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신명기(30강) 신명기13:16(화살과 과녁) 20250526a(강의: 이근호 목사)
오늘은 신명기 13장 8절부터 보겠습니다.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라고 되어 있죠. 여기서 말하는 ‘그’는 여호와 말고 다른 신을 섬기는 민족들을 말합니다. 9절에 보면, ‘너는 죽이라.’ 정도가 아니고 앞에 뭐가 붙어 있죠?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용서 없이 죽이라..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비를 베푼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 바깥쪽에는 그냥 자비가 없음이 아니라 무서운 진노가 있는 거죠. ‘여기는 용서가 있고, 저기는 없다’가 아니라, 소극적으로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퍼붓겠다는 거예요.
그 다음 9절에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 10절 끝에는 “너는 돌로 쳐 죽이라” 했죠. 죽이라는 말이 벌써 두 번 나옵니다. 그 다음에 15절 보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거민을 칼날로 죽이고” 죽이는 거 또 나오죠. 16절에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영히 무더기가 되어 다시는 건축됨이 없을 것이니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일종의 재개발 지역에 불도저, 또는 포크레인 장비 역할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재개발 지역에 있던 많은 추억과 많은 아름다운 과거가 소복이 담겨 있던 그 허름한 건물들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불도저나 포크레인은 그냥 깨부수잖아요. 추억이고 기억이고 그런 낭만적인 거 없애버리고 그냥 밀어 부쳐버리죠.
그러면 뭐가 남습니까? 황무지가 남죠, 황무지가. 상당히 하나님께서 너무 섭섭하게 하신다는 생각도 들겠는데, 섭섭하게 하는 게 아니고요, 인간은 없는 데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인간이에요. 그러면 천국 백성 만들려고 하면, 만들어진 인간으로는 안 되고, 이 만들어진 것을 뭐로 바꿔야 돼요? 없음으로 다시 원위치로 돌려야 되는 겁니다.
있는 걸 고쳐 쓰는 게 아니고, 있는 것은 아예 없애버리죠. 없애버리는 것을 가지고 ‘죽이라’, 죽음이에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죽이러 오는 것을 굉장히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됩니다. 자꾸 우리 자신이 안 죽은 상태에서 교회 나오고, 성당 다니고 ‘믿겠습니다.’ 해버리면 이것은 주님이 하는 일에 거슬리고, 훼방이 되죠.
공식 적어보면, <주의 일은 내가 방해한다.> 여기서 ‘내’란 살려고 하는 나, 살려고 하는 내가 주의 일을 방해합니다. “남편이 놀지 말고 돈 좀 벌어야지, 연금 가지고 안 되잖아.“ 이런 거요. 주의 일을 방해해요. 그러니까 아까 주일 오전설교 요약처럼 방해해야죠. 집에서 꽃이나 꽂지 말고, 요양보호사 자격증 따가지고 주의 일을 방해해야죠.
방해해야 뭐가 실감나고, 뭐가 체험되느냐 하면, 바로 신명기 13장 8절에서 18절이 체험돼요. 죽이라는 게. 왜 그러냐 하면, 인간과 인간 간에는 사이좋게 살고 싶지, 누굴 죽이고 싶지 않아요. 죽이라고 독촉하는 것은 율법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남을 죽인다는 것이 엄청나게 독해야 죽일 수 있는 거잖아요. 우리는 남 죽일 정도로 흉악범이 되기 싫어요. 왜? 살아있는 나는 건전하게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따라서 율법을 줘서 저들을 죽이라는 말은 그 율법의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결국은 그들이 죽는 것처럼 너희도 똑같은 입장에 있다는 거, ”율법이 너희들을 죽일 거야. 없게 만들고, 죽게 만들 거야.” 라는 얘기와 똑같은 이야기예요. 특히 여기 16절에 보면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라 했죠.
‘불사르라’ 불놀이 할 것도 아니고, 불살라서 뭐 할 건데요? 이 점은 고린도전서 3장을 찾아봅시다. 3장 13절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아멘. 불에 집어넣어서 불을 그냥 통과시키는 겁니다. 심판의 불이에요, 심판의 불.
그러니까 우리 개인적으로 했던 모든 착실하고 성실한 모든 것, 부모한테 효도하고, 자식 교육 잘 하고, 부부가 유별한 이 모든 것을 살아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이게 자기 의가 되고, 후지산의 고깔 눈처럼 우리 속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어요. 마지막 남은 자존심, 내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내가 더 살아야 될 이유, 보람, 이런 게 남아 있어요.
보통 가족 중에 누구 한 분이 돌아가시면 그 다음부터는 털썩 낙담이 되죠. 자기가 존재할 이유가 날아갔으니까. 경상도에서는 뭐라 하냐 하면, “아이고, 내가 더 살아서 뭐 하겠노?” 자식들 앞에서 남편 죽고 난 뒤에 “내 느그 아버지 죽고 나니 살맛이 없다.” 그러면 딸들은 “엄마, 우리가 자주 와서 반찬 해놓고 잘 할게.” 그럴 때 옆에 있는 며느리는 아무 소리 안하죠. ‘시누이 니가 해라. 느그 엄마지, 내 엄마가?’ 하면서 가만히 있어요.
그 아들은 “어무이, 내가 정기적으로 용돈 대겠습니다.” 온다는 말은 안 해요. 지 마누라가 못 가게 하니까. 온다는 말은 안 하고, 용돈만 댄다고 하는 거예요. 보세요, 그게 얼마나 자식들도 긴장되고, 아들도 긴장되고, 부인은 낙담하고 있고, “나는 이제 못 살지 싶으다.” 그러다 치매 걸리는 거예요. 살 이유가 없으니까, 자기 존재가 이만큼 꽉 차게 했던 한 부분이 사라져버렸으니까.
이 빈 공간을 뭘로 채웁니까? 채울 방법이 없거든요. 라인댄스 해봐야 늙어서 박자도 못 맞추는데요. 나가라고 눈치 줘서 못하죠. 노래 따라가지도 못해요. 그러니 이렇게 아무리 주변 사람이 늙어 죽고, 병들어 죽는다 할지라도 살아있는 나에 대한 처분이 자기한테는 제일 다급하고, 마지막 남아있는 숙제 같은 겁니다.
여기서 주님은 우리한테 <고귀함의 경쟁 비교>를 시킵니다. 누가 고귀하냔 말이죠, 누가? ‘뭣이 중헌디?’라는 말 있잖아요. 영화 ‘곡성’에 나오는 말. 무엇이 소중한 겁니까?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던가요? 없죠. 없는데, 여기 신명기 13장에서는 가차 없이 네 손을 들고, 심지어 돌로 쳐 죽이는 사람에게 먼저 손을 대 가지고 “내가 앞장서서 이 사람 죽였다. 너희들 증인이지, 봤지? 내가 죽이게 했다.”(9절)
주께서 그렇게 독촉하시는 이유는 “너희들이 여호와 안 믿는 사람을 돌로 쳐 죽였잖아. 그 다음 차례는 너야, 너! 네가 죽인 것처럼 네가 죽어야 돼.”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봐.’ 이런 식으로. “그 다음 차례는 너야!” 이러한 환경 속에, 구조 속에 주님께서는 강압적으로 이스라엘을 밀어붙이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고린도전서 3장 13절에서는 뭐냐? 공력을 다시 주께서 검사하는 거예요. 재검하는 거예요. 무엇을 재검하느냐? 그리스도의 터 위에 있는 것만 남고, 나머지는 다 없앤다. 왜? 둘째 하늘을 통과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공로 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로만 둘째 하늘을 통과해서 셋째 하늘에 도달해 간 거예요.
어쭙잖게 자기 행한 것 가지고, 선행 가지고, 자존심 가지고 가면 둘째 하늘을 통과할 수가 없어요. 사도바울은 자기가 셋째 하늘까지 갔기 때문에, 그 차원에서 예수님의 계시를 전부 다 그냥 선포해 버린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천국에 가실 거 같은데, 확실하지 않지만, 천국 갈 때는 여러분은 성명서를 듣게 될 겁니다, 성명서, 담화문.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7장 13, 14절에 나와요. 천국에 딱 도착했습니다. 딱 도착하니까 성명서가 들려옵니다. 13절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어디서 왔지?’ 이제는 선배죠. 고참, 선배가 이렇게 이야기할 때, 말을 안 해요. 14절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당신이 압니다. 장로님, 당신이 아시잖아요. 다 같은 코스 아닙니까?’ 이런 뜻이에요.
14절 이어서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라고 되어 있어요. 피, 이게 바로 성명서에요, 성명서. 신입 천국 백성이 들어옵니다. 들어올 때, 빰빠라밤 하고 성명서 쫙 울립니다. “이들은 바로 어린양의 피로 하얗게 된 사람들이 이제 신입으로 천국에 들어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천국보다 아름다운’ 그 드라마는 말도 안 되는 소리고요. 십자가 피가 빠졌는데 그게 무슨 천국입니까? 그러니까 이 피가 천국에서 발린 게 아니고, 이 지상에, 첫째 하늘에 있을 때 이미 십자가 피와 관련된 인물로써 선택된 거예요, 뽑힌 거예요. 피를 증거 하라고.
따라서 이스라엘은 뭐냐? 이스라엘은 무엇과 동행하느냐 하면, 유월절 어린양과 동행하면서, 유월절 어린양이 당했던 팔자와 운명을 약속의 땅까지 어린양이 가고 있으니까, 어린양과 하나님의 이름이 같이 있으니까, 어린양이 가고 있으니까 졸졸졸 따라서 그 어린양의 가는 코스대로 그들은 같이 가고 있는 겁니다.
어린양의 존재 이유가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여야 되고, 어린양의 그 가는 목적이 이스라엘의 목적이어야 되고, 어린양이 활동하는 그 보람이 이제는 이스라엘의 보람으로 넘어와야 돼요. 이스라엘로 넘어와야 돼요. 그런데 어린양이 뭐냐 하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에요.
첫째 시간의 핵심 부분에 도달했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이겁니다. <예수님이 죽지 않으시면, 이 땅에 오시지 않는다.> 예수님이 죽지 않으시면 이 땅에 오시지 않아요. 보통 생각하기를 ‘죽으면 다시는 이 땅 사람이 아니다, 안 온다.’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정도가 아니고, 죽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이 땅을 성령으로 방문하시고 재림으로 방문하시는 거예요. 죽으셨기 때문에.
왜 그러냐 하면, 죽으셨기 때문에 이 땅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시고, 이 땅에서 모든 인간이 죽어있다는 것을 통보함으로써 그 속에서 예수님의 천국의 어린양과 똑같은 팔자, 똑같은 인생길을 가야될 자를 자신의 죽었다가 살아나심의 그 능력으로 카피(copy)를 하고, 능력을 주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십자가의 능력이에요, 십자가의 능력(고전1:18).
살려고 하는 자에게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분의 능력이 임해버리면, 예수님이 죽었던 환경인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너희들이 지금 놓여있다는 것, 그래서 너는 죽어가는 것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냐? 참 기쁘다, 죽어가는 게. 주님께서 죽었기 때문에 다시 오는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빨리 죽어서 주님과 합류하는 것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이유가 된 거예요, 보람이 된 거예요. 존재의 이유가 된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아직까지 이런 정도의 입체적인, 수직적인 그런 세계관은 율법이 완성이 안 되었기 때문에 그냥 그림자로, 제단, 성전 다 그림자입니다, 그림자였기 때문에 항상 3차원 공간의 제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말씀에 의하면, “안 믿는 사람 다 죽이고,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버리라.” 했지만, 이건 일방적인 하나님의 말씀 주장이고, 그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한테는 당연히 거부감이 일어날 수밖에 없죠.
그런데 그것을 주님께서 모르시는 게 아니고, 알아요. 내(주님) 말한 대로 안 지킨다는 것을. ‘착하게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는 지켜요, 최선을 다해서. 그러나 ‘남을 죽여라’ 그것도 ‘용서하지 말고 죽여라.’ 아, 이것은 정말 힘든 겁니다. 성경을 보겠습니다.
신약 마태복음 8장 2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내가 여기서 거주할 의사 없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을 듣고 21절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랬다고요.
‘전세집도 아니고, 월세집도 아니고 이 땅에 거처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그냥 거처할 의사가 없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하신 것은 ‘모든 족보로부터, 족보가 네 거주지가 되지 말라.’는 뜻이에요, 족보까지. ‘족보 자체로부터 벗어나라.’ 이 말이에요, 족보 자체로부터.
그런데 제자가 하는 말이 “아버지 장사 지내는 것만 허락해주시면 하고 따라가겠습니다.” 하니까,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듣는 족족 이거는 도저히 실천에 옮길 만한 말이 하나도 없어요. 어떤 것도.
마가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네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미움을 받아야 된다.’고 이야기해요.(막13:13) 이게 아까 말한 ‘거절’이에요. “네가 미움을 받아야 된다.” 그것이 얼마나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래서 이 점을 이 시간에 한 번 생각을 해봅시다. 제가 먼저 한 문장을 쓸게요.
<물리적인 접촉이 없음에도 왜 분노하고, 화를 내는가?> 물리적으로 누가 때린다, 민다, 목 조른다는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말을 듣는다고 해서 물리적인 접촉은 아니잖아요. 음파가 전달된다 뿐이지. ‘어떤 사람이 욕을 한다.’ 물리적인 접촉은 없잖아요. 그런데도 왜 화가 나고, 분노하느냐 이 말이죠.
이 문제가 왜냐하면, 우리가 거울 볼 때 뭐가 보이죠? 나의 육체만 보이죠. 마음 같은 건 안 보이죠. 육체만 보이는데 우리는 이걸 가지고 ‘나’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실제로 사회에서 육체가 ‘나’라면, 물리적으로 떠민다든지, 밟는다든지 그런 게 없으면 나한테 해코지가 없는 걸로 간주해야 앞뒤가 맞는 이야기잖아요. 육신이 나니까.
그런데 욕을 먹는다든지, 째려본다든지 그런 거에 대해서 왜 은근히 화가 나냔 말이죠.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 하는 질문에 “우리 아버지 조폭입니다.” 라고 했는데 왜 시계 풀고 “너 오늘 좀 맞자.”라고 하는지, 그게 왜 맞을 짓이냔 말이죠. 아버지가 조폭이니까 조폭이라고 한 건데 선생님이 왜 화를 내느냐? 왜 모든 매사가 물리적인 접촉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화를 내느냐?
특히 가롯 유다는 예수님이 가롯 유다 불러서 쥐어 팼습니까? 그래서 가롯 유다도 예수님 때려죽이려고 한 거예요? 아니에요. 예수님은 가롯 유다를 폭행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죽는 데 팔아 넘겼는가? 왜 화가 났느냐? 그것은 진짜 인간은 숨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진짜 인간은. 내가 몰라요. 내가 모르는 인간이 숨어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중문을 설치했습니다. 문이 두 개예요. 문 안에 문이에요. 앞에는 열린 문, 열린 문 안에 닫힌 문이 들어 있어요.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완전히 올무에 빠진 거예요. 이제 빼도 박도 못한 거예요. “야, 천국이다! 여호와 하나님이다, 우리를 구원한단다. 야, 우리 민족 너무 감사하지? 들어가자.” 그런데 문이 안 열려요. 문이 안 열려요, 문이.
주께서 이스라엘을 팼습니까? 팬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에게 준 것은 언어예요. 문자, 십계명,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을 줬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노하고, 화를 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진짜 인간이라는 것은, 육체보다 진짜배기 보이지 않는, 그 동안 악마가 만들어놓은 이미지, 그 이미지가 각자 인간의 육체를 덮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겁니다.
열린 문이라고 덜렁 들어왔는데, 안에 닫힌 문이 있어요. 그 닫힌 문 입구에 뭐가 있느냐? 유월절 양의 피가 묻혀 있습니다. 피가 묻혀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했죠. 나 구원받기 위해서, 또는 나와 내 가정 구원인줄 알고 들어왔는데,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어요. 유월절 양이 주인공이 된 공간에 그들이 들어왔습니다.
누구든지 유월절 양이 가는 길에 합류하지 아니하면, 그 인간에게 이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합류한 사람 있어요. 갈렙과 여호수아. “뭐 어차피 우리는 유월절 그 때 이미 죽은 자로, 어린양의 피 때문에 살았지, 우리가 살았냐? 따라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죽는 경우가 있더라도 우리가 지금 유월절 어린양과 함께 동행 하면(그게 제사거든요), 동행한다면, 죽든 말든 그건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로마서 14장 말씀처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롬14:8) 한 번 적어볼게요.<사나 죽으나 주의 것> 사나 죽으나 내 것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내 것인 것을 주의 것으로 바꾸는 작업을 율법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 것은 어떻게 갖고 있느냐? 내 것은 소유성이에요, 소유성.
나는 뭔가 소유함으로써 내가 존재하거든요. 내가 있다는 이 소유성을 주님께서 악마성으로 일체화시키는 작업을 합니다. 내가 소유하기 때문에 소유가 아까워서 나를 못 놓는 거예요. “나는 내 거다.” 왜? “내 거라고 가진 게 있기 때문에.” 신약에 오면, 이것을 이렇게 처리합니다. 신약에서는 굉장히 간단해요.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다> 그런데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나의 세계에 나는 없다.’가 돼요. “네 중심의 세계관을 만약 네가 붙들고 있으려면 네 입에서 지옥, 천국 이야기 하지마라.”는 뜻이에요. 왜냐 하면, 천국, 지옥은 나하고 상관없기 때문에. 바로 그쪽 세계로 넘어 와줘야 돼요. ‘내가 천국 간다.’가 아니고, ‘내가 지옥 간다.’가 아니라, 지옥도 나가 없고, 천국도 나가 없고, 천국, 지옥은 나하고 연계시키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에 의해서, 다른 분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가 지옥이고, 천국이에요.
지옥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만들어진 세계지, 나쁜 짓 했다고 가는 곳이 지옥이 아닙니다. 지옥과 나가 상관이 없고, 천국과 나와 상관이 없어요. 왜?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가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은, 분노하는 것은 지금 무슨 세계가 나를 꽉 잡고 있다? 내가 만든 나의 세계가 나를 안 놓고 있는 거예요, 발목을 잡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분노하는 거예요.
“주여, 율법대로 살면 구원 받습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나랑 상관없는 천국, 지옥을 만들기 위해서 주께서 율법을 줬는데, 자꾸 우리는 나와 지옥, 천국을 연관시키는데, 연관시킬 수가 없어요. 그 점을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이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에서와 야곱> 에서와 야곱에 있어서 히브리서 12장 16절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자, 방금 이야기한 게 정리되겠죠. 망령된 것, 죄죠. 죄가 뭐냐? ‘내 것 있음’을 전제로 할 때 발생되는 게 죄에요.
실제로 어떤 남자 형제 둘이 ‘유퀴즈’라는 프로에 나왔어요. 호주 코메디언의 아들들이에요. 유재석이 물었어요. “너희는 어떻게 싸워?” 그랬더니 싸운 이야기를 해요. 그리고 다시 “싸우면 어떻게 풀지?”라고 물으니까, “과자 하나 주면 싹 풀려요.” 그러는 거예요. 형제 간의 서열의 문제가 과자 하나로 해결되어 버려요. 과자 주면 입을 다무는 거예요.
얼마나 육체적입니까? 달콤한 거, 먹고 싶은 거. 야곱이 형이 올 때 즈음 되어서 팥죽을 해서 냄새를 막 피우는 거예요. 팥죽을 해놓으니까 마침 사냥 갔다 와서 배고픈 타이밍에 동생이 “스톱, 잠깐!” 하니까 “야, 동생, 한 번 봐줘. 너무 먹고 싶다, 알잖아.” “아, 공짜로 안 돼.” “ 뭘 해야 이 팥죽 먹을 수 있겠어?” “내가 형 되고, 네가 동생 해라.” “아, 그게 뭐 중요해? 네가 형 해, 내가 동생 할게.”
지금 성경에서 그 철없는 형제간의 이야기가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천국, 지옥 그 시스템의 고귀함, 그 엄중함, 엄격함을 철딱서니 없는 에서가 그 귀중함을 지금 놓치고 있다,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무엇이 방해했습니까? 내가 먹고 싶은 거, 자기에 대한 소유성, 소유욕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렇게 되니까 신명기 13장의 말씀은 이게 지키라고 준 말씀이 아니고, “내가 이제 본격적으로 팔 걷고 한 번 나서봐?” 이런 뜻이에요, 신명기가. “네가 못 했잖아. 그러면 말씀, 내가 할게.” 이거예요. “네가 못하면 말씀, 내가 할게.” 자, 그러면, 아까 언급한 것처럼 ‘인간은 육체로 되어있다, 육체가 기본이다.’ 어제 낮 설교한 것처럼 ‘인간은 근육에 집중한다.’ 인간은 근육에 집중하죠.
근육에 힘을 집중해야 꽃도 이렇게 분꽃을 피우고 할 게 아닙니까? 힘 없으면 누가 피웁니까? 안 되지요. 힘에 의존하는 이것을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냐 하면, ‘말씀을 먹으라.’고 되어 있어요. 이건 전에 신명기 8장에서 했어요. “내가 너희에게 만나를 준다.” “야, 만나다.” “스톱, 스톱, 스톱. 이거 네 생각에 뭘로 보이냐?” “양식이잖아요.” “아니야, 그거 아니야. 육의 양식 아니야.”
크래커 모양의 먹을 것을 줬으니까, ‘이것은 먹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소유, 근육, 힘, 이런 것을 인간은 본능적으로 탐하고 있으니까, 만나를 보고 먹을거리라고 인간은 생각한단 말이죠. 그런데 신명기 8장 3절에 보면 이게 먹을거리가 아니고 생명의 양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육신이 기준이고, 기본이고, 육신이 되고 난 뒤에 ‘인간이 양심대로 살아서 사람답게 산다.’ 이게 인간의 출발점인데, 주님께는 뭐가 출발점이냐 하면, “내가 너한테 뭘 던져준다.” 뭘 던져주느냐? “말씀이 너에게 꽂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 하나 던지겠습니다. 넌센스 퀴즈인데, 누가 한 번 아이디어 내보세요.
어떤 사람이 활만 쏘면 10점, 엑스트라 10점에 꽂혀요. 그 사람이 양궁 선수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을까요? 쏘기만 하면 10점, 정중앙, 다시 해도 또 10점. 어떻게 해서 그런 놀라운 일이 생겼을까요? 제가 말하는 게 빠르겠죠. ‘과녁 있고 활쏘기’를 순서를 바꿔서, 활 쏜 뒤에 활을 중앙으로 해서 과녁을 그리는 거예요. 뭐, 백발백중이죠.
우리 성도가 죄 짓고 난 뒤에 주님께서 이것을 10점 만점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이게 말씀의 활동입니다. 참, 이래도 안 고마우면 진짜 문제 있다, 정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키면 다 가능한 쌀이 되든, 뭐 하든 간에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완전케 하시느니라. 인식이 완전히 순서가 말씀부터 순서를 잡는 거예요.
“말씀을 말씀되게 드러내기 위해서 ‘나’라는 육신이 채택되었다, 초대되었다. 말씀 세계에 강제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또 우리가 이용하면 안 돼요. 절대 이용하면 안 돼요. 왜 이용하면 안 되느냐 하면, 말씀이 우리에게 올 때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할 때 오는 게 아니고, 열심히 과녁 먼저 있고, 우리가 활쏘기를 하고 있는데다가 뒤통수를 때려버려요.
“네 원대로 될 줄 알았지? 네 원대로 그렇게 될 줄 알았지? 치아라! 내 원대로 된다.” 그래서 말씀은 지키는 게 아니고, 실천에 옮기는 것이 아니고, 환경으로 조성되어야 돼요, 말씀이. 그러면 환경으로 말씀이 조성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어떻게 아는가? 그게 신명기 8장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8장 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테스트 용으로 하나님은 자기 성도를 사용하십니다, 테스트 용으로. 마음을 낮추는지, 안 낮추는지 시험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가 태어난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는 세상 다른 불신자한테는 그냥 지옥이고, 성도한테는 테스트, 시험하는 곳이에요. 그런데 그 시험은 이미 예수님도 같이 겪었다는 사실이에요. 예수님이 당했던 테스트를, 테스트기를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혈압계로 혈압을 쟀다면, 예수님이 쟀던 혈압계로 오늘날 우리도 재는 거예요.
150에 120 나오면, “아, 약 먹어야 되겠다.” 120/70 나오면 “아, 정상!” 90/60 나오면 “이건 저혈압이다, 위험하다.” 그래서 항상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은 테스트 하는 거예요. 테스트 할 때, 어떻게 테스트 하냐 하면, ‘네가 지금 어느 정도 오버하고 있는지?’ 다른 말로 하면, ‘어느 정도 화내고, 분노하고 있는지?’
모든 일상에 대해서, 내 일상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아, 짜증난다.’ 하루하루 일상이 짜증이 나는 거예요. 처음에는 짜증에 이유가 있었어요. 몸이 아프다든지, 돈이 없다든지 해서 짜증났는데, 나중에는 짜증이 버릇이 되어가지고 이유도 없이 그냥 짜증이 나요. 심지어는 심심하다고 짜증내고요, 돈은 있는데 돈 쓸 데 없다고 짜증내고, 돈 쓴 값이 제대로 빛이 안 난다고, 백화점 옷 샀는데 또 바꿔야 돼. 왜? 내가 의도한 대로 안 돼, 내 뜻대로, 내 욕망대로 안 돼. 그래서 모든 게 짜증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선을 넘은 거예요. 오버한 거예요. 완전히 무슨 높이뛰기 하는 것도 아니고, 넘어선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죽기까지 낮추는 거예요. 죽는다는 말은 극단적인 걸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잊어버린 그 십자가를 다시 알게 하는 거예요. 그 기능을 말씀이 하게 돼요. 구약에서는 말씀이 하고, 신약에서는 성령께서 다 이룬 말씀을 가지고 우리한테 그걸 수시로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의 삶의 상황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보통, 불신자는 첫째 하늘이니까 그냥 세상에 있어요. 천문학자, 과학자들은 해와 달과 별의 운동을 살피고, 농사짓는 사람은 살폈던 그 법칙을 기상청에 전화해서 “오늘 날씨 어때요? 씨 뿌려도 될 날씨인지 모르겠다.” 이런 거고, 돈 있는 사람은 “오늘 날씨에 놀러갈 수 있을까?” 이러거든요.
그런데 성도는 그물망, 말씀의 그물망 속에 성도가 담기게 돼요, 이 땅에서. 그런데 다른 불신자는 이게 안 보여요, 안 느껴지고. 그런데 성도는 성령에 의해서 이미 구원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구원되었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할 때에 뭘 느끼느냐? 잊어버렸던 말씀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성도가 이 세상에 살면서 불신자하고 똑같아요. 늘 화나고, 짜증나고, 성질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있는데, 이 그물망이 뭐냐? 테스트기예요. 테스트하게 되면, “아, 내 할 일은 남들처럼 소유를 늘리는 게 아니고,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이런 일이 있구나.” 라는 것을 그 나라 의를 위해서 이 말씀 그물과 부딪히게 해요. 그런데 이게 얼마 안 가요.
왜 얼마 안 가느냐? 이게 얼마 안 가야 다른 말씀도 골고루 새롭게, 새롭게 맛보게 하기 위해서.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가 쓱 지나가고, 또 다른 데 가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다. 어느 누구도 의인은 없는 거 알지?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어.” 이 말씀이 생각나고.
그래서 하여튼 평생을 살면서 하나님이 쳐 놓은 말씀의 그물망에 어디에 걸리든 걸리게 되어 있어요. 걸리는 중에서 이 시간에 한 번 우리가 걸려봅시다. 아모스 8장 11절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이렇게 되어 있죠.
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가 우리가 모여 있지만, 언젠가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장소까지 없어질 날이 온다는 거예요. 말씀을 전하는 곳이 모조리 폐쇄되고 없어지는 그 날이 올 것이라는 거예요, 그 날이. 그 때에 성도만이, ‘어디 말씀 없냐?’고 찾는 자만이 말씀의 그물망 안에서 이미 구원된 자들이에요. 이미 구원된 자들.
뭐, 요새는 종교계도 없다며? 종교계가 있으나 없으나 중요한 것은 양식이 중요하고 이런 거죠. 그러니까 성도는 관심사가 “어디 말씀 없나?”하고 찾고, 불신자들은 “트럼프가 관세 좀 낮춰주지.” 이런 거, “대선 때 공휴일인데, 노나?” 이런 이야기 하고, 불신자들은 모든 관심사가 말씀이 없는 상태를 계속 찾고 있어요. 왜? 마음의 욕망에 기근이 왔으니까, 기갈이 됐으니까.
말씀의 기갈이 아니고, 나를 즐겁게 할 새로운 이슈가 없어서, 이슈가 없어서 기갈인 거예요. 프로야구 팀이 열 개잖아요. 그러면 꼴찌는 정해져있어요, 한화. 그런데 한화가 요새 1등이에요. 9등이 어디냐? 롯데, 롯데가 요즘은 2등 한다고요. 신났지 뭐. 부산 가면, ‘부산갈매기~ 부산갈매기~’ 노래 부르면서 신났지요.
부산은행에서는 4강에 들어가면 금리 1프로 올려줍니다. 0.1프로인가? 부산갈매기 노래 부르고, ‘어쩌다 한~번’ 연안부두 부르고 하는 거예요. 삼성은 저 뒤에 9등인가로 쭉 떨어져있고, 그게 뭐냐 하면, 그때그때 즐겁고 재미나는 일, 요새 젊은 애들처럼, 그것을 계속 내 소유, 내 인생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애는 왜 낳아? 개 키우면 되지. 애 키우면 골치 아픈데, 애 낳다가 뱃살 늘어지고, 내 아름다운 체형 다 망가지고, 애 있으면 부부간에 화목한 시간을 못 보낸다.”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 육신, 육체를 즐겁게 하는 데 모든 관심이 쏟아져 있습니다. 그럼 그 시대가 어떻게 되냐? 예수님 십자가 이후로 그런 시대에 돌입했어요. 돌입했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말씀을 찾으면 될 게 아니냐? 그런데 교회가 말씀을 안 전하죠. 교회는 재미나는 놀이해서 오는 교인들을 붙잡으려고 하죠. 애들 영어 공짜로 가르쳐 준다든지, 노인들 다 챙겨주고, 우리 교회 오시면 비뇨기과부터해서 의사들 있으니까 우리 교회 교인들은 염가로 해줍니다. 의료보험증만 내면 해줍니다.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그냥 붙들려고 하죠. 예배당 지어놨으니까.
말씀은 없지요. 재미나는 교회, 신바람 나는 교회, ‘탁구장 있습니다. 노래방 있습니다.’ 이런 거 다 기본으로 갖춰놓고요, 특히 젊은 새댁들을 겨냥해서 ‘아이들에게는 모든 교육 프로그램이 공짜로 다 되어 있습니다.’ 이런 거. 주일학교 때부터 잡아야 걔가 커서 어른 되어도 대예배에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거기는 말씀의 그물망이 아니에요. 인간의 욕망, 내 욕망의 그물망, 내 결핍된, 내 수고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서 그냥 하나님 말씀은 빠지고 인간 대 인간의 이익적인 서로 정보 교환을 위주로 연결되죠. 그게 특히 미국이라든지, 해외에 있는 교회들이에요. 바로 정보교환을 위해서 그렇게 활용들을 많이 해요.
자, 이 한 마디만 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서 13절 다시 보면요, 11절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누구라?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예수 그리스도. 그러니까 예수님의 공로 위에 중간에 뭐라도 얹지 마라 이 말이죠.
예수님의 공로와 결부된 것이 뭐냐? 불을 통과한다 했으니까, 불 통과 못하면 그건 지옥 구성원들, 불 통과 되면 그것은 천국 구성원들, 그러니까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면, 나하고는 상관없는 동네라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되겠죠.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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