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차단막

아빠와 함께 2025. 11. 26. 08:58

대전-신명기(36강) 신명기16:2(차단막) 20251124a(강의: 이근호 목사)

오늘은 신명기 16장부터 해보겠습니다. 신명기 16장에 유월절이 나옵니다. 아빕월, 1월달이죠. 1월달이 되거든 유월절 예식을 행하라.(16:1-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유월절 예식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 이것부터 뭐 만만치 않지요. 상당히 어렵습니다.

사건 보따리에서 시간이 나온다, 시간이 개시된다, 시간이 시작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게 뭐가 어려운가? 인간들의 시간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자신의 자아 또는 자기에서부터 시간이 나옵니다. 사실은 시간이 나오는 게 아니라, 시간 의식이 나오죠.

시간 감각이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인간으로부터 나오게 되면 자동적으로 인간은 시간의 시작이 되고, 시작이 인간에게 있으면 시간의 끝도 어디로 돌아가느냐? 자기에게 돌아오죠. 이게 흔히 말하는 고향, 또는 고향의식이라고 합니다.

사건에서 시간이 시작되게 되면, 이 사건을 일으킨 근거가 있고요.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 또는 율법에 장착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시간은 뭐냐? 말씀이 사건에서 퍼져 나오면서 사건이 이루어지는 것을 컨베이어 벨트, 공장에서 물건을 운반할 때, 밑에 받쳐줘서 가만히 있어도 물건이 노동자 앞에 딱 오잖아요. 차례차례 순서대로 오잖아요.

그러면 노동자는 기계처럼 빨리 부속 집어넣고 옆 사람한테 넘겨주고 하는 그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처럼 율법이 가면서 시간은 거기에 받쳐 주는 거예요. 율법을 시간이 받쳐 주는 거예요. 받쳐 주게 되면 이게 시간의 내용이 돼요. 시간의 내용은 뭐다? 율법이 되고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방금 이야기한 데서 간단하게, 시간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느냐? 시작은 사건에서부터 또는 말씀 사건, 사건에서 와서 돌아가기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도로 사건으로 돌아가죠.

인간의 시간은 인간에게서 나와서 도로 자기에게 돌아가죠. 이것을 뭐라고 하냐 하면, 추억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머릿속의 추억. 어릴 때 고모집에서 고모가 주던 마들렌을 차에 적셔 먹던 순간을 커서 다시 기억하는 것, 그 책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라는 사람이 1913년에서 1927년 사이에 발표한 총 7권, 3000쪽이 넘는 책입니다.

그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인데, 이 말은 뭐냐?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시간을 잃어버렸는데 ‘그 시간을 찾아가게 되면, 과거로 돌아간다.’ 그런 내용처럼 들리지요? 그런데 그 책이 주장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겁니다.

<현재가 과거를 재정립한다.>재조립한다, 이렇게 보면 돼요. 현재의 자신을 위해서 재정립한다는 말은, 인간의 고향은 누구란 말이에요? 내가 고향이에요. 나로부터 와서 나로 말미암아 나에게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동안 뭐 성당 다니고, 교회 다니고, 절에 갔든, 어떤 인생을 살면서 굴곡진 인생을 살며 온갖 경험을 해도, 마지막 남는 것은 누구겠어요? 나예요. 달랑 나만 남아요.

교회 가서 김장해 주고, 몸 아프고 온갖 것 다, 갓인지 잣인지 그거 주워서 백날 해도 결국 남는 것은 내 기억 속으로 돌아오게 되면 인간은 안정감을 느껴요. 편안함을 느껴요. 나의 존재, 내가 있다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거예요, 내 존재.

‘여기 나 있습니다.’라는 것이 인간이 말하는 모든 인생의 의미의 순수 내용이 결국 다 털어내고, 먼지 털듯이 장식품 다 털어내면 남는 것은 ‘나 여기 있어요. 나 여기 있습니다.’ 하는 거예요. 예수 떨어내고, 삼위일체 떨어내고, 하나님 떨어내고 다 떨어내면 나머지 몸통이 등장하죠. '나 여기 있어요.‘

어제 낮 설교에서 그걸 매니큐어라고 이야기했죠, 매니큐어. 입술연지라고 제가 표현했는데, 오 목사님은 그걸 볼연지라고 바꿔 놨어요. 입술은 연지를 바르는 게 아니고 립스틱 바르는 거죠. 어쨌든 간에 뭐, 세수 몇 번 하면 다 지워지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해석할 때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이걸로 해석해요. ‘나에게 불쾌하냐, 유쾌하냐?’ 주어진 이 상황이 나한테 ‘불쾌하냐, 유쾌하냐?’ 요게 인간에게 진리입니다, 요게 진리예요.

뭐 철학을 공부하고, 종교를 공부하고, 복음을 백날 공부해도 인간은 뭐로 산다? ‘나한테 유쾌하냐, 불쾌하냐?’ 그것으로 인간은 산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기분 따라 산다.’ 또 다르게 말하면 ‘컨디션~’ 컨디션에 따라 산다.

'여기 공기가 다르네' 하는 광고 여러분들 본 적 있어요? 못 보신 분들을 위해서 제가 찍어서 한번 보여 주려고 했는데, 그 광고가 자주 안 나오네요. '공기가 다르네', 기분 좋다는 말이죠. 모든 인간이 발산하는 단어의 의미는 뭐냐 하면은 "지금 내가 불쾌해. 나 유쾌해" 끝났습니다. 이게 끝이에요.

나중에 연세 더 많아서 노인정에 간다 할 때, 갈 분도 아니지만, 왜 안 가? 수준 안 맞으니까 절대 안 가지만, 만약에 간다면, 그 인생을 80까지 사신 분, 80, 90까지 사신 분들의 나오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나 지금 불편해. 나 지금 기분 좋아". 그 두 마디만 필요하고 나머지는 아무 필요 없어요.

이게 어른 모셔보면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다 아시죠. '나 지금 불편해', '나 기분 좋아.‘ 기분 좋을 때 뭐라 해요? "난 너 없이 못 산다" 이렇게 나오고, 기분 좀 나쁘면 "다 나가! 다 내 거야! 다 나가라!" 뭐 이렇게 되죠. 이 불쾌와 유쾌가 뭐냐 하면은 ‘내 몸이 내 고향이다.’는 것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신의 진리, 신의 계시, 하나님의 뜻, 그것은 바로, 말은 그렇게 신이라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그런 말을 하고 그런 믿음을 가지면 내가 유쾌해질 것이라는 것을 기대해서 신을 언급하고, 예수를 언급하고, 하나님을 언급하는 거예요.

자,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가만두겠어요, 안 두겠어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죽음 사건이에요.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죠. 어린 양, 폭신폭신한 어린 양을 품고 있다고 천사가 그냥 넘어가는 게 아니라고요. 내 손으로, 우리 집에서 키우는 어린 양, 저 산에 있는 양이 아니고, 내 집에서, 내 식구처럼 큰 내 양, 내 가족 같은 양을 잡아야 돼요. 내 손으로 잡는 거예요.

잡아서 그 다음에 뭡니까? 그 문에, 천사와 내가 만나는 지점, 문 열고 들어오는 그 지점에다가 그 피를 발라버리죠. 이삭을 누가 잡았습니까? 누가 죽였습니까? 아버지가 죽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가족은 아주 험악해요. 아버지가 성질난다고 자식을 죽여 버려요. 자식을 죽여 버려요. 자식을 왜 죽입니까? 안 죽으면 내 나라에 못 들어온다는 겁니다. 내 나라에 못 들어온다.

아까 식사하면서 했던 이야기, 다시 한 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천국에 내 공간 마련 어떻게 확보할까요?" 이 문제. ‘천국에 내 공간 어떻게 마련하지?’ 여기서 나온 종교가 엄마 종교, 유월절, 하나님의 교회, 그냥 뭐 쉽게 엄마 종교, 신은 어머니다, 여자다. 엄마 종교의 대표적인 것이 뭐냐 하면, 신천지, 그리고 못지않은 것이 여호와의 증인이에요.

이들의 교세가 확장된 이유는, 인간의 고향은 본인이기 때문에, 내가 죽을 자리는 누가 확보해야 돼요? 살아 있을 때 내가 알아서 확보해야 돼요. 내가 확보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 죽을 자리를 확보 못 하고, 내가 확보 못 한다면 나는 영원한 신이잖아요. 나는 다치면 안 돼요, 영원히.

그러면 내가 살아 있을 동안에 하나님하고 좋은 관계를 이루어서, 하늘나라에 내 안식처를 살아생전에 누가 확보한다? 내가 확보를 해야 되는 것이 필생의 과업이 된 거예요. 필생의 과업. 뭐 천리마를 하든 뭘 하든, 돈 문제도 시간문제도 아니고, 어쨌든 간에 내 자리 없으면 나는 인생 살아도 소용없다는 것을 전도를 통해서 그들이 알려줘요.

여기 또 빠진 게 있어요. 박옥수의 구원파가 포함돼요, 구원파. 다들 집 가까이에 이런 것들이 다 있어요. 그런데 이들 엄마 종교, 신천지, 여호와의 증인, 구원파, 또 안식교, 이들이 어디에서 나온 파들입니까? 어디에서 파생된 거예요? 기성교회에서 나왔잖아요. 이미 기성교회에서 언질을 줬다는 뜻이거든요.

기성교회가 교회를 하기 위해서 인간의 정신을 공략할 때에, 그들에게 결국은 긍정적인 희망과 기대를, 최종적인 기대를 주지 않으면 그들은 교회에 안 나옵니다. "당신 죽어서 지옥 가도 좋아요?". 이런 언사를 날려야 되고, 지옥 안 가려면 ‘천국에 당신 자리가 있어야 됩니다.’라는 말을 해야 되고, 그렇게 이야기 하면, 그 다음에 그쪽에서 뭐라고 합니까?

“어떻게 하면 그 자리를 확보할 수 있겠습니까?” 하게 되면, 이미 계약은 성립된 거예요. 이건 어느 정도 가계약이 성립된 겁니다. 그 사람은 말려든 거예요. 이게 어디에서 나왔다고요? 기성교회에서 나왔죠. 기성교회가 이미 그걸 했다 이 말이죠. 3대째, 4대째 그런 걸 들었다 이 말이죠.

기성교회에서 그런 자리를 확보하고 박아놓는 방법이 뭐냐 하면 성찬식입니다. 세례식, 성만찬, ‘구원받은, 세례 받은 자들만 성찬식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그런 것을 언질을, 이미 낌새를 줬잖아요.

근데 성경은 뭐라 하느냐? 내 자리가 박탈되었음을 통고해줘요. 우리 인간의 자리는 천국에 없습니다. 더구나 내 이름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 사실을 미리 앞당겨서 통보를 해 주는 것은 바로 오순절 날 뭐가 하늘에서 왔습니까? 성령이 왔죠. 성령이 온다는 말은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짊어진 어린 양이었잖아요.

아까 처음에 강의 기억나죠? 사건부터 뭐가 나오기 시작한다? 시간이 나오고, 말씀도 나오죠. 그리고 시간과 말씀이 나온다면, 그 모든 내용은 어디로 돌아가야 된다?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거예요. 이거는 무엇과 대비돼요?

나에서부터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내 꿍꿍이 챙기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미 모든 인간들의 기조예요, 기반입니다. 종교가 됐든 뭐든 간에 항상 그 안에는 내가 누락되지 않아요. 내가 있어 줘야 종교가 나한테 의미가 있지, 나를 탈락시키는 종교는 내 쪽에서 거부하고, 내 쪽에서 싫어요.

“하나님의 뜻이 뭡니까?” “아, 짜증나요. 귀찮아요.” “나 구원 받습니까?” “예.” 그러면 이제 슬슬 관심을 보이는 겁니다. 참, 인간들은 서로 다 다르다 하는데 이 점에서는 다른 사람이 없이 다 똑같아요, 똑같아. 모든 인간이 이 점에서는 똑같아요.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거예요. 듣고 싶은 것만.

지금 성경 자체에서 이야기하는 사건은 뭐냐 하면 유월절 사건인데, 이 사건이 뭐냐? 죽음 사건이에요. 죽을래, 살래 하는 겁니다. "저 살고 싶어요.". 땡! 탈락이에요. "죽어 마땅합니다." 오케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낮 설교에서 했죠. 창조주를 기쁘게 하는 게 인간의 존재의 이유가 아니고, 심판주를 기쁘게 하는 거예요, 심판주를. “심판받아 마땅합니다.” 이 이야기를 베드로가 했죠. "주여, 저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베드로를 떠났어요, 안 떠났어요? 안 떠났어요. 시작은 그렇게 해야 돼요, 시작은.

‘나는 죄인입니다. 안 오셔도, 구원 안 하셔도 됩니다.’가 시작점이에요. 물론 베드로가 그런 고백을 한 것은, 예수님이 한평생 이 생애 다 마치고 십자가에서 하신 그 아버지와의 대화 속에 그게 들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뭐냐 하면은 겟세마네의 기도 "저를 버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제가 아버지께 저주 받겠나이다"가 이게 모토, 이게 가장 근원적, 근본적인 거예요. 근본적인 거.

이 고백은 예수님만 해요. 다른 사람은 못 해요. 예수님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그 고백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마귀가 벌여왔던 모든 수작, 모든 정책, 인간을 통제해서 ‘꼼짝 마라.’ 했던 그 모든 것을 바로 그 고백이 유일하게 통과가 돼요. 그 통과된 분의 영이 무슨 영일까요? 성령이죠.

성령이 예수님의 영이니까요. 성령이 인간에게 오는 것은 무슨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까? 십자가에 예수님의 통과가 가능했던, 다시 죽었다가 죽음의 막을 통과했던 그 부활의 영생의 세계에 갔던 그 고백이, 이제는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그 영이 임하게 되면, 그 영이 임한 사람은 이미 통과한, 쉽게 말해서 합격한 마음으로 죽은 그들에게 도달됩니다. 죽은 그들에게 도달돼요.

이건 다 안다고 치고요. 잘 기억해 놓으세요. 저도 무슨 얘기했는지 기억 다 못하니까요. 집단지성의 힘을 좀 빌립시다. 주일날 했던 것의 핵심을 뽑으라면 저는 이렇게 뽑고 싶어요. <복음 인식이란, 저주와 심판 속에서만 나온다.>복음에 대한 감각은 저주와 심판에서만, 에서만, only 거기에서만 나온다.

저주와 심판 없이는 복음이 안 나옵니다. 저주와 심판 없는 복음은 이건 전부 다 매니큐어예요. 전부 다 가짜입니다. 매니큐어는 이걸 피부에 바르면 피부 세포가 날마다 증식하잖아요. 증식하게 되면 앞에 그 전에 있던 세포에 붙어 있던 색깔은 퇴색되고 탈색되고 옅어지고 날아가 버리죠.

속까지 안 들어가고 겉에 붙어 있는 거예요. 자아를 장식하는, 자아를 꾸미고, 연출하는 메이크업처럼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를 떼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종교라는 것들, 이런 시시한 것들, 근사해 보이는 것들을 갖다 붙여 버리면, 이 자아는 꿈쩍도 안 해요.

근데 붙어 있는 이러한 메이크업 화장품류는 전부 다 나중에 뭐 약간의 감정 기복이 있으면 다 날아가죠. 아까 했던 것, 감정 기복의 핵심은 뭐라 했습니까? 유쾌하냐의 여부. 도대체 인간치고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것은, ‘사람은 유쾌하냐, 불쾌하냐에 따라서 기분이 업되냐, 다운되냐에 따라서 인생은 평생 살아간다.’ 끝. 거기에 대해서 반대 의사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어요.

이게 뭐냐?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다른 말로 하면 이거는 철학의 종합, 모든 철학의 종합은 유쾌와 불쾌에서 나왔습니다. 나머지 따지는 논리는 다 겉절이에요. 소용없습니다. 가장 기본은 이겁니다. 근데 철학이 뭘 뚫지 못했습니까? “왜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유쾌하게 가려고 하는가, 그 의도가 뭐냐?” 거기에 대해서 철학은 아무런 답변을 못 내놓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게 마귀의 작품이거든요. 어두움의 작품이죠. 어두움은 빛이 오는 걸 차단시키고, 어두움은 어두움끼리 거기서 적응하며 살기를 이 연사는 간곡히 원합니다, 하고 마귀가 날마다 TV 뉴스를 통해서, 유튜브, 여러 가지 매스컴을 통해서 날마다 외치는 게 뭐냐 하면은 ‘우리 인간들 지혜안에서 우리끼리 삽시다.’라는 거예요.

"믿지 말고 스스로 자립하세요." "누굴 믿지 말고 스스로 자립하세요.“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여러분,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귀중히 여기고, 소중히 간직하시면 그게 인생 성공한 겁니다.’라는 조언을 계속 쏟아 붓고 있어요.

왜 쏟아 붓고 있죠? 제가 여러 번 이야기 했는데, 마귀가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 어떤 경우라도 내가 죽으면 안 돼요. 이걸 좀 더 발전시켜서 노골적으로 봅시다. 어떤 경우라도 내가 심판받으면 안 돼요.

창세기 2장에 “정녕 죽으리라.” 했잖아요. 남은 죽어도 괜찮은데, 그 ‘정녕 죽으리라.’가 나한테까지 오면 그게 하나님이라도 나는 거부하겠다. 그래서 그 심판과 죽음이 나한테 오지 않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해서 만든 대표적인, 역사가 제일 오래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나한테 이 저주와 심판이 오지 않도록 사전에 어떤 연출, 조치를 하는 종교가 바로 천주교입니다.

천주교의 그 성당의 구조나 그 모든 제도와 방법들을 보세요. 무엇을 방비하는 목적입니까? 액운을 떼는 거예요. 벌써 들어갈 때부터 마리아상 심어놨죠. 심어놓고 (성호 긋는 모습) 파바박 꽂아 버리잖아요. 이건 절에서 부처한테 비는 것의 연장선에 있어요.

왜 그렇게 마리아한테 고개 숙이고, 성호 긋는 거 왜 합니까? 뭐 마리아의 신심을 숭배해서 뭐 여러 가지 변명들이 있지만, 마리아는 핑계고, 누가 다치면 싫어요? 내가. 내가 다치면 내가 불쾌해. 그러면 복음 아는 사람은 대번에 훅 들어와요. "네가 다치면 왜 불쾌한데?". 유구무언(有口無言).

거기서는 그들이 아는 지식과 상식, 모든 정치적인 것, 교육받은 것, 철학 공부한 것, 인생 경험한 것 다 털어놔도 답변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죠. 그때 그들이 하는 짓은 바로 무조건~ 무조건이야~ 무조건이에요. 그것은 모르겠다는 뜻이에요, 모르겠다.

다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의 자리는 어떻게 확보되는가, 확보하는가? 사건 안에서 기다리고 있죠. 무슨 사건? 유월절 사건. 오늘 본문에 아빕월에 있는 유월절 예식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유월절 예식은 구체적으로 안 봐도 뭐를 작살내는 겁니까? 내 힘으로 안 되는 내 자아를 제거하는, 주께서 박살내는 그러한 제도죠.

한번 써 보면, <나의 자리는 영원히 박탈되었다.> 더구나 어디서냐? 천국에서. 천국에 내 자리는 없습니다. 천국에 가면 내 자리 있을 것 아니냐? 천국에 가도 성도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걸 어제 낮 설교에서 뭐라 했냐 하면, ‘인간은 영원히 둘째 자리’, 첫째 자리 따로 있고, 둘째 자리 따로 있는 거 아니에요.

둘째 자리는 무엇과 연계되어 있냐 하면, 첫째 자리와 연속입니다. 첫째 자리가 맏아들이거든요. 로마서 8장 29절, 30절 여러분 잘 아시죠. (롬8:29~30-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한 그 이유가 누구의 형상을 입기 위해서? 맏아들의 형상이죠. 우리의 형상은 어떻게 됩니까? 작살났지요. 우리의 형상은 아예 고려 대상이 안 됩니다. 여기서 문장 하나 또 나갑니다. <주님의 일은 철저하게 나를 배제한다.> 그걸 사자성어로 줄이면 기쁜 소식이에요, 기쁜 소식.

어제 오후 설교 제목이 뭡니까? ‘무효의 위력’ 무효 시키는 위력이에요. "너는 네 과거의 추억으로 버티지만, 나는 네가 버티는 그 추억과 기억을 아주 작살내고, 없애 줄게". 그게 야고보서 4장 14절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야고보서 4장 14절에 의하면 우리 이름을 사실은 바꿔야 돼요.

김씨, 이씨, 최씨, 박씨 이렇게 있더라도 제가 작명가는 아니지만 이름을 제가 붙여드리겠습니다. '김촉촉', '최촉촉', '박촉촉'. 뭐냐 하면은 우리는 물안개. 나타났는데 없어요. 마치 뭐와 같이요? 안개. 가는 길에 정훈희의 ‘안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아주 뭐 안개를 모를까봐 주께서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네가 있다가도 없어지는 안개니라.’ 누가 그렇게 만드신다고요? 말씀 자체가 그렇게 만드신다고요.

말씀은 어디서 나옵니까? 사건에서. 무슨 사건? 죽음 사건에서. 너는 이미 네 구원자와 더불어서 이미 너는 함께 죽었다. 함께 죽었다. 대신 죽었다는 말은, 대신 죽을 상대자와 더불어 함께 동반해서 죽었다는 뜻이에요. 대신 죽었다는 말이.

아, 이거는 너무 쇼킹하고 충격적인데, 이걸 기쁜 소식으로 받는다는 것은, 악마가 쳐놓은 이 죽음의 권세의 막을 뚫고, 막을 뚫고 나가면 그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 부활의 세계예요. 부활, 들어는 봤습니까? 부활의 세계는요, 우리에게 부활의 세계가 있다 하면 거짓말이에요. 죽은 자에게만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이 살아도 이거는 죽음을 요청하는 세계, 우리를 죽게 자빠뜨리고, 완전히 억눌러 버리는 그 메커니즘, 그 과정만 우리에게 남은 목숨 동안 그것만 남아 있는 세계라고 이미 벌써 성령을 통해서 일찌감치 그걸 받아들인 사람에게, 부활의 기쁨은 그들의 것이죠. 그들의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7절에 보면,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이때 이 70인들이 뭐를 느끼느냐 하면, 자아를 느끼는 거죠. "주님, 우리가 이렇게 대단한 자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하니까, 그때 주님께서 동조를 했습니까? 칭찬했습니까? 격려했습니까? 아니죠.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은 맞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한다고 해서 너희가 구원받는 건 아니에요.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그 책은 주님의 책이에요. 주님에게 예속되어 있는 책이에요. 우리 이름이 만약에 전화번호부에 올라간다면, 그 전화번호부는 내 이름의 책이 아니고, 내 이름을 일방적으로 뽑아서 자신의 내용으로 채우신 그분에게 소속된, 소속된 이름이에요. 내 이름이 아니고 우리 대신 돌아가신 그분에게 이미 소속이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 전에는 누구 소속입니까? 내 소속이죠. 나의 유쾌와 불쾌, 내 소속이죠. 그러니까 소속이 주님 소속으로 넘어가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주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주님께로 가는 그 과정에, 거기에 대한 주님에 대한 어떤 보고 또는 반응, 그런 걸로 우리 인생은 채워지는 겁니다.

요한복음 15장 잠시 한 번 보겠습니다. 같이 한 번 보자는 것은 잊지 말아야 될 것을, 다른 것도 잊지 말아야 되지만 이것은 특별히, 흔히 궁금해 하기 때문에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여기 나와요. 요한복음15장 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 다음에 보세요.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기도죠. ‘그리하면’ 뭐 한다? ‘이루리라.’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조건이 있어요. 네가 원하는 기도는 내가 일절 안 받는다. 아까 문장, 주의 일에 철저하게 우리를 배제시키는 거예요.

이 배제시킨 게, 이게, 이게, 이게 인생에서 기쁜 소식이 되고, 세상에 마음 편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뭐 착한 일, 나쁜 일 관계없이 주님께서 이거는 배제하는 거예요. “제가 이런 나쁜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제가 이런 착한 일을 했습니다.” “뭐, 내 일에 보탬이 된다고 착각하나?”

전부 다 이거는 뭐냐? 일방적으로 주님 혼자 하는 일이에요. 이 구원의 일이요. 혼자 하는 일이라는 그 내용을,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통해서 주님과 서신 교환하든지, 메일 교환하든지, 전화 통화하면 그게 뭐라고요? 그게 바로 기도예요, 기도. 그게 기도입니다.

"주님,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내가 속해 있는 위치를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 어느 소속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내 존재에 내가 속하지 않고, 주님 존재의 일부로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포도나무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고, 우리는 무슨 나무냐? 뽕나무냐? 아니면, 감나무냐, 사과나무냐? 아니죠. 우리는 나무가 아니무니다. 우리는 나무가 아니에요. 단독 나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냥 어느 어느 나무에 속한 가지입니다.

내게 속하지 않으면 너희에게 뭐가 맺지 않는다?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그럼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사정없이 잘라내 버리죠.(요15:2-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그래서 여기에 문장을 하나 만들어 보겠습니다. <합격자는 잘린 자와 대비해서만 밝혀진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두 사람이 등장해요. 하나는 바리새인, 하나는 세리.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임시 재판을 열었죠. 잘린 자가 누구죠? 바리새인이 잘렸죠.

그러면 그냥 바리새인이 잘렸다고만 하지 말고, 우리가 바리새인에 빙의해보는 거예요. 우리가 바리새인이라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어떤 분은 “저는 바리새인이 아닌데요.” 이러는데, 저는 거기에 동의 못합니다. 평소 살아가는 게 다 바리새인이에요.

바리새인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내가 때려죽여도 포기 못 하는 마지막에 남아있는 게 있는 사람이 바리새인인데 그게 뭐냐, 자기 의예요. 아까 인간은 어디서 나왔다 했어요? 자기 의에서 나왔다 했잖아요. 마지막 자기 의는 때려 죽어도 포기 못 해요.

지금 세리가 합격을 했는데요. 네가 의인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셔서 합격했잖아요. 그걸 수시 합격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얼마나 기분 좋아요? 굳이 죽어서 천국 안가도 돼요. 이미 심판주가 와서 합격을 통보했으니 끝난 거예요. 그 세리가 주님 앞에 뭐라고 이야기 하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나한테 죄인다운 조치를 내린다 할지라도 그게 저한테 합당’하다는 고백이에요.

이게 무엇과 닮았냐 하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가 저를 버리는 것이 창세전에 합당한 조치’인 것을 예수님이 거기서 선언하고 고백을 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은 자를 경유하는 코스를 주님께서는 피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겟세마네 기도예요.

아버지께 버림받는, 저주받는, 갈라디아서 3장 13절의 말씀처럼 나무에 올라가서 저주 받는 그 저주를 주님이 저주 받을 순간 피했다? 이런 거 없어요. 오롯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저주를 받아서 그 다음부터는 뭐냐? 예수님을 구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조치는 정당해요. 왜? 저주하는 척을 한 게 아니니까. “너, 잠깐만 참아라. 우리 짜고 치는 고스톱 아이가. 저주 받은 척 하면 내가 살려줄게.” 이게 아니고, 진짜 저주를 받으심으로써 어떤 효과를 줬느냐 하면은, 악한 마귀는 일체 천국에 오지 못하는 것으로 확정 났습니다. 그리고 마귀뿐만 아니고 마귀에 속한 모든 자들도 지옥 가는 걸로 확정 났어요.

그 다음부터의 몫은 뭐냐?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소매부터 걷어요. “자, 내 백성 한번 건져볼까?”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의논했어요. "이제는 너의 이름으로 저 중에서 네가 필요한 사람을 네가 골라서, 하늘나라는 이제 너의 나라니까, 네가 주가 되었으니까, 너의 나라니까, 네가 필요한 사람을 네가 선택해서 네가 골라서 데려가라. 그 권리를 너한테 허락해 주마"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심판권 행사, 그 다음에 무슨 권? 구원권이 있기 때문에 심판주에 의해서 심판을 받은 자에 한해서만 뭐가 주어졌습니까? 구원할 거냐 말 거냐의 권한이 예수님한테 옵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누구 권한이에요? 예수님의 일방적 권한이죠. 이걸 요한계시록에서는 ‘값없이 구원’ 이라 했어요.

값없이 구원입니다.(계22:17-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그런데 ‘값없이 구원’이 값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값이 있어요. 온 우주보다 더 비싼 값이 있어요.

사도행전 8장에 이 값에 대해서 눈치 챈 사람이 있어요. 불신자인데도 불구하고 이걸 눈치를 챈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 한 번 보겠습니다. 8장18,19절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18)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19)”

돈을 줬죠. 돈은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거 맞죠? 귀중한 것을 제시하면서 더 귀중한 것을 얻겠다는 것이 장사하는 사람의 특징 아닙니까? 손해 보는 장사 안하죠. 돈이 중요하지만,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눈치 챈 거예요. 누가요? 시몬이요. 그래서 돈 줄 테니까 저 권능을 자기한테 달라고 합니다.

이 권능이 무슨 권능이냐? 이 권능을 한 자로 하겠습니다. “막” 영어로는 brane(membrane의 약어), 막이라는 것은 세포막 같은 막, 이 지옥 같은 죽음의 권세가 작동하는 곳과 부활의 세계를 철저하게 가로막는 막, 이 막을 뚫는 것보다 더 소중한 은혜는 없습니다. 더한 능력은 없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그 능력 외에는 이 막을 뚫을 수가 없습니다. 근데 이걸 누가 눈치 챘어요? 시몬이 눈치 채가지고, “가만 있어봐, 가만 있어봐, 나한테 제일 중요한 게 뭐지?” 돈이잖아요. 돈을 드릴테니까 그 능력을 자기한테 달라고 하니까 베드로가 뭐라 하냐 하면, ‘이 권능은 인간이 주고 자시고 할 것도 없고, 이 권능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도 구매가 불가능’ 하다해요.

어떻게 유리창을 뚫고 나가죠? 어떻게 두꺼운 얼음판을 뚫고 저쪽으로 나간 안목을 가지고, 부활의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볼 수 있는가? 이건 제자들도 저들 본인의 수고와 노력하고는 전혀 상관없고, 자기가 뭘 해서 얻는 게 아닙니다. 본인들은 그냥 박촉촉이고, 최촉촉이고, 김촉촉이고, 그냥 안개에 불과한 거예요. 안개인데, 죽은 안개인데,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인데, 안개에 뭐가 덮쳤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이 덮치니까, 그때부터는 소속이 뭘로 바뀝니까? 하늘나라 소속으로 바뀌었잖아요. 우리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됐잖아요. 기록된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베드로나 제자들이 자기 자랑 했습니까? ‘내가 뭐 했다.’고 할 수가 없는 거죠. 너무 귀해서 내가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어 버린 거예요. 얻을 수 없는 것을.

자기 죽음에서 벗어난 거예요, 자기 죽음에서.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생존 의지에서, 생존의 욕구에서 벗어난 거예요. 달리 이야기하면, 자기가 불쾌하냐, 유쾌하냐는 이제 고려 대상이 안 돼요. 문제되지 않아요. "공기가 다르네~". 그 광고 찾아봐야하는데..“공간이 다르네~” 네, 공간이 달라요.

그동안 내가 알았던 그 공간이 이제는 서서히 그 실체가 바리새인 공간, 천하보다 자기 의를 포기 못 한 바리새인 공간을 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이스라엘 보고 이야기하잖아요. 이스라엘 보고 이야기하면서 앞부분 신명기 4장, 5장에서 언급했는데, 이 경험을 누가 했느냐 하면, 내려다보는 경험을 모세가 했어요.

모세가 내려다보기 위해서는 2,000m가 넘는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갔다가 내려왔죠. 내려오면서 산 밑에 있는 사람들, 자기가 떠나온 자기 백성들을 보았죠. 어떻게 봅니까? 내려다보지요. 내려다보면서 두 이질적인 공간 체험을 모세가 하게 됩니다. 소속이 다르니까 얼굴에 수건을 쓰지 않으면, 음성은 들어도 도저히 볼 수는 없어요. 단지 40일, 한 달하고 10일, 겨우 논산훈련소 훈련 기간밖에 안되는데, 거기서 받은 그 영광이, 단지 40일 뿐인 그 영광을 저쪽에서는 감당 못하죠.

<시간은 주님의 고향으로 흡수되었다.> 시간이 나왔던 그 공간 속으로 흡수되었다. 또는 모세가 있었던 그 공간은 시간이 처음 개시됐던 곳이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모세고, 그 당시 백성들이라면, 모세를 쳐다보는데 영광 때문에 수건으로 가릴 정도면, 모세의 말도 자기들은 감당 못하죠.

그러면, 중간에 감당 못하는데 일단은 모세는 산에서 합류를 했잖아요. 합류하면서도 감당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어떤 아이디어가 필요합니까? 이거 이야기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어떤 아이디어야 됩니까? 그게 신명기 16장에 나오는 거예요. 죽음을, 죽음 사건을 반복시키는데, 그 이름이 바로 유월절, 유월절 제도예요. 유월절 제도.

‘잘났다, 못났다, 인생 이렇게 힘듭니다. 뭐, 우리 가정 문제 상담을 어떻게 받을지, 우리 애가 말 안 듣습니다. 나이 몇 살도 안됐는데 구구단도 다 외우고요, 어쩌면 좋습니까, 이거 감당이 안 됩니다.’ 그 모든 것, 어떻게 해결할 거예요?

바로, 죽으면 산다는 거예요. 그냥 죽으면 사는 게 아니고, 어린 양의 죽음, 시간이 나왔던, 시간의 개시잖아요. 그러면 시간의 끝도 유월절 사건으로 가겠죠. 시간이 나왔던 그 시간의 순환 시스템 속에 우리 살아 있는 자들이 말려들면, 그게 바로 새로운 공간의 소속자가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원했던 바는 그겁니다.

이스라엘이 계속 가는 곳에서 매일같이 상번제 드리고, 유월절 날 따로 또 6월 14일부터 드리고, 일주일 동안 무교절 드리고, 그렇게 하면서 그 무교병, 그 딱딱한 거 있잖아요. 폭신한 빵 말고 먹기 힘든 빵, 그 빵과 일체화하면서, ‘우리가 한평생 살아봤자 맛이 없는 게 당연한 떡 같은 존재, 이 존재가 바로 나입니다.’라는 것을 반복하는 즐거움, 이게 유월절의 즐거움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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