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목사님의 갈2:20절의 주석과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란 말에 대해 질문합니다.
박홍섭 2004-05-01 10:26:19, 조회 : 287, 추천 : 40
우연히 십자가 마을이란 제목으로 클릭하여 이곳을 오고 나서 시간날 때마다 여기 있는 글들을 읽어오고 있습니다. 이유는 제 주위에 이근호 목사님의 사상을 신봉하는 분들이 제법 있어서 그 내용이 무엇인가 궁금해서입니다.
제가 굳이 이근호 목사님의 사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여기 있는 많은 글들에 담겨 있는 내용들이 성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경적이라기 보다는 이근호 목사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인간의 사상이나 철학의 산물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관한 것은 다음에 다시 질문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우선 이것을 질문드립니다.
일전에 어느 지체와의 토론에서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란 말에 관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저도 히11장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부분에 실상이 예수님인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러하기에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어느 분이 지적한 것처럼 어법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근호 목사님이 가지고 있는 신학과 생각의 발로 인것처럼 보입니다. 그러하기에 제가 이목사님의 주장들을 성경적이 아니라 사상적이요 철학적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이 목사님의 갈2:20절의 해석을 보면 참고가 될 것 같아서 보고 싶었지만 찾지를 못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구절을 목사님은 어떻게 주석하십니까?
그리고 고후5:17절의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인 신자들에 대해서와 골3:10절의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에 대해서도 목사님의 해석을 듣고 싶습니다. 답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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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04-05-01 11:55:24, 조회 : 267, 추천 : 29
예수님의 구약의 '주'이시기에 필히 창조에 나서십니다.
그 창조의 원리는 '언약'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언약을 달성하거나 협조할 입장에 못됩니다. 왜냐하면 반(反)언약적인 요소를 내뱉게 때문입니다.
따라서 단지 주님의 창조행위의 산물이 될 뿐입니다.
그 창조행위 가운데 '믿음'이라는 것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의 믿는 것까지, 예수님이 하신 일 속에 포함을 시켜야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외부에 증언되는 것은, "예수믿는 인간의 주체적 행위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은혜행위로서의 믿음'입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의 내용으로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20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 지음받은 자의 특징은, '자신의 믿음을 믿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는 것은 예수님의 창조행위로서의 자아성인데, 이점을 표현하는 방식이 바로, '믿음 안에서 살아감'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이나 골 3:10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언약적 세계의 풍성함을 성령님을 통해서 계속해서 은혜로 성도에게 공급하십니다. 그래야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 이 우주에 계속해서 발산되기 때문입니다.
'어법'으로 시비한 사람에 대해서는,
저는 그 사람의 어법의 적법성을 문제삼은 것이 근본적으로 비신앙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그점을 제가 공격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거기에 부터 생각을 출발하지 않고,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 '신학'이라는 게임의 률을 가지고 시비걸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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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섭 2004-05-01 15:46:37, 조회 : 262, 추천 : 36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꼭 위치만 니의 사상이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신인합일 사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물론 다르다고 하시겠지만.. 살려주는 영인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해 살아난 인생까지 깡그리 살아나기 전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의 존재로밖에는 인정하지 않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나'라는 주체가 살면 무조건 죄이고 '나'라는 주체가 사라지고 예수만 살아야 한다는 뜻 아닌가요? 그래서 갈2:20절이나 고후5:17절이나 골3:10절을 해석할 때도 전부 그런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목사님이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을 해석할 때 이 점이 다시 한번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무엇입니까? 성경대로라면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는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할 수 있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인간 아닙니까? (엡4:22-24) 그러면 목사님은 또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이라고 하시면서 새사람을 입는 것을 예수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시겠죠. 살려주는 영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인간자체는 부정하면서 말이죠. (물론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 자체도 자기만을 위하고 자기가 자기를 유지하려고 하는 타락한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중적 존재아닙니까? 여전히 타락한 본성의 도전과 유혹, 그리고 새롭게 거듭나서 우리 안에 역사하는 성령의 소욕의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성령의 소욕에 순종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렇게 살도록 우리 안의 그리스도가 역사하고요...)
그러나 목사님은 이런 성도의 마땅한 반응을 깡그리 인간의 행위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면서 오직 그리스도만 드러나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이 굉장히 신앙적인 말로 들리지만 사실은 신앙적이라기 보다는 사유적이고 철학적이고 사상적인 말입니다.
목사님은 새로 지음 받은 자의 특징이 자신의 믿음을 믿지 않고 이미 자신은 죽었으므로 예수님의 창조행위의 자아성만 남는 다고 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믿음이란 단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에베소서에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하면서 뒤이어 거짓을 버리라. 참된 것을 말하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말이 왜 따라 나옵니까? 나는 이미 죽었고 예수님만 남아 있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예수님에게 이런 권유를 해야 할 필요가 무엇이 있습니까? 나는 죽었는데 말입니다. 죽었고 예수님만 살아있는 존재에게 무슨 권면이 필요하며 가르침이 필요합니까?
여기서 목사님이 한 말,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란 말이 어법의 문제가 아니라 목사님의 신학이나 사상의 산물인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생각의 산물이 아니라 사상의 산물말입니다. 그것도 지극히 워치만 니적인 사상말입니다. 죄송하지만 목사님은 기존의 신학을 장난감 같은 신학이라고 비판하셨는데 제가 볼 때는 정작 목사님이야 말로 참으로 극단적이고 이상한 십자가 신학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네요...
신인합일 사상과 목사님의 십자가 사상은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더 자세하게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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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04-05-01 16:33:27, 조회 : 287, 추천 : 38
성도에게 있어 '죽었다'는 말은 '없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일방적인 사랑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증거할 사람으로 사용되어지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은 성령님께서 성도에게 적용시키는 기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성취할 능력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기에 주신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은 예수님의 영에게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적용은 일회적으로 적용시킬 말씀이 아니라 늘 되풀이되어서 평생 성도에게 적용입니다.
거룩한 성경 말씀을 통해서 말입니다. ("-하지 말라, - 하라" 라는 말씀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워치니 만의 사상은 제가 보기에는 복음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인간의 구원 욕구에 아부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동원시켜 조립한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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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섭 2004-05-04 08:58:12, 조회 : 274, 추천 : 27
우선 이근호님의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다른 분들이 끼어드는 것은 좀 그렇군요...
이근호목사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성취할 능력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기에 주신 말씀이 아니라
>그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은 예수님의 영에게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적용은 일회적으로 적용시킬 말씀이 아니라 늘 되풀이되어서 평생 성도에게 적용입니다.
>거룩한 성경 말씀을 통해서 말입니다. ("-하지 말라, - 하라" 라는 말씀을 통해서 말입니다.)
는 말에 관한 질문입니다.
참으로 합당한 말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 어찌 성경의 모든 말씀을 이룰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인생에게도 동일한 적용을 하는 것은 극단적이라고
보여집니다. 바로 이 부분이 기존의 복음주의 신학과 이근호의 신학의 차이입니다.
목사님의 십자가의 적용이 늘 되풀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우리가 늘 우리 자신의 부패한 본성의 요구를 부인하고 못박고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의지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기 위한 차원이 아니라 우리는 여전히 쓸모없는 존재이니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아무런 능력이 없으니까 그냥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나는 끊임없이 잠잠하라는 차원의 십자가의 적용으로 들려집니다. (여기 누가 답글을 달 때 부부의 비밀을 비유로 해서 이 부분을 하던데....그분은 부부와 교회의 비밀을 조금 잘못 이해하는 것 같아서...한 몸이란 한 사람의 인격은 전혀 발휘되지 못하고 한 사람의 인격만 드러나는 비밀이 아니죠.......)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믿음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라고 말씀하신 목사님의 논리는 예수를 믿는 주체인 나는 완전히 부인되고 그 나를 통하여 예수만 드러나야 한다고 의미로 말씀하신 것 같은데....그렇게 말씀하신 뜻을 일견 이해는 되지만(소위 믿음이란 단어를 통해서도 자기 의를 드러낼 수 없다는 측면에서 동의할 수 있음)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성도가 그 의지와 감정과 지성을 다 그리스도를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그 행위 자체, 그 의지 자체까지 부인하는 것이라면 바로 그 부분이 이근호님이 비판받고 교계로부터 책망받는 부분이라 생각되는데 과연 그러한지요?
그렇다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을 이근호 목사님은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성도에게 있어 죽었다는 말은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라고 하면서 성도는 예수님의 일방적인 사랑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증거할 사람으로 사용되어 진다고 했는데 완전히 말장난 같습니다. 그 말이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오히려 성경과 기존의 복음주의 신학은 성도는 예수님의 사랑을 힘입어 그 사랑을 증거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 세상의 사람과 구별되게 사는 존재라고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그스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 입니다. 내가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니까 아무 의미가 없고 심지어 사탄적인 것이며 내 안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 드러나야 하며 그것을 위해 성도가 존재하며 그것을 위해 성도가 그리스도가 연합되어 있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워치만 니의 아류들이 주장하는 신인합일 사상과 무엇이 다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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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04-05-04 11:50:39, 조회 : 210, 추천 : 42
'새로운 피조물' 안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은혜의 폭발이 일어나지요.
그동안 거듭나지 못한 인간들이 안고 있는 죄개념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거듭나지 못한 인간들이 알고 있는 죄개념은, 자신이 행위의 주체가 되어 신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못하는 것을 '죄'라고 알게 됩니다.
그러나 거듭난 피조물 안에서 죄 개념은,
바로 제가 위에서 언급한 그러한 사고 방식 자체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는 비성도들은 은혜의 원천을 예수님에게 그냥 두지 않고,
그것을 인수인계해서 자기 것으로 집요하게 만드는 속성을 계속 발휘하면서 '은혜'를 운운하게 됩니다.
즉 '은혜의 사유화'이지요.
도대체 그렇게해서 뭘 얻겠다는 겁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로 곧장 이탈하여 다시 자신의 절대성을 그런 식으로 재충전하겠다는 겁니다.
이러한 인식의 근본된 오류는
성경 전체에 흐르는 언약에 대해서는 모르고
단지
자신의 구원 챙기기에 급급해서 그런 겁니다.
그런 점에서 워치니만도 마찬가지 사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성경을 탐구하여 구원의 근거는 확보하겠다는 욕망을 이런 식으로 표출하는 겁니다.
그러나 언약적으로 봐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지 않고 도리어 적극적으로 막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야지만
인간들이 구원받고자 하는 근본적인 성향이 하나님에서 온 것이 아니라
이미 범죄해 버린 악마의 속성에서 유출된 열매임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하라', '- 하지 말라'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복음적 규모의 풍성함을 조성시키는 방침이요 기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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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섭 2004-05-04 16:39:28, 조회 : 175, 추천 : 30
목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모르고 십자가를 모르고 복음을 모르는 무지한 자인것 처럼 여겨지고 목사님과 그의 사상을 따르는 분들만 십자가를 알고 은혜를 아는 구원받은 백성인것 처럼 여겨지군요...목사님이 이근호 식의 십자가와 은혜와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가지고 계시는 안타까움과 한국교회에 대한 분노에 가까운 마음을 이해하지만 또 그렇게 이근호 식의 십자가와 복음을 고집하고 주장하는 목사님에 대한 연민도 느껴집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모든 토론에서는 성경 구절 한 구절 한 구절을 가지고 서로 성의있게 토론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말하는 성경구절에 대한 질문에 목사님의 논리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답하지 말고 그 구절에 대한 주석을 해주십시오. 앞서 제가 말씀드린 구절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할 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그 구절을 어떻게 주석하며 해석하냐는 질문입니다. 앞으로 제가 질문드릴 성경의 구절들도 그와 같은 목사님의 논리를 주장하고 나서 그 구절도 그러한 구절이다 라는 식으로 설명하지 말고 구체적인 그 구절에 대한 목사님의 주석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죄 개념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고 했는데
변화는 무슨 변화입니까? 그전에는 죄가 무엇인지도 몰랐는데요....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비로소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거지요...
자신이 행위의 주체가 되는 그 모든 사고방식이 죄가 된다고 했는데 그런 목사님의 말을 뒷받침 하는 성경의 구절들을 인용하셔야 되는 것 같습니다. 성경 어디에 자신이 행위의 주체가 되는 모든 사고방식이 죄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구절을 전후 문맥을 중심으로 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제가 목사님의 주장을 성경적이라 말하지 않고 사상적이라고 비판한 것도 그와 같은 이유때문입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이 부분에 결정적으로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 자신이 행위의 주체가 되는 그 모든 사고방식이 죄가 된다는 이근호식의 십자가 복음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또한 철저한 인간의 사상에서 나온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근호님이 그토록 싫어하는 인간의 주장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거룩한 이름으로 치장해서 말이죠...
앞으로 저는 이 부분에 대해 성경을 가지고 목사님과 토론하고 싶습니다. 부디 다른 분들은 끼어들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선 빌2: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이 구절을 구체적으로 주석해주십시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나머지 성경에 대한 구절은 다시 토론하도록 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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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2004-05-04 17:26:10, 조회 : 202, 추천 : 43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단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나름대로 견해를 지닌 이단들)
따라서 이단인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십자가를 알게 된 것이 도리어 이상한 사태에 해당됩니다.
한국 사람들이 십자가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정상적인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뜻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행위로만 그 내용이 펼쳐집니다.
왜냐하면 이 거룩한 말씀의 성취는 언약적으로 달성되어야 하고 그 언약 달성은 오로지 하나님 아들만이 홀로 달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3:16에서 '약속된 자손'은 여럿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혼자 뿐입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말씀은 성도로 하여금 늘 자신을 부끄럽게 돌아보게 만들고 회개하게 만들어 복음의 은총에 감사케 하지요.
성령께서는 이 신명기 말씀이나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씀을 오늘날 성도들에게 회개용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성경의 어느 구절을 해석할 때는 항상 그 밑바닥에 언약이 깔려 있다는 점을 놓치면 성경 전체를 곡해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9:39에 보면, 예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려 오셨는데, 그것은 소위 본다고 여기는 자를 소경되게 하시고 보지 못하는 자는 보게 합니다.
무엇을, 어떤 능력으로 알게 되고 보게 될까요?
그것은 성령님이 임해야 보게 되고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16:8-11에 보면, 성령을 받게 되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됩니다.
>빌립보서 2:13에 나오는 '소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당사자에게 부여하는 할 일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어떠하든 중심은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성도는 날마다 회개하면서 예수님의 공로만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 안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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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섭 2004-05-04 20:38:28, 조회 : 200, 추천 : 34
예의 목사님의 주장을 먼저 펼치고 그 주장에 맞춰 제가 질문한 구절을 스치듯 설명하는게 전부이군요
주석은 아예 하실 생각은 안하시군요. 그래서 저도 주석을 하는 쪽으로 반론하지 않겠습니다.
목사님은 언약이란 말을 참 좋아하시는데 그 언약이 무엇을 위해 동원된 언약인줄을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모든 성경은 언약을 놓치면 안된다고 하는데 그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인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문제는 이근호님이 하나님께서 왜 예수그리스도를 약속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의 성취로 주셨는가?
하는 것을 치열하게 성경적근거를 제시하면서 그 성경적 근거가 성경해석학적으로 합당한가 하는 것을 펼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방금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씀이 십자가의 행위로만 내용이 펼쳐진다고 했는데
일면 참으로 성경적인 것 같고 십자가만 붙드는 생각 같지만 이근호님의 사상에 불과합니다.
이근호식의 언약입니다. 왜 십자가의 행위로만 펼쳐지는지 간단한 주석마저도 안하시고 역시 사상론적으로만 제시합니다.
신명기 6:5절의 말씀과 마22장의 말씀이 인간의 죄인됨을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말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만 주장한다면 반쪽 복음입니다. 어찌 인간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님밖에 그럴 수 없죠. 그러나 하나님이 시내산의 언약을 주셨을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언약...)실제로 자신의 타락한 본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자신만을 사랑하는 죄성을 깨닫고 매 순간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그리스도가 주는 선한 의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만 바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럴러면 인간을 애초에 창조하지 말아야죠.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인간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대상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게 은혜이죠. 그리고 그 놀라운 은혜의 관계가 바로 선악과 언약에 담겨 있습니다. (호6:7)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그 언약을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배반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언약의 배도자로 가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전적으로 타락한 인생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하나님만 사랑하는 존재, 기꺼이 자기 의지를 하나님을 사랑하는쪽으로 쏟으며 나아가는 존재로 회복시키기 위해(완성이란 말이 더 어울리지만..물론 그것은 미래적 구원이죠.) 하나님의 언약 예수님은 우리 역사 속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에게 주신 것은 인간의 타락을 고발하고 하나님의 은혜만 찬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지음받은 인생의 모습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언약이 개입된 이유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언약의 성취자로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시면서 여전히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려고 하는 그의 백성들을 말할 수 없는 성령의 탄식으로 탄식하시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끊임없이 그의 열심을 동원하여 만들어가십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구원의 의미입니다. 성경을 전부 그런 시각을 가지고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어느 구절을 해석하든지 그 밑바닥에 항상 언약이 깔려 있다는 것을 놓치면 성경 전체를 곡해한다고 했는데 맞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 언약이 왜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동원되었는지를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으로 교회란 이름으로 부름받아 그렇게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들로 지어져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회개용으로만 사용된다는 성경구절이 어디 있습니까? 부디 성경을 제시해주십시오. 성경 어디에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회개용으로만 사용된다고 했던가요? 딤후 3:16절을 보십시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내기 위한 구절이라고 항변하시겠습니까? 이구절은 앞 뒤 좌우 모든 문맥을 다 살펴보아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성도들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간다는 구절이 분명합니다.
목사님이 성경적 구절을 제시하면서 한 절 한 절 주석하신다면 저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2:13-15절의 말씀도 제 부탁처럼 한 절 한절 주석을 해주십시오. 또 목사님의 사상을 제시하고 나서 뭉퉁그리 그것도 그런 뜻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좀 그렇네요....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가 무슨 뜻이며 소원을 두고 행한다고 할 때 소원이 무엇인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리지고 거스러는 세대 가운데서 흠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 가운데 빛들로 나타난다는 것이 무엇인지...거기에 대한 주석 없이...그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죄인됨을 드러내는 회개용이고 그리스도만 드러내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다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네요.....
똑같이 성령을 통하여 말씀을 깨달았다고 하는데 왜그리 다른지요?
성령이 깨닫게 하는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를 목사님의 사상에 근거해서 펼치지 마시고 제발 성경구절의 의도대로 앞뒤 좌우의 문맥을 제시하면서 설명을 하셔야죠.....제가 질문한 성경구절에 대한 주석은 대충하시고 목사님의 사상을 주장하기 위해 또 다른 구절을 그것도 전혀 해석하지 않고 내어미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인간이 회개만 하고 언약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에게 감사만 하는 존재가 아닌 것을 좀 아셨으면...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금도 하나님을 향하여 전인적으로 반응하는 존재로 새롭게 태어났고 지금도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인간론에 대해서도 성경구절을 통해 차근차근 토론을 제안하면 얼마든지 할 용의가 있습니다. 제발 번거롭더라도 한 절 한 절 주석하면서 토론하기를 바랍니다.
물론 저는 그렇게 안해도 목사님의 뜻과 주장을 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제 삼자들이 이 토론을 보면서 누가 옳고 누가 그런지.....판단하기 위해서는(물론 이 사이트는 목사님의 사상을 추종하는 분들이 주로 보겠지만요..) 성경구절에 대한 서로의 주석이 정확하게 제시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수고스럽더라도.....그런 토론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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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 목사님의 갈2:20절의 주석과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란 말에 대해 질문합니다.
이근호 2004-05-04 22:22:12, 조회 : 188, 추천 : 30
성도가 내보이는 '사랑의 반응'이란 반드시 자신의 죄에 대한 예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고백 뿐입니다.
자신의 '사랑 행하기 능력'은 절대적인 성경 말씀에 비쳐볼 때 모두 거짓되고 위선적인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이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함이다'라는 말씀을 대하면서
인간은 필히 다음과 같은 반응을 갖게 됩니다.
"나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기에 이 말씀에 의해 교육받으면 내가 보다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어!"라는 생각을 말입니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이 우상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찾을 근거가 상실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성령받은 자라면 이 말씀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그 동안 이 성경을 통해 의로 교육받아 보다 훌륭한 사람인 줄로 알았지만 실은 그것이 아니라 그 실천력은 전혀 나에게 나올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 성경 말씀은 모두 성령님의 불쌍히 여김으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모든 공로는 오직 예수님의 몫이다"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모든 성경 귀절은 회개용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다"(시편 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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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 목사님의 갈2:20절의 주석과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란 말에 대해 질문합니다.
박홍섭 2004-05-05 07:19:58, 조회 : 180, 추천 : 44
이근호님과의 토론은 알차고 의미있는 토론이 되기 힘들겠군요? 질문에 답할 성경적 능력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게 이근호식인지는 좀더 두고봐야 알겠지만...
인간은 필히 다음과 같은 반응을 갖게 된다고 했죠? "나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기에 이 말씀에 의해 교육받으면 내가 보다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고 했는데...누가 그랬습니까? 성경 어디에 인간이 그런 반응을 보인다고 되어 있습니까? 이근호님은 이런 자기의 사상에 불과한 논리를 내세우면서 성경말씀을 갖다부칩니다. 구절도 제시하지 않고 그냥 성경말씀에 비쳐볼때라고 합니다.
자기 생각으로 모든 성경구절을 회개용이라고 반복해서 앵무새처럼 말하지 말고 성경 어디에
성경이 그런 목적으로 쓰여졌다는 것을 제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가 이근호의 십자가이고 이근호의 복음입니다.
그러니 님이 한국교회에서 제명당하고 이단이란 소리를 듣는 것 아닌가요?
모든 한국교회를 향하여 이단이라고 몰아부치지 말고 제발 성경으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성도를 의로 교육하겠다고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교육하겠다고 하는데 왜 이근호님은 거기에 대한 주석도 안하면서
자신의 사상으로 엉뚱한 이야기를 하십니까?
주석이나 주해가 무엇인지 모릅니까?
다시 한번 성경을 가지고 그 구절에 근거해서 님의 생각과 저의 해석을 비교하며
토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님의 사상을 모르는 바 아니기 때문에 님의 그런 사상과 신학이
성경적 근거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정도밖에 토론을 못할 분이라면 실망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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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 목사님의 갈2:20절의 주석과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란 말에 대해 질문합니다.
이근호 2004-05-05 14:14:29, 조회 : 183, 추천 : 40
히브리서 4:12-13에 보면, 성경 말씀은 모든 인간을 벌거벗게 만듭니다.
귀하께서 한국 교회로 돌아오라고 했는데,
귀하같은 인간들이 한국 교회로 돌아가면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훌륭한 자아상?
성도라면 늘 성경을 보면서, 자신의 부족을 느끼면서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더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한국 교회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참된 교회가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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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잘했네요..이근호의 십자가 말고 성경의 십자가로 돌아가세요
박홍섭 2004-05-05 17:16:47, 조회 : 221, 추천 : 36
왜 자꾸 훌륭한 자아상으로 몰아가세요
언제 휼륭한 자아상으로 나아가자고 한 적 있나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가자고 했지...
휼륭한 자아상을 가지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크게 당한 일이 있습니까?
그런 말 한 적도 없는데 조금만 하나님을 사랑하자고 하면
휼륭한 자아상을 가지는 시도로 보는지....
말씀 잘했네요
성도라면 늘 성경을 보면서 자신의 부족을 느끼면서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더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십자가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길이와 넓이를 깨달아 알면 알수록 하나님께 돌아가야죠.....좀더 정확이 말하면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입니다.
내가 언제 한국교회로 돌아가라고 했나요? 성경으로 돌아가라고 했죠...
꼭 성경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히4:12-13절은 모든 인간을 발가벗게 만들어 끝나는 것이 아니라
14-15절의 우리의 대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게 만들며
16절의 그를 붙들어 그를 힘입어 날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라는 것까지
연결되는 구절이죠.....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그게 십자가의 효력입니다.
우리 같이 연약한 죄인도....하나님의 말씀 앞에 벌겨벗겨져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죄인도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마저
님은 휼륭한 자아상을 위한 인간의 시도라고 논리도 안맞고 억지로만 들리는 이론으로 몰아가는게
문제입니다.
어린아이도 아는 이 십자가의 비밀을 왜 십자가 십자가 그렇게 외치는
님은 모르십니까? 제발 이근호의 십자가 좀 자랑하지 마십시오. 성경에 나오는 십자가만 자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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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 목사님의 갈2:20절의 주석과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란 말에 대해 질문합니다. 박홍섭 2004/05/01 36 263
[re] re)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예수님만의 것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그 믿음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겁니다. 정승연 2004/05/03 34 256
'나'라는 자의식의 소멸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결합으로 인해 부여 받게 되는 '나'라는 identity에 대한 의미는
다릅니다.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신 점을 상고 하십시요. 예를 들자면 결혼 전과 결혼 후의 나는 같은데
다른 존재 가치를 부여 받는 것과 같습니다. 남편으로 인한 새 인생, 아내로 인한 새 인생...100년가약도 이렇듯 귀한데 영생의 약속으로 얻어지는 가치에 대해서는 얼마나 신중한 결단을 스스로에게 부여해야 하는지요?
타락한 본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새 삶을 살아 보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 안에서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 짓고 벌 서겠다는 베짱 좋은 생각이지요. 그런 생각은 거짓된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으로 남편이 자리를 비우면 호시탐탐 간음하려는 악한 아내와 다름이 없습니다. 자의적으로 계약을 위반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주인과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주인이 없을 때에도 자신에게 엄격했던 요셉은 그런 면에서 모본이 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라면 예수를 알지 못했을 때 가졌던 나의 선천적인 본성을 예수의 존재로 인해 씻기고 예수에게 본격적인 다스림을 받는데 대해 감사와 기쁨이 있을 뿐입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을만큼 그 마음에 말씀이 자리잡히고 아무런 사심 없이 그분과 더불어 사는 삶이 열려집니다.
믿음은 믿음을 확증한 증인의 증거가 아니면 진리라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세속적인 가치의 믿음이 아닌 예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모든 것을 알려 줄텐데, 그가 자의적으로 말하지 않고 듣는 것을 말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자신있게 나중 세대에 증거할 수 있을 권능을 부여 받고 외칩니다.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만 말하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그러나 예수님을 따랐으나 사탄이 임한 가룟 유다는참과 거짓을 갈등하다가 결국은 자기가 온 곳으로 되돌아 가며 그의 직분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은 우리는 세상 왕의 통치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위에 장막을 쳐주시고 우리의 지경을 줄로 그어 구별하여 주시는 예수 안에서 복을 누리는 것이지요. 영생이라는 복 말입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신인합일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고, 동행하시며, 양육하여 주심으로 내 힘으로 해야할 아무런 것도 없음을 자각할 수 있는 단계를 표현한 말이라고 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날마다의 자범죄나 고범죄를 가리우는데 사용하려는 사악한 누룩이 잇습니다. 세상 철학과 지식으로 합성된 설교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인도 하니 죄는 더욱 힘을 얻고 세상은 도적들이 들끓습니다. 재를 쓰고 (!) 회개 하여야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불의와 악을 끊고 그분의 대속의 피에 육적 죄성을 완전히 씻으라는 경고이기도합니다.
예수님께 떠맡기고 계속 죄를 지으라는 후한 양보가 아닙니다. 예수와 결합한 영혼은 세상(부모)을 떠나 둘이 하나가 될 것이니 이 비밀한 기쁨을 무엇에 비기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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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섭님 보세요
함상권 2004-05-05 04:25:41, 조회 : 228, 추천 : 38
박홍섭님
이근호목사님과 토론한다기는 그렇고 말장난 잘 보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주제를 놓고 이야기하다보면
결국은 말장난으로 일삼는 현상이 즐비함을 봅니다.
사실 말장난이 있어야 인간이 변화도 되고 새로운 것을 알게도 되는게 아닙니까?
그런데 님에게 한가지 부탁드립니다.
이목사님과 말장난할때 두분만 하실것이지 추종자가 어떠하니, 이근호 사상이 뭐니,
이런말은 좀 삼가해 주시면 합니다.
정말 듣기 민망합니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박홍섭님이 이근호목사님을 얼마나 아시는지요?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시는 부분이 말장난 하시는 글을보면 너무나 무지하다는 생각밖에 안듭니다.
또 성경을 주석하라고 하시는데, 웃음이 저절로 납니다.
이근호 목사님 책도 사 보시고, 강의도 들어보세요.
그리고나서 토론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토론의 글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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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박홍섭님 보세요
박홍섭 2004-05-05 07:24:48, 조회 : 210, 추천 : 32
이근호님의 책을 사보기전에 성경부터 먼저 보시죠...
말장난을 먼저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이근호님을 모른다고 했는데 충고고맙습니다만 저는 이근호님의 책을 옛날부터 읽어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책들이 아무리 보아도 성경적이라기 보다는 사상적이라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님은 저를 아시는지요?
참으로 우습군요...
그래서 제가 다른 분들은 끼어들지 말라고 부탁드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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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박홍섭님 보세요
함상권 2004-05-05 09:42:41, 조회 : 238, 추천 : 38
대답을 하려고 보니 이런 말까지 합니다.
박홍식님의 말장난만 보고 뭘관심이 가겠습니까.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요.
도토리가 있는데 그 속엔 알맹이가 없으면 다람쥐가 도토리를 먹으려 할까요.
님을 모르는게 당연하지요. 님은 이근호 목사님과 말장난을 하고 있으니
이근호목사님에 대한 신학과 사상 그리고 책과 강의를 완전히 완독하시고 토론 하는게 낫다는 것입니다.
님의 대답을 보고 또 나로 하여금 또다시 웃게 만듭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예수도 모르는 자가 예수에 대해서 말하면 님은 뭐라하겠는지요.
이근호 목사님과 말장난 하지 말고, 연구해서 토론 좀 하라는 충고입니다.
앞으로 기대해 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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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박홍섭님 보세요 박홍섭 2004/05/05 32 211
[re] [re] 박홍섭님 보세요
이근호 2004-05-05 10:25:03, 조회 : 241, 추천 : 27
상대방의 사상에 대해서 공격할 때는
1. 먼저, 그 사람 사상 전반의 특색이나 특징에 대해서 자신이 정리한 것을 내놓아야 합니다.
2.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성경의 중심 사상을 제시해야 합니다.
3. 그래서 성경의 중심과 공격하고 싶은 사람의 견해 차이를 제시해야 합니다.
제 사상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 (하나님이든, 죄든, 하나님의 형상이든, 계시든, 교회든, 거룩이든, 인간론이든 무엇이든지)
반드시 십자가를 거쳐서 도출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귀하께서 제 사상의 헛점을 공격하려면
성경의 모든 말씀 중에서 십자가를 거치지 않더라도 바른 진리적 개념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혀야 합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라는 명제를 이해하는데 구태어 십자가와 결부할 필요없이 '하나님의 형상론을 정립할 수 있음을 말해야 합니다.
만약 혹시 십자가를 필연적으로 거쳐야 됨을 인정한다면 ,
결국 성경에 나오는 그 어떤 개념이든, 오직 십자가에 지신 예수님의 공로로만 귀결됩니다.
만약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운운한다면,
가롯 유다의 경우나 악한 천사(악마)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친히 (!) 그들을 창조하신 당사지이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영광을 돌릴 파트너(인간) 관리를 제대로 못한 책임을 어떤 식으로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도저히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인생 파트너는 살아계신 거룩한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국 언약의 하나님 믿고 지옥간 사람입니다.
왜 지옥에 가야하는지 이유도 모르는채 말입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한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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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님
박홍섭 2004-05-05 12:36:24, 조회 : 269, 추천 : 36
이근호님께서
상대방의 사상에 대해서 공격할 때는
1. 먼저, 그 사람 사상 전반의 특색이나 특징에 대해서 자신이 정리한 것을 내놓아야 합니다.
2.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성경의 중심 사상을 제시해야 합니다.
3. 그래서 성경의 중심과 공격하고 싶은 사람의 견해 차이를 제시해야 합니다.
제 사상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 (하나님이든, 죄든, 하나님의 형상이든, 계시든, 교회든, 거룩이든, 인간론이든 무엇이든지)
반드시 십자가를 거쳐서 도출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귀하께서 제 사상의 헛점을 공격하려면
성경의 모든 말씀 중에서 십자가를 거치지 않더라도 바른 진리적 개념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혀야 합니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1. 이근호님의 사상전반이나 특징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을 드렸을 것인데요...복잡하지 않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근호님의 사상이야 이미 님이 말씀했듯이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을 반드시 십자가를 거쳐 도출하여(여기서 님은 마치 기존의 조직신학이나 성경신학이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개념정리가 된듯이말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학이나 사상만 십자가를 거친 것인양...)인간을 깡그리 몹쓸 놈을 만들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다시 말하면 그 십자가는 모든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으로만 기능하는 그래서 이근호님의 신론, 기독론, 인간론...모두는 그런 결론으로 도출되는 것 아닙니까? 길게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일들도 전부 죄를 드러내고 회개하는 기능으로만 십자가를 이해하니까 똑 같은 십자가란 단어를 써도 님과 기존의 많은 다른 복음적인 분들의 견해가 다를 수밖에요...
그래서 님은 기존의 조직신학을 완전히 이근호식으로 재구성하지 않았습니까?...소위 이근호식의 조직신학으로..성경신학도 전부 이근호식의 십자가 중심으로......꼭 다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님의 책을 보고 또 이사이트에 실려 있는 글들을 보면 어렵지 않게 님의 사상은 갈파되죠...
2. 제가 이해하는 성경의 기준도 잘 알아들으시라고 유치할 정도로 간단하게 이미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이근호님은 제가 질문하는 질문내용만 봐도 제가 이해하는 성경의 기준을 아실 것 아닙니까?
굳이 기존의 조직신학적인 표현을 들어 다시 말씀드리면(님이 기존의 조직신학을 부정하시니까)
님이 모든 성경의 기초에 언약이 깔려 있어야 한다고 할 때의 그 언약, 그 언약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에 빠진 인생을 하나님만 사랑하고(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존재로 회복시킨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죄는 하나님을 떠나 끊임없이 자기 중심적으로 흘러간 인생을 의미합니다.
끊임없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가 최고가 되어 있는 인생말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모든 시도가 죄이죠...심지어 부패한 인생은 종교와 하나님까지 동원해서 자기를 추구하지 않습니까....
십자가는 이런 죄인된 인생의 죄됨을 먼저 파헤칩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모든 인간을 죄 아래로 몰아갑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며 하나님을 이용해서라도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지를 낱낱이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나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만듭니다. 십자가 앞에 우리는 인간의 자기 의가 아무 것도 아님을..더러운 걸레보다 못함을 처절하게 깨닫습니다. 물론 이것을 깨닫는 것도 성령의 은혜죠. 여기 까지는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이근호님이나 저나....또는 기존의 조직신학이나....
그러나 문제는 그 뒤입니다. 이근호님은 십자가는 그 뒤에도 계속적으로 인간을 그 죄아래서 신음하게만 만들고 더 철저하게 자신은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쪽으로만 기능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외에 어떤 시도나 욕구나 의지도 전부 사악한 마귀의 장난으로 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동원하여 끝끝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여기서 이근호님의 구원과 기존의 구원개념이 갈라집니다. 어찌 그것을 다 설명을 하겠습니까? 피차에 서로 아니까 저는 바로 핵심구절을 가지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을 향한 열심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변화시켜 간다는 것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존의 조직신학은 이 부분을 인간의 자기 의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보죠...이것도 굳이 말씀 안드려도 아시지 않습니까.. 혹시 모르시나요? 우리는 100%하나님의 주권과 100%인간의 의지를 존중합니다. 물론 그 인간의 의지도 하나님의 은혜 속의 의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발동될 때는 적어도 인간의 의지라는 개념으로 발동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알미니안이라고 하면 곤란합니다.....)
3 3번의 말씀은 굳이 더 설명안드려도 될 것 같군요..
4. 그리고 성경의 모든 말씀을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하라고 했는데
님이 말하는 십자가와 제가 말하는 십자가의 목적과 방향과 개념차제가 서로 다르니까 거기 까지 갈 수가 없거니와
먼저 님이 십자가를 거쳐 도출한 님의 사상을 여기 토론의 장에서 밝히지 않고 자신의 책이나 여기 있는 글을 읽어보고 나서 하라고 하고 저보고는 그것을 다 제시하라고 하면 그건 책을 쓴 사람의 횡포에 가까운 논리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님의 사상이나 신학은 님이 소개한 것처럼 정확히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죠. 그래서 굳이 다시 님이 주장하는 논리를 되풀이 하지 않고 바로 그 논리가 정말 성경의 뒷받침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해보고 싶어서 가장 기본적인 몇 구절에 대한 해석을 부탁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의 님은 저의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을 주시지 않고
님의 결론만 되풀이 하면서 그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
십자가를 모른다고 복음을 모른다고 몰아가는 것 같습니다.
심히 안타깝군요...
님의 사상이 한국교회에 이단시비가 붙어 있다면
그 정도의 질문에 답을 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물론 워낙 묻는 사람이 많아서 일일이 답을 하지 못한다고 하면 저도 거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유치한 것 한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출20:5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시내산 언약, 즉 십계명을 주시면서 너는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면서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질투하는 대상이 누구이며 질투한다는 뜻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질투하기 까지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은혜로 나의 모든 의지를 동원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는 시도까지 마귀적이고 인간의 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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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근호님
이근호 2004-05-05 14:01:06, 조회 : 256, 추천 : 34
인간을 위한 신은 우상이며 그 우상에서 나오는 '예수님'도 우상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도 인간을 위한 십자가로 전락하겠지요.
인간을 위하지 않는 예수를 예수로 보지 않는 그 악마성은 이미 가롯 유다를 통해서 충분히 다 보여준 것입니다.
사람들은 노리는게 결국 뭡니까?
자기 위주로 사는 그 본성을 긍정해 달라는 겁니다.
즉 "내가 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만큼은 참된 사랑이다"고 긍정해 달라는 겁니다.
결국 돌아오는 것은 뭘까요?
"나도 예수님 못지 않게 괜찮은 녀석이다!"는 자기 도취성입니다.
이럴 경우에만 신이든, 예수든,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주는 신이라야 고마운 신이라고 납득하겠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바로 이런 자기 즐거움을 챙기려는 인간들에 의해서 지금도 학대받고 있습니다.
다시금 이야기합니다만,
모든 성경 귀절의 해석과 성취는, 인간으로는 알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해석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들이 말씀의 성취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질투'라는 개념은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예수 안 믿으면 누구든지 지옥간다"는 뜻입니다.
곧 긍휼과 사랑의 절정이지요.
정말 귀하께서
성령을 받은 자라면,
이렇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오직 저는 십자가만 자랑할 것입니다."(갈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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