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의

사랑의 보관함

아빠와 함께 2025. 6. 14. 08:47

서울강의20250612a 요한일서 4장 7절(사랑의 보관함)-이 근호 목사


오늘은 요한일서 4장 7절부터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Beloved, let us love one another: for love is of God; and every one that loveth is born of God, and knoweth God.

Beloved, let’s love one another; for love is from God, and everyone who loves has been born of God and knows God.(NASB)



여기서 철저하게 폐쇄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께 속했잖아요. 우리한테 속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사랑은 하나님께 속했다’니까 ‘사랑은 하나님이다.’ =‘사랑은 내 것이 아니다.’ 사랑은 나의 것이 아니란 말은 우리 안에는 사랑이 있다, 없다? 우리 인간 안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께 속했으니까.

굉장히 간단해요. 사랑은 굉장히 간단한 겁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다.’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이 두 가지가 성립 안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 사랑하기’, 이거 성립 안 되죠.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으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성립이 안 됩니다.

그다음에 ‘인간이 인간 사랑하기’, 이것도 역시 안 됩니다.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붙이면 되죠. ‘인간이 개 사랑하기’, 안 되죠. 안됩니다.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사랑이 없다는 말은 특징이 있죠. 사랑이 없다는 말이, 인간이 인간을 상대한다든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든지 사랑 없음이 드러나는 거예요. 사랑 없음이. 인간이 자기 말고 다른 쪽에는 사랑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때 사랑이 성립되지 않는 이유가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왔죠. 왔는데 영생 얻으러 왔습니다. 자기 딴에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로 왔어요. 자기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인 영생을 얻지 못하면 자기 인생 살아도 헛산 게 되니까 제일 중요한 걸 얻고자 왔죠. ‘예수님, 돈 한 이천만 꾸어주세요.’ 이런 것 때문에 온 게 아니잖아요. 영생을 달라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왔는데 결국 영생을 얻지 못하고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되돌아갔어요. 되돌아갔습니다. 영생 구입하는 데에 실패한 거예요. 주님이 영생을 못 줘서가 아니라, 그 인간이 내가 달라는 영생이 뭔지를 모르고 주님한테 온 거예요.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생명이 되는 경우가 어떤 경우냐 하면… 빨간 걸로 하겠어요. 예수님은 생명 맞습니다. 영생 맞아요. 예수님이 영생 되는 경우는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희생되시는 것’ 여기에서만 생명이 나와요. 예수님의 존재가 있다고 생명이 나오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붙들고 있다고 생명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희생제물 되실 때 그때 생명이 나오는 겁니다.

“누구든지 내 피와 내 살을 먹으면 영생을 얻으리라” 했잖아요. 내 피와 내 살이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예수님이 그냥 먹어라 해서 주는 게 아니거든요. 예수님이 희생제물 된다는 것은 살아있는 예수님이 뭐가 된다는 거예요? 살아계신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죽을 때 생명이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살아있을 때 생명이 안 나와요. 예수님이 죽었을 때 생명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부자 청년이 영생 얻으러 예수님께 왔으면 이 분이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그것부터 먼저 이해가 되어야 될 건데, 부자 청년은 예수님이 살아있다고 여겼습니다. 그 이유가 본인이 살아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영생을 주려면, 부자 청년 본인이 죽어있고 죽어있는 인간은 자기가 죽는다고 해서 자기가 영생 얻을 수 없는 겁니다.

살아있어도 영생 얻지 못하고 그다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살아도 영생 얻지 못하고 죽어도 영생 얻지 못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으면 영생을 얻어요. 차이점이 그 점에 있습니다. 나는 백번 죽어도 영생이 없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소용없어요. 영으로 오신 분이 돌아가셔야 영생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부자 청년은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살아있는 나는 영생 얻을 수 없다. 두 번째, 죽어도 나는 영생 얻을 수 없다.’ 그럼 예수님의 죽음에 의해서 영생이 생긴다면 나는 살아도 죽었고 죽어도 죽은 거니까 영생 주고 안 주고는 죽어서 영생을 줄 수 있는 예수님의 고유 권한인 겁니다. 주고 싶은 사람은 주고 줄 필요 없는 사람은 안 주는 겁니다.

이 사실을 부자 청년은 몰랐던 거예요. 달라 하면 주는 줄 알았어요. 달라 하면. 자기가 영생 얻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마땅히 영생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찾아간 겁니다. 퇴짜 당하죠. 퇴짜 당합니다.

뒤에 오신 분을 위해 다시 말한다면, 성경에서 사랑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것이다. 사랑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다.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 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이웃이나 다른 인간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 본인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개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개를 키우지, 사랑하지는 않아요. 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이 없으면 인간은 사랑할 만한 것을 찾죠. 찾아 나섭니다. 이것이 인간의 평생 과업이에요.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과업이 자기가 사랑하고 싶은 것을 찾는 거예요.

아이들은 뭘 사랑해요? 장난감을 사랑해요. 장난감이 사랑하고 싶은 것이에요. 그 아이가 나중에 커서 어른 되어가면서 점차 점차 자기가 사랑할 것을 찾아요. 그래서 타인들, 남을 대할 때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할 만한 것이 그 사람에게 있는지 탐색해서 그것만 뽑아내죠. 그것만 뽑아내요.

젊은 여자가 남자하고 사귀면서 백화점 지나가다 “빽 신상 나왔다. 저 빽 갖고 싶어.” “아이고, 비싼데. 오백만원 하는데.” 그럼 여자는 남자보고 “자기 나 사랑해, 안해?” 이렇게 돼요. 그럼 그걸 곧이곧대로 들은 남자가 “나 당신 옆에 있잖아. 사랑하는 당신 옆에 남자 나 있잖아.” “아니야. 내 옆에 신상 가방이 있어야 되지.”

빽을 매개로 해서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 달라. 당신이 빽을 사준다면 난 빽을 매개로 해서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해 달라. 그럼 뭡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는데 당신이 내가 사랑하는 가방을 사준다면 그때부터는 내가 당신을 사랑할지 말지 고려해볼 용의가 있다는 거예요. 솔로로 지내라. 솔로로 지내.

이건 모든 가족도 마찬가집니다. 아버지가 병들어 있으니까 다 큰 아들이 하는 말이 “내가 클 때까지 아버지가 해준 게 뭐가 있는데? 지금까지 아버지가 내 사업자금을 대줬나, 결혼할 때 집을 하나 사줬나, 아버지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병든 아버지를 내가 수발들어야 되고 관심 둬야 됩니까?”라고 할 때, ‘아버지로부터 내가 사랑할 만한 것이 충분히 제공되지 않았으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정당한 권리가 있습니다.’라는 뜻이죠.

‘당신이 나한테 뭘 해줬다고 내가 당신 수발을 들어야 되느냐?’ 이 말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내가 사랑할 만한 것을 아버지 당신이 나한테 해준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매개로 해서 중간 매체로 해서 당신을 사랑할 용의가 되어 있다.’ 이런 뜻이죠.

바로 그것을 구약에서는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내 안에 들어있는 내 욕망의 가현체에요. 욕망의 표현체가 우상이에요. 내 안에 들어있는 것. 나는 나만을 사랑하거든요. 나는 나만을 사랑한다고요. 사랑이 의외로 어려운데, 이런 뜻이에요. ‘나는 내가 사랑할 만한 것을 가질 때만 비로소 나는 사랑을 안다.’ 이거거든요.

내가 사랑할 만한 것을 가질 때만 사랑을 안다는 것은 한 마디로 해서 ‘나는 나를 희생할 뜻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 희생하면서 사랑이라 표현을 한 것은 기존에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사랑을 이해하고 있는지 뻔히 알고 계시면서 예수님께서 인간과의 반대 행위를 하신 거예요.

내 살과 내 피에서 영생이 있다는 말은, 그게 사랑으로 제공된다는 말은, 인간이 얻을 수 없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사랑을 만들었다는 거예요. 인간이 만들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랑을 만들었고, 예수님은 자기희생으로 사랑을 함으로써 인간은 일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준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잔인해요. 어느 정도 잔인하냐 하면 사랑이 있는데 아무도 가질 자격이 없다는 점에서 약을 올리는 거예요. ‘저 사랑 갖고 싶어요.’해도 사랑 주는 게 아니에요. 사랑이 없는 게 아니고 있는데 그 사랑을 가질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희생할 생각이 없어요. 아무도 자기희생을 할 생각이 없어요.

왜 인간이 자기희생이 안 되느냐 하면 내 사랑이어야 하는데 내가 희생되면 나 자체가 날아가기 때문에 나 자체가 없는 데서 사랑만 있다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나에 대한 모독으로 보는 거예요. “사랑은 여기 있나니” “그거 내 거 안 됩니까?” “네 거 아니야.” “그럼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라고 인간은 화를 내는 거죠.

사랑은 여기 있으니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하나님 자기사랑 뿐이에요. 우리 인간 사랑은 없으니까. 사랑은 하나님께 속했다고 되어 있잖아요. 아까 요한일서 4장을 우리가 봤는데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거예요. 사람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살 자격도 없는 거죠. 사랑이 없으니까 살 자격도 없는 겁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시고 난 뒤에 성경에서 나오는 사랑을 쭉 보게 되면 인간의 사랑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열왕기상 3장 3절에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여기 ‘오히려’라는 말이 나와요.

솔로몬은 여호와를 사랑했어요. 맞습니다. 사랑했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했습니다. 맞습니다.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이렇게 이 뒤에 그러나, 영어로 But. 여호와를 사랑하고 다윗의 법도를 행하는데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행했더라.’ 이 뒷부분을 봐서 솔로몬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암시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여 산당에서 제사를 파괴시켰다. 없애버렸다.’ 이렇게 나오면 ‘솔로몬은 여호와를 사랑한다’가 되는 겁니다. 오늘 강의가 상당히 어려워요. 왜 그러느냐 하는 이 문제는 어렵다기보다 굉장히 간단한 문제인데요.

솔로몬의 사랑이 한계가 있고 솔로몬의 사랑에 문제가 있는 이유가 예수님의 사랑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죄로 규정해버리는 사실과 더불어서 나타나는 게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어둡고 죄며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방식으로 사랑이 오니까 사랑은 대단히 잔인함으로 오는 거예요. 잔인함, 단호함, 냉혹함으로 오는 겁니다.

그것은 로마서 3장에 나오는 거니까 제가 후딱 한번 읽어보지요. 지금 제가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에게 사랑이 없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다는 그것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성경을 통해서. 로마서 3장 10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11절,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어떻게 이런 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모든 인간이 그래요, 모든 인간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도 없고 찾는 자도 없어요. 깨닫는 자도 없고. 모든 인간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모든 인간이.

이것을 이렇게 우리에게 “너 말이야, 너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지 않고 너는 열린 무덤이고 너희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어.”라고 지적해주는 것을 사랑으로 느낄 사람 있어요? 그걸 사랑으로 느껴야 돼요. “야, 사랑이 바로 여기 있네. 내가 모르는 나를 이렇게 제대로 지적해주니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으리오.” 이렇게 그걸 반갑고 기쁘고 즐겁게 받아들이면 되는 거예요.

이게 어려워요? 아, 이게 어렵구나. 이게 어려워요. 굉장히 어려워요. 나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싫어하고 따라서 하나님께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입장이 아니라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 인생이 망가져서 전과7범이 된다 할지라도 나는 거기서 ‘예’하고 그냥 8범 안 된 것을 고맙게 여기면 돼요. 그 정도가 되어야 돼요. ‘왜 내 인생이 이렇게 망가집니까? 이럴 수 있습니까?’라고 할 수 있는 어떤 할 말도 다 사전에 우리 안에 없어져야 되죠.

이처럼 우리 자신의 노골적인 모습을 제대로 알려주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우리가 죄인 되어야 주님의 희생제물이라는 그 가치가 살아나는 거예요.

주님이 우리 대신 왔다는 것이 마지막은 결국 처참한 죽음, 십자가 달려 죽는 죽음으로만, 대신 죽으신 죽음으로만 죄 사함이 가능하다는 말은 그만큼 우리가 철저하게 망가졌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선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 분명히 보여주는 거죠.

그래서 ‘사랑은 주님께 있으니, 사랑은 하나님께 있으니’라는 그것이 이미 우리 가운데서 이처럼 분명하게 실시되고 있습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희생을 오늘 본문 요한일서 4장에서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그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화목제”에요. 희생제물이에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제물이 된다는 말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 우리의 위치나 우리의 상태가 희생제물 안으로 다 표현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제물 안에는 우리에게서 어떤 선이나 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을 확답 짓는 그런 내용이 희생제물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보고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어떻게 망가지든지 그것은 우리 처지에 합당한 조치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아,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군요.’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우리가 하나님께 그렇게 불평했는데 우리가 불평할 입장에 있지 않구나.’ 이렇게 알면 벌써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화목제물-십자가죠, 화목제물이 오게 되면 사랑이 이제 우리 속에 온 거고요. 화목제물이 오지 않으면 백날 하나님 사랑하고 찬양해 봐도 그건 소용없는 일입니다. 화목제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랑이 우리에게 왔을 때, 사랑이 우리에게 찾아옴으로써 주께서 정작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인가? “너 사랑한다. 천당 가자.” 이게 끝인가? 아니면, 우리를 사랑함으로써 그다음부터 추진하려는 하나님의 프로젝트가 뭐냐? 그건 이렇습니다. 사랑이 오게 되면 ‘사랑의 세계’가 되겠죠. 사랑의 세계는 무엇을 동반하느냐 하면 반드시 ‘미움의 세계’를 동시에 형성시키기 시작합니다.

사랑이 형성되면 같이 미움의 세계도 형성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은 미움의 하나님이에요. 둘 다를 고려해야 돼요, 사랑과 미움을. 사랑과 더불어서 미움도 찾아온다는 것은 사랑받은 자만 알게 돼요. 사랑받지 않은 자에게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에요. 미움이 없는 사랑의 하나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사랑에 환장했을 때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한테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한테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기사랑의 세계와 그리고 그 외에 미움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에 보탬이 되겠죠.

로마서 11장 22절, 사랑이 왔을 때 또는 긍휼이 왔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동반하는지를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뭐, 사랑이 온다 해놓고 갑자기 찍히는바 되리라. 이거 뭐 사랑하시겠다는 겁니까? 달래겠다는 뜻이에요?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 그다음 다른 분이 한번 읽어보세요. 로마서 11장 32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아, 이거 참 보세요. 여기서 ‘모든’, ‘모든’은 개인차원이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집단 차원입니다. 사랑도 집단, 미움도 집단인데 32절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그다음 나오는 단어가 뭐죠?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그다음 뭡니까? “가두어 두심” 가두리 어장이죠.

가두어두셨다는 말은 자진해서 순종 쪽으로 나올 수 있는 위인이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거예요. 아무도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았다. 그리고 순종하지 못한다. 주께서 주신 말씀은 순종하라 해놓고는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순종하라는 말은 우리가 순종하지 못하는 자라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시는 말씀들이에요. 일체 순종 못해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이 순종할 만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주는 게 아니고, 순종 어림도 없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긍휼을 주시는 거예요. 순종할 가능성이 1도 없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신 겁니다. 순종할 사람이 있어야죠. 없는데 뭐요. 주님만 순종하고 나머지는 순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세계라 하는 것은 이것을 달라고 할 수 있는 권한자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아까 제가 부자 청년 이야기한 것처럼. 그냥 빈손으로 돌아가요. 내가 주지도 않았는데 네가 왜 찾으러 왔느냐? 내가 줄 생각도 없는데. 떼쓰면 내가 줄 것 같아? 네가 달라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영생이 아니고 네가 가려고 해서 갈 수 있는 천국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일체 인간의 것을 받지 않습니다. 이 지혜에 대해서 로마서 11장에서는 이게 얼마나 깊은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다음에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절)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그냥 말로 설명해서는 안 되고요. 하나의 예를 들면 설명할 수가 있어요. 요나 1장 12절, 요나 선지자. 어떤 사람이 배를 타는데 두 종류의 배가 있다고 합시다. 자, 배 탄 사람이 묻습니다, 선장한테. “이 두 배가 다 안전합니까?” 선장 하는 말이 “한쪽은 안전합니다만, 다른 쪽은 침몰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칩시다. 다른 쪽은 침몰합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한번 들어보세요.

“그러면 나는 어느 배에 타야 됩니까?” “침몰하는 배에 타셔야 됩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말이에요. 그럼 그 사람이 “침몰하지 않는 배와 침몰하는 배의 차이점이 뭡니까?” 이렇게 물을 게 아니겠어요? “침몰하는 배에는 선지자가 탔기 때문입니다.”

이게 요나서 1장 12절의 말씀입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지금 배가 침몰하는 이유는 뭐냐? 그 안에 말썽꾸러기 선지자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다. 말썽꾸러기 선지자.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이 세상이 무너지는 이유를 말썽꾸러기 선지자가 있어줘야 비로소 ‘세상은 왜 침몰하는 세상이냐, 왜 저주받은 세상이냐’가 보여지는 기회가 된다는 겁니다. 선지자가 탄 배가 침몰한다는 말은 선지자가 없어도 마지막에 결국 침몰한다는 거예요. 선지자가 탄 배도 침몰하고 선지자 안 탄 배도 침몰하는데 다만 선지자가 탄 배를 타야 될 이유는 침몰하면서도 이유를 알고 침몰하기 때문에 그게 낫다는 거예요. 이유를 알고.

그런데 당시에는 요나가 탔기 때문에 그 배가 아슬아슬하잖아요. 요나가 탄 배 이전에 배가 침몰했습니까? 잘 갔죠, 뭐. 비교해보세요. 요나가 안 탄 배는 정상적으로 항해 잘했는데 요나가 탔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 배는 지중해에서 침몰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그 침몰의 위기가 바로 기회죠, 기회. 이 세상 형편은 선지자를 통해서만 밝혀지잖아요.

마태복음 11장 보겠습니다. 오늘 성경 너무 많이 찾는지 모르겠다만, 찾아야죠. 11장 7절에 보면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보러 광야에 나갈 수 있죠. 광야라 하는 것은 인간의 선입감에 ‘광야는 이런 곳이다’ 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잖아요. 광야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있단 말이죠.

그럼 너희 갈대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아니잖아. 옥에 갇힌 요한이 옥에 갇히기 전에 말씀을 전했거든요.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광야에 있지 않고 왕궁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광야에 왜 나갔느냐? 선지자 보러 나간 거예요(9, 10절).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시는 것은 네가 영생을 얻느냐 안 얻느냐, 어떻게 행복하냐, 내 인생이 잘 풀리느냐, 자꾸 자기 생각하지 말고 먼저 찾아야 될 분을 찾아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모르는 하나님과 통하고 있는 분을 찾으면 거기서 내가 과연 영생 얻을 수 있는지 없는지, 내가 불행할 수 있는지 행복할 사람인지는 선지자를 통해서 비로소 알 수가 있다는 겁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그런데 사람들은 어디를 찾느냐 하면, 광야? 갈대 흔들리는 곳. 그리고 부드러운 옷 입은 자? 그건 왕궁을 찾는 거예요. 사람들은 ‘내가 누구냐’를 찾을 생각하지 않고 내게 무엇이 필요한가만 찾는 거예요. 이왕 성경 많이 찾는 거 오늘 부지런히 원 없이 한번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9장.

지금 계속 말씀드리는 것은 인간 속에 사랑이 없고 인간은 사랑이 없는데,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사랑이 와야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안다 이 말입니다. 안 그러면 자기가 사랑이 있는 줄 알고 있어요.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줄 알아요. 그게 다 엉터리인 거예요.

요한복음 9장 18절을 보게 되면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어떻게 지금 보고 있느냐 그 말이에요.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그러니까 예수님은 졸지에 소경 하나를 뭐로 만들었습니까? 선지자로 만든 거예요, 선지자로. 선지자의 변화에 대해서 선지자 아닌 자가 평가하거나 비판할 권한이 없다는 겁니다. 사람이 사람을 선지자로 만들 수 있습니까? 못 만들잖아요. 못 만들죠.

선지자는 권세가 어디서 와야 돼요? 하늘에서 내려와야 되잖아요. 하늘에서 내려온 자를 두고 인간은 그 사람을 평가할 권한도 자격도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뭐냐? 선지자 앞에서 무지몽매한 사람으로 규정되는 겁니다. 무지몽매한 사람으로 규정이 되는 거예요.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 돼요. 처음부터 다시. 이 내용이 하도 어려워서 다시 해도 괜찮을 거예요. 사랑은 하나님께 속했죠. 그럼 인간에게는 사랑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에겐 사랑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쭉 첫째 강의 들어보니까 나한테 사랑이 없다는 것이 뭐로 느껴져야 돼요? 사랑으로 느껴져야 돼요, 사랑으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적 없고 내가 이웃을 사랑한 적 없고 내 속에는 아예 사랑이라는 게 없다는 사실을 주님의 사랑이 올 때 비로소 우리는 그걸 알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둔다는 거예요. 그러한 세밀한 것, 하나님의 세밀한 작업이 전부다 사랑을 동반해서 일어난 일이에요.

에베소서 1장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의 편지는 아주 시원시원해요. 1장 6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이렇게 되죠. 사랑은 거저 주는 거예요, 사랑은. 사랑은 헌금했다고 주고 기도했다고 주고 이런 거 없어요. 그냥 줘버려요, 사랑은.

헌금해서 사랑을 받아버리면 이것은 어디에 어긋나냐 하면 바로 로마서 11장에 어긋납니다. 자기가 바침으로써 대가 얻는 식으로 획득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35절) 이거는 액자 할 만합니다, 이거. 프린트해서 액자로 집 현관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딱 걸어놓게 되면 그 집에 온 모든 손님들이 평화가 있을지어다.

주께서 일방적으로 사랑을 줬는데 여기에 무슨 사랑에 대해서 내가 요렇게 하니까 사랑이 왔다는 그게 성립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져 있기 때문에. 가두어져 있다는 것은 갇혀있다는 거예요, 갇혀있다. 갇혀있는 거예요.

호세아 2장 23절,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일방적으로 주님의 자율성이죠.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의 고백은 어떤 고백입니까? ‘나는 하나님 백성 될 어떤 자격도 없고 하나님께 긍휼을 받을 어떤 입장도 못됩니다.’ 하는 것을 긍휼을 받고 난 뒤에, 백성이 되고 난 뒤에, 입이 째져가면서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면서 고백하게 되죠.

그리고 남들이 그 사람에게 묻죠. 당신은 어떻게 사랑을 받았습니까? “너는 어떻게 해서 소경인데 눈을 떴느냐?” “몰라. 어떤 분이 와서 그렇게 했어. 어떤 분이 그렇게 했어.” 다른 사람이 “그럼 너희 아들은 그리스도를 믿나? 믿으면 출교 당하는데 믿나?”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이거는 믿고 자시고가 아니라 그분이 그렇게 일을 저질렀다니깐. 내가 고백하는 것은 그거야.”

믿어서 얻은 게 아니에요. 예수 믿어서 눈 뜨게 된 게 아니고, 그냥 주님께서 일을 저질러버렸어요. 눈 감았던 나를 눈뜨게 했는데, 눈이 떠진 수동적 입장이고 피동적 입장에서 내가 달리 뭐 ‘나 눈 떴다.’ 이런 이야기는 할 수가 없죠. “나는 예수님이 메시아인줄 이제 알게 되었다.” 이렇게 고백하고 “나는 주님의 사랑을 받았고, 주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렇게 고백하는데, 다른 사람이 “너 건방지구나. 네가 뭘 바쳐서 무슨 뇌물을 바쳐서 그걸 따냈어?”

따내기는. 어디 거래첩니까? 작업 따내는 거예요, 지금? 뭐 뇌물 줘서 따내는 겁니까? 이런 조로 계속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나의 인생에 가정 문제라든지 자식 문제, 남편 문제, 직장 문제, 결혼 문제, 건강 문제 이 모든 문제가 사랑 앞에서는 이게 문젯거리도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문젯거리가 돼요? 내가 어떤 고민을 한다는 것은… 이건 적어야 돼요. ‘내가 무엇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미련이 남아있다는 뜻’이잖아요. 나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게 되어버리면 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으로 ‘난 백성 아닌데 백성 되었다.’ 이런 이야기가 잘 안 나와요. ‘난 사랑받을 수 없는 자가 사랑받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가 잘 안 나온다고요.

정신머리, 관심사가 자기한테 있기 때문에. 자기의 가치에 대해서 아직도 애착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미련이 있는 사람의 예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노래 가사 하나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제비꽃>(1985)
조동진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멀리 새처럼 날고 싶어

내가 다시 너를 만났을 때
너는 많이 야위었고
이마엔 땀방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와

내가 마지막 너를 보았을 때
너는 아주 평화롭고
창 너머 먼 눈길
너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아주 한밤중에도 깨어있고 싶어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에는 제비꽃’ 이렇게 되면 너를 만나지 않았을 때와 처음 만날 때의 시간이 둘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아로나민 골드를 먹은 날과 아로나민 골드를 안 먹은 날과 나누어지듯이. 이러면 내 시간이 둘로 쪼개지죠. 내 시간이 둘로 쪼개집니다.

하나의 이스라엘을 반으로 쪼개서 그 쪼개진 남쪽, 북쪽 이스라엘을 서로 마주보게 해버리면 둘 다 똑같은데 쪼개진 이유는 서로에게 발견되지 않아요. 그 틈에서 발견되죠. 누가 우리를 쪼갰느냐? 쪼개놓고 마주보니까 둘 다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똑같이 우상 숭배하는 인간들이에요. 똑같은데 왜 굳이 쪼개느냐? 그것은 그 틈에서 나온 세계가 이미 기존에 있는 세계보다 더 크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어제 수요설교(250611『제사장 없애기』) 요약에 ½+½>1에요. ‘1/2 더하기 1/2은 1보다 크다’에요. ([그러면 ½+½은 온전한 1이 될 것 같지만 그 틈, 간격, 간극을 통한 새로운 범위의 세계가 출현합니다. 이 세계가 곧 ‘제사장의 세계’입니다. 기존의 모든 인간세계의 의미를 죽음으로 덮어버립니다.])

쪼개놓고 마주보게 하니까 쪼개기 전에 나타나지 않던 틈이 기존의 1보다 더 큰 거예요. 그게 ‘온전한 이스라엘’이에요. 온전한 이스라엘. 기존의 것은 이스라엘이 될 수 없죠. 어제 수요설교 이야기입니다. 시간을 대칭시키는 방법인데, 양자물리학자들이 양-밀스 방정식(Yang–Mills equations)을 통해서 세상에 있는 것들을 다 합쳐도 세상의 중량보다 뭔가 늘 모자라고 미지의 것이 남아있다는 거예요. 그걸 과학적으로 논하는 방법이에요.

성도가 되어서 주님의 사랑을 받았을 때 내가 사랑받을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았다. 사랑받을 만한 어떤 행위를 하지 않았는데 그 모든 행위를 다 플러스해서 모아보면 그것보다 사랑은 더 크게 주어지는 거죠. 로마서 5장.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를 보면서 내가 이 점을 처음 알게 되었었어요.

로마서 5장 15절부터 보면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그다음 뭡니까? “넘쳤”다는 이 대목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아주 강조하고 있는데 그건 잘 강조한 거예요.

20절에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더욱 더 넘친다. 이 대목을 설교할 때 제가 예를 든 게 뭐냐 하면, 신혼 때 공부한다고 방에 있는데 바깥에 수도꼭지 틀어서 물 받고 있는 걸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나중에 물소리 나서 보니까 물이 바케스를 넘쳐흘렀어요. 넘쳤는데 그때 하필 공부한 게 로마서 5장 이 대목이었어요. 타이밍이 먹어주죠.

흘러넘치는 거예요. 죄를 사하는 게 아니고 “어디 있나, 죄? 죄 어디 갔어?” 죄를 찾을 수가 없어요. 물에 다 씻겨 내려가는 것은 기본이요, 거기다 보너스, 의가 넘치니까요. 범죄는 이만큼 했는데 의는 그보다 훨씬 더 크게 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는.

만약에 범죄한 것만 죄 씻음 되어버리면 이건 어느 시절로 돌아가느냐? 아담과 하와가 죄 짓기 전에, 의인된 상태가 아니고 죄 없던 상태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럼 항상 또 죄를 짓게 되면 죄 사함도 같이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회개라는 것은 죄 지은 것에 대해 죄 사함이 회개가 아니라, 죄가 있는 곳에서 의가 있는 곳으로 모가지를 돌리는 게 회개에요. 다른 세계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또 새삼스럽게 느끼게 하는 겁니다. 네가 다른 세계에 속해있다는 사실.

그리고 로마서 6장에 보면 그리스도인은 ‘내가 의인되었다’가 아니라 잘 들어야 돼요. 내가 의인된 게 아니고 내가 ‘의의 종’이에요. 완전히 다르죠. ‘나 의인 돼서 구원받았다’ 이게 아니고, 구원의 종이에요. 뭘 해도 구원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을 이걸 선전하는 사람이에요. 예수님, 하나님의 의, 그 나라 의를 선전하는 사람이에요. 이게 성도에요.

막 사세요. 막 살 자신감 없으면 그 사람은 아직도 자기한테 미련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사랑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에요. 두 번째 시간에는 이 머물러 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쪽은 어떻게 대처하느냐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10분 쉽시다.

 

 

 

서울강의20250612b 요한일서 4장 7절(사랑의 보관함)-이 근호 목사


성경에서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미움도 같이 이야기를 해줘야 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게 언약의 내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성경 제일 끝에 나오는 말라기 1장에 보면 1장 2-3절,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에서가 형이라는 것을 단정하고 “형이다. 맞아, 형 맞아. 하지만 나는 둘째를 사랑했다. 형은 미워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의도적으로 인간의 선입감을 틀어버리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그것은 인간이 사랑할 것을 미워하고 있고 미워할 것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일부러 거꾸로 뒤집어버려요. 에서는 형이지만 내가 미워했다. 형은 아버지의 모든 유산을 이어받기 때문에 다 사랑하게끔 되어있지만 나는 너희들과 반대로 가겠다. 반대로.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의식하고 반대로 가는 거예요.

그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반대-하나님 추락 프로젝트’ 하나님의 추락 프로젝트, 이게 바로 희생이에요. 하나님이 희생했다는 것. 하나님이 누굴 위해서가 아니라, ‘누굴 위해서’ 빼버리고 그냥 ‘하나님은 추락하시는 하나님’.

자기가 추락되기를 원하는 인간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것도 틀어버리는 거예요.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을 하나님이 해버리는 거예요. 빌립보서 2장에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해놓고는 아무도 그 마음을 품은 자가 없음을 전제로 해서 주님께선 인간이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해버리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추락 프로젝트, 희생이에요. 희생. 하나님의 희생. 하나님의 망가짐.

“믿으세요?” “뭘 믿어요?” “하나님을 믿으세요?” “예.” “그럼 망가진 하나님과 망가지지 않은 하나님, 어느 쪽을 믿겠습니까?”라고 하나님께서 우리 쪽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망가지는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멀쩡한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묻는 거예요. 멀쩡한 하나님은 바로 악마가 인간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그러한 식의 신이죠. 대단한 하나님, 멀쩡한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우수한 하나님. 흠모할 만한 게 약간이라도 있는 하나님. 인간은 그런 하나님을 찾고자 하고 있습니다. 찾는 거예요.

솔로몬이 하나님을 사랑했지만 뭘 못 버렸어요? 산당에서 제사하는 걸 못 버렸어요. 산당엔 뭐가 있느냐? 산당은 우상을 섬기는 곳이에요. 그만큼 솔로몬은 아직도 온전한 사랑의 위상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이기 때문에. 신약에 와서 모든 게 완성이 되어야 되는데 중간에 흘러가는 과정 속에서 솔로몬이 등장하잖아요. 다윗도 마찬가지죠.

자, 하나님이 왜 이렇게 추락하고 희생하고 그리고 이렇게 망가졌는가? 그것은 인간이 자기 모습을 위장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자기를 그럴싸한 존재로 위장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잠언서 10장 12절에 보면 인간의 한계가 나오는데요.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여기 다툰다는 말은 혼자서 다투는 법이 없죠. 다툰다는 것은 두 인간 이상이 있을 때 다툼이 성립돼요. 그런데 다툰다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할 경우기 때문에 서로 다투잖아요. 그럼 미워한다는 말은 어떻게 성립되느냐 하면 자기 손해 안 보려고 하기 때문에 미움이 발생되는 거죠. 자기 망가짐 프로젝트, 추락 프로젝트 이런 것은 인간에게 가동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간에 전에 울산강의에선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은 자기를 수호하고 자기를 보전(보존)하는 거예요. 자기를 보전하고 수호하는 것, 온통 정신이 여기에 다 팔려있습니다. 자기 걸 수호하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다투고 또 다투고 맨날 다투고 다투는 것밖에 없죠. 거기서 발생되는 게 미움이다 이 말입니다.

인간들은 이 미움에 대해서 잘 생각 안 해요. 자꾸 하나님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고, 사랑을 받아서 어떻게 또 사랑합니다, 사랑을 주셨으니… 자꾸 사랑관계로 해야 된다고 하지, 미움관계로 하나님께 접근을 안 해요. 제가 쓴 책 제목을 『지옥의 하나님』이라고 해놨더니만 많은 사람들이 조언을 했어요. “이래가지고 책 안 팔립니다. 어느 인간이 지옥을 찾아요? 지옥을 찾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지옥을 찾는 이가 없어요. 그게 잘못된 것 아닙니까? 지옥이 없습니까? 있잖아요. 그러면 지옥을 알아야 되잖아요. 있으니까 알아야 되는데 가기 싫으니까 자기가 안 받겠다는 거예요. 지옥이 있다 했으면 지옥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되는 건 당연한 건데, ‘지옥의 하나님’하면 ‘설마 사랑의 하나님이 지옥을 만들었겠지만 그거는 관심 뚝 끊으라고 지옥을 만들었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색은 마귀에서 나왔거든요. 그래서 이 미움에 대해서 이번 시간에 한번 생각해봅시다. 유다서, 요한계시록 바로 앞에요. 유다서 1장 9절,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이 대목.

이 대목에서 모세의 시체에 대해서 마귀와 미가엘이 다투고 있는 거예요. 모세의 시체에 대해서 마귀가 모세의 시체를 달라고 하는 거예요. 왜? 모세의 시체를 왜 달라고 했을까? 왜 달라고 떼를 썼을까?

악마가 모세의 활동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활동도 악마가 알고 있어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 사도행전 19장에 나오는 말씀이죠(15절). 그렇다면 악마가 하나님의 선지자 활동을 주시하고 주목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모세의 시체에 대해 달라고 한 것은, 악마는 자기의 전리품, 기념물로 삼고자 한 거예요. 자신의 승리로. 자기가 우월하고 자기가 우세했고 자기가 승리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모세는 죽었지만 자기는 멀쩡하다 그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했습니까? 악마는 자기가 승자되기 위해서 모세의 죽은 시체를 달라고 하면서 자기가 잘났음을 증명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승자가 되는 게 아니고 반대로 패배자가 되어버렸죠. 패배자가 된 거예요. 패배자가 되었다면 악마가 이번에는 누구 시체를 가져가려 하겠어요? 악마가 예수님 시체도 가져가려 하겠죠. 죽었으니까.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가 악마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죽은 예수님을 사흘 만에 살렸어요. 그때 성경은 사도 바울은 의미심장하게 표현합니다. 이 두 문장에 차이가 있어요. ‘예수님은 죽은 데서 살아났다’가 아니고,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이 죽은 데서 살아났으면 이건 뭐 에녹이나 엘리야나 아니면 죽었다가 ‘달리다 굼’해서 일어난 소녀와 똑같이 되죠. 죽었는데 살아났다,가 되죠. 밑의 문장은 뭡니까?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최초로 처음으로 죽음 그 자체로부터 죽음의 힘으로부터 최초로 벗어난 분이에요. 그것도 능력으로 힘으로 벗어난 분. 그래서 예수님은 승자가 된 거예요, 부활을 통해서.

요한복음에 나오죠. 16장에 보면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절) 세상을 이겼다는 말은, 죽음도 이제는 예수님의 발목을 못 잡는다. 붙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건지고자 한 자를 어떤 누구도 예수님의 권세에서 끊고 다시 마귀 쪽으로 잡아당길 그러한 권세는 이 세상에 어떤 권세도 이제는 남아있지 않다는 거예요.

주님이 관여했다면 어떤 권세도 그 구원을 방해할 자는 없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8장에, 사망이나 권세나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35-39절).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러한 부활의 권세가 되기 위해서는 죽음의 권세 아래 있는 곳까지 주님께서 내려가시는 것이 당연하죠. 추락 프로젝트가 당연한 거예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모든 영광을 버리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은 너무나 마땅한 과제입니다. 코스고요.

그냥 뭐 설교나 하시고 “열심히 해라. 나한테 순종하고. 너 나한테 기적 받았지? 너 물 위를 걸었잖아, 베드로야. 그러니까 이제는 그걸 기억해서 네가 알아서 열심히 해봐라.” 세상에 이래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산상설교 이야기하고 설교 듣고 뭐 말기 암인데 낫고. 말기 암에서 나을 수는 있어요. 그러나 구원받은 건 아니에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부활의 영이 와야 돼요, 성령. 부활의 영이 올 때는 어느 누구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겼으니까요.

자, 그렇게 본다면 잠언 8장 35절, 36절,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그다음 뭡니까?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나를 미워한다는 것은, 이 예수님을 미워한다는 것은 지금 이미 미움 받는 자의 편에 완전히 넘어가 있다는 거예요.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 저주죠, 사망을 사랑한다는 말은… 아까 악마가 모세의 시체를 달라 하잖아요, 이미 악마 편으로 완전히 선회했다, 선회한 거예요. 악마의 존재로 말미암아 주님은 미워할 자라는 규정이 점점 더 확실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사랑은 미움과 함께 드러나는 거예요. 미움 없는 사랑이 없고 사랑 없는 미움이 없없습니다.

여기서 밉다는 것은 미움 받을 짓을 한 게 아니에요. 그냥 태어날 때부터 악마의 권세 안에 사로잡히도록 작정되어 있는 자들이 본성적으로 주님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잠언서 8장 35, 36절은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없이 둘 중 하나를 택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주님을 사랑하든지 아니면 주님을 미워하든지 그 둘밖에 못해요, 둘밖에.

고린도전서 16장, 오늘 어지간히 많이 찾는데 원 없이 한번 찾아봅시다. 여기 미움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미움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미움을 미움이라 표현하지 않고 주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뭐를 받을찌어다? “저주를 받을찌어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것도 하나 프린트해서 액자로 거실에 해놓으면 좋겠죠. 그다음부터는 빚쟁이나 누구든지 겁나서 못 오죠. 집 팔 때는 이거 떼고 해야 돼요. 안 그러면 집값 내려가니까.

제가 방금 선택한다는 말을 했는데 선택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강권하는 것입니다. 강권적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강권, 강제권 동원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강권한다.

강권한다는 말은 우리가 사랑을 예상한다, 안 한다? 전혀 사랑을 예상 못하는 거예요. 우리는 일단 하나님을 미워하는 쪽이에요. 우리는 특히 이방인이기 때문에 주님이라는 것을 모르죠. 그리고 모든 인간은 이미 태어나면서 우상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자기에 대한 미련과 애착, 자기사랑 여기에 부합되는 신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어요. 그 대표적인 신이 뭐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특징은 이거에요. ‘부재함으로써 존재하는 것’. 부재함으로써 존재하는 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입니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절대 나타나면 안돼요. 나타나면 가짜에요. 안 보여야 진짭니다. 이게 신입니다. 인간의 신 의식이에요.

인간의 생각+여분으로 인간이 만들어냈기 때문에 그것은 항상 비어있는 장소가 되어야 돼요. 그래야 자기가 든든해요, 그 신에 대해서. 비어있는 장소의 신이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면 인간한테 혼납니다. 혼나요. 그래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올 때는 반드시 애가 잠잘 때 선물을 줘야 돼요. 잠잘 때. 잠 안자거든 위내시경 하면 돼요. 위내시경하면 잠 안잘 수 없어요. 나중에 깨보니까 벌써 조사 다해버렸는데. 애한테 너무 잔인하지만.

인간의 신은 보이지 않음으로써 신으로 행세를 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초를 쳐버려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떻게 옵니까? 이 땅에 말씀이 육신이 돼서 찾아와버렸어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전력을 다하여 당신 가짜라고 이야기해요. 당신 가짜다.

예수님이 옴으로써 그들이 들통 난 게 있습니다. 예수님이 노골적으로 이야기했어요. “너희는 나를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너희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섬겼다.” 이렇게 돼요.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너희가 믿었던 것은 마귀다.’라는 뜻으로 설명하죠. 마귀는 특징이 뭐냐? 하나님께 이미 미움 받았어요. 미움 받은 거예요.

아까 어려운 부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말라기 1장에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했다. 하나님의 사랑이 등장할 때는 반드시 미움도 같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과 미움이 오기 전에 이미 인간은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를 본인이 정해놓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하고 나한테 잘해준 사람은 사랑하는데, 나한테 해코지하는 사람은 무조건 미워하기로 인간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그런데 주님은 어느 쪽으로 갔는가? 사랑하는 하나님 모습이 아니고, 미워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이 와버렸으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어 있고 그 미워함을 통해서 그들은 예수님께 미움 받아도 마땅한 자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통내는 겁니다.

심지어 전도서 9장 1절 같은 경우에는 상당히 도발적인 말씀이 돼요. 이 전도서 9장 1절 말씀을 보고 많이 잠을 못 이루어야 돼요. 여기 보면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아주 미칠 일이에요. 한 60년 교회 다녀도 소용없어요. 아무 소용없어요. 모른다는데 뭐.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포커나 화투 치는 것도 맨날 화투 안 보여주고 남 안 가르쳐주면 화투의 재미가 없잖아요. “돈 깔아. 나도 얼마 타고.” 해놓고 반드시 뭐가 하이라이트입니까? 상대방 패가 궁금하잖아요. “패 까, 패 까자.” 패 깔 때 자기 예상에 맞는지 안 맞는지 그게 궁금해서 화투를 치는 거예요. 맞는지 안 맞는지 그게 궁금한 거예요.

할머니들 10원 내기 고스톱 치죠, 노인정에 가면. 화투를 칠 때 항상 끝이 보고 싶은 거예요. 48장을 몰래 가져가잖아요. 몰래 쥐고 안 보여줘. 안 보여주니까 부재 아닙니까, 부재. 우상이거든요. 우상을 보면서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짐작한 것, 상대방 패에 대해 짐작한 것이 맞는지 안 맞는지 그게 나에게 흥밋거리가 되고 새로운 진지함으로 작용되어서 화투치면서 시간가는 줄 모르는 거예요. 화투치면서 시간가는 줄 몰라요.

한국 축구 대표팀하고 이라크 대표팀이 경기할 때 그렇게 사람들 관심이 많은 이유가 이걸 이기면 11회 연속 월드컵에 올라가고 만약에 비기거나 지면 또 이거 초조하게 기다려야 된다고요. 쿠웨이트하고 할 때. 그런데 2대 0으로 이겼잖아요. 그다음부터 쿠웨이트는 젊은 애들 보내서 4대 0으로 이겼어요. 약간 시시해요, 그때부터는.

사람 사는 게 조마조마한 면이 있어야 되거든요. 조마조마한 면. 내 예상, 내 촉이 맞는지 안 맞는지, 자기가 대단한 예언자인 것을, 자기 존재의 가치가 이 정도까지 예측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자기가 확인하고 싶은 그것이 사는 보람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그런데 전도서 9장 1절 같은 경우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을 다 빼버려요. ‘나 분명히 구원받을 거야. 오늘밤에 가도 네게 구원이 있으리라 할 거야. 분명해.’ 그런데 쓱-하고 뭔가 하나 눈앞에 들어오는 거예요. ‘이거 주문했습니까?’ 하고. 보니까 짜장면이 아니고 뭐라고 되어 있어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니까 네가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은 알지 못한다.’ 악, 안돼~! 패를 언제 까는 거야, 패를? ‘너 패스. 합격.’ 이걸 까야 되는데 이걸 계속 미뤄놓으면 초조해서 바짝바짝 사람 야위죠. 야윈다고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유명한 말씀이죠. 지금까지 실컷 사랑이야기하고 사랑은 강권한다 했는데 전도서 9장 1절 쓱 들어오니까 와르르 다 무너지는 느낌 안 듭니까? 내가 뭐 하러 믿고 교회 다니고 복음 듣는데, ‘모른다’는 안돼! 뭐 알아야 돼. 내 자신의 확정된 미래가 있어야 돼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보게 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그 뒤엣말이 나와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를 사랑하사.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 먼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전부, 그 정보의 전부, 전체 정보가 사랑으로 이렇게 나타났다는 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나는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사랑이 산다.” 이런 고백을 하고 있거든요.

그럴 때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또 착각하고 있다. 전도서 9장 1절 읽어봤어? 모른다 했잖아. 자꾸 장담하려고 하지 마. 확답 지으려 하지 마. 몰라. 모르는데 자꾸 네가 사랑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확정짓는 그런 건 안돼. 끝까지 갈 때까지 가는 거야. 죽고 난 뒤에 구원받을지 안 받을지 누가 알겠어?”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면 어떻게 돼요? 이거는 성경말씀에 위반되죠.

그래서 21절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뭡니까? “헛되이 죽”었다. 이게 전도서 9장 시대에 이야기하는 것과 신약 시대에 이야기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거죠.

전도서 9장에서는 확정되지 않았다. 모른다. 주께서 패를 안 깐다. 신약은? 패를 깠다는 거예요. 패를 깠다. 전도서 9장은 구약입니다. 구약에서 주께서 그렇게 이야기하시는 것은 어떤 조건이냐? ‘내가 구원받을지 안 받을지 그건 주님 손에 있다’는 이 말을 이렇게 고쳐야 돼요.

내가 사랑받을지… 내가 미움 안 받는다면 사랑 안 줘도 난 관계없는데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이고 그 미움이 같이 오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사랑 안 받으면 뭐 받아요? 미움 받는다는 겁니다. 미움 안 받는다는 말은 이미 사랑의 대상이라는 뜻이에요. 둘 중 하나밖에 없으니까, 사랑과 미움에 대해서 그만큼 신경을 날카롭게 할 수밖에 없죠.

‘내가 사랑받을지 나는 모르고 나는 나의 결정에서 떠났다. 이것은 하나님의 결정에 달렸다.’ 이게 구약이죠.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서 이게 어떻게 바뀌느냐? 이렇게 돼요. 구약에는 이렇게 결정이 미뤄졌지만 신약에는 ‘확정되었다’가 아니고, 뭐가 확정되었느냐 하면 ‘내가 죽은 자로 확정되었다’.

구약은 안 죽었어요. 안 죽고 기다려야 돼요. 합격통지가 언제쯤 오는지 기다려야 돼요. 주께서 패를 깔 때까지 나는 기다리겠다. 신약은 기다림이 없어요. 기다릴 자가 없어요. 왜? 인간은 죽었으니까. 죽은 자에게 찾아와서 똑똑 두드려요. 합격. 죽은 자가 기다린다는 말은, 나는 안 죽었는데?

주님이 살아있고 우리가 죽은 것이 현실에 맞거든요. 주님이 살았고. 왜? 부활의 영이 있으니까 죽음에서 벗어나 살았잖아요. 우리는 죽음 안에 있으니까 죽은 것 맞잖아요. 그런데 죽음 안에 있는 자는 본인이 살았다고 여기거든요. 죽음의 세계 바깥에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 분이 살아서 나에게 노크를 하는 거예요. “야 이 죽은 자야. 그래, 죽어있어. 나만 살면 되니까.”하고 새삼스럽게 우리가 죽은 자라는 것을 통보하는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이미 합격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오는 거예요.

주일 낮 설교에서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구원받는 것은 살았는데 죽었던 분, 그 죽었던 분이 다시 나에게 찾아오면 구원이 된다는 말을 했어요. 또 한 가지 이야기했죠. 우리가 예수를 못 믿는 것은 충분히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주님을 배신하게끔 되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아있는 과제는 충분히 예수님을 배신하고 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이 살아계심은 뭘 이겼어요? 우리의 불신과 죽음과 악마로부터 이겼잖아요. 그 이김이 이김으로 드러나기 위해서 이미 이겨냄 앞에서 우리는 불신과 배신으로 충분히 일관해야 되죠. 수시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결정과 우리의 판단과 지식을 믿기 때문에 그래요. 수시로. 우리 불신의 세계에서 빠져나와서 주님이 찾아왔다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우리의 가능성은 뭡니까? 전부다 불신 덩어리고 자기에 대한 아집이고 고집인 거예요.

나의 인생을 내가 처리하려고 관리하려고 애를 쓰는 그 아등바등하는 모습을 우리는 주님한테 가볍게 매일같이 들키는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늘 그걸 들켜야 돼요. 주께서 다 하셨다는데 우리는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아등바등 애를 써요.

이것도 한번 성경 봐야 돼요. 얼마 전에 했는데 저는 늘 달이고 달이고 우려도 계속 맛이 난다는 국밥집 국물처럼 이 말씀은 저한테 그런 말씀이에요. 마태복음 6장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이미 주께서 이 말씀을 할 때 천부께서 친히 기르신다는 거예요. 꼭 곰탕 같아. 우려도 우려도 계속 맛이 나는. 기르시는 거예요. 기르실 때 우리에게 기르실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없는데 무조건 길러줘요, 우리를. 천부께서 아버지께서 길러주신다고요. 길러줄 때 그 기르시는 방식이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될 때 그 아들이 하는 모든 것이 무엇과 연결되느냐?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기르시는 방식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기르신다는 말이 뭡니까? ‘지금껏 내 인생은 내가 악을 써서 이만큼 버텨내고 있고 그만큼이라도 내가 보전하고 있다.’ 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하는데 그 생각이 바로 미움 받을 짓이고 불신의 생각이라는 것을 기쁜 마음으로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육신에서 나오는 모든 나에 대한 집착이 이게 바로 불신이라는 사실. 이게 주님에 대한 배신이고 친히 기르심에 대한 배신이에요. 사랑에 대한 모독인 것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겁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고 내 사랑, 곧 주님에 대한 미움이죠, 내 사랑을 경유해서 비로소 사랑이 반복해서 나오지, 처음부터 사랑하는 것은 없다 이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 성도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한 대목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다. 할례나 무할례는 율법이에요. 율법이 행한 것은 효력이 있어요, 없어요? 효과 없어요. 아까 전철타고 오는데 가산디지털 단지역에서 전철이 안 가요. 냉방도 안 되고. 전기 끊어졌답니다. 그래서 난리 났어요, 저 동네. 차를 탔는데 안가. 가지를 않아요. 교회 다니고 예수 믿고 성경공부 다 했는데 이게 안 가요. 천국으로 가지를 않아요. 거기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5장 6절은 그 원인을 말합니다. 법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니까요. 이것 또 지켰습니다, 헌금 했습니다, 뭐 했습니다 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어요.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믿음도 소용없어요. 믿음 안에 뭐가 들어가야 돼요? 사랑. 사랑으로 꽉 차있는 믿음. 사랑으로 꽉 차있는 믿음, 그 사랑은 주께서 죽음을 이김으로써 오는 거예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죠. 따라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죄 아닌 게 없다고 알려주는 사랑, 그 차 제대로 타신 겁니다. 그 차 안에는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되는 거죠.

그럼 죄에 대해서 항목을 나열해보겠습니다. 죄 리스트입니다. 간단하죠.

1.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 이게 죄죠. 내가 존재하는 게 죄에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존재하는 것을 의식하는 게 죄죠. 존재하는 것을 의식하는 게 죄.

2.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이것이 죄입니다. 아침에 눈 떠서 죄 안 지을 때가 없어요. 아, 잘 잤다. 그거 죄입니다. 뭘 잊어버렸어요? 어젯밤에 네가 갔어야 돼. 이걸 놓친 거예요. 오늘 또 뭘 하지? 내가 은혜로 살아있다는 것을 갑자기 잊어버린 거예요. 친히 기르신다는 것을 완전히 고려 안한 거예요. 어제 아로나민 골드 먹어서 잘 잤나, 이런 거. 역시 먹는 날과 안 먹는 날이 차이 나, 이런 거 있잖아요. 무한대니까 뭐든지 해도 돼요.

3.오늘 뉴스 어떤 게 있지? TV한번 켜볼까? 이게 죄가 되는 거예요. TV 켤 때는 의도가 있죠. 무슨 의도? 트럼프가 오늘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 TV를 켬으로써 여기서 정보가 나오잖아요. 정보, 여러 가지 지식, 이 세상 정보. 세상 정보가 다 뭡니까? 우리 80억 인구가 여기 있고 80억 인구가 여기 살아있다, 이것을 부정하지 못하는 정보가 세 번째, TV를 통해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가게에 손님 오시거든 속으로, 속으로만 하세요, 진짜 하면 안 되고. ‘죄인 어서 오세요. 죄인. 야, 또 죄인 왔다. 죄인 뭐 드릴까요?’ “떡볶이 두 접시.” “포장할까요, 어떻게?” 자칫하면 말 튀어나오죠. “이 죄인한테 떡볶이 두 접시…”아, 죄인하면 안되지. 전과자 아니지. 말조심해야 돼.
4.하나님 섬기기, 이게 바로 죄 아닙니까. 하나님 섬기기. 저는 하나님을 섬기고 싶습니다. 하면 주님께서 왜? 왜 섬기고 싶은데? 내가 친히 기르신다잖아. 네가 섬겨서 그 섬긴 덕으로 네가 살고자 하지. 내가 친히 기르신다. 특히 재밌는 게 마태복음 6장에서 제가 속으로 이건 하나의 코미디 같다는 느낌 드는 대목이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들풀을 사랑하면 아궁이에 안 들어가야 돼요, 내일. 아궁이에 내일 들어갈 거 오늘 왜 입히십니까? 이게 말이 안 되거든요. 하나님께서 입혀서 아궁이에 집어넣는 거예요. 입혀서, 친히 길러서 아궁이에 집어넣는다고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도 주께서 잘 키워서 팔리게 만들어요.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은혜에 은혜를 더한 거예요. 왜냐하면 죽었으니까. 죄인이니까.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에요. 죄인을 부르러 왔죠. 주님 보시기에는 딱 두 종류 인간밖에 없어요. 죄인, 그리고 내가 불러서 의인된 것, 딱 두 종류밖에 없어요.

그래서 주께서 누굴 미워했다 할 때는 그 미움 받은 자가 거기에 대해서 조금도 불평하면 안돼요. 지옥가도 불평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주님의 일방적인 선언이 자기에게 도래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천국 가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일방적인 선언이 가득 차 있는 배를 타세요. 거기에 하나님 스스로 망한, 추락한 프로젝트로 가득 차 있는 거예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환경입니다.

모조리 죄밖에 없고, 죄밖에 없다는 것을 기초로 해서 성경에 주의 하신 모든 말씀을 들으면 그야말로 이해 안 되는 게 없어요. 이건 찾아볼 필요 없이 여러분들이 잘 아는 이야기, 요한계시록 2장 4절, 처음 사랑 내놔. 처음 사랑을 내놓으라는 이 말은 구약 때 사랑구절에 보면 굉장히 많이 나와요. 특히 아가 같은 데도 굉장히 많이 나와요.

이게 뭐냐 하면 사랑을 쑤셔 넣고 그 사랑이 잘 있는지를 확인하는 하나의 보관함으로서 우리를 사용하는 겁니다. 자기사랑을 집어넣고. 왜?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우리에게 뭐가 없다? 사랑이 없어요. 사랑이 없는데 화목제물이라는 사랑을 집어넣고 수시로 잘 있는지를 확인해가는 거예요. 수시로.

수시로 확인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를 말하는가? 우리 곁에 여러 사람이 들락거리게 만들어요. 여러 사람이 들락거리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고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느냐?’ 묻는 겁니다. 사랑을 집어넣고 하는 거예요, 사랑을 집어넣고. 사랑을 집어넣고 사랑 가운데 서로 교제하라는 말이 나와요. 에베소서 같은 데 보면. 사랑 가운데 서로 교제하라.

사랑이 없는 사람 같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사랑이라도 끄집어내겠죠. 그건 엉터리죠. 그거는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주어지면 반드시 미움이 동반되죠. 사랑이 의라면 의가 작용하는 가운데 반드시 뭐가 드러납니까? 죄가 드러나죠.

사랑-미움, 의-죄 이런 것은 사랑을 받은 자에게만 느껴지는 감정이죠. 진짜 사랑을 안 받은 사람들은요, 이게 기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니까요. 내가 죄인 되고 내가 미움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이게 감격과 기쁨으로 오지를 않아요.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요한일서 4장 7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보세요. 사랑을 꽂아놓고 그다음부터는 네 사랑 말고, 다시 말해서 너를 천하의 죄인으로 만들고 ‘나는 미움 받아도 할 말 없을 정도로 마땅해.’라고 하는 그 마음을 서로 내놓고 교제하라 이 말이에요. 그게 주님의 사랑만 유통되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내 사랑이 왜 낍니까? 죄인인데요. 나는 미움 받아 마땅한 인간인데 거기에 내 사랑이 왜 들어가요? 안 들어가죠.

그다음 8절을 봅시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 말이요. 말이 안돼요, 이게. 왜 말이 안 되느냐 하면, 나는 누구냐? 나는 나지, 뭐. 같은 말을 왔다갔다 하잖아요. 왜 사랑 안합니까?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죠. 왜 하나님을 모릅니까? 사랑받지 못해서 그렇죠.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이 말 취지가 뭐냐 하면 하도 가짜가 많으니까 사도 요한이 사랑만 나오느냐 여부로 진짜 천국 백성인지 아닌지 가름하자는 거예요. 그 이야기에요.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고백한다고 그게 사랑이 아니잖아요.

사랑이 나와야 돼요. 내가 사랑했다,가 나오면 안 되고. 그냥 사랑이 나와야 된다고요.
사랑이 나를 진두지휘해야 돼요. 내가 사랑을 갖고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사랑을 다룰 수 있는 게 아니고, 사랑이 나를 다루면 되는 거예요.

 

이 방식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살리려 했다니까 이제 여러분들 이해하실 거예요. 우리는 어떤 상태였다? 죽은 상태였다. 이건 뭐 사랑받은 사람은 늘 당연한 거예요. 왜 죽었습니까? 죄 지어서 그래요. 아니,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이 땅에 태어났고 존재하고 있고 내가 살아있다는 의식 자체가 뭐라고요? 이게 죄니까 죄 아닌 순간이 없다는 것이 이게 그렇게 기쁘게 다가와야 돼요.

죄만 있으니까 죄가 있는 곳에 뭐가 넘치죠? 은혜가 넘치죠. 살만하죠. 살만한 거예요. 내게 주어진 모든 일어나는 일들은 주님의 사랑을 점검하기 위해서 나한테 붙여준 가족들이고 자식들이고 남편이고 아내고 다른 사람들이고.

그들을 통해서 나는 못난 죄인이며 하나님이 친히 길러줬기 때문에 살았지, 살고자 악바리 애써서 살아온 게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미움과 함께 사랑을 주실 때에 그게 주님의 고유 권한이고 결정인 것을, 그것도 최종 결정인 것을 기쁘게 맞이하게 하옵소서. 몰랐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희생제물이라는 사실, 십자가의 피와 살이 영생을 준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서 우리가 믿게 되었고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주님의 사랑의 보관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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