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라 하는 것은 개인을 성도라 하지 않습니다. 144,000이란 집단의 숫자로서 성도를 표시한 거예요.
악마를 대적할 때에 개인으로 대적하면 안돼요. 개인으로. 집단으로 대적해야 돼요. 집단. 교회 자체가 집단이기 때문에.
다윗이 골리앗과 붙을 때, 다윗은 결코 혼자 이긴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긴 거예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단체가 있어요. 자기 집단이 있다 말이죠. 개인이 집단화 될 때는 개인 + 개인 모은다고 집단 되는 게 아닙니다. 개인이 죽어야 집단 돼요.
우리의 구원은 개인 구원이 아니고 집단구원입니다. 개인의 가치는 날아가 버려야 돼요. 내 훌륭해서 내 구원받고 내 믿음 좋아서 구원 받는 거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소속이 되어야 돼요. 그 소속이. 이건 신약뿐만 아니고 구약 내내 이야기해왔던 겁니다. 구약 내내. 이스라엘이 되지 아니하면 구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집단입니다. 개인이 아니에요.
집단을 집단으로 구성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되는데 그 힘을 로마서4장에서는 은혜라고 합니다.
이 은혜가 나 개인에게 오게 되면 개인의 자격으로 이 집단,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고 “너, 원래부터 이 집단의 일원이었어.” 라는 소식과 더불어서 개인의 모든 가치와 개인의 의미는 사라지고 죽고, 이미 집단된 것을 눈뜨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게 구원이에요. 내가 기도해서 내가 응답받는 그런 건 성경에는 없어요. 반드시 성경의 기도는 집단기도입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성도들의 기도가 제단한테 가는 거예요
은혜라는 것은 항상 처음 태어났다는 그 기쁨에 만끽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자, 개인에서 집단으로 가게 되면 우리는 죽었다고 그러는데 개인 안에 집단성이 안에 들어있어요. 집단성은 살아있고 개인은 집단성이 부각되다 보니까 이 개인은 존재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운반체에요. 본인의 가치를 전달하는 게 아닙니다. 본인만 있으면 본인의 가치만 내세울 수밖에 없지요. 성도 아니지요. 그건 도 닦는 사람이에요. 나 이렇게 살았다고 지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안되지요. 우리의 의는 안 받습니다. 주님의 의를 받아요. 따라서 우리가 운반해야 될 운반체는 우리의 의가 아닙니다. 나 말고 나보다 못난 사람도 천국 보내는 그런 집단적으로 보편적으로 다 적용되는 주님의 의의 운반체입니다.
더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성도는 뭐냐 하면 택배기사에요.
이 물건이 내 물건이 아니고 주께서 십자가로 피로 흘린 물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운반체거든요. 택배기사 직원이다 말이죠.
반드시 택한 백성에게 같은 집단 일원이지요. 나는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걸 전달해야 됩니다. 그런데 배달사고 나면 안돼요.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전하라는 것을 그 물건을 전해야 되지 내가 만든 것을 가지고 전하면 안돼요.
우리가 그렇게 나를 귀신처럼 여겨야 됩니다. 나를 산송장처럼, 나는 죽은 존재가 되어야 돼요. 그래야 악마가 주먹으로 때려도 이게 허공을 때리는 거예요. 나를 때리는 것이 마치 허공을 때리는 것처럼 되어야 돼요. 우리는 남이 주는 시선에 아프면 안돼요. 야, 오늘 참 어려운 걸 요구한다. 제가. 아프면 안돼요. 남이 욕하는 거, 뒤 담화 듣고 그걸 잠 못 들면 안돼요. 그건 평소에 내 역할을 지금 안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운반체인데도 불구하고 택배회사 기사인데 불구하고 지가 뭐 공장장인 줄 착각하는 거. 하나님은 내 인간성보고 구원하는 것처럼 자꾸 그런 착각을 하는데 마귀가 온 인간을 다룰 때 바로 그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