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80713a야3장1절(말의 세계)-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3장1절에서 12절까지 하겠습니다. 기니까 생략하고요, 제가 그냥 1절부터 12절까지 흐름만 딱 말씀드릴게요. 선생은 말하는 사람인데 말을 할 때에 주의하라. 그리고 그 주의해야 될 것은 주의해야 될 이유가, 그 입으로 하나님을 9절에 보면 찬양하기 때문에 그렇고, 그것이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말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선생 된 자는 주의하라. 이렇게 돼있거든요.
그러면 이것은 선생이 아니다. 라는 사람은 볼 필요 없다. 이래 될 논리가 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누구보고 특정해서 이렇게 하라, 하지 마라가 아니라 이렇게 생각해야 돼요. 왜 말을 하는 선생 된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내 말하는데 주의성을 그렇게 강조 하는 취지가 뭐냐, 고걸 캐치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 성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한테 한 이야기죠.
그럼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 요게 참 오묘해요. 보통 사람들한테는 이렇게 사람이 있고 또 사람이 있잖아요. 있으면 우리는 사람의 A라는 이 덩치, 덩어리, 육신, 우리 눈에는 육신과 육신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는 육신과 육신을 인정하지 않아요. 네가 보는 어떤 덩어리, 덩치 이걸 인정하지 않고 뭘 인정하느냐, 주고받는 말을 인정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야고보서3장7절에 나옵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이 말은 쉽게 해서 짐승과 인간의 차이점이 뭐냐를 하나님께서는 이미 규정해 놓았습니다. 짐승은 말 없음, 말 못함. 인간은 말을 함. 이런 차이점이 있어요. 이런 차이점을 가지고 창세기1장을 그대로 가져가버립니다. 그러면 창세기1장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인간과 짐승의 차이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 없음. 형상 있고 형상 없고 이렇게 되거든요.
야고보서3장9절에 보면 그런 암시가 나와 있어요. 그러니까 야고보서3장9절에서 뭘 연관시키느냐 하면, 말과 무엇과 연관시켰다? 형상과 이렇게 직접 연관시켰다. 이런 뜻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냐, 니 말하는 품새, 말하는 내용을 통해서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가를 하나님께서는 규정 하겠다. 이 말입니다. 규정하겠다는 말은 심판하겠다는 그런 말과 같지요.
그래서 이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 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나왔을 때에 야고보는 말을 통해서 잠재되어 있는 형상이 외부로 드러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서는 그렇게 보는데 일반적인 교회나 신학에서는 야고보처럼 이렇게 이야기하지를 않아요.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윤리성과 도덕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렇게 규정해 버립니다.
이렇게 윤리성과 도덕성을 규정하는 것은 이것은 잘못이에요. 왜 잘못이냐 하면 윤리성과 도덕성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이게 되려면 선과 악이라는 체계 안에 있어서만 이게 윤리성과 도덕성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체계 안에서. 그런데 선악을 안다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내치는 조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2장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것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됐다 이 말이죠.
하나님이 보시기에 추방될 수밖에 없는 그런 조건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끄집어내는 것은 이건 옳지 않은 거예요. 왜 윤리성 도덕성이 하나님께서 내칠 수밖에 없느냐 하면, 윤리성 도덕성은 결국 무슨 결과를 낳느냐 하면 이것은 선이다. 이것은 악이다. 요 두 가지를 대조해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럼 이건 무엇과 나중에 연결되느냐 하면 자기 변명조로 자기변명과 핑계로 이어지게 돼있어요. 기어이 나는 착해지고 싶어서. 심지어 조폭들 사이로도 이런 게 있어요. 조폭들. 나쁜 짓해도 사회가 그래서 그렇다든지 어릴 때 부모를 일찍 돌아가셔가지고 고아원에서 자라다 보니까 내가 못 배워서 그렇다든지 모든 탓을 자기는 여전히 선한 쪽에 있다는 것을 발악을 하듯이 주장하게 돼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 잘난 맛에 교회에 오는 거예요. 교회 손님들이 자기 잘난 맛에. 그래서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당신은 이렇게 하시면 잘남이 더욱더 확대됩니다.” 하면 거기에 “어메! 기 살어.” 해서 죽기 살기로 그 의와 도덕을 유지하려고 온갖 짓을 다하지요. 그러면 거기서 레벨에 따라서 선한 레벨과 악의 레벨에 따라서 점점 더 선과 악의 레벨이 높아지게 돼있어요.
어떤 식으로 높아지느냐 하면 남이 감이 나를 따라오지 못하는 레벨로 점점 내빼게 되는 겁니다.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이게 교회에서 경쟁마당이 된 거예요. 경쟁마당. 신비주의가 왜 생깁니까? 새벽기도가서 옆에 사람이 대충 기도하고 나서려고 하는데 이거 뭐 초자가 와서 나보다 더 끓어 앉아있으니까 이게 자존심이 확 상하잖아요. ‘니 오늘 한 번 보자.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이리 한다고요.
그런데 개척교회 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되면 진짜 개척교회 목사는 속상하지요. 왜냐하면 겨울에 새벽기도하면 기름을 때야 되잖아요. 한 시간 있으면 기름 값이 얼마인지를 계산이 된다 말이죠. 둘이 버텨버리면 빨리 목사는 끝나고 집에 가서 자야 되는데 아침 일찍 나왔기 때문에 자야 되거든요. 큰 교회야 여유 돈이 있으니까 보일러 계속 돌아가도 되는데. 이게 배틀. 현금 배틀, 기도 배틀, 선교 배틀, 부흥 배틀, 청소, 꽃꽂이 전부 다 배틀 들어가는 겁니다.
기어이 자기는 니가 따라올 수 없는 높은 자리에 있다 하는 그래서 설악산 같은 데에 갈 때에 높은 곳 보게 되면 저 밑에 헉헉거리는 거 보면 참 가찬지요. 에이~~ 멀었네. 높은 산에 가서 자긍심을 제공해서 세상에서 주눅 들고 실패한 거 교회 와서 칭찬받음으로서 자기의 존재의 가치를 회복하는 그러한 심리적인 치료, 힐링 그런 것을 노리고 교회에서는 그렇게 사람들을 모으는 겁니다. 다 교회 사람들 왜 오느냐, 지 잘난 맛에 와요.
그러면 선악은 결국 어떤 부작용, 후유증을 낳느냐 하면, 이게 공포를 낳아요. 공포를 놓는다. 아무리 착하고 착해도 착한만큼 자기 자신의 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철저에 철저를 기하다 보면 예상에 없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에 그동안 쌓아온 나의 의로움과 착한 윤리에 흠집나지 않을까 주야로 걱정해요. 주야로. 걱정이 굉장히 되는 거예요. 스스로 공포를 만들어요.
그런데 요한일서4장에 보면 사랑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했지요. 오늘 강의 처음에 제일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참, 오늘 강의 처음이 중요하지만, 끝까지 중요한 거 말씀드리겠습니다. 끝까지 중요한 거예요. 한 번 적어볼게요. 이건 말로 해서는 안돼요. 너무 중요해서.
“‘다행이다.’를 결정하는 조건은 이미 나타났다.” 다행이다를 결정하는 요건은 이미 나타났습니다. 다행이다! 가 뭐냐 하면 나에게 어떤 실수를 하고 내 인생이 어떻게 구겨지고 망가진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 않는 조건이 이미 나타났어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는 겁니다.
자, 피가 내 이마에 탁 붙어있다. 포스트잇을 이마에 붙였다 합시다. 여기에 피, 하나님의 약속된 피 입니다. 자기 피 아니에요. RH+ 이런 거 아니에요. 약속된 피를 이렇게 붙였다. 그럼 주님께서는 뭘 보느냐 하면 피를 보거든요. 그럼 주님의 시선은 피에 가있다 말이죠. 나의 행동에 안 가있어요. 어떤 인간도 이미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를 못하는 이유가 뭐냐, 인간이 첫째는 율법이 뭔지를 모르고 두 번째는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두 가지 다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못 지키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킬 때에 예수님이 와야 율법의 내용을 아는데 예수님 오기 전에 자기 딴아 율법을 안다고 우겼고 두 번째는 내가 얼마나 자기밖에 모르는 못된 인간인 것을 예수님 오기 전까지는 몰랐어요. 내가 오기 전까지는 죄로 드러나지 않다가 내가 오고 난 뒤에는 죄로 드러났다. 두 가지를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못 지킵니다.
못 지키지만 마귀가 이미 인간을 선과 악을 지키기 때문에 뒤에서 군불 때는 거예요. 계속 부추겨서 산에 올라가게 만들어요. 자꾸 산에 올라가게 해가지고 타인과의 상대적 비교를 통해서 우월감이라든지 자긍심 승부 걸도록 부추기는데 그렇게 되면 뭐가 생긴다고 했습니까? 공포심. 불안. 두려움.
내가 지금껏 교회 50년 60년 다니며 쌓아놓은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면 어쩌냐 하는 거예요. 이건 교회에 온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교회에 안 나온 사람들 공자, 맹자하는 사람이나 종교 없다 하는 사람들도 전부 다 지 자존심 때문에 살잖아요. 자존심을 딱 깨보면 수십년동안 자기 인생 살면서 쌓아놓은 자기가 남한테 기죽지 않을 만큼의 뭔가 형성된 게 있어요. 기죽지 않을 만큼의 형성된 것. 그게 허풍이고 허세인데 특히 남자한테는.
허풍과 허세 지키기 위해서 온갖 과도한 짓을 하면서 “나 건드리지 마! 나 이정도 잘났다.” 하는 게 있어요. TV에 그런 게 있어요. <광산김씨> 나오는 게 있어요. 살림남. 살림남에 광산김씨. 광산김씨는 잘 모르지요? 순박한 허세남이거든요. 아들 하나는 연애인인지 아닌지 경계가 모호한 놀면서 일하는 그 하나 있고 또 아이 하나는 식당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식당을 시작했고, 그 아내는 미스 주부대회에 나가가지고 예선에 떨어진 사람이에요. 광산김씨 그걸 아주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게 있어요. 그걸 보면서 뭘 보느냐 하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품새를 대표적으로 보여줘요.
그 사람은 개뿔도 없으면서 누가 없다고 이야기하면 화를 벌컥 내는 거예요. 사람이 점을 왜 보느냐, 두려움 때문에 봐요. 점치는 거 무서워서 보는 거예요. 요한일서4장18절에 보면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 했지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쫒는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성도한테 얼마나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일하는지 보세요. 끊임없이 두려움을 내어쫒는 식으로 주께서는 이 피라는 이걸 붙여가지고 계속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강조하는 거예요.
니가 귀한 거 받아놓고도 니가 쓸 줄을 모른다는 거예요. 다행이다! 이 다행이다 하는 게 천국 갔을 때만 다행이 아니고 모든 매사가 피가 요건이 개입되어서 다행이다. 가 되는 겁니다. 집에 불이 나도 다행이고, 아들 가출해도 다행이고, 이 사랑을 훼손시키고 와해시킬 어떤 조건도 추가적인 조건은 이 세상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심정을 성도가 같이 공감되어야 돼요. 이건 요한일서에 보면 성령이 와서 그렇게 하신다 했는데.
니가 받은 게 얼마나 고귀하고 귀한 것인지 온 천하보다 귀한 걸 받아놨는데 뭐가 그렇게 아쉬워서 벌벌 떨고 있느냐, 이리 묻는 겁니다. 어떤 교회법, 어떤 세상 윤리, 도덕법이라도 이 사랑의 다행이다를 그걸 취소시킬만한 이유는 요건은 더 이상 없습니다. 손에 장 지지라 하면 장 지질게요. 어떤 경우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피를 흘려서 이 사랑의 피에 응축되는데 그 피를 흘림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모든 걸 완료했다면 마귀의 노리는 점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마귀는 인간에게 모든 걸 다 허용합니다. 자유도 주고 모든 걸 허용하되 단 하나만큼은 절대로 거기에 관심두지 않게 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다행이다! 예수님의 피로 다 이루었다! 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 다 이루었다. 그건 교회에서나 절에서나 세상에서나 그건 절대 발설 못하도록 계속해서 겁주는 식으로 하지요.
교회 나와서도 집구석 망해놓고 헌금 십일조를 안 해서 그렇다.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공갈 협박 보이싱피싱하는데 계속해서 겁주는 거예요. 빨리 통장 바꿔야 한다고. 그러면 그 협박 공갈에 말려든 사람은 뭐냐 하면 자기 자랑하기 위해서 교회 온 사람은 다 말려들어요. 그런데 처음에 교회 올 때는 지 자랑하러왔다가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복음 듣고 다행이다를 이미 선점해버린 사람한테는 아예 도배를 다행이다. 예수의 피로 자기 영혼을 도배를 한 사람한테는 그 협박 공갈에 우습지요. 진짜 웃기네!
아~ 교회가 저리 장사하는구나. 아~ 저렇게 하는구나. 믿음이 없으니까 목사 됐구나. 믿음이 없는 조건하에 마귀가 목사를 되게 한 거예요. 장로도 마찬가지고. 아~ 교회 운영을 저리하는구나. 그 운영 법을 알게 된 거죠.
그렇다면 다시 야고보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의 형상이 이처럼 어떤 특정적인 말로 나온다는 것은 말을 주의하라고 하는 이 야고보서의 뜻은 뭐냐 하면 내용이 제대로 다행이다.에 관련된 내용인가를 주님께서 주목하고 주시하겠다는 겁니다. 그냥 인간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아니고 복음에 근거해서 하면 너무 딱딱하지요. 그러면 다른 더 쉽게 하겠습니다.
“이 기쁨에 얹어서 말을 하라.” 이 말입니다. 기쁨에 얹어서 말을 하라. 안 믿는 남편이나 복음을 모르는 가족들이나 할 때, 조건이 뭐냐 하면 기쁨에 얹어서 해야 돼요. 기쁨에 얹지 않으면 이게 시합이 돼버립니다. 나 이만큼 안는데 그것도 모르고 이 바보야! 나한테 한수 배워라. 이리되면 야고보서 3장에 나온 것은 이건 뭐냐 하면 졸지에 본인이 스승이 돼요. 이 스승의 특징 업무를 이야기한 게 아니지요.
모든 성도가 다 스승으로서 행세할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스승이 될 때에 기쁨이라는 쟁반에 얹어서 말을 해야 되는데, 이걸 이제 여러분이 잘 아시는 고린도전서13장에는 이렇게 했어요.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뭐가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라.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사랑은 뭐냐 하면 사랑은 가벼움이거든요. 율법은 뭡니까? 무거움이죠. 무거웠었는데 무거움이 날아갔을 때 오는 가벼움. 뭔가 가슴에 응어리가 졌는데 어디 갔지? 그게? 갑자기 빠져나오니까 분화구처럼 빈자리가 생기는 거죠. 뭔가 있지 않아야 될 게 있었는데 내 힘이 아닌데 주님의 은혜로 빠져나오고 난 뒤에 그 기쁨의 자리가 그 빈자리가 기쁨의 자리에요. 기쁨의 자리.
그래서 기쁨의 자리를 주님께서 계속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고민거리를 주셔요. 고민거리 주시고 끙끙대고 끙끙댑니다. 구약에 사사기가 그런 거예요. 사사기가. 끙끙대면서 그 다음에 뭐냐 고민거리 주고 끙끙대고 그 다음에 자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 다음에 실패로 끝나요. 그 다음에 “아이고~~ 모르겠다. 내 몸 내 것도 아닌데 내 인생 아닌데 죽여주시옵소서.”
이게 뭐냐 하면 그 모든 문제가 끙끙대고 노력하고 하는 이 모든 문제가 마귀에게 속아서 그러는데 이게 있어요. 내 숙제가 아니거든요. 요한복음6장39절 유명한 말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살리는 이것이라. 했잖아요. 그러면 그 일은 누가합니까? 주님이 하시지요. 개척교회 목사 본인이 하는 게 아니지요. 할 필요 없지요. 나한테 전도 안했다고 책벌하고 그런 거 없지요. 그런 것이 우리한테 무거운 짐이 되는 겁니다.
요번에 수련회 하는데 수련회 제목이 사도행전 주제가 되는 겁니다. 마지막 째 9번째 제목을 미리 적어놨어요. ‘선교하지 않는 것이 선교다.’ 9번째 제목이. 첫 번째 제목은 이겁니다. 여기서만 공개할게요. 다른데서는 공개 안 해요. ‘무슨 일이 있어?’ 이게 제목이에요. 이게 첫 번째 제목이에요.
선교하지 않는 것이 선교인 이유가 우리가 선교 주체가 아니고 선교 대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교된 대상은 내가 선교하겠다는 그 의도마저 박탈당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제대로 우리를 성도 안 만드신 겁니다. 선교해야 되겠다는 의무와 책임이 있다면 그건 주님 쪽에서 선교를 덜 한 게 돼요. 아직 제대로 안한 게 돼요. 사도행전은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사도행전 첫 강의부터 사도행전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제가 말씀드릴 건데 1장부터 28장하잖아요. 그렇게 보시면 안돼요. 28장부터 거꾸로 올라와야 돼요. 그렇게 올라가서 이 유대인들이 얼마나 바보 등신같이 그런 걸 믿었다는 것을 못난 이방을 통해서 고발하는 책입니다. 역시 뭘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방인들은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된 거예요. 그 잠수의 깊이가 더 넓은 거예요. 얕은 곳에서 훌짝 훌짝해서 구원 받으려고 하는 것보다 깊은 물에 있는 보물을 건져서 얕은 물에 있는 보물의 시건 없음. 철딱서니 없음을 고발하는 겁니다.
이런 것이 뭐냐 하면 내 숙제가 아니지요. 그러면 내가 인생을 살면서 일어나는 일은 필히 일어나야 되는 일이에요. 전부 다. 필히 일어나야 될 일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확정된 일이에요. 내가 몇 월 몇 일날 일어나야 될 일은 필히 확정된 일입니다. 그 확정된 일이 진행할 때에 그것이 고백으로 나온다는 말은 성도에게는 고백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에서 말을 주고받을 때 그 말을 통해서 그 사람이 내 사람인지 아닌 사람인지 구분하겠다는 말은 그 말이 나온다는 것은 그 맘속에 있던 주님께서 유발한 어떤 변화가 말로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럼 왜 그렇게 말로해서 나오는 이유가 뭐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비폭력적이었지요. 그렇지요?
그럼 확정난 일이 있을 때에 이제부터 슬슬 어렵기 시작하는데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을까 몰라요. 제가 약간 걱정되긴 하는데요. 할 수 없어요. 이건. 어려워도 감당하셔야 돼요. 이미 확정된 일이라는 말은 확정된 내용이라면 이게 뭐냐 하면 여기서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의미. 말을 할 때 그냥 말을 하는 게 아니고 반드시 뭐를 싣고 있느냐, 내용을 담아서 의미를 담아서 전하거든요. 의미를 담아서.
확정된 내용이 있을 때 의미가 나오는데, 그러면 이렇게 주님께서 확정된 의미가 있다면, 반대가 뭐냐 하면 미확정된 내용을 가지고 말을 하게 되면 여기에 뭐냐 하면 인간들의 자체적인 자기 의미가 나오겠지요. 이 둘 사이가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확정된 내용은 아까 “다행이다.” 또는 “기쁨에 얹어서” 주눅 들지 않고 주께서 나를 망가뜨려서 기어이 내가 걱정했던 것 다 도려내고 나를 빈자리로 만들었어요. 빈자리. I am nothing이라는 말이 있지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신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거 내용은 예수님이 이 내용 가지고 싸웠듯이 오늘날 싸움이 성도에게 이어집니다. 미확정된 인간들, 미확정된 인간이니까 여기서 두려움이 생기지요. 공포,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감 이런 게 생기잖아요. 이런 게 뭐냐 하면 의미를 지키기에는 무슨 의미에요? 자기의미에요. 자기 의미 지키기. 자기 의미 지키기에서 확정된 건 내 가정 지키기, 내 자식 지키기, 내 남편, 내 직장 지키기, 내 금융거래 지키기, 교회 지키기, 전부 다 내 역사 지키고 내 자존심, 내 찬란한 아름다운 과거 인생사, 전부 다 자기 소속 단체 지키기죠.
그런데 이 지키기는 지키면 지킬수록 점점 두려움과 공포가 이것이 계속 가중되지요. 이 끝은 뭐냐, 자살입니다. 하다, 하다 안 되면 자살해버리지요. 그럼 자살하지 않은 사람은 지연된 자살이지요. 치매. 치매되면 얼굴부터 다르지요. 치매되면 얼굴이 달라져요. 착한 천심의 얼굴도 치매되게 되면 고집불통의 얼굴로 변합니다. 치매환자들의 얼굴이 다 그래요. 그렇게 순수했던 것도 완전히 불퉁스럽고 올리브 괴롭히는 부르투스 있잖아요. 그 얼굴이에요. 인간극장에도 나오는데 지리산에서 치매 걸린 할머니 하는데. 옛날에는 점잖은 얼굴이지만, 전 같지가 않아요.
두뇌에 변화가 일어나면 얼굴 표정이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고집불통으로 보이는데 다른 말로 하면 내 것 못 놓겠다는 거예요. 내 과거 기억을 못 놓겠다. 맨날 지리산 살면서 혜화동가자. 서울 가자. 남산 밑에 동네 맨날 가자. 장기기억만 있어가지고 고집만 부리는 거예요. 남들을 보면 전부 다 저게 원수고 나를 해꼬지하고 이게 치매 걸리면 생긴다 하는데 사실은 말이 잘못됐어요. 우리 안에 누구나 잠복돼 있습니다. 아닌척하고 포장이 될 뿐이지 포장지만 딱 뜯으면 누구나 그것이 다 공통점으로 다 들어있어요. 건드리면 욱합니다. 건드리면 욱해요.
절대로 하나님을 위해서 산 적이 없어요. 자기를 위해서 살았어요. 그래서 신앙도 자기 잘남을 위한 신앙이었지 하나님을 위해서 한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나는 바람 안 피웠다. 그럼 누굴 위해서? 지 가정 지키기 위해서 바람 안 피운 거예요. 내 의미, 내 미확정된 의미 지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둘이 병행 안 된다고 이것을 전부 다 걷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아프지요. 굉장히 아파요. 이거 걷어내니까. 이걸 걷어내는 게 왜 아프냐 하면, 이것 때문에 남하고 비교 우열에 나서요. 비교 우열.
남보다 낫다는 점 때문에 고된 인생을 버티는 거예요. 남보다 낫다는 것 때문에. 강남에서 좀 살다가 일이 꼬여서 이상한데 와가지고 이 인덕원 못 사는데 와가지고 상대적으로 비교하고. 남자들이 왜 차를 좋아하느냐 하면 대출해서 사는 이유가 차가지고 자기의 의미를 존재의 의미를 지켜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남자들이 차 좋아하는 것은 옛날의 조선시대의 말 좋아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차를 건드리면 가다가 차바퀴를 건드리면 자기를 찬 게 아닌데 자기가 화를 내지요. 그걸 확장된 자아라 합니다. 확장된 자아.
차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거예요. 교회에서 누가 꽃꽂이를 했는데 애가 꽃꽂이를 건드렸다. 남들은 가만히 있는데 그 사람은 화내요. 확장된 자아입니다. 피아노를 가르치는데 제자 하나를 누가 이렇게 하면 선생님이 가만히 안두지요. 자기의 공로와 행함이 거기에 누적돼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의 행함은 문어 발 같아요. 전부다 걸쳐놓고 이것 건드리면 곧 주체 나를 건드리는 거예요.
요 방식을 주님께서 그대로 사용해서 교회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두머리고 자기 지체. 너를 행한 게 곧 나한테 행한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는 겁니다.
자, 지금까지 정리해 보면 인간은 말을 한다. 그 말의 내용이 중요하다. 그 말의 내용은 뭐냐 하면 바로 다행이다. 기쁨에 얹어서 하는 그 말. 그 말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예수님과 예수님이 주도하는 고백인 반면에 그렇지 않고 말을 하면서 선악에 의해서 타인과의 비교 우열을 늘 염두에 두면서 이런 고백, 이런 기도, 이런 말을 함으로서 남들이 내가 얼마나 믿음 좋다고 칭찬하겠느냐, 그런 식으로 계속 생활해가요. 남을 의식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교회도 여자 기도를 아예 없애버렸는데요. 여자 교인은 좋아가지고 입이. 정말 그 모양새가 꼭 이것 같아. 이제 종을 편히 쉬게 하시는군요. 왜냐하면 기도를 하면 되는데 기도하고 난 뒤에 그 기도내용을 그 사람의 본질로 뒷담화해서 문제에요. 계속 씹어대요. 믿음 좋을 줄 알았더니. 모든 이 세상에 살면서 내가 나를 힘들게 해요. 그리고 그 나라 하는 것은 누가 조성했느냐 하면 평소 어릴 때부터 남들 보기에 제대로 살아야 돼! 라고 계속해서 외부에서 주어지는 교육의 효과 그게 이만큼 빙하 쌓이듯이 계속 시루떡처럼 쌓여서 이게 꾹꾹 나를 누르는 거예요. 계속 눌려버려요.
그래서 말을 할 때에 평소에 남들에 의해서 조성된 말이고 그 조성된 말 자체가 “니는 반드시 남을 이겨야 돼! 지면 안 돼! 우리 가정은 이런 가정이야.” 라고 하니까 야고보서3장8절 한 번 봅시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야기 듣고 보니까 여기 악이고 독이라 하는 것은 그 구심점에 누가 있어요? 센터에 바로 자신의 가치를 포기 못하겠다는 아집, 집착, 하나님도 나를 위해서 있어야 된다는 그런 것이 자리 잡았지요.
그런데 그게 그냥 그것이 말로 나왔을 때는 누굴 죽인다? 바로 형제를 공격하는 요소가 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공격받듯이 형제를 공격하는 셈이 되어버리지요. 주님의 형제는 다행이다. 기쁨이다. 이게 나와야 되는데 형제라고 우기면서도 같이 섞여서 엉뚱한 소리하고 있을 때는 남한테 압박이 되고 협박이 되고 공갈이 되고 마귀 짓이 되는 겁니다.
그럼 말 안하면 되겠네. 입 다물고 있으면 될 게 아니냐. 그래서 이제 기도를 안 하지요. 기도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최고 좋은 것은 그러면 입 다물고 기도 못합니다. 안하면 뒤 담화 할 일도 없고 그렇게 되는데.
그러면 여기서 근원적으로 한 번 따라가 봅시다. 이 문제입니다. 왜말을 하는가. 사람은 왜 말을 하지요? 아무도 그런 질문을 안 하고 답도 생각 안하고 있지요. 이게 인간들이 건방져서 그래요. 길가에 들풀이 있습니다. 들풀. 길가에 들풀이 있습니다. 그냥 지나가면 돼요. 지나가면 되는데 같이 가는 사람이 “저기 들풀 있네.” 하면서 드디어 뭐가 만들어졌어요? 들풀이라는 단어가 성립됐지요. 이게 말이 되지요. 사람이 말을 하는 이유는 세상 주변에 있는 모든 환경을 자기를 중심화시키기 위해서 연관시켰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자기 중심화에요.
“세상에 돌아가는 것은 나를 위해서 돌아가야 해!” 라는 말도 안 되는 억지가 인간의 죄된 본능에서 계속 나오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주의해야 된다. 니 중심이냐 아니면 복음중심이냐. 니는 빈터냐 아니면 니가 중심에 니가 차지해서 예수님마저 쫒아내고 하나님마저 쫓아내고 니가 가운데 턱하니 보좌에 앉아있는 마귀처럼 앉아있느냐를 주의하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 해서 인간은 말을 하는 이유는 세상에 태어나서 눈을 떴으니까 일단 그 세상은 내 중심으로 돌아가야 마땅해! 라는 그런 주장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질문부터 해보지요. 왜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되지요? 이게 뭐냐 하면 ‘심판받지 않기 위해서’ 이것을 로마서10장에서는 자기 의라고 하는데. 이걸 좀 더 함축적으로 어렵게 이야기해서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의 행동과 삶은 자기 존재 증명용이에요. 인간은 자기 존재 증명용입니다.
말을 함으로서 나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거예요. 자기 존재 증명. 그런데 드러내면 그걸 알아줄 사람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형무소에 안 가봤지만 가보면 제일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독방에 갇힌다는 게 제일 힘들 답니다. 전화기도 없고 아무 외부 연락이 없다면 그 사람은 숨을 쉬어도 죽은 자에요.
특히 인터넷상에서 강제적으로 퇴출당하면 그 인터넷 세계에서 그 사람은 없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아무도 찾지도 않고 자식도 찾지도 않고 가족도 없고 그저 라면이나 최저생활비 얻어가지고 라면이나 끓여먹으면 TV나 쳐다보고 있으면 그건 죽은 자지요. TV는 일방적으로 나한테 보여 지는 거잖아요. 내가 남한테 연락할 사람이 없으면 이 땅에 있으나 마나한 겁니다. 지연된 자살이지요. 자살한 이유가 아무도 내 사정 안 알아준다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평소에 내 사정 알아주기 위해서 나는 살아왔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지요.
그러면 왜 작은 교회 안가고 큰 교회 가느냐, 이용할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 중에서 그 여전도회 중에서 나하고 맞는 사람이 필히 있을 것이다. 어떤 정보, 생활의 정보, 어디 가면 피아노 레슨 어디가 잘 가르치고, 애들 과외 누가 잘하고, 이런 정보라든지 다 큰 딸이나 아들 시집보내고 장가 드리고 할 때에 또 장로님 다니는 회사에 믿음 좋다고 특채할 수도 있는 문제고 모든 가능성은 열어져 있거든요. 그게 뭐냐 자기 존재 증명이에요.
큰 교회 목사들이 사회적으로 자기 위신이 유명하다는 걸 가지고 광고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기독교 방송에 돈 내고 설교하는 이유가 우리 교회 소속된 자체가 이만큼 유명세를 떤다는 것이 자기가 아직도 살아갈 이유를 제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 존재증명이에요. 자기 존재 증명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그만큼 살기가 빡빡하다는 겁니다. 빡빡하니까 숨 좀 쉬자는 거예요.
지금까지 강의한 거 쉽게 하면 뭐냐, 빡빡하니까 나도 숨 좀 쉬자. 좀 알아둬. 뭘 알아주고? 나는 선과 악 사이에서 나는 선에 기울어져 있다. 이런 게 바로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 내잖아요. 이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뭐냐 하면 나는 그런 인간을 만든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 인간을 하나님은.
그런데 인간 대 인간들끼리 그렇게 인간이라고 우기지 나는 너희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니 어디를 봐서 인간이냐 말이지요. 흙이지. 잠시 인간의 모습을 띠지만 한 백년 살면 흙으로 환원되잖아요. 그러면 뭐 흙이지요. 바퀴벌레가 긁어먹어요. 결국 잠시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말이죠. 잠시 인간 모습하고 이렇게 예쁘게 있다 해서 하지만, 그 이쁜 것도 세월이 날아가 가지고 붙어가지고 뜯어내게 되면 온 전신이 안 아픈 데가 없고 전부가 점점 더 쇠퇴하고 소멸하지요. 내가 주일날 설교했잖아요. 인간은 쇠퇴의 아이콘이라고. 쇠퇴하는 아이콘이에요. 쇠퇴가 뭐냐 인간들 보면 돼요.
쇠퇴할 때 그걸 본인이 아니까 자기가 젊을 때 생각하는 자기 존재는 대단한데 몸은 안 따라주니까 인간은 발악하는 겁니다. 발악하는데 60된 할아버지가 자기 아내한테 화냈다 해가지고 추징금해가지고 10년형 받았지요. 꾸준히 결혼생활하다가도 순간조로 잔소리한다고 죽여 버린 거예요. 그럼 그 사람은 평소에 뭡니까? 이거에요. 자기 존재 증명한 거예요. 그래서 이건 결국 뭐냐 하면 하나님은 심판은 뭐냐 스스로 알아서 심판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교회에 가만히 있으면 복음 몰라도 괜찮아요. 가만히 있으면 그 사람이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에요. 심판 중에 있습니다. 어디 나오느냐 로마서3장에 나오지요.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니, 저주 아래 있는 게 그냥 가만히 있는 줄 알아요? 에어컨 아래 있다고 우리가 에어컨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여기서 찬 기운 나오잖아요. 저주의 기운이 온 땅에 추궁합니다. 애국가 고쳐야 돼요. 하나님이 계심으로서 동해바다 저주가 함께 하는 나라에요. 저주가.
그래서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걸 파스칼의 원리라고 했지요. 모든 면적이 압력은 동일하게 미친다고. 저주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몸도 성도의 몸도 이렇게 저주받아 죽잖아요. 얼마나 성도는 이게 굉장히 감사한 거예요. 내 몸으로도 처리 안 해도 주께서 알아서 처리해주니까 그것도 다행이다. 알아서 치매 걸리고 알아서 죽어가니까 그것도 다행이고. 점점 없어져가니까.
만화에 이런 게 있잖아요. 만화에 보면 실체가 이렇게 있는데 여기에 뭔가 사막에서 온 피라미드의 기근이 오니까 피라미드의 미이라 기운이 오니까 이게 뜯기면서 모래로 변화는 게 있지요. 흩어지면서. 이게 모래로 변해요. 이게 우리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여자나 남자나 60대 이상이 되면 거울을 잘 안 보려고 해요. 늘 실망이니까. 평소의 자아 이미지는 30대내지 40대 후반인데 막상 거울을 보면 안돼요. 거울을 보면 또 익숙해져가지고 견딜 만한데 특히 사진 찍으면 안 볼란다. 나, 안 볼란다. 차마 눈 뜨고 못 봅니다. 무슨 저런 귀신이 있나.
그러니까 자기가 착각에 빠지는 거예요. 귀신이면서도 아닌 척 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남자들 60되가지고 젊어 보이려고 청바지 입고 이렇게 깍둑이 머리해가지고 이리 하는데 아이고~ 저 주책. 나는 그렇게 해요. 제 아내 보면서 제발 TV에 60이상 나오지 말라고 그래요. 60이상 나오면 화면 다 버려요.
계속해서 이렇게 죽어가면서도 말발을 설치는 이유가 어떤 경우라도 내 존재를 내가 스스로 못 버리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못 버리는 자체가 이게 벌 받는 중이에요. 벌 받는다고 손바닥 내. 매매! 이게 벌이 아니고 24시간 나를 못 잊는다는 게 나한테 형벌입니다. 저주에요. 좋은 일이 생겨도 이게 또 몇일 갈까? 이게 걱정되고 나쁜 일이 있으면 하필이면 이게 나에게 남들은 멀쩡한데 왜 이렇게 일어납니까? 모든 것이 나를 경유해서 그것을 다시 내가 그 의미를 쳐다보고 있는 내가 존재한다는 게 이게 참 저주스러운 모습이지요.
주님께서 이러한 인간은 말을 해야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말은 해야 되고, 그럼 주님의 성도에게는 이렇게 내가 있는 한 절대로 내가 스스로 다행이다. 기쁨을 제공하지 못할 때에 주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주께서 원하시는 다행이다와 기쁨이 계속 이어질 수 있는가,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안양20180713b야3장1절(말의 세계)-이 근호 목사
첫째시간에 이야기 들으니까 이거 참 중요한 문제지요. 말을 해야 될 텐데, 다행이다. 기쁨에 얹어서 주께서 찬양이 되는 말을 한다는 거,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실 때에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 상당히 중요한 문제지요. 중요한 문제인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그 인간이 자력으로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찬양이라든지 원하시는 복음의 내용이 안 나온다는 것을 아셔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 인간을 주체라 합시다. 주체란 말이 어려우면 그냥 나. 같은 말인데 자아. 주체 앞에다가 뭐냐 하면 대상으로 오십니다. 대상. 우리 힘으로는 안돼요. 우리 힘으로는 안 되고 우리 인간 세계 속에서 전부 다 지 잘났다고 밖에 안 되기 때문에 누가 오셔야 돼요. 오실 때 인간은 자기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자기 외에 있는 이것을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이 대상은 무엇을 갖고 있느냐 하면 정보를 갖고 와요. 정보를 가지고 옵니다. 정보를 주는 자를 발송자라고 하고 받는 수령자를 이걸 합류해서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실 때 문제는 이 주체가 대상으로 볼 때에, 대상은 예수님이잖아요. 하나님이 보내시니까. 예수님을 볼 때에 내 중심이기 때문에 여기서 필히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곡해가 일어나요. 오해가 일어난다고요. 오해가.
좋으신 분이니까 무조건 믿자. 좋은 건 우리한테 도움 된다고 생각하고 믿자고 나오는데 그 예수님이 자기가 드린 예수님이 아니지요. 이것을 이렇게 제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먼저 선점해서 제자들이 이 일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불러줬으니까 제자들 앞에서 누가 대상이죠?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이 있거든요. 그러면 ‘예수님하고 자기하고 좋은 관계를 이루면 이제는 하늘나라 가겠지.’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하늘나라 정보지요. 정보. 발송자이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그리 하지요. 아예 천국에 못가요. 어린아이 되지 아니하면. 노력하면 가는 게 아니고 아예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를 못해요. 그런데 제자들은 어른이잖아요. 어른이면 이미 어린아이 시절을 지났기 때문에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되돌릴 수가 없어요. 가능한 이야기를 하신 게 아니고 지금 불가능한 이야기를 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누가 높으냐,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을 하나로 묶어요. 같은 팬으로 생각해서 묶어가지고 남은 것은 천국 가서 누가 높으냐, 누가 평소에 있는 노력에 따라서 보상을 차등보상을 받을 텐데 상급을 받을 텐데 누가 상급을 많이 받느냐 그것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예수님 하신 말씀이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뭘 못 간다? 천국에 못 간다. 요한복음3장에서는 니가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볼 수 없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주체는 예수님을 자기 것으로 평소에 자기가 좋은 것 챙기는 방식으로 예수님마저 좋은 것으로 챙기려 했는데 이쪽에서 나갈 때는 챙기자! 가 되는데, 이쪽에서의 예수님은 뭐냐 심판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인간을 심판해 버려요.
그런데 심판이 사람보고 차별해서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일괄적으로 심판해버려요. 일괄적으로. 남자들이 군에가 힘들지만 버틸 수 있는 것은 다들 군복 입었다는 사실이에요. 차등이 없으니까. 고생이라도 견딜 만한 거예요. 차등이 없으니까. 왜 병원에 가면 병이 잘 낫습니까? 전부 다 환자복 입었거든요. 약이 안 오르는 거예요. 그런데 집에서 그냥 있어보면 빨리 병이 나아서 옛날처럼 밖에 나가 놀 생각하기 때문에 이게 안 낫지요. 병원에 가면 주는 밥 먹고 하면서 자기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포기를 해요. 나는 환자다. 고분고분 해야 돼! 그래야 낫는 거야. 자기가 뭐 판사가 되던 의사가 되던 목사가 되던 관계없이 병원에 가면 전부 다 환자입니다. 전부 다 환자지요.
주님께서 일괄적으로 전부 다 죄인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이건 심판입니다. 죄인으로 한다니까 심판하는 그 행위를 통해서, 이런 게 어려운데요. 죄가 있고 심판하는 게 아니고 심판을 함으로서 없는 죄가 서서히 만들어져요. 생산돼요. 없는 죄가. 그러니 주님과 가까이 하면 구원되는 이유가 죄를 알기 때문에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기 때문에 구원대상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도 안 나오고 니나 교회 다녀라. 나는 바빠서 술 먹으러 가야되겠다. 이렇게 돼버리면 자꾸 뭐가 되느냐 하면 의인이 되어버려요. 교회 나와도 복음의 말씀을 들어야 되는데 교회 나와서 엉뚱한 설교 있잖아요. 나라 걱정하고 핵문제 걱정하고 이렇게 해버리면 본인의 깊이 있는 죄를 지적 못하는 설교를 들어버리면 전부 다 이건 친목단체가 되고 동호회가 되고 으샤! 으샤! 교회 돼요. 모든 교회는 일괄적으로 으샤 으샤 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교회 키우자. 교회 더 키우자. 그래프 그려 놓고 주일학교 몇 명 모였나? 매일 그래프 그려놓고 부모 조지고. 계약제 부목사 매일 욕먹고. 그래프 안 채워지면 또 계약이 안돼요. 정규직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부목사는 무리해가지고 옆에 있는 교회의 애를 데려와 가지고 문제 일으키고. 이건 당회장도 마찬가지고요. 그저 내 교회 누가 키워줄 것인가, 내 교회 누가 헌금 많이 나오게 해줄 것인가, 나는 많이 했으니까 나중 온 사람 헌금해야 된다. 이런 것 가지고. 교회 붙들고 있으면 천국 가는 줄 알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죄를 모르지요. 그런데 만약에 복음이 들려져버리면 이런 행위 자체가 일괄적으로 죄 안에 갇혔기에 비로소 나타나는 종교적인 죄, 그리고 예수님이 죽었던 그 요소와 조건과 딱 맞지요.
바리새인이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은 내 것, 내 가치, 내 의미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누구냐, 바리새인들이에요. 현지 같이 있었고 예수님이 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역겨운 이야기인지를 그들만큼 절실하게 느낀 사람은 없어요. 좋으신 아저씨가 아닙니다. 이건 아주 우리를 작살내고자 하는 독한 말을 쏟아내는 분. 따라서 우리는 내 평소의 삶의 의미가 내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히 제거대상이 되는 겁니다.
대상인데 무슨 대상? 제거대상이죠. 이게 제거돼버리면 정보도 구원의 정보도 다 날아가지요. 다 철수되는 겁니다. 심지어12제자에게도. 그러면 이렇게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내쫒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주체가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기에 뭐냐 하면 협조자를 이렇게 설정돼 있고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이 협조자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대적자를 나 중심으로 항상 설정해요. 이게 삶의 체계입니다.
집안에 만약에 안 믿는 남편이 있다면 안 믿는 아버지는 이제 술 먹고 가끔 들어오지요. 술 먹는 이유는 잃어버린 자아를 다시 회상하기 위해서 유지하기 위해서 술을 먹어요. 술 먹는 순간에는 자기가 신이 되기 때문에. 자기가 최고가 되기 때문에. 그 짧은 순간이라도 그걸 버티기 위해서 술을 먹어요. 술을 먹는데 먹으면서 그 때 자식들, 부인 모아놓고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절대로 저 광산김씨는 저거는 용납하지 마라.”해가지고 몇 동 몇 호는 절대로 상종하지 마라. 내가 한 소리했다고 나한테 대들었어. 저거 싸가지 없는 것. 아버지한테 대들었는데 너희들이 만약에 친하다면 나는 용서하지 않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말이죠.
원수지간의 가문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잖아요. 인간의 주체는 어떻게 형성하느냐, 반드시 협조자와 대적자를 가름하는 식으로 자아가 점차 구축되게 돼있습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자는 곧 나의 적이 되고 나에게 동조하고 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내가 협조자가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날 때부터 정치적이에요.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친구가 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주체를 심판한다는 것은 결국은 뭐예요? 이런 협조자, 대적자하는 이 자체를 완전히 심판해버리는 겁니다. 이러한 기준은 그것을 저 사람은 협조자, 이 사람은 대적자 분류 자체를 공격해 버리지요. 그 자체를 공격하게 되면 심판하게 되면 이건 곧 무엇을 공격하느냐 하면 심판과 심판이 결국 오늘 주제인 말을, 오늘 제목은 ‘말의 세계’입니다.
말이 어떤 연관이 나오느냐, 심판과 관련되어서 주님이 심판 이야기했지요. 주님의 심판 이전에 이미 인간은 자아는 나름대로의 뭘 한다? 심판하지요. 이것이 이렇게 말로 나왔던 여기는 서사구조가 돼요. 서사라 하는 것은 이야기지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죽 이야기를 드러내는 거예요.
특히 남자들이 술 먹었을 때 나오는 이야기에요. 또 여자들도 술 먹고 나면 눈물 죽죽 흘리면서 들었던 이야기 또 하고 한 이야기 또 해가지고 서사구조가 죽 나오지요. 내가 이렇게 고생했고 느 아버지 만나서 인생 조저났다. 해가지고. 넋두리 말을 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선택입니다.
인간은 선택을 하게 되어있어요. 선택을 하고 선택된 것을 그 다음에 뭐하냐 결합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요 선택하는 요것이 뭐로 나오느냐 하면 은유가 되고 요 결합하는 걸 가지고 이것을 환유라고 해요. 언어학에서. 은유와 환유. 전부다 뒤에 뭐가 있지요? ‘유’가 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착각이다 말이죠. 착각, 망상. 인간은 망상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세상에 돌아가는 구조가 에베소서에 보면 예수님을 위하여 돌아가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예수님의 구조로 돌아가는 것을 감추는 그걸 목적으로 그 악한 신의 지배를 받거든요. 에베소서2장1절에. 세상신이 어두움의 권세자가 계속해서 그걸 카바 시켜요. 그걸 못 보게. 그럼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면 누구 중심이에요? 마귀 중심.
마귀는 절대로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귀는 없는 거예요. 마귀는 없고 마귀는 없는 식으로 뒤로 빼돌려요. 예수 그리스도도 비밀이지만, 악마도 비밀입니다. 비밀은 감추어져 있는 거고 나타난 것은 뭐냐 하면 인간밖에 없어요. 인간들이 악마의 마음을 가지고 계속 나오면서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재편해 나갑니다. 자기중심으로.
자기중심으로 나온 구조를 무슨 구조라고 했습니까? 서사 구조. 밀가루로 국수 뽑아내듯이. 똑같은 상황 5.18, 똑같은 6.25했는데 사람마다 각자 나오는 뽑아내는 것 보면 전부 다 달라요. 흥남 부두에서 탈출한 이야기, 앨리라는 터키 애 고아 키운 그 이야기. 그 영화 있었어요. 좋은 영화인데 인기 없어서 후딱 지나간 영화 있었어요. 6.25때 고아 키워가지고. 서사구조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이런 서사구조를 뭐로 바꿔야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전한 정보라 한는 것은 딴 것이 아니고 그냥 모든 것은 내 중심이다. 이렇게 하면 안 되겠지요. 심판해야 되겠지요. “어디서 망상이야! 어디서 착각이야!” 둘러 부셔야 되겠지요. 부수고 그 부수게 되면 내가 뭔가 잘못 살았구나! 내가 뭔가 놓친 게 있구나! 그렇다면 내가 놓친 게 있다면 나의 선택이 놓친 게 있지요. 그럼 선택의 주인공이 누구에요? 본인이지요.
그럼 내가 뭔가 선택한다? 그 선택한 것을 가지고 결합한다? 이 행위 자체가 이게 죄고 이게 문제 있구나! 나쁜 짓 하려고 사는 사람 없잖아요. 그런데 행위 자체가 결과적으로 그게 나쁜 짓이 되게 하시는 다른 우월한 어떤 원리 같은 것이 이미 전에 이미 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독교식으로 세상을 편집한 내용을 한 그 사례가 있으니까 그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김기덕 감독이 2012년도에 황금사자상을 받은 게 있어요. 이태리 베니스에서. 영화제목이 <피에타>입니다. 피에타는 비탄에 잠겨 있는 거, 슬픔에 잠겨 있는 거, 피에타가 무엇에 유명하냐 하면 이태리에서 15세기 문예혁명 할 때에 마리아가 예수님 자기 아들을 품에 안고 슬퍼하고 탄식하는 그 유명한 조각이 있어요. 그 조각이름이 피에타에요.
마리아가 죽은 예수님의 시체를 안고 울고 있는 장면. 그 전까지의 신학은 굉장히 냉혹하고 냉정했어요. 그런데 르네상스는 인문주의, 인간의 입장에서 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서 관심이다 보니까 이제는 마리아가 그냥 냉혹한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천상에 있다는 게 아니고 지상에 있는 엄마의 아픔을 가지고 예수님을 평소에 어떻게 대할까를 주목해서 사람들에게 감정에 호소해서 신자로서의 느낌을 더욱 부추기려는 그런 시도가 있었고, 그런 시도에서 그 당시에 성당이나 이런 사람들이 예술가를 해가지고 그런 식으로 해서 교인들을 교화시킨다 할까요. 더욱더 교회에 붙어있도록 충성하도록 그렇게 시도하는 시기가 왔었어요.
그 <피에타>는 서사구조니까 영화 구조가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태리 베니스 영화제에서 했는데. 제가 영화를 봤습니다. 줄거리를 적었어요. 그 배경은 서울의 청계천4가에 가면 철공소 밀집지역이 있습니다. 아직도 있어요. 거기에 공구상가, 가스공장, 프레스 공장, 건축 관공서, 주물공장, 그 가내수공업에 깊고도 어두운 골목을 형성하고 있는데, 여기에 영화의 초반에 할렐루야 하는 영화가 나타납니다. 후진 교인 몇도 안 되는 아주 가난한 신학교, 무허가 신학교 간판이 있어요. 영화에. 거기에 간판이 보이는 창문의 장면에서 주인공이 뭐하느냐 하면, 사채업자 돈 받아 내는 그 사채업자가 주인공입니다.
남자 주인공이 하는 일은 사채를 제때 갚지 않는 자에게 상해보험을 들게 만들어서 일부러 현장에서 절단하고 보험금으로 미납한 이자를 빼내가는 해결사. 아주 독한 인간이죠. 이자가 원금의 10배가 됩니다. 그 사채업자의 그 모습은 감독이 보기에 어느 구조에 있느냐 하면 돈에서부터 해서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돈에서 돈의 흐름으로 돈으로 귀결되는 현 사회를 아주 대변해 보여주는 그것도 밑바닥에서 보여주는 대표자가 주인공이지요.
그런 사람 돈에 궁해서 비싼 이자 돈 감수하고 생을 버텨보려는 사람을 상대로 신체 일부와 돈을 맞바꿔주는 해결사가 주인공인데 할렐루야라는 영화가 후진 신학교 후진 간판이 이 김기덕 감독은 어떻게 연관시키느냐를 우리가 보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연관시키느냐 하면 이게 마리아가 예수님 죽음을 애통하는 것과 관련되어있는데, 그럴 쯤 자칭 엄마라고 여인이 등장해요. 조민수가 그 역을 맡았어요. 등장해가지고 거짓말 해서 내가 애를 낳았는데 느 아버지는 도망갔다. 그런데 아기를 보니까 니가 내 아들이다. 이제 찾아왔다. 하면서 그러면 남자 주인공은 안 믿지요.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노. 뻔질 따라다니면서 하는데 채무자 사지를 절단하는 그 현장에도 조민수가 와서 자칭 엄마가 와가지고 막 도와줘요. 아주 사지를 뿌러 버립니다. 아주 독한 짓을 하니까.
그때사 이제 이 강도 날 강도 같은 사채업자가 믿어줘요. 그러면 자기가 왜 사채업자하고 독한 인생을 살았느냐, 엄마가 나를 버렸거든요. 버린 엄마가 이제 찾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는 이제 든든하지요. 든든하면서 그 채무자가 너무 독하니까 그 주인공보고 이 나쁜 놈아 했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전에는 “혼자서 나쁘긴 뭐가 나뻐.” 이렇게 했는데 이젠 엄마가 자기보다 더 나대가지고 “누가 내 아들 욕해?” 해가지고 더 조저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그 주인공은 든든하고 이제는 그 여인을 자기 엄마로 동질화시킨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니까 전에는 혼자서 냉혹한 나쁜 짓하다가 엄마라는 여자와 같이 하면서 둘 사이 동질화 느끼면서 동질화가 뭐냐 하면, 따스한 모정을 느끼는 거예요. 따사로운 모정을. 점차 이제는 그 엄마 없이는 못 사는 거예요. 왜냐하면 처음의 엄마는 나를 버렸기 때문에 사회에 대해서 분노를 일으켜서 나쁜 짓 했는데, 양심 없는 짓 했는데.
다시 지금 엄마 놓쳐버리면 두 번째 놓친 게 돼가지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 엄마를 계속 같이 따라다니면서 비로소 인간미를 느껴요. 냉혹한 킬라가 인간미를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그걸 감지한 여자가 이제는 서서히 아들 편을 안 도와줘요. 안 도와주니까 누가 이제는 다급했냐 하면 아들 쪽이 다급했어요. 엄마 정을 이미 느낀 상태에서.
다시 엄마를 떼어내려 하니까 다신 엄마 없던 시절은 이제 한 번 사랑을 느낀 사람이 사랑을 안 줬으면 차라리 견딜 수 있는데 버틸 수 있는데 있던 사랑이 가버리니까 못 견디는 거예요. 힘든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복수였던 겁니다. 그 여자의 아들이 사실은 이 냉혹한 가짜 아들에게 당했거든요. 복수를 한 거예요. 거짓말로 니 엄마라 해가지고. 복수한 방법이 뭐냐 하면 엄마의 정을 느끼게 만들고 그 엄마가 떠나버리는 게 복수가 되는 겁니다.
그 주인공 때리고 할 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 엄마가 떠나버렸어요. 그 다음부터는 이 아들이 채무자를 찾아가지고 “내 엄마 내놔라! 내 엄마 내놔라!” 전에는 “돈 내놔라!” 하다가 이제는 “내 엄마 내놔라!” 인간이 달라졌어요. 포학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내용이 달라졌어요. “내 엄마 내놔라!”
그래서 그 엄마를 계속 찾게 되는데 결국 엄마가 떠났다는 사실, 자기는 엄마의 정체를 알았어요. 가짜 엄마임을 알았어요. 하지만, 가짜 엄마든 진짜 엄마든 이미 엄마의 정이 자기한테 삽입된 이상은 그 여자를 잊지 못해가지고 마지막에 뭐냐, 돈을 안 갚은 피해자의 아내가 새벽길을 나오는데 1톤 트럭 밑에다가 자기 신체를 세로로 매달고 그 트럭을 운전하는 사람은 모르지요. 누가 있는지.
시속100Km로 달려버리니까 뭐가 긁히겠습니까. 자기 신체가 다 핏자국 남기겠지요. 그 핏자국이 십자가입니다. 김기덕 감독에 있어서. 자기 죄 값을 치루기 위해서 자해를 하는 흘린 그 피. 그것이 하나님의 어머니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 피에타의 사랑이다. 그거 해가지고 황금사자상 받았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은유라는 거예요. 은유. 제가 다시 할게요. 현재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이 감독의 생각은 각자, 각자 자기 인생, 자기 인생을 아까 제가 이야기한 자기 서사구조지요.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국수 뽑아내듯이 내 인생만 괜찮으면 되니까. 죽 뽑아내는 거예요. 그렇게 살다가 뭔가 외부에서 난데없는 사랑을 받아버리면 그 사랑이 내 서사구조에 갇혀있는 나를 거기서 껍질을 파괴시켜 버립니다. 끄집어내요.
그러면 나의 존재의 의미가 그쪽 안목에서 다시 바라보게 돼요. 엄마가 나를 볼 때, 나는 이런 짓을 하면 안 되잖아. 하는 새로운 고단 적인 초월적인 사랑의 차원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김기덕 감독은 그걸 바로 십자가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는 겁니다.
사랑으로 봤을 때, 돈에 팔려서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나는 행복하다는 현대인들아! 니들이 십자가를 아느냐? 이 말입니다. 천주교식 같으면 니가 아들을 버린 마리아의 심정을 아느냐, 이 말입니다. 그 마리아의 심정을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보는 겁니다. 성경하고 좀 다르지요.
원래 아브라함이 자식을 바치게 되어 있잖아요. 아버지의 심정인데. 여긴 천주교 쪽으로 하면 어머니의 심정이지요. 비탄의 슬픔이지요. 그 슬픔에 참여할 때만 인간은 자기가 죄인임을 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죄인을 아는 순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요. 죄인을 아는 순간 뻔뻔스럽게 죄를 지을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뻔뻔스럽게 죄를 지을 수 없다면 아는 순간부터 남은 인생 뭐냐, 그 죄 값을 대가를 어떤 식으로 치루는 쪽으로 하겠지요. 이게 천주교식이지요. 복음은 아니에요. 어떤 의미에서는 가룟유다식 이라할까요. 스승을 팔아먹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겁니다.
양심을 가책 받으면 그냥 살지 왜 자살을 하겠어요? 내 죄를 어떤 식으로 해소하지 않으면 내가 못 견디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가룟유다를 뭐로 보느냐 성경에서는. 사단의 마음이 그 마음이에요. 내 죄 값은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자기 선택이지요. 자기 선택이 또 자기 결합이 되게 되면 이건 하나님 앞에 내 죄를 고백하고 죄 값을 치루겠다는 아주 고상하고 경건 되고 거룩한 흔히 교회에서 칭찬 받을 만한 거룩한 삶의 모습이 마귀가 의도했던 마귀의 심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뻔뻔스럽지를 못한 거죠. 다행이다. 가 아닙니다. 기쁨이 아니에요. 옛날에 하나님 몰랐던, 예수님 몰랐을 때도 자기 선택에서 산 것처럼 예수님 알았다고 치고, 안 것도 아니에요. 지 양심은 살아 있잖아요. 문제는 양심이 살아있다는 게 문제에요. 마귀가 살아있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마귀가 살아있으니까 양심은 악 쪽이 아니고 선이잖아요. 선이니까 선으로 악을 이겨보는 내 방식이 납득이 되는 방식을 나는 살겠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교회에서 충성을 다하겠다든지 십일조 하겠다든지 아프가니스탄 스스로 자학하듯이 선교 나가서겠다든지 이제는 두 번 다시 유행가는 안 부르고 가스펠송만 부르고 이렇게 찬송가도 뒷부분 앞부분 부르고 이런 식으로 뭔가 스스로 자학해야 자기 딴아 위로가 되고 속 시원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모든 행동이 결국 돌아서서는 “주님, 하나님, 저 아직 이 정도로 양심은 살아있는 걸 인정해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바로 십자가의 원수인 거예요. 왜 막 살지 못했어요? 마귀가 막 살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교묘하지요.
왜 악마가 모든 기독교를 장악할 만한 이유되지요. 모든 인간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십자가의 영을 받지 않으면 결국은 예수님을 흉내 내고 예수님을 따라가고 모방하려 합니다. 행함을 동원해서. 그런데 주위에서 그걸 격려해 주거든요. 훌륭하다고. 김기덕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지요.
세상을 살아갈 때, 선택했고 선택한 거기다가 결합을 해버리면 그게 의미가 발생돼요. 그 의미를 나의 의미로 꼬깃 꼬깃 움켜쥡니다. 교회 오래 다닌 그 장로들이 가진 마음가짐이 뭐냐 하면 젊은 것들이 요새 싸가지가 없어가지고 점심 값 돈도 안내고 헌금 조금하지만 우리 처음 할 때는 집 바쳤다. 요새 애들은 싸가지 없어가지고 집은 뭐고 돈 천원 달랑 내고. 교회 잘 돌아갈 때는 내가 보탤 게 뭐있노. 이런 식으로 해서 에어컨 다 켜고. 에어컨 공짜로 켭니까.
교회 운영에 돈도 안 내고 말야. 그냥 나와 가지고 전부 공짜로, 유아실 사용 다하고, 노인네들은 공짜로 해주는 일요일 말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운영되는 노인방에 가가지고 에어컨 다 켜고 거기서 미팅 다하면서 온갖 것 다해놓고는 노인네가 무슨 돈이 있어요. 이천원 달랑 내고 이런 식으로. 그게 이제 화가 나는 거예요.
선배가 많이 냈으면 후배가 같이 내줘야 되는데 선배가 냈는데 후배들이 안 따라 주니까 그 장로들이 누구 탓하겠어요? 목사님에게 뽀록 해가지고 교인들 해가지고 돈 있는 교인들 오게 해가지고 목돈 내게 만들어라. 장로들 생각은 이것밖에 없어요. 남북통일도 아닙니다.
내가 세운 교회는 내 자존심이에요. 이거 무너지면 이거 끝나면 내 자신이 끊어지는 겁니다. 나는 헌신했는데 너희들은 왜 헌신 안하느냐, 목사가 잘못 가르쳐서 그렀다. 이리 보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아무리 교회를 크게 하고 뭘 해도 결국 환원되기는 뭐냐 하면 망상구조에 그대로 못 빠져 나온 겁니다.
그럼 망상구조에서 못 빠져 나오면 어떻게 하느냐 그림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주체할 때 협조자, 대적자 있지요. 예수님이 대상이라 했지요. 예수님이 대상인데 주체를 심판하지요. 그것도 그냥 나빠서가 아니라 일괄적으로 심판해요. 모든 인간을 마귀에 속해서 심판할 때에.
그 주님이 선택하는데 어디 선택하느냐 하면 심판하면서 인간의 대적자 자리에 와버려요. 인간은 메시아를 뭐로 보느냐? 협조자, 내 일에 협조하는 예수님. 든든한 예수님. 내 가정을 지켜주는 예수님. 내 아들 취직 안 될 때 취직 해주고, 딸 시집 못 가는데 시집가게 해주는 그런 하나님이기를 원하는데. 그렇게 요구하는 나의 선택과 정면으로 상충되는 그 자리에다가 주님께서 이쪽으로 선택해 버려요.
화가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지요. 화나지요. 베드로가 예수님 할 때 자기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자기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정도 성의 같으면 좀 받아줘도 괜찮잖아요. 돈 정도 몇 푼 바치는 게 아니고 목숨을 바치겠다는데. 주님께서는 그걸 거절했어요. 그럼 이 자리는 무슨 자리입니까? 결국 거절의 자리지요.
거절을 했다는 것은 인간과 주님께서는 우선 뭐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이 단절성이 유지가 되어야 돼요. 단절성이 유지 되어야 그 다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줬을 때 다행이다! 가 돼요.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행동은 단절성을 유발하는 행동 외에는 딴 거는 나올 게 없기 때문에. 십일조하고, 헌금하고, 기도를 해도 그 짓거리가 기어코 해놓고는 나 오늘 기도했다. 성경 몇 장 봤다. 오늘 성경공부 참석했다. 뭐 했다. 반드시 주님께서 거절할 만한 요소를 계속해서 육체가 있는 한, 끊임없이 이것이 나오게 돼있습니다.
만약에 주님 쪽에서 주시는 다행성이 없으면 내가 뭐 해놓고 나는 오늘 죄를 이겼다. 아휴! 다행이다. 이리 돼요. 그것이 자기도 좀 이렇게 긴가 민가 하잖아요. 그러면 기도 빡세게 해놓고 그 다음에 기도한 효과를 그 다음부터는 애를 붙들고 니 성적 얼마 올랐노? 묻습니다. 모의고사 몇 점 나왔냐고. 성적이 오르면 싱긋이 웃어요. 그러나 그게 올무에요. 왜냐하면 전에 새벽기도 10일해가지고 성적 10점 올랐거든요. 그 다음에 10점 더 올리려하면 이제는 10일 해본다고 안 오르잖아요. 성적 20점 내려갔어요. 그러면 이제, 아이고~ 하나님! 계산에 밝으시네요. 그것도 20일 금식해버려요. 그것도 10점 오르기 위해서. 지가 지금 수판 놓기 하는 거예요.
자아를 뭐로 보느냐 하면 성적10점 오른 그 아들의 엄마로 보는 거예요. 내 아들 의사가 된 엄마. 그냥 엄마가 아니고 의사 아들 둔 엄마에요. 인간은 미쳤거나 바보입니다. 이건 그야말로 인간은 정신병자로 보면 돼요. 자체가. 이왕 정신병자인거 제대로 한 번 미쳐봅시다.
이 단절성을 건너가는 거예요. 우리가 건너갈 수 있는 게 아니고 주께서. 건너가게 되면 이건 집안 꼴이 엉망이라도 다행이다. 는 거예요. 성적 10점 내려가도 아이고 기쁘다는 겁니다. 두려움이 없어요. 여러분, 완료성이거든요.
나의 원수 된 그쪽과 내가 이제는 그쪽편이 됐다는 것. 내가 원수로 생각한 그쪽에 내가 같이 한통속이 됐다는 것은 그 다음부터는 주님께서 당하는 모든 수모, 그 수모를 나도 기쁘게 그 수모를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복음으로 환란을 받으면 성령이 너와 함께 있으리라. 베드로전서4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오늘 본문 다시 돌아가 봅시다. 오늘 본문에서 말을 조심하라. 이 말씀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못 지킵니다. 지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들어가기 때문에. 내가 들어가면 나의 선택과 내가 한 것을 주워 모아서 그걸 건전한 괜찮은 의미로 조립하는 헛된 짓을 해요. 이 일을 하는데 누가 협조했을까와 누가 반대했을까를 자기 기준의 입장에서 생각해 버려요.
그 노리는 게 뭐냐 하면 이 야고보서3장1절부터 10절 자기가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걸 왜 지키려고 하는가, 그건 <피에타>에 나오는 남자주인공과 똑같은 거예요. 나 안 죽었다는 거예요. 나 가치 있다는 거예요.
아까 강의 다시 해봅시다. 인간이 선택하고 조합하게 되면 거기서 뭐가 생긴다고 했습니까? 의미가 생기지요. 그 의미는 내 선택에서 나왔기 때문에 나의 존재의미가 되는 겁니다. 그것 가지고 남들한테 나는 이 정도다. 하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하지요. 이건 죽을 때까지 안 변합니다. 고칠 생각하지 마세요. 고칠 이유가 없어요. 그 자체가 우리가 받을 벌이에요. 산다는 자체가 벌 받는 겁니다. 산다는 그 자체가.
살면서 그 생각해놓고 웃었다가 또 그것 때문에 안 돼서 또 우세요. 맨날 웃었다가 울다가. 웃었다가 울다가. 미쳐도 이런 미친 게 없지요. 그렇게 미치게 되는 것이 아담 몸을 띤 벌 받는 겁니다. 벌 받아도 신나게 받아야 되고 알고 받아야 돼요. 즐겁게 받아야 되고 기쁘게 받아야 돼요. 좀 뻔뻔스럽게 받아야 됩니다. 벌을 받을 때.
내가 하는 짓이 이게 뭐 별거 있어. 처음부터 자기를 치매환자로 아예 간주하세요. 나는 아무 쓸모없어요. 아무 쓸모없습니다. 어디에 쓸모 있느냐 하면 “니는 인간도 아니야!” 를 티내는데 쓸모 있어요. 아무리 말씀보다도 설악산 놀러가는 게 더 재미있어요. 그게 막 가슴 두근두근해요. 그렇지요?
이 말씀은 우리가 못 지킵니다. 못 지키는 존재보고 우리보고 귀 잡아 당겨가지고 이 말씀 보게 하시는 거예요. 이리 와! 이리 와! 잡아당기는 거예요. 보면 이 전체가 뭐냐 하면 나에 대한 심판이에요. 우리는 못 지키는데, 특히 입에 재갈을 물리라, 이리 해버리면 못 지키는 이유가 나와요. 입에 재갈을 채우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재갈 채워라. 할 때 ①번 재갈 채운 상태와 못 채운 상태를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결정한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철없는 짓이에요.
2018년도 7월달에 나는 재갈 먹였다. 그런데 내년되면 2019년도 7월달에 그건 재갈을 먹인 게 아니고 그건 내가 너무나 철딱서니 없어서 일방적으로 내 옹호한다고 그런 결론을 내렸구나! 하는 것을 내년되면 알아요. 그러니까 항상 어떤 상황이 되게 되도 인간은 자기 잘남을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자꾸 도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체는 죽을 때까지 안 죽어요.
안 죽기 때문에 내가 있다는 것이 내 인생에 대해서 짐이 되는 겁니다. 내가 있다는 것이. 요번에 월드컵 결승전에 올라간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까?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옆의 작은 나라 인구가 5백만명 밖에 안돼요. 작은 나라에요. 무지 무지 못사는 나라에요. 유럽에서 최저로 못사는 나라입니다. 못 사니까 공만 차는 거지. 다른 거 할 게 없으니 공차가지고 이태리나 유럽이나 집안을 일으키는 일이 되지요. 브라질도 마찬가지고. 남미도 그렇고. 못 살기 때문에 공만 차는 거예요. 공은 별로 안 비싸니까.
만약에 그 나라 국민이 됐다고 생각해 봅시다. 얼마나 신나겠어요. 그렇지요. 그것처럼 인간은 자기 소속을 못 버립니다. 항상 우리나라 잘 되어야 돼요. 크로아티아 잘 되면 안 돼. 이게 타고난 본성이에요. 그러니까 인간의 의미라는 것이 자기중심이거든요. 자기중심에게 뭘 구한다? 협조자 구하지요.
만약에 내가 경상도 사람 같으면 군에 있는데 후배가 경상도 사람이 나왔다. 오! 같은 경상도. 어디? 대구! 갑자기 그만 건빵 더 주고 잘해주는 거예요. 왜? 협조자라 하는 판단을 내가 대구라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미 협조자가 정해져 있어요. 그런데 전라도가 들어왔다. 죽이는 기에요. 이건. 우리 군에 있을 때 이야기에요. 지금은 그런 거 없지만. 전라도? 전라도 요거, 요거. 이 깍쟁이들 이 인간 만들어야 되겠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서울깍쟁이들이 들어와 가지고 밟으려했는데 교회를 나가. 자, 보세요.
내가 판단한 선택에서 변수들이 여기서 취하게 되면 그 변수가지고 경중을 논하게 됩니다. 경중을 논하게 되지요. 회사에서 어떤 상무를 냈는데 상무를 누구한테 몰아줄꼬 했는데 대학 동문이라. 아시아나 이야기에요. 그러면 그 쪽에서 상무를 다 몰아주지요. 수십억의 이익이 가도록. 모든 인간은 인맥과 혈맥으로 모든 걸 하게 돼있어요. 그런 조건이 우선이고요.
이렇게 되면 협조자가 되지요. 협조자가 되게 되면 나한테 의미가 되는 동시에 저쪽에도 나에 대한 의미가 됩니다. 상호 의미가 되게 되면 에너지가 여기서 갑자기 증강돼요. 내 세력이 커집니다. 잘사는 사람은 계속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못사는 이유가 바로 협조자들이 많이 달려들기 때문에 그래요.
잠언서에 나와 있지요. 부자는 친구가 많다고. 가난한 사람은 매일 짜는 소리해가지고 있는 친구도 다 떠나버립니다. 동창회 와가지고 좀 산다 싶으면 막 와요. 집 좀 있다 하면 특히 우리나이에 무슨 동창들이 많으냐 하면 공인중개사가 많거든요. 찾아와요. 3채있는데 1채는 팔고..., 그런데 와가지고 동생이 와가지고 술 먹고 와서 질질 짤 거 같으면 그 다음부터는 그 이야기를 따돌려버립니다. 빼먹을 게 없으니까.
주님은 뭐냐 하면 빼먹을 게 없어요. 우리가 기피하고 기피하는 그쪽에 있어요. 주님께서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못 알아들어요. 왜? 대적자 이야기는 우리가 안 들어요. 지금 돈이 중요하지 예수님의 복음 안 좋아하잖아요. 돈으로 기뻐하고 돈으로 다행스럽다. 백으로 청와대 아는 사람이 있어 다행스럽다 싶지 예수님 십자가가지고 아휴~~ 가슴 쓸어내면서 다행이다! 이건 미친 인간이에요. 미친 짓이지요. 어느 인간도 예수님 십자가가지고 “아~ 주여, 이제 종을 편안히 놓아주시는군요.” 이런 인간 없습니다.
없는데 있어요. 그게 기적이지요. 그게 주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자기 택한 백성만 하는 거예요. 그게 3장1절에 내 형제들아! 내 형제라는 말은 선택된 그 자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 자들에게 요 3장1절12절 그대로 거기다 박아버려요. 지키는 게 아닙니다. 박아버리면 그 사람은 뭐냐, 움직이는 야고보서3장이 되는 겁니다.
3장이 되어버리면 자기가 지킨 게 아니고 내 안에서 주께서 “그 기준 말고, 이 기준이야! 아니, 그거 아니야. 이거야!” 라는 사태를 유발시킵니다. 그러면 그걸 보고 “다행이다!” 왜냐, 못 지켰으니까 다행인 거예요.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다행인 거예요. 안 지켜도 천당 가니까 다행인 겁니다. 고맙고 감사하지요.
모든 일에 고맙고 감사함을 지울 수 있는 사태는 더 이상 성도한테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태도 꼭 일어나야 될 사태인데 그 때는 모르지만, 야고보서3장을 보는 순간 3장과 관련시켜보면 ‘아~ 이 때가 야고보서3장이 적용되는 그때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 10절에 한 번 봅시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라고 할 때, 그러면 샘은 바로 성도를 이야기하고 성도를 통해서 뭐가 나온다? 착한 말이 나온다? 욕이 안 나온다. 그게 아니고 성도를 통해서 뭐가 나온다? 주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다행이다 라는 복음이 나와 버려요.
복음은 십자가 안다가 복음이 아닙니다. 십자가와 내가 결부되어서 나와야 복음이에요. 그럼 십자가 주님이 하셨다. 가 아니라 내가 결부됐을 때 나는 지옥가야 되는데 다행이다! 가 되어버려요. 그 대단함과 그 유들 유들함과 뻔뻔스러움 도대체 그런 용기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가 준해서 굉장히 놀라지요.
단물과 쓴물을 내겠느냐, 그럴 수 없지요. 성도한테는 뭐만 나온다? 단물만 나오지요. 왜? 내가 하는 것은 다 쓴물이기 때문에. 뭘 해도. 주님을 찬양해도 쓴 물이에요. 찬양을 하나 유행가를 부르나 다 쓴 물이지요.
12절에 봅시다.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내겠느냐. 날 수가 없지요. 그러면 우리는 뭐하면 돼요? “주께서 하셨습니다.” 아휴~ 다행이다. 내가 절대로 못한 거 주께서는 다 못했다는 것을 앞장세워서 다 했다함을 알리기 위해서 이 땅에서 계속 안 죽이고 온 동네 다 가게 만들어요.
교회도 나가게 만들고, 절에도 가게 만들고, 설악산에도 가게 만들고, 온 동네에 뭘 해도 양심의 가책이라 하는 것은 사치에 불과하고 그런 것은 내가 생각하지 말아야 될 거예요. 주님께서는 양심의 가책을 논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이야기하라 하지 니 썩어빠진 양심가지고 뭐 할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양심도 주께 던지라고 했지요. 지가 쥐고 있지 말고. 양심의 내용은 주의 말씀으로 채울 겁니다. 포도나무를 내겠느냐, 그럼 우리는 뭐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지. 니가 내 말 알아 듣는구나!”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의 성령을 받는 적도 없고 믿은 적도 없으면서 가짜로 믿으면서 요걸 그대로 흉내 내요. “주여, 찬양하겠나이다.” 이렇게 나온다고요. “몇 분 동안?” “제가 입이 아파서 2시간은 못하고 1시간 반은 용납해주세요.” 이 짓하고 있다고요. 오늘도 찬양했으니까 애 성적 오르겠지. 뭐 이런 식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유지시켜 주신 것에 대해서 다행이라 여기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고 지금도 아무것도 아니고 죽기 직전까지 아무것도 아닌 자를 주께서 빈자리에 주의 말씀으로 채워서 주의 이름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삼아주셨사오니 참 뻔뻔스럽지만 주님만 자랑하고 감사하는 다행스러운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