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어린 양의 가족

아빠와 함께 2025. 10. 28. 21:33

대전-신명기(35강) 신명기15:19(어린 양의 가족) 20251027a(강의: 이근호 목사)

자, 신명기 15장 19절,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냥 읽어서는 무슨 뜻을 내포하는지 알 길이 없어요. 19절을 먼저 읽어봅니다. 신명기 15장 19절 “너의 우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네 소의 첫 새끼는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새끼의 털은 깎지 말고” 이렇게 되어 있죠.

왜 하나님께서 자기가 필요한 게 있다면 자신이 직접 관리하면 되는데,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매개로 해서 양을 바치게 하느냐? 그 이유가 뭐냐? 초반부터 어렵게 하더라도 여러분은 감당할 수 있으니까, 잘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선을 긋게 되면, 나중에 이 선이 뭐가 되느냐 하면, 데생(dessin, 주로 선에 의하여 어떤 이미지를 그려 내는 기술, 또는 그런 작품)이 돼요. 선들이 모여야 데생이 돼요. 형체가 나타납니다. 인간의 자아도 똑같아요. 살다보면 희미했던 자아가 점점 윤곽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걸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면서 자아가 형성된다.” 이것저것 도구를 사용할 때마다 선을 하나씩 그어나가는데, 살아가면서 그 많은 도구를 사용하고 다루면서 자아라는 그 속에 ‘나는 이런 도구도 다룰 줄 알고, 저런 도구도 다루었다.‘의 집합체가 자아입니다.

그러면 이 도구라는 것은 톱, 낫, 숟가락, 그런 것만 도구가 아니에요. 타인과의 모든 관계, 자식과의 관계도 포함됩니다. 그러니 여자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봐야 엄마의 아픔을 안다고 하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자식은 나의 자아를 구체화하는데 도구로써 개입된다는 그러한 현상을 말해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양 잡아라, 뭘 해라.‘ 율법 가지고 뭐 하고, 뭐 하고, 15장 전체가 율법 아닙니까?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 율법이니까, 전체 이야기하는 것은 그 율법을 다루면서 뭐가 형성되고 굳어지느냐 하면, 하나님이 상대하길 원하고 하나님이 받아주기를 원하는 진짜 인간상은 어떤 형상으로 뚜렷하게 구성되어 있는가? 그것을 본인이 느끼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는 완성품이다.‘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한 환경과 그 상황 속에서 뭐라도 하는 것 가운데서 점차적으로 내가 뚜렷해지는 그 여정과 과정을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허락하신 거예요. 데생, 어떤 형태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왜 어린 양인가? “네가 양이야. 나는 너를 양 만들 거야, 양.” 어떤 양? ’희생양‘, 희생양을 잡으라는 것은, 양이라는 것은 짐승이잖아요. 짐승은 사람이 아니란 말이죠. 사람이 아닌데,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의 출발점의 모델은 사람에서 사람이 아니고, 같잖은 사람밖에 없으니까, 사람 같은 인간 없으니까, 출발점을 양, 그것도 희생양, 그것도 인간에 의해서 희생되는 양, 그것도 하나님이 시켜서 인간에 의해서 희생되어야 될 그 양, 그걸 하나의 원형, 모델로 삼아서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백성이 나오는 거예요.

이 점에 대해서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나오는데, 그걸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빌립 집사님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엘리야도 그렇고, 빌립 집사님도 그렇고, 모세도 그렇고, 선지자들 보게 되면, 어디까지 우리가 받아들여야 되고, 어디부터는 우리가 고개를 저어야 되는지, 이런 것이 굉장히 난감하게 섞여서 나와요.

뭐냐 하면, 주의 사자, 천사가 개입해요. 사도행전 8장 26,27절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39절에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물세례 받고 난 뒤에 올라올 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이 대목, 무슨 내용인지는 대강 감은 오는데, 문제는 이렇게 주의 영이 임해서, 주의 능력이 임해서 천사가 임해야 꼭 이 일이 이루어지느냐 하는 회의감, 왜 빌립 집사 자신의 믿음과 평소에 하는 것으로 주의 복음을 못 전하게 하느냐?

믿음도 좋고, 신앙도 좋고, 성경도 많이 아는 빌립 집사가 일을 하는데 있어서 ‘주의 성령이 임하여 이끌어 간지라.’ 갑자기 이끌어 가서 그 동네에 같이 있다가 한 사람이 사라졌어요. 공중에 끌려갔는지.. 우리가 평소에 상식적으로 아는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이 왜 굳이 개입되어야 하느냐 이 문제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그 이유는 성경은 ’내일 신문‘이기 때문이에요. 매일신문이 아니고, 대구에 있는 매일신문이 아니고, 내일 신문이에요. 보통 신문이라고 하는 것은 어제 일 터지고 난 뒤에 그 소식을 전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어제 일이 아니고, 인간이 경험하지도, 상상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하는 그 일에 대해서 미리, 오늘 이렇게 개입되니까, 주입되니까, 이 일을 당했던 빌립 집사 같은 경우에는 지금 성경의 이사야 부분을 펴놓고, ’어린 양‘ 그 대목을 같이 보면서 이것을 지금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이미 준비된 일을 지금 그냥 받는 거예요.

그럼, 내일 되면? 내일 치 하나님의 일을 또 받을 것이고, 한 달 뒤에는? 또 한달 뒤에 미리 준비한 하나님의 일을 받을 것이다.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이 그렇게 위에서 계속해서 할당하도록 성경 자체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게 되면, 내시가 책을 보고 있는데, 그 책의 내용이 이래요. 32절에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우선 그 대목이요.

지금 내시가 질문한 게 이겁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그, 그가 누구냐?” 그가 누구냐? 빌립 집사가 ’그가 예수님이다.‘ 그렇게 이야기해도 돼요. ’그가 예수님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돼요. ’그 분은 예수님입니다.‘라고 하지 말고, 이렇게 해야 돼요. “우리는 여기 있는 그분에게 같이 합류돼있다.” 라는 내용까지 설명을 해줘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그냥 ’그가 예수님이다.‘라고만 하면, 나 따로 있고, 그 분, 예수님 따로 있어서 둘이 결합될 수 있는 요소가 빠지게 돼요. 그 분이 있는 조건 하에 내가 새롭게 있어야 돼요. ’예수님이 계시다‘라고 하면 안 돼요. ’예수님이 계심에 내가 여기 있다.‘라고 같이 그 토대가 연결돼 있어 줘야 돼요.

그래야 성경 해석이 제대로 돼요.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누가 하셨다? “예수님이 하셨다!” 이렇게 되어야지, “나는 지금 궁금해. 이 성경책에 나오는 이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야.” “아, 그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아이고, 고맙습니다. 그럼, 빠이빠이” 그러면 뭡니까? 그건 이미 예수님은 뭐냐? 옛날 신문이에요. 매일신문, 내일 신문이 아니고.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내 기억에 담을 뿐이에요. 이순신 장군 따로, 나 따로, 그렇잖아요. 뭐 엮이는 게 있어요? 이순신 장군 영 받은 무당도 아니고. 그렇잖아요. 주님의 영이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주님의 영이.

사도행전에서 오순절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데, 주의 영이 함께 있어,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말씀을 봐야한다 이 말이죠. 말씀 알아서 뭐 할 건데요? 어디 뭐 신학교나 가라 하세요. 말씀 외우고 그게 아니고, 지금 내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말씀 가지고 진행하시고 사용하시는 그 일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현재 나는 그걸 알고 있어야 돼요.

현재 알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어려워도 계속 갑니다. 그게 바로 새로운 시공간입니다. 대전 올 때마다 시공간 이야기를 해서 ‘이게 뭐 단골인가?’ 이런 생각이 드는데, 이런 겁니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지죠. 마음도 쓸쓸해지고, 낙엽이 떨어지는데, 여러분, 가을이 돼서 낙엽이 떨어지는 나무를 한 번 보세요.

나무가 어디 갑니까? 나무 어디 안가지요. 가을 되고, 나중에 눈 오고, 봄 되어서 꽃 피고, 여름 되어서 연녹색 새잎 나고, 또 가을되면 낙엽이 찬 서리에 멍들어서 땅에 떨어지죠. 특징이 뭘까요? 나무의 특징은 갇혀 있다는 것이죠. 이게 자연이잖아요. 자연은 우리에게 갇혀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그 자연 안에 나무를 보고 있는 우리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요. 이 가을에는 바바리코트 깃 세우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훌쩍 떠나고 싶다. 어디로 갑니까? 갇혀 있는데! 인간은 떠날 데가 없어요. 나무의 처지나 인간의 처지나 똑같아요. 떠날 곳이 없습니다. 갈 곳이 없어요.

이 자연 안에서 인간은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 바깥에, 나무를 이렇게 낙엽지게 하신 그 바깥의 세계, 그런 일을 하신 바깥 분이 계시는 하나님 나라로 우리가 이사 갈 수가 없어요. 거기로 이주가 안 돼요. 이주가 안 된다고요.

그런데 이 자연 바깥에서 자연을 능가하는 힘을 가진 그 무엇이 자연을 뚫고 이스라엘에게 찾아온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율법입니다. 율법. 율법의 기능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가 “너는 필히 실패한다.” 두 번째는 “율법이 추구하는 구원에 어느 인간도 참여할 수 없다.”

율법이 뚫고 자연에 갇힌 인간에게 왔으면 좀 기쁜 소식을 전해 가지고 ‘너는 율법 따라가면 구원 받는다.’ 이래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갇혀 있는 이유를 설명해요. 갇힐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첫 번째, ‘너는 필히 반드시 실패한다.’는 거예요. 반드시 인간은 실패한다.

‘실패한다.’라는 율법의 고유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이제 원치 않는 실패를 계속 만들어내는 것을 강요받게 돼요. 실패 안 하고 싶은데, 계속 실패해야 돼요. 매사 실패해야 되고, 실패하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실패는 실패대로 실컷 하고 구원은 구원대로 안 되고, 이게 율법의 기능입니다. 율법의 기능이에요.

바깥에서 온 소식이 있는데, 그 소식은 ‘너를 구원해 줄 게.’가 아니라 오히려 너는 구원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 바깥에서 소식을 전했는데, 그 소식의 매개가 뭐냐? 율법입니다. 그러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존재는 매개 존재죠. 어떻게? 인간은 도구를 통해서 자아가 점점 더 구체화된다 했죠.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을 줌으로써 율법대로 이것저것을 해요. 율법에 보면 ‘하라, 하지마라.’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 이것저것을 하면서 뭘 느껴요? 실패를 느끼고, 그리고 우리는 실패했다는 것을 근거로 구원받는 일은 없다. 애당초 우리는 구원이 안 되는데, 다른 민족과의 차이점은 ‘우리는 실패해야 되고, 구원되지 말아야 되는 것’을 제대로 아는 유일한 민족이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은 그렇게 결정이 되는 겁니다.

사사기 17장 1절,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이거든요. 그거 하기 전에 아까 사도행전 8장 마무리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그 희생양에 대해서, 희생하신 분에 대해서 이분은 누구냐고 묻는 것은 ‘이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라고 하면 안 돼요. 왜 안 되느냐? 세례 받아야 돼요. 물세례 받아야 됩니다. 이게 어려운 거예요.

우리가 지식으로 ‘이 분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아이고, 알았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되면 이게 내 안에 지식이 돼요. 갇힌 자 안에 들어 있는 또 갇혀 있는 그런 지식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면 내가 갇혀 있음에서 빠져나오려면 내게 찾아온 그 성경 말씀의 지식을 품고 넘어가면 안 돼요.

그건 선악과 체계입니다. 아는 걸로 넘어가면 안 되고, 나로 하여금 이 이사야 53장이 예수님의 일이고 그걸 통해서 (빌립 집사가 여러 가지 이야기했잖아요) ‘모든 되어지는 상황이 바로 그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일인 것의 일부로서 당신과 내가 이 광야, 사막에서 만났다.’가 돼야 돼요.

그러면 이것을 한꺼번에 표현하면, “나는 주님 안에 속할래.” 그게 뭐냐? 물세례예요. 그게 물세례입니다. 합류가 되는 거예요. 합류되는 것은 인간의 육의 능력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빌립 집사에게 누가 옵니까? 천사 왔지요. 그것도 모자라서 누가 옵니까? 성령께서 오셨지요.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전에 말했던 ‘우리가 독주한 것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이순신 장군 독주회처럼, 이게 막혀 있으니까, 이건 인간의 힘이 아니에요. 성령께서 물세례 주시고, 성령께서 빌립 집사에게 ‘할 일 했지? 파견 근무했나?’ ‘예.’ ‘그럼 내가 데려갈게.’ 하면서 데려가고, 에디오피아 쪽은 에디오피아로 가고, 저쪽은 저쪽으로 가고, 어디에 가더라도 모든 일이 그리스도가 하신 일에 포함이 된다, 이 말이죠.

그거는 이제 신약에서 율법 말고 복음이 갈라디아서의 의미에서 율법이 아니고, 율법은 우리를 범법자로 만드니까, 율법이 아니고 복음으로 주께서 일을 하실 때는 율법을 찢어버리고 일하거든요. 율법을 찢는 것은 우리가 찢으면 안 돼요. 우리가 제 맘대로 살려고 지가 찢으면 안 돼요.

율법을 찢어야 율법에 의해서 우리 자아도 같이 폐기가 되는 겁니다. 율법은 우리가 자연 안에 갇혀 있고,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런데 그냥 갇혀 있는 게 아니고 실패해야 되고, 그리고 실패하는 느낌을 준다 할지라도 그 실패한 걸 근거로 구원이 된다, 안 된다? 구원이 안 돼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한다고 구원되는 거 아닙니다. ‘어, 그래 망하게 되었어.’ 그렇게 끝나는 거예요. 끝나고, 조치도 율법 말고, 율법을 주신 그분에 의해서 율법 말고 주님이 자체적으로 아버지하고 이미 의견 타결 본 게 있어야 돼요. 우리 쪽은 완전히 소외되고 배제되는 거예요.

주님하고 아버지하고 쑥덕쑥덕해가지고 협의, 타결 본 게 있어야 돼요. 율법 외에 다른 의가 아들을 통해서 다 이루어져야 돼요. 그 이루어진 것을 율법을 통해서 절망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복음으로 찾아오는 겁니다. 기쁜 소식으로.

지금 우리가 하는 게 구약이잖아요. 구약이니까 같은 구약을 봅시다. 사사기 17장 한번 봅시다. 이스라엘이니까. 사사기 17장 1절,2절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이렇게 시작하죠.

아까 여러분들이 신명기 보고, 사도행전도 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어디 안에서 이루십니까? 율법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지요. 율법 안에서 이루어지는 목적은 바로 희생양, 이스라엘로 하여금 희생양이 되지 않는 한, 구원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상황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자, 여기에서 이렇게 먼저 전제를 합니다. “사람하고 상대하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하고 사람이 관계한다.” 먼저 사람하고, 사람하고, 사람하고 상대하는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사람하고 관계합니다. 왜냐 하면, 인간은 직접 하나님과 상대할 수가 없어요. 사람하고 상대해야 돼요.

사사기 17장의 사람은 누구입니까? 어머니하고 아들이 나오죠. 어머니라는 한 사람, 아들 한 사람이 일반적인 지나가는 사람의 만남이 아닌 겁니다. 어머니이고, 아들이니까. 어머니가 어느 날 자기가 끌어 모았던 돈이 잘 있는지, 도둑은 안 맞았는지 조사를 해 보니까, 은화 일천일백을 잃어버려 가지고 엄마가 화가 나서 저주를 해요.

"내 돈 가져간 인간 죽어 버려라."라고 저주를 했어요. 엄마가 돈 잃어버렸는데 왜 저주하고, 화가 나 있죠? 돈을 잃어버렸는데 왜 화가 납니까? 이상하잖아요. 그걸 좀 길더라도 여러분이 상식이라고 생각하시고 한번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머리 큰 아이가 어느 날 한 살쯤 돼서 거울을 봤어요. 거울을 보니까 거기에 또 다른 아이가 하나 있어요. 그럴 때, 이 거울 속에 있는 아이는 본인이에요, 본인 아니에요? 본인 아니죠. 왜냐 하면, 내 모습이 비친 것이 거울에 나타나니까, 이것은 이미지지 내가 아니에요. 내가 둘이 되면 안 되니까.

난 여기 있고, 저것은 비친 이미지죠. 그런데 이 이미지라는 것이 없으면, 그 다음부터는 ‘저것은 내가 아니다.’가 성립이 안 돼요. ‘저것은 내가 아니다.’가 만약에 성립이 된다면, 비로소 그때부터 자아가 성립돼요. 나는 여기 있고, 그 외는 ‘내가 아니다.’가 돼요. 거기서 나온 게 뭐냐 하면 정신분석학의 '방어 기제'예요.

내가 여기 있는 게 확립이 됐잖아요? 그럼 내가 할 일은 뭡니까? 여기 있는 내가 나를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지켜내죠. 지켜내는 겁니다. 지켜내는데, 거울을 보면서 아이에게 나, 소위 자의식이라고 하는 게 이제 시작됩니다. 생후 1년에서 1년 6개월이 되면 그렇게 된다고 해요. 12개월에서 18개월 사이에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거울에 비췄잖아요. 그런데 그 아이가 점점 더 이 거울 같은 역할을 하는 자가 누구냐 하는 것을 본인이 알게 돼요. 이 비치는 사물적인 거울 말고, 이 거울에다가 어머니를 대신 세워 봅시다. 그러면 아이가 나라고 하는 것은 이미 어머니의 욕망이 자기 내부로 다 집어넣어 놓고 이게 누구냐 하면, 이게 바로 나예요.

길 가는 아주머니 보고 다 의식하지 않아요. 애들은 적어도 길 가는 이웃집 아주머니하고 어머니는 구분할 줄 알아요. 왜냐 하면, 내 안에 누가 들어 있기 때문에? 어머니의 욕망, 어머니의 요구 사항이 들어 있어요. 그리고 엄마도 자기의 아들이 자기의 거울이에요. 자식 없는 내가 있을 수가 없어요.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키웠다 하는 것은 밥 주고, 잠 재워주는 것은 보육원에서도 할 수 있어요. 요양사도 할 수 있어요. 치매 걸린 부모를 요양사가 돌보는 거 하고, 딸이 와서 돌보는 거하고, 며느리가 돌보는 거 하고 달라요. 며느리는 가라고 합니다. 딸은 있으라고 하는 거예요. 왜? 나니까! 내 안에 내 딸이 들어있으니까요. 나는 걔를 보고 나를 새롭게 구축했고요. 딸은 나를 보고 ‘나’라고 이미 확정을 지어 놓고요. 그 관계다 이 말이죠.

프로이트라는 사람이 히스테리, 그러니까 원인도 모르는데 신체가 발작을 하는 그런 환자들을 많이 접했어요. 접했는데, 어느 날 그 증세가 없어지는 것을 발견했어요. 뭘 했느냐 하면 최면을 거니까 그 발작 증세가 없어졌어요. 최면을 걸면서 그 환자에게 뭐라 하냐 하면, ‘레드 썬!’ 하면서 “지금 당신은 조선 시대에 와 있습니다. 당신은 폭군의 쉐프입니다."

이러면서 "당신은 지금 어디쯤 있습니까?" "연희궁이 보입니다." ”그래요. 무슨 요리를 했습니까?“ ”맛있는 어떤 요리를 했습니다." 이렇게 한단 말이죠.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최면을 거니까 자기가 반 수면상태에서는 말하는 대상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꿈속에 있지요.

꿈속에 있는 대상에게 최면을 걸면서 정신과 의사가 물으니까 묻는 대로 답변이 술술 나오는 거예요. 의식이 아니고 무의식에서 나오니까, 억압되어있던 말을 실제로 말을 통해서 터뜨리니까 증상이 없어졌던 거예요. 바로 저거다.

지금 히스테리 환자의 문제가 뭐냐 하면, 자기 눈에 다른 사람들이 보인다는 거예요. 이렇게 보일 때는 무의식이 자기의 발목을 잡아요. 의식은 무의식을 또 억눌러요. ‘지금 내가 중요한 손님 만났는데, 너 가만히 있어라, 발작하지 말고.’ 그렇게 억압되어 있으니까..

할 말 하고 성질을 터트려야 이게 몸이 안 아픈데, 중간에 신체가 힘들게 된 거예요. 패고 싶은데 못 패고 ’참자, 아이고 내 탓이요.‘ 이렇게 하다가, 최면 걸면 이 증상이 없어지고, 다시 현상에 돌아오면 남들 보는 눈이 있으니까, 자기 그 의식 세계에 돌아오니까, 무의식적으로 이거는 짐승도 아니고 함부로 행동을 못 하잖아요.

그래서 뭐냐 하면, 의식보다 무의식 세계가 더 세다. 모든 병은 무의식에서 차마 못할 그 모든 내용을 의식은 강제로 억누르고 있으니깐 이게 마음의 병이 되었다. 따라서 치료 방법은 환자 본인에게 의사는 질문만 하고, 혼자 자신의 이야기를 카우치라고 하는 긴 소파에 누워서 제 할 소리를 다 내뱉음으로써 자가치료, 셀프치료가 될 수 있도록 정신과에서 도와주고, 정신 분석학의 시작이 그렇게 되는 겁니다.

보통은 정신과 가면 돈이 드니까, 술을 먹죠. 술 먹고 집에 들어가서 자는 마누라 깨워서 "내 이야기 들어 봐라.“ 듣기 싫다고 하면, 자기 혼자 이야기 하면서, 지 혼자 술 먹고 이야기하면서 증상이 완화되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는 사람은 술을 안 하잖아요. 그러면 새벽 제단에 가서 울고불고, 울고불고 상담해 달라고 가는데, 상담은 무슨? 불 속에 집어 넣어버려야지. 불속에 들어갈 게 무슨 상담이 돼요?

아들과 어머니 사이에 이미 그들은 한 통속이 되어 있고, 그게 주님 보시기에 갇혀 있었던 겁니다. 지독한 엄마의 사랑 "엄마, 돈 내가 가져갔어." 이렇게 하니까 갑자기 엄마가 자기가 저주한 그 저주의 대상이 자기의 분신인 아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돈 가져가는 놈은 어느 인간인지 죽어 버려라".

이게 사사기 입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께서 승리케 해 주신다면, 제일 먼저 우리 집에서 튀어나오는 그것을 제가 제물로 바치겠습니다.” 몰렉 우상을 섬기던 분위기라서. 그런데 자기의 사랑하는 딸이 나올 줄은 미처 상상도 못했어요. 상상도 못 했어요.

만약에 이 딸을 안 바치면 어떻게 되느냐? 이거 승리한 거, 하나님 덕분에 승리한 거 물어줄 판이에요. 그래서 인간은 인간의 가족 관계, 엄마 아빠 가족 관계, 의식 무의식 관계에 갇혀 있습니다. 탈피하지 못합니다.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인간은 벌써 하나님 보시기에 정상이 아닙니다. 전부 정신병자들이에요.

그래서 수습을 어떻게 하느냐? 사사기 17장에 보면, 그 수습하는 방법으로 뭐가 동원되느냐 하면, 우상이 동원돼요. 17장 3절,4절 “미가가 은 일천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돌리리라.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신상을 만들어서 집에 두고, 그 신상을 섬기기 위해서, 그러니까 자기도 저주 안 받고 아들도 저주 안 받고, 보호 차원에서, 그걸 수호하는 차원에서 어린 레위 족속 제사장 한 사람을 고용해서 연금 주고 복지 혜택주면서 자기 집에 있게 했다는 이야기가 사사기에 나옵니다.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율법을 준 세계에서 율법을 줬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에게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사례를 이렇게 쭉 사사기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구축한 자기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꼭 낙엽 지는 나무 한 그루 신세와 똑같습니다. 낙엽 져 봤자 겨울 되면 또 눈, 그래 봤자 봄 되면 또 피고, 그 나무가 자기는 살았다 생각하겠죠. 뺑뺑이 도는 거예요. 봄 여름 가을 겨울,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자연 안에 갇혀 있어요. 자연 자체도 갇혀 있고, 갇혀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신명기 15장 19절에서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여호와께 드린다고 되어 있어요. 이게 성립하느냐? 여호와께 드리려면 지금 인간의 세계에서 탈출이 되어야 드림이 돼요. 탈출이 되어야. 그런데 뭐가 드림이 되느냐 하면, 어린 양, 수컷의 어린 양은 탈출이 돼요. 왜?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했기 때문에.

여기에 “너의 우양의 처음 난 수컷은 구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 네 소의 첫 새끼는 (네가 네 가정의 삶을 도모하기 위해서 그 첫 번째 수양은) 부리지 말고 네 양의 첫 새끼의 털은 깎지 말고” 20절 “너와 네 가족이 매년에 여호와의 택하신 곳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을찌니라” 라고 돼 있어요. 여호와 앞에서 먹어라.

요한복음 6장 50절에서 54절을 보면, 주님께서 영생을 이렇게 표현해요. “영생이란, 네 안에 영생이 들어 있는 방법은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면 네가 영생을 얻으리라.” 라고 되어 있죠. 기억하시죠? 안 찾아도 아시죠?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내 살과 내 피가 있잖아요. 여기에 외부의 살과 피가 내 살과 피를 접수하고 점령해야 되고, 내 살과 피를 대신해야 너희에게 뭐가 있단 말입니까? 생명이 있단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안 들어온 상태가 되면 이건 뭡니까? 우리에게 뭐가 없어요? 생명이 없는 거예요.

율법은 있으나 생명이 없어요. 생명 없는 율법이 있는 거예요. 율법은 우리를 실패로 만듭니다. 실패한다고 해서 영생 얻는 건 아니에요. 뭔가 외부에서 새로이 들어와야 돼요.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 안에 들어와야 생명을 얻는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 듣고 거기 왔던 제자들이 뭐라고 했냐 하면,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만약에 현장에 우리가 있었다고 가정해보세요. 영생 얻기 위해서 주님한테 왔는데, 주님께서 뭐 ‘십자가 믿으라.’하면 그거야 믿지요. 그런데 그 말을 하는 게 아니고,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문제를 제가 한번 내 볼까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가 어렵습니까? ‘십자가 믿으라.’가 어렵습니까? 둘 다 어려운 거예요. 둘 다 어려운데, 사람들은 십자가 믿는 것은 그냥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오산입니다. 잘못 생각한 거예요.

15장 17절 보겠습니다.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찌니라.” 18절 “그가 육 년 동안에 품군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이게 남자하고 여자하고 달라요.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남자하고 여자하고 차이 나게 했는데, 어떤 가정에 노예가 들어왔어요. 노예로 들어온 이유는 단 한 가지, 돈이 없어 노예가 된 거죠. 밥 먹고 살 돈이 없어서 노예가 된 거예요.

자, 이 문제는 이겁니다. 노예가 같은 식구입니까? 하는 거예요. 노예는 식구가 아닙니다. 타인이에요. 타인인데 노예가 식구가 되는 경우를 율법을 통해서 알려줬어요. 그게 뭐냐 하면,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는 거예요. 문에 대고 뚫는 겁니다. 누가 뚫어요? 주인이 뚫고, 누가 뚫린 겁니까? 종이 뚫린 거죠.

노예가 노예일 때는 같이 한 집에서 일해도 내 소유는 아니에요. 그냥 일꾼이에요. 그런데 노예에게 구멍을 뚫어 버리면 이제는 출애굽기 21장에 보면 ‘아들같이 대하라’, 또 ‘딸같이 대하라’, 만약 어떤 노예가 이 집을 떠나기 싫고 이 집에 온다고 하면, 아들과 딸같이 하라고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집이 원래 두 집이죠. 두 집이었는데, 두 집이 어떻게 됐어요? 한 집 되었어요. 한 집 되었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외부인이 내부인 되는 방법까지 주께서 알려줬습니다. 그런데 이 노예는 가진 게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만약에 노예에게 "됐다, 나가라" 하면 또 살 수 없어요. 왜? 가진 게 없으니까.

의존해야 되고, 기대야 되고, 와야 됩니다. 살기 위해서 무조건 자기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하고 와야 돼요. 이게 출애굽기 21장 이야기를 신명기 15장에서 그렇게 이야기해 놓고, 그 다음에 이렇게 우양의 처음 난 수컷 이야기를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물어봅시다. 그 양을 잡을 때 그 양은 누구 소유였습니까? 소유주가 원래 누구예요? 자기 집이죠. 자기 집의 소유를 이제는 반대로 내 집에서 하나님 집으로, 하나님이 받겠다니까, 우리가 준다고 받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받겠다고 했으니까, 이 집안의 수컷 양을 하나님께 드리면, 이 자연 바깥에 있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연락 체계, 연락 장소가 만들어진 셈이 되죠.

연락 통로가 만들어졌지요. 그러면 여기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생각해야 돼요? "야, 너 참 좋겠다. 너는 하나님한테 가니까, 우리는 뭐 가지도 못하고, 뭐 양만 바치고 우리는 가지도 못하네."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되겠죠.

그런데 양 바칠 때 그냥 바치지 않고, 죽여서 바치죠. 죽은 양을 도리어 부러워하고 “좋겠다, 야, 너 죽으면 거기 가잖아. 네가 하나님 집으로 소속이 되잖아. 우리는 언제쯤 하늘나라에 같이 소속이 되고, 합류하게 돼?" 이래야 정상이 되겠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 못 하고, 이미 자기가 하나님과 한 통속인 줄 알고, 시킨 대로 양 바치면, 자기가 자기 선을 떠나지 않더라도 이미 구원된 걸로 그렇게 오해를 했던 겁니다. 자기는 꿈쩍도 안 하니까 오해를 했던 거죠.

그런데 여기 지금 바치는 게 양의 첫 새끼죠. 그리고 흠이 없어야 돼요. 여기 신명기 15장 21~23절에 “그러나 그 짐승이 흠이 있어서 절거나 눈이 멀었거나 무슨 흠이 있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잡아 드리지 못할지니, 네 성중에서 먹되 부정한 자나 정한 자가 다 같이 먹기를 노루와 사슴을 먹음같이 할 것이요, 오직 피는 먹지 말고 물같이 땅에 쏟을찌니라” 라고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15장의 율법대로 준행한다면 "이거 한 마리 없어도 우리는 뭐 상관없어" 이런 종류입니까? 아니면, "참 아깝다. 아이고, 참 귀한 거다. 내가 지금 탐나는 건데, 탐나는 건데 내 게 아니네." 하고 "그래, 너라도 내 집에서 떠나서 하나님께 가야지"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연락이 왔다 이 말이죠. 연락이 왔다는 말은 본인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을 감수를 해야 돼요. 그걸 인정을 해 줘야 돼요. 지금 내가 양을 바쳐서 하나님께 받은바 된다는 말은, 지금 하나님 있는 곳과 우리가 있는 곳의 차이가 난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을 해 줘야 됩니다. 아직도 율법으로 뭔가 행할 것이 남아 있다는... 제사를 드린다든지.

그 다음에 그 양의 피는 어떻게 합니까? 피는 어떻게 하고? 먹지 말고, 그 양을 잡고, 양고기 먹고, 그 양의 피는 먹지 말고, 고기는 먹을 수 있되, 피는 먹지 말고 물같이 땅에 쏟으라고 한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양의 신체와 피 부위를 따로 차별 나게 구분할 수 있는 의식이 있어야 된다, 그렇게 보시면 되겠죠.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것이 뭐냐 하면, 사람 대 사람을 상대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상대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었다. 사람과 사람을 상대하는 방식으로. 노예 상대하는 거 있죠. 그리고 집에서 제일 탐나는 양을 상대했듯이 그 상대한 속에 깊숙이 누가 거기에 개입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개입을 하신 거예요.

그러면 율법이 이것으로 끝납니까? 율법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많은 율법을 보면서 자꾸 낌새, 뭔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는 그 의도, 취지에 그들이 조금씩 조금씩 젖어가야 되겠죠. 아까 얘기했듯이 선을 계속 긋다 보면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이게 데생이 되죠. 기초 데생이 된단 말이죠.

율법이 자꾸 들어오게 되고 일이 벌어지게 되면, 나의 자아는 ‘복합 자아’가 돼요. 복합 자아가 되면서 이 복합 자아는 내가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진 자아이기 때문에 무슨 자아냐 하면, 매개 자아가 되겠죠. 이 매개 자아로서 아까 빌립이 만났던 에디오피아 내시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일의 매개자가 돼요.

매개자란 말은 전달자, 전달자가 되죠. 전달자가 되면, 아까 성령, 또는 천사의 개입처럼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합류된 존재로 인식되는 겁니다. 이미 하나님에게 합류가 되기 때문에 이 화살표 방향을 거꾸로 한번 돌려 보세요.

왜 우리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까? 내 구원? 아니! 뭔가 전달하는 거예요. 무슨 전달? 모든 상황과 모든 일이 우리 주님으로부터 유발된 것이라는 상황을, 사실에 거기에 참여하고 경험함으로써 나라는 자아가 내가 ‘나는 이게 나다.’라고 알았고, 그동안 내 이미지를 내가 골랐는데, 그게 아니고 복합자아로 변신돼야 돼요.

내가 원치도 않는 일들 속에서 만나면서 우리는 도저히 내가 ‘이거는 나야.’라고 규정할 수 있는 나는 아예 존재하지 않고, 주께서 나를 쓰시고 사용하기 나름이에요. 한국화를 그릴 때도. ‘이게 바로 나야.’ 금상 받을 때도 ‘이게 나야.’ 일할 때도 ‘이게 또 나야.’ 제주도 갈 때도 ‘이게 나야.’

계속 이루어지는 그 모든 일이 어디서 나왔고, 어디에서 비롯되는 겁니까? 우리 주님께서 이미 합류된 자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그런 식으로 다루시는 게 신명기에 나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편하게 사세요. 제발 좀 편하게 사시고, 그런 의미에서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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