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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으로서 교회

아빠와 함께 2025. 11. 26. 08:59

대전-복음이냐 교회냐(5강) 행8:18(기능으로서 교회)20251124b(강의: 이근호 목사)


『복음이냐 교회냐』 66페이지, ‘교회의 근원’ 이야기입니다. ‘공기가 다르네!’라는 광고의 대사를 복음적으로 이야기하면

 

공간이 다르다는 뜻으로 표현할 수 있고,

나랑 상관없는데 공간이 나를 지배한다는 이런 의미도 되고요.

그리고 거기서 신선함과 새로움을 느꼈다는 그런 표현도 되겠죠.

그래서 ‘말씀의 세계’라는 공간 안에서는 ‘자아의 공간’을 ‘말씀의 공간’과 대비시킵니다. 그래서 성령 또는 아까 첫째 시간에 언급한 막, 죽음의 저주의 막을 통과한 분이 오게 되면 그야말로, 공기가 다르네!

자아, 내 중심의 나에게 신경 쓰던, 맨날 ‘나는 어떻게 되고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그런 자아는 타인의 욕망에 의한 자아인데 이 자아가 말씀의 공간으로 바뀝니다. 말씀의 공간으로 바뀌게 되면 내가 의식되지 않는 공간, 내가 주인공이 아닌 공간으로 바뀌어지는 거죠.

[교회의 근원은 어디서 찾는가?](p.66 첫째 줄) 교회의 근원은 당연히 이스라엘이죠. 이스라엘 이야기를 둘째 시간에 해보겠습니다. ‘창조-이스라엘-십자가-부활-성령 오심-재림’ 이런 논리로 해볼 때, 이스라엘에서 십자가로 가잖아요. 갈 때,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십자가로 갈 수 있느냐?

이 이스라엘은 집단, 단체인데 이 단체가 개인으로 바뀝니다. ‘이스라엘’ 이름을 원래 이름으로 돌려버리면 ‘야곱’이 되겠죠. 야곱에게 일어난 사건은 무슨 사건이냐? 야곱 위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했죠(창 28:12).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51절) 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되면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는 거죠.

개인인 예수님께서, 야곱에게 천사를 통해서 오르락 내리락 했듯이,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이스라엘 되죠. 이스라엘 되면서 나다나엘이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했잖아요(요 1:49). 이스라엘과 임금 사이의 그 절차, 이 절차가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핵심부분인데 그것을 나다나엘이 이야기한 거예요.

나다나엘이 이스라엘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 기대를 걸다가 이스라엘이 기대에 부응 못했잖아요. 그럼 기대할 것은 ‘메시아가 오신다.’ 이렇게 돼요. 메시아가 오신다고 말하지 말고,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메시아가 온다.’

그러면 그 당시 유대인의 희망은 뭐냐? ‘옛날 이스라엘을 정상으로 돌려줄 임금만 오시면 하나님이 약속한 대로 이스라엘은 왕 같은 제사장 나라가 된다.’ 그 당시 구약 이스라엘에 대한 해석을 나다나엘이 대표해서 지금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말해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거부했습니까? 그 해석 잘못되었다고 했습니까? 아니면 그대로 수용했습니까? 그대로 수용했죠. 수용했으니까 예수님의 할 일은 뭡니까? 나다나엘이 했던 그 해석을 그대로 밟아나가시면 되겠죠. 그렇죠?

출발점은 이스라엘의 멸망이죠. 모든 이스라엘의 멸망. 단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멸망당해요. 멸망당하고 아무도 없어요. 이스라엘 같은 이스라엘은 아무도 없어요. 없는데 주님께서 이제는 외로운 임금으로 오시면 되겠죠.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헤롯이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말고 바깥의 동방박사들이 눈치코치도 없이 지금 정치적 상황도 고려하지 않고 대뜸 하는 이야기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마 2:2) 이랬어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 누굽니까? 아기 예수로 태어나신 분이 누굽니까?’ 대뜸 물었던 이유는, 구약은 포기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포기한 적이 없이 기다리다가 드디어 때가 되매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켜서 인간들의 손때 묻은 이스라엘 말고 제대로 된 이스라엘을 일으키겠다는 신호를 주님께서 아기 예수의 출생으로서 벌써 출발했습니다.’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에게 바친 물건들이 있잖아요. 그 물건들이 바로 임금에 대한 예우에 합당한 물건들입니다. 몰약과 유황과 황금을 드려서 왕에게 경배했어요. 동방박사들이 한 아기 예수의 경배에 대해서 그들이 어떤 점을 염두에 두었느냐?

바로 이사야 9장 2절,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그 다음 전쟁이 일어났죠. 5절,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 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 일을 행사할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다음 나온 것은 그 분이 어느 위에 앉는가? 위치가? 다윗 위에 앉는다(7절). 그것을 누가 이루느냐? 바로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이름이 뭐냐 하면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름은 너희들이 모른다는 뜻이죠. 기묘하니까. 인간의 이름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인간이 붙여줄 이름이 아니에요.

그 이름은 이사야 7장 14절, 이름이 붙어요. 이름이 붙는데 그것은 명사로서 붙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해야 될 동사로서 붙는 이름이죠. ‘하나님과 백성이 함께 있을 것이다.’ 하실 목적, 하실 내용을 이름으로 갖다 붙여버려요. 임마누엘.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 하나님과 백성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행하기 위해서 태어난 아기.’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럼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는 그 아기의 작업, 아기가 찾아오지 않는 자에게는 때려죽여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그러한 모든 여건은 없다는 뜻이에요. 철저한 배제가 되는 거죠. 그런데 함께 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 출생할 때 육에서 태어난 게 아니에요. 영에서 태어났어요. 성령으로 태어났어요.

어제 낮 설교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이겁니다. 몸이 아니고 육이라는 거예요. 몸은 기대를 걸어볼 수 있는 여지가 있어요. 그걸 몸이라 하죠. 몸이 있으니까 뭔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헌금, 기도, 전도도 해보고 뭘 할 수 있잖아요. 몸은 뭔가 할 수 있는 우연을 노릴 수가 있는데, 육은 우연 자체를 거부하는 필연이에요. 너는 이미 끝났어. 너는 육에서 났으니 육으로 끝났다는 거예요.

육에서 났으니 육으로 끝났으니까 이 육이란 것은 어떤 세계와는 별도다? 영의 세계에는 들어갈 수 없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 이미 확정 난 상태죠. 이 육이 영과 결합한 데에 있어서 육은 이미 몸이 아니기 때문에, 육으로 규정받았기 때문에, 육이 영을 추구하거나 원하거나 바랄 수 있는 자격 자체가 박탈되어 있습니다. 없습니다.

따라서 육으로부터 시작해서는 소용없고요. 영으로 오신 분이 육으로 다가올 때는 결합이 성립되는데 영으로 오신 분이 죄 된 몸을 입었어요. 죄 된 몸이니까 한마디로 뭡니까? 육으로 오신 거예요. 육으로 오셨는데 안에는 성령. 그러니까 이 성령은 육으로 된 자기 백성을 영에다 합류시킬 수 있는 그러한 능력과 권한이 유일하게 계신 분. 이 분이 바로 지금 이사야 9장 6절에 나오는 기묘한 분이에요. 이름이 무슨 이름인지를 몰라요.

‘예수’라는 이름은 그냥 건성으로 인간적인 문자로 보면 ‘구원자, 여호수아’라는 뜻인데 그 내용에 대해서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설명을 해놨어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자기 백성을” 그다음이 중요하죠. ‘자기 백성’은 안 중요해요. 다들 자기 백성이라고 환장한 상태에서. 죄의 자리를 본인이 수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 여부에요. ‘내가 죄의 자리에 있습니다. 끝났습니다. 저 완전히 끝났어요. 저한테는 일체 의라는 것이 없습니다. 끝났습니다.’ 하는 거거든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도 마찬가지죠. 끝났습니다. 데려와서 주께서 건져주면 고마운 일이고 안 건져줘도 이건 합당한 조치가 되고. 죄인을 버리는 것은 뭐… 쓸데없는 죄인을 버려야지, 어떻게 하겠어요. 그럴 수밖에 없죠.

그래서 만약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 몸으로서 건져줘버리면 ‘역시 나는 내가 원했던 바를 얻었어.’가 되지만, 죄인을 건져줘버리면 자기 인생 자체도 기묘자의 연발, 또는 연속이 되어버리죠. 내가 하루하루 사는 게.

이번 김장은 맛이 왜 이렇게 좋지? 기묘해요. 수육은 레시피가 뭐지? 제가 물어보겠습니다만, 기묘해요. 그걸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딸 시집보내는데 멀리 가지도 않아. 가까이 바로 옆에 붙었어. 뭐 그리워할 여지가 없어. 이거 뭐 시집갔는지 안 갔는지 한 가족이라. 기묘한 겁니다. 모든 게 기묘해요. 애가 여섯 살밖에 안됐는데 천재다,… 전부다. 기묘해서 불안해. 어질어질해. 도대체 어떻게 키워야 될지 걱정이 늘어지겠는데…

자기 백성은 주님의 자기 연장(延長, extension)이라. 자기 자신, 임마누엘의 확장 공사. 일체 보상금 하나도 없어요. 그냥 강탈하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자기 사람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주께서 하십니다. 왜냐하면 왕밖에 없기 때문에.

왕만 있으면 안 되잖아요. 왕이라 하는 것은 백성이 있을 때 왕이 의미 있잖아요. 백성 모집에 누가 나서는가? 왕이 나서는 거예요. 그 동네에 유치원 원장만 달랑 있다. 그럼 유치원이 해야 될 일이 뭡니까? 원아 모집이죠. 유치원 아동 모집에 나서야 되듯이. 어린이집도 마찬가지에요. 나서야 되는 거죠.

얼마 전 TV에 안세영 선수가 나왔어요. 안세영 이 사람은 배드민턴 치는 사람이에요. 나이는 23세인데 이 사람이 말도 잘하고 똑똑해요. 이 사람이 어제부로 한 시즌에 11번 나와서 결승에 11번 올라갔어요. 그중 10번을 우승한 사람인데 이 안세영 선수가 두 가지를 이야기해요. 1.나는 코트에서 죽습니다. 자기가 살아서 돌아올 생각 없어요. 그냥 죽도록 치는데 ‘우승해야지’가 아니라 이기면 다행스럽고요. 자기는 죽기 위해서 쓰러지기 위해서 코트에 가는 거예요.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자기 아쉬운 점인데 2.나는 배드민턴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아 참…이 2번이요, 2번이 너무 복음적이에요. 몰라도 돼요. 몰라도 10억 벌어요. 몰라도. 그런데 자기는 요리를 못해서 아쉽다는 거예요. 요리도 못하고 다른 친구들처럼 노는 것도 잘 못 놀고. 아쉽다는 거예요. 그런데 코트에서 죽을 사람이 요리해서 뭐할 건데요? 라면만 끓이면 되지, 다른 거 뭐 필요하겠어요?

그러니까 성도도…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갔던 코스가 있어요. 십자가 사건이 배드민턴 코트입니다. 십자가 사건화 시켜요.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뭔가 당겨요. 당기면 어디로 당겨지겠어요? 여러분 내 질문의 답이 예상되죠? 당기면 어디로 당겨지겠습니까? 십자가로 당겨지겠죠.

왜 그렇게 하시느냐 하면요. 둘 중 어느 게 맞는지 보세요. 아담이 마귀와 한통속 되었을 때 나타난 결과가 1번이냐, 2번이냐? 1.지옥으로 추락했다. 2.지옥으로 끌려갔다. 몇 번입니까? 아담이 악마와 만났을 때 그다음부터 운명이? 지옥으로 추락했다. 보통 타락했다 하는데 ‘타락했다’가 맞습니까, ‘끌려갔다’가 맞습니까?

‘끌려갔다’가 맞죠, 당연히. 왜? 마귀가 힘이 더 세니까. 정신개조를 해버렸거든요. 선악개조를 했어요. 선악개조는 하나님 쪽에서 안 받습니다. 선악개조 되어서 굉장히 똑똑하고 총명하고 뱀처럼 지혜로운 거 맞는데 선도 알고 굉장히 지혜로운 거 맞는데 혼자 많이 즐기세요. 우리 천국에서는 안 받습니다. 유월절을 통과 못하면 누구도 안 받아요. 천국에서는 안 받는데 자기는 똑똑해.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끌려간 거예요. 여기서 나온 유명한 말, ‘인신매매’라는 사자성어가 있죠. 마귀가 인신매매한 거예요. 외국영화 보면 이런 거 있죠. 나쁜 사람들이 순진한 여자 파티에서 꼬셔가지고 집어넣어놓고 집에 안 보내고 몇 년째 가두어서 돈벌이하고 그런 거 있잖아요. 돈은 다 뺏기고 얻어맞아서 바들바들 떨고 바짝 야윈 채로 그들 사업에 어쩔 수 없이 농락당하고 마는 것. 그걸 성경에서는 인간세상이라 봅니다.

인간세상은 왜 사는지 몰라요. 박찬욱 감독 영화제목에 나오죠. 어떻게 삽니까? 어쩔 수가 없어요. 태어난 이상 어쩔 수가 없어요. 제지공장 다니다가 잘렸어요. 잘렸는데 제지공장에서 간부급들 뽑는 숫자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후보감들을 자기가 조사해서 하나 둘씩 제거하는 영화가 <어쩔수가없다>는 영화입니다.

내가 사람을 죽여도 나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나 살기 위해서. 나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그게 나쁘냐 좋으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요, 박찬욱 감독 입장에서는. 나쁘냐 좋으냐가 아니라, 우리는 이미 여기에 사로잡혀 있는 거예요. 왜 살아야 되는지 이유를 묻지 마세요. 그냥 사는 게 남는 거라는 생각이 최종 생각이에요. 최종 내린 결론이 그거에요.

뭐 스무 차례 만엔가 이사 왔던 그 집을 내가 이제는 다시 내놓지 못한다, 영화 초반에 보면 그런 가족회의가 나와요. 이걸 어떻게 마련한 건데 이 집을 내놔? 하면서. 당신 차도 바꾸고 애도 첼로 레슨 그만두고 완전히 긴축재정으로 들어가자. 우리는 무조건 여기서 살아야 된다. 너희 아빠가 잘렸어. 이제 돈 없어. 옛날처럼 못 살아.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데? 정답은? 어쩔 수가 없다. 어쩔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걸 뭘 이유를 찾아? 내가 살고 보지, 뭘 이유를 찾아?

마약을 왜 해요? 마약하는 게 얼마나 나쁜지 압니까? 캄보디아 간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어쩔 수가 없는 거예요. 남이 죽는다는 건 내가 여유 있을 때 하는 이야기고, 내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돈 버는 것 외에 없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추락한 게 아니고, 내가 나쁜 짓하려 하는 게 아니고, 마귀한테 잡아당겨져서 끌려가는 인생이에요. 끌려가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

그러니까 소경이 예수님 앞에서 뭐라고 합니까? 주님, 제 눈을 낫게 해달라는 거예요. 왜? 불쌍히 여겨달라.(마 9:27, 마 20:30, 막 10:47, 눅 18:38)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은 ‘내 쪽에서 해결할 수 없고 이런 상황은 내 뜻이 아니고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능가하는 우리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약속대로 불쌍히 여겨주게 되면 이스라엘 되게 해주시는 거잖아요. 복의 대상자가 되잖아요.’ 그게 바로 소경들이 와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그 대목이죠.

그럼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왕이 백성 모집을 하는데 불쌍히 여겨줄 때만 가능하다. 이게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달음박질하는 것도 아니고 원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그냥 긍휼이 여길 자만 남은 자가 되어서 이스라엘이 된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6)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하죠. 사도 바울이 율법을 지킨다고 얼마나 애썼었습니까?

사도 바울의 인간론에 대해서 로마서 3장에 나옵니다.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어떤 사람 말입니까? 어떤 사람? 모든 사람. ‘모든’이라 하는 것은 앞에 3장 10절에 보면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

인간에 대한 규정이 철학적 규정과 달라도 너무 다르죠? 인간은 몸이니까 자꾸 가능성, 기대가 있잖아요. 이게 일체 없죠. ‘모든 사람’으로 끝.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뭐 반성하면 되지 않습니까? 회개하면 되지 않습니까? 안 돼! 지금 네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아버지께 영광이 안 되는 거예요, 죄가.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손 못 대요. 끝났어요. 이제 영광되고 안 되고는 누구 손에 달렸습니까? 이스라엘 왕 되시는 예수님께만 달린 문제지, ‘저 회개할 테니까 하나님이 절 기쁘게 받아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잘못되었습니다.’ 소용없어요. 그런 건 천주교에서 이야기하세요. 그런 건 소용없어요. 회개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반성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잘못했습니다’라는 말 자체가 다 헛수고에요, 이게. 그냥 ‘주님, 감사합니다. 긍휼히 여겨주셔서.’ 이러면 끝날 문제를 가지고 하늘나라 지침을 왜 안 따라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지침을 자기 마음대로 정해가지고 서류 제출해요.

‘서류 제출’은 두 가지입니다. 1.내가 할 수 있는, 내가 천국에 내밀 수 있는 서류. 어떤 게 있겠습니까? 전도, 찬양, 예배 이런 여러 가지가 있겠죠. 세례 언제 받았는지, 성만찬 몇 번 했는지, 결혼식 할 때 목사 주례했는지 이런 거 쭉 있잖아요. 그 서류 보지도 않아요. 헛짓하고 있다고요.

두 번째는, 예수님의 공로입니다. 2.예수님의 공로에 관한 서류. 이게 복음이고 말씀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혜롭게도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겨놓고 어디다 집어넣느냐 하면 예수님의 말씀 세계, 말씀 공간, 복음 세계에 집어넣어요. ‘예수 안’에다 집어넣어요. “네가 서류가 되어라. 아버지가 뭐라 하거든 저 예수님이 불쌍히 여겨서 왔다고 이야기해라. 우리끼리만 이야기하는 거야. 우리끼리만.”

남들이 들으면 화내요. 자기는 지금 기도한 거, 예배한 거 서류 낸다고 바쁜데… 세상에 빽도 이런 빽이 없어요. 뒤로 불러내서 “주께서 널 불쌍히 여겨서 너 대신 내가 값없이 구원하기로 작정했다.” “그럼 저는 뭐하면 됩니까?” “너 자체를 가지고… 이마 대라, 이마.” 이마에는 자기 이름 못 써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거예요. 이마에 ‘예수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문신 새기듯이 써버려요.

이제 네 이마에 어딜 가더라도… 사람들은 그 기묘한 이름을 몰라요. 모르는데 남들이 나를 쑤시면 주의 이름과 관련된 발언이 나오겠죠. 인형에 이런 게 있잖아요. 쿡 쑤시면 ‘아이 러브 유!’ 주께서 필요할 때마다 사건을 일으키면 ‘오, 주여!’ 이런 게 나오는 것처럼 ‘주께서 일으켰습니다. 나는 이미 주님께 소속되어서 ‘아이 러브 유!’ 이런 소리, 주님의 복음의 소리만 나옵니다.’라는 사건을 보여주는 거예요.

여기서 주의사항이 있어요. 주의사항이 뭐냐? 내가 먼저 나발 불지 않는 거예요. 주의 십자가에 대해서 입 다물어라. 사건이 와야 돼요. 사건이. 그 사건은 뭐냐 하면 나로 하여금 육으로 저주와 심판에 이를 수밖에 없는 사건, ‘나 같은 인간은 때려죽여도 전 할 말 없습니다.’하는 그런 사건 속에서 비로소 복음이 인식되게 되어 있어요.

저주와 심판. ‘나 같은 건 끝났어. 나는 맛이 갔어. 이건 안돼. 이건 물건이 안돼. 벌써 끝났어.’라고 할 때, ‘찬양하리이다. 감사하리이다.’ 내가 나 된 것은 바로, 제대로 된 표현,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솜씨입니다.’ 이 말은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살아계셨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우리는 자기 것 챙긴다고 하다 보니까 그걸 전부다 가로막고 밟고 엎어버리고 ‘나 안 볼란다’ 해서 전부다 안 볼 사람으로 그렇게 해버리는 거예요.

자, 그 점을 다시 한번 실생활로 바꿔봅시다. 세 가지입니다. ①친자연적인 공간, ②인간 공간, ③말씀의 공간.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약속의 공간 또는 영적 세계, 영적 공간이 되겠죠.

친자연적인 공간이란 뭐냐? 등 따시고 배부르면 최고죠. 외국에 여행 간 사람이 한국이 제일 그리운 것은 누울 때 온돌 뜨뜻할 때, 보일러 뜨뜻할 때. 세상만사 그것처럼 좋은 게 없는 거예요. 이불 치워. 이불 치워. 일단 등 따숩게 뜨뜻하게 지지죠. 피곤이 다 풀려요. 그다음에 뭐해야 돼요? 등만 따시면 됩니까? 앞부분, 배불러야 되죠. 등 따시고 소고기 국밥에다 밥 말아먹어서 배부르면 뭐 더할 나위 없죠. 이게 바로 어릴 때. 어릴 때 환경은 친자연적 환경이에요. 애들이 그래요. 사탕만 주면 좋아해요, 하여튼. 앙 울다가도. 친자연적인 공간입니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돼요.

그런데 슬슬 배부르면 더 이상 필요 없다 했는데 필요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외로워요. 수다를 떨어야 돼요. 자기 억울한 것, 자기 속에 들어있는 것을 풀어줘야 돼요. 그래야 정신적으로 쓰레기를 비우듯이 뭔가 안정감을 얻어요. 다 게워내서 내게 있는 고민을 저쪽에 다 떠맡겨야 돼요. 그렇게 해야 돼요. 친구가 필요해요, 친구가. 외로우니까.

그래서 등 따시고 배부르면 최고라고 전원주택 사서 돈 날리고 다시 어디로 오느냐? 역시 병원이 가까운 게 좋아, 나이 들면. 자주 가야 되니까. 아침마다 병원에 출근하기 때문에.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친구 되어주거든요. ‘아이고, 오셨습니까? 어르신네.’ 또 가다보면 같은 동기생들이 많지 않습니까. 나이 팔십 쯤 되고 ‘오, 곱네!’ 이런 거요. ‘걷는 게 정상이네?’ 정상이 아닌데. ‘오? 걷네? 오? 일어서네! 우와!’ 이런다고요.

인간들끼리의 교류, 내 속에 있는 것을 주고받으면서 외로움을 드러내는 것. ①친자연적 공간, ②인간 공간 여기까지가 끝입니다. 그다음, 친구랑 전화 세 시간 반하고 ‘우리 오늘 짧게 했지?’하고 끊었는데 전화 세 시간 반하고 끊고 난 뒤의 그 적막감, 그거 어떻게 감당할 거예요? 전화를 세 시간 반해서 팔이 아파요. 파스 붙여야 돼요. 처음에는 앉아서 하다가 누워서 하다가 나중에는 도저히 안돼서 끊었는데 그 뒤에 오는 적막감, 고요함. 뭐로 채울 건데요? 감당 못하죠. 여기서 인생은 이 두 가지로 끝납니다.

친구 만날 때 그리워한 것은 사랑이에요. 등 따시고 배부른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은 정 없이는 못 산다는 거예요. 나를 찾아주고 내가 찾고 싶은 것. 그래서 여기서 팁 하나 드릴게요. ③말씀의 공간은 조금 이따 설명하고요. ‘사랑이란,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떼어내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내 욕망과 욕구가 다가서면 사랑이 아니에요. 내 욕구와 욕망을 떼어내서, 내가 내 욕망과 욕구와 헤어지고 난 뒤에 빈 자리에 내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고 내가 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여력마저 완전히 말라버렸을 때 그때 찾아와야 그게 사랑이거든요. 떼어내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고 사랑의 개시에요. 안 떼어내게 되면 내가 원하는 욕구로서의 사랑을 자꾸 고대하게 되어 있어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 제가 참 좋아하는 말씀이에요.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결혼을 하나 안하나 처녀로 사나 총각으로 사나 주께서는 아무 관심이 없어요. 심판을 이기는 것은 뭐밖에 없어요? 사랑밖에 없어요. 율법이 그렇게 센데 율법을 능가하는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나에게서 나를 떼는 작업부터 시작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모처럼 준비한 게 있어요. 아무래도 말하는 폼새 보니까 뭐 있겠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준비한 노래는 ‘You light up My life’ Debby Boone이라는 여자 분이 불렀던 노래에요. 이 사람이 불렀던 노래인데 ‘당신이 내 인생의 빛이 되었다’하는 노래입니다. 한글 가사를 제가 읽어드리겠어요.

You light up my life
Debby Boone(1977)

So many nights, I'd sit by my window
Waiting for someone to sing me his song
So many dreams, I kept deep inside me
Alone in the dark, but now you've come along

수많은 밤을 창가에 앉아 있었어요
내게 자신의 노래를 불러줄
많은 꿈을 마음속에 간직하기도 했어요
누군가를 어둠속에서 혼자 기다렸죠
그러나 이젠 당신이 나타났어요

And you light up my life
You give me hope to carry on
You light up my days
And fill my nights with song

당신은 내 인생을 밝혀주었어요
나에게 일을 실행할 희망을 주었어요
당신은 내 인생을 밝혀주었어요
나의 밤을 노래로 채워주었어요

Rollin' at sea, adrift on the water
Could it be finally, I'm turning for home
Finally a chance to say, "Hey, I love you"
Never again to be all alone

바다에 떠다니는 표류물 같이 방황했어요(예전에)
이제야 집으로 돌아가는 걸까
지금이 바로 이야기할 기회인 것 같아요
“당신을 사랑해요”
이런 기회는 다시는 없을 거예요

결국 이 가사에서 자기 말로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앞에 어두움에 혼자 방황하는 절차를 통해서 이 사랑이 저쪽에서 주어졌다는 것. 내가 구하기도 했지만 구한다고 사랑이 오는 게 아니고, 이렇게 어두움조차도 당신이 나한테 밝혀줄 빛을 더욱 더 빛나게 하겠죠. 무슨 뜻인지 대략 아시겠지요?

'Cause you light up my life
You give me hope to carry on
You light up my days
And fill my nights with song

왜냐하면 당신은 내 인생을 밝혀주었어요
나에게 일을 실행할 희망을 주었어요
당신은 내 인생을 밝혀주었어요
나의 밤을 노래로 채워주었어요

'Cause you, you light up my life
You give me hope to carry on
You light up my days
And fill my nights with song
It can't be wrong when it feels so right
'Cause you, you light up my life

나의 밤을 노래로 채워주었어요
나에게 일을 실행할 희망을 주었어요
당신은 내 인생을 밝혀주었어요
나의 밤을 노래로 채워주었어요
이런 편안한 감정은 잘못된 게 아닐 거예요
당신은 제 삶을 밝혀 주었으니까요

잠시 노래를 듣고 가겠습니다. 가사 들을 때는 몰랐지만 ‘아, 이 노래!’ 여러분들이 또 반가울 수가 있어요. 들어보니 옛날에 많이 들었던 노래 아닙니까? 자, 여기서 사랑이 오게 되면 그냥 모든 것이 번역이 돼요. 먹든지 마시든지 그 사랑에 감격하고 고마워하면서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두 번째 주제가 ‘교회가 뭐냐? 교회의 근원이 뭐냐?’죠. 교회는 ‘존재’ 아니고 ‘기능’이죠. 존재가 아니고 기능이에요. 뭘 지금 하고 있어요. ‘내가 교회입니까?’ 그런 질문 자체가 의미 없어요. 그건 마치 엄마보고 “엄마, 나는 엄마가 낳은 아들 맞습니까?” 질문하는 것과 같아요. 호로자식 같은 질문이죠.

지금 주께서 사랑을 줌으로서 전에 내가 어둡게 불신자처럼 살았던 것조차도 어디에 편입되느냐 하면 주님의 사랑행위에 이미 포함이 되어있어요. 소급해서. 그러면 과거에 잘못했는데 새 사람 되었으니까 바르게 살아야 된다, 이거 아니에요. 왜냐? 미래에서 계속 사랑이 나오려면 무엇과 같이 움직이느냐 하면, 주어진 사건 안에서 나의 육적인 본성도 숨겨지지 못하고 마귀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사태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육인 거죠. ‘육의 호출은 사랑으로’. 육이 그냥 있으면 육이에요. 그런데 뭐로 호출합니까? 사랑으로 호출하게 되면 내가 숨기고자 하는 이 육이 육다운 모습으로 그대로 노출됩니다. 노출되면서 우리가 말씀에 의해서 내리는 결론은, 육과 말씀이 만나잖아요, 불평하지 말고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게 즐거이 나오는 거예요. ‘이만큼 어지간히 살았습니다. 손자 걱정하지 말고 딸 걱정하지 말고 지금 데려가신다 해도 그것도 주께서 할 일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이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의 말에 의하면, 이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지금 내가 구원받느냐의 문제는 이제 끝났어요. 끝나고 ‘어떻게 하면 사랑을 사랑답게 드러내는가’가 남은 일인데 그 남은 일을 우리가 기획하지 마세요. 계획하지 마세요. 스케줄 짜지 마세요. 주께서 매 사건, 김장 사건, 무슨 사건을 통해서도 어느 한 순간도 사랑 아닌 것이 없도록 그렇게 들추어내는 겁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어떤 분의 질문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게 그거에요. ‘목사님,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일들을 우리가 다 겪어야 됩니까?’ 하는 질문. 평소에 질문하고 싶지만 믿음 있는 척한다고 애쓰다 보니까…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일, 예를 들어 순교하는 일부터 해서 요한계시록에 많잖아요, 모든 일을 우리가 다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

그 질문의 바탕에는 두려움이 깔려있죠. 그런데 요한일서 4장에 보면 사랑은 뭐를 쫓아낸다? 두려움을 쫓아내죠(18절). 두려움을 쫓아내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예 평생 두려움 없이 사느냐? 아니에요. 육을 소환했잖아요. 육은 두려움과 더불어서 나타나죠.

일단 두려움이 생기고 두려움에서 사랑의 찬미로 넘어가는 데 있어서 우리의 무능력함, 이 절망을 내 힘으로 이겨낼 수 없는 무능력함과 그 무능력함을 딛고 말씀 공간이라는 사실, 보다 폭이 넓은, 풍선을 불면 풍선이 커지잖아요, 보다 넓은 풍선 사이에서 두려움의 시작은 사랑으로 마감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합니다.

처음에 두려워할 때는요, 우리가 아주 몸부림치고 발악을 해요. ‘나 이러고서는 못삽니다.’ 완전히 파업을 해버려요. 신앙 파업. ‘나 이제 주님하고 안놉니다. 이렇게는 나 못 견딥니다.’ 발악을 하고 그렇게 하죠. 그런데 고마운 일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태들이 그런 예시로 가득 차있다는 거예요.

이 성경을 본다는 것은 거기에 감정이입하고 그 현장에 우리가 있다고 생각해보는 거예요. 그럴 때 첫 번째 우리의 느낌은 뭐냐? 겁난다, 두렵다, 나는 빼주세요,…뭐 여러 가지가 있겠죠. 특히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 갔던 길. 특히 지중해갔는데 폭풍우 일어서 완전히 몰살되었잖아요. 사실은 죽은 거예요. 배 부서졌죠. 양식 다 떨어졌죠. 지금처럼 휴대폰 있었으면 휴대폰 물에 다 빠졌어요. 자기 소지품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내 쪽에서 나를 건질 어떠한 건덕지도 주께서 다 치워준 거예요.

드라마에서 폭력깡패하고 형사하고 싸울 때, 깡패한테 막 얻어맞고 있는데 거기에 권총이나 칼이 있을 때 카메라가 그걸 비춰준다고요. 손을 딱 뻗잖아요. ‘드디어 나쁜 사람을 제압하는구나.’ 했는데 그걸 눈치채가지고 권총을 발로 차버리는 거예요. ‘드라마 너무해! 도대체 희망을 안줘. 어떻게 이기라고.’ 그게 스릴러의 묘미 아닙니까.

갑자기 난데없이 나를 떠났던 사람이 와서 대신 깡패를 패줘서 구출된다, 그런 내용 같은 거요. 그 못된 옛날 아버지의 동업자가 나를 괴롭게 하는데 힘이 없으니까 저걸 어떻게 복수를 못하고 있는데 자기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죽여버리네? 그 동네에 태풍이 막 불잖아요. 그래서 무슨 상사? 태풍상사. 자기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그냥 죽이도록 방치해버리죠.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나중에 드라마 15, 16회가 남았습니다만.

그처럼 모든 것이 우리의 예상 밖의 일인데 조건은 뭐냐? 절대로 내가 원했던 그러한 희망적인 결과는 우리한테 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게 전제입니다. 내가 은근히 ‘이랬으면 참 좋겠네.’하는 결과는 일체 우리한텐 물 건너 갔습니다. 만약에 내가 원했던 결과가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아에 자기 의가 쌓이게 돼요. 하나님도 내 편이라는 자기 의가 쌓이니까 이건 뭐 하나님께서 기겁을 하시고 안 되죠.

예상 못했는데, 내 뜻대로 된 적은 없는데, 남들 보기에 비리비리하단 소리를 듣는데, 나한테는 다시 한번 사랑과 고마움. 당신이 계시므로 내 인생에 빛이 왔습니다. 그놈의 빛은 반복적이라. 빛 됐다가 그 다음날 어두움 됐다가 밤에 또 빛이 오고….

맞아요. 그런 식으로 주께서는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주님의 자기 사랑을 생산해내는 생산 공장으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이 기능이 무슨 기능이요? 이게 교회잖아요. 이게 바로 그리스도 몸의 교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맡기면 될 문제를 괜히 어쭙잖게 우리가 계획 세워가지고 ‘이것대로 해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우리 얄팍한 자기 의의 모습을 날마다 들키게 하여 주셔서 들키게 한 이조차도 이미 말씀 세계, 사랑의 대상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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