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바깥 구조

아빠와 함께 2025. 10. 1. 09:03

대전-복음이냐 교회냐(3강) 고전9:27(바깥 구조)20250929b(강의: 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시간과 공간은 우리를 위한 게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이 살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창세 전에 정보 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위해서 그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주께서는 이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이 어떤 시도를 한다는 걸 이미 아시잖아요. 그때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불가능성입니다. 불가능성+불가능성+불가능성+… 계속 불가능성이에요. 한번 불가능성이고 그다음부터는 우리한테 가능성을 주는 게 아니고 매일같이 불가능성. 모든 게 불가능성으로 연쇄 고리를 만들어요.

예를 들어서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이것은 불가능성이다.’ 하잖아요. 그럼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예수 믿고 구원받는 건 불가능성이야. 기적이야. 구원받았잖아. 이제부터 하나님의 증인하겠습니다.’ 갑자기 뭐로 변했어요? 불가능성에서 갑자기 ‘그럼 내가 이제 증인노릇 하겠습니다.’하면 이것은 어떤 가능성을 또 슬슬 내비치고 있죠. 이 노선은 넓은 길로 가는 노선이에요. 이것은 멸망으로 가는 노선이고요.

불가능성에서는 그다음 일도 오직 하나님의 기적이 임해서 불가능성으로 연결되어야 돼요. 그럼 불가능성이 한 번, 두 번 됐죠. 그러다 예수님의 증인노릇해서 누구를 전도했다. 그러면 ‘야, 이거 되네. 아, 이런 경우도 있네.’ 그럼 세 번째는 뭡니까? 여기서 가능성을 또 내비치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예수 믿고 이제는 남편까지도 천국 보내야 되겠다. 이거는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이상하게 변해서 복음을 듣네? 어? 되네? 그럼 남편과 더불어 주를 섬겨야지.’ 이러면 가능성으로 또 넘어온 거예요.

항상 좁은 길, 천국 가는 길은 불가능성과 불가능성 외에 어떤 가능성도 섞이면 안돼요. 불가능성의 연결, 연결이 되는 겁니다. 연결, 연결이 되려면 중간에 육신에서 나오는 이 가능성에 대해서 주께서 이스라엘에 드론 보내서 가능성으로 나오는 그걸 전부다 때맞춰 폭파시켜서 내 가능성으로 다음 사태로 연결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쏙 빼죠. 그 빼는 작업을 하게 되는 겁니다.

방금 그런 차원에서 고린도전서 9장 27절을 읽어보세요. 아주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올 거예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야, 이게… 복음을 전하는 내가 그 복음에 준해서 ‘너도 잘렸어!’하고 잘릴까봐 내가 두려워함이라.

그럼 나의 구원은 어디서 보장받습니까? 이거 참…. 내 구원을 내가 보장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내 구원을 내가 보장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탈출했는데 주님 나라까지 가려면 아직 정신 바짝 차려야 된다는 말이에요? 이게 정신 차려서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 원인이 어디에 있냐면 내 몸에 있다고 보고 어디를 공략하느냐?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이 점에 대한 해결책을 어제 낮 설교에서 언급했었어요. 사도 바울이 강해질 때마다 주님께서는 가시를, 그것도 그냥 가시가 아니고 이름도 사탄의 가시를 줘서 나로 하여금 nothing, 내가 아무것도 아닌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유지하게 하시는 그 능력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어요.

하나님의 은혜에 이것저것이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의 내용에 집결되는데 그것은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이 말이죠. 나를 약하게 안 만들고 어떤 경우라도 나를 스스로 설 수 있고 강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은혜에 속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고린도후서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약해졌기 때문에. 그런데 고린도후서 13장 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해요. “약해지세요. 약해지게 되면 당신을 약해지게 하시는 분이 강하게 여러분 속에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이에요. 우리는 약하다/강하다 중에서 어느 걸 반드시 선택합니까? 우리의 자율과 의지는? 강한 쪽을 선택하죠. 강한 쪽을 선택한 것을 약한 쪽으로 돌리는 이것이 얼마나 강하냐는 겁니다. 우리의 고집보다 더 센 고집이잖아요. 이게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지금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나 잘렸어. 나도 이제는 나를 장담 못해.’ 이런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구원받은 자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를 충분하게 활용해주신다는 겁니다. ‘나에게 사탄의 가시를 주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현실로 나타나는 모습이라면 제 몸도 기꺼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데에 사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이에요. 왜냐하면 자기는 그 복음 전파의 선봉에 서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 그렇게 생각하시고 이 불가능성의 연속이 어떤 구조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45페이지에서 하고 있습니다. 45페이지를 볼게요. 밑에서 8번째 줄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구조 속에 놓여요. 주님께선 바깥쪽에 둬서 우리로 하여금 여기에 적응하게 하는 식으로 이렇게 보쌈하듯이 데려가서 구원하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이 사적으로 모세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죠.

이건 설명이 좀 많이 필요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여기에 적어놨느냐 하면 광주강의 때 제가 갈대아 우르로 시작해서 하란을 거쳐 헤브론, 세겜 거쳐서 브엘세바까지 내려오는 동선을 그림으로 보여드렸잖아요. 그러면 그들의 땅은 애굽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땅은 애굽이 아니고 애굽 바깥에 있는 가나안 땅이에요. 그곳으로 가라고 한 거예요.

그곳으로 가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리고 아브라함의 4대손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다음 요셉 그들을 어디로 보냈느냐 하면 애굽에서 살게 했어요. 그 후손들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살게 만들어요. 그럼 뭐가 되는 거예요? 고향도 아닌데 남의 땅에 얹혀사는 꼴이 되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데 있어서 구조가 필요한데요. 그 구조는 원토박이도 아닌 외부인이 그 나라에 들어와서 그 나라에 살면서 거기서 어떤 계시적인 효과를 발휘시키게 해요. 효과를 발휘시키게 되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는 약속의 땅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를 보여주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아브라함에 대해 말하기를,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죠(8절). 갈 바를 알지 못했다는 말은, 내 출생지와 내가 영원히 살 곳이 다른 곳이다. 같은 장소가 아니라는 겁니다. 같은 장소가 아니에요. 인간보고 그렇게 하라 하면 인간은 불가능하죠. 태어나기를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땅에 사는데 이 땅이 아닌 다른 곳에 가라면 다른 곳이라는 인식 자체가 성립 안 되죠. 없죠.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다른 곳에 가라 하니까 거기서 등장하는 것이 불가능성입니다. 언약의 불가능성. 언약에 의해서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다른 곳으로 가는 겁니다. 다른 곳에 가는데 이 다른 곳에 가려면, 여러분, 다른 인간이 되어야 돼요. 다른 곳도 불가능하지만 다른 곳에 사는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고 다른 인간 되는 것도 역시 불가능한 거예요.

그 땅의 그 백성, 이게 죽이 맞으려면 그 땅도 다른 곳이라면 나도 내가 예상하지 못한 나. ‘내가 예상하지 못한 나’가 되어야 돼요. 나는 어떠냐 하는 것은 강의 전에 20분 동안 강의했기 때문에 그거 들어보시면 알 거예요. 나라는 것은 조작된 것이고 나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사건의 다발이지, 내가 있는 건 아니에요. 사건이 집약된 사건의 결과물이 되는 것이지, 내가 있고 사건을 끌어 모으는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공간 속에서 나라는 것이 날마다 달라져요. 나라는 생각을 별로 안 해요, 사람들이 살다 바쁘면. 그런데 몸이 아플 때나 내가 나를 위해서 활동을 멈출 때는 갑자기 내 생각이 슬그머니 올라옵니다. 나는 누구며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느냐, 이런 거. 여러분, 자살하는데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자살할 때까지 그 끝까지 자아를 못 버려요. 자아는 없는데도 불구하고 있다고 여기니까 자살로 이어지는 겁니다. 마귀가 그렇게 만들었죠.

주께서 은혜 주셔서 밥 빌어먹고 사는 주제에 그 나가 왜 필요합니까? 주는 대로 살면 되지, 왜 굳이 ‘내’가 살아야 돼요? 살려주시는 분만 살아있으면 되지, 왜 내가 굳이 살아야 됩니까? 나는 나를 못 버립니다. 그러니까 다른 인간, 현재 말고 다른 인간에서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그럼 다른 곳에는 지금의 나는 못 들어가고 다른 인간으로 바뀌어야 들어간다면, 여러분이 만약에 하나님이시라면 여기에 어떠한 조치, 어떠한 해결책이 필요하겠습니까?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신고해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인간들이 있는데 그 인간 말고 다른 인간이 되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합니까?

첫 번째 답을 내는 방법은 모델을 찾는 거예요, 모델. ‘나 저 사람처럼 되어야 되겠다.’하고 모델을 찾고 탐색해보는 거예요, 모델을. 그래서 애들이 동화 볼 때 동화에 나오는 주인공은 전부다 모델이에요. “너 커서 뭐 될래?” “아이돌 될래.” 전부다 자기가 좋아하는 범위 내에서 모델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모델들이 다 시원찮아요. 모델들은 자기가 이상적인 존재라 하는데 막상 가까이 접근해보면 나름 고민과 걱정이 있어서, 너나 나나 똑같네. 고민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하고. 모델로서의 자격미달, 자격박탈이라는 것이 뭐든지 가까이하게 되면 그게 들통 나게 되어있습니다. 가까이하면.

처음에 좋다고 결혼해놓고 나중에 이혼숙려에 막 들어가죠. 처음 만날 땐 “아, 너무 예쁘다.” 트렁크 들어주고 캐리어 막 들어주면서 “저는 26기 광수입니다.” 했는데 며칠 지나고 난 뒤에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나오는 거예요. 가까이해보면 술 한 잔하고 객기부리는 거 받아주려고 하면 짜증나는 거예요. 아, 내가 생각한 그 사람이 아니구나.

모델을 찾을 수가 없어요. 왜 인간은 모델을 못 찾느냐? 타인을 타인 그대로 바라볼 눈이 없고 내게 괜찮은 나의 요소를 상대에게 투사하거든요. 투사란 집어넣는 거예요.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네. 이렇게 되어주면 내가 당신을 참 사랑할만합니다.’라고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요소를 상대방에게 집어넣어놓고 억지를 부리면서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좋게 좋게 보려고 애를 쓰는데 그거 한계 드러나고 밑천 다 떨어집니다. 소용없어요. 안되죠.

모델을 어디서 찾는가? 첫 번째 나오는 어려운 거예요, 둘째 시간에. 뭐냐 하면 다른 시대에서 찾아야 돼요. 다른 시대. 하나님께서 다른 시대를 집어넣는 거예요. “저는 이 시대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 떠나야 됩니다.” 그러니까 남자가 하는 말이 “다시 돌아오겠지.” “당신이 폭군이 아니라면 내가 돌아올 의향이 있다.” 누가 이야기해요? 폭군의 셰프가 이야기하죠.

드라마에서는 그게 나오는데 다른 시대가 어떻게 들어옵니까? 어디 뭐 타임머신타고 옵니까? 타임머신이 꿈으로 이 시대에 삽입되기 위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애굽에 집어넣었습니다.

애굽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토실토실한 살찐 일곱 황소가 먼저 나와요. 애굽 바로 왕은 신이 났어요, 지금. 세상에, 그것도 한우. 실한 한우 일곱 마리가 먼저 등장했어요. 바로는 기분 좋았죠. 꿈을 꿨는데 그게 무효가 되어버렸어요. 왜 무효가 되었느냐 하면 세상에, 육식을 하는 모양새도 흉하고 더러운 흉측한 소가 등장해서 먹으라는 사료는 안 먹고 곡식은 안 먹고 앞에 있는 싱싱한 소를 잡아먹었어요.

앞에 아무리 좋은 게 있더라도 결국 끝이 안 좋아버리면 앞의 좋은 것이 모조리 다 무효가 되죠. 슬픔과 탄식만 주어지죠. 이게 압축된 인류의 역사입니다. 압축된 인류 역사. 이것이 애굽 나라의 특수성이었어요.

애굽 나라의 특수성이 뭐냐 하면 애굽 나라가 하나님의 언약백성,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만남으로써 통째로, 이걸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통째로 죽어야만 하는 동네로 들추어지는 데에 동원된 나라가 애굽 나라에요. 통째로. 죽음의 저주에요. 죽음의 일반화라 하죠, 죽음의 일반화.

애굽 나라가 어디까지 동원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배태되고 탄생하는 자궁역할을 해요. 애굽이 자궁역할을 한다고요. 애굽 나라가 그 시대에는 최고의 나라였거든요. 그러니까 아버지의 나라죠. 아버지의 나라에서 다른 종족이 탈출하는 형식으로 구원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님의 무대장치였습니다. 세팅된 세트장이에요, 애굽 나라가.

그런데 이스라엘은 출애굽기 4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어요. 내 아들을 내놓아라. 출애굽기 4장을 잠깐 봅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상당히 재미나서 그래요. 출애굽기 4장 22절,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그다음 뭡니까?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했죠.

이게 왜 코미디 같은 이야기냐 하면 아들을 애굽 자기가 붙들고 있는 게 아니고, 주께서 먼저 심어놓았단 말이죠. 심어놓은 분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에요. 이건 주님 쪽에서 지금 시비 거는 거예요. 너 내 아들 놓을래, 안 놓을래? 애굽 입장에서는 이건 생뚱맞은 이야기에요, 도대체.

본인이 와서 심어놓고 내 아들 왜 붙들고 있느냐. 일은 누가 만들었어요? 일은 하나님이 만들어놓고 책임은 누구한테 묻습니까? 애굽한테 묻는 거예요. 안 놓으면 너 죽는다. 이거는 안 놓으면 죽는 게 아니라 죽이기 위한 빌미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언약백성을 애굽에 심어놓은 거예요. 저는 이걸 하나님의 횡포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횡포에요, 이거는.

누가 억울합니까? 애굽 입장에서 억울하기 짝이 없어요. 왜냐하면 애굽 나라는 여호와와 거래할 의사조차 아예 없었어요,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조차도 인정 안하고 거래할 마음이 없는데 괜히 쳐들어와서 시비 걸어놓고, 내 백성 왜 학대하느냐? 뭘 학대해요? 원래 애굽에 속한 사람인데.

그래서 제가 일반화라 했죠. 죽음의 일반화죠. 죽음은 죽은 자를 함부로 내놓지 않습니다. 내놓지 않아요. 이 세상 마귀는 인간을 함부로 풀어주고 그럴 위인이 아닙니다. 악마가 그렇게 착한 분들이 아니에요. 죽음은 꽉 잡는 데에 의미가 있어요.

어제 제가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인간은 뭐냐?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몸이 왜 이렇게 피곤하냐?’ 거기에 인간은 꽉 잡혀있어요. 그게 인간의 삶이에요. 그 외에 다른 것은 없어요. 교회 왔다 가고 복음 들어도 집에 가면 “아이고, 허리야. 허리야.” 여기서 못 벗어난다니까요.

살아있으니까 살고 싶다는 데에서 어떻게 인간이 벗어납니까? 죽었으면 이런 일이 없는데 살아있다는 그 자체에서 인간은 벗어날 수 없어서 안 벗어나려고 신음소리를 내는 거예요. 고통이 어떠니… 힘들다는 말을 한다는 자체가 본인이 지금 나는 죽기 싫다는 뜻이고 살아있는데 그럼 살게 해달라는 그런 요구잖아요.

왜 사는데? 물어보면 답변은 없어요. 그냥 살게 해 달래요. 왜? 몰라요, 몰라. 도대체 인간은 바보에요. 아는 게 없어요, 그냥. 살아있는 게 전부고 20대고 30대고 40대고 대통령이고 국무총리고 뭐 민주당이고 국민의 힘이고 전부다 ‘살아있는 걸 제발 좀 살게 해다오’ 그것밖에 없어요, 그것밖에. 그게 인생이에요. 종교도 마찬가지고 다 그런 겁니다. 살려고 교회 다니고 하잖아요.

애굽 나라의 특수성은 뭐냐? 아무도 내 손아귀에서 못 빠져나간다. 이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애굽 나라는 아무도 못 빠져나간다. 그럼 우리가 여기서 빠져나가면 되지 않느냐? 애굽에서 빠져나간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애굽이 뭔지를 알아야 돼요. 그리고 빠져나간 이스라엘도 이미 애굽화 된 사람들이에요. 애굽에서 죽을래, 광야에서 죽을래? 광야에서 죽었잖아요.

그만큼 끈질깁니다. 이 삶의 욕구는 의식이 아니고 무의식이기 때문에 무의식은 통제의 대상이 안돼요. 이건 순간적으로 충동으로 나오기 때문에 충동은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냥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애굽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그냥 액서사리라고요. 아무 의미 없어요. 살려주면 부처라도 좋아요, 우리는. 그 정도로 우리는 삶에 대해서 죽음의 무서움에 대해서 이미 확정된 운명체입니다. 운명은 우리가 수정이 안 되는 확정된 거예요.

그런데 제가 아까 45페이지에서 ‘구조’라 했죠, 구조. 이걸 구조로 보자는 거예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이걸 이용한 구조로 보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애굽은 최종 구조로 나아갑니다. 애굽 나라도 주께서 이끌어서 최종 구조에 포함시킵니다. 최종 구조에 포함시킨 애굽 나라가 바벨론입니다.

오후 설교 때 했죠? 요한계시록 18장에 천사가 와서 바위를 들고 떨어뜨리듯이(21절) 바벨론 제국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그 작업까지 말씀이 움직인다 했어요. 오후설교 제목을 처음에 ‘흐르는 말씀’으로 했다가 ‘최종 계시’로 바꿨는데요. 움직인다는 말은 물결이에요, 물결. 액체의 특징이 뭐냐 하면 고체가 아니기 때문에 딱 하나를 끄집어내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말씀은 고체가 아니고 물결이거든요. 흐르는 거거든요. 흐른다는 말은 어떤 목적지가 있어서 흘러요.

이게 전도서 1장에 보면 나옵니다(7절,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세상에 모든 것은 그냥 액체라는 거예요. 강물이 흐르듯이 강물이 흘러서 바다에 가듯이 모든 것은 계속해서 가만있지 않고 계속 흘러가고 말씀이 흐르듯이 인생도, 이 시간과 공간도 거기 같이 섞여서 휩쓸려 흘러간다는 겁니다. 팝송 가사에도 그게 있죠. 강물이 바다로 가듯이(Like a river flows surely to the sea). 사랑할 수밖에 없다(Can't Help Falling In Love)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가사에 보면 나와요. 지난 강의에서 그 노래를 했죠.

전도서 1장에 보면 모든 것이 흘러간다. 시간도 흘러가듯이 인생도 흘러간다. 따라서 자기를 고체로 보지 말고 추석 때 제사음식에 있는 포를 쭉쭉 찢듯이 나라는 것도 어떨 때는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도 있고 헤어질 때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있고’, ‘있고’라는 말을 연결해보면 찢으면 쉽게 찢어지게 되어있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일이다.

그걸 미련 갖고 ‘안 된다’ 막 붙들고…. 우리나라에 그런 노래 있어요. 제목이 <얄미운 사람>인데 ‘정 주고 마음 주고 사랑도 줬지만 지금은 남이 되어 떠나가느냐 이별의 아픔일랑 가져가 다오 아 얄미운 사람~’ 이 야속한 사람아. 노래도 답답할 때 불러야 실감이 나죠. 정 주고 마음 주고 다 줬지만 이제는 남이 되면 난 그럼 뭐하냐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강의하고 설교할 때 이야기했죠. 인간은 자기에게 이익이 오면 선이고 자기에게 손실이 오면 악이라고요. 그게 고체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를 고체로 봐서 그러는데 액체가 되어버리면 이것조차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을 향하여 가는 물결이에요. 그 물결에서 나는 출생했고 생일맞이했고 나는 거기서 학교 다녔고… 그것도 물결이에요.

결국 그 시대 사람 되었다가 그 시대 사람과 함께 죽음으로써 소멸되면서 큰 강물은 한쪽으로 합류해서 다 간다. 어디로 가는데? 그걸 모르죠. 어디로 가는지 몰라요. 천국 가서 웃기자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여기서 코미디언이니까 천국 가서도 코미디언이라고? 아니에요. 어디로 가느냐? 십자가로 갑니다. 십자가.

모든 것은 십자가로 흘러가게 되어있어요. 사랑하는 자와 증오하는 자. 사랑해야 될 자와 미워해야 될 자의 그 정보로 모든 것은 흘러가고 마감되는 겁니다. 둘 중 하나에요. 양과 염소, 좋은 고기 나쁜 고기, 넓은 길 좁은 길, 좋은 열매 나쁜 열매. 모든 게 그걸로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 애굽에서 나왔던 것이 이스라엘이잖아요.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 구원을 못 받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못 받아요. 구원을 못 받는데 이 구원 못 받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구원 못 받는다. 왜 구원 못 받을까?’를 따져보면 되거든요. 그런데 바벨론이라는 제국이 널름 이스라엘을 삼켜요.

고기가 겁도 없이 요나 선지자를 삼키듯이. 요나 선지자는 그냥 하나의 인물이 아닙니다. 요나 선지자는 선지자에요. 선지자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사람의 자기 생각이 섞여있는 것이 아니고 주도적인 주님의 계시가 섞여있어요. 말씀이 섞여있고 언약이 섞여있다고요. 그것도 모르고 바벨론 제국이 여호와를 마르둑 신이 이겼다 해서 널름 삼켰어요.

삼켰는데 삼킴을 당한 그 언약이 안에서 폭발을 일으켜버렸어요. 폭발을 일으키니까… 바벨론이 고기라면 고기가 언약을 삼켰잖아요. 그런데 언약이 자체적인 성취성을 통해서 이게 성취가 되고 폭파되니까 바벨론은 어떻게 됩니까? 찢어지겠죠. 그 찢어진 나라가 로마 제국이고 200개국이 넘는 오늘날 우리들, 이 세상이에요. 찢어진 겁니다.

고린도후서 13장에 약해보이지만 의도적으로 약했지만 그 안에 강한 분이 약한 척하면서 그 안에 도사리고 있었죠. 왜냐하면 죽음의 권세, 마귀의 권세가 워낙 세거든요. 이거는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셉니다. 따라서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바깥에 있던 꿈이 요셉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주사로 마약 넣듯이 애굽이라는 단단한 구조에다가 단일체 최고의 제국에 주사기로 밀어 넣듯이 요셉의 꿈을 애굽 나라에 삽입시키죠.

삽입시켜서 나온 결과가 뭐냐? 애굽에서의 탈출이라는 결과물을 냅니다. 애굽에서의 탈출. 이것은 히브리인들도 예상을 못했어요. 애굽을 탈출할 거라고 예상을 못했습니다. 첫째는 이 나라에서 누구도 탈출 못한다. 불가능하다. 이것도 중요하지만 두 번째가 더 중요해요. 굳이 탈출할 이유가 없다.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의 특징이 2번입니다. “교회 나와라.” “나가주지 뭐.” 아내와 더불어 남편이 같이 교회 나와줘요. “교회 나오면서 복음 좀 들어라.” 들어줘요. 반항하지 않고. 그런데 계속, 혹시 교회가면 나중에 죽어서 천국갈 수 있다는 자기가 세상에 살다 천국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오는데 문제는 1번이 문제가 아니고 2번이 문제에요.

왜? 그러니까 천국 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왜 천국 가야돼? 천국 가야될 이유를 모른다니까요. 천국 가야될 이유는 그동안 나를 위해 살다가 이제는 사나죽으나 주를 위해서 사는 동네가 천국이잖아요. 그런데 자기를 위해 사는 건 유지하면서 교회 다니면서 성경공부 한다? 이거는 뭐 지옥가도 마땅한 거죠. 지옥가도 마땅한 거예요. 자기 몸을 이동시켜서 교회까지는 공간 이동했는데 자기로부터 자기가 못 빠져나오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탈출하고 나서 광야에서 다시 애굽을 보라고, 애굽에서 살던 삶과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존재로 광야를 통과케 했었습니다. 저쪽에서는 농사짓고 양 키우고 소 키우며 살았던 것을 이쪽에서는 만나라는 사료를 주면서 그것도 안식일에는 없고요, 사료를 받으면서 살게 했다고요.

둘 중에 어느 삶을 현재 네 몸이 반기느냐를 광야에서 테스트하죠. 40년 동안 시험해보니까 사람들은 어느 쪽이었습니까? 이 광야에 만나가 좋아요, 이런 쪽이었습니까? 컴백 애굽. 컴백 홈! 역시 정력에 좋은 부추, 부추가 정력에 좋은지 처음 알았어요, 부추, 참외, 수박, 난 애굽에 수박 나는지 처음 알았네.

거기서 먹던 음식들은 그 이유가 있어요. 내 몸 좋으라고 먹던 거예요. 내 몸 좋으라고.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바뀌어야 돼요? 이제는 내 몸 좋다는 것은 없어요. 내 몸은 이제 없어요. 이미 어린 양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내 몸은 나를 위한 몸이 아니고 주님의 이름을 보여주기 위한 몸으로 활용되라고 지금 광야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내 몸 좋으라고 하는 그 짓은 안 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4장을 하도 많이 해서 여러분들 다 아시겠지요. 요한복음 4장에서 거기 물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은 물 왜 길러 옵니까? 묻는 내가 잘못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뭘 묻느냐 하면 ‘네가 물을 왜 길러오고…’ 그런 얘기하시는 게 아니고 물하고 전혀 상관없는 동떨어진 주제에 대해 주께서 접근을 하죠.

“남자가 다섯 명인데 너 재주도 좋다, 그 인물로. 야, 이거 대단하네. 그런데 그 다섯 명과도 헤어지고 마지막 연애는 몇 개월 전이었습니까?” 이렇게 묻는 거예요. “다섯 번째 남자와 헤어지고 여섯 번째 남자하고 사귄다면서. 대단해요!” 이런 식으로. 그게 물 긷는 것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질문입니다. 답변해보세요. 물 긷는 것하고 남자친구 사귀는 것하고 무슨 상관있어요?

둘의 공통점이 있다는 거예요. 물 마시는 것도 나를 위하여. 남자친구 사귀는 것도 나를 위하여. 인간은 나를 위해서 나라는 고체에요. 액체 되면 안 돼요. 분해되면 안 돼요. 절대로 해체되면 안 되는 나. 살아있을 동안 단단하게 강화시켜야 될 대상인 나를 위해서 나는 때로는 물도 마시고 때로는 남자도 사귀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여자에게 주께서 훅하고 들어올 때, 나는 나만 아는데… 나만 아는 걸 그 분이 알았단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 바깥쪽이에요, 바깥쪽. 바깥 구조가 내 구조를 삼켜야 구원이 된다는 사실이에요. 바깥 구조. 그러니까 사이즈를 키우는 거예요. 구조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이 말씀해석입니다.

성경해석은 구조의 규모를 주님의 구조로서 키워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그러면 나 위주의 구조는 시답잖은,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너무나 작은, 있다가도 없어질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무 의미 없어요. 바깥 구조를 사마리아 여인에게 소개하죠, 주께서. 이게 뭐라고요? 이게 바로 말씀해석입니다. 말씀 되시는 주님이 자신의 말을 스스로 행동으로 해석해주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그 대목 보면서 어떤 생각 들었어요? ‘야, 사마리아 여인은 좋겠다. 주님 찾아오고.’ 이러잖아요. 현재 우리가 사는 삶이 바깥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 설정되었어요. 그 세팅된 무대에 우리가 하루하루 살고 있어요. 우리가 거기에 대한 감이 있어야 돼요. 주께서 내 일에 개입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어야 돼요. 모든 것이 바깥 구조를 소개하기 위해서 시답잖은 구조에 힘들어하고 어려워하는 나에게 주께서 이렇게 말씀으로 찾아와주신 겁니다. 바깥 구조죠.

그럼 아까 꿈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실한 소 일곱 마리, 그리고 흉측한 소 일곱 마리. 동수(同數)입니다. 같은 수가 있는데 이 실한 소 일곱 마리가 있었나 할 정도로 순식간에 흉측한 소에 의해서 잡아먹혔어요. 이 관점에서 보면 풍년이 들어도 흉년이 얼마나 세게 들었는지 앞에 있는 풍년을 다 갉아먹었어요. 다 소비하고 없어졌어요.

그러면 여기서 대책을 내보세요. 대책이 뭡니까? 꿈을 꾼 요셉이 대책을 내놓잖아요. 이 대책이 바로 언약입니다. 언약이 언약 자기의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큰 구조, 큰 프레임, 큰 틀로서 말씀 안에 그걸 압축시켜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작은 틀 안에서 내가 생각한 나를 위한 틀 안에 있다고 여겼던 것이 말씀해석에 의해서 큰 구조 안에 탈출이라는 것이 무엇이요,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지금 조그만 구멍가게 같은 이 인생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겁니다.

아직까지 중요한 것 이야기 안 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깥 구조를 키웁니다. 키우면 애굽에서 나중에 바벨론까지 가죠. 바벨론까지 가게 되면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실패하잖아요. 구원에 실패해요. 실패한 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예레미야애가에 보면 나와요. ‘하나님은 우리 이스라엘을 버렸다.’ 유튜브 강의 때 나왔어요. 이스라엘을 없애버렸죠.

그러면 이스라엘이 없어졌으니까 이스라엘이 없어지는 것은 언약에 위반되니까 언약대로 이스라엘이 나타나야 되지 않습니까? 나타나기 위해서 사이즈를 키우는 겁니다. 애굽 말고 바벨론을 가져가자는 거예요. 바벨론이 애굽의 완성체로서 공간적으로는 애굽보다 바벨론이에요. 애굽보다 바벨론이 최후 마지막 계시에요. 그럼 공간적으로 마지막 계시가 되려면 모든 나라의 단일체로서 바벨론이 등장해야 되겠죠. 이게 요한계시록 18장 2절에 나왔던 이야기 아닙니까. 공간적으로. 그렇죠?

그럼 시간적으로 마지막 메시아가 어디와 만나야 되느냐 하면 바로 바벨론에 체포된 이스라엘 속에 메시아가 와야 돼요. 구조가 3중 구조죠. 제일 바깥에 누가 있습니까? 제일 바깥에는 하늘나라 있죠. 하나님 나라 있죠. 그다음 그 안에, 이 세상은 뭐로 통합됐습니까? 바벨론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이 바벨론은 신상을 만들었거든요. 신상은 두 개입니까, 세 개입니까? 단 하나죠. 그래서 인류가 아무리 발달해도 하나의 신상의 몸체 형성의 부분일 뿐이지, 바깥에 따로 신상은 없습니다. 바벨론 자체가 짐승이고 네 번째 짐승도 짐승이고 마지막 짐승 로마도 짐승이고. 로마, 마지막 짐승의 특징이 뭐냐? 진흙처럼 다 부서지잖아요.

로마제국이 다 부서져도 이건 로마제국에 속해요. 로마제국의 행정법이 근대사회의 국가법의 기초가 되기 때문에. 기초가 돼요. 로마는 왕이 없어요. 로마는 의회중심입니다. 원로원 중심이에요. 로마가 누구를 이겼어요? 메대, 바사, 헬라, 메카도니아를 이겼죠. 민주주의가 누구를 이겼어요? 왕 제도를 이긴 거예요.

그런데 민주주의가 뭐냐? 마지막 드러난 짐승, 악마의 이빨이에요. 어설픈 이빨은 왕 제도입니다. 조선에 왕이 있었죠. 일본 천황은 상징적 왕이기 때문에 실제 왕이 아니에요. 행정은 선거에서 뽑힌 자가 행정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 모든 나라는 왕 제도가 있어도 형식에 불과해요. 태국도 마찬가지고.

브루나이 같이 개인 나라가 있는데 그건 특수한 경우고. 석유가 많이 나서 국민들에게 전부다 용돈 줘서 자기 나라 백성 만드는 브루나이라는 나라가 있어요. 국민소득이 전 세계에서 5위 안에 드는 그 나라는 세금도 없고 애들 유학까지 나라에서 돈 다 대주는데 인구가 40만이에요. 일은 누가 하는가? 외국에서 용역 불러다가 일하는 나라. 절대적으로 이슬람 국가에요.

그런 특수한 나라 말고 이 세상 모든 나라는 대중, 민중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라에요. 민주주의 국가에요. 그게 짐승의 마지막 속성을 내놓는 겁니다, 민주주의가. 그래서 어느 나라도 민주주의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마귀의 발톱에서 벗어나질 못해요.

그럼 성도는 어디에 속합니까? 성도한테는 왕이 있어요. 그 왕이 누굽니까? 킹 오브 킹스. 왕 중의 왕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고 우리는 주님의 백성이고 신하잖아요. 그러니까 너희는 사람 말을 들으면 안돼요. 왕이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에 그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목자고 너희는 양이고 나의 백성이고. 끝까지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에 다 살려내는 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잖아요.

그게 어디에 박힙니까? 바로 바벨론 제국, 짐승의 나라에 그걸 박아 넣은 거예요. 그럼 공간적으로 나라는 하나로 통합되었죠, 바벨론으로. 시간적으로는 뭡니까?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마지막 분이 오셨기 때문에, 포도원 비유에서. 상속자가 오니까 죽여버리자 하는 마지막 시대 이야기를 포도원으로 비유했잖아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1장에 나오잖아요(33-46). 그러면 시간적으로 뭐가 되냐? 종말이 돼요. 종말이 된다고요.

그럼 구조적으로 보면 뭐냐? 시간적으로 종말, 구조적으로 종말을 더 넓은 바깥 구조로서 종말의 구조로서 기존의 인간 구조, 짐승의 구조를 덮을 때 세례 요한은 말합니다. “회개하라.” 쉽게 말해서 “심판이 온다. 심판의 때가 왔다. 가까이 왔다. 너희들이 하나님 천국 백성이라고? 돌멩이가 너보다 낫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천국 열매 없으면 너희들은 불에 사르든지 안 그러면 성령을 받든지 둘 중 하나다.” 세례 요한은 과감하게 외쳤습니다.

그 외침을 이제 누가 할 차례냐? 오늘날 성도들이 그걸 해야 돼요. 그러면 우리가 대전역 앞에서 뭐 나눠주고 성심당 앞에서 뭐 나눠주고 외쳐야 되느냐? 그러면 안돼요. 왜냐하면 개돼지한테 전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개돼지한테 입 다물라.

이 말은 이미 구조 안에 놓여있으면 우리로 하여금 항상 이 원칙에 준하게 합니다. 끝으로 이게 중요하지 싶은데요. 광주강의에서 했습니다만, 말씀해석은 반드시 잃었다가 얻는 것이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어요. 탕자, 동전, 한 마리의 양 이 내용이 포함되지 아니하면 마치 말씀을 내가 소유하는 소유자 행세를 하기 때문에 이거는 안돼요.

내가 다른 인간이 된다는 것은 늘 잃었다가 얻는 그 작용이 내 안에서 그 바깥 구조가 반복이 될 때, 반복되는 그 세팅된 무대에서 활용될 때 그게 바로 다른 인간입니다. 다른 인간은 내가 소유할 수가 없어요. 다른 인간은 주님이 소유해서 주님 하고 싶은 대로 마구마구 다루시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에 의하면 어떤 때가 가장 위험한 때인가? 바로 누가복음 12장에 이런 말씀이 있죠. 농부가 농사가 잘 되니까 창고를 짓죠. 창고를 크게 짓고 하는 말이 뭡니까? 본인이 본인보고 칭찬하는 거예요. “내 영혼아, 이제 안심해라. 이제 굶어죽을 일은 없다.”하니까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뭐라고 합니까? “오후 1시 47분에 네 영혼 데려가면 저 창고 지은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는가? 내가 시간 딱 봐서 데려갈 거야, 하면 저건 누구 것이 되겠는가?”

이게 뭐냐 하면 지옥 가고 천국 가고 문제가 아니고 ‘잃었다가 얻었다는 이 자체가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기 때문에 이런 사태의 반복이 불가능함으로 올 때 이게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아라.’ 이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에요.

우리는 뭘 가지면 강해지려 해요. “붙자. 누가 복음 아는가 한번 붙자.” 전화해서 “너 복음 모르지? 몰라, 하여튼 이건.” 그거 시합해서 뭐 할 건데? 그거 이겨서 뭐 할 건데요? 건전하고 괜찮은 구원받은 나를 내가 소유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안 잃어버린 상태잖아요. 우리한테서 손을 놓고 주께 맡기면 주께서 시소를 태워요. 비싼 돈 주고 롤러코스터 탈 필요 없어요. 매일 삶이 잃었다가 얻고, 잃었다가 얻고. 이런 삶의 반복, 이게 바로 새로운 존재, 새로운 피조물로 주께서 다루어주시는 구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깥 구조가 우리가 생각한 구조보다 더 넓고 더 촘촘하고 더 깊숙이 개입되어 있음을 우리가 진즉에 알아야 되는데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어느 한 순간도 모든 것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성취의 열매인 것을 이제는 놓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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