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진

행함없는 믿음과 행함있는 믿음091030박윤진 댓글

아빠와 함께 2014. 2. 28. 16:10

2009-10-30 12:55:53 조회 : 3437         
행함없는 믿음vs행함있는 믿음 이름 : 김풍호 (IP:203.241.147.32)

1.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이유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했었기 때문에 이삭을 바치는 행동이 따라 나왔나요?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사건을 가지고 야고보가  믿음을 설명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이삭을 바친사건 관련해서 설명부탁드립니다.

 

3. "행함은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것이다" 이말이 맞는지요?

    (이것이 행함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지금까지는...)

  

 이성근 (IP:211.♡.41.128) 09-10-31 03:12 
이목사님이나 다른 분이 답해주시겠지만....평신도인 제가 답을 해보자면

1.히브리서에서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때에 부활 할것을 믿었다라고 나옵니다.왜냐하면 그 이삭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가 나올것을 미리 보았고 분명히 죽여도 주님이 부활 시키리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고. 당연히 그 이삭을 드리는 그 믿음이 그냥 생긴것은 아니죠....

처음에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대면하시고 불러내셨을때 주님의 명대로 하지 않았고. 많은 실수가 있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그를 이끌어 가시고 결국에는 이삭을 받치는 신앙의 단계까지 만들어 갔다고 보여집니다. 믿음은 아브람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하십니다라고 보여집니다.

2. 제가 언변이 딸려서 .....넘어가겠습니다.

3. 자연스럽게 터지는게 인간 내부로 부터가 아니라 주님의 죽음심의 그 은혜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택한자를 붙들어 믿음의 행함이 터지게 나온다고 보여집니다..그러니까 결코 인간이 할수 있는게 없고 오직 성령께서 행하게 하신다고 봅니다..
 박윤진 (IP:122.♡.62.8) 09-10-31 10:58 
행함과 믿음은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행함의 주체도, 믿음의 주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그 어떤 주체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매몰되기 때문에 자기만의 행함과 믿음을 챙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된 '나'의 속성 중 하나가 바로 믿음과 행함인 것이며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행함을 덧입는 신세에 불과합니다.

1.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이유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했었기 때문에 이삭을 바치는 행동이 따라 나왔나요?

---> 이삭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혈통적 아들이 아닙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흔히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물로 바쳤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대단한 믿음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실상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삭은 하나님 아들이니까요.

아브라함의 역할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고 하는 그 결과가 그저 죄라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아브라함의 죄는 오직 여호와 이레라는 하나님의 준비된 어린 양에 의해서만 용서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동원된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까지 하나님을 위해서 바치는 위대한 아브라함이 아니라, 죄인은 그 아들을 바쳐도 죄인이기에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제사는 죄인에게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그 어떤 분의 피 밖에 없음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이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으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아셨다고 하시면서 그만두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서 그 아들조차 아끼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직접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별도로 수풀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하는 숫양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삭을 대신하여 잡으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그 마음이 '의'라면 숫양의 죽음은 필요없는 것이지요. 이삭을 대신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아브라함의 그 열심 자체로 직통으로 하나님과 연결되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숫양이 미리 준비되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 제사는 아들도 잡아죽이는 아브라함의 행위도 아니고,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라면 거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었던 이삭의 순종도 아니며, 바로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죽음이며 하나님의 죽음이 아닌 그 어떤 죄인의 죽음과 행위도 하나님께서는 일체 거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 대신 죽는 숫양을 잡으면서 방금 바로 그 자신에 누워있었던 자신의 아들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원래 자신의 아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의 아들을 참된 희생자로 만드시는 분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희생자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자신의 아들까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만 하는 기구한 인생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교묘한 죄의 위장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더니 결국 하나님의 아들에게 칼을 겨누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자로 알았는데 진짜 희생자는 여호와 이레라는 이름으로 별도로 이미 준비되어 있더란 것이지요.

그러한 여호와 이레의 세계를 아브라함은 언약을 통해 처음으로 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행함있는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공간속에 담겨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신의 그 어떤 열심과 행위도 결국 하나님을 찌를 수 밖에 없구나 하는 죄인의 한계에 부딪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한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용서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행함이며 믿음입니다.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사건을 가지고 야고보가  믿음을 설명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이삭을 바친사건 관련해서 설명부탁드립니다.

----> 결국 인간 쪽에서 조작한 것은 그것이 아들을 바치는 것이더라도 죄일 뿐입니다. 야고보는 바로 이 점을 부각하고자 합니다. 자신이 안개와 같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행함과 믿음을 따로 따로 챙기고자 하는 심보가 바로 믿음없고 행함없는 것입니다. 안개의 행함과 안개의 믿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안개가 믿는다고 말만 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것을 보니 곧 사라질  안개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말과 믿음과 행함은 모두 한가지입니다. 말씀마다 다 성취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라면 여호와 이레처럼 이미 준비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행함 속에서 별도의 덕목으로서의 믿음과 행함을 챙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준비하신 것이 아닌 인간 쪽에서 조작한 믿음과 행함이 바로 행함없는 믿음이요 음없는 행함입니다.

3. "행함은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것이다" 이말이 맞는지요?

---> 이 문장의 주어인 "행함"을 성도의 행함이라고 한다는 위 문장을 틀린 말입니다. 성도는 예수의 행함을 덧입고 사는 신세이기 때문에 성도의 행함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행함(죄)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행함(용서)을 불어오는 역할 뿐입니다.

그래서 위 문장은
"성도의 행함은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계속 터져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는 행위가 터져나옴으로써 참된 희생자는 이미 별도로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계심을 드러낸 것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