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안이란 표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좀 있었습니다
그래서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아서 여쭙습니다
1.창조때부터 성도는 예수 안에 있다
2.죄란 결국 피조물성(창조주와 다름)이다
1번은 주신 파일을 듣고 깨달은 생각이구요
2번은 지금까지 가져온 생각입니다
어떻게 수정되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답 변]
1.'창조때부터 성도는 예수 안에 있다.' 라는 문장에 대하여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마치 예수 밖에 있는 것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동원되는 것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것들이 예수 안으로 들어오는데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몸을 열어주심 뿐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이요 이 때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이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존재를 창조 이전으로 당기는 것은 예수 안이라는 자리를 만드신 예수님의 공로를 높이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박윤진이라는 개체를 성도로 가정하고 그 성도가 창조 때부터 존재하며 그가 예수 안에 있었으므로 그 또한 매우 의미있는 존재이다라는
논리는 악마의 논리입니다. 왜냐하면 박윤진만을 목적으로 남기고 예수님은 수단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언어이기에 위 문장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셨는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그 언어의 지향점이 십자가인지, 아니면 인간(성도 포함) 가치 높이기 인지를 잘 살펴보셔야 할 것입니다.
2.'죄란 결국 피조물성(창조주와 다름)이다.'라는 문장에 대하여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을 유일한 창조주로 인정하신다면, 죄 자체를 인간이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이셔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즉, 죄 자체는 인간이나 피조물이 개념을 정립하여 스스로 대응하기 위해 등장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알 수도 없는 죄를,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죄를 누가 해결하셨는가를 질문하기 위해 등장한
것입니다.
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죄를 해결한 분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라면, 그 죄의 엄청난 위력을 평생을 통해 확인받게 됩니다.
동시에 그 엄청난 죄를 단번에 영원히 해결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사하게 됩니다.
자랑할 것이 그것 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죄란 창조주와 피조물의 다름을 구별하기 위한 표지가 아니라,
누가 진짜 주인인지를 알려주기 위한 가짜 주인인 것입니다.
마귀 역시 그것을 위해 동원되어 제 역할을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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