없음을 엿볼 수 있는 게 뭡니까?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 오늘 시편에서는 뭐냐? 레위기의 제사법입니다.

지금 다윗이 왕이잖아요. 그럼 왕에 있을 때는 ‘나는 왕이다’ 이미 최종상태에 도달했어요. 토끼와 거북이에서 거북이가 승리했잖아요. 그럼 거북이가 토끼한테 우리 한 판 더 할까, 이런 말 할 필요 없어요. 한 판 더하면 지지요. 왜냐? 잠을 안 잘 거니까.

승리했으면 끝난 문제인데 다윗은 그렇게 알았는데 다윗이 어디로 갔습니까? 이제 우리 집안은 대단한 집안이라고 집안 위주로 갔는데 그 집안이 쪼개졌지요.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잖아요. 그래서 어디로 갔습니까? 자기는 광야로 갔잖아요. 광야로 갔으면 내가 왕과 왕 됨에 있어서 무엇을 어떤 가치를 빼먹을 수가 있다는. 어떤 가치를 빼먹었는가? 제사법의 가치를 빼먹고 왕이라고 우기고 있는 게 아닌가. 실제로 다윗에게 나와요. 역대상 그 부분에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제사는 누가한다? 제사장 니가 해라. 나는 왕이라잖아요.

그런데 다윗 말년에 제사 누가합니까? 다윗이 인구조사하면서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누가 제사장이 돼요? 본인이 값을 주고 타작마당에서 본인이 제사하게 돼요. 다시 말해서 희생제물의 혜택이 말씀 시공간에서 계속 우러나고 있고 살고 있다는 것을 다윗으로 새삼 알게 하는 환경이 고난의 환경입니다. 우리 인생이 고난의 환경이에요. 예수님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우리는 구원받았다. 이것 누가 몰라요? 이건 이단도 알아요.

거기서 무엇을 탈락시키고 누락시키게 됩니까? 나 구원받았다. 다시 한 번 누가 부각이 되지요. 나 구원받아서 천국 가, 하면서 뭐가 빠집니까? 뭘 놓치게 돼요? 주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놓치게 되잖아요. 그러면 놓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나로 하여금 구원받은 자라면 어느 길에 집어넣어요? 주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로 집어넣는 그것, 그 대목, 그 십자가로 해석하지 않는 성경해석은 다 무효입니다.

구원받은 자로 하여금 헤헤거리고 구원받았으니까 내 마음대로 산다, 이게 아니라 구원받은 자는 어느 길로 가야 된다? 십자가의 길로 이끄는 이것을 누락하지 않기 위해서 주님께선 다윗을 왕에서 어디로 보냈습니까? 광야로 보낸 거예요. 광야로 보내서 우리가 무엇으로 넉넉하냐 하면 골수와 기름진 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제사를 드리고 나오는 그걸 먹을 때 기쁨을 느꼈던 것은 제사장들만의 경험이었어요. 그 경험을 다윗이 체험토록 한 겁니다.

제가 이야기를 하나 할게요. 어떤 보건소에 똑똑한 얘가 놀러 와요. 왜 놀러 오느냐? 보건소에 집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신기한 것들이 많았어요. 촌의 보건소니까 일종에 촌의 병원이라 볼 수 있지요. 그 신기한 것에 매일같이 왔는데 어느 날 그 얘가 그 보건소에 놀러 안 와요. 왜 안 왔을까요? 몸이 아파서 안 왔습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아무 일 없을 때는 교회 잘 나와요. 어느 날 교회를 안 나와요. 왜 교회를 안 나오지요? 마음이 아파서. 이혼해서 부끄러워서 못 나오고, 이런 것. 이상하지요. 여러분, 그 이유를 찾아보세요. 교회라는 것이 마음 아파서 나와야 되는데 놀러 오는 거예요. 그러나 정작 마음 아플 때는 영혼 아플 때는 안 나와요. 폼 나는 게 없기 때문에.

그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나 구원할 때, 이 구원의 본질을 내가 얻고자하는 내 구원의 욕망에 입장에서 새롭게 시공간을 만들어내서 그렇게 된 거예요. ‘구원되면 나는 예수님과 함께 산다.’ 아주 신이 났어, 신이 났어. 천군천사와 함께 신났지요. 이거는 평소에 내가 내부적으로 은근히 원했던 거예요. 내 욕구가 원했던 거예요.

‘교회 가는 맛이 그 맛이지. 죽어서 천국 가는 맛이지. 천국 가면 나는 보란 듯이 잘 살 거야.’ 지금 이런 상황에 있다면 그건 예수님을 이용한 거예요. 주님을 이용한 겁니다. 물론 이 사람이 성경을 모를 리가 없지요. 어제 오후설교에 한 것처럼 ‘선택’ 나오니까 ‘그래 나 선택되었어.’ 오후설교에 뭐라 그랬습니까? 선택되었다 하면 받아들이지요. 그 좋은 걸 왜 안 받아들이겠어요. 그러나 증거가 있어야 된다고 했지요.

그 증거가 뭐라 했습니까? 증거가 바로 고린도전서 7장 23절과, 6장 20절, 값을 주고 산 것이 된다 했잖아요. 그러면 정말 구원받고 택함을 받았다면 여러분, 이 조건을 유지할 수 있는가 보세요. ‘다시는 사람의 종이 되지 아니 한다.’ 이 조건 우리 힘으로 유지할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7장 23절,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내가 값을 주고 샀기 때문에 얼마나 고귀한 값입니까? 예수님의 피 값이잖아요. 예수님의 화목제물로 했기 때문에 너는 선택됐기 때문에 이거는 사람의 종이 되지 않는다.

이걸 고상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호명을 받았기에 타인의 호명을 무시할 수 있느냐? 이게 선택받은 사람이에요. 주님이 우리보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했잖아요. 주님이 딱 집어서 나오너라 했으면 그 능력은 누구 고유의 능력입니까? 주님의 고유의 능력이죠.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는 구출한 능력이 계속 우리 안에 살아 있어야 되죠. 살아 있다는 말은, 이 능력보다 더 소중한 능력은 없고 이 능력보다 더 대단한 능력은 없음을 우리는 이 세상에 증인으로 떠벌여야 되죠.

월급 천만 원 줘도 너거 회사 안 가, 이런 것. 왜? 주님이 나를 호명했기 때문에. 그 예는 적절하지 않는 예입니다. 왜 적절하지 않는 예냐 하면 우리가 호명을 받았으면 그다음부터 우리의 직장생활은 광야입니다. “한 달 일하고 월급 백오십 주는데 올래?” 가지요. 왜? 광야기 때문에. 직장에서 만나면 아까 강의한 것처럼 누굴 만납니까?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들을 만나지요. 그것도 갑질한다고, “어이 신참 이리 와봐. 일은 이렇게 하는 거야, 알겠어? 잘하는지 내 지켜보겠어.”

이거는 뭐 사장보다 더 신경 쓰여. 바로 위 고참이 사장보다 신경 더 쓰인다고.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지 할 일을 나한테 미루네. 내가 한 업적을 자기 업적으로 가로채네. 그걸 두 자로 뭐라 합니까? 광야. 주님이 주신 고난의 능력. 주님이 어떤 길을 갔는지 구원받을 땐 신났는데, 주님이 택하여 호명 받을 땐 그렇게 신이 났는데 주께서 어디로 집어넣습니까? 광야로 집어넣어버리니까 그동안 잠잠히 있던 자존감, 자존심 다 드러나서 성질나서 다 때려치운다. 이것 아니면 다른데 취직할 때 없을까, 그만두죠.

세상은 왜 그래요? 왜 그래 갑질해요? 군에서 전라도 만나면 경상도 죽어나고, 경상도 고참 만나면 전라도 죽어나고, 왜 그런데 도대체? 제삼의 길은 왜 없는 거예요? 그것은 각자 자신의 시공간에서 뭔가 미흡한 게 있는 졸병을 통해서 그걸 메우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에 있는 스트레스 있잖아요. 스트레스가 뭐냐? 마저 메웠던 구멍이 스트레스라 합니다. 꾹꾹 눌러서 내 약점을 안 들키려고 했는데 상황이 바뀌어서 그게 잠시 반짝 얼굴이 비쳤어요. 후다닥 빨리 그걸 메워야 된다고요.

교회 와서 보통 천사처럼 했는데 성질나는 게 있어서 그다음에 갑자기 헌금이 오만 원 보태졌어. ‘하나님이여, 나는 내 잘못을 아는 그런 인간입니다’ 해서 표내고 자기 약점을 구멍을 메우는 거예요. 그게 스트레스, 정신병 아닙니까, 모든 인간은.

다시 보겠습니다. ‘나 구원받았다’를 주님의 말씀의 능력은 뭘 시킨다? 해체시키지요. 해체시키면 ‘나 구원받았다’가 뭐 되느냐 하면 이거는 죄인이기에 나오는 고백입니다. 자기가 천국 가는 걸로 자기의 약점을 그런 식으로 보충하고 싶다는 것이 바로 죄인들의 주특기가 되는 거예요. ‘세상에서 날 무시했지? 나 천국 간다.’ 그거는 구원의 기쁨이 아니고 오기라 하죠.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 걸 교회 열심히 해서 장로 될 때 장로 자리가 뭡니까? 남을 정신적으로 이겼다는 승리 도취감을 대체하는 거예요.

이런 요소, 그런데 다윗은 알지요. 바로 내 진솔한 진짜 내 모습, 나만 챙기고 내 약점을 진솔한 그걸 위해서 대신 희생이 되는 부끄러운 면을 노출시키면서 가셨던 그 길을 들어서게 된 거예요. 주님의 그 아픔과 주님의 수치심에 따라가도록 강제로 이끄시는 것이 자체적으로 말씀에서 나오는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그 전쟁에, 그러니까 전쟁이라 하는 것은 나의 전쟁이 아니고 주님과 마귀가 이미 붙었던 그 전쟁터에 우리가 거기에 실제적인 대상자로 들어가는 겁니다. 성경구절 찾아보겠습니다. 에베소서 4장 8절, 이건 다 찾아보세요. 역시 전쟁 이야기인데,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카아, 여러분, 심오하지 않습니까?

마귀한테 사로잡힌 자를 주님이 사로잡고 그들에게 주님이 일방적으로 끄집어낸 자에서 뭘 주신다, 하늘에서?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뭐냐? 우리는 마귀한테 패배자였다. 우리는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마귀의 종이었다. 그러나 마귀보다 더 세신 분이, 마태복음 12장에 나오지요.

도적같이 담을 타고 넘어와서 우리에게 그동안 주인 행세하던 마귀를 꽁꽁 묶어놓고 마귀한테 사로잡힌 자를 주님이 보쌈하듯이 그걸 데려가서 우리로 하여금 그다음에 뭘 주십니까? ‘너 구원받았다’ 하면 뭘 주십니까? 성령을 주시잖아요. 그러면 성령은 누구의 영이죠? 예수님의 영이죠. 예수님의 마음이잖아요. 예수님의 마음이 어디서 만들어졌습니까? 이 땅의 마귀 세상 속에서 만들어졌잖아요. 주님께서 고생하신 고생담이잖아요. 그걸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누가복음의 기도대목도 마찬가지에요. 구하라 구할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죽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자식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줄 수 있으면 고기를 달라하는데 뱀을 줄 수 있느냐? 하물며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뭘 주신다 했어요? 성령을 선물로 준다. 우리가 주는 걸 받질 않아요. 왜? 우리가 달라는 것은 우리의 시공간이 조성한 나의 약점을 감추기 위한 용도로 필요한 것, 거창하게 나를 포장할 수 있는 것, 그런 것들을 달라하거든요.

이거는 타락한 아담의 본질적인 병이에요. 치마 만드는 것,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치마로 나의 수치를 대신 가리는 것, 이거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어요. 변하지 않아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다윗은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왕 자리를 알아서 본인이 버린 게 아니에요. 광야에서 살고 싶어서 고생하고 싶다고 자진해서 광야로 간 게 아닙니다. 지금 이 모든 환경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진 환경이에요. 그 환경 속에서 그동안 내가 몰랐던 경험하지 못한 것, 내가 왕이기 때문에 미처 챙기지 못한 것을 새로운 상황 속에서 주님이 만든 시공간 속에서 그걸 흠뻑 경험케 하는 기회를 허락하신 거예요.

이걸 신약적으로 이야기하면 잃었다가 얻은 자를 주께선 그런 자를 원하지 옆에서 붙어서 아버지 말대로 농사 잘 짓는 큰아들은 필요치 않은 거예요. 아버지가 원하는 것은 잃은 적이 있어야 돼요. 그리고 아버지에 의해서만 찾은 적이 있어야 돼요. 아버지가 보낸 자가 아니면 예수께서 갈 수가 없어요.

아버지께서 예수께 보내는 이유가, 예수님이 모델이니까 잃어버렸다가 얻는 최초의 인물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사흘 만에 도로 찾았잖아요. 잃었다가 찾는 것, 없다가도 생긴 것, 죽은데서 살리는 것, 이 원칙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은 이 원칙으로만 작동합니다. 다른 말씀해석은 다 사기에요.

말씀은 우리를 죽입니다. 지난 낮 설교에 했지요. 말씀의 성취는 죽음이라고. 어디서 했습니까? 울산강의에서 했는가? 말씀의 성취됐다는 말은, 내가 죽은 자로 확인되는 게 성취에요. 왜 죽어야 되느냐? 죽어야지 살 수 있잖아요. 예수님의 원리를 우리한테 적용시키려면 우리를 빼빠로 밀어서 있는 것도 없어야 되고, 살아 있는 것도 죽여야 돼요. 없애서 온전히 예수님의 다이루심만 남아있어야 그게 주님의 사랑입니다.

여기 에베소서 4장 8절에 그 이야기해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잡혀서 꼼짝 못하는 자를 내 사람이라고 끄집어내고, 그 사람들을 그냥 받는 게 아니고 성령을 선물로 줘서 ‘나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구원시켰다는 그리스도의 일하심만 증거하는 것, 이게 바로 예상도 못한 새로운 나의 모습이에요. 내가 예상 못한. 우리가 예상하는 것은 ‘나 잘났다’에요. 근데 그 ‘잘났다’를 주의 능력으로 그걸 비껴갑니다.

오늘 시편 63편에서 또 단어 하나 나오는데 그게 ‘밤’입니다. 여기 보면 6절에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라고 돼 있지요. 이게 사무엘하 16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왕과 그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곤비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이만큼 광야라는 것이 없음의 자리에요.

몸의 기력도 없고 있는 것은 어디 있느냐 하면 들개가 있어요. 들개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여기 나옵니다. 9절,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붙인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 ‘시랑’이란 말은 들개에요. 이게 어디 살아야 들개가 얼마나 무섭다는 걸 알지요? 들개는 기계입니다. 이거는 기계라고 보면 돼요. 그냥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기계. 기계한테 무슨 감정을 호소하고 살려달라고 해도 소용없어요.

악인을 다루는 방법은 무입니다, 무. 악인을 동정하고 감정적으로 다루면 안 돼요. 악인도 나중에 양심이 있어서 ‘봐주세요’ 이러거든요. 악을 이기는 것은 무정한 마음씨, 기계. 천사의 마음, 천사는 감정이 없어요. 그냥 기계에요. 천사가 막 눈물 흘리고 이럽니까? 악을 이기는 것은 무에요, 무. 악을 이기게 되는 이유가, 선과 악이 붙어있는 이유가 선이나 악이나 전부 다 감정이란 점에서 이게 똑같은 거예요.

감정은 주님만 감정 있으면 되지 우리가 감정 있을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의 감정만 있으면 돼요.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에겐 성령이 옴으로서 예수님의 감정을 우리에게 집어넣습니다. 그때부터 예수님이 좋아하는 것 같이 좋아하고, 예수님이 싫어하는 것 같이 싫어하는 것이지 기존에 있는 나 위주의 감정은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뭐가 필요하겠어요? 나 자체를 말씀으로 구원하려면 나를 어떻게 해야 돼요? 없애버려야 되지요. 광야로 가는 길로 가서 나를 없애버려야 되죠. 내가 왕년에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없어져야 돼요. 그래야 잃었다가 다시 얻는 그 과정이 있어야 됩니다. 거기에 적합한 노래가 있어요. 가사 들으면 어떤 노래인지 알거에요. 가사만 읽어볼게요.

그 얼마나 오랜 시간을
짙은 어둠에서 서성거렸나
내 마음을 닫아 둔 채로
헤매이다 흘러간 시간
잊고 싶던 모든 일들은
때론 잊은 듯이 생각됐지만
고개 저어도 떠오르는 건
나를 보던 젖은 그 얼굴(그 여자가 떠나면서 눈물 흘렸던 모양이죠)
아무런 말없이 떠나버려도
때로는 모진 말로
멍들이며 울려도
내 깊은 방황을
변함없이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던 너
너에게로 또다시
돌아오기까지가(그다음에 뭡니까?)
왜 이리 힘들었을까

주님한테 오기가 왜 그렇게 힘들었느냐 이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을 시시하게 봤다가 짙은 어둠 속에 서성거리고 있었던, 찬송가도 이런 찬송가가…. ‘너에게로 또다시 돌아오기까지가 왜 이리 힘들었을까’ 여기서 제발 좀 노래 부르지 말라고 당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제 나는 알았어
내가 죽는 날까지
널 떠날 수 없다는 걸

변진섭의 노래, <너에게로 또다시> 이게 뭐냐 하면 떠나고 난 뒤에 비로소 뭘 아는 거예요? 떠나고 난 뒤에 비로소 떠날 수 없음을 아는 거죠. 근데 내가 주님을 떠났다는 사실을 주님을 안 떠났을 때 비로소 알아요. 재밌죠. 이게 주님의 시공간에선 그래요. 주님의 시공간은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우리의 과거를 다시 한 번 끄집어내어 재해석하는 겁니다.

기존의 우리 시간은 어릴 때부터 나 위주의 시간이었어요. 내가 좋은 부모 만났으면 어떻게 되는가? 저 인간만 안 만났어도 내 인생은 이렇겐 안 되었다. 물어둬, 할 수도 없고. 이렇게 하는데 따지고 보니까 그것이 누구 시공간 안에서 이뤄진 거예요? 말씀의 능력 시공간 안에서 하나의 절차로서 한 거예요.

스스로 제가 어둠에 있다고 했지만 어둠이 빛으로 변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가운데서 내가 진정 나보다 더 소중한 분을 놓쳐버렸다는 거예요. 나를 있게 한 분을 나한테 없게 만든 과거의 모습을 자기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는 게 내가 있는 게 아니거든요. 나는 없어요.

그러나 그분이 있으면 나도 덩달아 같이 있게 하는 그 상황을 주님의 시공간이었습니다. 그 시공간을 성령 받고 난 뒤에 그때 시공간을 다시 한 번 입장에서 볼 때에 내가 어둠 속에 있었다. 그 어둠 속의 시간이 어떤 시간이냐?

그 얼마나 오랜 시간을
짙은 어둠에서 서성거렸나
내 마음을 닫아 둔 채로
헤매이다 흘러간 시간

이런 노래거든요. 역시 숙제 나가거든요, 이 노래. 들어보시는 숙제.

이 뒷부분을 다시 해봅시다. 선과 악 자체가 붙어있는 이유는, 우리가 범죄하고 난 뒤에 마귀한테 속하고 난 뒤에서 선과 악이 떨어질 수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악을 멀리하면 나는 자동적으로 무슨 사람 된다? 선한 사람 되지요. 이게 잘못이에요. 이게 우리가 마귀를 못 벗어나는 이유입니다. 선악 자체를 떼어낼 수 없어요.

선악 자체를 무로 하기 위해서는 바로 레위기의 제사법이 동원되는 거예요. 율법이 동원되는 거예요. 너 대신 죽어야 떠난다는 거예요. 인간이 너는 죽어야 돼. 안 죽고는 너는 선악 자체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거예요.

그럼 죽이는 방법은 뭐냐? 공식을 하나 쓸 테니까요. 죽음+죽음+죽음+…=폭발, 폭발하는 거죠. 이 죽음은 뭐냐 하면 이걸 뭐로 바꾸느냐? 주님께선 이걸 사람으로 바꿉니다. 사람 만나고, 사람 만나고, 사람 만나고…. 이 사람은 산 사람 아니거든요. 주님 입장에선. 왜 우리는 사람 없이는 못 살아요? 혼자서는 외롭고 만나면 괴롭고. 만나면 좋은 친구 아니에요. 그건 엠비씨고.

괴로워서 혼자 있으면 외롭고 다시 사람 만나면 또 괴롭고. 인간 자체가 자기 혼자 시공간을 생각했는데 그 시공간 속에서 계속해서 확장을 해보면 나도 인간 같지 않지만 너도 인간 같지 않다는 것을 이걸 만나서 확인시키는 거예요. 계속 우리는 말씀이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신앙이고 주님이 어떻고 해도 계속 우리가 할 일은 뭐냐? 사람 만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자식한테 전화하고, 친구한테 전화하고, 예배시간에도 휴대폰으로 문자하고, 문자 보내고. 설교하고 있는데 틱톡, 답장한다고…. 그럼 목사는 그 답장한다고 방금 문맥 놓쳤잖아요. 그러면 그다음 기다렸다가 답장 끝났잖아, 그 문맥을 다시 해야 돼요. 왜? 놓쳤으니까. 서비스.

왜 사람을 만나느냐 하면 사람을 만나야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해줄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거 참 모순이죠. 내가 혼자 있을 때 죽음을 느끼거든요. 다 마찬가지에요. 혼자 있을 땐 살 이유가 없어요. 혼자 있는데 왜 삽니까? 심심해서 못 살지요. 그런데 내가 혼자 있을 때 죽음을 느끼는 것처럼 상대방도 똑같아요.

그러면 죽음과 죽음이 만나면 죽음이어야 되는데 산수가 이상하게 만났다 하면 카페에서 벌써 세 시간 지났어요. 카페 주인은 눈치 주고. 커피 한 잔 시키고 세 시간 동안 있으니. 내가 사는 기분을 느껴요. 이상하게 시체를 만났는데 산 기분? 이게 무슨 조화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람을 만나야 내가 산 느낌을 주는 이유가 이 시공간이 동일한 시공간이라 그래요. 나의 시공간 따로 있지만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똑같은 사고방식이 유통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걸 언어라 하지요.

근데 혼자 있으니까 죽을 맛이거든요. 죽을 맛이니까 언어, 말을 누구한테 이야기하지요. 할 때 이게 같이 뭐가 나오느냐? 정신병이 섞여 나온다는. 그래 내 이야기 좀 들어보라니까. 전쟁이 따로 없어요. 서로 자기 이야기 들으라고 전쟁하는 중이에요. 카페 앉아서. 남편 저녁 할 때까지 몇 시간 남잖아요. 빨리 자기 이야기 다 쏟아내야 돼요. 안 그러면 정신병 걸릴 것 같아. 자기 하는 이야기.

왜 아내 이야기하는데 남편이 옆에 있고 싶지 않은 이유가 뭔지 알아요? 이미 아는 이야기를 또 하기 때문에 지겨워. 자기는 새로운 친구 만나 이야기하는데 남편은 다 아는 이야기에요. 기승전결을 다 알고 있으니까 새롭질 않아. 그러면 슬슬 남편은 친구 만나러 갈게. 다른 친구 또 만나요.

세상 자체가 악하고 음란하다는 말은 그냥 죽음의 세계라 할 수 있는데 주께서 악하고 음란한 이유가 뭐냐 하면 죽는 이유가 날마다 생산되는 현장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죽게 하는 일이에요. 언어를 하든지 모든 것이.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은 뭐냐? 제자들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해요.

그 입을 다물게 하는 대목이 요한복음 21장입니다. 주께서 말하지요. 베드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입을 다무는 방법이 말의 주인공이 내 입에서 나오지 말고 주님한테 넘겨주는 방식이에요. ‘주께서 아십니다.’ 이 순간이 뭐냐? 생명을 만나는 순간이에요. 주께서 “네가 요새 사는 게 힘들지?” 하면 “주께서 조성한 시공간이잖아요.” 이렇게 넘어가는 거예요.

이게 사도 바울의 편지에 보면, 내게 준 모든 환경은 주께서 말씀 전하라고 준 적합한 환경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누구한테? 호명한 자에게. 주께서 선택해서 호명한 자에게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호명이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게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는 그 시공간에 내가 말려들었습니다. 이제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주의 소식, 주의 하신 일만 내가 내놓겠습니다. 그게 바로 사도 바울의 편지가 되는 거죠.

‘폭발’이라 했는데 설명해야 되겠지요. 빠뜨리면 안 되겠지요. 폭발이 자연폭발이에요. 불로 태워지는 것, 폭발. 기존에 인간이 아는 자연세계를 불로써 태우는 이유는, 태울만한 이유들이 꽉 차있다고 느껴질 시점에 태워버려요. 이것은 아브라함과 약속할 때 아브라함의 후손이 바로 약속의 땅에 가지 않고 사 대, 사백 년을 대기했다가 애굽에서 탈출해서 약속의 땅에 가잖아요.

그 대기하는 목적이 이유가 뭡니까? 뭐 때문에 대기합니까? 그 약속의 땅에 악이 관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처벌할 때 이스라엘이 심판 대행자, 실무자가 되어 심판할 때 심판할만한 죄가 그만큼 숙성해야 돼요. 꽉 차야 돼요. 꽉 차서 해야 이스라엘의 정당성이 보장되니까 이스라엘과 함께 한 하나님이 보장되니까 기다려야 되는 거예요.

지금 이 자연세계, 온난화, 해와 구름, 별 지금 대기상태입니다. 내가 죽음+죽음, 공연히 쓴 게 아니에요. 이게 요한계시록 8장 13절인지 누가 찾아보세요.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아멘.

여러분, 철새 본 적 있지요. 철새도래지 자리에서 떠나서 그 철새가 어디론가 가지요. 우리는 여기서 살고 있는데 빌라나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철새는 내가 살던 집에서 떠나버리죠. 독수리가 떠나면서 뭐라 하느냐? 화, 화, 화. 죽음, 죽음, 죽음. 저주, 저주,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 이야기를 떠나는 존재를 통해서 알려준다는 겁니다. ‘시체, 시체, 시체가 있을 것이다.’ 이것과 똑같은 것이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는 죽음의 세계입니다. 어제 낮 설교에 했지요. 아담 안에 있으면 생명이고, 아담 밖에 나가면 무조건 저주지요. 왜냐하면 생명나무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 그 생명이 하나님께서 특수한 나라를 만들었어요. 이스라엘을 만들고 거기다가 언약을 집어넣었어요.

언약을 받은 당사자가 다윗이었어요. 다윗은 비로소 언약 받고 난 뒤에, 그리고 자기가 왕 자리에서 쫓겨나서 광야로 가면서 그동안 미처 몰랐던 새로운 계시를 부여받은 게 뭐냐 하면 악인들은 이 땅과 더불어서 멸망한다. 여기 오늘 본문 마지막에 이런 대목 나옵니다. 9절에,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어느 곳에 들어갑니까? “땅 깊은 곳에”

땅 깊은 곳에 들어가는 건 여러분 잘 아는 민수기 16장에 보면 나오지요. 땅이 갈라지요. 땅이 갈라지는 곳에 뭐냐? 살 가치가 없는 것들, 폐기된 것, 시효가 끝난 것, 주께서 다룰 수 있는 대상자로서 마감이 된 자는 쓰레기장에 다 치워졌습니다. 그게 지옥이죠. 지옥의 특징은 뭐냐? 주께서 영광을 위해서 더 이상 쓸 가치가 없는 것들의 집합소. 주님이 쓰시기에 주님을 증거하는데 쓸모짝 없다고 이미 규정이 된 것들의 폐기장소, 폐차장 그게 지옥입니다.

그래야 그 지옥이 있어야 주님의 공로에 합세한 하나님께서 따로 은혜를 주신 복된 자의 세계가 따로 있음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균형 맞추기에요. 천국이 있는 이유는 지옥이 있기 때문에, 지옥이 있는 이유는 천국이 있기 때문에 필히 지옥이 있는 겁니다. 이런 안목을 가지고 죽음, 죽음들을 만나서 세 시간 동안 수다 떠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늘 누구를 만나고 또 만날 수밖에 없는 악하고 음란한 환경을 허락하신 것을 이제는 감사하게 하옵소서. 내가 누군지를 주께서 호명하고 택하신 그 위력이 어떤 현장에서도 우리에게 주신 신분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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