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복음이냐 교회냐(4강) 요20:27(사건의 지점)20251027b(강의: 이근호 목사)
『복음이냐 교회냐』 49페이지 위에서 넷째 줄부터 하겠습니다. […네가 복의 근원이 되겠다. 아브라함의 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할 때 ‘하나’. 자, 셋 중 하나에요. ①복의 근원이 되는 아브라함의 자손은 없다, 제로(0). ②하나밖에 없다, 1. ③다수. 몇 번입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나밖에 없다 할 때, 0이 되겠어요? 1이 되겠어요? 다수가 되겠습니까?
아, 참 어렵죠. 정답은 제로, 0. 없어요. 아브라함의 자손은 없습니다. 없는데 복의 근원은 있잖아요. 그게 1이에요. 근원이 하나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복 이야기가 나왔고 그것이 하나가 되는 거예요. 1이 1이기 때문에 1이 되는데, 인간들은 다수기 때문에 이 다수 중에서 하나가 아니라 모든 다수를 제로(0)로 만드는 그 하나, 그 하나가 아브라함의 복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그 근원이 알파요 오메가요, 그 근원이 마지막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복의 자손이 되는 거예요.
따라서 이런 이야기는 뭐를 거부하느냐? 관찰자로서의 우리의 무능성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내가 복의 근원을 알아서 누가 복의 근원인지, 내가 그걸 믿을 거야.’ 이 자세가 무슨 자세입니까? 측정하고 관찰하고 ‘내가 잘 살펴서 누굴 믿으면 되겠어?’라는 생각 자체를 거부하게 만들죠. 이것이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은 나만 있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도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그럼 이건 다수가 되는 거예요. 다수가 돼요. 제로가 되어야 되거든요. 제로가 되어야 되는데 다수니까, 이 다수는 탈락이죠. 탈락이고 없어야 되고. 없으면서, 다수를 제로로 만드는 데에 개입된 그 1, 그 1이 정답이 되겠습니다. 1이 되는 거예요.
복잡한 절차를 이렇게 설명해놨어요, 49페이지 중간에. 뭐 간단합니다. 그건 이제 어렵지 않아요. 아브라함의 혈육에서 나온 자식은 정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처럼 보이지만 이건 하나님이 안 받아주는 인간입니다. 그걸 ‘혈육에서 나왔다’ 해요. 그래서 신약에 오면 “육으로 난 것은” 무엇일까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는 말은 ‘육으로 난 것은 절대로 영이 될 수 없습니다.’라는 이야기에요. ‘육에서 난 것은 영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그 육은 나중에 한 줌의 재가 되어야 될 육입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제가 질문하면, 내 육 이건 쓸모없기 때문에 내 육을 내가 버릴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버리지 못합니다. 내 육을 버리겠다는 것도 뭐에요? 육이에요. 이것도 육신적인 생각입니다. ‘이래가지고는 천국 못가. 그러니까 뭔가 조치를 해야 돼. 내가 나를 포기하겠어.’ 이것도 육이에요.
어제 오후 설교 때 제가 한 부분을 잠시 인용해보겠습니다. ‘타인에게 우리가 복수할 수 없는 이유는, 복수를 할 수 있는 근거를 주님만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타인을 우리가 복수할 수 없는 이유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남을 욕할 수 없는 이유는? 또는, 우리가 남을 저주할 수 없는 이유는? 그리고, 우리가 남에게 복 이야기 할 수 없는 이유는?
복과 저주의 근원은 우리 말고 다른 분이 갖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소관이지, 우리 소관이 아닌 거예요. 사기 당했다고 ‘저주 받아라’ 이렇게 할 수 없어요. 아까 사사기 17장에 뭡니까? 자기 돈 잃어버렸다고 ‘저주 받아라’ 할 수 있는 그런 권한 자체가 우리한테 성립 안 됩니다. 예수님한테만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았어요. 따라서 우리 인간들 내부에서 남을 욕하거나 비난하거나 남을 평가하거나 측정할 수 있는 어떤 자격도 없는 이유가, 예수님을 우리 모든 인간이 전부 다 합세해서 밀어버렸기 때문이에요. 없애버렸잖아요. 그러니 우리 가운데 남에게 복수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복수심만 없어도 우리는 정말 행복해요. 정말 행복합니다. 사람이 사는 게 힘든 것은 ‘내 인생 조진 것은 다 네 탓이다.’하면서 자꾸 남 탓하기 때문이에요. 그게 실효성도 없고요, 실제로 저주가 임하지도 않아요. 괜히 속만 썩고 있어요. 마치 내가 남을 정죄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자체가 자기가 뭔가 된 양 여기고 있는 거예요. 너나 나나 다 잘린 입장에서. 복의 노선, 라인에 우리는 애초부터 육이기 때문에 거기 들어가 있지도 않아요. 배제된 상태에서 자기들끼리 잘했다, 못했다 이런 거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죠. 갈라디아서 3장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새로운 출생을 이야기해요. 새로운 출생이 되려면 우리가 아는 어머니 말고 다른 어머니가 있어야 되죠. 우리에게 죄를 넘겨준 어머니 말고 죄가 없는 어머니에 의해서 우리가 새롭게 출생되어야 되죠.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새롭게 잉태해야 된다.’ 그럼 잉태하는 방법은? 주님이 배 불룩하게 해가지고 하나 낳고 또 불룩하게 돼서 낳고 이러는 게 아니고, 반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임신하게 만들어요. 우리가 주님을 임신하게 만듭니다. 죄인 안에 주님이 잉태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잉태하는 게 더 쉬워 보여요. 이 죄 많은 우리가 주님을 잉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을 거 같아요. 일단 우리가 잉태하게 되면 우리가 죄인된 것처럼 우리 안에 잉태된 것도 죄이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오히려 죄를 더 짓게 만드는 결과를 낳잖아요.
그 방법,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는 자체가 오히려 추가적인 죄를 더 짓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이 사실을 하나님은 충실하게 이용합니다. 구원받아놓고 나 잘했다고 될 수가 없게 만들어요. 구원된 것도 잘한 짓이 아니에요. 구원된 것도.
이 복잡한 작업을 위해서 갈라디아서 3장이 있습니다. 3장을 봅시다. 어렵다 어렵다 해도 사도 바울 성경만큼 어려운 게 있을까요. 3장 보기 전에 다른 것 먼저 보고 3장 들어갑시다. 사도 바울의 글 하나하나가 정말 누구 말대로 정신 나간 소리하는 거예요. 정말 도저히 인간의 지혜로서는 접근 자체가 안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빌립보서 3장 10-11절,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지금 죽으려고 환장하는데 그냥 자살하는 게 아니고 지금 뭐를 시도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었던 그 십자가에 참여하려고 애를 쓴다는 거예요.
그게 가능합니까? 이게 왜 불가능하냐 하면요,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보면 십자가를 어떻게 규정했느냐? 무엇이 십자가냐 하면 나를 미워하는 게 십자가에요. 나를 미워하는 것. ‘나를 미워하는 것’ 이 표현이 어렵잖아요. 그래서 쉽게 하려고 하면 이렇습니다. 기도로 하게 되면 ‘하나님, 결코 나의 의가 생성되지 않고 나의 의가 족족 파괴되는 상황만 주시옵소서.’ 이 말이에요.
“나의 의가 생성되지도 않을뿐더러 생성된 의라면 족족 부서지고 무너지는 상황만, only 그 상황만을 제 인생에 허락해주옵소서. 어떤 경우라도 나의 의가 나올 수 없는 상황만 덮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너 왜 그래? 왜 그런 기도하는데?” “제가 미우니까요.” “그럼 내가 죽여줄까?” 아니, 죽이지 말고 내가 미워지는 내가 되게 해 달라는 거예요. 죽이는 것은 가룟 유다가 한 짓이고요. 자기가 미워서 자기가 자기를 죽이는 자살 말고 ‘내가 미워지는 나로, 현재 나를 너무나 미운 나로 바꿔주옵소서.’ 이거에요. 바꿔주옵소서.
이게 정말 인간으로서 가능합니까? 이게 가능하지 않은데 성경에 나타나 있어요. 누가복음 7장. 갈라디아서는 너무 어려워서 좀 이따 봅시다. 갈라디아서 한 구절 한 구절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누가복음 7장 38절요. 초청하기는 바리새인이 초청했어요. 죄 많은 여인이 초청한 게 아니고 바리새인이 초청해서 있는데 죄인인 한 여자가 불쑥 등장해서 예수님한테 달려들어 향유를 발에 부었죠.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그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했어요. 그렇죠? 여기서 문제 나갑니다. 이 여자가 이렇게 하면 내가 구원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생각했겠어요?
‘믿지 않으니 행한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믿지 않기 때문에 행하는 행동들이에요. 모든 행동은, 믿지 않기 때문에. ‘가만있어봐. 성질이 나서 뭔가 해야 돼.’ 믿지 않기 때문에 행동하는 거예요. 예수를 안 믿기 때문에 나라도 행동에 나서는 겁니다.
이걸 적용해보면 이 여인은 자기가 너무 미워서 행동에 나섰죠. 나섰는데 여인은 ‘역시 난 지금 믿음으로 행하는 거야.’ 그런 생각이 없고 그냥 터져 나온 거예요. 터져 나왔는데 해석은 누가 하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 행동에 대한 관찰자가 아니에요. 평가자도 아닙니다. 평가자는 따로 있어요.
관찰하시는 주님이 따로 관찰하시되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저 여자의 행동은 사랑이다.”라는 거예요. 사랑을 많이 받은 행동이라고 추가적으로, 여자가 미리 예측도 못했는데 추가적으로 주님의 해석이 그 여자에게 덧붙여져서 여자는 예수님의 행함에 합류되는 매개 존재가 돼요. 주님이 주님 일을 하는데 곁들여서 같이 움직이는 주님의 말씀의 전달자로 현장에서 이루어진 겁니다.
그럼 이걸 보고 또 어떤 수녀나 예수 잘 믿는다는 어떤 사람이 눈물을 흘려가면서 일부러 백화점에 가서 향수 사가지고 주님 발 앞에 엎어지는 이런 행동 하는 거, 그건 자기를 사랑하는 모습이죠. 지금 여인은 사랑이고 뭐고 그딴 것은 자기한테 있을 수 없어요. 중요한 것은 내가 밉다는 거예요. 내가 밉다는 것.
주님께서 그 순서를 바꿔요. 내가 미워서 사랑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미워진다.’라고 순서를 바꾸는데, 그 순서에 대해서 여자 본인이 그것을 사전에 받아들인 적이 없죠. 자기는 미울 수밖에 없는데 주께서 일방적인 해석으로 “너는 나를 많이 사랑하는구나.” 그렇게 해석을 붙여버린 겁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울면서 자기가 미워지는 것. 이런 행동은 주님이 의도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는 걸로 이렇게 정리가 돼요. 그렇다면 그런 입장에서 아까 빌립보서 다시 봅시다.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이 뭘 아느냐 하면,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삽니다. 다시 말해서, 행동하지 않아요.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행동은 자기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로 귀속이 돼요. 자기가 믿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의 일부가 현재 자기의 삶으로서 펼쳐지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해서 구원받는다.’가 아니라 ‘주께서 나 같은 인간도 이렇게 해서 이런 과정을 거쳐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자기를 매개자로 사용해서 지금 계시로 증거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를 매개자로 해서. 우리 성도도 그렇게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걸 확인할 뿐이죠.
그런데 빌립보서 3장 8절 같은 데에 보면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빌립보서 3장 8절에. 전에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했다고 한 일이 뭐로 해석되어야 옳으냐 하면, 그리스도를 해롭게 하는 일인 줄 모르고 나는 하나님 일을 하는 줄 알고 했다는 거예요.
사도가 되기 전에 이 사람이 나쁜 짓 했습니까? 나쁜 짓 골라가며 했습니까? 도적질하고 이랬습니까? 아니죠. 순결과 순수를 추구하면서 ‘인간으로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의로운 의가 뭐냐?’ 그걸 했는데 그게 예수 그리스도를 욕보이는 짓거리들의 시리즈였다는 거예요. 연속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8절에 이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 모든 것을 뭐로 여겼느냐 하면 “배설물로 여김은”.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바로 버려져야 될 쓰레기로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쓰레기라는 사실을 새롭게 주님의 안목으로 측정 당하게 되기 위함이다.’ 이렇게 돼요.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럼 남은 것은 뭡니까? 이 쓰레기 같은 나를 사용하실 주님의 그다음 절차가 뭐냐? 그다음 절차가 아까 빌립보서 3장 10-11절, 내가 다 이루려함도 아니요, 주께서 나로 하여금 주께서 나를 십자가에 죽게 만들어서 어찌하든지 부활에 이르게 하려 한다는 겁니다.
어제 오후 설교 때 한 것을 잠깐 언급하면서 여러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광야에서 누가 총을 맞고 쓰러졌다. 사흘 뒤에 가보니 시체가 없어졌다.’ 이 이야기 뒤에 시놉시스(synopsis, 이야기 줄거리), 여러분들이 작가라면 그다음 무슨 내용으로 이어질지 한번 채워보세요. ‘사흘 뒤에 시체가 없어졌다.’ 그 뒤에 줄거리.
여러 가지가 있어요. 외계인이 찾아왔다든지 아니면 사흘 뒤니까 없는 사이에 누가 시체를 치웠다. 또 어떤 경우 있어요?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인간의 어떤 아이디어를 통해서 독자들이나 관객들, 소설이나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납득이 되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바보같이 여기다가 ‘그 시체는 사실은 부활해야 될 시체다.’ 이러면 그건 드라마가 안돼요. 그건 연결하는 데 있어서 반칙이라.
‘우리가 안다, 안다, 안다,…’로 계속 가야지 ‘우리가 안다, 안다, 안다,…, 우리가 예상 못 했다.’가 되어버리면 이거는 단절이에요. 이야기가 끊어지는 거예요. 끊어지면 그 드라마는 우리가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황당무개한 거예요. 이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그 드라마 속에 우리는 몰입하여서 ‘저게 내 인생이야.’라고 지금 일치시키고 싶은 마음준비를 하고 있는데….
‘했다, 했다,… 그런데 나중에 죽은 사람의 친척이 우연히 지나가다가 ‘어? 총 맞았네!’ 죽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을 뻔했는데 어디서 약초를 구해다가 그 약초로 몸이 건강해지고 난 뒤에 어떤 도사를 만나서 권법을 배워가지고 그다음부터는 ‘기다려. 딱 기다려. 싹쓰리 나 죽인 인간을 복수한다.’’ 이래줘야 우리의 관찰하는 마음가짐과 끊어짐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부활은 뭡니까? 완전히 쫑난 거죠. 완전히 끝난 거예요, 끝난 것. ‘하나님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게 바로 인간의 육이다.’ 이것을 결정짓는 것이 부활입니다. 갑자기 이야기가 부활되어버렸으니까 따라오려다가… 심지어 제자들도 못 따라갔어요. “내 목숨 바치겠습니다.” 거기까지 엔간히 했는데 그다음부터는 막달라 마리아도 못 따라갔어요. “시체 잘 있겠지. 썩으면 안 되니까 향수나 바르러 가자.” 향유 들고 갔을 뿐이지, 없었어요. 아무도 없었어요.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제로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단 한명도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구원받겠다는 이것은 복음이 아니고 바알종교죠. 아세라, 바알종교. 서로 보호를 할 수 있는 신. 내가 지켜줄 수 있는 신. 그래서 보호했다는 그 공적, 공과, 불교에서는 업보라 하죠, 그 업보가 신의 장부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런 좋은 관계로 유지되는 신.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우상밖에 없습니다. 우상에 대한 주님의 공격입니다.
자, 갈라디아서 들어가기 전에 빌립보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너는 너를 뚫고 지나가라.’ 이건 설명하기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이 비슷한 경우가 인간 세상에 있기는 있어요. 스웨터를 벗을 때 보통 목 부분에서 위로 뽑아내잖아요. 그런데 성질 급한 어린애들은 어떻게 합니까? 스웨터를 그대로 빼는 게 아니고 자기가 빠져나오기 급해서 뒤집어서 벗을 때 그 뒤집혀진 옷. 그게 약간의 유사성을 갖고 있죠.
내가 나를 뚫고 지나가면, 뚫고 지나간 나는 그 출처가 어디냐? 뚫으려고 하는 내가 출처가 되죠.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이게! ‘내가 나를 뚫고 지나간다.’ 이게 말이 안 되거든요. 십자가는 뭐라고 했습니까? 나를 미워하는 거죠. 자기를 미워하고 십자가 지라 했잖아요. 그렇게 이야기했죠? 마태복음 성경에 나오잖아요.
나를 미워해서 뚫고 지나가는 그 자체를 주님은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건 온전히 미워하는 게 아니고 꼼수 쓰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아휴, 답답해 죽겠네. 정답이 뭡니까?” 이쯤 되면 짜증이 나야 돼요. 이것도 안 되는 이야기라면, 그럼 뭐냐?
정답 말씀 드릴게요, 여기서 미리.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니까. ‘제발 나를 죽여라.’ 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죽여라 이 말이죠. 왜 그러느냐? 내가 너희에게 찾아왔잖아. 너 대신 내가 왔기 때문에 나를 죽이고 뚫고 지나가라 이 말이죠. 나를 뚫고 지나가게 되면 ‘예수님 빠이빠이’가 아니라 네 손에 죽었던 예수님이 이제부터 너의 새로운 주권자 주도자가 되어서 너를, 나 죽고 난 뒤에 내가 얻은 생명에 너로 하여금 참여되도록 하겠다 이 말입니다.
그겁니다. “날 좀 죽여줘! 잘난 체하지 말고. 죽여줘!” 왜? 어떤 인간도 자기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미워하지 않는 이유는 딱 한 가지에요.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이 자기 의로 생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까 미움이라는 이야기했죠? 내 의가 행여나 나타난다면 그걸 깨부수는 새로운 상황이 나를 덮쳐주옵소서. 우리 머리는 그렇게 돌아가요. 실제로요. 손톱 하나만 문제 있어도 ‘이럴 수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 손톱이 이렇게 갈라집니까.’
제가 지난 토요일에 목욕탕에 갔는데요. 목욕탕을 아침에 안 가야 되는데 괜히 또 아침에 갔어요. 머리 완전히 깎은 중들이 떼로 들어오는 거예요. 아침 먹기 전에 신나게 왔어요. 방금 염불하고 와서 기분이 업 됐어요. 은혜 받아서 업 되가지고는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그것도 탕 안에 들어가서 “안녕하십니까! 잘 계셨습니까?” 이제 영업을 하는 거예요. 꼬셔야 되니까 영업을 해야 돼요.
그래서 제가 얘기했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라 해줘야 돼요. 50대도 있고 60대도 있는데 나이들이 있으니까. “할아버지, 여기 사랑방 아닙니다. 공공장소에서 조용히 해주세요.” 또 한 오지랖을 내가 했다고요. 그런데 내가 늘 오는 게 아니고 두 달에 한 번도 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나 없을 때 자기들끼리 얼마나 떠들었을까요. 실제로 그 이야기를 그냥 하는 게 아니고 탕 안에서 온갖 이야기를 다 하는 거예요, 떠들면서. 물론 옛날에는 더 했어요. 탕 안에서 노래 불렀으니까요. “어~ 좋다.”하면서 노래까지 불렀으니까. 옛날에는 그걸 용납했거든요, 우리 어릴 때는. 지금은 그러면 안 되거든요.
그때 뭘 느꼈느냐 하면, 중들은 왜 자꾸 아침에 목욕을 오느냐. 그리고 그들은 왜 환한 얼굴을 해서 오느냐. 그게 바로 ‘희열’, 행복입니다. 행복한 이유가 부처하고 자기 관계에서 뭐를 획득했습니까, 오늘 새벽 염불을 통해서? 뭘 획득했죠? 자기 업보를 획득했잖아요. 업보가 뭡니까, 성경적으로 하게 되면? 자기 의죠, 자기 의. 자기 의에요.
업 : 미래에 선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고 하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
인간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뭐를 한다? 논리가? 행하죠. 그 행함으로 뭐가 생긴다? 자기 의. 자기 의가 생기니까 그다음부터는 자기 가치가 높아졌죠. 가치가 높아지니까 행복을 느끼는 거예요. 킬 빌이 아니고, 킬 지저스.
명령을 하나 안 하나 간에 모든 인간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쪽으로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신자든 신자 아니든 성도든 성도 아니든 간에 다 마찬가지에요. 이걸 눈치 챈 사람은 성도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성도는 구원받는 거예요.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 주께서 나와 함께 죽으셨고 주께서 부활하실 때 죽은 나와 함께 하셨다는, 대신 죽으셨다는 그것 때문에 나도 같이 부활된다는 사실을 알면서 자연적으로 인간은 자기 의라는 것이 나한테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나타나는 겁니다.
육은, 없어요. 제로에요. 어떤 누구도 복의 근원은 없는데 제로를 제로 되게 하신 분이 등장함으로써 그분이 1이 되고 그 1이 성령을 통해서 다수를 만들어버려요. 그러니까 그 많은 숫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아까 빌립보서에서는 얼추 정리가 됐죠? 사도 바울은 자기 행함이 아니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나를 반드시 이렇게 해준다. 그 자체가 주께서 계획하신 계시이고 그 계시가 나를 통해서 발현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갈라디아서 한번 봅시다. 3장. 우리가 갈라디아서 3장을 보고자 하는 이유는 이겁니다. 불가능한 일인데요, 이거에요. ‘육이 어떻게 영이 되느냐’ 이 문제에요. 이게 갈라디아서 3장에서 4장까지 계속 이어져요. 육이 어떻게 영이 되느냐? 육은 육이라 했잖아요. 끊어져 있어요. 막혀있어요. 육은 육이에요.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라고 요한복음 3장 6절에서 분명히 언급했단 말이죠. 그럼 막혀있는 거예요.
막혀있는 것을 뚫은 것으로 하기 위해서 니고데모가 한 제안은 “내가 엄마 몸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야 됩니까? 거듭 다시 태어나면 됩니까?”라고 했을 때 주께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어요.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이기 때문에 육에서 천 번을 태어나도, 타임 루프를 해서 조선시대로 돌아가든 뭐든 백날 해도 육에서 죽고 육에서 태어난 것뿐이지, 육에서 죽고 영이 태어나는 것은 육에선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육이 영이 되기 위해서는 육과 영 사이에서 끊어주는 게 있어야 돼요. 끊어져서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다’를 분명히 한 가운데 육에서 영으로 넘어간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럼 이 안에 어떤 매커니즘을 집어넣으면 되겠는가?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그 매커니즘에 대해서는 언급을 안 하고 있어요. 언급을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이야기했기 때문에. 다만 자꾸 예언적인 말씀을 했어요. “내가 너희에게 성령을 보내줄 테니 성령이 오시면 너희가 이제부터는 내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면 성령이 너와 함께 있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러나 그 사이에 ‘어떻게, 어떻게’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에 “말씀대로 될 거야. 말씀대로 된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사도 바울의 편지가 오기 전까지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0장에서 우리가 약간의 힌트는 얻어요.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도마가 나오잖아요. 주께서 도마보고 “도마야, 봐. 잘 보이지? 나야 나. 나 보이지?” 이렇게 자기 몸을 보여주면 될 텐데 왜 도마에게 못자국과 창자국을 보여주느냐 이 말입니다. 아니, 전체를 보여주면 되지 전체의 일부를 보여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못자국도 예수님 몸의 일부고 창자국도 몸의 일부라면 전체를 보여주면 돼요. 왜 그 자리를 보여주느냐 이 말이죠. 그 자리를.
도마가 “나는 보지 않고서는 안 믿겠다.” 하면 (두 팔을 쫙 펼쳐서) “자, 그럼 봐봐. 자, 봐. 이제 믿어?” 이럴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게 인간 육의 한계에요. 보고 믿는 육의 한계라고요. 도마한테는 인간 육의 한계를 넘어선 다른 요소로 네가 나의 몸을 볼 때 주목해서 봐야 될 그 지점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 지점이 뭐냐 하면 바로 육과 영을 끊어주는 사건의 지점이에요. 사건의 지점. 이걸 제목으로 할까? 사건의 지점. 무슨 사건이냐? 죽음을 몸 안에 포함시킬 수 있는 새로운 몸의 등장.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하나의 사건화 시켜서 그것을 자기 몸으로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영체의 등장.
부활 같으면 아예 말끔해야 되거든요. 부활인데 뭐가 들어있어요? 자기 죽음 사건을 내포한 부활체에요. 이 부활체는요, 장차 오실 주님의 재림하는 부활체하고 또 달라요. 요한계시록에서 봤던 그 부활체는 창자국, 못자국 없습니다. 뭔가 중간지점, 경계지점을 묘사하고 있어요.
경계지점. 인간 육의 한계와 영의 시작을 영이 되시는 분이 그것을 사건화 시켜서 몸에 담고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렇게 해서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기다려. 너 봤지? 이제는 누구 차례냐? 너희들의 목숨을 바쳐서, 사도 요한과 사도 베드로 너희의 목숨 바쳐서 내 가는 코스대로 너희들도 이제 육 된 인간한테 죽임을 당해야 될 거야.” 요한복음 21장으로 끝나요.
그러니까 성경은 요한복음도 그렇고 끝이 이상하게… 드라마가 남아있는 것 같이 아직 일이 마감되지 않은 그러한 찜찜함을 자꾸 남겨두는 거예요. 저는 그 이유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으로서 계시가 완결되었다고 보지 않고,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쓴 요한계시록처럼 이런 것들이 아직까지 더 필요하다는 것으로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마지막에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했거든요. 그럼 그 한 일을 다 적으면 그게 계시가 됩니까? 아닙니다. 그걸 압축시켜서 다른 사도의 이름으로 사도 바울의 이름으로 편지라는 형식으로 그 안에 함축이 되어야 돼요.
그럼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하느냐? “지금까지 하신 모든 비밀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하고 에베소서를 내놔요. “창세 전의 비밀까지 이 안에 들어있습니다.” 그럼 창세 전의 비밀이 뭐냐? 그게 에베소서, 갈라디아서 쭉 편지로 나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가는 사도행전의 사건들이 계시의 바탕이 되기 때문에.
사도행전보고 갈라디아서, 로마서 보면 이해가 안돼요. 사도행전은 뭐냐? 사건으로 부딪치는 인간 대 인간의 만남 사건이잖아요. 그런데 에베소서나 갈라디아서, 골로새서에서 “너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하늘나라에 있다” 이 말들… 사도 바울 말고 인간들이 똑같은 사건을 일으켜도 그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수 없는 내용들이 편지에 있어요. 이 편지는 영원하게 현실화될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 시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영원한 거예요. 그러니까 매일신문이 아니고, 내일신문이에요. 내일일보.
이제 갈라디아서 3장을 봅시다. 어떻게 육이 영이 되느냐? 이 말은 ‘육은 필요 없다’가 아니라 ‘반드시 육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3장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렇게 되어 있죠.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했습니다. 그려보죠, 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십자가가 보인다.” “어디 보이는데?” 이렇게 나오겠죠. 십자가를 예수님 몸 안에 새겨진 십자가로 보게 되면 어떻게 돼요? 예수님의 몸은 부활해서 지금 안 보이잖아요. 하늘나라 가서 안 보이죠. 안 보이지만 사도 바울의 편지에 의하면 안 보이는 형식, 머리라는 거예요, 안 보이는 형식으로 이 세상에 사건화 되는 주님의 일이 나타나는데 그 모든 일은 어디로 집중되는가?
전부다 십자가의 의미로 집중이 되어 있고, 이 말은 달리해서 앞으로 남아있는 모든 현실세계는 십자가 의미에서 파생되어 사건화 된 자체로서 이 세상 모든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은 다 십자가에서 출발한 그런 의미에요.
문서 발송처럼. 우체국에서 문서를 발송할 때 서울 광화문 우체국에서 발송된 것이 제주도까지 퍼지는 것처럼 현재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십자가에서 시작한 일이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를 품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우리의 존재 의미를 알려면 어디를 밟아나가야 돼요? 십자가까지 가야 비로소 그 의미가 파악이 된다 이 말입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인간 대 인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역시 실패로 끝났습니다. 끝났어요. 하나님과 인간은 이스라엘 멸망으로 실패로 끝났어요. 그다음 뭡니까? ‘하나님과 아들’, 성공했습니다. 그다음 ‘아들과 성도의 만남’, 지금 이 이야기에요. 네 번째 관계, 아들과 성도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갈라디아서 3장이 여기서 투입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심으로서 성도를 모집하는 거예요. 성도는 모집책이에요, 모집책. 마약 거래하는 것처럼. ‘캄보디아 가시겠습니까? 좋은 직장 있습니다.’하는 것처럼 모집책. 성도는 모집책이에요. 성도는 답답한 게 없어요.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 모집책이 되었으니까 성도는 자기 일이 있어요, 없어요? 자기 일이 없어요. 자기 일이 없다고요.
아들에서 성도가 될 때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 될 때 관계는 성령이었습니다. 이 성령이 아들을 통해서 아들의 영으로서 성도에게 주어져버리면 하나님이 아들에게 한 일이 성도를 통해서 계속 이어지게 되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여러분 아시죠? 그럼 계속 나가봅시다. 복잡해요, 이게. 갈라디아서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은 첫 번째, 예수님은 실제로 육신이 되셨다는 말이에요. 허깨비가 아니고 실제로 육신이 되어야 십자가 질 거 아닙니까. 두 번째, 예수님은 실제로 저주받을 죄가 본인한테 넘겨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세 번째, 죄가 뭐냐? 육이에요.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으로 온 거예요.
그래서 육에서 어떻게 영이 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묻지 말고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다. 그 십자가 사건의 내막이 뭐냐? 그것은 성령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전달, 전달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예수님을 버렸으니까 우리는 나 몰라라 에요. 우리는 육의 한계로 차단되어 있습니다.
그다음, 십자가 의미가 뭐냐? 그건 십자가 지신 분의 영이 와서 이렇게 이렇게 해서 나는 십자가지지 않고서는 너는 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우리 같은 육신을 지니고 아버지와의 관계가 성사될 때만, 성사되고 확립된 그 해답지만 우리한테 넘겨줄 때 우리는 비로소 아는 거죠.
“목사님, 왜 자꾸 복잡하게 이야기합니까?” 복잡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십자가가 십자가만 증거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십자가 증거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안에 있는 십자가가 십자가만 증거하기 때문에. 내가 십자가를 증거할 수 없어요. 우리가 십자가 증거하면 행함이 되고 행함은 필히 자기 의를 낳는다고요. 그럼 자기 의가 있다는 우리를 우리가 온전히 미워할 수 없고 미워할 수 없으면 우리가 온전한 십자가 졌다고 할 수가 없어요. 자기를 미워하고 십자가 지라 했는데 미워하는 척하고 십자가 지고 이건 안 되거든요.
그럼 갈라디아서 3장의 내용이 뭡니까? 율법을 통해서 철저하게 우리를 밟아요. 철저하게. 3장에서. “예수님 왜 죽은 줄 알아?” “저주받아 죽었지.” “너희는 저주받고 싶어, 복 받고 싶어?” “복 받고 싶어!” “그러니까 넌 탈락이야.”
자꾸 예수님과 비교해보세요. 예수님은 저주받았거든요, 3장 10절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사람은 저주를 원하지 않아요. 저주를 원하지 않는다고요. 인간은 사랑을 원하지, 저주를 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것은… 주일 낮 설교하면서 단어 하나만 끄집어내라면 이걸 끄집어내고 싶어요. ‘돌이킬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이 아무리 바르게 기도해도 소용없어요. 이미 십자가 사건 터져버린 이상, 저주가 보편화된 이상 어느 누구도 어떤 영웅이나 거인이 와도 이것은 ‘돌이킬 수 없잖아~’ 돌이킬 수 없어요!
그냥 우리는 이 사태에 밀려갈 뿐이에요. 애들 노는 워터파크에 가면 재미나 있지. 우리도 재밌게 삽시다, 저주에 밀려. 돌이킬 수 없어요. 나 안 해!? ‘안 해’가 어디 있어요, ‘안 해’가. 갈라디아서, 빌립보서에서는요, ‘나 이제 성도 안 해. 나 천국 안 갈 거야.’ 이게 안 돼요, 이게. ‘삐-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천국 가야 됩니다.’ 이거에요. 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에 앞으로는 당신 주도가 아니고 성령이 주도권을 쥐어서 좋으나 싫으나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됩니다.’ 이 이야기하고 있다고요.
철저하게 우리를 없애는 게 아니고, 우리를 저주받는 자 되게 하죠. 저주받는 자. 그래서 복을 기다리는 그들에게 430년 후에 저주가 찾아옵니다. 아, 이건 예상도 못한 거죠.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라 자부했는데 돌아온 것은 저주였습니다. 그런데 저주가 오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 저주받는다. 복인 줄 알아라.” ‘주님이 하시는 코스에 같이 참여된 것만 해도 영광인 줄 알아라. 이것들아.’ 이렇게 되는 거죠. 그게 이스라엘의 특징이죠.
그래서 그 이스라엘적인 안목을 가진 자에게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3장 16절 같은 경우에는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라고 되어 있다고요. 그럼 여럿 중 하나냐, 모든 여럿을 배제한 하나냐? 당연히 배제한 하나죠.
그 증거는? 유대인에 의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버림받았잖아요. 대표로 버림받았잖아요. 버림받은 자리에 예수님 딱 한 분 등장했어요. 제대로 저주받은 분이 딱 등장한 거예요. 그러면 기존의 인간들의 믿음은 다 사기였던 겁니다. 믿음이 아니었어요. 예수님의 믿음만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은 믿음이에요.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은 유일한 믿음은 예수님의 믿음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야기했던 모든 것,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죽은 자를 살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하고 싶으면 그 일을 해내십니다.’라고 받아들이는 믿음이에요. 내게서 난 믿음이 아니고, 내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해내는 그 행함, 결과로서의 원천인 그 믿음, 이 믿음이 바로 선물로 받은 믿음, 성령을 통해서 받은 믿음이 바로 그 믿음입니다.
26-29절하고 마치겠습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들 됐죠. 이 믿음이 다수입니까, 하나입니까? 그렇죠. 하나죠. 예수님 믿음. 예수님 믿음으로 말미암아 머리가 되시니까 지체한테 믿음이 관통해서 내려가는 거예요. “(예수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그다음부터는 너희들끼리 측정하거나 평가하거나 복수하거나 심지어 너 자신도 너를 평가하지 말라. 잘했다, 못했다 네가 그 입을 뗄 자격이 없다. 주께서 나의 의를 파괴시키는 일을 계속 하신다는 것만 증거하면 돼요. 나의 잘남과 멋있음과 신앙 좋음을 깨부수는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래야 오후 때 기도한 것처럼 우리는 엑스트라니까, 엑스트라 임무가 뭡니까? 주인공만 돋보이는 일을 하면 되거든요.
29절에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아들이 받는 영광, 천국)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 했죠. 그럼 ‘너희’니까 이건 다수잖아요. 분명히 다수가 아니고 하나라 해놓고 여기서는 다수다 이 말이죠.
그 모든 다수라도 그들이 갖고 있던 믿음은 선물로 받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던 그 관계가 그대로 성령을 통해서 인수인계된 거예요. 육에서 영이 된 것은, 영이 되시는 분이 우리에게 성령을 줌으로서 ‘우리는 육이었습니다.’는 고백이 이게 바로 믿음이에요. ‘육에서 나온 것은 육입니다. 말씀대로 육에서 난 것은 육입니다.’를 고백할 수 있는 자만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이었지 우리가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을 받고 보니 주의 믿음을 받고 보니 지금 우리가 사는 것도 우리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인 것을 이제는 기쁘게 감사하고 주님이 하신 것만 드러낼 수 있도록 날마다 우리의 잘남과 의가 부서지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