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37강) 신명기16:9(마귀의 허세) 20251229a(강의: 이근호 목사)
신명기 하겠습니다. 신명기 16장 9절부터 11절 "칠 주를 계수할지니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 주를 계수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찌니라." 라고 되어 있어요.
스케줄을 누가 짰느냐 하면은 주님 쪽에서 짜서 지시를 내립니다. 그 스케줄이라고 하는 것은 바닥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시간이 있어야 돼요. 시간은 뭐냐? 변화입니다. 시간은 변화예요. 그 변화를 계산한 사람, 원칙을 세운 사람이 뉴턴이에요. 시간의 변화는 이 대자연의 힘과 관련이 있다는 겁니다. 변화한다는 것, 여기서 시간이 생겨요.
변화가 없으면 시간이 없어요. 못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시간 자체가 없어요. 맞죠? 우주도 그렇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져서 16일 동안 갇혀 있었던 사람이 본인은 ‘한 이틀 지났나?’ 이렇게 이야기 한 이유가, 건물이 무너져서 자기가 갇힌 곳에 아무 변화가 없으면, 심리적으로 시간이 늦어지거나, 거의 없거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수학 시험에 몰두하게 되면 ‘벌써 끝났나?’하면서 감을 잡지 못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과학자의 문제 또는 우리 인간들의 문제인데, 이 변화를 측정하는 '나', 나도 이 변화와 똑같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이걸 놓치는 거예요. 내가 변화를 보고 측정해서 거기서 법칙과 원리를 만드는 것, 이것에서 나를 의도적으로 뺀 겁니다. 빼면 뭐냐? 이건 반칙이 돼요.
방금 제가 과학 이야기했잖아요. 종교도 마찬가지고, 철학도 물론 마찬가지고, 종교, 과학을 하면서 자꾸 누굴 빼요? 나를 뺀다고요, 나. 몸까지 합치면 '나'가 되고, 몸은 제쳐두고 ‘나’라 하면 이게 뭐가 되냐 하면 '자아'가 되죠. 보통 종교에서는 영혼이라 하는데 영혼은 너무 귀신 냄새가 나서 싫고, 현실적으로는 자아예요.
자아를 일방적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건 뭐 반칙이죠. 그래서 진리가 나올 수가 없어요. 나를 고려해야죠. 내가 달라지고 있다. 내가 어디로 가느냐? 그거는 주님의 스케줄에 따라서 우리는, 이 자아가 끌려가요. 어디로 끌려가는가? 첫 번째로 나오는 중요한 겁니다. 자아라고 할게요. ‘나’ 대신에. 이 자아는 어디로 끌려가는가?
주님의 스케줄에 따라서 자아는 해체됩니다. 자아는 해체돼요. 자아가 해체될 이유는 이 자아가 없어야 되는데 생기게 된 이유가, 마귀 때문에, 악마 때문에 자아가 주어졌고, 이 자아를 인간이 소유할 수가 없어요. 소유 못 하고 자아가 인간의 몸을 통제하고 지배를 해버린 겁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 성경 구절 우선 한 번 찾아볼게요. 요거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금 대단히 중요한데 어디를 보느냐 하면요, 창세기 3장 14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첫 번째 뱀에게 먼저 저주를 했어요. 첫 번째 저주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에요. 첫 번째 저주는 인간 저주가 우선이 아니고 악마에 대한 저주가 순서상 우선입니다.
마귀를 저주함으로써 마귀에 종속된 인간 저주는 어디에서 흘러나온 저주다? 마귀에게 확정된 저주가 인간에게 들어오는 것인데, 그 들어오는 통로가 자아입니다, 나예요, 나. 내가 출발점이 아니라는 말을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출발점이 아니에요. 그런데 악마는 모든 생각의 출발점이 악마 자신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이미 영원한 저주의 형벌, 지옥에 집어넣기 위해서 주께서 악마라는 피조물에게 이미 일을 벌였다는 거예요. 유다서에 보면 나옵니다. 어두운 음부에 가두기 위해서 악마를 만들었다고요.(유1:6-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하나님께서 지옥을 만드신 이유는 악마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이 말이에요. 지옥은 만들어 놓고 누굴 집어넣는 게 아니고, 누구 꼭 집어서 "너, 너, 너" 네가 있어야 지옥이 지옥답게 되고 저주가 저주답게 되기 위해서, 주께서는 악마라는 피조물을 사용하신 겁니다. 이걸 누가 아느냐? 마귀가 알아요.
그런데 마귀 입장은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지는 이미 확정됐죠. 변동이 없어요, 자기 운명은. 귀신이 예수님 만났을 때, 그 귀신이 스스로 고백했어요. "아직 우리가 망할 때가 안 됐는데 왜 벌써 오십니까?" 그리고 마귀 쪽에서 고백을 했어요. "예수여, 당신은 나와 상관없잖아요."
아...이 발언요, 이 발언이 49제 지내는 일가친척 입에서 막 나와요. "너나 교회 가, 나는 이미 종교 있어. 이 불심 깊은 집안 네가 뻔히 알면서도 배신은 네 쪽에서 했지, 우리는 전통적으로 우리 불도를 지켰다" 이렇게 말한단 말이죠. 그 말을 줄이면 뭡니까? "예수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는 당신하고 볼 일 없다.’는 거예요. ‘나는 당신과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상관이 없는 그에게 만약에 자기 인생을 책임져줄 것 같은 넉넉한 집안이 후원을 해주면서 교회를 다니라고 권했다 칩시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게 되면, 그 사람은 교회 다니는 귀신이 되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 귀신이 되니까 그 속에 뭐가 있느냐? 악마의 근원적인 본성이 교회에서 발휘되고 있습니다.
그걸 여섯 글자로 하면, ‘신에 대한 증오’. “내 인생 조진 거 다 당신 때문이다.” 증오. 악마는 확정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4절에서 악마는 이미 저주 받기로 확정이 된 상태에서 저주받은 악마 입장을 생각해보세요. 충분히 악마 심정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악마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더러운 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악마라면 하나님이나 예수님께 뭐라고 자기 분노를 표현하겠습니까? "당신 때문에 나 조졌다. 당신이 뭔데 나를 심판해?" ‘당신이 뭔데 나를 심판해?’라는 말은 오히려 주님을 정확하게 증거합니다. 자아인 내가 자아인 나를 심판할 수가 없고, 심판주는 따로 있어서 그쪽 결정에 우리가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거죠. 자인하는 겁니다.
여러분, 자유는 확정되어서 오는 거예요. 확정적이에요. 결정된 데에서 자유가 옵니다. 변동과 변화가 삭제될 때 자유가 와요. 오전에 구름이 껴서 비가 약간 왔다고요, 지금은 또 맑다고요. 이렇게 자연은 변화가 심하잖아요? 구름 낄 때도 있고, 그럼 자유는 뭐냐? 아예 그 변화 요소가 다 삭제되고 결정된 것을 바로 직통으로 바라볼 때 그때, 자유입니다. "아, 끝났구나. 다 이루었다." 하는 말이 자유예요. "끝났네. 내 행동이 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게 아니었네."
내가 내 결정을 하겠다는 건 자아예요. 이건 마귀의 품성이고 마귀의 본질입니다. 지금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거기에 놀아나고 있어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이 성당 가고 교회 갈 수가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내가 결정 안 하면 달리 결정할 자가 없다는 것, 어쩔 수 없이 내 운명을 내가 개척해야 될 그런 부담을 지고 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불쌍하기 짝이 없어요. 자기 말고는 믿을 사람이 없으니까요.
보통 믿는다고 하잖아요? 이미 인간은 믿어요. 누굴 믿습니까? 나 외에는 믿을 수가 없어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지옥 가도, 지옥 갔을 때 위로할 자는 나밖에 없어요. 내 곁에 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는 나밖에 없어요. 이런 뜻입니다. "감히 나를 심판해? 좋아, 그러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게. 빠이빠이다."
그것이 인간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자아는 자아의 본성을 티 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 친척 가운데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자기의 신앙관을 나타낼 때 마귀가 교회 갔을 때 어떤 고백을 하면서 자기를 사수하느냐를 그대로 다 보여주는 거예요. "내가 이 정도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믿고 소망합니다. 됐지요?“ 끝에 이럽니다. ”이러면 됐잖아. 해달라는 거 다 해줬잖아. 이러면 됐잖아."
그런데 주님의 스케줄은 율법이 투입되면서 주님의 스케줄대로 되는데, 성도한테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자아'가 없어져 버려요. 너와 나의 관계도 자아가 있을 때나 성립되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면, 자아는 나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타인'이란, 내가 답답할 때 찾는 대화 상대가 타인이에요. 이게 없으면 개라도 키우든지 하죠.
그래서 개를 개로 보지 않고 사람처럼 다루는 이유가, 답답할 때 해소할 곳이 없어서 그래요. 이거는 종교하고 상관없어요. 답답하고 아쉬우면 누구나 찾아요. 그런데 찾으려고 하니까 모양새가 빠진다, 위신이 안 선다, 그러면 좋게 말하는 게 아니고, 욕을 해버리죠. "자식이 돼가지고 전화 한 통 없다. 내 너 키울 때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제 와서 부모한테 이렇게 섭섭하게 대하다니." 이러면서 하루 24시간 계속 보내는 거죠.
그러다 아들, 며느리가 "어머님 잘 계십니까?" 하고 양손에 선물 보따리 들고 오면 앞에 욕했던 거 전부 다 무효. "아이고, 바쁜데 왜 왔냐, 전화만 하면 되지." 이런 식으로요. 방금 욕했던 건 다 취소에요. 방금 욕했던 건 옆에 강아지가 다 듣고 있어요. 앵무새 키우면 안 돼요. 내 본심을 상황 파악 못하고 다 이야기해버리기 때문에 안 돼요.
그러니까 율법이 투입되는 것은 마지막에 저 자아라는 게 성립이 안 되면, 자아가 없으면 뭐가 없어요? 타인이 없지요. 근데 이 타인이라는 것은 남 좋으라고 있는 게 아니고, 주인인 자아가 기분 좋으라고 타인을 투입하는 거거든요. 심지어 안 찾아오면 돈을 들여서라도 타인을 만들어요.
대표적인 게 술친구 같은 거. 술친구는 돈 떨어지면 끝나는 겁니다. 기마이 쓰고(선심쓴다, 한 턱 낸다) 하는 건 내 자아를 외롭지 않게 너희들이 주변에 좀 깔아달라는 말이거든요. 일종의 자기 자신을 조선시대 왕처럼, 왕 놀이하고 있는 거예요. 돈이 있으면 왕 노릇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자아가 없어지면 타인이 없지요.
그래서 율법을 압축하면 뭐냐 하면, “네 이웃을” 그 다음에? 하나님 사랑하는 것 빼놓고, 두 번째가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데 이것을 왜 할 수 없느냐 하면, 이웃이라는 것은 나에게서 출발한 거예요. 그래서 이 말씀에 의하면, 나에게서 출발한 것은 반드시 어디로 소환되느냐 하면, 내게 유리한 쪽으로 소환되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웃은 아무리 사랑해도 내 사랑의 한도를 못 넘습니다. 율법은 바로 그런 식으로 ‘네가 율법을 지킬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울법을 가지고 지적해 주는 거예요. 하나님 사랑은 기본적으로 안 되고, 무슨 몸과 마음과 목숨을 다해 사랑합니까? 목숨 버리면 소용이 없는데. 목숨을 버리기까지 신을 사랑한다면, 신이 주시는 대가는 뭐냐? 아니, 내가 없어졌는데 대가가 나한테 돌아올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대가가 돌아오지 않는 위치, 신분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주인이 식사할 때 본인은 서 있든지, 밥을 안 주든지 관계없이 주인을 위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종, 또는 성경에 나오는 다른 말로 하면 '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주인의 상에서는 아들도 같이 먹어요. 주인과 아들이 같이 밥상머리 하고 있는, 거기서 떨어져서 갖다 버리는 쓰레기라도 혹시나 나한테 떨어져서 건질 수 있을까봐서 딱 자리 잡고 있는 개, 개는 어떤 경우라도 떨어지는 것만 주워 먹어도 감지덕지해야지, 감히 개가 주인 상 옆에서 "우리 겸상합시다." 하면 호되게 맞아야 돼요. “네 위치 지켜!”
종의 위치에 가지 않는 한 구원은 없습니다. 아들은 종의 위치에서 양자로, 있을 수 없는 호적 정리에서 등장한 거예요. 호적 정리가 되려면 근거가 있어야 되잖아요. 종이 아들 되는 근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있던 자리가 마귀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를 만약 아들이라 한다면, 악마도 천국에 넣어줘야 돼요. 그게 여호와의 증인이에요. 사랑의 하나님이 누구를 배제하면 그건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지만, 종은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게 시형제 결혼법이라는 율법의 정신이에요. 아들이 없으면 아들 없는 거예요. 없는 아들이 새로 생기는 것은 새로운 여자가 생겨서 혼인을 해서 그것도 여자가 생기면 안 되고, 잉태치 못한 자가 잉태를 해야 아들이라는 명분 자리가 생깁니다.
이게 갈라디아서 4장에 나와요. 아들 없는 자가 천국 가고, 아들 있는 자는 지옥 가고, 잉태치 못한 자가 구원을 받는다. 이게 뭐냐 하면, 예수님이 아들 자리에 하늘나라 호적상 근거를 마련해 주는 겁니다. 제가 호적상이란 말을 했잖아요.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다른 호적으로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느니라.”(행4:12)
왜, 그 이름이 호적이 되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가 확정된 아버지고, 확정된 아들이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 사이가 호적이에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 그걸 제가 어제 천문 단위, 영적 단위라 했잖아요. 정확하게는 언약이죠. 언약이 바로 하나의 단위를 구성해서 그 구역, 곽이 짜인, 구역에 짜인 아버지 자리에 아버지, 아들 자리에 아들 오게 되면 그 곽 자체를 딱 들어버리면 그게 바로 구원되거든요, 그 관계가.
그래서 그 밖에 있는 사람은 그 아들 자리가 되지 아니하면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못 부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는 자는 그건 저 지옥 갈 사람들이 다 그렇게 불러요. 그런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누가 와야 되느냐 하면, 보통 성령이라 하잖아요? 정확히 이야기합시다. 아들의 영이 와야 돼요, 아들의 영이.
아들의 영이 안 오면 할 수 없어요. 그런데 오게 되면 이거는 신기한 일이고 놀라운 일, 기적적인 일이에요. 성령이 와야 아버지라 부른다는 말은 성령 오지 않으면 뭐가 된다?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아들이 될 수 없어요. 이미 확정 난 거예요. 그냥 종입니다. 그 대목을 여러분들이 아는 대목이니까 뭐 찾지 맙시다.
로마서 8장에 있잖아요.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5) 이렇게 돼 있다, 이 말이죠. 따라서 아들 같으면,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 만약에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들어오게 되면 예수님께 일어났던 모든 경우가 동일하게 똑같이 일어납니다.
“그 아들의 영광, 아들의 영광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당했던 고난을 너도 함께 받아야 되느니라. 섭섭하냐?” 섭섭해 하실 필요 없어요. 왜? 장차 올 영광은 지금의 고난과 족히, 족히 비교가 안 돼요. 비교가 안 되고, 성경에서는 이렇게 나와요.
요한복음 16장, 여자가 해산할 때 상당히 힘들고 아파도, 해산하고 난 뒤에는...16장 20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반드시 무슨 코스를 거쳐야 돼요? 애통이죠.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근심이 도리어 뭐가 돼요? 기쁨이죠. 그 기쁨 바닥에 뭐가 있어야 돼요? 근심이 있어야지, 근심 빠진 기쁨은 이거는 가짜 기쁨이에요.
근심하면서 무엇의 무능력을 느끼는가? 자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걸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구원이 내 일이 아니라 누구 일이다?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책임감 자체가 뭐 책임질 수도 없어요, 능력이 없으니까. 우리가 구원 될 능력이 애초부터 안 되는 신분이었으니까 절망할 것도 없지요.
뭐 기대해 볼만해야 절망하겠는데, 우리는 기대하지 말라고 태어났거든요. 천국 같은 건 아예 우리한테는 허용도 안 되고 그럴 권한도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가지고 예수님을 통해서 근심하는 현상이 일어나면서, 그 다음에 그 근심하는 이유는 뭐냐? 주의 나라 다 좋은데, 문제는 들어갈 수 있는 역량이라든지 그러한 재주가 나한테 없다 하지 말고, 자아한테는 없는 거예요, 자아한테는.
그런데 기쁨이 되고, 21,22절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빼앗을 자가 없다는 말은 네가 나에 대한 기쁨을 네 능력으로, 네 수완으로 유지하려는 쓸데없는 짓은 할 수가 없다는 거, 이게 왜냐하면 자아에 관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관리하고 내가 잘 갖춰야 될 문제가 아니라, 시작이나 끝이 다 주님의 아버지와 아들의 일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냥 우리에게는 들이닥친 것뿐입니다.
자, 그렇다면 다시 창세기 3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창세기 3장 14절에서 악마한테 저주를 내리죠. 그러면 악마의 저주가 뭐냐 하면 창세기 3장 14절에 의하면 ‘땅의 밀착성 삶’입니다. 땅의 밀착성 삶, 갈수록 땅에 쫙 들어붙어 있는 삶, 그게 극단화되면 뭐냐? 너는 흙이니 어디로 돌아간다? 흙으로 귀환된다, 또는 흡수 통합된다.
그러니 인간에게는 죽음은 없습니다. 죽음은 없고 뭐가 있느냐? 사라짐이에요. 문제는 아래쪽으로, 우리가 익숙했던 삶, 땅 쪽으로 사라지느냐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전혀 예상도 못한 천국 쪽으로 사라지느냐 그겁니다. 땅으로 사라지게 되면, 그 땅에 사라지면 땅은 누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냐? 악마가 먼저 와서 기다려요.
악마의 종으로 태어나서 악마가 시킨 대로 하는 너희 패거리끼리 영원토록 지옥에서 영원한 저주를 받아라. 그러니 이 자아는 없어지는 게 아니고 본래의 자리, 누구의 종의 자리로 자아가 주어지는 거예요. 천국 가도 우리 자아가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건 불교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불교는 뭐라 하냐 하면, 인간은 기억이기 때문에 기억이 사라지면 자아도 사라진다, 이렇게 해가지고 자기의 마음의 고통을, 번민을 여기서 잠재우려고 해소시키려는 하나의 수완이죠. 그 방법이 불교 철학입니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에요. 모든 고통이 나한테 오니까 나만 없어지면 모든 괴로움과 슬픔과 아픔도 없어지지 않겠느냐, 이렇게 되죠.
그런데 성경은 슬픔이 없으면 안 돼요. 잃어버림이 없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그것과 연관해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죄를 안 지으면 안 돼요. 죄가 있어 줘야 의가 되는, 그 의가 되는 그 권한은 내 선에서 넘어섰다는 것을 알거든요.
천국 가면 자아가 없어지는 게 아니고 주님의 종으로서 천국에서 주인님이 누리는 것을 같이 누리면서 시형제 결혼법에 의해서, 이거는 자식이 될 수도, 아들, 형제가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시형제 결혼법에 의해서 맏아들로 자처하는 동시에 맏아들이니까, 맏이가 있으니까 그 다음에 누가 있단 말이죠? 둘째 셋째 있겠지요. 양자들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주께서 친히 마련한, 자신이 맏아들로 들어섬으로서 없었던 형제, 주님의 형제 자리가 생기면서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 바로 전에 악마의 종, 죄의 저주의 종이 되었던 우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죄 사함을 통해서 그 자리를, 예수님과 연장된, 연속된 주님의 세계 안에 이렇게 포함, 합류가 되는 겁니다. 합류가 되죠.
요건 좀 억지스러운 예인데요, 좀 억지스러워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제 아이 다 키우고 "나도 뭐 조금만 사업 한 번 해 볼까?" 이래 가지고 만약에 대전에 큰 백화점, 신세계 백화점에 들어갔다고 칩시다. ‘나는 저 지하의 분식집 하나 챙겨 볼까?’ 했다고 칩시다.
만약에 신세계 백화점이 불나면 같이 불나죠? 신세계가 멀쩡하다면 내 분식집도 같이 있죠? 그러면 신세계 백화점에 종속된 것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 관계는 자유가 돼요, 자유가. 왜? 어디 가도 나부터 출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소속이, 자아가 있는데, 이 자아 소속이 자아부터 출발하지 않아요.
<싱싱 고향별곡>이라고 대구 지방 방송의 시골 노인네들 이야기 하는 프로인데, 지난 토요일에 아주 특이한 사람이 나왔어요. 보통 이야기하면 누구 자랑하냐? 자식 자랑해요. 나이 많은 사람들이 보통 "우리 애가 서울 가서요, 용돈 보내주고 자주 전화 오고, 또 우리 애는 국문학 박사고..“ 하면서.
그런데 이번에 나온 80 넘은 어머님은 누구를 자랑하느냐 하면 시동생 자랑을 해요. 사회자가 시동생 말고 아들 자랑하라고 해도 무조건 시동생이에요. 시동생이 자기 키운다고 고생한 거 알아줘가지고 지금도 매달 돈을 보내준대요.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둘이. 그러면서 시동생 자랑을 하는 거예요. 자식 이야기는 묻지도 않고, 나중에 물어도 이야기 안 해요. 그저 그 시동생 이야기를 해요.
첫 번째 이유가 뭐냐? 남편이 무능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 무능함을 시동생이 채워줬기 때문에 이거는 시동생을 남편처럼 섬기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할머니의 자아는 어디에 종속되어 있습니까? 시동생이죠. 이 할머니는 누구의 증인? 시동생의 증인, 무슨 영을 받았다? 시동생의 영을 받은 거예요. 인생은 시동생이 알아서 다 해줘요.
평소에 그런 약속을 했겠지요. "형님 나이가 이제 팔십 아홉인데, 돌아가시면 우리가 책임져 줄게." “고맙다, 시동생아” 이렇게 된 거예요. 타인은 내게 필요한 거예요, 내게. 타인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나를 사랑하는 보조 배경이 타인이에요. 만약에 나한테 돈 떨어졌다, 그럼 돈 떨어진 인간은 쓰레기거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게 욕이 아니에요.
그럼 남이 돈 떨어진 인간을 부담 느끼겠습니까, 안 느끼겠습니까? 느끼죠. 밀어내죠. "어디 짐이 나한테 찾아오나, 우리 좀 자주 만나지 맙시다." 하면서 밀어낸단 말이죠. 뭐 ‘좋았습니다, 훌륭합니다.’ 하는 건 나중 이야기이고, 일단 돈 떨어지면 사람 아니에요. 끝까지 아파트 하나라도 버티고 있어야 효도 받는 겁니다.
그 돈 많은 시동생한테 나중에 나이 많아가지고 요양병원 갈 돈이라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시동생을 주로 섬기고, 자기 자아는 끽소리 내지 말고 기어 들어가야 되거든요. 율법은 이룰 수가 없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주님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이미 마귀의 종, 마귀의 심보, 마귀의 심정이 인간 속에 들어왔지요. 종이니까.
이걸 자꾸 제 얘기라 생각하지 마시고요,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죄의 종이었더니’, 또는 ‘죄가 왕 노릇 하고 있으니’ 우리는 신하죠. 죄를 쥐고 있는 것은, 시작은 저주는 마귀부터 했으니까 마귀가 왕이잖아요. 왕은 반드시 누가 필요해요? 신하가 필요하잖아요. 그 졸개가 누굽니까? 인간이잖아요.
그 관계가 뭐냐? 선악 체제 관계예요. 어제 낮 설교에서도 했는데, 잠깐만 설명하겠습니다. 선악 체계는 ‘나에게는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다.’ 이런 의식, 좋은 면 나쁜 면 둘 다 있으니까 결론적으로 ‘나는 나를 버리지 않겠다.’ 왜? 좋은 면이 있으니까. 내가 아주 나쁜 짓만 한 건 아니니까. 좋은 것을 내가 왜 버려? 나는 좋은데. 그리고 내가 나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그 점도 얼마나 장점으로 추가가 되겠어요? 이게 선악 체계예요. 이게 선악 체계니까 이 선악 체계가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상황과 사건에 선악 체계가 다 덮는 거예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고 했는데, 그걸 오히려 써먹고 있어요. 다 덮어버리고 세밀한 데에. ‘거실 등을 끄는 게 놓을까요, 켜는 게 좋을까요?’ 이것도 선악체계 아닙니까? 매사에 있어서 내가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이 있다는 걸 과시하고, 그걸로 도배를 하는 거예요. 식사 준비한다든지, 물건 고를 때 전부 다 좋은 면, 나쁜 면, 다시 말해서 ‘이 좋은 면이 나한테 어떤 유익한 미래로, 나한테 복으로 돌아올 것이냐’를 계산하면서 행동하는 거, 이게 바로 선악 체계입니다. 그 선악 체계가 누구의 본심이라고요? 악마의 본심, 마귀의 본심이죠.
이것은 하나님이 심판을 해야 되는데, 마귀가 그 선악 체제 정보를 빼돌려가지고 "네 심판은 네가 알아서 하면 돼. 하나님이 아는 선악 체계를 네가 알고 있으니까 굳이 누구로부터 심판받을 필요 없고, 네가 알아서 행동하면 돼." 이게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 아닙니까? 그럴 때 뭐가 높아진다? 자아의 주체성이 높아지겠죠.
선악체계에 대해서 이미 마귀의 본성이 주어졌단 말이죠. 그러면 창세기 3장 15절에 마귀만 있습니까? 또, 여자의 후손이 있지요.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기존 노선의 자손이 아니란 말이에요. 이 말은 주께서 기존 노선을 부정하는 거예요. 남자 계통의 자식들을 안 받는다고 부정해 버리는 겁니다.
여자의 자손이 등장해서 생명나무의 원칙을 거기다가 적용합니다. 하려면 먼저 뭐부터 해야 되느냐? 이 자아가 마귀 종이잖아요. 자아에 대한 해체를 해버리는 거예요. 해체하는 방법은 7입니다. 칠칠절, 7. 오늘 본문 신명기 16장 앞에 보면 안식일이 며칠마다 돌아옵니까? 7. 왜 자꾸 주님의 스케줄에 의해서 율법의 7을 활용하고 적용시키는가?
7을 적용해 버리면 7일 만에 한 창조가 어디로 돌아가느냐, 환원되느냐 하면, 혼돈으로 돌아가요. 혼돈. 왜? 주님이 창조할 때 어디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혼돈에다가 창조, 또는 질서, 또는 창조질서라 할 때, 중간에 뭐를 집어넣었습니까?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을 집어넣어서 혼돈에서 질서가 됐죠.
그러면, 세상이 혼돈 쪽으로 간다는 말은 뭐가 빠졌다? 말씀을 품어야 될 질서가 말씀을 배격해 버린 거예요. 따먹지 말라 했는데 따먹어 버렸어요. 그러면 이 질서는 뭐로 환원됩니까? 혼돈으로 환원되는 거예요. 혼돈은 무질서가 아니고, 악마와 단짝이 된 것이 혼돈이에요.
자, 그럼 그 순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혼돈부터 출발해 봅시다. 인간은 이미 혼돈되었습니다. 혼돈부터 출발하게 되면, 1번, 2번, 3번 순서로 질서가 잡힙니다. 1번은 뭐냐 하면, 혼돈에 있을 때는 악마의 종이라 했지요? 그럼 악마의 종이 뭐가 주인이 되느냐? 내가 나한테 주인이 되는 거예요. 주인이 하는 일은 뭐냐? 측정이에요. 측정 다음에 판단하게 되어 있어요.
측정하고 판단하는 거, 아까 뭐라고 했어요? "하나님 보여주면 믿겠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 나왔죠. 이게 뭐냐? 측정할 때 자아는 절대자가 돼요. 판단자가 되고, 심판자가 돼요. 측정, 측량할 때, 이걸 뭐라 하느냐? 이걸 과학이라 합니다. 과학의 근거는 뭐냐? 과학은 합리성과 이성이에요. 판단하는 이성. 합리성의 판단, 이게 과학입니다.
과학에서 7이라는 것은 의미 있습니까, 없습니까? 의미 없어요. 과학에서는 60분이에요. 왜 60분, 60초냐? 자연 현상, 천문학, 과학이 천문학에서 나왔으니까 그것이 농사짓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12, 열두 달. 점점 과학이 발달하니까 자연 세계에서 농사짓는데, 고기 잡는데 필요한 숫자들을 발명했습니다.
처음에는 1부터 10까지, 12345678910 그리고 더 발달하다보니까 앞에 0이 하나 더 붙었어요. 0보다 더 발달하니까 현재는 허수 i가 있습니다. 제곱해서 마이너스가 나온다. 이건 있을 수가 없지요. 모든 수를 제곱하면 플러스가 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2를 제곱하면 –4가 아니라 +4예요. 그런데 제곱했는데 마이너스가 나온다?
이건 현실에선 있을 수 없지만, 이 허수가 없으면 오늘날 로켓을 쏠 수가 없고, 컴퓨터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현재의 신약(新藥), 신제품이 만들어지지가 않습니다. 모든 과학은 이제는 없는 것도 내 머릿속 이성에서, 자아에서 만들어내게 되면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밀착형 생활에서 편리하고 유리한 게 만들어진다, 이게 과학입니다.
그런데 이 자연세계를 측정하는 과학에다 의미를 보태는 것이 인문과학입니다. 철학, 종교, 신학, 법학, 언어학, 그리고 예술, 인문학, 이 모든 것은 의미를 갖다 붙이면 이렇게 돼요. 측정된 것에 의미를 갖다 붙이면. 그런데 과학적으로 측정된 것, 곧 진리에다가 의미를 부여할 때, 깊은 허무에 빠져요. 의미를 부여하는 수단이 언어거든요.
그래서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수많은 언어를 생산해내고, 온갖 용어, 테토녀(테스토스테론을 갖고 있는 여자, 남자 같은 여자, 드센 여자) 그런 용어도 막 사용하고, 자꾸 만들어 내는 이유가 점점 더 허무하기 때문에 그래요. 허무함의 늪에 빠지는 겁니다. 땅은 있고 자연은 있는데, 그 땅과 자연에 사는 나는 자연에 없는 의미를 내가 만들어 냈잖아요.
내가 만든 의미가 자연 현상과 자꾸 어긋나니까 허무함을 느끼는 거예요. 자연을 정복하려는, 정복했다고 우기는 나는 나의 허무를 정복 못 한 입장에 있다, 이 말입니다. 공부하고 돈 벌고, 친구도 많고 제 하고 싶은 거, 파크골프부터 해서 하고 싶은 거, 놀 거 다 해봐도 왜 자꾸 모든 게 허무하지? 친구와 웃을 때는 그렇게 즐거웠는데, 돌아서면 헛되고, 헛되고, 허무한 거예요. 이게 언어의 허무성입니다.
첫 번째, 과학은 측량하죠. 두 번째는 언어로 분석해요. 누구 분석? 나를 분석해요. 분석하는데, 분석하는 자체가 정신병이 되어가지고 더 허무해져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혼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드디어 말씀이 투입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니라.(요1:14)” 육신이 되어 버리면, 이것은 뭐냐 하면, 창조주가 와요. 창조주는 숫자로 7이죠.
그 창조주 앞에서 “나는 7인데, 다 이루었고, 나는 완성인데, 너는 6이고, 5고, 4고, 3이고, 2고, 1이고..” 혼돈의 자투리예요. 만약에 우주에서 미사일이 인공위성과 충돌하면 인공위성은 조각조각 파편이 되듯이, 인간은 말씀 앞에서 뭐가 되어야 돼요? 자아로 다시 조합하기가 곤란한 파편 조각이 되어야 돼요.
그런데 그 파편 조각을 보면 다 추억 조각이고, 그때 내가 그렇게 애를 썼던 의미 조각이고, 내가 모았던 돈 조각이에요. 말씀이 오지 않으면 허망하니까 이런 나의 의미의 조각들, 돈들을 모아서 절에 갖다 바치고, 종교 놀이를 합니다. 종교는 허망한 나를 다시 무언가 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자아의 굳건함, 곧 자아의 굳건함은 ‘내 속에 악마 있다! 내 속에 마귀 있다. 날 함부로 무시하지 말라.’는 것.
심지어 개도 인간하고 같이 살면 자존심이 생겨요. 사람 침대에 누워 자다 보면 개집이 제 집이 아니라 자기가 침대의 주인이라 생각해요. 자기를 신으로 모시는 데에 그 돈, 제 돈도 아닌 엄마 돈을 자기를 위대하게 하는데 과감하게 쓸 때는 쓴다는 그 허세 있잖아요, 허풍, 허풍을 발휘하는 거죠. 마귀 놀이죠, 마귀 놀이. 아주 신나는 마귀 놀이.
그래서 나오는 것은 ‘나는 게임에서 최후의 승자다, 나는 이겼다.’ 이게 바로 의미 분석이에요. 자기에 대한 의미 분석. 그런데 말씀은 뭐냐 하면, 그게 바로 네가 죄의 종이라는 것을, 너는 소경인 것을 까발려 주는 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자아의 굳건함은 성립이 안 되죠.
7이라는 율법을 가지고 계속해서 7이라는 안식으로 쪼개고 쪼개면 우리는 하나의 부스러기이고, 조각, 파편에 불과할 뿐입니다. 깨져야 마땅한 주님이 오로지 하나 되셔야지, 그 앞에서 내가 내 자아를 조립할 가치도 없는, 주님이 깨뜨려 주시는 그 자체만으로 영광이 되고 감사가 되는 그러한 관계, 나의 세계는 날아가고, 변화산에서 봤던 주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같이 임하게 되는, 그것이 복음이 자아를 해체해줄 때, 진리가 나를 해체할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