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구원)의 영역에서 "주체의식"을 경계하는 것처럼 죄의 영역에서도 "주체의식"을 배제해야 하지 않는가?
행위로 구원받지 못한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이 믿음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이란 외부에서 침투하여 들어온 것이다.
즉, 인간에게 믿음이란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만이 믿음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를 지향하는 구원, 나의 소유된 구원은 없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로서 인간 행위와의 완전한 단절상태에 있다. 인간 행위의 결과물로서의 구원이 아니라, 인간행위와 무관한 은혜로의 구원이다.
이처럼 은혜(구원)에서 인간 행위의 배제, 즉 인간주체의식의 배제는 많이 강조되고 있다.
주체의식은 생존을 전제로 이야기 하는데 십자가는 생존이 아닌 사망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죽어있는 자의 주체의식을 누가 문제 삼겠는가?
물론 십자가를 이야기 하면서도 인간은 결코 자신의 주체의식을 버릴 수 없다.
인간은 십자가조차 자신의 생존의 근거로 삼는 우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렇다면, 죄의 영역에서의 주체의식은 허용되는가? 죄의 영역에서는 인간이 살아있는가?
즉, 내 죄, 내가 범한 죄, 내가 인식하고, 기억하는 나의 주체와 상관된 죄만이 죄인가?
나의 행위와 결부된 것만 죄인가?
아니다!
죄는 우리 행위를 기초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속아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로 말미암아 비로소 죄가 이 땅에 등장한 것이 아니다.
악은 그 이전부터 창조영역 내에 내장되어 있었다. 선악과의 존재는 악의 존재도 이미 상정하고 있다. 창조라는 작업은 공허 혹은 무질서를 전제한 개념이다. 빛은 어두움을 배경으로 깔고 등장한다. 빛은 어두움을 뚫고 나올 때 비로소 빛이다.
다만, 선악의 구별과 구별에 의한 처리문제까지 모두 하나님의 관리대상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악과 인간과의 연결고리를 “명령의 위반행위”라고 단정한다. 선한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 책임을 아담에게 돌리기 위한 논리구조인데 이는 여전히 인간 행위를 기초한 선악구조의 답습이다.
아담 또한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아담만의 절대주권이나 절대영역이란 없다. 그가 누리는 것 모두는 은혜의 결과이다.
아담은 죄의 영역까지도 담당하고 있는 하나님에 의해 내어준 바 되었을 뿐이다. 죄가 덮친 것이다. 아담의 자유의지도 아무 소용없다. 아담은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버려졌다.
여기서 발동하는 것이 주체의식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나를 일부러 죄인되게 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나름대로의 “선”개념을 하나님에게 투사한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악”개념을 여자에게, 그리고 여자는 뱀에게 전가시키고 만다. 하지만, 아담의 그러한 버림 바 됨이 하나님 아들의 버림 바 됨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면 우리가 무슨 말로 하나님께 따질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누구 책임인가?”가 아니다. 이것 역시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 책임인지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오직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에 급급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죄에게 삼킨바 된 아담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이다. 아담 속에서 나온 모든 인간의 속성, 즉 나의 주체의 속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죄인된 아담의 변화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주체의 확립이다. 주체와 객체의 분리이다. 이 객체 안에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까지 포함됨은 물론이다. 그렇지 않다고 위장하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한 몸된 여자에 대한 공격은 곧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다. 죄인된 아담이 보호해야 할 대상은 오직 자기 주체 뿐이다.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노골적으로 분출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주체 내에서 자생된 “선”에 의한 하나님관, 즉 좋으신 하나님과 자신의 죄와의 연결점을 도대체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선한 설정을 유지함으로써 자기 주체를 보호한다. 즉, 나는 죄인인 지금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좋으신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은근히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이상의 논리전개에 대해서 다음의 성경구절을 반론의 근거로 삼는 경우가 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아무도 시험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아담을 버리신 것을 시험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 때문이다. 시험이란 주체를 흔든다는 것이다. 유일한 주체자로서의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주체자가 있는가? 악도 그런 주체가 될 수 없다. 반대로 주체도 아닌 자들을 대상으로 하나님께서 시험하실 필요가 있는가? 도구로 사용하면 그만이다.
주체도 아닌 것들이(피조물인 주제에) 하나님의 시험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담, 욥의 버림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아담이 가지고 있는 “선한 하나님”의 연장선이다. 오염된 하나님관은 인간 자신만을 보호하고 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어찌되건 상관하지 않는다.
죄의 덮침은 아담의 행위와 관계없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행위를 했다는 것은 죄가 덮쳤음을 구체적으로 알릴 뿐이지 아담이 자신의 행위로 죄인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죄의 영역에서도 여전히 주체의식을 논할 수 없다. 내가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죄가 나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을 “죄의 종”이라고 하며 이는 “의의 종”이 어떤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이다.
은혜(십자가)의 영역이 인간의 행위와 주체 모두를 죽이듯이
죄의 영역도 인간의 행위와 주체 모두를 죽인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다만 살아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자신의 주체의 생존을 위해 배고프다, 아프다, 목마르다 말할 수 있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온전하신 유일한 주체자에게 사랑받은 대상만이 살아있는 것이다.
아담을 탓하지 말라! 그 또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사용한 도구일 뿐이다.
내가 범하지 않은 죄가 있음으로 안심되는가?
그 안심이 바로 내가 죄인임을 고발하는 피할 수 없는 증거이다.
내가 행하지 않은 선으로 불안한가?
그 불안과 상관없이 이미 의인됨의 증거가 바로 십자가 피이다.
인간은 죄와 은혜 어느 쪽도 선택하거나 자신의 행위로서 간섭할 수 없다.
은혜가 은혜됨과 죄가 죄됨을 공표하기 위해 죄와 은혜가 싸울 뿐이다.
은혜와 죄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영역이다. 선악과는 인간에게 어떤 여지도 허락하지 않는다.
인간이 참을 수 없어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자신의 주체가 다른 주체에 의해서 완전한 객체로서만 남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부분을 율법으로 수술하신다. 하나님의 법을 객체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인간의 주체의식을 고발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객체로서 남아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법, 즉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주체적으로 움직이신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자체를 돌판이라는 객체로 만들어 버리신다. 그리고 그 위를 주체적으로 점령하신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계명을 새기신다는 새언약은 바로 이런 취지이다.
어떤 인간도 주체자로서 객체로 덩그러니 남은 하나님의 법을 준수할 수 없다. 하나님의 법은 그렇게 점령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라는 참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이용되거나 점령당하거나 인간 영생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 자체가 점령군이다. 주체라고 주장하는 인간을 사형하는 도구이다. 이제 우리의 심비에 성령의 은혜의 법이 주체자가 되어 역사한다. 십자가만이 참 진리임을 알리기 위한 배경으로 성도의 진리의 원수됨이 날마다 터져나온다. 이것이 바로 빛이다.
성도의 주체적․능동적 활동을 이야기 하는 이유는 스스로 빛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자신의 선한 자아를 인정받고 싶어서이다. 자신의 어두움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그러나 빛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다만 인간을 배경으로 삼았을 뿐, 인간 자체가 빛이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빛이라고 증거할 수 밖에 없는 어둠, 즉 빛의 영광을 위해 빛에 사로잡혀 있는 어둠을 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어떤 자도 어둠이다. 그는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둠과 빛을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임을 안다. 빛 자체를 흉내내거나 따라잡기 위해 훈련하지 않는다. 빛만이 어둠을 조절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이 순간마다 감사로 깨닫게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