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80413a약2장8절(저승사자)-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2장8절부터 봅시다. 8절 읽어봅니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라고 되어있지요. 현재 성경이 우리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가 보기에는 사람밖에 없잖아요. 사람밖에 없으면 이 세상이 움직이는 법이라 하는 것은 누구하고만 의논하면 되느냐 하면 사람 대 사람으로 의논하면 돼요. 그럼 서로 존중하게 되니까.
그런데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 인간이 만든 법외에 다른 법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 라는 생각이 들 수가 있어요. 이 세상은 사람들이 만든 세상이니까. 사람들끼리 친하게 지내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면 그게 만사 오케이가 되겠지요.
그런데 거기에 율법이 개입됐다. 이러면 이건 인간들이 만든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인간들의 세계가 아니고 누구한테 간섭받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율법이라는 게. 우리끼리 좋게 지내면 만사가 좋다는 게 통한다? 안 통한다? 이게 안 통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율법의 간섭이니까 일종의 율법의 투입이지요.
교회 안 나오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이런 중요한 말을 해요. 뭐냐 하면 나는 교회가기 싫어. 왜? 하나님께 간섭받기 싫어서.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그러면 교회 가는 사람은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좋게 지내면 만사가 괜찮다가 아니라 그것보다 우선적으로 누구의 간섭 하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 겁니까? 하나님의 간섭 하에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것이 야고보에서는 하나님의 법, 여기 최고의 법이지요. 율법이라 봅시다. 하나의 율법의 투입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의 투입이니까 율법의 여러 가지 조항들이 한 두 개가 아니고 많잖아요. 그런데 율법의 최고의 법이라 했거든요. 여기에. 최고 법이니까 많은 법들이 있는데 그걸 종합해서 최고의 법을 야고보서는 뭐냐 하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그 법이라 되어있지요. 8절에 보면.
자,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하는 최고의 법이라 하는 것은 나머지 여타의 법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이 사랑에서 전부 다 파생된 법이지요. 그러면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인간들끼리 살잖아요. 인간들끼리 친하게 지내면 된다 이 말이지요. 이게 불교 신자든 아니면 교회를 안다니든 관계없이 이 세상에 사람뿐이라면 “그래, 니 종교 니가 알아서 믿고, 내 종교는 내가 알아서 믿을게.” 또는 “니 하는 행동대로 하고 나는 나 하는 대로 할게.” 이러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러면 종교도 하나의 취미가 되니까 이건 해도 되고, 안 해도 뭐 상관없고 그리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율법이 투입됐다 해 버리면, 이 모든 인간들이 놀겠다는 이것을 투입한다는 것은 그냥 투입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인간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는 거죠. 인간들끼리 하는 거. 율법의 투입은. 제 하는 말을 이해하시겠지요.
세상이라는 것은 인간들끼리 놀이마당이잖아요. 노는 마당이거든요. 세상이라는 것은. 여기에 율법이 투입됐잖아요. 그러면 인간들끼리 그냥 놀 때까지 놀면 이게 옳다. 그르다. 이게 잘못됐다 이 말이지요.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희들끼리 마음 맞추면 OK. 그게 OK.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율법이니까 이게 법이잖아요. 법을 안 지키게 된다면, 누가 이렇게 투입할 때, 이게 법이 투입할 때, 우리는 에이~ 무시해 버리면 되는데. 법이라는 것이 투입되게 되면 여기서 무엇이 되느냐 하면 벌칙이 주어져요. 벌칙이. 심판이 주어진다 이 말이지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고 있는데 어떤 상인이 들어와 가지고 물건사세요. 라고 들어왔다. 우리는 바쁜데 안삽니다. 하고 밀어내잖아요. 외부의 투입이니까 밀어낼 수 있다 말이지요. 그러면 그 사람이 가면서 너희들 저주받을 것이라. 하면 우리는 놀랩니까? 아이고, 큰일 났다. 저 물건을 살 걸. 안사가지고 저주 받을 걸. 이럽니까? 아니지요.
아닌데, 율법의 투입도 그러냐 말이지요. 반드시 벌칙이 주어지는 거예요. 율법의 법칙이. 그런데 야고보서의 뒤에 보면 뭐냐 하면 여기 10절에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중에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 했지요. 자, 이 최고법이 없을 경우에 그냥 법과 법들만 있으면 열개가 있다 칩시다. 아홉개는 지켰는데 하나는 못 지켰어요. 그러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홉개 지켜봐야 소용없다는 거예요. 다 못 지켰으니까 벌칙은 그대로 유효하다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어긴 게 아니고 다 어긴 것이라 했거든요.
우리는 양적으로 아홉 개 지키고 하나 어기게 되면 그래도 90% 지킨 것이 된 것이기 때문에 100점 만점에 90점이 되는데 율법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다 빵점이, 0점이 된다는 거예요. 그건 왜냐하면 전부 다 최고 법. 최고법과 연관되어있기 때문에 거미줄처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오늘 아주 쉽게 가겠습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인간들끼리는 좋으면 그만이에요. 좋으면 그만인데, 율법이 투입됐다는 것은 이건 인간들끼리 좋게 하는 것이 이게 세상사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야고보는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율법의 투입이라 하는 것은 그냥 잔소리하는 것 같으면 무시하면 되는데 뒤에 뭐가 주어졌다? 벌칙이 주어진 거예요. 심판이 주어졌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심판이 주어졌으니까 우리는 거침없이 지켜보려고 하잖아요. 지켜보는데 열 개 중에서 아홉 개는 지켰는데 한 가지는 못 지켰을 때는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율법에서는 다 어긴 것이 된다는 겁니다.
이제는 할 겁니다. 그 원리를 찾아야 돼요. 어떻게 해서 열 개중에서 아홉 개를 지켜서 했는데도 불구하고 무효화되는 이유가 뭐냐, 그 원칙은 제가 설명했습니다. 이게 최고 법에서 파생돼서 연결됐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최고 법이 뭡니까? 이웃을 내 몸같이 그 다음이 뭐라고요? 사랑이 온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로마서13장8,9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다 들어있다. 이리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박스 자체가, 상자 자체가 사랑이라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어긴 것이다? 지킨 것이다? 사랑을 하게 되면 어긴 것이다? 지킨 것이다? 지킨 것이다. 그러면 이야기합니다. 나는 간음 안했다. 살인은 안했다. 그런데 사랑은 못하겠다. 하면 어긴 것이다? 다 지킨 것이다? 다 어긴 것이 돼요.
야고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랑을 이야기했기 때문이에요. 그 사랑이라 하는 것은 율법으로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해서 추가적으로 율법 따라서 주어진 거예요. 최고 법을 주님이 지킨 거예요. 주님이 지켜서 우리에게 사랑이란 박스 안에 넣어주니까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온전하게 지킬 수 없는 율법을 다 이룬 그 사랑 안에서 이룬 사랑으로서 간주를 해준다는 거예요. 아~ 놀랍지요.
자, 이런 사랑가지고 사도바울에서는 이걸 가지고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4자로 하면 기쁜 소식 이지요. 기쁜 소식. 그 다음의 문제는 뭐냐 하면 이 사랑과 이 기쁜 소식을 누구한테 주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하겠지요. 누구한테 주느냐. 우리는 나에게 오기를 기대합니다. 나에게. 나에게 오기를 기대하는데, 나에게 오지를 않아요. 나에게 오면 참 좋겠는데 나에게 오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립니다. 우리가 여기서 그래도 지난 번 하고 또 두 번째 하기 때문에 이제는 지난 번에 서툴던 게 이젠 조용히 조신스럽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난번에는 그것도 모르고 고함질렀어요. 세상의 나는 내 중심으로 삽니다. 이게 타고났어요. ‘나는 내 중심으로 산다.’ 어린애들 보면 잘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부부가 있는데 아내가 심심해서 남편보고 놀아 달라 했습니다. 그러면 한 30분 놀아줬어요. 그 다음에 자기 남편 할 일 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30분 시간 빼줬으니 고맙게 여기지요.
그런데 어린 애들은 30분 놀아줘도 그새 30분 후에 딴 형이라든지 딴 동생이나 돌보면 화냅니다. 30분이나 놀아줬는데. 엄마 화장실에 가야 되고 엄마 점심식사 해야 되는데 그새 그걸 못 참아서 또 와요. 애들이 막 따라오거든요. 도대체 그 아기의 욕망을 어떻게 다 충족시킬 수 있을까요. 못 충족시키지요. 그걸 봐서도 애들은 태어날 때부터 죄 가운데 태어나는 거예요.
왜 인간이 율법을 투입할 때, 인간과 인간끼리 하게 될 때 자기가 괜찮은 인간이지만, 율법 앞에서 왜 인간은 율법을 못 지키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느냐 하면 타고난 근성이 자기밖에 모르는 근성이에요. 나는 내 중심으로 사는데, 우리가 아는 하나님의 율법은 세상은 누구 중심이냐 하면 하나님 중심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복음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움직입니다. 같을 리가 있습니까? 같을 리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세상은 내 중심으로 산다 말이지요. ‘우리 애는 왜 세월호에 빠져죽었습니까? 다른 애는 멀쩡한데.’ 이런 생각을 빠져 죽은 부모는 하겠지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니 애는 안 빠지고 다른 애는 빠지면 니는 기분 좋아할 이유가 뭐냐?” 라고 물을 때 인간으로서는 답변이 없어요. “다른 애는 다쳐도 우리 애는 안 다치면 우리는 고맙고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할 때 주님께서 물으시기를 “왜 다른 애는 다쳐도 괜찮은데 왜 니 애는 안 다쳐야 돼? 왜 니 애이기 때문에 안 다쳐야 되는지 이유를 나한테 제시해 보라.”고 하면 집사님은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내 애니까 무조건 안 된다는 거예요. 무조건. 무조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렇지요?
그냥 우리가 아는 교회 다니는 상식은 뭐냐 하면 세상은 내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 복음 중심이잖아요. 뭔가 우리가 잘못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뭔가 같을 리가 있습니까? 없지요. 뭔가 잘못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복음이 나에게 온다는 우기고 있는 이 심보는 잘못 된 거 아니에요? 그렇지요? 왜냐하면 처음 바닥 자체가 바탕 자체가 내게 문제가 있어요. 내게 문제가 있다고요.
내게 문제가 있는데, 주께서 사랑으로 구원한다 하니까 그 사랑 저한테 주세요. 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기존에 문제 있는, 기존에 나한테 문제 있음이 계속해서 뭔가 그 문제를 수정할 생각을 안 하고 그 고집대로 우기면서 천국까지 골인하려는 욕심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욕심으로. 나만 구원 받으면 된다는 거예요. 나만.
그러면 아까 한 최고 법을 해 봅시다. 네가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라. 이게 최고의 법이잖아요. 네가 이웃 사랑하기를 할 때 이 내 몸이 이미 태어날 때부터 자기중심이에요. 자기 문제점이 있어요. 작은 법을 우리가 왜 못 지키느냐 하면, 큰 법을 우리가 못 지키기 때문에 저절로 우리는 작은 법도 그 파생된 법도 지킬 수가 없습니다.
내 생각을 안 하고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그러한 본질이 우리한테는 아예 없어요. 반드시 뭔가 해주면 그 대가를 바라게 되어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자기중심이지요. 방금 제가 한 말이 틀린 게 아니고 맞는 말이라는 게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최고 법을 지키려고 오신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습니까? 환영받았어요? 천대받았어요? 천대받지요. 그냥 천대 받는 것이 아니고 너 같은 인간은 우리 사회에서 죽어 없어져야 돼! 하고 죽여 버렸잖아요. 많은 사람이 거기에 찬동했고 제자들은 도망쳤지요.
왜 도망칩니까? 스승을 보호하지 않고 왜 도망칩니까? 스승보다 누가 더 중요하다? 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당연히 도망쳤지요. 그렇지요. 제가 지금 틀린 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성도가 된다는 것은요, 성도라 하는 것은 교회 나온다고 성도 되는 게 아닙니다. 교회 나온다고 성도가 아니고 성도는 죄인 + 뭐가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돼요. 그래야 성도됩니다. 죄인 + 성령.
물론 성령은 우리를 인간이 아닌 죄인으로 만들겠지요. 그게 성도잖아요. 그러면 성도는 뭐가 있다? 보통 사람은 성령이 없지만, 성도에게는 성령이 있지요. 그러면 이 성령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했잖아요. 예수님이 부활할 때, 제자들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예수님의 부활을 자기 손으로 원할 때 언제든지 예수님의 부활을 볼 수 있습니까? 못 봅니까? 예수님 한 번 찾아가볼까? 아이고, 여기 계시네.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없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께서 나타나줘야 눈으로 볼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못 보거든요. 그렇지요. 그러면 성령 받으면 이건 뭐냐 하면, ‘저승사자’입니다. 성도는 저승사자에요. 왜냐하면 성령이 있기 때문에. 성령은 부활하고 난 뒤에 받는 거예요. 성령 안 받았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가치 없게 여기고, 생각하고 싶어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예수님께서 부활할 때 아무나 보면 길가다 보면 다 보입니까? 예수님이 보여줄 때만 보이는 거예요. 보여줄 때만 보이지요. 교회 간다고 성도 만나는 게 아니에요.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끼리만 통하게 되어있습니다. 같은 저승사자기 때문에. 오늘 제목이 저승사자에요.
왜 저승사자라고 하느냐 하면, 저승사자의 가치를 세상 사람들은 그 가치를, 성령 없는 사람은 알아볼까요? 못 알아볼까요? 못 알아봐요. 그 가치를. 저승사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세상에 대해서 일말의 미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기 때문에. 죽은 자의 영을 받았잖아요.
다시 할게요. 성령은 어디서 온다?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의 영이 성령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고 있다는 말은 죽어서 살아있지만 사람 눈에는 포착되지 않는 그 분의 영에 의해서 지배받고 있지요. 그렇게 영이 지배한다면 성령이 주도권을 쥐고 있겠어요? 내 고집이 주도권을 쥐고 있겠어요? 성령이 주도권을 쥐고 있지요.
그러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가겠지요. 마치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만 사람을 강제로 몰듯이. 구름기둥 인도하는 대로 가야돼요. 밤에는 불기둥 인도하는 대로 가야 되고. 길이 없기 때문에. 천국 가는 길을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한다 이 말이지요. 인도할 때,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자기하고 똑같은 사람으로 보는 겁니다.
하루 밥 세끼 먹고 잠자고 까불고 다 까불고 좋은 거 다 좋아하고 백화점 옷 신상 나오면 부럽고 애 공부 잘하면 자랑질하고 싶고. 똑 같은데 차이점이 뭐냐 하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그 자기의 본색과 죄인이니까 죄의 본색과 성령의 나타난 십자가하고 늘 대조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증인이거든요. 예수님의 증인됩니다. 그렇지요.
지금까지 어렵습니까? 안 어렵지요. 그래서 성령 받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성경해석은 문자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하겠지요. 성령 안에는 누가 계신가,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다 했습니까? 미움 받고 살았지요. 그러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예수님은 왜 미움을 받아야 하는가, 이 땅에서. 라는 그 점을 보여주는데 성경을 거기다가 동원되는 겁니다. 성경해석이.
자,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 세상은 인간 대 인간끼리 마음 맞추면 괜찮은 인간이라고 봤지요. 인간끼리. 그런데 거기에 누가 투입됐다? 율법이 투입된 거예요. 율법이. 율법은 하나님의 간섭이라 했지요. 그런데 인간이 간섭하면 내치면 되는데 율법이 간섭하게 되면 내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벌칙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심판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 법을 지키면 될 게 아니냐. 하겠지요. 그 법을 지키면 되는데 아무리 지켜봐도 천개중에 999개 지켜봐도 하나를 어기면 다 몽땅 어기는 것이 되는 이유가 뭐냐가 궁금하다 이 말이지요. 어긴다가 했으니까. 그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사랑으로 다가서야 된다는 거죠.
그런데 사랑은 왜 불가능하다 했습니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누구 중심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을 이룰 수가 없어요. 온전한 사랑을. 세상을 살 때 나는 내 중심으로 산다 말이죠. 이것 때문에 사람은 웃고 울고 하잖아요. 사람이 변명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변명한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내 중심인 것을 남한테 어필하는 거잖아요. 그렇지요? 그렇잖아요.
그러면 상대방이 나를 심판하는 심판주입니까? 같은 집안 식구가 심판주에요? 같은 교인들이 나의 심판주입니까? 그들의 영을 받았어요? 누구의 영을 받았어요? 예수님의 영을 받았지요. 그럼 심판주가 누굽니까? 예수님의 영이잖아요. 그럼 우리를 죄인으로 죽은 자로 간주해서 성령을 줘가지고 구원하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무슨 자로 간주한다? 죽은 자로 이미 간주하지요. 이미 죽었다고 보고. 그냥 죽은 게 아니고 이래서 죽었다고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적인 죄를 우리를 평생을 통해서 끌고 다니면서 우리 중심을 까발려 보여 주시겠지요.
그래서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고 했잖아요. 죄인을 부르러 와서 주님의 성령인데, 이 성령이 예수님의 십자가 지고 온 성령이기 때문에 이 성령이 뭐냐 하면 바로 최고 법에 해당되는 곧 사랑의 법이에요. 사랑의 법이에요. 성령이. 사랑을 해주시는 거예요.
우리는 법을 못 지키는데 주님만 법을 지켜서 완성한 그 최고의 상,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최고의 법이 성령 오심을 통해서 우리 속에서 그게 지금 계속해서 실제로 주어지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그러면 아까 저승사자라고 했는데. 저승사자의 특징은 뭐냐 하면, 어느 모임이나 교회에 가서 누구하고 만이 이야기가 통한다? 저승사자는 같은 저승사자와만 이야기가 통하겠지요.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과만 통하겠지요.
그러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무엇을 최고로 여깁니까? 무슨 가치를? 내 중심으로 사는 걸 최고의 가치로 여기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복음 듣는 것, 예수님의 복음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겠습니까? 예수님의 복음이죠. 그런데 반대로 합시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자기중심이지요. 자기중심인데 예수님의 복음은 누구 중심이다? 내 중심은 죄고 예수님 중심이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바로 복음이죠.
그러면 복음을 전하면 그 사람은 도망칩니까? 도망 안칩니까? 성령이 없는 사람은 도망을 치겠지요. 왜냐하면 자기에게 뭐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체면과 위신이 최고 중요하기 때문에. 내 가진 게 최고 중요하기 때문에. 그러면 요한계시록 6장 한 번 봅시다. 요한계시록6장에 뭐라고 되어있던가요? 6장15절~17절,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자, 여기 15절, 16절, 17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 내용이 지금 사람들이 피합니까? 반깁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피하고 있지요.
왜 피합니까? 피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피할 때 각자 자기 토굴, 동굴 속으로 피하지요. 피하는 직업도 다양하지만, 결국은 모든 인간이 다 해당돼요. 그 피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아까 이야기했지만, 나는 계속해서 피하게 되면 “내 중심으로 살겠다.” 에 대한 고집이지요. 나는 내 중심으로 살겠다.
그게 내 중심으로 사는데, 자기들끼리는 안 피합니다. 왜냐하면 니도 니 중심이고, 나도 내 중심이고. 안 피하는데. 주님이 오니까, 주님의 복음 소식이 오니까, 성령이 없으니까, 도망가기 바쁜 거예요. 도망치기 바쁜 거예요. 이것이 지금 예수님 재림할 때 이야기지만, 지금 성령을 받은 저승사자들이 활동하게 되면 저승사자에서 나오는 이 복음으로 인하여 똑같은 현상이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집안 식구가 네 명이 있는데, 성령 받은 사람이 한 명 있다고 칩시다. 나머지 세 명이 살기 힘들어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중심으로 살아요. 우리 율법 빼고, 복음 빼고, 예수 빼고, 십자가 빼고, 빼고 그렇게 살아가자는 겁니다. 교회 나가서 서로 친하게 지내고 서로 자랑질 해주고 서로 위해주고 그렇게 살자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은 교회 나가는 것도 뭐가 됩니까? 여기 보세요. 성령 받았다 하는 것은 뭐 + 한다. 죄지요. 교회 나가는 것도 죄에요. 십일조, 헌금하는 것도 죄입니다. 성경 공부하는 것도 죄에요. 죄 아닌 게 없어요. 뭐냐, 모든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나를 어기면 안 되니까. 이거 십일조 왜 했습니까? 누구 좋아라고? 주님 좋아라고 한 것이 아니고 누구 좋아라고? 나 좋아라고 한 거죠.
만약에 “아이고, 목사님. 일방적으로 그리 이야기하면 안 되지요. 나는 헌금할 때 주님 좋아라고 했습니다.” 라고 분명히 이야기하겠지요. 주님 좋아라고 했으면 주님의 보호 앞에 피해야 돼요? 안 피해야 돼요? 피할 필요 없지요. 내가 주님 좋아라고 한 것도 뭐다? 이것도 죄였습니다. 라고 나오는 사람이 저승사자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헌금을 할 때 주님을 위해서 했습니다. 하는 것을 점점 자기 자신이 중심이 아니고 주님 중심으로 했으면 그야말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했다면 헌금했으니까 내 몫으로 돌아오는 거 기대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기대를 안 하지요. 이만큼 헌금을 했으니까 나는 복 받겠고 나는 착하다 생각하고 나는 구원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안 하지요.
그런데 어떤 인간은 헌금해놓고 거기에 대해서 생색을 내겠어요? 안 내겠어요? 낸다 이 말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보여준 최고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사랑합니다!” 이게 사랑이 아니에요.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느냐 이야기했거든요. 요한복음 15장13절에서 이야기했다 말이죠.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지요. 예수님께서 보여준 율법 완성은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게 아닙니다.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한 사랑이지요. 자기가 죽어버리면 소용없다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것은 모든 것이 무가치하게 된다는 공포감을 줍니다. 내가 아무리 잘돼도 내가 죽어버리면 소용없다. 우리 애가 안산에서 그리 공부를 잘해도 세월호 물에 빠지니까 소용없더라. 이리 이야기하잖아요. 내 자식이 죽었는데 내가 힘들어 죽겠어서 세월호에 빠지고 난 뒤에 내가 술로 보낸다. 이리 하거든요. 자식 죽고 난 뒤에 술사랑 했던 모양이라. 왜 자식이 죽었는데 술로 보냅니까? 남의 자식 죽었다고 술로 안 보내지요. 왜 그렇습니까? 그 죽은 자식이 누구 자식이다? 내 자식이에요.
결국 자식을 사랑한 게 아니고 누굴 사랑한다? 자기는 나를 사랑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세상은 누구 중심으로 돌아갑니까?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잖아요. 뭔가 잘못됐지요. 뭔가. 이 세상 전체가. 그게 저승사자의 눈에만 뜨인다 말이죠. 뜨이는 거예요. 어디 한 군데 고장 난 게 아니에요. 모조리 다 잘못된 거예요. 집사님은 잘못된 동네에 더 살고 싶어요? 빨리 떠나고 싶어요? 빨리 떠나고 싶지요. 그게 저승사자의 마음가짐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마음이 붕 떠있다니까요. 저는 이걸 마음에 붕 떴다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도는 세상을 스캔한다.’ 스캔한다는 것은 위에서 아래를 드론처럼 죽 조망한다. 그냥 훑고 지나간다. 이 말입니다.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죽 훑어보는 것. 성도는 이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돼요. 주욱 훑어가야 돼요.
애가 공부하는 거 전문대학 때려치운다고. 알았어. 죽 스캔하는 거예요. 딸이 가출해서 집에 안 들어온다고. 알았어. 스캔하는 겁니다. 알거든요. 지가 가출하고 지가 때려치운다는 것이 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고. 나를 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율법을 어기게 되면 그건 뭐다? 바로 이 세상에서 예수님한테 심판 받을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성도는 성령 받아서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알고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이야기, 이런 사람이 별로 없지요. 전부 다 서로 칭찬해주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가지고 이런 소리가 이 복음이 안 들리는 쪽으로 도망치고 싶지요. 거기다가 저승사자가 날아와서 이야기를 해버리면 아까 요한계시록처럼 도망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내빼는데 급급한 거예요. 내빼는데 어디로 내빼는가 봤더니 그들이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있어요? 없어요? 아까 요한계시록6장에 보니까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래서 복음 피해서 어디로 가느냐가 궁금해요. 저는. 자, 복음을 피했다. 안 듣겠다고 귀를 막았다. 그러면 어디로 피신했느냐. 어디로 갔느냐는 거예요. 결국 피신한 곳은 숨 터보자고 가는 거예요. 휴~ 어휴~ 살았다. 그곳은 뭐가 안 들리는 곳이다? 복음이 안 들리는 곳이에요. 복음이 안 들리는 곳이 정신적인 안식처가 될 수 있어요? 없어요? 저는 그걸 자신만의 아지트지요. 자기중심만을 챙기는 아지트.
아지트와 비슷한 말이 아파트에요. 아파트의 특징은 빌라 정도가 아니에요. 아파트는 문 닫아 버리면 아무도 간섭할 수 없다는 거예요. 층간 소음 이외에는 아무도 간섭할 것도 없고. 복도에서 담배만 안 피우면 돼요.
자, 사람들을 보세요. 저승사자의 안목을 가지고 보자. 사람들이 퇴근하면 집에 가잖아요. 그들이 피할 곳이냐 말이죠. 집에 가서 TV를 켰다. TV에서 뭐가 나올까요? 세상이야기 나오겠지요. 결국 그들이 피신하는 곳이 뉴스에서 그대로 나온다 말이지요. 그러면 이 세상이 모든 것이 해결해 줄 수 있어요? 자신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습니까? 없지요.
어디 앞에 나와야 됩니까? 사랑 앞에 나와야 되지요. 사랑은 아까 최고의 법의 사랑은 이 세상에 뭐로 등장한다고 했습니까? 친구를 위해서 뭐하면 최고의 사랑? 죽음이에요. 예수님의 죽음 앞에 나와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만 이야기하면 도망쳐요. 만약에 어느 교회에 가서 제가 설교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하면 다 도망가 버립니다. 전부 다 싫어해요. 참 희한하지요. 지금까지 오늘 강의한 것에 대해서는 납득이 안 될 정도입니다.
분명히 아까 사랑 안에서 모든 율법을 이루었다 할 때는 아주 기쁜 소식 이렇게 기쁜 소식이 없습니다. 살인, 강도 어떤 것도 사랑 안에서 다돼요. 그런데 그 사랑 앞에 나온다? 안 나온다? 지금 안 나오고 있어요. 이 사랑이 부담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천국가기를 원했을 때 어떤 자세로 천국 가느냐 하면 내 중심을 유지하면서 어디 가겠다? 천국 가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이 땅에 하나님께서 그냥 하나님만 계시고 이 지상에 인간만 있고 십자가 사건이 없으면 이 말이 맞아요. 이 땅에서 열심히 내 중심으로 살다가 가면 되는데 그 십자가 때문에 이것이 전부 다 지옥이란 사실이 밝혀져요. 지옥이란 사실이. 그렇게 가겠다는 천국은 사실은 천국이 아니고 지옥 가는 사람은 그런 마음을 가지라는 말이죠. 내 것 지키면서 내 착함, 내 신앙 연조, 내가 신앙 열심히 헌신한 것, 교회에 봉사한 것, 헌금, 이런 거 다 열심히 말씀대로 사는 것, 이것 다 지켜서 가겠다는 것은 지옥밖에 갈 곳이 없어요.
자, 그러면 어떻게 해서 오늘 본문에 보면 모든 율법을 지켰거니와 해놓고는 뒤에는 모든 율법을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것이 됐다고 야고보가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냐, 이 율법이라 하는 것이 그러면 어디를 염두에 두고 율법이 주어졌는가를 볼 필요가 있지요. 율법만 주어진 게 아니고 율법을 지키라고 했고, 지키지 못하게 된 그 배경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 배경이 무엇인가를 제가 알려드릴게요. 마태복음16장18절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주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게 됐잖아요. 그런데 그 교회에 위세가 뭐냐 하면 음부의 권세, 지옥의 권세가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이기지 못하지요. 음부란 지옥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의 권세를 언급했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세운 교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어떤 없는 단체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지옥의 권세가 여기에 있는 사람을 뺏어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기존의 모든 인간들은 어디에 지금 사로잡혀있다는 말입니까? 지옥의 권세 안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러면 율법이라 하는 것을 주신 이유가 현재 너희들은 어떤 힘에 사로잡혀 있다는 거죠. 그 힘이 뭡니까?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 힘에 너희들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율법을 주시고 율법의 완성된 모습을 주님이 자신의 십자가로서 이게 사랑이야! 라고 죽음을 보여 준 거예요.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이 알고 그러면 성도가 저승사자처럼 드론처럼 보면서 세상을 스캔하면서 뭐만 보면 돼요? 세상 사람들, 아파트, 아파트 많잖아요. TV 뉴스 보면 시리아가 어떻고, 미국 트럼프가 어떻고, 한국의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이 어떻고, 김기수인지 건강론 이야기하고, 뉴스 보면 나오잖아요. 그 전체를 뭘 보면 돼요? 뭘 스캔하면 돼요? 이 전체가 뭐다? 지옥의 권세지요.
그러면 이 저승사자라 하는 성도가 그냥 날개 타고 하늘만 돌아다니고 밤에만 돌아다닙니까? 지상에 돈 벌어야 될 게 아닙니까? 돈 벌어야 되지요. 여기서 어떤 파출부를 한다. 파출부 한다고 저승사자가 직업을 가져요. 파출부라는 직업을 갖는다 말이죠. 남의 청소를 해줘요. 청소를 해가지고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돈 준다고 갑질이 시작되지요. 갑질이 시작되면 뭘 느껴요? 갑질이 시작되면 저승사자에 대해서 지옥의 권세자들이 지금 갑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 갑질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어른행세, 높은 자 행세하는 거예요.
할 때 여기서 뭘 느끼느냐 하면 수모와 수치를 느낍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성도로 하여금 이건 뭐 오지 말라 해도 느끼게 만들어요. 천국가기 전에 실컷 지옥체험하게 하셔요. 그러면서도 지금 50대 60대 된 겁니다. 연세가. 지옥체험 한다고 팍삭 늙었어요. 저도 마찬가지고. 그들이 예수님이 당했던, 예수님이 하나님이지만 이 땅에서 목수의 아들이잖아요. 하나님이지만.
모세는 시내산에 가서 밥을 안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식사했어요. 그것도 예수님은 수모에요. 인간의 몸을 지냈다는 자체가 주님 앞에는 이게 지옥체험입니다. 무~척 힘든 거예요. 세례요한한테 세례 받을 때 이미 죄 속에 죄란 잉크물속에 들어온 겁니다. 우리야 죄 지었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이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 이야기냐 하면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한쪽 강도가 뭐냐 하면 자기중심이었지요. “예수여, 나를 건져내면 내가 당신 믿어줄게.” 이렇게 나왔지요. 그런데 한쪽 강도는 뭐냐 하면 “우리는 우리 죄를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저 분은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 당했잖아.” 그런 이야기했다 말이죠.
죄도 없으면서 당한 걸 뭐냐 하면 이걸 ‘억울’이라 합니다. 억울. 성령 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 제대해야 돼요. 사실은. 벌써 제대해야 되는데 그 제대는 순서에 맞춰서 주의 뜻대로 제대하실 거고. 군에 제대했는데 또 군대생활 할 때 굉장히 억울한 거예요. 굉장히 억울해요.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할 필요도 없는데 당하는 겁니다. 이게 성도가 가야 될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길이에요.
주님도 당했기 때문에 주님도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통곡하면서 울면서 아버지한테 기도했다 했어요. 너무 힘들어서. 이 땅의 지옥이. 하지만, 감사할 것은 이 지옥이 죽는 순간 떠난다는 겁니다. 지옥생활이 끝나는 지점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늙어가는 것이 좋은 점은 점점 더 제대 날자가 가까이 온다는 겁니다. 제대 날자가. 지금 제일 기분 좋아하시는 것은 이 가운데 제일 연세가 많으신 분이. 죽는 것은 우리 뜻대로 안되니까 문제가 되는데. 새치기할 수가 있어요. 그것도 좀 억울하겠지만.
정말 있고 싶지 않은 곳이에요. 뭐가 있고 싶지 않으냐 하면 주의 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자기중심으로 살면서 자꾸 옳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옳다고. 뭐냐 하면 자기중심으로 하나님, 예수님 복음을 총동원해서 가리고 있어요. 그걸 계속 가리고 있는 거예요.
복음이라 하는 것은 껍데기를 하나씩 벗겨내니까 그 벗겨내는 그것이 차마 견뎌낼 수가 없어가지고 도망치는데 어디로 도망치는가, 아파트로 도망치는 거예요. 기껏 도망치는 게 자기 집으로 도망쳐요. 거기는 일단 복음이 안 들리니까 자기 잘남이 있으니까 편한데, 아까 요한계시록 봤지요. 결국은 당해요. 매도 미리 맞는 게 낫다고요. 더 이상 우리 것을 가릴 수 있는 게, 우리가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돼요. 어디 미국, 캐나다 이민가도 소용없어요. 어떤 분은 미국 캘거리 이민 갔다가 밴쿠버로 이사 간 사람이 있어요. 제가 카톡으로 한 분이 있는데. 고생이지요. 한국 사람이 동양인이 외국 산다는 것은 고역입니다. 고역이에요.
하지만, 이미 청춘을 거기에 바쳤으니까 더 이상 밥 먹고 살아야 되니까 힘들지요. 성도가 아니라면 밥 먹고 사는 게 힘들겠지만, 성령을 받은 성도는 자기 살려고 애쓰면서 힘든 게 아니고 주님한테 주는 눈총 있잖아요. 같은 인간이면 같은 인간답게 살아야지. 이야기하는데 거기서 오는 어떤 오해. 전혀 성령 안 받은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에게 오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지옥 속에서도 못 빠져나오면서도 빠져 나왔다고 우기는 거예요. 빠져 나오면 자기중심이 아니어야 돼요. 그런데 자기중심인데 빠져나왔다. 이건 안 빠져나온 거예요. 물론 순간, 순간 자기중심이지요. 하지만, 성령께서 가만두지를 않으니까. 그게 바로 죄다. 언제까지 피할래? 어디까지 도망칠래?
그래서 우리가 이 야고보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상을 많이 안다고 세상을 많이 아는 게 아니고 최고의 법을 통해서 사랑을 통해서 한꺼번에 팍! 찰칵! 사진 찍듯이 한꺼번에 사람을 찍어버려야 돼요. 찍어버리면 주님의 보시는 안목이 아까 저승사자의 안목이지요. 옛날 저승사자는 시커먼 옷 입고 다녔는데 요새는 뭐 미니 옷 입어도 괜찮아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세상에 성령 받은 사람은 받은 것을 취소가 안 됩니다. 달라고 해서 받은 게 아니거든요. 달라고 해서 받은 게 아니고 이건 달라고 해서 준 것도 아니고 따라서 가져가시라고 해도 안 가져가요. 성령 받은 것은. 그걸 팔자. 그걸 운명. 이런 팔자, 운명입니다.
목자는 자기가 택한 양은 버리지 않는다는 것.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안다. 그 성령 받은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는 것이 중요하지 예수님이 내 것 되는 것은 나는 원치 않음을 온 몸으로 그걸 느끼게 되지요. 내가 주님 것이 돼야 되지 내 잘되라고 예수님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
내 가족, 내 새끼,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잘되라고 내 앞 길이 지옥에서 출세하라고 있는 게 아님을, 주께서 쓰시는 대로 쓰시라는 것. 그런 안목을 가진 것이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180413b약2장8절(저승사자)-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합시다. 첫째시간에 마지막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이리 되어있지요. 지옥의 권세가. 그러면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면 이것은 주님만이 지옥의 권세를 다룰 수가 있어요. 주님만이. 인간은 지옥의 권세를 다룰 수가 없습니다. 이미 파묻혀있기 때문에. 다룰 수 없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없고, 다만 나타날 것은 있어요. 어렵지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내가 나타내는 것은 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내가 나타낸다고 해서 내가 한 게 아니고 내 안에 주님께서 행하신다면 나는 뭔가 나타낼 수가 있는 거예요. 말이 굉장히 어렵지요. 어려울 때는 성경에 나오는 쉬운 예를 들면 됩니다.
1월 15일이 유월절이다. 출애굽기12장13장에 보면 유월절 나오거든요. 하나님의 사자가 피 발린 문설주를 보고 넘어갔는데, 그 때가 낮이 아니고 밤이었어요. 그런데 이 유월절 사건이 있고 난 뒤에 이스라엘 백성한테는 유월절을 지켜야 됩니다. 유월절을 지켜야 되는데 유월절을 지키는데 각각의 소품들이 있어요. 시간적으로서는 뭐냐 하면 밤이어야 되고 낮에는 안 되고요. 밤이어야 되고, 양고기를 먹어야 돼요. 양고기 섭취해야 되고, 그 다음에 뭐가 되느냐 하면 발효되지 않는 빵을 먹어야 되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할례 받은 자만이 이 유월절을 참석할 수 있습니다.
밤이고, 양고기 섭취해야 되고, 발효되지 않는 떡을 먹어야 되고 이걸 무교절이라 해요. 이 떡을 무슨 떡이라 하느냐 하면 고난의 떡이라 합니다. 세 번째는 참석한 사람이 할례를 받아야 돼요. 제가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유월절 1월 15일 보자는 겁니다. 그럼 1월 14일과 16일 밤과 차이점이 뭐냐 하는 겁니다. 맨 그 별이 별이고 달이 달이고 그 차이점이 뭐냐 하는 겁니다. 유월절 참석할 수 있는 애들이 이런 이야기해요. “아버지, 지난밤과 오늘 밤의 차이점이 뭐예요?” 이리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하고 아까 이야기하고 연결시켜 봅시다.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람은 지옥을 통해서 행할 게 있다? 없다? 행할 것은 없다. 그러나 나타내야 될 것은 있다. 이리 했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제가 밤을 이야기하는 것은 잘난 자나 못난 자나 밤은 누구한테나 밤이에요. 공평해요. 어떤 사람은 밤인데 어떤 사람은 낮 되는 거 없습니다. 서울시에 밤이 온다면 모두다 밤입니다.
그걸 지난 수요일날 황사는 사람 가려가면서 오는 게 아니라고 했지요. 황사가 신자, 불신자 가려가면서 옵니까? 불신자는 마스크 안 써도 돼요? 황사가 사람 가려가면서 오는 것이 아니듯이 밤이라는 것이 사람 가려가면서 오는 게 아니지요. 그런데 밤은 인간의 행함으로 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나 어떤 특정 밤에는 성도를 통해서 나타냄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유월절을 통해서 알 수 있지요.
“아버지, 어제 밤과 오늘 밤의 차이점이 뭡니까?” 똑같은 밤인데 똑같은 달뜨고 별 뜨는 밤인데 차이점이 있어요. 이게 나타낸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나라는 존재가 아니라 뭐냐 하면 이게 사건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에게서 내가 하지 않은 나라는 존재가 행하지 않은 주께서 행하신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사건이 바로 벌써 유월절을 통해서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만나고 앉은뱅이가 걷게 됐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 낫는 전문의사가 아니지요. 자기가 예상을 못했어요. 그냥 현장에서 누가계시지요? 주님 계시지요. 아까 첫 째 시간에 저승사자 이야기했고, 주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지요. 주님이 부활하시면 그냥 놉니까? 일하십니까? 부활하고 난 뒤에 가만히 있습니까? 일하십니까? 일하시지요.
택한 백성에게 성령 주잖아요. 성령 주신다는 말은 그 안에서 성령안에서 예수님께서 그 죄인 붙들고 예수님 자신의 증인되도록 성령을 주도적으로 해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일을 하시면 사건화 돼서 나타나는 게 있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성도는 그냥 내가 행했다고 하지를 않는다 말입니다. 베드로 요한이 그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럼 본인은 행함은 뭐예요? 본인의 행함은 가치조차 있다? 없다? 없는 거죠.
자, 그러면 지옥의 권세 봅시다. 모든 인간은 아까 지옥의 권세 있다 했지요. 마태복음 16장18절에 분명히 나와 있지요. 교회만이 주의 권세지, 나머지는 주의 권세 없다. 교회는 뭐냐 하면 주님께서 반석이 되시기 때문에 교회는 움직이는 힘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고 주님이 직접 다스려요. 인간이 세운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인간이 세운 교회는 흔해 빠졌지요.
인간이 세운 교회와 인간이 세우지 않은 교회와의 차이점은 뭐냐, 인간이 세운 교회는 그 교회를 유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주님이 세운 교회는 누가 세웠어요? 주님이 세웠잖아요. 다시 물어볼까요? 주님이 세운 교회 누가 세웠습니까? 주님이 세웠지요. 그러면 교회가 유지되고 없어지고 하는 것은 그건 누구 소관이지요? 주님 소관이지요. 인간이 교회 붙들고 부흥하려고 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인간이 교회를 부순다고 부셔집니까? 안 부셔지지요. 교인이50명되는데 다 나가고 한 명도 없다. 한 명도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 게 아닙니까? 한 명도 없다고 하는 사람. 그 사람이 교회지요. 원래 다 나갔어야 할 교회라 말이지요.
저승사자가 둘이 있다고 저승사자가 아닌 게 아니잖아요. 저승사자가 열둘이 있다고 저승사자가 기분 좋은 게 아니에요. 하나가 있어도 주께서 저승사자를 통해서 일하고 둘이 있어도 일하잖아요. 성령 받은 사람이 숫자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숫자 많다고 더 받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태어날 때 여자 됐잖아요. 그러면 여자 됐는데 여자 열 댓 명이 있어야 여자 됩니까? 아니지요. 이건 내가 원치 않는데 주어진 숙명 같은 거예요. 숙명. 갑자기 숙명여대 생각나네. 숙명 같은 거잖아요. 숙명. 성령이 오시면 내가 원해서 온 게 아니잖아요. 숙명 같은 거잖아요. 성령이 안 왔다 하면 뭐가 숙명입니까? 내가 운명과 숙명을 내가 만들어놔야 돼요.
교회라는 것은 주님의 숙명이고 주님의 숙제란 말이지요. 교인이 나오고 안 나오고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주께서 나가게 하셔서 나가게 했고, 오라해서 온 거예요. 예를 들어서 50명 한꺼번에 와가지고 다음날 60명 나갈 수 있어요. 약간의 혼란스러울 뿐이지 내 저승사자 됨과 교회됨에 아무 지장이 없어요. 주님은 택한 백성을 놓치지 않기 때문에. 목자가 자기 양을 놓친다? 안 놓친다? 안 놓치지요. 그게 믿어집니까? 그게 믿어진다면 내 인생에 대해서 걱정할 이유가 없어요. 망가져도 주의 뜻이에요. 그게. 망가져도.
너무나 우리가 세상을 닮아가기 때문에 내가 기대한 대로 안 되면 우리는 짜증부터 먼저 내잖아요. 남편 몰라 적금 넣었는데 보니까 남편이 사전에 알아가지고 비밀번호 알아가지고 톡 털어먹어가지고 놀음자금으로 다 날렸다. 짜증날까요? 안 날까요? 나지요. 그러면 짜증나니까 해답은 누구한테 물어요? 주님한테 물어야 되겠지요. 성경에 나옵니다. 주님이여, 내 남편이 고자질 다해줘요. 남편이 내 적금을 다 날려서 내가 살아보려고 했는데 놀음해서 다 날렸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겠지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고쳐놓고 도둑놈을 잡고 예수님을 믿고 같이 천당 갈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러면 주님의 답변은 성경 안에서 나오지요. 주님께서 답변하지요. 구원받고 안 받고는 니 소관도 아닌데 니가 왜 나한테 구원받아야 된다고 고집하는 성경적 근거 대봐라. 이리 나오지요. 먼저 그것부터 잘못되었지요. 그 아내는. 그리고 아까 니 기도할 때 적금 타가지고 밥 먹고 살려고 했는데 남편이 그걸 날렸다 했잖아요. 주님께서는 뭐라고 합니까? 누구든지 생명은 자기의 소유에 넉넉함에 아니다. 누가복음12장13절, 상속을 형이 다 챙겨서 동생이 억울해가지고 주님에게 찾아오지요. 주님의 답변이 뭐였습니까? 동생편 들었어요 ? 동생편 안 들었습니까? 안 들었지요.
억울하게 왔는데 그게 억울한 거냐. 생명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나오지요. 누가복음12장 15절,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주의 응답입니다. 맞지요.
주님이 또 남편이 털어먹은 억울한 아내한테 이야기합니다. 니가 방금 살려고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는 것은 주님 소관이에요? 인간 소관입니까? 죽고 사는 게. 그건 마태복음 10장에 나와요. 참새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주의 뜻이 아니면 안 떨어지지요. 그리고 그 아주머니가 모르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그동안 살아온 것이 자기가 악발이해서 살아온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어요. 참새 키우고 들풀 키웠습니다.
그래서 제가 수요일날 그런 말 했지요. 사람이 은혜 주게 되면 더 큰 은혜 달라고 하는 게 문제라고요. 은혜주면 고마울 줄 알아야 되는데 더 큰 걸 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만약에 그 아주머니가 정말 성도라면 본인 잘못을 일깨우기 위해서 남편으로 하여금 적금 다 깨가지고 놀음으로 다 날린 거예요. 그리고 그 남편하고는 이혼해야 돼요. 또 이혼하기는 싫어. 사회에서 이혼녀는 안 좋게 보기 때문에. 앞으로 내가 우이 사느냐 하는데. 남편 구슬려가지고 월급 빼먹어가지고 지는 놀고 남편은 돈 벌고 그런 계산도 서있다니까요.
제가 이런 이야기하니까 도망가는가, 성경대로 에요. 성경대로.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이게 제가 틀린 말 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의 길을 누가 막습니까? 내가 막아요. 내가. 남이 막는 게 아니에요. 놀음쟁이 남편이 막는 게 아니고 내가 내 길을 막는 거예요. 이렇게 복음을 이야기해도 안 들으려고 해요. 뭐 안 듣는 것도 제 이론에 의하면 누구 뜻이다? 주께서 허락하신 거죠. 지옥 실컷 체험하라고 그렇게 하신 거예요.
다시 해봅시다. 밤이 왔을 때 그 자식들이 이야기해요. “오늘 밤과 지난밤과 차이점이 뭡니까?” 그런 이야기가 유월절에 보통 하는데. 성경에도 이렇게 되어있어요. “아버지여, 이 소품들이 무엇입니까?” 묻는 대목이 나와요. 유월절 할 때 성경에 보면 나와요. 이 예식이 무슨 뜻입니까? 할 때 자식들이 보기에 이게 뭐냐 하면 특이하다는 겁니다. 특이하다.
자, 특이하다는 말은 보편적이 아니다 라는 뜻이지요. 흔하고 흔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좀 이상하고 특별나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아까 첫째시간에 한 것처럼 인간은 어디에 있다? 지옥의 권세 안에 있지요. 지옥의 권세 안에서 인간들은 자기들끼리 좋은 법문 만들면 돼요. 자기들끼리. 서로 위해주고 서로 다독거려주고. 초코파이 하나 건네주고, 정주고. 이사 왔다고 떡 해주고 사람 사는 재미 그거잖아. 그거 외에 뭐가 있어. 친하게 지내고 정답게 지내고 서로 칭찬하고 서로 위해주고, 그렇게 살고 예수 믿었으니까 죽으면 천당 가면 된다. 이게 인간들의 생각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여기에 뭘 집어넣었다 했습니까? 오늘 몇 번째 했는가 모르겠다마는. 율법이 개입되지요. 율법은 못 지킨다. 돼있지요. 최고법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인데 그 사랑의 모습은 무슨 모습이다? 죽음의 모습. 다 죽었다는 거예요. 죽음이 사랑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 속에 소스를 부은 거예요. 소스를. 카레 소스를 붇듯이. 이미 인간은 죽은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나는 십자가에 죽었으니 모든 인간은 죽은 것이라. 했습니다.
자, 그러면 제가 무슨 이야기하려고 하느냐 하면 특이하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은 똑같은 것의 반복이에요. 일상에서는. 왜? 지옥의 권세에서는 시간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특이성, 낮과 밤이 있지요. 계속 같은 밤이 주어집니다. 저녁에 퇴근해서 씻고 자는 밤 하다가 특이한 밤이 있어요. 이게 무슨 밤이라 했습니까? 유월절 밤이지요. 유월절 밤에서 나온 민족이 있어요. 그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밤에 태어난 민족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야곱이고 야곱이 이스라엘 된 것이 바로 낮이 아니고 밤의 천사와 만났기 때문에. 창세기32장에 나오지요.
일상의 시간에서 특이한 시간의 밤이니까 이 밤이 갑자기 도약해 버린 거예요. 기존의 시간이 아니고 특이한 시간, 밤. 이 시간은 흐르지 않아요. 흐르지 않는다는 말은 이 시간은 반복이 된다고요. 유월절이라 하는 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잖아요. 그런데 이건 뭐냐 하면 유월절이 신약에 들어가면 유월절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의 반복이 여기서 침투하게 되면 이 바탕은 인간의 존재가 되고 특이한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바로 특이성이다 말이지요. 특이성. 사건.
로또 당첨되는 게 특이한 게 아니에요. 뭐냐 하면 내 행함과 별개로 뭔가 나로 인하여 특이한 것이 나타날 때 행함은 X고, 나타냄은 O표라 했잖아요. 기억나십니까? 인간은 자기가 행한 것은 인정받지 않아도 성도는 뭔가 나타나는 게 있다. 그게 뭐냐 성령께서 죄인을 통해서 뭘 증거 하느냐 하면 지금 이미 니가 부활의 세계 그리고 성령의 처소 안에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임을 알려주고 확인해주고 드러내는 사건이 성령을 통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게 남들 보기에는 굉장히 특이하게 보이는 거예요.
인간들은 자기 행함과 행함의 연속이에요. 그런데 성도는 사건과 사건의 연발로 되어있습니다. 자, 그 특이한 거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눅가복음7장36절~38절입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이게 예수님 사전에 이게 조율된 거예요? 아니면 돌발사태 입니까? 돌발사태지요. 이게 바리새인한테 허락 맞고 한 거예요? 지금 초청자가 바리새인이지요. 그럼 이 여자는 바리새인이 초청한 여자에요? 초청 안한 여자에요? 초청 안한 여자에요. 불청객이지요.
갑자기 들어와서 예수님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갑자기 들어와서 예수님 앞에 갑자기 뭘 하느냐 하면 울면서 눈물로 향수병을 깨고 적시면서 머리털로 씻고 주님 발에 향수를 붓는다 이 말 아닙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전적인 항복을 의미하거든요. 전적인 항복. 주의 뜻대로 처분해 주소서. 내 인생은 내가 처분하지 않겠습니다. 하는 고백이에요. 내 인생을 내가 행함으로 다루지 않겠습니다. 죽이든 살리든 밟든 주님 마음대로 해주세요. 나는 내 나름대로의 인생을 저는 포기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47절을 한 번 보세요.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여기 사랑이란 이야기가 나오지요. 예수님은 그 여자의 돌발사태 특이한 사건을 뭐로 여겼느냐 하면 그 여인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예수님이 존재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발생된 사건이지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 여자가 예수님께 수용하는 그 현장은 여자하고 예수님만 있는 현장이 아니고 누가 있어요? 바리새인이 함께 있지요. 오늘 강의에서 중요한 대목이 왔습니다. 사랑이란 것이 단둘이 있을 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것이 저쪽 지옥의 권세가 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고 사람들을 왜 지옥에서 못 빠져나오느냐를 들추어내는 용도로 주님의 자신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냥 니 사랑한다. 우리 사랑하자. 이게 아니라 그들 보는 앞에서 그들이 아무리 행했다. 행했다. 착하다. 착하다. 의롭다. 의롭다. 해도 할 수 없는 그 것.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 인생을 예수님 앞에 전적으로 모든 것을 손들고 포기시키는 거예요. 자기 인생을 날려 보내는 거예요. 향수 안에는 자기 모든 인생이 다 들어있어요. 그 여자의 향수 안에는. 운다는 것은 그게 빠져나오는 순간입니다. 나는 이만큼이다. 하는 그 게이지 수치가. 쫙 빠져나오는 거예요. 사료탑에서 사료가 밑에 구멍에서 빠져나오면 수위가 죽 내려가지요. 그것처럼 몽땅 다 빠지는 거예요.
투석도 그런 투석이 없어요. 자기 속에 있는 자기 사랑, 자기 자신의 기대감, 자기가 자기의 인생의 목적이 되는 이것이 완전히 빠져나온 겁니다. 사이다 열고 사이다 다 뽑아내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자랑하지 않고 울면서 했다는 말은 이걸 다 붓는다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 받은 사랑에 비하면 내 모든 걸 소모한다 할지라도 어찌 주님의 사랑을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뜻이에요.
이렇게 하니까 39절에 봅시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했는데, 바리새인이 초청한 집에서 여인이 이런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강조한 이유는 예수님은 이 여인을 사랑했다. 구원했다. 가 그것만이 목적이 아니고 왜 이 세상은 지옥의 권세 아래에 있는가,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지옥의 권세의 대변자가 있어야겠지요. 대변자. 이게 지옥의 권세다. 하고 대변하는 대변자로서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바리새인이 등장한 거예요. 바리새인의 사고방식 그것이 바로 지옥의 대변인이 되는 겁니다. 악마가 갖고 있는 마음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악마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룬다는 걸 알지요. 악마는 뭐든지 다 다뤄요. 하나님의 말씀을 앞장세웁니다. 특히 바리새인은 어떤 철학을 갖고 있느냐 하면 말씀을 듣기만하면 안되고 그걸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사상이 바리새인의 사상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바리새인의 말만 듣지 말고 그걸 그대로 행동에 옮겨라. 하는 말이 있지요. 저희들은 말뿐이지만, 너희들은 행동에 옮겨라. 하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신 적이 있어요.
자, 여자가 똑같은 사건이 일어난 건데 그 사건에 대해서 예수님이 보는 관점하고 이 바리새인의 관점이 왜 이리 다룰까요? 그것은 바리새인은 그 여자에 대해서 여자의 행함을 뭐로 해석하느냐 하면 평소에 바리새인 본인이 행했던 것과 같은 취지에서 행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인간은 똑같으니까. 내가 어떤 행동할 때는 무엇을 노리고 행동하는데, 저 여자도 아마 뭘 노리고 행동했을 거야. 하고 하는 거예요. 이 행동을 함으로서 추가해서 더 얻을 게 있다고 자기에게 이익이 있다고 여기고 행동에 나선 겁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지금 그 행동은 얻을 것을 챙기는 게 아니고 오히려 있는 것도 버리는 행동이지요. 버리는 행동. 바리새인이 예수님보고 충고를 해요. 뭘 충고하느냐 하면, 저 여자가 얼마나 행실이 더러운 여자로 알았으면 저렇게 더러운 것이 몸에 묻히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바리새인 본인이 예수님을 초청할 때 뭐로 보느냐 하면 선지자로 초청했기 때문에.
선지자의 원조는 바로 모세지요. 신명기18장15절과18절입니다. 15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18절,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그러니까 모세 같은 선지자가 결국은 선지자의 원조가 돼요. 그 다음 나온 것이 바로 엘리야가 나와요. 그래서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에 옵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라 하는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유다나라에서는요,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룬 사람이에요. 뜻대로 살고 뜻대로 이룬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다 사모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모세 같은 선지자에요. 그래서 바리새인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이 율법을 전할 때는 모세의 자리에 앉아요. 이 모세의 자리가 고라신이라는 갈릴리바다 근처에 보면 고라신이라는 마을이 있어요. 그 유적지가 얼마 전에 개발돼가지고 내가 거기 가봤어요. 고라신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 중의 하나가 모세의 자리라는 것이 발굴이 되었어요.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했다는 것이 요한복음에 나오거든요. 그걸 고고학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모세의 자리에 앉은 선지자 같으면 거룩해야 돼요. 거룩은 뭐냐 하면 죄가 묻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주신 것은 깨끗하라고 주신 거예요. 더럽히지 말라고. 그러면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는 더러운 사람과 상종을 안해야 되지요.
그런데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초청하면서 선지자인줄 알았어요. 선지자일 거라고 여겼는데 예수님께서 자기가 생각한 선지자가 전혀 다르고 그 행실 나쁜 더러운 여자를 그냥 발에 씻도록, 그 여자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겠어요. 죄 지은 여자가 자기 머리털로 하는 것을 용납을 하니까 이 사람이 선지자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바리새인이 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한테 이렇게 합니다. 당신을 만진자가 누구였으면 죄인인줄 알았으려니와, 여기에 보면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그 선지자라 하는 것은 그냥 똑똑한 사람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고 진짜 원하고 있는 메시아 같은 사람이었으면 알았으리라,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께서 “시몬아, 내가 니게 말이 있다.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있다. 뭐냐, 선생님 말하소서.” 누가복음7장 41절입니다. 두 사람이 빚진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빚진 이야기를 할 때에 빚이 얼마가 되느냐가 여기서는 전혀 중요하지를 않습니다.
뭐가 중요하냐 하면, 얼마가 됐든 빚을 탕감해주는 그 마음을 부가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있어야 돼요. 한 사람은 탕감해주시는 분, 또 한 사람은 탕감 받는 사람. 요 사이에 성립되는 관계가 뭐냐 하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죠. 이해되시지요.
그런데 한 사람은 뭐냐 하면 빚이 있는 사람이에요. 한 사람은 돈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권리 있는 사람이 자기 권리를 없는 것으로 양도하고 베풀어주는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그게 사랑이란 말이죠.
그러면 사랑은 뭐냐, 심판하셔야 되는 분이 그 사람에게는 심판을 면제해주는 고 심판 사이에서 비로소 등장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럼 이 여인이 울 때는 어떤 마음으로 울겠어요? 당신은 나를 심판해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심판을 하지 않으시고 어찌 이렇게 용서를 해주십니까. 어찌~~ 이렇게 용서를 해주십니까? 라고 울면서 그동안 내가 나를 심판 안 받겠다고 투쟁하고 노력했던 모든 요건들을 자진해서 설사약을 먹고 다 빼듯이 다 빼내버리는 겁니다. 완전히 다 빼는 거예요. 똥 같은 것을 확 빼내는 거예요. 내가 나로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모든 요소를 확 빼는데 그걸 누구 앞에서 했다? 바리새인 앞에서 한 거예요.
그럼 세상의 권세는 뭡니까? 너의 천국 구원받는 너의 의는 니 행함으로 이걸 저축을 해야 된다는 사고방식이 지옥의 권세 안에 있는 인간들의 특징이에요. 그럼 저축을 하려면 통장이 있어야 되지요. 그럼 통장은 누가 통장이 됩니까? 나라는 것이 있어야 되겠지요. 나라는 것이 있어야 되고 나의 뭐가 쌓인다? 끊임없이 나의 행함의 그 대가가 “주님이 축복 주신 거 있잖아요.” 흔히 이야기하는 “주님이 축복 주신 거, 주님이 이쁘다.” 한 그걸 계속 누적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나를 구원한다. 이렇게 되겠지요. 자기 행함으로.
그런데 제가 지난 수요일날 설교 중에서 꽃꽂이 하는 녹색 스폰지 블록 이야기했잖아요. 또 한 가지는 뭐했습니까? 골판지 이야기했지요. 면적은 뭔가 꽂힐 수 있는 면적이 있어요. 그래서 어떤 고난도 받았다. 이렇게 돼버리면 고난 받았다 하지만, 뭐는 여전히 살아있어요? 내가 고생했던 거 예수님을 받아내는 이 바탕은 있어요? 없어요? 여전히 있겠지요. 이게 뭐가 되겠어요? 이게 바로 자기 의가 되겠지요. 자기 의. 왜? 자기한테 왔으니까. 나 이 정도로 주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자랑질 할 수 있는 그 근거가 계속 마련되겠지요. 수요설교 한 번 들어보셔야 되는데.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서 이렇게 멋지게 됐다. 이런 게 있겠지요. 그런데 골판지는 뭐냐, 뾰족하게 되어있어요. 종이가 이리 있으면 종이를 이리 보면 면적이잖아요. 요걸 이리 세워버리세요. 면적이 안보이고 뭐가 보입니까? 선이 보이지요. 야곱은 자기가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복을 이만큼 누려야 되고 받아야 된다고 이렇게 면적으로 생각했던 야곱이 밤에 오신 천사를 만나고 난 뒤에 면적에서 뭐로 바뀌었냐 하면 면에서 선으로 바뀐 거예요.
왜냐하면 천사 자체가 그래요. 천사 자체가. 낮이 되니까 밤으로 가야겠다. 해서 천사는 낮과 밤사이에 경계선에서 나왔어요. 낮과 밤 경계선에서. 참 어려운 이야기지요. 경계선에서 튀어나온 게 천사고 경계선에서 사라지는 거예요. 따라서 낮과 밤 변하는 그 선 사이에서 그걸 째고 나온 천사에 의해서 야곱이 만나기 때문에 야곱은 야곱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천사처럼 요 따라 이렇게 해서 복 받았다. 가 아니라 이쪽가면 지옥이고 이쪽은 천국이라. 그 경계선 상에서 기능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야곱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은 따라다닌다고 예수님한테 얻을 게 없어요. 예수님은 경계선이라니까요. 내 말을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이 말은 안 믿으면 지옥이고 믿으면 생명이니까 천국이다. 그 경계선에서 하는 거예요. 이 저승사자는 이 땅에서 재벌 될 필요 없어요. 저승사자는 그냥 경계선이라니까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영을 받은 것이고 예수님의 영을 받았으면 하나의 경계선이에요. 내 것이라는 것이 따로 있을 게 없다니까요. 내 것이 있으면 아무리 해도 내 것을 못 버려요. 못 버린다니까요. 신학교처음 들어간 사람이 유명한 찬송가 부르지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어디든지 가오리다. 그렇게 한다는 말은 온전히 헌신 하겠다는 이 말아닙니까.
그러면 그렇게 헌신했을 때 이게 면적이 되어버리면 나는 주님 앞에 헌신했다. 가 꽃꽂이처럼 꽂히겠지요. 그러면 주님 앞에 헌신한 면적이 남겠지요. 이걸 부인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이 면적에서 선으로 옮기는 것이 뭐냐 하면 존재에서 하루, 하루 사는 게 사건화 되는 겁니다. 선이니까 자체적인 폭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하나의 증인으로 살아요. 증인으로. 내 것이 없고 하나의 증인이에요.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내가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사도바울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지옥이에요. 사도바울의 말을 들으면 천국이에요. 그러니 이게 뭐냐, 사도바울은 그 경계선에 있지요. 사도의 특징이 그거에요. 하나의 면적이 아니고 선이라니까요. 선.
드라마 같은데 저승사자 나오지요. 저승사자가 교통사고 납니까? 이미 죽었던 자에게 저승사자는 안 죽지요. 이미 죽은 인간이기 때문에 어디든지 갈 수 있지요. 교통사고 왜 안 나느냐 하면 면적이 없거든요. 영이기 때문에 부딪힐 영이 없어요.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셨는데 부활하고 난 뒤에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냐 문을 닫아놨는데 그냥 통과했지요. 육체가 있는데 부활한 육체에요.
지금은 우리는 육에 속한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게 안 되잖아요. 안 되더라도 성령 자체는 우리로 하여금 그런 사람 되게 하십니다. 죽으면 그렇게 돼요. 죽으면. 천사들의 특징이 그거잖아요. 천사의 특징은 주께서 시키면 어디에도 다 등장하는 겁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 누가 구해줬습니까? 천사가 구해줬지요. 베드로도 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성문을 흔들어서 구출했잖아요. 척척 다 열리고. 자동문도 이런 게 없어요. 쇠문이 열렸잖아요. 멋지지 않습니까. 누가 그렇게 했어요? 천사가 그렇게 했거든요.
천사가 눈에 보일 수도 있고, 안 보일 수도 있고 이건 천사 마음대로에요. 주님 마음대로거든요. 아브라함한테 천사가 왔잖아요. 그리고 삼손의 부모한테 천사가 왔지요. 천사인 줄 모르고 대접하려하니까 아내가 천사다 해가지고 이름이 뭡니까? 내 이름을 왜 묻느냐, 나의 이름은 기묘자다. 했잖아요. 마노아집에 그렇게 했어요. 삼손의 아버지 이름이 마노아입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 주님 주도하에 움직입니다. 주님 하에 움직이기 때문에 그 움직이는 목적을 알아야 돼요. 목적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뭘로 다가오느냐 하면 이 세상의 너희들은 지옥의 악마의 힘에 눌려서 산다는 것을 계속해서 자기 성도를 통해서 또는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악마에 따라 살아간다.
악마가 뭐냐 하면 악마의 노림은 하나밖에 없어요. 사랑으로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서 니 것 가질 필요 없다는 것. 니 것이라 여기지만 사실은 니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증거 하기 위해서 그 때 그 때마다 사건화 시켜서 주신 거예요. 그래서 욥은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다. 왜 주셨습니까? 자녀분 계세요? 왜 자녀분을 주셨지요? 사실은 우리가 복음을 알면 주신 게 아니고 갔다 붙여놓은 거지. 세상 사람은 내 자식이라 하는데. 남의 새끼 아니고 내 새끼 내 자식이라 하잖아요. 왜 주셨습니까?
가져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시기 위해서 주신 거예요. 니 것처럼 느끼는 것은 악마의 힘에 의해서 니 것으로 여기지만, 가져갈 때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 증거 하라고 주신 거예요. 자식이. 사람들은 자식이 내 맘대로 안 된다고 한탄하는데 처음부터 자식은 내 맘대로 안됐어요. 어릴 때도 내 맘대로 안됐었어요. 그 자식도 태어나자마자 지 고집대로 움직였어요. 교육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악마의 권세에 있는 것을 악마의 권세자가 교육해서 인간 만들겠어요? 안되지요. 그럼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저승사자처럼 주의 복음을 주께서 허락할 때에 그냥 시도 때도 없이 전해야 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무시로 복음을 나타나면 되지요.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고. 나타내게 되어있다니까요.
복음을 전하게 되면 목적을 갖게 되어있어요. 목적을 갖고 있으면 우리의 행함은 반드시 기대와 목적을 노리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이게 뭐냐, 존재가 돼요. 면적이 된다니까. 사건이 아니고.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는데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가 어떤 요렇게 행하면 요런 결과가 나오겠지. 라고 계속해서 지 현재 행함과 결과를 결부를 시키고 있는 게 문제에요.
성령께서는 그걸 수정하십니다. “봐라. 니 자식 니 맘대로 안 되잖아.” 안 된다는 것을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생각지도 않았는데, “엄마, 공부가 제일 쉬워요.” 이럴 수도 있는 문제잖아요. 진짜 자녀분 그래요? “엄마, 공부가 제일 쉬워요. 나 이러다가 사법고시 합격하겠어요.” 그런 이야기해요?
그러니 “엄마, 왜 갑자기 부자 되었어?” 그런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부자 되던 가난하게 되던 관계없이 그 자식을 통해서 자신의 내가 악마의 권세에 눌려서 살았던 그 모습을 내가 다시 발견하는 겁니다. 나도 저 철딱서니 없이 살았던 내가 지금은 주께서 변 빼내듯이 변비 빼내듯이 설사하듯이 다 빼내가지고 주의 일로 하게 하셨다. 하는 것을. 늘 그렇지는 않아요. 그러나 특이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 자체가 또 특이한 사건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그 현장에서 증명하게 증거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오늘 본문 다시 돌아봅시다. 참, 이 야고보서 율법 이야기하려고 마태복음, 누가복음을 훑어 봤는데. 죽 돌아봤는데요. 여기 11절 봅시다.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이 말은 뭐냐, 율법이 스스로 다 응취했다. 이 말이죠. 이 말은 죄와 죄 사이가 틈이 있는 게 아니고 여기도 소소한 작은 죄들이 몰라서 그렇지 많은 죄와 죄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앞으로 태도를 어떻게 하느냐, 사람을 볼 때, 세상을 볼 때 이렇게 보세요. 사람들이 이렇게 앞에 있잖아요. 한 사람이고 있잖아요. 사람으로 보지 마시고 사람들 어깨, 어깨 사이에 주님 계심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저 사람이 내 앞에 등장한 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일부러 나한테 앞에 붙였다. 하고 사람들만 구분해서 보지 마시고 사람들 사이에 주님께서 얘도 오늘 니 만나게 했고, 얘도 만나게 해서, 만나게 하는 거예요. 남편도 자식도 만찬가지입니다.
주님이 현재 살아계셔서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우리는 이 사람 대할 때는 이렇게 대하고, 저 사람 대할 때는 저렇게 대하지요. 주님이 한결 같은데 우리는 한결같지가 않아요.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요렇게 요령부리고 이 사람은 이렇게 요령부리지요. 한결같지 않으니까 죄를 하나 어기면 모든 것이 어긴 결과를 우리가 초래하는 겁니다. 하나같이 내 중심으로 사니까.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처음에 돌아가서 세상은 성경을 덮어버리면 인간끼리 좋으면 좋은 거예요.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게 정상이라고 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그게 악마의 세력 안에 갇혀있는 세상이에요. 세상은 인간들이 지금 놀고 있는 마당입니다. 이거 지옥이에요.
지옥인데, 주께서는 이렇게 야고보서를 주셔가지고 다시 한 번 온전한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밖에 없음을 알게 하셔서 그런 드론에 띄우듯이 저승사자의 안목을 가지고 하는데, 우리가 하늘로 직접 돌아다니면 편한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처럼 지옥의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남들로부터 오해와 모독과 배척과 오해 이런 모든 그래서 지옥 간다고 이러한 온 수모를 다 받게 하십니다.
다 받게 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아~ 이래서 지옥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그 지옥 속에서 나도 지옥 갈 일조를 한 거예요. 나도 마찬가지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그걸 용서해 주셨으니까 우리가 쌓아놓은 평생 사는 죄가 아까 그 여자처럼 쫙 설사 나서 빠지는 즐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십자가 죽을 때 어떤 의미로 돌아가셨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평생 살아가면서 두고, 두고 깨달아야 될 일이고 우리의 존재를 부셔서 사건화 시켜서 뭘 하던지 간에 주께서 유발하신 사랑이라 알고 사랑 앞에서 아무것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