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토필요

말씀운동과 십자가마을의 언약사상의 차이 050419

아빠와 함께 2014. 2. 21. 18:10

2007-03-10 14:45:58 조회 : 1596         
[말씀운동 과 이근호의 언약사상의 차이점] 2005-04-19 이름 : 관리자 (IP:122.47.55.30)

끝나지 않은 전쟁 
이성민   2005-04-19 00:04:09, 조회 : 213, 추천 : 32

말씀운동산하 이덕성목사님의 글을 퍼옵니다.
이분의 글이 인간의 욕망적인....그리스도를 배제하는 글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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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쟁

전쟁을 하려면 선전포고를 하여야 하는데 이를 선전[宣戰, declaration of war]이라하며 국제법상 또는 국내법상 전쟁개시의 의사표시이다. 이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아래와 같다.(http://100.naver.com/100.php?id=91024)

중세에는 전쟁의 개시방법으로 '도전장'이 전달되었으나, 17세기에 이르러 선전포고의 관행이 발생하게 되었다. '개전선언' 또는 '선전포고'라고도 하는데, 국제법상 선전은 무조건의 개전선언을 말하는 것으로, 조건부의 개전선언을 포함하는 '최후통첩'과는 구별된다. 1907년 '적대행위 개시에 관한 조약'도 전쟁 개시의 절차로 이를 인정하고 있다. 이 조약은, 선전은 선전의 이유를 붙여야 하고 명료한 사전통고와 그 통고의 도달을 요건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전쟁개시 의사의 명백한 표시가 있어야 하므로 단순한 적대행위의 언명만으로는 불층분하다. 사전에 이유를 붙인 통고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정당한 이유 없이 전쟁에 호소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통고 절차에 관해서는 명문규정이 없으나, 전보와 같은 약식통고가 아니라 외교사절을 거친 정식문서로써 통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전쟁상태는 지체없이 중립국에 통고하여야 하며, 통고수령 후가 아니면 그 국가에 대해서 전쟁상태의 효과를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중립국에 대한 통고방법은 무전보고도 가능하며, 중립국에 대한 통고는 중립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한 요건일 뿐 선전의 요건은 아니다. 선전에 의해서 전쟁은 개시되고, 따라서 선전 후가 아니면 적대행위를 개시할 수 없다.

선전의 시기는 선언문서를 상대국에 교부한 때이다. 중립국에 대한 효과는 그에 대해 전쟁상태를 통고한 후에 발생하나 중립국이 실제 전쟁상태의 존재를 알고 있음이 확실한 경우에는 통고의 흠결(欠缺)을 주장할 수 없다.
선전포고 후에 적대행위가 있는 것이 보통이나, 적대행위 후에 선전포고가 있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일본의 진주만공격은 1941년 12월 7일에 있었고, 일본의 정식 선전포고는 66시간 후에 있었다. 점차 선전포고 없이 사실상 적대행위로 전쟁을 개시하는 관행이 형성되어 가고 있다. 한국의 6.25전쟁 때도 상호선전은 없었다.

성도들에게는 이미 선전(宣戰)된 전쟁이 있으니 이를 善한 싸움이라고 한다(딤전 1:18).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성육신하셨을 때 헤롯은 교회의 머리가 되실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였다(마 2:13). 구약에서 약속된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에도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었다(마 4:1~11, 14:1~12, 26:4, 26:59, 눅 19:47, 요 7:19). 이는 그의 제자들에게도 계속되었고(마 10:16~42, 26:31) 구약성경에 약속된 일로서(마 21:33~46, 요 15:18~20) 제자들은 이를 기뻐하였다(행 5:41).

이러한 성도들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세상 주관자들과 거짖 영들과의 싸움이다(엡 6:12)
성도들의 전쟁의 영역은 실로 광범위하니 사회, 경제, 정치에 이르는 전면전이다. 이는 하나님의 삼대언약을 인간 스스로 이룬다는 교만으로부터 시작되는 까닭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손과 땅과 그리고 통치인 국가의 삼대요소를 언약하시고 이를 친히 이루신다. 그러나 인생들은 일찍이 삼대언약을 스스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악한 마음때문이다(창 3:22).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전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 자손에 대한 언약은 무자한 아브라함에게 인간의 수단에 의한 이스마엘이 아닌 약속으로 말미암은 이삭을 통해 이루신다. 그리고 애굽에 4백년동안이나 종살이를 하도록 하시면서 자손언약을 민족적으로 이루신다. 또한 언약된 땅도 하나님의 약속을 인하여 칠족속이 잘 가꾸어 놓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차지하도록 하신다. 그리고 왕국 또한 목동 출신인 다윗을 불러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루신다. 그러므로 광범위한 전쟁의 영역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악의 뿌리로부터 구체적인 죄로 실체화된다(창 3:5, 마 5:20~48, 살후 2:4).

사람이 에덴에서 사단에게 유혹을 받은 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창 3:6) 나무였다. 충분히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말씀을 거역하는 영적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싸움에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서 패전한 까닭에 무릎을 꿇고  결국 죄의 종이 되었다.

의기 등등한 사단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도 똑같은 시험을 하였다. 돌로 떡을 만들어 해 아래의 생명을 보존하라 하였고 높은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해 아래의 것으로 왜곡하려 하였으며 해 아래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자신을 경배하면 이를 주겠다고 유혹하였다. 이것 또한 사회, 경제, 정치적인 영역에 걸친 전면전이다. 그러나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께서는 이를 이기시므로 궁극적으로 사단에게 이기실 분임을 보여 주셨다(마 4:1~11).

예수께서 구약의 말씀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고(고전 15:3~4)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되심의 증인을 삼으시고 승천하셨다(행 1:8). 그런 이후에도 사단은 할 수만 있으면 택한 백성이라도 무너트리기 위한 전쟁을 계속하였다(벧전 5:8). 오히려 마지막임을 감지한 사단의 궤계는 날로 교묘해 지기 시작하여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할 뿐 아니라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첨하는 말로 미혹한다(롬 16:18). 그러나 그리스도의 지체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는 이에 맞서 싸움으로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셨다(행 5:41).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공격하는 모든 세력을 자신을 공격하는 대적이라 하셨다(행 9:4~5).

지금도 사단은 구습에 얽매여 있는 성도들의 전 영역을 통해 공격하고 있다. 하나님의 삼대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사역이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인간의 의지로 이를 이룰 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러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아버지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요일 2:16). 사단은 진화론이라는 터무니없는 사설을 학문으로 체계화하여 수많은 성도를 유혹한다(골 2:8). 마귀는 지금도 자연과학을 통한 안목의 정욕으로 헛된 해 아래 일에만 관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짐승권세와 음녀권세는 사회과학을 통한 육신의 정욕으로 통합세계를 이루려 모든 衣食住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속삭인다(살전 5:3). 그리고 옛뱀은 인문과학을 통한 이생의 자랑으로 眞善美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하는 탐심으로 하나님께 하듯 섬기게 한다(엡 5:5).

하나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전쟁을 인하여 하나의 나팔소리로 전쟁을 대비케 하시려고 성경신학을 주셨다(고전 14:8).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된 성도는(엡 4:13)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볼 일이다(마 22:37~40, 히 12:2). 그러므로 인간을 해 아래의 제도적 편의에 길들이고자 하는 의식주의와 해 아래서의 안연함에 취하게 만드는(살전 5:7) 세속주의에 대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자.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친히 이루심으로 보여주시기 위한 영광의 발현이지 결코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다(잠 1:32~33).

안영민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고난 당할때에 더욱 빛이 빛나는, 두려움 없는 전진으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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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언약사상에 대한 답변입니다(말씀운동 과 십자가마을의 언약사상의 차이점) 
이성민   2005-04-19 00:21:39, 조회 : 254, 추천 : 23

조각목 목사님께는 정말 죄송합니다.
허락없이 글을 다시 퍼오게 되었네요...

여기서 글을 보는 성도들에게 그나마 좋은 답변이 될듯 해서 올립니다.

조각목 (, Hit : 346, Vote : 4) 

http://www.logos.or.kr

이근호목사님의 이해에 대한답변

이근호 목사님의 첫번째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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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목씨의 주장에 의하면,창세기 3:15부터 성경의 핵심을 잡을 것이 아니라 창세기 1:28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시기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다소 앞선다고 여기신 모양인데, 그렇다면 시기적으로 보다 앞선,요한복음 1장이나 에베소서 1장의 '창세전'의 이야기나 골로새서 1: 15-17의 상황에서 왜 출발하지 않는지 의아하군요<<

1)삼대언약은 영원한 언약에 기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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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언약은 영원한 언약에 기초하고 있음을 글 서두 1번에서 미리 밝히고 다음 글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이나 에베소서 1장을 말하지 않아도 근본적으로는 영원한 언약으로 부터 시작되고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아마 이글을 읽으셨다면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았을 터이지만 읽지않으신것으로 보입니다.

2) 삼대언약은 시기나 논리적 우선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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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아담에게 복주어 세워주신 삼대언약은 시기나 논리적으로 앞서기 때문에 중요한것이 아니라 인류의 타락이전에 주신 언약이냐? 타락이후에 주신 언약이냐? 하는 분명하고도 중요한 문제을 알게하는 근본입니다. 이것을 만약 다르게 본다면 다른 길을 걷게되는 것입니다.

(1) 타락이전의 하나님 언약(창1장28절) --> 하나님의 무조건 은혜언약 
(2) 타락이후의 하나님 언약(창3장15절) --> 인류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야언약 

이렇게 다릅니다. 더 쉽게말하면 창 3장 15절을 근본으로 보신다면 타락이후 구속에 대한 언약을 말하는 것이라 사실상의 구속사 신학입니다. 그러나 창1장 28절은 구속이전의 언약을 말하고 있음으로 더욱 근본적이고 인류의 타락과 관계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언약임으로 구약성경신학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두번째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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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8의 축복 안에 장차 나타날 3대 언약의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고 보시는 것 같은데,우선 메시야가 세 분이 아닌 이상 언약사 도중에 언약의 세 가지 요소가 하나로 뭉쳐져야 될 것 같은데 그 뭉쳐지게 하는 요소가 왜 창세기 3:15에 함축되어 있다는 발상은 왜 하지 않는지 역시 의아합니다. 즉 논리상 셋으로 가지를 쳤다면 반드시 하나로 모으는 원리가 셋 으로 가지칠 때와는 전혀 상관없는 원리로 동원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의 원칙에서 셋으로 나뉘는 원리와 따로 하나로 뭉쳐지는 원리를 발생시킬 수 있을까요? 차라리 하나에서 하나의 원리로 움직이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즉 3대 원리가 아니라 그냥 언약에서 새언약으로 전개하는 것이 더 바람직 한게 아닐까요?)

3) 삼대언약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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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언약이란 하나님이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실것과 땅을 정복하고 통치하도록 주신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 아담이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변개하지않으시고 언약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구약 역사를 통해 보여주심으로 영원한 그리스도를 언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이 이해하시려는 것과 성경의 구조적 관점과 다릅니다. 창3장 15절은 구조의 출발점도 아니고 결론도 아닙니다. 단지 구속에 대한 메시야언약 뿐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세번째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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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15절의 손목사님의 해석을  이원론적이라고 배격한다면,그렇다면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이 주장하는 두 언약이 대조되면서 갈라지는 원리도 같이 배격해야 되지 않을까요?

4) 이원론이란 근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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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장 15절을 언약의 기원으로 삼으면 인류가 이미 타락하여 사망의 권세 아래 있음에 대응하는 하나님의 구속으로 부터 시작하는 언약임으로 언약성취사의 원론이 되지못한다는 뜻에서 이원론에 근거했다는 것입니다. 또 바울이 갈라디아서 4장에서 말하는 것은 구원의 과정을 말하는 구속사적 설명입니다. 기원과 과정은 서로 비교되지않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과 갈라디아서 4장은 서로 인류의 구속에 대한 과정적 설명이라는 점에서 일치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 28절은 이러한 구속사의 과정적 설명을 포함하는 광대한 하나님의 언약성취사에 대한 근본언약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사상은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야언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틀린것은 아니지만 성경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지엽적 부분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래서 창3장 15절이 근본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인류 타락 이후의 하나님 언약을 근본으로 보시는 발상 자체가 이미 영원한 언약을 의식하지않은 주장이며 더 나아가서는 인류의 기원과 함께 주어진 하나님 은혜 언약을 무시하는 해석이됩니다. 저는 님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창3장 15절을 인류의 구원에 대한 메시야언약이라는 해석은 하지만 언약성취사의 기원 혹은 근본으로 말하지도 공감하지도 않습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네번째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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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손성식 목사님의 논리는, 구약이든 신약이든,그 귀절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해석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고 바라는 해석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조각목씨는  손목사님의 이러한 사상에 우려를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딛고 궁극적인 성부 하나님께서 포괄하는 신학이 보다 완결적인  신학이 된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5) 그리스도 증거는 구속이 결론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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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전에 그리스도안 에서의 언약은 인류의 구속(선택받은 성도)에 대한 것만 있는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글을 기초로 본다면 이근호목사님의 사상은 그리스도 증거라는것은 곧 선택한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으로 보는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속사의 한계지요 동일한 말을 외치지만 그리스도 증거란 선택한 성도에 대한 구원에 대한 증거말고도 할말이 허다히 많습니다. 하지만 손성식 목사님이나 목사님의 생각대로 한다면 그리스도 증거는 항상 구속에만 촛점이 맞추어 결론 날것입니다.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부분적 설명에 불과하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다섯번째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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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기에는 십자가 복음으로 인하여 완전히 유대교와는 다른 하나님을 소개했던 사도들의 복음의 취지는 사라지고 그저 장엄하고 거대한 하나님 중심의 유대교 신학에다 그 중간 허리에 복음을 삽입해서 봉합하는 선에서 머물러 버리게 되니 이는 인간이라면  구약 성경을 가지고 거대한 신학체계를 조립하려고 마음 먹고 달려드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구성해 낼 수 있는 모든 신 체제를 도리어 뒤엎어버리는 그 십자가의 본래의 가치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복음 대신 유대교 신학 체제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아쉽습니다.
   
6) 유대교 사상이라고 비난할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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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구약의 삼대언약을 서두로 꺼냈더니 그 결말은 듣지도 않으신분이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다른복음, 유대교 신학에 삽입된 복음, 또는 유대교 신학체제를 확대한 결론등으로 이해를 하시는 군요 물론 그러한 오해는 할수도 있지만 이렇게 글로 답변하는 내용을 대하고보니 지나치게 경솔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님이 비난하듯 유대교 사상에 복음이 삽입된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며 그분을 언약대로 보내신 하나님을 여호와로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역사와 시서와 선지를 통해 그리스도를 언약하셨으며 그리스도는 언약하신대로 성취하심으로 그분을 보내신자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곧 성경이요 복음인것입니다.

그러나 이근호 목사님의 생각대로 한다면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택한성도)을 위한 메시야 언약을했으며 그 언약의 성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리스도를 모두 증거했다고 볼수 없습니다. 

또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셨으면 그리스도를 약화 시키면서 여호와를 말할수 없고 여호와만 부각하면서 그리스도를 바로 증거할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실것입니다. 만약 이중에 어느 한곳으로 편중되었다면 그것이 바로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근호목사님이 잘 외치는 구호 오직 자랑할것은 십자가 밖에 없다는 말에 저는 공감합니다. 다만 구호에만 그치고 계신다면 그것은 맹목적 주장을 하는 것이며 이를 신약에만 집중적으로 근거한 해석이라면 편중된 해석입니다. 저는 그 십자가 외에 자랑할것이 없다는 의미를 신약은 물론이고 구약의 역사에서 시서에서 선지서에서 이끌어 하나님의 은혜와 십자가의 능력을 증거합니다. 복음이란 신약은 물론이고 구약까지 자유자제로 증거할때 더욱 빛나게 될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언약성취사와 이근호목사님의 사상은 출발이 다른 말입니다. 제가 말하는 언약성취사 곧 하나님의 언약과 그리스도의 성취는 구속은 그리스도의 사역중에 한 부분입니다. 또 목사님 처럼 "인류구속(선택한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야 언약"을 말하는 것은 언약사가 아니라 구속사라고 규정하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 구속사가 틀린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언약과 성취사에 있어 일부분에 해당하는 분야입니다. 


  ** 조각목**

이글을 올리신 분에게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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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서 의문이 있으면 님이 직접 이해하신대로 질문하시거나 자신이 배우고 싶은 곳에서 잘 배우시기 바랍니다. 양쪽을 비교한다거나 이글 저글 옮기면서 서로 토론하게 하는 방식은 상당히 기분이 언짢은 일입니다. 삼가해주시기를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벨웨이브
(2004-07-24 22:21:57) 

기분이 언짢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러나 싸움의 구조를 기대하여, 이글을 올린 것이 아니며,
그저 배우고싶었기때문입니다.
어쨋든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강현호
(2004-07-25 04:57:28) 

조각목씨가 아니라 목사님이십니다..

제가 듣기에는 영...
이근호 목사님의 언약신학은 무어라 할까 정돈이 안된 느낌입니다.
일단 일반 성도들이 듣기에도 어려운 언어구사도 있습니다.
그분의 mp3 파일강론을 들어보기는 했지만 아직도 어려운감이 있습니다. 여기 말씀운동에서도 다른 드러나지 않는 그런 언약신학에 관해 비교하고 정돈하시는 그런작업을 바라기는 합니다만..
모두 바쁘실테니 어려운 부탁이겠죠...
다만 일반 성도로서는 어떤게 더욱더 귀한것이냐를 구별할수있는 조언을 해주시면 감사할뿐이겠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이단이 무서운것보다 더 드러나지 않는 사상을 구별하는게 더 어렵습니다..

유덕상
(2004-07-25 09:44:35) 

의문은 의문대로 정리해두고 계속 공부를 하다가 ,그의문이 해결되는 기쁨은 질문해서 얻은 것보다 더 진합니다.배우기를 원하시면 조급함을 버리시고 ,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만큼 알아 가시면 된다고 봅니다. 성도대학 코스 완료 하는것만도 보통7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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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밑에 언약사상에 대한 답변입니다(말씀운동 과 십자가마을의 언약사상의 차이점) 
이근호   2005-04-19 06:44:22, 조회 : 262, 추천 : 35

지금 조각목 목사님의 사상에 대해서 시비거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박용기 목사님의 사상을 거론하는 겁니다.

손성식 목사님이 알려주시는 박용기 목사님의 사상이나 조각목 목사님의 글을 통해서 추정해 보면

창세기 1:28의 내용이 원래 은혜 언약의 본질로 삼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이론이 타당하려면


"모든 성경은 내게 대해서 증거한 것이라"는 요한복음 5:39의 말씀에 근거해서

창세기 1:28에서 예수님의 은혜가 도출되는 근본이 된다고 주장할 될 때나 타당성이 성립될 것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말해서 

사도 바울이 창세기 1:28절의 은혜성에 최종 근거를 두고 '복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경우에만 타당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12사도의 견해 만큼 예수님의 말씀 해석이 더 탁월한 신학자는 도무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도 바울이나 사도 베드로나 사도 요한이  '복음'을 생각할 때, 창세기 1:28를 토대로 해서 '복음'을  생각했더란 말입니까?

아니면 오직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복음'을 말한 것일까요?

지금 조각목 목사님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언약의 완성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달리 표현해서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기 1:28를 완성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로 보고 있습니다.

과연 사도들의 복음이 이런 내용의 복음일까요?

제가 알고 믿기로는 사도들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증거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1:28 이전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위해 이 세상은 창조되었음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언약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을 만유로 주로 영광돌리기 위한 언약이었습니다.

만약 조작목 목사님의 주장대로,

예수님의 주되심이 언약의 일부라면, 그렇다면 예수님의 주되심이 최종적 언약의 내용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 나머지 내용은 예수님의 주되심으로 새삼 뭔가 이용해 먹을 거리가 아직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야를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관점입니다.

황폐한 우주만물의 미련 같은 것을 신 쪽에서 어떻게 해결해 줍시사 하는 바램 같은 것이 그들이  품고 있는 최종 노림수가 됩니다.

신도 좋고 인간도 좋은 그 완벽한 경지의 세계를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인간들의 이러한 종교적 소망은 아예 처음부터 그럴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악마가 심어준 종교적 심성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덕성 목사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전쟁'을 성도가 벌려 왔다고 하는데

악마가 최종적으로 노리는 것이 사도에 의하면 '십자가 복음'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덕성 목사님께서 조각목 목사님(동일인인지 모르지만)과 의견을 같이 한다면  이덕성 목사님께서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예수가 아니라 창세기 1;29절을 사수라는 예수님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박용기 목사님의 신학을 옹호하시는 분를 신학은 이렇습니다.

"삽자가 복음은 사실상 최종적인 도달부분이 아니다. 십자가란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하고 생긴 죄  때문에 주어진 것인데 타락 전 원상태로 복귀하려고 그 죄를 처리하려는  중간 조치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복음은 사실상 '십자가 복음'이 아니라  '십자가을 일단 딛고 더나아가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진정한 복음의 세계의 전부이다'"라고 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범주가 '십자가 복음'이 주는 은헤의 범주보다 더 넓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가 무엇이며 악마가 무엇을 노리는지를 근본적으로 몰라서 이런 발상을 펴고 있는 겁니다.

자신들이 그런 발상이 십자가 앞에서 죄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즉 죄라는 것을 일방적으로 나름대로 정해놓고, 그 죄에 대해서는 십자가 피로 해결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죄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처음 이 세상에 규정되는 겁니다.(요 15:22)

그 전에 죄라고 여기는 기준 자체도 여전히 죄에서 나온  발상에 해당될 뿐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십자가의 원수이기에 (죄인이기에) 이미 범죄한 입장에서 범죄하지 않아서 괜찮아 보이는 창세기 1:28절의 상황을 더 근본적으로 바라보는 겁니다.

바라보는 것은 본인들의 자유이지만, 과연 십자가 앞에서 그런 소망을 가질 입장인가 하는 것을 생각치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발상은, 인간들이 이렇게 불쌍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에 대해서 어쨌던 하나님 쪽에서 책임져야 하나님답다는 의식이 여전히 숨어 있는채 발동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은 이런 인간들의 의도성을 밝혀내고, 배후에는 계속해서 악마가 인간들에게 이러한 기대감을 유발시킨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도 이 십자가 복음 앞에서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인간의 '자기 의'가 곧 십자가 사건을 일으킨 주범인 것을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창세기 1:28의 상태로 되돌아갈 권리는 이미 신이 내린 자신의 존재성 안에 함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식을  계속해서 분출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하나님이 자진해서 만든 인간을 자진해서 저주할 리가 없을거야 그지?"라는 자기네들 만의 위로입니다.

그것도 십자가의 피 흘림 앞에서 말입니다.

관권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주되심을 알리시는데 있어,

십자가 외에 다른 것까지 첨부시켜 더 넓은 방식으로 이 세상에 주되심으로 드러내시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십자가 가지고는 모자라고 창세기 1:28의 은혜성까지 챙겨야 제대로 내가 주되심을 이해하는데 모자람이없다"라는 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주되심으로 드러내시느냐 하는 겁니다.

세상의 지혜를 박살되지 않는 방식으로는 예수님은 자신의 주되심을 드러냄이 없으신 분입니다.

이 세상 지혜를 박살되는데는 창세기 1:28의 은혜성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입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깊은 비밀,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자신이 전적인 죄인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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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감사합니다 이근호목사님.. 
이성민   2005-04-19 17:55:17, 조회 : 222, 추천 : 39

답변글을 보고 저도 많은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글을 말씀운동사이트에 옮기고 싶으나 더이상 제가 옮기면 그쪽 분들에게 실례될까 싶어서 여기서 그만하겠습니다
거기 말씀운동쪽에 제가 목사님이나 또는 깊게 배운 상태라면 제가 답변이라도 할텐데
주제넘게 제가 답변 할 지혜도 없어서요..그렇다고 이글을 그쪽에 그쪽글을 제가 여기에 올리기도 참...-_-
차라리 이근호목사님이 그쪽 웹상에서나 또는 직접  공개질의를 하시면 괜찮을것 같기도 합니다만....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제가 정말로 바라는것은 말씀운동쪽이나 여기 십자가마을이나 정말 성경대로 해석하려는 점은 같으니
대화가 되리라 생각되어집니다. 막무가내로 십일조안내면 이단이다 교회건물이 성전이다라면서 떠는곳과는 달리 말입니다.  같은 성경의 언약사상에 해석을 달리 하는 부분이니....

단순 소모식의 논쟁 보다는 정말 공개토론이나 각자 목사님들께서 질의응답식으로 저희들에게도
완전한 해석이 아니라면  정말 어떤 것이 성경에 대한 옳은 해석인가 서로 대화로서 신학사상의 오점이나 잘못된 해석을 바로 잡아가셨음 하는 자그마한 소원이 있긴 있습니다만.. 그게 쉽지 않겠죠..

옛날 신학자들이 많은 시간을 두고 정경을 선택하기위해 한것같이 그런 신학성의 검토는 같이 연구하고
잘못된것은 성경의 어떤부분에 모순이다라면서 고쳐가야하는게 아닌가 생각은 합니다.

모든 주관은 주님께 있으니 다만 기다릴렵니다....추후 공개토론같은것이 있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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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답글 감사합니다 이근호목사님.. 
송재원   2005-04-19 23:11:56, 조회 : 223, 추천 : 39

이성민님.어딜 바라보고 계신지요?

미흡한 복음이란 없습니다.
고로 신학적 토론을 통해 복음이 발전할 수도 없습니다.

장안중앙교회란 곳이 지금 학문을 하고 있다면,
속히 십자가 복음을 바라보아야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
지적호기심과, 논리성, 넓고넓은 지평들은 모두 부숴져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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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언약사상에 대한 답변입니다(말씀운동 과 십자가마을의 언약사상의 차이점)    이성민 2005/04/19 23 255

[re] 밑에 언약사상에 대한 답변입니다(말씀운동 과 십자가마을의 언약사상의 차이점) 
권범식   2005-04-20 18:28:23, 조회 : 200, 추천 : 46

안녕하세요...
지금까지 이성민님께서 붙여주신 글을 잘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제생각에도 말씀운동쪽에 주장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거 같습니다...

처음에는 제법 그럴듯 했는데, 문제는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엔 이근호 목사님이 지적하신대로 말만 하나님, 예수님을 가져다 붙였지...다른 종교와 비슷한 논리라고 보여집니다.

왜냐면 벌써 시작이 인간 중심으로 시작되고 인간의 타락의 해결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종교와 진리와의 가장 큰 차이점인 인간이 중심이냐 아니냐에 아직도 걸려 있는 거죠...(이것을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겠죠, 유대인들이 이거에 걸려서 모두 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운동측에서는 하나님께서...어? 사람들이 타락했네, 예수님을 보내서 타락한 사람들을 위해서 피흘리게 하고 구원해야겠구나...하고 내려보냈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의 해석 방법이 되면 하나님은 일이 터질때마다...그걸 하나씩 해결해 가는 존재밖에 되지 않겠죠?

이미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시려고 예수님을 태초부터...말하자면 창세전부터 언약으로 정하셨습니다.(성도들도 창세전에 선택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십자가 사건이(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을 증거 하고 있죠) 창세전부터 이미 언약되어져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이 벌어지면 하나씩 해결해 가시는 분이 아니라는 거죠...(우리가 보기에는 시간상의 차이가 있다고 느껴지는 언약주심이 하나님께서는 이미 한번에 다 주신거죠...단지 드러내시는 시기가 틀리다고 해야될까요?)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계획안에 살고 있습니다...십자가의 계획안에 살고 있죠...이 것 말고 더 바란다는 것은 이미 종교로 발전했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럼 서툰 글 읽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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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범식형제에게 말씀운동에 대한 소견을 드립니다.. 
이성민   2005-04-20 22:28:29, 조회 : 259, 추천 : 39

주제넘게 제가 이해한 것을 말씀드립니다
다시말하지만 장안교회성도도 아니고 그쪽 노회 성도도 아닌
그냥 서울에 있는 장로교회에 다니는 평범한 성도랍니다


인본주의 즉 사람중심의 신학은 절대아닙니다.
인간이 타락했네?라며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발단이 시작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뜻 다시말해 그의 선하신 뜻(인간을 죽이고 살리고는 하나님 자신의 독단적? 마음 그것이 선한뜻입니다)
에 의해 택자들과 불택자들을 두시고(.이건 기본 장로교 교리입니다)

그의 영원한 말씀이신 즉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하나님의 뜻을 통해 택자들에게 예수그리스도의 그 엄청난 은혜와 속성 그리고 택자나 불택자나
다 영원한 지옥에 갈수밖에 없지만 오직 긍휼하신 사랑으로 깨닫게 하사 하나님께서 주신자는
다 내게로 온다라는 말씀같이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심을 타락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죽어 마땅한지 알게하시고
그의 십자가를 통해 주의 택한자들을 깨닫게 하사 그 영원하신 하나님만 섬기게 된다는것입니다.

초칼빈주의라고 말을 듣는것은 칼빈이 주장한 죄에 대한 개념, 율법 또는 예정론등등
칼빈목사님의 부족한 신학을 좀더 방대하게 체계화해서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말씀운동쪽의 언약개념은 밑에 조각목 목사님이 쓴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성부쪽에 강조를 한다고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거기에 성자 예수님이 공로가 작아졌다고도 생각 안합니다
아니 그렇게 보았다면 오해한것입니다.

그 방대한 강론을 1~2년 다녀서 파악했다면 그분이 대단한거겠죠
왜냐하면 성경66권을 계속해서 강론하시는 말씀을 부분부분 들어서 간파?했다
그건 오해입니다. 저도 아직 듣고 있고 아직도 부족합니다.
중간에 툭 던져서 이해할 신학체계가 아닙니다..그걸 다 이해한다고 구원받는것도 아니요
모른다고 구원안받는것도 아니겠죠..그쪽 말씀운동을 꼭 들어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공부안할거면 다른 교회가라고 하십니다.

물론 우린 지식을 위해 교회를 다니는게 아닙니다만...
마찬가지로 생명의 말씀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되신 말씀을 매일 먹음으로써
우리가 더욱더 깨달아 아는것과 믿는것이 하나되는 것 아닌지요?

우리 피조물인 관점에서 삼위일체의 그 영원한 것들을 얼마나 알수 있겠습니까?
박목사님의 언약신학은 성부 성자 성령 속에서 신적인 영원한 삼위일체 언약에 관한것이라
우리가 관여할게 못된다고 생각하는바입니다..
윗분들이 하시는 일에 대해 피조물인 저희들이 어떻게 관여할수가있겠습니까?
솔직히 창세기를 기점으로 한 삼대언약이 출발이다 라는것은 단지 우리에게 표현되는는 것이고
그 근본이 창세전 즉 영원적 그리스도안의 사건으로 깊게 출발된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근호목사님의 언약신학은 실제로 죄악된 인간에게 주 예수그리스도와 우리의 죄된 본성들을...
깨부수면서 좀더 세밀하게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덧 붙이면 장안교회에서 십자가 설교가 없다구요?

그렇다고 강단에서 매일 너희들 회개하라 너희는 죄인이니 예수만 믿어라?라고 가르치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어라 너희들 죄인이다라고 강론하기위해서는 서론과 본론 결론을 통틀어서 가르치는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

사도행전을 보십시요,...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게한 베드로의 설교가 어떠했는지 말입니다..

아부라함때부터해서 너희들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줍니다....그리고 구약성경을 통하여 서론하시고
마침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들의 죄악이 어떻했는지 알려주시어서 예수그리스도를 결론화하여
유대인들이 깨닫는과정이 있었습니다.

다 들어보지도 않고 관점이 틀리다고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시는것은 연약한 성도들에게 흠이 되는 짓을 하시는겁니다.
제가 앞서서 얘기하였지만 판단하는것으로 주 예수께서 판단을 하실겁니다.

현재 우리 한국교회가 얼마나 타락을 하였습니까만은....그래도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자들의 약속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끝까지 끝까지 보호하심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진다고 생각되어집니다
제가 앞서서 말씀드렸지만 종교개혁당시의 설교나 강론 그리고 한창 복음이 전파되었을때에
언약신학같은 사상이 있었을까요? 말씀운동의 신학같은게 있었을까요?

현재도 계속 외국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을 전하는 목사와 성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전에 방글라데시아에서 목사님이 피살당한 사건이 있을 정도로 아직도 주님의 언약으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하신 약속이 죽음앞에도 불구하고 이루어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에 저렇게 순교한 분중에 뭐 언약신학 또는 말씀운동이요?
그런 신학 모르고 그냥 예수만 전하다 죽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의 죽음은 헛된것입니까? 아니면 예수그리스도의 권세로 그 인간의 약한것을 통해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계속 증거해나가고 계시는것 아닙니까?

우리가 왜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지요?
구원 받 기위해서인가요?
영원전에 예수안에 있던 자들이 구원받는것이지 우리의 의지나 행위따위의 선택에 의한것이
절대 아니라는것을 아실겁니다. 믿습니까?/ // -_-

지혜의 설교를 들어서 구원받습니까? 아니면 우둔한 설교임에도 사람을 구원하시는 성령의 사역으로 구원받습니까?
오직 영원전에 약속받은 택자들은 예수께서 친히 지금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과
우리의 죄외 허물에도 넉넉히 구원을 주신 우리 구주 예수님께 입이 열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큰소리 외쳐 찬송드리고 싶습니다..아니 찬송합니다.


말씀운동을 단지 옹호하려는것도 아니고
그냥 제가 알고 있는것들 그리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것들을 알려주고 싶어서
타자를 쳐갑니다.


아 이런글 이제 안쓰렵니다....떠들어봐야 소용없고 조용히 설교를 듣고 기도하며
예수님께 맡기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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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강남 노회 계신 분들의 장점들 
이근호   2005-04-21 09:52:15, 조회 : 335, 추천 : 29

그들은 바른 신학을 위해 '이단 소리' 듣는 것도 개의치 하고 기존 교계 세력을 수 십년 채 투쟁하고 계십니다.

교계에서 자신의 위상을 따로 알리고 챙기고자가 아니라

근 200년 가까이 거짓 진리에 계속 압사당하고 농락당하고 또한 속고 있는 이 교계의  현실 안에서 당연히 부딪칠 부딪힘을 자연스럽게 대응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십일조 율법주의와 치열하게 싸웠고, 교권주의와 싸웠고, 주일 성수 율법과 싸웠고, 목사 중심의 성직 제도와 싸워왔습니다.

특별히 유념해야 할 것은

성화론에 있어 인간의 자유의지를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국 교계를 겨냥하는 것을 넘어서 '강남 노회' 자신들이 자체적인 정당성 추구에 대한 반성의 여지를 항상 생각하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명령적 말씀이나 서술적 말씀에 있어 그 행위의 주체자가 결코 인간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므로서,

'강남노회'가  부흥이 안되는 한이 있더라도 진리는 포기 못한다는 강한 숭부수를 모든 노회원들이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부흥을 위한 강남노회가 아니요 성장을 우선하는 강남노회가 아니라 오로지 말씀을 말씀대로 전파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다는 사명감에서 나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김홍전(최낙재 교단)보다 더 탁월한 신학체제를 소유하게 되고, 또한 시중에 떠 도는 워치니 만 류의 '새생명'을 부르짖는 무리들(이들은 백발백중 사기꾼들입니다.) 보다는 비교도 안되는 품격있는 신학을 보여주게 됩니다.

고 김홍전의 사상은, '삼위일체적인  삶을 보여야 신자다'라는 사싱이고

워치니 만의 사상은, 인간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고장된 생명을 안고 사는 것에 있으니  이것을 예수님이 새생명으로 교체해야 하나님이 보시기에 영광돌리는 삶이 된다는 사상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상의 취약점이 모두 성경의 핵심인 '언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욕구에서 비롯되었음을 은 박용기 목사님에서는 간파한 것입니다. 

교회 부흥이 우선이냐 아니면 말씀이 우선이냐를 놓고 그 분은 한국 교회를 진단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생각에 대해서 추호의 양보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 분의 작업은 이러합니다.

박형용 조직신학의 퇴조 및 변질이 한국 교계의 이단화를 가속화가 되었다는 겁니다.

즉 신학교 시절에는 학교에서 배운대로 박형용 조직신학대로 하겠다고 해놓고서는 막상 목회 현상에서는 조용기 식으로 나가더라 말입니다.

박용기 목사님은 그 원인이, 박형용 신학조차 제대로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하고 목회 성공을 위한 핑계로서 "나 정통 개혁주의 신학교 출신이니 내가 뭘 외치고 뭘 목회해도 이단하고는 거리가 머니까 안심하시고 우리 교회 출석하시면  천국은 보장됩니다"라는 장사속으로 신학을 해오고 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 것입니다.

물론 이 장사판에 죽어나는 것은 일반 교인들의 영혼이지요.

박용기 목사님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박형용 신학 자체가 그런 오해를 소지를 준 원인에 대해서 나름대로 분석했습니다. (물론 많은 신학 서적을 읽으시고)

그래서 내린 결론이

성경신학적인 바탕이 되지 않은 조직신학은 결국 교회론에 문제를 이르킨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무도 이런 시도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없기에 박용기 목사님은 "본인부터라도 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어떤 공명심이나 명분 같은 것도 다 포기했습니다. 이런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기존의 교계로부터 엉뚱한 것으로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사전에 스스로 차단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박용기 목사님은 썩어빠진 이단적인 한국 교계 가운데서도 어떤 회생의 가능성을 찾아내신 겁니다.

썩었다고 탄식만 할 것이 아니라 무지해서 잘못된 길로 가니까

우선적으로 교회가 구원을 보장한다는 의식에서 깨어나 말씀 중심으로 새롭게 교인들을 가르치고 그 교인들로 하여금 성령에 은사에 의해서 초대교회에서 보여지는 바른 교회를 구성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구체화해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그 와중에서 박용기 목사님은 정치적으로, 교계적으로 인간으로 차마 견디기 힘든 수모와 박해와 오해와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그마나 다행스러운 것은 박용기 목사님은 순수성을 이해한 분들이 기적처럼 죽순처럼 여러 방면으로 돋아났습니다.

박용기 목사님은 이런 결과를 자신의 수완이나 카리스마나 지도력에 있다고 보지 않고 아직도 하나님이 이 한국교회를 버리지 않고 있다는 증거로 보신 것입니다.

성경신학적으로 뒷바침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조직신학으로 만족하고 연연하고 있는 소위 '영적 지도자'들에 지속적인 교육과 스스로 공부하게 하는 노회를 풍토가 갖추어져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박용기 목사님 자신이 앞장서서 성경 전체의 진리를 아우를 수 있는 거대하고 광대한 신학체제를 구축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작업이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익히 아시면서 대략적인 틀은 후학들을 위해서 갖추어놓고 그 안의 내용을 채우는 것은 후학들이 자기처럼 멈추지 않는 탐구열과 학문성으로 채워나기기를 원했던 겁니다.

즉 '박용기'만을 옹호하고 외치는 그런 집단이 아니라 과연 이 신학체계가 궁극적으로 모든 성경 진리성에 만족스럽게 해명할 수 있는 체제인가를 후학들, 그리고 다음 세대의 성도들이 몫으로 계속 남겨두어서 옳지 않는것은 그들의 손에 의해 수정이 가해지고 보다 완벽을 이루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개혁교회로 지속될 수 있다는 취지입니다.

제가 보기에 강남노회의 최대의 장점은,

한국 교회가 쉬쉬하는 면을 정면으로 까발겼다는 겁니다.

즉 교회를 위한 신학을 해서는 아니되고, 성경에서 말하는 기본 진리를 위한 말씀 전파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강남 노회를 결코 자체적으로 완전함을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정말 한국 교회는 이래서는 아니되지 않느냐"라는 안타까움을 양보없이 외치는 겁니다.

지속적인 공부와 진리가 우선한다는 지속적인 사명감이 없이는  아예 강남노회 자체내에서 거부합니다.

그동안 기족 교계와 싸우면서 (그리고 지금도 싸워 오면서) 인간의 약점이 무엇이며 교회의 취약점이 무엇이며, 노회나 교단의 약점이 무엇인지 이미 스스로 파악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약점을 말씀드린다면

1. 박용기 목사님은 이론들 ( 삼대언약이라든지- 언약에는 3대 요소가 있다고 하는 기존의 신학자들이 주장을 '요소'가 아니라 삼대언약으로 바꾸신듯 하지만 실은  땅, 주권, 백성, 이런 것은 19세기 이후 서구 정치론과 국가론에서 산물에서 나온 발상임을 기존 신학자들이 모르고 있음) 여러가지 이론이,  기존의 조직신학 틀의 약점과 헛점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부정의 부정이라고해서  반드시 진리라고 할 수 없다'는 원칙이 저촉되어 있는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 자체에서 '타락 전 구원' 이냐 혹은 '타락 후  구원'이냐 하는 논쟁의 나올 여지 자체가 성립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강남 노회측은 이점이 칼빈의 신학 이후에 상당히 중요한 쟁점인 것으로 나름대로 정립해서  이것은 '삼대언약'의 틀 안에서 최종 정리해 보려고 노력하고 했습니다. 이 점이 기존의 신학을 항상 염두에 두고 그런  신학들은  언약 신학으로 흡수 통합햐려고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부정에 대한 부정을 시도한다는 증거가 됩니다.

진리란 반대 논증의 연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진리로서 종결나 버린 십자가에서 출발해서 십자가로 마감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의 사명감을 앞장세워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만 나오는 능력과 은혜로만 일하십니다. 그런데 이 점을 강남노회는  놓치고 있습니다.

즉 사명감 자체는 연속적인 사명감을 부르고 그것이 누적이 되면 그것이 곧 십자가의 고유 능력을 가리는 시험꺼리로 자리잡게 됨을 아셔야 합니다.

3. 원대한  신학을 구축하기가 너무나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온갖 박해와 수모와 오해를 집중포화 받듯이 온 몸으로 다 받아야 하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그 보다 그 힘든 것은 그 거대한 신학 자체를 포기하는 겁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되지 않고 십자가로부터 성령을 받게 되면, 남는 것은 교회도 아니요, 탁월한 신학도 아니요 나의 확정적인 사명감도 아니라 모든 것이 예수님만을 주님되게 하도록 힘이 모아지기 위한 그 은혜 뿐임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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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문장의 글 너무 감사드립니다..[re] 강남 노회 계신 분들의 장점들 
이성민   2005-04-22 00:33:33, 조회 : 281, 추천 : 36

목사님의 장문의 글 너무 감사드립니다..

현재는 약간의 이견들이 있지만 복음의 순수성을 들고 나오시는 목사님들이 계셔서 너무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덕에 전에 몰랐던 것들을 깨닫고 다시 주님이 누구신가 생각하고 주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더 가까이
보고 제 처절함을 너무나 너무나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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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권범식형제에게 말씀운동에 대한 소견을 드립니다.. 
권범식   2005-04-21 18:33:05, 조회 : 240, 추천 : 30

안녕하세요~ 이성민님

먼저 성도라면 자기의 믿음관련해서 서로의 의견을 교환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성민님이 말씀운동에 속하셨거나 아니거나 상관 없답니다.

말하자면 저의 의견을 말씀 드린 것 뿐이고요...아래 글을 쓸때 조각목 목사님을 비롯해서 이 사이트에 올려진 말씀운동측의 글을 다 읽고 올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좀 이해 못 하신 부분이 있는 듯 해서 이렇게 답글을 적습니다.

일단 이성민님의 뜻은 알겠고요, 많은 부분 동감합니다. 저도 말씀 운동측의 모든 글을 읽어보진 못했답니다...하지만 아래 제가 적어 놓은 부분은 몇 개 안되는 말씀 운동측의 글에서도 바로 알수 있는 부분으로 성경의 가장 예민한 부분이랍니다. 아무리 다른 부분이 좋아도...아래에 적어놓은 십자가 부분이 해결되지 않으면 문제가 있다는 뜻이지요.

그 만큼 예수의 십자가 부분은 성경의 전부이자 기본인 것이죠, 중간에 나오는 중간과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이 부분은 이미 이근호 목사님께서 잘 설명 하셨죠.

이런 부분을 잘 이해하게 되면...몇 가지의 반응이 나오는데요...

첫 째, 절대로 사람의 한 일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게 됩니다.(선교사들이 생명을 바쳐서 선교했다던지의 내용은 무의미 해지는 것입니다.)

둘 째, 신학이란 테두리 안에 말씀을 가두지 않습니다.(저는 누구의 신학을 거론한 적이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원래 신학이란 사람들이 성경을 나름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만든 것일 뿐으로 절대적이지 않겠죠. 단지 진리와 비진리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 말고도 여러가지가 있겠죠...

어쨌든 이성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성경은 방대합니다...그런데 사람들이 성경을 이용해서 만들어 놓은 신학은 더욱 방대 합니다...하지만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부분은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쓴글이 다른거 아무리 잘 말하고 있어도, 그 핵심부분을 놓치고 있다면 이미 그 사람의 글은 의미가 없는 글이겠죠...그러니까 A,B가 서로 다르게 말하고 있다해도 그 핵심부분이 공통이라면 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하지만 서로 비슷한 말을 해도 핵심부분이 틀리다면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A가 틀린지B가 틀린지는 보시는 분이 판단 하시는 것이고요...저는 이성민님께서 그 관건의 핵심부분을 중시 하셨으면 합니다.

그럼 언제나 주님의 은혜를 알아가시는 이성민님이 되시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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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원 형제님의 말에 공감하며 
김철주   2005-04-21 11:02:19, 조회 : 230, 추천 : 20

가말리엘문하의 수제자로서 헬라철학 등 세상의 학문을 두루 섭렵한 사울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신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사도바울이 되어 자신이 하나님앞에 너무도 부패하고 추악란 죄인임을 알고 이 죄를 대속하려 오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사망의 몸에서 건짐을 받아, 구원과 영생을 얻었음에 감사하며 세상의 학문을 분토만도
못하게 여기며, 목숨을 걸고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이를 전한 바울을 생각할때, 초대교회때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전한 것을 생각할때 장안중앙교회의 가르침은 언약신학(언약성취)
적인 측면에서 학문적으로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 같으나 인간의 죄인됨과 이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경솔히 취급함에 따라 엄청난 위험한 결과((지옥길)를 초래할까 심히 우려됩니다    
성경을 통하여 인간의 추악한 죄인(사망)됨을 지적(구원의 필요성)하고 이 죄를 대속하려 오신
예수님을 믿도록 인도하여 구원(천국, 영생)을 얻도록 인도하는 이보다 더 큰  복음진리가 어디에 있을까요,
장안중앙교회가 이 복음진리를 언약성취의 한 부분으로 보아 지엽적으로 다루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너무도
위험한 접근이 아닐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핵심은 인간의 죄로부터 출발하고 날마다 죄인임을 고백하고 인식하며 이 죄를 구속하러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로 믿도록 인도하여 구원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게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5;14)
 
서울소재 복음진리를 제대로 전하는 캘빈의 5대강령을 근간으로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회를 운영(예:십일조가 아니라 연보의 형태로 운영하는 교회, 성전이 아닌 예배당등)하는 참된 교회를 소개바랍니다 아울러 송재원 형제님의 출석교회를 알고 싶습니다 (연락처019-494-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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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식 목사님의 글에 공감합니다 
김철주   2005-04-21 11:51:05, 조회 : 253, 추천 : 43

손성식 목사님의 글 박용기 목사님의 책 "언약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쓴 글에 동감합니다.
저 역시 박용기목사님의 저서 성경신학개론을 읽었기에 목사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장안중앙교회가 십일조가 아닌 연보, 성전이 아닌 예배당, 안식일이 아닌 주일등 교회를 운영하는
방식은 기존의 교회와는 달리 성경적으로 바르다고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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