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80914a야4장1절(싸움)-이 근호
시작하겠습니다. 야고보서4장1절,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여러분, 성경보실 때에 해석이 의외로 간단해요. 너희 싸움이 어디서 나오느냐, 다툼이 어디서 나오느냐, 이렇게 하거든 지금 주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싸우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해석이 굉장히 쉬워요. 니가 살인하지 말라. 무슨 뜻이다? 이미 우리가 살인하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주님 보시기에 니가 얼마나 인격이 고매하냐 훌륭하냐를 보는 게 아니고 하나님 내가 너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내가 너희 몸을 만들었으니 너희 육을 만들었으니 너희가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을 내가 뻔히 안다는 겁니다. 어떻게 아시는가 하면 그 몸이 처해있는 환경조차도 주님이 조성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지고 보면 위에서 보면, 주기도문 여러분이 외우시잖아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그 다음에 무슨 말입니까? 땅에서 이루어지지요. 무척 쉬워요. 하늘에 구름이 이동하잖아요. 땅에 반드시 그림자 생기는 겁니다. 이거 철학가도 몰라요. 과학자도 모릅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그대로 복사판이에요. 이 지상은 복사판으로 그대로 가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의논한 대로 그냥 가는 거예요.
이것을 제가 이렇게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말씀 앞에서 모든 것이 사라진다.’ 말씀 앞에서. 인대가 문제가 있어서 아프잖아요. 아프고 하지만, 말씀 앞에 서게 되면 아픈 나마저도 말씀 앞에서 그것이 나가 사라지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내 몸의 인대가 나갔다 하는 그런 식으로 되어버립니다. 고민한다. 걱정한다. 특히 장래에 대해서 염려한다. 이건 아직도 자기가 안 사라져서 그래요.
말씀이 엄연히 있으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없는 거예요.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첫 번째 시험이 그거였어요.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이리 되어있거든요. 말씀은 말씀 온 쪽으로 가버려요. 그런데 떡을 먹어버리면 떡을 먹는 모든 매사가 떡을 먹는 나에게 치중하게 되어있어요. 그럼 오늘 떡을 3개먹을까? 4개먹을까? 이것조차도 우리한테는 고민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우리가 하루에 살면서 여러 가지 걱정 고민되는 것은 염려되는 것은 두려워하는 것은 아직도 자기가 살아있어서 말씀을 가리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을 대체하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 왔을 때 말씀을 딱 들을 때는 은혜 받는 현상이 어떤 현상이냐 하면, 교회가기 전에는 내 생각하다가 예배당 마치고 나서는 내 생각하지 않아야 그게 은혜 받는 겁니다.
이제 집에 가면 어떤 번거러움이 있더라도 그건 내가 고민할 문제가 아니지요.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말이죠. 그것조차도 말씀의 체계 속에 이미 예비 된 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존재가 예비 된 거예요. 그런데 싸운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런 것을 염두에 두시고 4장을 다시 한 번 봅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되어있지요. 왜 싸우지? 왜 싸움이 일어나지? 라고 지금 나무라시는 거예요. 추궁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되겠지요. 싸움이 왜 일어나는지.
싸움이란, 타인을 지배하기 위해서 싸움이 일어나는 겁니다. 지배하는. 남을 지배한다는 반대말이 뭐냐 하면 사랑이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이에 싸웁니까? 안 싸우지요. 사랑하지 않는 관계에서는 필히 싸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학교 다닐 때 째려보잖아요. 그게 일종의 지배에요. 남을 통제하는 겁니다. 왜 남을 통제하는가. 오늘 몇 분 안 오셨기 때문에 어렵게 가봅시다.
진짜 어렵게 갑니다. 나라는 것은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것을 보면서 나라는 것이 정립이 되는 겁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보는 동시에 나라는 것이 부각이 돼요. 나라는 것이 부각이 됩니다. 드라마 볼 때는 나가 생각이 안나요. 드라마 보는데 누가 갑자기 들어올 때는 갑자기 옷매무새를 이렇게 하고 자기가 자아의식이 되거든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거기에 맞추어서 나라는 것을 이렇게 구성을 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남을 왜 지배하느냐 하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무례하게 요구하게 되면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방어하는 기제가 돼요. 메카니즘. 방어하는 작용을 하게 됩니다. 자기가 자기를 방어하는 것은 그걸 한 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꿈이라는 거예요. 꿈은 왜 꾸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꿈은 평소에 자기가 자기를 방어하는 것. 사람이 이렇게 낮에 잠자지 않고 깨어있을 때는 그냥 고요하게 깨어있는 게 아니에요. 끊임없이 자기를 방어하면서 있습니다. 그 방어는 뭐냐 하면 남들이 요구하는 것이 내가 감당이 될까, 안 될까를 늘 측정하는 거예요. 쉴 새 없이. 차를 운전하는데 노란불이 왔다. 갈까 말까 갈까 말까. 이게 가도 되고 안가도 되고. 만약에 안 가게 되면 뒤차가 와서 갈 줄 알고 박을 수도 있고 가게 되면 경찰한테 걸릴 수도 있고.
그게 뭐냐 하면, 노란 불이라 하는 것은 타인이에요. 타인의 현상이에요. 나한테 뭔가 요구를 하는 거예요. 노란불, 초록 불, 전부 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게 전부 다 요구를 하는 거예요. 남편이 와서 밥 달라 전부 다 요구를 하는 거예요. 할 때 내 스스로 나를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밥을 차려줘, 말아, 노란 불에 갈까 말까를 늘 이렇게 신경 쓸 수밖에 없어요.
과도한 자기 방어가 나중에 뭐로 되느냐 하면, 이게 한 자로 한이 맺히는 겁니다. 한이 맺혀요. 한이 맺혔기 때문에 이것은 타인이 요구하는 것을 내가 못 들어준다는 데서 오는 억압감이거든요. 억압이란 말이죠. 예를 들어서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몇 일 전부터 와가지고 전지지라고 할 때 지금 직장생활 하는데 전지지라고 할 때 뻔히 알면서도. 그게 “아이고, 바빠서 못 갑니다.” 순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러나 말은 말이고 막상 마음속에 남는 게 있어요. ‘시어머니가 내 뻔히 직장을 알면서 왜 그런 이야기했을까?’그만두라는 이야기였을까? 이건 내가 감당이 안 되는데. 나는 지금 직장을 다녀와 우리 가족이 보호가 되는데.’ 나 자체를 타인이 공격을 하니까 뭔가 한이 맺히겠지요.
한이 맺힐 때는 자기를 보호하는 자동적으로 이걸 풀어야 되겠지요. 이걸 푸는 게 뭐냐 하면 복수에요. 복수하는 거예요. 시어머니한테 전화 받고 난 뒤에 갑자기 남편한테 함부로 대하는 이유가 복수입니다. 복수는 어디서 나오느냐, 한이 맺힌 거예요. 그러면 현재 나를 유지하려면 타인이 계속해서 감당 안 되는 것을 요구하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타인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지배를 해야 되는 거예요.
그 지배가 뭐냐 하면 싸움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타인이 너무 강해서 복수가 제대로 안될 때는 그건 4자로 새벽기도라는 게 있어요. 쭈여! 쭈여! 믿씁니다. 한 맺혀서 그래요. 전부 다. 교회 가는 이유가 한 맺혀서 가는 거예요. 인간의 본능은 나를 보호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인간은 어디서 생겼다? 남들이 나한테 요구하는 대로 부흥을 해줬는데 갈수록 과도하게 밀어오는 거예요. 현재 내가 감당 안 되는.
인간은 자아가 형성되고 난 뒤에 지켜야 되는데 과도하게 들어오니까 억지로 맞춰주는데 스트레스는 계속 쌓이고, 안 풀면 내가 망가지고 폭발할 지경 같아요. 진짜 폭발해버리면 이건 자살이지요. 결국은 뭐냐 하면 타인과 싸워야 되는데 타인하고 못 싸우니까 누구하고 싸우느냐 내가 나하고 싸우는 거예요. 내가 나하고 매일 싸우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문제가 뭐냐 하면, 제가 처리해 드릴게요. 말씀 앞에서 자기가 안 사라져서 그래요. 사라져야 되는데. 갈수록 생생해져 버렸어요. 교회 가서 성경공부를 하고 백날해도 내가 버티고 있는 이상은 지금은 고요하지만, 내일 돼서는 무슨 또 난리를 쳐서 나에게 한 맺힐 일이 또 생길는지 미리 당겨서 불안 불안한 겁니다.
사람이 자기가 사라지게 되면 내일도 없어지거든요. 그럼 내일 걱정은 미리 당겨서 할 필요가 없어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현장성’ 또는 ‘현재성’ 요게 무슨 특징이냐 하면, 말씀의 특징이에요. 말씀 속에 자기가 있는 사람은 내일을 걱정하지 말고, 내일 염려는 내일 할 것이고, 지금 주께서 말씀이 어떻게 나에게 현재 있게 하느냐, 현재 나를 나답게 있게 하느냐를 보는 겁니다.
인대가 아프잖아요. 그럼 지금 병원에 계시다. 그럼 병원에서 내 할 일은 뭐냐 하면 말씀이 계시는 우리 주님께서 나를 이 자리에 왜 있게 하셨느냐 그것만 생각하면 돼요. 아~ 주께서 있게 하셨구나! 그 순간 아픈 나는 없어지고 아파야 되는 역할이기 때문에 아~ 아프자. 그래. 나을 때까지 아프자. 그랬는데 돈은 얼마 들어가고 성경공부 참석 못하고, 추석은 어떻게 보내고, 이상한 엉뚱한 이단 섬기다가 걸렸잖아....., 그런 타인의 또 뒤 담화 걱정되고, 내가 지금 뒤 담화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온갖 생각을 다한다는 것. 이 자체가 결국은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려고 하는 꼭 붙드는 거예요. 안 빼앗기려고. 남한테 흠집 안 나려고. 평생을 그리 살아갑니다. 평생을.
아무리 수십억을 벌어줘도 소용없어요. 인간은 자기가 사라지지 않는 한 마귀는 귀신은 계속해서 찾아오는 겁니다. 계속해서 찾아와요. 교회 옮겨도 소용없어요. 끊임없이 찾아들어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데 하늘을 차단시켜 버렸어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는데 부산강의인데. 마귀가 어디 있습니까? 마귀를 볼 생각하지 마세요.
마귀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에요. 존재는 하는데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는 식으로는 존재하지 않아요. 이걸 더 쉽게 하면 보이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게 마귀에요. 그래서 우리는 마귀를 볼 생각을 하면 안돼요. 마귀를 만약에 보고자 하면 마귀를 자기가 변장해 버려요. 그리고 정 마귀를 보고 싶으면 제가 보여드릴게요.
왜냐 모든 인간은 마귀의 변신체입니다. 마귀가 모든 인간으로 변할 수가 있어요. 태연하게 대통령으로 변하고 장관으로 변하고 모든 인간은 마귀의 다양체로 보면 됩니다. 귀신들의 다양체. 그래서 이렇게 거리에 나가서 만나보면 귀신에 실려 있는 자동차 대하듯이 전부 다 길거리에 대할 거예요. 그들이 존재로서 마감되는 게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를 실어 나르는 운반체로서 걸어 다니고 돌아다니고 있는 겁니다. 장사하고 지하철타고 그런 거예요.
모든 인간은 마귀가 노리고 있습니다. 다루고 있어요. 그래서 마귀를 보고 싶으면 사람을 보면 되고요. 몇 일 되면 또 추석되잖아요. 온갖 멀리 있던 마귀들 다 옵니다. 귀신들 다모여요. 고스톱치고 소주 한 잔 먹고 땡깡 치고 형님은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런 소리하고 온갖 소리 나오지요.
중요한 것은 마귀의 기능이 뭐냐 하는 거예요. 마귀가 보고 싶다 보다도 늘 보고 있으니까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제가 차양이란 말을 쓸 겁니다. 차양, 햇빛을 가리는 것. 이 인간 세계를 이게 고린도후서4장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신이 일종의 엄브렐라 우산같이 해가지고 인간으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못 보게 차양, 태양을 가리듯이 가려버리는 역할.
두껍게 가려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인간이 아무리 성경 말씀을 율법을 가지고 특히 유대인들은 율법들 가지고 했잖아요. 유대인들이 아무리 뚫어도 이게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놓지를 않으니까 내가 나를 못 놓으니까 말씀을 백날 지켜봐야 아무리 올라가도 자기 세계 이외에는 달리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없어요.
천국도 자기 세계, 지옥도 자기 세계, 자기로부터 자기를 벗어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있으니 모든 걸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든, 예수든, 교회든, 십자가든 나를 위해서 있다 보니까 자기가 자기를 발목을 잡으니까 이게 두꺼운 차양 막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삼겹살이에요. 오늘 제목을 삼겹살로 할까.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다가 뭔가 하나 일 터져버리면 사람이 경직이 되고 마비가 되어버려요. 우짜노? 어떻게? 어쩔거나, 큰일 나서 절망하고.
사람이 절망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가 자기를 지키려는 식으로 살아왔다는 티를 내는 거예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14장에 가볍게 나와 있잖아요. 가볍게. 정말 툭 던져져 나와 있는데 그 성경 말씀도 전혀 삼겹살 때문에 먹혀들지를 않는 겁니다. 말씀의 세계가 삼겹살 이 차양 막 때문에 안에 들어오지를 못하는 겁니다.
간단한 문제거든요.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예수를 믿어라. 이게 아니에요. 오늘 제목은 두 자입니다. ‘놔라’ 너에서 너를 놔버려라. 놔버려라. 어차피 지금까지 니가 니를 만드는 게 아닌데 왜 자꾸 오인하느냐. 오인은 뭐냐 사태를 잘못 파악하는 것을 오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서 사태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아는데 오류를 일으켜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오인과 오류를 수정해 줄 사람이 옆에 타인들이 없어요. 유일한 타인은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와서 우리에게 타인으로 등장했을 때, 유대인이나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한테 잘 보이려고 이렇게 하면 됩니까? 저렇게 하면 됩니까? 아이고, 훌륭하십니다. 했다고요.
그것은 뭐냐 하면, 자기를 놓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시도한 겁니다. 그런 점이 있잖아요. 복음을 어떻게 하면 소유할 수 있습니까? 구원은 어떻게 하면 소유할 수 있습니까? 천국은 어떻게 갈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들이 자기가 자기를 안 놓으려고 하는 그런 삼겹살 밑에 차양 대 밑에 인간의 본심을 그대로 노출한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게 되면 마태복음10장을 보면 아주 간단해요. 니가 발목이 하나 나가더라도 나머지로 지옥 불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낫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러분, 그 말씀 들어본 기억나십니까? 마태복음10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28절을 제가 한 번 읽어볼게요. 읽어보고 혹시 여러분이 이 성경 가운데 이런 경험이 있거든 딱 순간이다 보시면 돼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쉽게 말해서 이혼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 이 말이에요. 확 다가오지요. 실감나지요. 애가 세월호에 빠져죽어도 신경 쓰지 말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10장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그 다음에 뭡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 그게 잘못 생각한 거죠. 자기가 누군지 잘못 생각해가지고 떨어도 너무 떤 거예요. 그동안. 평생을 벌벌벌 떨면서. 잠이 오지 않습니다. 뭐 잠이 안 오는 건 할 수 없지만. 잠이 안 오면 드라마 보면 되지요. 강의 들으면 잠이 옵니다. 그런 간증하는 사람 많습니다.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이 말씀은 우리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어요. 성경말씀 해석은 간단해요. 지옥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니 그 몸 가지고 지옥 간다는 이야기에요. 해석 참 쉽지요. 지옥 이야기 나오거든 지금 니가 가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니가 두려워한다는 말은 지금 니가 두려워하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그게 말씀만 살아있고 그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우리를 만들어놨거든요. 이게 믿음 아닙니까.
내가 믿는 예수를 내가 예수 믿는다는 그 나의 결심을 안 믿는 거예요. 참 쉽지요 잉. 정말 쉬워요. 두 번 다시 내 믿음으로 지긋 지긋한 내 믿음 쥐는데 다시 돌아가지 마세요. 악마가 계속 예수님 시험한 그 대목가지고 계속 시험하는 거예요. 니 떡으로 먹어야 산다고 계속 인간에게 평소에 인간이 스스로 자기한테 못 벗어나고 자기한테 발목 잡혔다는 걸 뻔히 알기 때문에. 누가?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가. 마귀가 그렇게 했어요.
우리는 마귀 나와! 단칼에 죽이려고 하는데 마귀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우리의 싸움의 상대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존재하고 있고 저쪽은 영물이잖아요. 잡힙니까? 이게. 그리고 마귀를 이겨도 문제가 돼요. 마귀를 이기면 이겼다는 내가 나를 또 붙잡게 돼요. 요번에 사도행전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사도행전에서 보면 악귀가 사도바울에서 뭐라고 평합니까?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니는 누구냐? 그러니까 예수님에 의해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성령 받은 사람이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악귀도 알아요. 지금 내가 다룰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이건 성령도 안 받아놓고 눈에 보이는 존재자를 존재 본인이 다루려고 한 거예요. 내가 눈에 보이는 나를 이 존재자를 존재자인 내가 다루어서 나를 천국 보내놓고 시도하는 모든 교회의 프로그램들 그거 바알종교잖아요.
자기를 학대하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자기를 칼로 찌르면서 850:1로 엘리야와 붙을 때 그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세요. 뭐했습니까? 신이시여! 우리의 응답을 이 자학을 들어주소서.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 괴로워하면서 신의 은혜를 기다립니다. 이건 같은 인간들끼리 은혜 받아요. 같은 존재들끼리 은혜 받는다고요. 누구 하나 간증하게 되면 눈물 막 흘리지요. 같은 존재자거든요. 존재자 아닌 존재자는 기껏 아무 상관도 없어요.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공감을 들으면 동감이 되고 찔찔 울고 하지만, 뭐 운다고 천당 가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 은혜 받았다는 그 자체가 오인에서 비롯된 겁니다. 오해에요. 사격선수가 자기 표적 판에다가 쏴야 되는데 엉뚱한데다 쏴놓으면 그 쪽 점수에 다 보태준다고요. 우리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오인에 대해서 아주 적절한 예가 뭐냐 하면 나를 속이는 저울을 사고 싶어요. 몸무게 달 때마다 5Kg빼주는 기분은 괜찮아요. 기분은 은혜 받은 거 같아. 5Kg빠지니까. 소원이 5Kg 빠지는 게 소원인데 빠졌으니까. 그런데 어떤 아줌마가 “어? 아줌마 이거 저울 고장 났네요. 5Kg빠졌네요.” 이렇게 되어버리면 기분은 좋았지만 살쪘다 하는 것은 변동이 없습니다.
우리는 기분 상 우리에게 은혜라는 것을 굉장히 이렇게 주입을 하는데 결국 거기서 싸움이 멈춥니까? 아니지요. 내가 은혜 받았다고 하는데 누가 은혜 안 받았다고 해요. 또 타인의 평가에 대해서 또 예민하게 작용합니다. 주님과의 관련된 문제에 왜 타인의 눈치를 살펴야 됩니까? 언제 그렇게 눈치봐가지고 천당 갔습니까? 뭔가 참 우리 자신을 그동안 경상도 말로 질을 잘못 들였다 하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못 키운 거예요.
남들이 요구하는 나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헛짓 한 겁니다. 주의 말씀 앞에서 몸을 죽이는 자를 안 두려워하면 되는데 우리는 남이 살아있는 것을 정상으로 보고 내가 죽으면 나는 그들보다 못하니까 실패한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건 우리가 어른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어릴 때 중학교 때 학급에 생각해 보세요. 초등학교 때나, 고등학교 때 생각해 보세요. 그 때부터 우리는 옆자리하고 얼마나 비교들을 해댔습니까. 특히 성적 나올 때. 옆에 애 보려고. 전부 다 자기거만 성적보고.
새로 도시락해가지고 갑자기 소시지 막 싸오면 우리는 아주 경상도 말로 신기, 모르지요? 신기라는 말은 바다에서 나오는 풀. 간장 넣어가지고 그걸 도시락 반찬하고. 김치 싸가는 날은 조심해야 돼요. 버스타면 국물이 줄줄 흘러내리니까. 같은 옆에 있어도 반찬이 신기, 돈 좀 생기면 닥광 넣고. 저쪽에는 계란 후라이 탁 올려놓고. 소시지 딱 할 때, 사는 동네가 완전히 달라요. 표정 보니까 다 그렇게 사셨네. 벌써 어릴 때부터 타인과 비교를 통해서 자기 위치를 정했던 것이 바로 우리의 자아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했어요. 타인의 평가가 니 평가라는 겁니다.
성경 말씀이 뭐라고 하는지 우리는 신경도 안 썼지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가족이 어떻게 보느냐 했어요. 이제는 그런 오인과 오류에서 벗어날 때 됐잖아요. 자, 그러면 여기서 오늘 본문에서 싸우지 말라 하는데 우리도 안 싸우고 싶어요.
그럼 안 싸우려면 어떻게 되는가, 이제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복습해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남을 뭐한다? 지배하려고 했지요. 일종의 통제지요. 타인을 의식해서 타인 앞에 굴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지배하기 위해서 격렬한 싸움을 벌입니다. “니 나한테 왜 욕했어?” “니 나한테 왜 손찌검하는 거야?” 이런 싸움. 심지어 폭력적인 싸움도 되지요. 싸움 또는 다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럼 아까 후딱 지나가면서 이야기했는데. 지배의 반대말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이지요. 사랑에 대해서 로마서4장5절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여기에 보면 일을 아니할찌라도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보호하기 위해서 인간은 노동하게 되어있고 노동하는 그것이 바로 노동한 당사자가 나고 그래서 나는 가치 있다고 했는데 남들이 그걸 공격하니까 내 보호하는 입장에서 나를 지키기 때문에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어요. 나를 위해서 싸움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보면 뭐냐 하면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않은 자를 어떻게 하신다? 의롭다 하지요. 이게 진정한 타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이게 바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의 음성이라면. 우리는 그동안 존재한 음성만 듣고 왔어요. 모든 인간들은 귀신이 들린 상태기 때문에 그 배후에는 악마가 있거든요. 귀신은 악마의 졸개를 귀신이라 해요.
그들이 내뱉는 건 뭐냐 하면 니가 일을 한만큼 니가 가치 있고 니는 훌륭한 존재가 된다는 식으로 타인의 입을 통해서 가족이란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속 주입시켜 왔던 겁니다. 심지어 유대인들도 율법을 통해서 심지어 오늘날 교회 목사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들도 전부 다 귀신들린 자들이거든요.
“성도라면 이 정도 되어야지. 교인이라면 이 정도 되어야 교인답지. 성경에 성령의 열매는 폼으로 있는 줄 아나, 이거 지키라고 있는 거야. 안 지켜도 된다는 것은 그건 이단들이 하는 짓이야.” 이런 식으로 하면서 계속해서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관리해야 되고 계속 붙들고 있어야 되고 발목 잡아야 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주입시켜 왔어요.
그런데 로마서4장에 뭡니까? 4장 4절에 보면, 이런 자들에게는 삯을 뭐로 여기지 않는다?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빚으로 여기니까 빚이 뭐냐 하면 우리 속에 있는 빚이 빚을 가지고 크게 쓰겠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빚을 가지고 이게 뭐냐 하면, ‘양심’이라는 거예요.
악마가 우리를 다루는 방법은 양심을 통해서 다룹니다. “니 양심상 그리 해야 되겠어? 니는 왜 니 가족을 돌보지 않아? 양심상. 니 가족인데 니 동생을 왜 이렇게 미워해? 니 동생 죽었으면 좋겠어?” 이런 식으로. 제가 만약에 예를 들어서 여러분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거예요. 어떻게? “당신이 왜 나한테 이렇게 했어?” 하면서 그냥 시비 걸면서 보냈을 때에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은 잘못 보냈구나! 하는데 혹시나 나쁜 마음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아셨어요?” 누가 하나 날아 올 거란 말이죠. 바로 악마가 인간을 다루는 방법입니다. 이게.
매일같이 “니 나한테 왜 그랬어?” “니 하나님한테 왜 그랬어?” 우리 양심에다가 계속 노크하는 거예요. ‘그래, 내가 뭔가 잘못됐을 때 죄를 지어서 그렀구나!’ 계속해서 선과 악의 구조에서 늪에 더욱 빠지도록 아주 질식하도록 모가지 들고 완전히 머리 들고 완전히 선악구조에다가 확 집어넣는 거예요. “앞으로는 잘해!” 이렇게 하거든요. “앞으로는 잘해! 앞으로는 개선해서 니 인간 개선해야 돼. 잘해야 구원받아!” 라고 집어넣거든요.
그러면 앞으로라는 말이 뭐냐, 아까 이야기한 현장성이 깨져버려요. 지금은 못하지만 내일은 잘할게요. 이 자체가 미리 내일에 일어날 일을 말씀에 의해서 일어날 일을 말씀을 끊어버리고 내가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내일은 반드시 말씀을 잘 듣는 내가 될게.’ 라고 자기 자신을 미리 조작해버린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그냥 놓으면 되는데. 하루 하루 계속해서 개목 줄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악마가 내 양심에다가 밧줄을 해가지고 계속 끌어당기면 우리는 개를 강제로 끌면 개가 발이 네 개잖아요. 네 개가 앞에 버티면요, 그 땅에 흔적 남습니다.
안 끌려가려고 그러는데 끌어가는 개장사는 힘이 더 세니까 강제로 끌고 가보면 나중에 손톱 발톱자국이 남지요. 손톱 발톱 자국이 흔히 말하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우리의 지나온 인생이 억지로 끌려가는 마귀한테 끌려가는 개 발톱이고 손톱자국이에요. 참, 이게 도저히 언제까지 속을 거예요?
이게 교회가도 마찬가지에요. 교회가면 목사가 목줄을 끌고. “지난번에 약조하신 헌금 안 냈잖아요. 떼어먹을 거예요?” 뭐 이런 식으로. 와~ 이건 뭐 “지난번에 주일학교 교사 한다고 해놓고 왜 그냥 벗어냅니까? 처음 맡았으면 12월달까지 해줘야지요.” 이렇거든요. 예레미야에 12월 달까지 해준다는 게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말씀이 안 나오잖아요.
말씀은 뭐냐, 내일 일은 니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이게 말씀이에요. 목사가 교인들에게 교사할 때 임명장을 준다고요. 요번 12월 달까지 족쇄처럼 돼요. 그러면 이 임명장이 어디에 삽입이 되느냐, 내 양심에 삽입이 돼요. 새겨져요. 그러면 이것은 내 자존심을 걸고 12월 달까지 해준다는 거예요. 이게 뭐예요? 이게 신앙입니까?
타인이 나에게 걸어준 족쇄를 나는 마치 훈장 탄 양 자랑거리인양 그것밖에 내세울게 없어서 남한테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런 것으로 우리는 지금 길들여져 있는 거예요.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는 겁니다. 로마서4장에서 뭐냐 하면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 )로 여기지 아니하고 ( ) 가 뭐냐 하면 그게 은혜거든요.
은혜가 들어온다는 것은 주님의 행함이 우리 속에 중심부로 들어온다는 거예요. 주님의 행함이. 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은혜라는 말이 왜 안 되느냐 하면 그냥 은혜 받아보면 마귀가 또 시비 걸어요. “니 지난번에 은혜 받아 놓고 왜 행동을 이렇게 하노?” 또 이런다고요. 은혜를 또 하나의 아우라 또는 분위기 이런 척을 해가지고 왔다가 없어지는 것이 은혜인줄 자꾸 오해를 하게 만들어요.
그러나 주님의 행함이 들어오게 되면 마귀가 우리를 절개해서 보려고 하니 그 안에 주님이 들어 있잖아요. 주님의 행함이 다 이루었다 가 들어 있잖아요.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시비를 걸려면 누구한테 시비를 걸어야 돼요? 지금 껍데기는 우리보고 시비를 걸어야 되는데 우리 안에 누가 들어있는가 하면 주님의 행함이 있으니까 주님의 행함은 이미 악마를 이겼잖아요. 악마는 그 앞에서 패배가 된다고요.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이게 중심이 됐으니까 이해 못하고 껍데기 변두리가지고 자꾸 시비를 거는 거예요.
“더 열심히 해야지.” 진짜 예수님이 안 들어있는 사람은 거기에 또 말려든다고요. ‘그래, 더 열심히 해야지.’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증거 해야 될 게 뭐냐 하면, 주님을 증거 하는 게 아니고 내가 이만큼 성실함을 증거 하는 식으로 천국가려고 시도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개 목줄.
개 목줄하고 우리는 가기 싫어. 왜냐 하면 여기서 더 열심히 해버리면 생활이 어려워져. 교회에서 교육관 짓는데 돈 내놔라. 돈 내고 싶은데 이러면 또 생활이 균형이 밸런스가 안 되는 게 이젠 너무 목돈 나갈 게 많아서. 그래서 또 버틴다고. 버티면 또 뭐냐, 버텼기 때문에 돈은 안 냈지만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까봐 벌벌 떨고 있어요. 이게 길들여져 있어서 그래요. 선과 악 사이에 길들여져 있어서 그래요.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빚의 반대말이 뭐라고 했습니까? 은혜지요. 그러면 은혜가 와야 은혜가 오는 거예요. 은혜 오기 전에는 우리에게 뭐가 있었다? 빚이 있었지요. 빚은 내가 감당할 수 있으면 빚이 있을 리가 없지요. 감당 안 된다는 거예요. 이미 하나님은 말씀으로 오실 때는 뭘 알아요. 우리 자신이 채무자라는 것을. 그리고 영원히 변제할 수 없는 채무자인 걸. 선과 악 율법에 대해서 채무자라는 걸. 빚지고 산다는 것을 이미 알고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그럼 주님께서 찾아올 때는 그냥 잘 있나? 안부 물으려고 오신 게 아니에요. 이 빚을 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탕감해버리면 안되지요. 그러면 제로가 돼버리잖아요. 제로가 아니고 여기 로마서4장에서는 놀라운 사실은 무죄가 아니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된다 이 말이죠.
의인이 아니고, 의가 된다는 말은 의인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주님하고 또 타인이 되는데 나는 의인이고 주님 의인이고 타인관계가 성립되는데, 의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 안에 주님의 의가 담겨버리면 담기는 걸로 끊어지는 게 아니고 담겨준 주님과 연결되어있다. 끊어질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다 말이죠.
만약에 집사님하고 악수하면 악수하고 놔야 하는데 붙들고 안 놓는 거예요. 이게 의의 관계에요. 의는 소유용이 아니고 둘 사이에 연결된 연결고리를 가지고 의라고 합니다. 이로서 너로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이루자고 했잖아요. 세례 받을 때, 세례요한이 “아이고~ 저 같은 주제에 어떻게 세례를 줍니까?” 하니까 “우리가 이렇게 해서 의를 이루자.” 되어있어요.
의를 이룬다는 것은 내 잘났다가 아니라 못난 우리와 잘난 주님사이에 그 관계가 의라는 겁니다. 소유용이 아닙니다. 선악적인 구조에서는 소유용이 돼요. 착하면 착한 게 있어서 착한 걸 소유했다는 이유 때문에 나는 착한 사람이 되지만, 선악구조가 아니고 처음에 인간 만든 생명구조에서는 관계가 더 중요해요. 소유가 아니고 관계라니까요.
집사님이 만약에 붙들었는데 안 놓는다. 집에 갈 때까지 안 놓는다. 그러면 오늘 서울강의도 못해. 이렇게 붙들고 있기 때문에 악마가 노리는 것이 뭐냐 하면 그 관계를 어떻게든 자르려고 관계를 떼려고 시도하겠지요. 그래서 아까 차양, 햇빛가리는 그건 뭐냐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를 비추지 못하게 만드는 뜻이에요.
악마는 귀신입니다. 악마는 지혜로워요. 뱀같이 지혜로워서 무엇을 끊으면 된다는 것을 알아요. 이 세상에 장로, 목사, 권사들 보내가지고 그 관계만 끊는 거예요. 복음의 관계를. 열심히 해가지고 그 관계를 끊게 만들어요. 교인수가 100명, 교인수가 여러분의 교회입니다. 또 우리의. 의라는 것은 소유격이잖아요. 여러분교회니까 여러분이 책임져야지요. 꼭 소유를 안겨줘요. 계속해서 우리에게 집중시킵니다.
우리 아들 잘 났고 우리 딸 잘 났고 우리 남편, 우리 아내 잘 났고 항상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소유로 살라고 독촉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는 마귀가 그렇게 못 달려들도록 날 파리가 못 달려들도록 해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주의 방법은 그게 아니에요.
성도하고 주님하고, 중국에 보면 산에 보면 다리가 많이 있잖아요. 관광지 많이 모집하잖아요. 흔들다리해지고 이 다리가 하나님의 의다 말이죠. 그러면 이렇게 됐으면 마귀가 오지 않아야 되는데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마귀를 보내가지고 계속 건드리게 만들어요. 흔들다리. 환란과 핍박과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아픈 것이나 계속 흔들게 만들어요.
왜 마귀가 이렇게 해야 되느냐, 이걸 안하게 되면 인간 본인이 내가 주님을 이런 관계라고 이걸 나라고 규정을 해버리면 또 나가 여기서 계속해서 나에 대해서 집중하게 돼요. 이것을 자꾸 내가 확인하려해요. 확인은 누가 하느냐 하면 타인이 확인해요. 주님이 나의 신앙에서 확인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를 위해서 주님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숙제로서 죄인을 구원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엄청난 말을 해서 미안합니다.
구원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라니까요. 이런 의식의 발상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내 구원이 아니고 주님이 좋아라 해서 주님이 구원하는 거예요. 내 좋아라고 주님이 있는 게 아닙니다. 주님 자기 좋아라고 예수님을 믿게 하신 거예요. 따라서 요한복음10장 이야기해봅시다. 목자는 누굴 알고, 양을 안다잖아요. 그 뒤에 나온 말이 목자가 양을 아는 그 순간부터 어떤 권세도 어떤 위기도 내 품에서 양을 뺏을 자가 없다. 라는 것이 말씀이지요.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 내 쪽에서 주님을 믿는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 마귀로 하여금 계속 쑤시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의 육이라는 것은 결국은 육적요소가 발생되거든요. 세상에 나가면 남하고 또 비교를 해야 돼요. 니만 믿음 좋으냐 나도 믿음 좋다고 또 비교하게 된다 말이죠.
아까 타인은 뭐라고 했습니까? 각자 안에 뭐가 들어있다? 귀신이 들어있지요. 그 타인들이 전부 다 움직이는 악마의 졸개들로 보면 돼요. 좀비지요. 전부 달려드는 거예요. 추석 때 전은 제대로 했어? 추석 때 용돈 얼마 가지고 간 거야? 봉투에. 이런 식으로. 죽 했고 우리는 그들과 그렇게 의사소통이 잘 되는 이유가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살아가거든요. 똑같이.
그렇게 설득이 되고 납득이 돼요. <같이 살래요> 드라마 보면서 같이 살고. 장미희는 아프면 안 돼! 장미희 아프면 나는 드라마 안 볼 거야. <같이 살래요>드라마를 그렇게 많이 본답니다. 왜냐하면 장미희 때문에. 이쁜 거는 이쁜 거죠. 장미희가 이쁘나, 예수님이 이쁘나 지금..., 대화 상대가 아니잖아요.
제가 주일날 그런 설교했잖아요. 유치원에 난동부리는 사람 들었지요. 난동부리면 바깥에 뭐가 튀어나옵니까? 애들이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애들이 유치원에 가서 왜 튀어나오는가 하면 “저 안에 뭐 있어요.” 라고 고자질하는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육의 열매가 튀어나오는 것은 우리 안에 누가 있다? 십자가가 있는 거예요.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바깥에 뜯겨나갈 것들이 우리 평생을 통해서 다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매일같이 떨어져 나갈 것들이.
그러면 ‘내가 육의 열매를 또 만들어야지.’ 이러면 또 뭐가 옵니까? 다시 나에게 치중하게 돼요. 집중하게 되어버려요. 뜯어져나가면 그것도 주께서 자기 숙제한다고 이런 것들을 면면들을 보이는 거죠. 주님의 자기 일이다. 말씀의 일이에요. 말씀되게 하는 일인데, 그걸 자꾸 우리 책임으로 가져오면 안돼요. 우리는 책임 못 집니다.
우리는 존재 없는 존재자가 아니고 그냥 존재자에요. 그럼 존재 없는 존재자할 때, 지금 다루어지고 농락당하고 있는 입장인데 지가 주인이 아니잖아요. 주인이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나를 관리합니까. 나를 관리한다는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오신 거예요. 또, 또 다른 주인 없다 말이죠.
다시 야고보서4장 돌아가 봅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서 나오느냐, 이거 이야기했다고 그 다음날 이거 본 사람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안 싸울게요. 안 싸울게요. 그래서 내가 싸웠더니만 우리 애한테 성적 내려갔구나! 야고보서4장도 못 지키고 내가 앞으로 안 싸워야지. ‘앞으로 안 싸워야지.’가 아니라 있다가 더 심한 싸움이 이제는 계속 일어날 겁니다. 그것도 세밀하게. 이건 싸움 아닌데 하는 것도 싸움이에요.
“이거 더 드세요.” “아이고, 많이 먹었습니다.” “아니, 드시라니까.” 이것도 싸움이잖아요. 하는 것마다 싸움 아닌 게 없어요. 그럼 오늘 해석은 뭐냐, 싸워라. 싸워라. 이제는 싸움 아닌 것도 싸움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이게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그 이유가 여기 뭐냐 하면, 바로 니가 싸우는 이유가 욕심 때문에 그렇다고 되어있어요. 욕심 때문에. 그럼 욕심 때문에 있다는 말은요, 사실은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하나마나에요. “니 욕심 있다.” 라는 말은 니가 그 욕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자기를 오인해가지고 욕심 있다 하니까 욕심을 지 힘으로 뺄 수 있겠어요? 못 뺍니다. 그러니까 또 마귀에 넘어간 거예요. 빠지지도 않는데 지가 빼려고 하니까 점점 자기는 어떻게 됩니까? 곤궁에 빠지는 거예요. 딜레마에 빠지는 거예요. 빠지면 더 빠지게 되어있어요. 아~~ 나는 안 돼! 나는 천당 못가. 이리 되는 겁니다. 이게 전부 다 속임수라 보시면 돼요. 우리가 세상사는 것이 속임수에 푹 젖어서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이거는 은혜를 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도저히 마귀의 손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일단 10분 쉬고 빠져나갑시다.
■안양20180914b야4장1절(싸움)-이 근호
첫 번째 시간에 중요한 것 다시 이야기하게 되면, 말씀을 해석을 할 때는 지킬 생각하지 마시고 현 지금 내 모습이 이렇다는 것을 말씀이 있기 때문에 적나라하게 다 보여주는 거예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 있느냐, 할 때는 “저는 싸운 적 없습니다.”라고 하게 되면 그건 잘못된 게 지금 안 싸우는 상황 속이기 때문에 안 싸운 것이지 새로운 상황이 들이닥치면 필히 죽기 살기로 싸움하게 되어있어요.
여기2절에 봅시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되어 있잖아요. 여기 살인이라는 말 나오잖아요. 그럼 우리는 살인하고는 전혀 동떨어진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런데 살인하고 싶은 사람이 살인 취미가 되어서 살인하는 건 아니거든요.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못한다 말이죠. 이 말은 결국 뭐냐 하면 니가 살인하더라도 니가 유별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는 겁니다. 평생 나는 살인 안하고 살고 싶다는 것은 니 희망사항이지만 내가 살인하게 되면 살인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러한 말씀을 주시는 것은 바로 존재자에 대한 존재 없는 존재자의 말씀이 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인간에 대한 인간이기 때문에 손에 잡히지 않고 붙잡을 수 없고 그런 겁니다. 만약에 주님이 이 건물에 있다 하면 줄 서서 난리 나요. 줄 서서 난리 나가지고 얼굴 보려고 전부 다 스마트폰해가지고 완전히 방탄소년단 온 것처럼 찍을 거예요. 그러면 자릿세 받을 거고 그러면 돈 있는 사람은 볼 거고 돈 없는 사람은 받지도 못하고 그럴 겁니다.
주님께서 임재 할 때 어디에 임재 하느냐 하면, 어디에 임재할지 궁금하지요? 주님이 임재 하는 자리는요, 말씀이 있는 곳에 주님이 오셔요. 말씀부터 먼저 던지고 그 던진 말씀에 주께서 오시는 겁니다. 어릴 때 했던 애들 초등학교 때 했던 놀이 있지요. 앞에 1번, 2번 그어놓고 3번, 4번, 5번, 제일 밑에 7번 그어놓고 돌 던져놓고 디디고 가잖아요. 먼저 돌을 던져놓고 그 2번 던진 돌에다가 밟고 오잖아요. 말씀을 던져놓고 오시는 거예요. 말씀에 응하게 함이라는 원칙을 그대로 실행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 말씀을 주실 때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이 말씀을 현장성에 대한 이 말씀이 그대로 살아난다는 현장성을 원한다면 우리는 거기에 말려들게 되어있어요. 주님이 말씀으로 타일을 깔 때 그 타일에 나타나는 모자이크처럼 한 무늬가 우리의 성도의 모습으로 무늬가 비쳐지기 때문에 그래요.
진짜 주님 앞에서의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나는 몰라요. 말씀으로 이렇게 구조가 되어있는 말씀이 엮여져서 나오는 그 모양새가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두 가지일까요? 세 가지일까요? 한가지일까요? 성도는 한 가지이지요. 다 한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전부 다 공통의 재료가 거기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성도는 어떤 모습인가, 말씀대로 생겨먹은 사람들 이게 성도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말씀 완성에 작품. 그 말씀 완성을 3자로 하면, 다 이루었다. 십자가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말씀이 이렇게 구성되게 되면 옛날에 있던 나는 어떻게 될까요? 나는 거기에서 흔적이 지워지겠지요.
그 지워지는 것이 고린도후서12장1절,2절에 나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 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신다고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 앞에 뭐를 내놓느냐 하면, 나는 그 다음에 뭡니까? 나는 모르거니와 되어있지요.
성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분석하지 마세요. 몰라도 돼요. 주님이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내가 관여할 수 없는 내가 굳이 알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요. 내가 안들 주님이 친히 만든 작품에 내가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무슨 기여가 되겠어요? 착한 일 하나 한다고 해서 내가 더 훌륭하게 되어지는 거 아니거든요. 행함의 가치의 누락입니다. 그냥 믿는 것이지 행함의 가치가 누락되는 거예요. 내 행함은 어떤 것도 거기에 현재 내 목숨에 현재 이 존재에 있어서의 어떤 보탬도 거기에 줄 수 없습니다.
무익하나마 부득불 뭐만 하면 된다? 나는 자랑하노라. 사도바울이 은혜를 받고 난 뒤에 삼층천에 가고 난 뒤에 자기가 자랑할 게 있는데 뭐냐 하면 뭘 자랑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나를 셋째 하늘로 오게 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셋째 하늘로. 내가 갔다는 걸 자랑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께서 사도바울이 셋째하늘만 자랑하겠어요? 주께서 사도바울이 고난 받는 것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도 주께서 하신 거죠. 어딜 가나 주님은 어디 계신가, 말씀이 말씀대로 실현되는 그곳에 주와 함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디 있느냐, 성도는 바로 성도 안에 주님이 계신 거죠. 성도 자체가 주님의 작품이니까.
조각가가 자기 조각품을 만들어 놓고 내몰라라 하지 않지요. 아~ 다음에 작품 구상을 저 모습을 이렇게 바꿔볼까, 매일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나를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주님이 나를 더 생각해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그 이상으로 나를 더 사랑하는 겁니다.
자기애가 얼마나 지독합니까. 자기 연민. 하지만 그것보다 더 불쌍히 여기시고 더 아끼시고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귀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만들어준 말씀이 귀해서 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말씀되게 했던 모든 말씀이 다 이루었다 그 십자가의 복음이 귀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아까 첫째시간에 했던 거 이야기 해봅시다. 지배의 반대말을 제가 은혜라 했지요. 그런데 처음에는 뭐라고 했습니까? 지배의 반대말을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이에요. 사랑. 노래가 이런 노래가 있어요. 그 사람 나에게만 보여요. 하는 가사가 있어요. 이은미가 불렀던 <애인 있어요.> 노래가 있어요. 그 사람 나만 알고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그 사람 내 눈에만 보여요. 존재자 없는 존재지요.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에요. 지금 이은미란 가수가 그 사람 내 눈에만 보인다는 말은 남자한테 굳이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거예요. 누가? 자기가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나 된 거죠. 이걸 살짝이 그 사람에다가 예수님을 대비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대비해 보면, 우리가 남한테 전도하고 싶고 뭔가 복음을 전하고 싶어도 주님께서 허락한 사람에게만 전해야 돼요. 개 같은 인간한테는 복음을 전하면 안돼요.
그러면 목사님! 개 같은 인간과 아닌 인간과 어떻게 구분합니까? 다 개입니다. 고민할 필요 없어요. 다 개라고 보세요. 명절날 개들 다 모입니다. 일가친척 왕왕 짖거든요. 문재인 이야기하고 다 개인데, 혹시 그 중에 개아닌 사람이 있거든요.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적을 받은 거예요. 개는 개에요. 원래 인간은 처음부터 날 때부터 귀신 들려서 전부 다 개 같은 존재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옛날에도 우리가 성령오기 전에도 우리가 동일한 개였습니다. 최 개, 김 개, 박 개, 전부 다 개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사랑을, 성령의 사랑을 요한일서에 보면 성령을 사랑의 영이라 하거든요. 사랑의 영이 오니까 성령을 안다는 것은 사랑을 안다고 되어있어요. 주님의 사랑을 아니까 다른 말로 성령을 받았으니까 그때부터 우리는 뭐냐 하면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요, 라고 되어있어요.
제가 설교를 여러 번 했는데 전에 이걸 강조한 이유가 있어요. 자꾸 앞에 것을 빼고 이야기해서 내가 답답해서 하는 겁니다. 여기 요한일서4장10절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사랑은 이미 존재한다는 거예요. 사랑을 찾을 생각을 하지 말라니까요. 사랑은 여기 이미 있어요. 있는데, 못 알아봐서 문제지요. 사랑은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이걸 왜 자꾸 빼는 것 때문에 제가 불만이 많다 이 말이지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라는 말을 왜 집어넣었느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어떠한 능력도 없던 존재란 말이죠. 사랑도 아니면서 예수님 믿겠다. 그건 수작부리는 거예요. 그래도 사랑으로 믿었잖아요. 아니요, 사랑으로 믿었으면 주객이 바뀌어져야 되지요. 말을 똑바로 해야 돼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그것이 믿음이지 “나는 예수 믿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이러면 앞뒤가 둘이 서로 안 맞는 것을 강제로 엮인 게 돼요. 정말 믿음이 있으면 “나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스스럼없이 나와야 되지요.
그럼 내가 사랑하지 않았는데 주님이 사랑했다면 동시에 뭐냐, 요한일서4장18절에 보면, 사랑 안에는 뭐가 없느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뭐를 내쫓는가, 두려움을 내쫓는 거예요. 내쫓는다는 말은 우리에서 두려움이 나온다? 안 나온다?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야기 논리가 어렵지요. 제가 왜 이런 어려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자꾸 공부하고 돌아서면 자기 관찰하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탐색하고 자기 관찰하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두려움이 나온다는 말은 쫓겨나온 거예요.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그럼 내어 쫓겨나온다는 말은 어떤 말이냐 하면 우리에게는 두려워할 만한 가능성과 요소가 있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마귀를 보내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 대해서 뭘 모릅니까? 우리가 깜짝 놀라고 벌벌 떠는 일들 유발해요. 유발하면서 이 원인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 내가 성도라 하면서 왜 벌벌 떨지. 보니까 뭐를 잊어버렸어요? 내 몸이 내가 관리할 대상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숙제물이라는 것을 또 잊어버린 거예요. 주님의 말씀 때문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내게 필요한 말씀으로 내가 소유하려는 옛날 버릇이 또 튀어나온 거예요. 그렇게 해서 자기 잘못을 알지요. ‘내가 잘못이구나!’ 아는 순간 우리에게는 뭐냐 하면 전에 예상 못한 고마움과 감사와 자유가 확 밀려옵니다.
그 자유라는 게 뭐냐 하면 뭘 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이젠 누구 시선이나 어떤 것도 상관없이 막살아도 된다는 거예요. 그럴만한 권리가 있고 자격이 있다는 거예요. 그걸 새삼 아는 겁니다. 제발 바라기는 10초 이상 가기를 바랍니다. 한순간이라도 좋으니까. “그래, 이거야.” 옛날에 감사하려고 해도 억지로 감사가 됩니까. 하나님을 기뻐하라 해서 기뻐해도 안 되고. 영혼도 도대체 내 쪽에서 실시해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성경 말씀대로 믿고 싶어도 잡생각이 들어서 믿지도 않고. 두려워하지 말라 해도 두려움이 생기고. 내 힘으로 안 되는 걸 가지고 어느 날 한 순간에 탁오니까 ‘내가 도대체 무엇에 지금 벌벌 떨고 있는 거야. 내가 미쳤어. 내가 내 자신을 또 착각했구나!’ 라는 걸 아는 그 순간, 어디를 고치면 내가 괜찮습니까. 고칠 생각을 했던 이 자체가 잘못된 인식이라는 거예요. 내가 고쳐서 달라지겠다는 이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는데. 그냥 나는 나대로 살면 되거든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러한 나를 사랑하신 분이 있거든요. 내 눈에는 그 사람만 보여요. 그러면 그 사람만 상대하면 돼요. 사람은 인간하고 상대할 필요 없어요. 자식이든 가족이든 상대할 필요 없어요. 나는 그 사람만 상대하면 돼요. 집에 가거든 애인 있어요. 노래 한 번 들어보세요.
<애인 있어요.>
아직도 넌 혼잔거니 물어보네요 난 그저 웃어요
사랑하고 있죠 사랑하는 사람 있어요.
그대는 내가 안쓰러운건가봐
좋은 사람 있다며 한번 만나보라 말하죠
그댄 모르죠 내게도 멋진 애인이 있다는 걸
너무 소중해 꼭 숨겨두었죠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내 입술에 영원히 담아둘 거야
가끔씩 차오르는 눈물만 알고 있죠
그 사람 그대라는 걸 나는
그 사람 갖고 싶지 않아요
욕심나지 않아요 그냥 사랑하고 싶어요
그댄 모르죠 내게도 멋진 애인이 있다는 걸
너무 소중해 꼭 숨겨두었죠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내 입술에 영원히 담아둘 거야
가끔씩 차오르는 눈물만 알고 있죠
그 사람 그대라는 걸
알겠죠 나 혼자 아닌걸요 안쓰러워 말아요
언젠가는 그 사람 소개할게요
이렇게 차오르는 눈물이 말하나요
그 사람 그대라는 걸
자, 그 다음부터는 그렇게 10초 유지된다고 치고 요 순간에 놓치면 안돼요. 빨리해야 돼. 빨리하고 우리 안에 뭐가 들어있나 봅시다.
우리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야고보서4장에 보게 되면 너희 안에 정욕이 들었다는 겁니다. 이제는 느긋한 마음으로 수술대에 누워가지고 경상도 말로 ‘째소! 마음껏 째서 온갖 더러운 걸 다 벗겨내도 저는 꼭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칼질 하시는 주님 앞에 몸을 편안하게 맡기면 돼요.
째보니까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정욕이 들었고 3절에 나오지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지금 4번째 합니다. 성경해석 어떻게 한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겁니다. 이래 살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이렇게 살고 있으니까 지적질을 하시는구나!’ 라고 받아들이면 돼요.
오늘 끝날 때까지 몇 번 더할지 모르겠지만, 몇 번 더 해야 돼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 할 때에 우리는 바로 이 사람이 저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라고 하면 돼요. 뭘 해도 괜찮으니까. 아니, 정욕이 없어요? 있잖아요. 욕심이 없어요? 있잖아요.
남들은 나를 위로하려고 하는 타인인데, 그게 아니고 주님은 제대로 된 타인이에요. 내가 오인한 나를 제대로 칼질하셔가지고 쫙 절개하셔가지고 이거 들어있다고 완전히 해부학시간이에요. “이거, 이거 정욕 들었다. 그런데 이 정욕이 어떻게 잘못된 줄 모르지? 알려줄까? 이 정욕으로 기도하니까 니가 기도 응답이 안 되는 거야.” 그리고 정욕으로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 하면 4절에 나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세상과 벗된 그것을 간음이라고 보는 겁니다.
자, 여기서 이 의식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구약에서 나왔어요. 조금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간음. 간음이란 요소는 십계명에 나오지요. 십계명이 위에서 보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개지요. 열 개가 하나로 묶여있어요. 어디에 묶여 있느냐 하면 제1계명에 묶여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러면 여기서 탐내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죽 이것이 하지 마라, 마라 하면서 하게 되면, 아까 성경 말씀에 다섯 번째 이야기합니다.
뭐 하지 마라라는 말은 그럴 수 있는 잠재력과 능력을 상황만 맞게 되면 바로 튀어나온다고 하는 거예요.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런 일이 많았고요. 특히 사사기에 보면 이웃나라를 더 좋아하는 이유가 탐심 때문에 그래요. 그 탐심을 간음이라 합니다. 이웃나라 종교의 간음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어디를 묶느냐,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그러한 가능성, 그러한 잠재성을 갖고 있는 것이 현재 너희의 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 외에 다른 신 할 때, 다른 신 안 섬기고 나를 섬기면 되는 게 아니고 다른 신을 섬긴 나라는 것을 먼저 구축해야 비로소 그 다음에 여호와가 제대로 된 모습으로 여기서 연결이 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주변에 전부 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들이 있는데 다른 신이 뭐냐 하면 십계명을 옹호하는 쪽을, “사람이 살다보면 그런 수가 있지.” 하는 전부가 우리 속에 있는 십계명에 위반되는 것을 오히려 격려해주는 그러한 신들이에요. 그런 신들이 죽 나오거든요.
그 대표적인 것이 다른 신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무당입니다. 무당의 특징은 이론적 무당 말고 굿하는 무당, 신기 있는 무당들의 특징은 어떤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목소리를 변신이 가능해요. 어린애는 어린애에게, 노인은 노인에게, 변신이 가능하다는 말은 전부 다 동일한 귀신한테 다 묶여있다는 말이죠. 같은 마귀한테 다 묶여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귀신이 이 무당이 굿을 할 때, 목적이 뭡니까? 어떤 상태가 되기를 기대해서 굿하는 무당을 부른 겁니까? 무엇을 기대하는 거예요? 옛날에 병들기 전에 집안의 꼴이 괜찮게 되었을 때 그걸 뭐로 보느냐, 자기의 정상적인 자기의 본 모습이라고 해주겠지요. 무당은 그걸 맞춰서 그 상태 되기를 해주는 겁니다.
집안에 만약에 애가 병이 났다. 병원에가 봐도 못 낫는다. 그러면 굿을 하잖아요. 그러면 그 애가 나중에 올림픽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굿을 하는 겁니까? 아니지요. 아프기 전의 그 상태지요. 그 상태만 되면 그 무당은 돈 버는 거예요. 무당이 돌려주는 건 뭐냐 하면 인간 자체가 문제가 없는 상태라는 인간 본래의 죄악 된 모습이, 자기사랑이니까 나는 누가 뭐래도 나는 괜찮은 존재라는 고 자리까지 다시 딱 돌려주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애가 병들었는데 그것은 안 괜찮다는 겁니다. 그런데 병 들은 게 왜 안 괜찮지요? 왜 어떤 근거에 의해서 병 든 것은 나쁘다고 보는 이유가 뭡니까?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남들이 다 안 아프니까. 어떤 만약에 포로 잡혔는데 남들이 전부 다 같이 건빵 2개가지고 아침을 때운다면 건빵2개 주는 것이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지요.
그런데 같은 포로인데 건빵2개주는데 지는 한 개 주면 어떻습니까?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원숭이하고 똑같아요. 아침에 4개주고 저녁에 3개 주다가 아침에 3개주고 저녁에 4개 주니까 막 화내는 거예요. 다시 아침에 4개주고 저녁에 3개 주니까 좋아하는 거예요. 합해봐야 7개인데. 똑같이 7개잖아요. 똑같은데 서로 비교하는 거예요.
결국은 무당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살아가는 이것 말고 다른 어떤 현실은 있다? 없다? 없다는 겁니다. 땅의 세계가 전부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무당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고 오늘날 교회에서도 교회 참석한 모든 사고방식이 죽여주옵소서. 하는 게 아니고 이 하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서 옛날처럼 원상복귀해달라고 교회 오는 사람이 대부분일 거예요.
그냥 원상복귀 된 사람은 그냥 시간 때우러 왔다 하고 갑자기 김 집사가 그만 같이 무심코 다니다가 갑자기 통곡하고 쭈여! 하는 것 보니까 무슨 일이 있어. 원상복귀해달라고. 갑자기 봉투해가지고 감사헌금하고 뭔가 옛날에 무당 찾던 그 마음, 그대로 가는 거예요.
그 헌금 행위 모든 행위가 무당 짓이에요. 마귀가 시킨 짓이라니까요. 귀신은 아주 가까운 친숙한데 있어요. 그 존재 없는 존재자는 아주 가까운데 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친한 친구처럼. 대화도 잘 되고.
개인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변화들이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파생된 결과라는 겁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그러면 다른 신이 있는 인간은 인간들이 아무리 해봐야 다른 신의 굴레에서 벗어납니까? 못 벗어납니까? 못 벗어나지요. 그러면 이쪽에서 다른 신에 속했던 쪽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건너뛸 수 있는 능력은 이쪽의 신이 용납을, 허락을 안 하지요. 백날 노력해도 그건 안 됩니다. 그럴 때마다 여기 누가 개입하느냐, 선지자가 개입해요.
선지자의 희생이 개입합니다. 이게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가 개입해요. 이걸 하나의 간단한 공식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육과 영 사이에는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들어가는 겁니다. 이 공식이지요. 행해서 자기 욕심을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욕심 버린 그것이 나의 우상이 되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못 버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일단 선악과 따먹고 창세기3장에서 일단 신이에요.
혹시 여러분, 부산강의에서 하체라는 제목의 강의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 여자는 뭐냐 거기서 여자는 신이라 했거든요. 남자는 자기가 신이라고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남자의 특징이라면, 여자의 특징은 신이면서도 아닌척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눈물 흘리는 신이라 했거든요. 눈물 흘리는 신.
왜냐하면 선악과 따먹고 누구나 신이에요. 그러나 여자는 소극적 신이에요. 누구한테 기대가지고 빼먹을 생각하지요. 남자는 허세덩어리 신. 그러니 남자가 등신이지요. 내놓을 거 다 내놓고 다 빼앗겨놓고 그래도 나는 신이다. 이러고 있다 말이죠. 술 먹으면서. 술 먹는 이유가 신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먹어요. 허세하기 위해서. 허풍과 허세.
그런데 결국 이건 뭐냐 하면 오늘 본문대로 이야기하면 성경에 보면 마귀를 세상 신이라고 했어요. 세상에서 가장 친숙한 신은 세상에서 원하는 하나님은 마귀입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있는 인간과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는 신은 악마에요. 그래서 모든 교인들이 믿는 신은 뭐냐, 악마를 믿고 있어요. 악마가 아닌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인간에게 무시당한 그분이, 무시당한 메시아만이 하나님이에요.
앞에 무시당함. 성경대로 하면 핍박받는 분. 그분이 하나님이에요. 다른 하나님은 없어요. 인간이 상상한 것은 인간이 상상했기 때문에 그것은 어디서 통하느냐 하면 악마와 통해요. 마귀와 통합니다. 그래서 모든 목사들이 기도나 설교가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하나님부터 출발해요. “여러분이 하나님 다 알잖아요.” 이런 식이에요. 하나님 알지요. 그 마귀로부터 만든 인간이기 때문에 마귀로부터 있는 심성이니까 하나님을 모를 리가 있겠어요. 중도 넘어지면 아이구 하나님! 하고 있는데. 중들도. 스님들도. 아이고~ 하나님! 하는데. 하나님 모를 리가 있어요? 다 알지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왜 죽였습니까? 사울이란 사람이 그 예수 믿는 사람을 왜 잡아 죽였습니까? 누구한테 충성하려하는 거예요? 이름이 뭡니까? 여호와에요.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자기를 몰라도 너무 모른 거예요.
성령이 우리한테 왔다는 것은 곧 우리에게 나온 모든 것이 의는 없나니 죄밖에 없다는 로마서3장8절의 말씀, 그게 말씀이지요. 말씀이 말씀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신 거예요. 아까 처음에 말씀 앞에서 우리가 살아야 된다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모든 것은 말씀에 위배돼서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말씀 앞에서 우리는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안 내세우면 돼요. 뭐든지 이 주스 먹는 것도 말씀대로 먹는 거예요.
자, 주스 먹는 것이 어떻게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는가 논문 써봐라. 논문 간단하지요. 이걸 먹고 싶을 때 이미 나는 이걸 먹고 마시고 싶다는 나의 죄가 나오지요. 그 죄와 십자가의 피 흘리심과 관련시키면 딩동댕~~정답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자체가 이미 피 흘림을 전제로 하고 있잖아요. 피 흘림을.
언젠가 간증에 대해서 그런 이야기했는데요. 정말 간증이 옳다면 그 간증대로 당신 때문에 세상 천지에 달과 해와 별이 변해야 된다. 심지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믿음으로 인하여 나무가 뽑혀서 바다에 빠져야 된다. 그렇다면 간증해봐라. 간증하는 순간 뭔가 해가 달라지고 해가 중천에 떠있나? 없지요.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증을 안 받는 거예요. 우리의 믿음도 안 받는 거예요.
세상이 달라지고 천지가 달라지는 것은 누구 때문에 그런가 하면 우리 때문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계약이에요. 창세전에 계약이 그렇게 되어있어요. 예수님이 움직이면 새로운 현실 판이 만들어지기로 그렇게 약조가 되어있어요.
우리가 만든 현실 이것은 현실 하지 말고 세상이라 하지요. 우리가 택한 세상은 우리 정당화 때문에 있는 세상이고, 원래 진짜 세상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예수님 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만든 피조세계입니다. 방금 한 이야기는 그것은 지적으로 여러분들이 숱하게 알고 있는 거예요. 알고 있으면 뭐합니까? 거기에 새로운 느낌이 없는데. 그럼 그 느낌은 누가 막았어요? 내가 안다는 것이 실재하는 느낌을 내가 막아났어요.
주께서 움직이는데 내가 턱하니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내 안다가 주님의 십자가를 앞에 깡패도 아닌 게 턱 틀어막고 있는 거예요. 세상이 오라. 나를 위하여. 이런 식으로. 나 기도한다. 응답되게 하옵소서. 신도 아닌 게 꼬마 신이 신의 흉내 낸다고. 그래서 3절에 보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다른 말로 하면 니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해도 하나님처럼 못 되는 이유가 니 안에 절개해보니까 뭐가 있습니까? 정욕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묻습니다. 정욕이 셉니까? 내가 셉니까? 정욕이 세지요. 다른 말로 하면 욕심이 셉니까? 내가 힘이 세요? 욕심이 힘이 세지요. 그러면 우리는 욕심을 내가 다룰 수 있어요? 없어요? 다루지 못하는 겁니다. 다루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가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강남에서 잘사는 여자들의 욕심이라는 것은 아무리 낮추고 낮추어도 그 하한선이 어지간한 촌의 할머니의 상한선을 뛰어넘습니다. 잘사는 동네의 하한을 아무리 낮춰도 나 이정도 낮추는 것도 나한테는 힘든 거다. 낮춰봐야 못사는 사람들은 포시럽다는 말을 알아요? 너무 여유롭다. 그런 뜻이지요. 너무 여유롭게 산다. 이런 뜻이거든요.
아무리 힘들다, 힘들다 해도 그 이미 가진 자 앞에서는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자식이 세 명인데 둘이 군에서 죽었다. 한 명 남았으니까 감사한다. 이 말을 아예 군에 안 보내는 집안한테는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왜 그러냐 하면 각자 신이기 때문에. 모두가 신이거든요. 신은 누구하고 비교대상이 안 됩니다. 절대적이어야 돼요. 최고가 되어야 돼요. 신은 소유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싸워요. 나는 누구의 소유가 안 되기 위해서 애를 쓰며 싸웁니다. 그게 부부싸움이라 하는데.
부부싸움은 옳고 그름이 아니고 내가 니 소유가 되지 않겠다는 악랄한 버팀이지요. 악랄한 버팀이에요. 쓸데없는 반항기고. 싸우다 보면 이유가 없어요. 자존심 싸움밖에 안돼요.
이 세상 자체가 오늘 본문에 보면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그 다음에 뭡니까? 세상과 벗된 것이 뭐다? 하나님의 원수지요. 여섯 번째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그리 살고 있다는 거예요. 살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그리 살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그 삶에서 우리가 고친다? 못 고친다? 고치지 못합니다.
아무리 하나님, 하나님해도 현찰 몇 억 들어오면요, 최고지요. 그런 남편 최고 남편입니다. 이건 못 고칩니다. 왜냐하면 우린 나를 몰라요. 나라는 것은 내 몸에서 나라는 것은 껍데기 부분이 나고 알맹이는 욕심이에요. 정욕이 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안 되잖아요. 이게 세상 사람이 똑같아요. 그런데 이 성에 누가 들어왔다?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오고 십자가가 들어온 거예요.
십자가 들어왔으니까 비로소 내가 몰랐던 나를 알 수 있는 겁니다. 아! 여기 오늘 좋은 거 주셨는데. 초코렛으로 보이지요. 깨물어 보면 안에 하얀 크림이 들어있어요. 바깥에서 보면 모르지요. 신자, 불신자 똑같아요. 안에 들어가 보면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있으면 비로소 자기가 바깥에 나는 웃으면서 기분 좋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거 고백하는데 하나님의 천사까지 동원됩니다. 그 고백하는데.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말씀에 맞춤된 인간되기 위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에 합당한 말씀이 되려면 정말 그런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인간이 나타나야 예수님 말씀에 일관성이 있어요. 그렇다면 주의 말씀도 말씀이고 도저히 성도될 수 없는 나도 그 말씀에 옳소이다. 하는 것도 주님의 솜씨이고 능력이지, 우리 솜씨 능력 아닙니다.
아까 했던 거 마태복음10장 다시 한 번 볼게요. 29절에 보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 이렇게 되어있다 말이죠. 말씀이지요. 그러면 이 말씀 보면 우리는 이 말씀 보고 약간 겁을 집어먹어요. 뭐냐 하면 요거 참새한테나 적용시키고 나한테는 좀 적용 안 시켰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허락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우리가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는 그 내용이잖아요.
이게 남의 이야기는 아주 편하게 볼 수 있는데 막상 당사자 나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라면 내가 오늘 죽어야 될 한 마리의 참새라면 아우! 안 돼! 지금 애가 고3이라는 말이지요. 내가 죽으면 공부 안할 거고 낙심해서 재수하면 안 되잖아요. 자식 봐서라도 나는 죽으면 안 돼. 나는 아직 우리 딸이 시집을 안 갔어. 결혼식 때 봐야 돼. 여러 가지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신으로 보기 때문에 이 세상이 내 보기에 좋은 세상 되는 그 희망을 포기 못하기 때문에 이런 말씀도 우리는 튕겨버리는 겁니다. 튕겨버리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또다시 주님 말씀 앞에 뭐로 등장합니까? 의인이 아니고 죄인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그 죄인과 주님 사이에 무슨 다리가 연결되어있습니까? 하나님의 의. 누구 공로? 주님의 공로와 솜씨와 주님의 사랑만 빛나게 되는 겁니다. ‘아~ 이런 저질도 사랑이 되는구나! 천국 가는구나!’ 라고 되는 거예요.
누가복음16장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 나오지요. 그 잘난 바리새인 앞에서 주께서 뽑아낸 모델이 청지기가 불의한 청지기에요. 횡령해먹은 사람입니다. 횡령했다고 자살 같은 거 하지마세요. 검찰청 왔다 갔다 했다고 자살하지 마세요. 천국 갈 사람인데 말씀으로 그렇게 횡령하게 하신 거예요. 돈을 보고 탐이 나도록 한 거예요. 사실은 나도 탐나고 너도 탐나는데 하필이면 고 스케줄이 내가 탐나는 스케줄 돼서 내가 탐을 내고 돈을 횡령한 겁니다.
그런데 그 횡령한 이유가 뭐냐 살고 싶어서. 퇴직하고 난 뒤에 돈 빼내가지고 살고 싶어서 그런 짓한 거예요. 절실하게 절절하게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다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이 불의한 청지기처럼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얼마나 하나님 말씀이 과격해요. 급진적이죠. 과격하고. 니가 내 말을 이해하려면 이해해봐. 못 따라와. 니가 니한테 니 자신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고 니 자신을 곱게 보는 한 니는 내 이 말씀은 이해 못할 것이다. 단절을 딱 만들어 놓아 버리지요. 자기 사랑을 못 지키게 하려고.
그래 놓고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건너온 겁니다. 그렇게 해서 충분하게 우리가 이 세상에 뭐가 되느냐 하면 숙성되어야 해요. 죄로. 그리고 여기서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이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된 자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제가 묻습니다. 이 세상에서 죄를 열 개진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입니까? 두 개진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입니까? 똑같지요. 세상자체를 우리가 벗어나지 못하는 한 태어날 때부터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생일축합니다! 하든 태어날 때부터 돌 사진 찍을 때부터 원수에요. 돌 사진 앞에서 실 놓고 마이크 놓고 이렇게 하잖아요. 돈 놓고. 원수가 원수를 교육하듯이 그렇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라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끼리는 안 통합니다. 아무도 그걸 규정할 사람이 없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진짜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피를 입은 당사자가 “니가 나를 핍박했잖아.” 라고 분명히 할 수 있는 그 분이 우리에게 원수가 됩니다.
다시 합니다. 육과 영 사이에 뭐가 들어갑니까? 한 번 해봅시다. 육과 영 사이에, 육에서 영이 될 수 없습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아무리해도 영이 될 수 없어요. 그 사이에 뭐가 들어간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들어가요. 십자가 죽음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요거 여러분들이 동의하십니까? 동의한다면, 모든 말씀 안에 뭐가 들어있다?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있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죽을 때 혼자 죽었습니까? 택한 백성 죽음도 같이 껴안고 죽은 거예요. 같이 갔지요. 그러면 모든 말씀 안에 뭐가 들었다? 나의 죽음이 들어있지요. 그럼 말씀 해석에서 뭐냐, 나는 왜 죽을까, 그걸 끄집어내는 해석이 OK. 그리 해석하면 됩니다. 논리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말씀으로 내가 죽어 마땅함을 아는 것이 제대로 된 성경 말씀이에요.
자, 어느 교회 목사가 설교합니다. 설교내용이 옳으냐, 그르냐 보려면, 여러분! 이 말씀이 다 보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여러분 그만 살고 우리는 죽어도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하고 설교 끝내면 그 사람은 제대로 된 설교하신 사람이에요. 그 교회, 장로교회면 쫓아낼 거예요. 난리날 거예요. 우리는 이만큼 살아도 많이 살은 거예요.
경상도 말 이렇게 있지요. 많이 묵었다. 그만해라. 하는 말이 있지요. <친구>영화에 보면 장 동건이 그런 말하지요. “니가 가라. 하와이. 마니 묵었다. 아이가. 고마 해라.” 하는 것처럼 우리 이만큼 살아도 많이 살은 거예요. 오래 사는 것이 성공이 아닙니다. 타향에서 오래 돌아다니는 것은 노숙자만 하는 짓이지 빨리 저 위로 가야지요.
여러분, 귀찮겠지만 골로새서 찾아봅시다. 골로새서3장1절부터 3절까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지키라는 이야기에요? 이미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입니까? 됐다는 이야기지요.
그러니까 우리를 다시 살렸다는 말은 지금 상태가 죽은 상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죽고 난 뒤에 다시 삶을 받고 이 세상을 배회하고 있는 중입니다. 제목을 오늘 또 배회라고 바꾸고 싶다. 오늘 왜 이러나 몰라. 우리는 이 땅에 어슬렁거리고 있는 중입니다. 애 한 번 키워볼까. 어슬렁거리고.
(질문: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 말씀은 우리가 땅을 계속 생각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계속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말씀은 우리보고 말씀대로 못 지켜서 죽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거예요. 그 때 말씀이 계시는 곳에 누가 계시다? 주님이 계셔서 우리가 이미 살았다는 것을 또 다시 확인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라 해가지고 늘 이렇게 유지되는 게 아니에요. 성령께서 다루고 있다는 말은 뭐냐, 필요할 때마다 그 말씀과 더불어서 사도바울이 자기 자신을 알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사도바울이 해야 될 일이고 우리가 저녁에 밥 짓는 것은 이건 우리가 해야 될 일이에요. 그래서 밥 안 짓고 저거 한다고 또 거룩한 건 아니고. 모든 성도는 동일해요. 말씀이 때를 따라서 밥을 짓게 했기 때문에 짓는 겁니다. 그냥. 주께서 하게 하신 거예요. 밥 지으면서도 감사하지요. 밥되고 항상 기도하는 게 있어요. 제 아내가 그렇게 하거든요. 왜냐하면 제 아내 엄마가 우리 장모님이 사모님이니까 옛날 사모님이 이제는 95세인데 그 분이 옛날에 교회 다닐 때는 그 때는 목사가 밥을 주신 것에 감사하세요. 했다 말이지요.
감사하기 때문에 밥솥의 밥을 보면서 늘 감사하면서 인간인 이상 뭘 느껴요. 이렇게 감사하니까 내 자식 잘되게 해 달라 또 그렇게 했겠지요. 하여튼 간에 시킨 대로 한다고 감사하듯이 그걸 그대로 제 아내가 본보고 밥이 될 때마다 감사히 밥을 해요. 그런데 그걸 누가 본보냐 하면 내가 본본다니까요. 아내가 일 나가고 난 뒤에는 정히 내가 밥을 할 때는 내가 또 감사기도를 하게 돼요. 나쁜 건 아니잖아요. 또 이거 전파되면 안 되는데. 그 생각할 때마다 우리 장모님의 낮아진 마음이, 요새 밥 굶는 사람 없잖아요.
그런데도 그런 기도를 할 때마다 밥 굶을 수도 있다는 것. 밥 굶어도 우리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새록 새록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지요. 그렇다고 밥 먹고 더 세상에 살겠다는 것은 아니고요, 중요한 것은 주께서 살게 하셨다는 것. 이 밥을 통해서 살게 하셨다는 거예요. 맛있게 먹자. 그러나 더는 욕심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먹여줄 때만 먹이는 거예요. 참새를 허락한 것처럼.
자, 5절에 봅시다. 이제부터 약간 어렵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원수에요. 원수 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 우리가 나쁜 게 아니고 나쁜 짓을 해서 나쁜 게 아니고 세상의 산물이기 때문에 원수가 된 겁니다. 5절에 보게 되면,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사모라는 말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사랑한다는 말이거든요. 사랑하는 쪽이 따로 있고 우리는 무슨 대상이다? 그 사랑의 대상이에요. 제목 또 바뀌었다. 사랑의 대상.
우리는 내가 자꾸 사랑한다고 하지 마세요. 어쩜 그건 마귀가 시킨 짓이에요. 우리는 사랑 받고 있지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 사람이 아닙니다. 할 재주가 없어요. 사랑하지도 못하는 자를 계속해서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처음 할 때는 모르지만, 어떤 결과치를 봤을 때는 이걸 날마다 다시 한 번 자꾸 반복이 돼서 일어나는 거예요.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걸.
갑자기 무슨 노래가 생각나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니고 주님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사랑받기 위해서라면 내가 귀한 존재가 되어버려요. 그게 아니고 주님의 사랑이 나보다 더 귀하지요. 귀한 사랑을 받아 챙기는 하나의 그릇이지요. 그걸 자비의 그릇이라고 로마서9장에 보면. 사랑의 그릇이 있고, 진노의 그릇이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요거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 다음에 오면 사랑이란 사모하지요. 그럼 성령께서 어떤 특정인간을 사모한다는 말은 다른 인간은 사모한다? 사모하지 않는다? 사모하지 않는다. 이 사람 빼놓고는 나머지는 사랑합니까? 사랑 안합니까? 사랑 안하지요. 이걸 미움이라 하자는 말이지요. 사랑 안하면 미움이에요. 중간지대가 없어요. 사랑하지 않으면 미움이에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사랑하는데 미운 자식이 교회 다닌다고 끼어들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말씀이 용납을 안 합니다. 강하게 내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랑 받는 것만 기적이 아니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 듣는 그것도 주께서 그렇게 작용하게 하신 거예요. 마귀를 통해서. 사랑 못 받게 하시는 거예요. 미움 받게 하시는 겁니다. 에서 같은 경우에.
거짓말하는 게 나빠요? 잘한 거예요? 거짓말이 나쁘지요. 그런데 거짓말 나쁜 짓한 사람은 천국가고 거짓말 하지 않은 에서는 형은 지옥가지요. 왜, 주님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것이 짝이 있어야하기 때문에 그 짝이 뭐냐, 그 짝 역할 하는 것이 바로 에서의 역할, 미움 받는 지옥 갈 사람의 역할 하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8층 내려 가가지고 세상 거리의 사람들 보세요. 특히 담배피우고 가는 사람들 보세요. 주님의 기적입니다. 지 힘으로 담배 못 끊습니다. 천국 못 갑니다. 담배 피웠다고 지옥 가는 건 아니지만. 예를 들면 대부분 사람들 복음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들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들의 의지가 아니에요.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가 이 세상에 악마가 작용하고 주님이 작용하는 겁니다. 그래서 싸움과 그 결판은 악마와 주님과의 싸움이고 우리는 그 결과물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미움의 대상으로 삼지 아니하시고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는 것은 어떤 누구도 먼저 주님을 사랑한 적 없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주어진 줄 압니다. 하나님 우리가 사랑한 걸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저희를 사랑했음을 놓치지 않게 하옵시고, 그 사랑 앞에서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이 사라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