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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아빠와 함께 2024. 9. 17. 20:06

안양20180608a약2장14절(구성)-이 근호 목사

야고보서2장 14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말씀이 굉장히 쉬워 보이지요. 쉬워 보이는 이게 이제 함정이 되는 겁니다.

쉬워 보인다면 이건 구원이 안 된 사람이에요. 윤리, 도덕으로 빠져 나갈 가능성이 굉장히 많아요. 이런 본문이 윤리 도덕으로. 쉽다는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이것을 행하면 되지요.” 라는 그것이 쉬운 거예요. 이건 평소에 내가 뭐를 행하면 그 행한 것으로 천국 간다. 이게 평소 하던 것이 되어서 쉬운 거예요. 제가 이렇게 쉬워서는 안 된다는 말은 뭐를 여기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는 게 오늘 강의의 핵심 포인트인데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느냐. 무엇을? 무엇 행함? 무엇 실천? 무얼 건넴? 성경에서 기본은 믿음의 모든 모델은 예수님이십니다. 내 믿음 발휘하라고 성경 준 게 아니에요. 그래서 야고보도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은사를 받아서 야고보서를 썼거든요. 야고보서라는 계시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성도로 하여금 이 계시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증거 하게 하기 위해서 이 야고보서를 준 겁니다.

그리고서는 실컷 야고보서를 읽고 난 뒤에 “그래, 내가 행하면 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인정받을 것이고, 그러면 내가 말로만 행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실천을 가미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왔기 때문에 내 믿음은 가짜 믿음이 아니고 진짜 믿음이다.” 라고 자기 쪽으로 회수를 해버려요.

실천 또는 행함인데. 행함은 방향성을 가집니다. 인간의 실천 행함은 방향성을 가진다는 거예요. 방향성. 만약에 내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면 방향성이 10개라도 20개, 100개라도 될 수가 있어요. 집에서 설거지할 때의 방향성, 여행 갔을 때의 방향성, 그리고 교회 갔을 때의 나의 실천 방향성, 전부 다 이게 다르다 말이죠. 수영장 갔을 때의 방향성, 내 방향 수천가지 수백 가지 방향성을 내 중심된 나에서 계속 나올 수가 있습니다. 시장에 가서 콩나물 살 때의 나의 방향성, 콩나물 살 때 기도하고 사십니까? 그렇지 않지요.

콩나물 살 때에 헐값에 맛있는 콩나물을 구입하게 되면 오늘 저녁식사는 굉장히 맛나겠다. 라는 내 쪽으로 방향성을 가집니다. 분명히 제가 이야기합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방향성으로 가야 될 텐데 인간이 실천을 하게 되면 그 실천한 방향성은 이렇게 가다가 도중에 유턴 해가지고 그 방향성이 나의 실익, 나의 이익으로 되돌아가버려요. “나, 잘났지요? 나, 행함 있는 믿음이니까 진짜 믿음 맞지요?” 이런 식으로 자기를 증거 하는 쪽으로 방향을 틉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방향성이 어디에 도달하지 못하느냐 하면 예수님에게서 나와서 예수님에게서 나온 행함이라면 그냥 예수님 쪽으로 가야 돼요. 제가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이 점을 이해한다면 오늘 강의는 사실 이해 다한 거예요. 이 두 개의 차이점을 봅시다.

행함. 행함으로 행하자. 행함으로 행하자와 믿음으로 행하자의 차이점은? 행함으로 행하자 하면 방향성이 나에게로 가요. 내가 행함의 주체기 때문에 나에게로 옵니다. 어? 어려운 사람이 있네. 형제가 헐벗었네. 형제가 헐벗고 배고프네. 그럼 누가 도와주나? 내가 도와줘야지. 내가 도와준다. 나에게서 뭐가 나왔습니까? 행함 나왔지요. 나 행함, 나 실천이지요. 행함이 나왔지요. 저 쪽 상대방에게 행함으로 전달된 겁니다. 나의 행함이 저쪽 행함으로 결심으로 연결된 거예요. 그럼 뭐가 빠졌어요? 믿음이 필요치 않지요. 믿음이 필요치 않은 거예요. 믿음이 가미되게 되면 나에게서 비록 행함이 나왔더라도 믿음의 실천 방향이 나를 제키고 나를 빼먹고 어디로 가야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가야 되잖아요. 그리스도가 증거 돼야 되잖아요. 그리스도가.

그냥 행함으로 행하라면 믿음이라는 게 필요 없는데 믿음을 보이기 위한 행함이라면, 내가 나를 믿습니까? 내가 나를 믿어서 구원 받습니까? 구원이란 말이 나오거든요. 그럼 아니라는 말이지요. 오늘 강의에 어려운 점이 또 나오는데,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에 미리 말씀드릴게요. 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과 귀신의 공통점은 뭐냐 하면 바로 실체는 있는데 이 땅에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림자 없는 실체. 희한하지요?

이 컵에 그림자 있잖아요. 그림자가 있으면 실체가 있잖아요. 그런데 실체는 있는데 그림자가 전혀 없다. 어머, 무서워라! 어떨 때 그런가 하면 유령. 유령은 있는데 그림자는 보이지를 않지요. 여고괴담. 복도에 탁탁! 귀신이면 그림자가 없어요. 하나님 믿는데 하나님의 그림자가 몇 센티 되던가요? 마귀는 하나님 믿는데 하나님은 없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하나님 계시면 마귀도 있지요. 귀신도 있고 마귀도 있는 겁니다. 문제는 그림자가 없다는 거예요. 실체는 있는데. 그래서 그림자 없는 실체를 인간 속에 집어넣을 것이냐, 말 것이냐, 인간들이 결정해요. 과학적으로.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혔을 때에 문을 누가 열었습니까? 옥문을. 천사가 열어주지요. 성경에는 이렇게 그림자 없는 실체, 유령 같은 영적 존재가 계속 끼어드는 거예요. 끼어들면서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 믿음이라는 것이 그림자 있는 나를 믿는 것에서 더 능가해야 된다는 겁니다. 거울을 보면서 백날 나는 왜 이리 완벽해. 이런 거 있잖아요. 거울 보면서 매일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은 뭐를 누락시키느냐 하면 바로 성경에서 집어넣은 믿음이라는 그 관계성을 전부 다 훼방하고 있고 인간이 자기 존재 때문에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집에 와서 “설거지 누가했지?” 딸이 있다가 “엄마, 내가 했어요.” 전혀 믿음 아니지요. 같은 아담이 같은 아담에게. 성경에서는 이 아담이라는 이것이 아담에서 아담에게.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아담에서 아담에게. 같은 아담이 아담에게서 하는 이것은 전혀 믿음의 구성요소로서 미흡한 겁니다. 믿음의 구성요소로서. 오늘 아침에 십자가마을에 딱 들어가니까 누가 질문 하나 던져놨지요. 질문을 했어요. <출애굽기 속의 그리스도> 92페이지 이야기하면서 십자가 피와 그 차이 남에 연관성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고 했는데 답변을 제가 해놨어요. 나중에 시간 있거든 답변해 놓은 거 보세요. 그 답변이 이리 되어있어요. 인간보다 언약이 우선이다. 아담보다 우선되는 게 있었다. 에덴동산에. 인간은 인간을 위한 에덴동산 같으면 인간에게 해로운 선악과를 아예 심지를 않을 것이고,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담을 사랑한다면 죽음이라는 그 부정적 이상한 유해물체를 심어놓지를 않았을 것이고, 실제로 아담이 따먹었다 쳐도 그 손상된 선악과 파내고 새롭게 선악과를 심던지 아니면 아예 선악과를 안 심던지 해서 어쨌든 인간이 범죄 하지 않고 죽지 않기 위해서 모든 배려를 다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선악과 따먹었다고 생명나무까지 못 따먹게 만든 추방되었다는 것은 아담보다 우선되는 게 있어요.

아담보다 우선되는 게 뭐냐 하면, 마지막 아담입니다. 마지막 아담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마지막 아담이 예수님이에요.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든 선악과나무든 무슨 나무든 간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졌어요. 골로새서 1장 16절. 그리스도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말은 방해물이 있었다는 겁니다. 방해물이 뭐냐는 선악과를 심어놓고 파악을 해주시는 겁니다. 선악과 심어놓고 아담이 따먹으라고 먼저 하지를 않았어요. 여기에 부추긴 자가 있지요. 처음에 부추긴 악마는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뱀이라는 것. 그런데 그 뱀을 뒤에서 조종해서 따먹어라. 따먹어라. 했다 말이죠.

그러면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뭘 예상했느냐 하면 선악과에 대해서 반발하는 영적인 존재가 하늘에서 전쟁에서 패배해서 지상의 인간들까지 이미 이것이 전투의 자리가, 장소가 확대되었다는 전쟁이 확대되었다는 사실이 요한계시록12장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에 미가엘을 천사를 이기지 못해서 추방되어서 지상에 어디까지 확대되었느냐 하면 인간의 사는 동네까지 확대되었잖아요.

그러면 승리했다는 표시가 하늘에서 확대됐기 때문에 하늘에서 결정된 증거를 찾을 게 아니라 이 지상에서 마귀한테 이겼다는 것을 지상에서 찾아야 돼요. 지상에서 찾을 뿐만이 아니고 지상에서 찾은 증거를 통해서 우리가 모르는 악마가 무엇을 중점으로 악마가 인간으로 하여금 꼬셔왔는가를 십자가를 통해서 만을 알지 다른 것으로는 몰라요. 교회 갔다고 몰라요. 십자가 복음만큼만 제발 입 다물어라. 그 말은 십자가 피만큼 만이 구원되지 그 외에는 구원의 길을 준적이 없다는 것을 악마는 알고 있어요.

이 악마는 교회를 앞장세워서 갖은 노력을 다해요. 십자가 대신 교회부흥, 이거 대신 니 몸 건강, 계속해서 우리에게 십자가 대신 니 행복, 이리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 이 마지막 아담은 예수님이지요. 마지막 아담과 연결된 아담은 이들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살아있는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모형. 이게 이스라엘이거든요. 이스라엘의 모형.

저는 성도를 가지고 예수님의 추적계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도=예수님의 위치, 추적기. 여러분, 주머니 한 번 보세요. 예수님의 추적기 있나. 이건 무지 무지 중요한 이야기인데 그 중요한 이야기를 미리 말씀드릴게요. 예수님은 어디 계시는가, 바로 믿음을 구성하기 위해서 아담이 다른 아담에게 전달하는 그 전달 실천 속에서 예수님은 거기에 계십니다.

니가 지금 어디 있느냐, 미국에 있느냐, 한국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은 니 실천력 속에 주님이 계시는 겁니다. 그 말을 바꿀게요.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 주님이 나보고 믿음을 구성하기 위해서 실천에 어떤 행위에 나서게 하는 그 사건 속에 우리가 놓여있습니다. 질문에 바꿔야 돼요.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하지 말고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질문을 바꿔야 돼요. “내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게 구약의 선지자들의 삶이었어요. 선지자의 삶이었습니다. 스데반집사의 삶이었습니다.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으면서 자기 고향을 생각했던가요? 만약에 스데반집사가 고향이 평양이라면 얻어맞으면서도 ‘아, 이제 내가 평양냉면 못 먹는구나!’ 걱정했겠습니까? 스데반집사의 고향은 따로 있어요. 얻어맞고 죽게 되니까 거긴 바로 주와 함께 있었던 주님이 서서 스데반집사를 기다렸잖아요. 스데반집사를 죽게 하는 그 사건, 주님의 실천인데, 실천성, 그 사건 속에 스데반집사에 주님도 함께 있었습니다. 이것을 사도행전7장에서는 그걸 뭐냐 하면 ‘성령 충만’이라 합니다.

성령을 요한복음14장에서는 이걸 두 자로 이렇게 해요. 처소에요. 처소. 이게 얼마나 감사한지. 성령이 그냥 개인적으로 만나 버리면 처소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이야기할 때 이야기하고. 집사님은 집사님 집에 가고 나는 내 집에 가면 되니까요. 처소가 새롭게 형성이 안돼요.

그런데 성령은 이야기하러 온 게 아닙니다. 니 소속과 니 장소가 현재 니는 아무리 나대보고 도망쳐 봐도 니가 이미 옴팍 뒤집어씌운 처소는 거기서 못 빠져 나온다는 것을 통보하고 일러주시는 분이 성령이에요. 소유할 생각하지 마세요. 오히려 우리는 그 성령이 제시한 처소 안에 소유 당했어요. 그런데 그 처소는 성령만 계신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함께 있어요.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요한복음14장에 계속 나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성령은 처소라는 근거는 어디 있느냐, 원래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성령 받았거든요.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예수님은 꾸준히 어떻게 살으셨냐, 내가 아버지 안에,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신 방식으로 예수님은 움직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과 함께 있다 보니까 유대인들이 하나님계신 곳을 하늘로 본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답답한 거예요.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봤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내게 일어나는 그것이 곧 내 안에서 아버지가 하신 것이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 사람은 계속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고요.

누가복음에 보면 17장21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지요. 너희들이 하나님나라 가기 위해서 징후를 자꾸 찾는데,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눈 떠봐라. 바로 너희 안에 있잖아. 니가 지금 마주보고 있잖아. 너희와 더불어 함께 있다 이 말이지요.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거예요. 예수님 자신을 아버지와 예수님이 독점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내 아버지만이 진짜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어디에 있느냐 하면 언약에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언약이 사건으로 실천되는 그 현장만 아버지도 거기 있고 아들도 거기에 있고 성령도 거기에 있고 성도도 거기에 있는 거예요. 언약사건입니다. 

언약 사건은 성령께서 그 자리를 초대하지 않는 한 언약 안에 들어올 수 없어요.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언약에 유월절이 있었어요. 언약 사건은. 어린양의 피, 그 죽음을 경계로 해석했기 때문에 니가 죽지 아니하면 이곳에 들어올 수 없어요. 산채로 목숨 바치려고 했던 베드로 실패했습니다. 요한복음14장에 보면 혼자 그 장한 베드로 떼어놓고 그냥 혼자 가셔요.

저나 여러분이 어릴 때 엄마한테 제일 섭섭했던 게 뭐냐 하면 엄마가 시장가서 어린 우리를 데리고 가면서 제일 섭섭했던 것이 평소에 장볼 때 늘 같이 가다가 뭐라고 하는가 하면, “니, 딴 데 가지마라. 여기 있으레이. 딴 데 볼 일 보고 올게. 딴 데 가지 말고. 엄마 후딱 볼일 보고 올게.” 해가지고 엄마가 자기 옷 보러 양품점에 들어가고 난 뒤에 나는 거기 서 있어야 되는 거예요. 혼자서. 줄곧 같이 오다가 고 시간만큼은 서있어요. 한 10초 가격만 볼 줄 알았는데. 1분 지나고 2분 지나고 여자 옷 사는 게 어디 그렇게 간단합니까. 슬슬 짜증나고 막 울음이 터져 나올 그 때, 엄마 금방 나오잖아. 바로. 금방 안 나왔는데. 금방 나왔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자녀교육 할 때, 예상 못한 괜찮은 옷이 있을 때, 잠시 애 보류해 놓고 잠시 가는데 있지요. 그 애들이 얼마나 어릴 때 섭섭하겠습니까. 트라우마를 아직도 갖고 있어요. 나이 서른 넘어도, 장가가도 트라우마 있어요. 엄마 그 때 나를 버렸다. 모든 인간은 주님한테 트라우마가 있어야 돼요. 나를 버린 분이에요. 주님이 나를 버린 분부터 출발해야 돼요. 나를 찾아온 사랑하는 분부터 시작하면 이건 완전히 100% 개판이에요. 이건 엉터리에요.

베드로를 버렸듯이 가룟유다를 내쳤듯이 일단은 주님은 우리를 내침을 우리가 용납해야 됩니다. 나를 내쳤던 분이에요. 내치지 않고 해버리면 우리는 사랑이란 망상에서 못 벗어납니다. 제가 대구강의에서 마지막에 그런 대목 했거든요. 미워하는 법을 모르면 사랑하는 법도 모른다고요. 우리는 남을 사랑하기 전에 미워하는 법부터 먼저 배워야 한다 말이죠.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은 100% 그건 사기입니다. 사랑 아닙니다. 상대방을 이용하는 거예요. 미워해도 되는데 사랑할 때 이게 진정 사랑 아니겠어요?
 
미워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믿음의 주체로서 행함으로 건너올 때 이게 야고보서2장에 나오는 그 행함이라는 말이죠. 그래야 우리의 행함의 방향성이 내 쪽으로 쏠리지 않습니다. 도로 유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미움의 대상입니다. 내쳐도 할 말 없어요. 왜? 우리는 언약 밖에서 놀던 그러한 엉터리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은 모르고 자기 살 궁리만 생각하고 자기 구원받을 궁리만 생각했어요.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언약한 그대로 언약을 회수하거든요. 저보고 볼펜주세요. 하면 여러분이 갖고 있던 볼펜을 던질 거예요. 그런데 제가 볼펜을 던져 놓고 제 볼펜 주세요. 하면 제가 던진 볼펜을 여러분이 찾아줄 거예요. 그렇지요. 주님께서는 언약을 던져 놓고, 애들 문방구에서 파는 거 있잖아요. 훅 불면 펴져서 도루룩 감기는 게 있잖아요. 자기가 던져 놓고 던진 콩고물에 묻힌 사람들만 데리고 오는 방식. 그런데 이건 뭐냐, 꿀이 달렸어. 언약 안에 꿀이 있어가지고 꿀을 다 알아보는 언약 회수할 때는 그런 사람만 회수하는 거예요. 개한테 진주 던지지 말라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분류를 이야기해요. 분류. 개한테 진주 던지지 말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전도할 때 상대방을 꼭 미워하세요. 꼭 미워하세요.

남편한테 전도할 때 남편을 밉지 않거든 전도하지 마세요. ‘아이고, 인간아! 예수도 안 믿는 게 인간인가.’ 우리 아까 권사님이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예수는 안 믿는 게 무슨 인간입니까? 주님 안목에서 미워할 줄 알아야 비로소 이게 복음이 손상되지 않습니다. 빛이 나요. 복음이 빛이 나요.

그냥 생뚱맞게 이만한 다이아 적어도 10억내지 20억되는 다이아를 가지고 만약에 아주 못한 어떤 시어머니가 무슨 정신이 나갔는지 갑자기 자기 가보 10억 되는 다이아를 며느리 불러가지고 “자, 나는 다됐다. 니 해라.” 하면 그 며느리가 ‘아이고, 또 유리조각 잘라가지고 참 끝까지 나를 속이는구먼.’ 이리 생각하지. 그걸 다이아몬드로 생각하겠어요? 항상 복음은 예상 밖의 기쁨을 줘야 되지 예상한 기쁨은요, 이건 시큰둥하고 시시해요. 매일같이 예상 밖의 복음이 와야 되지 미리 예측한 복음은 그건 우리의 오만원짜리보다 더 못합니다. 오만원짜리보다.

세상 천하를 얻고도 목숨(복음)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할 비중 그러니까 단층에서 지붕으로 여겨놓고 십자가 복음을 논했을 때 이게 복음 때문에 시국 이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어야 돼요. 권사님이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세상에 좋은 게 없다고요. 복음 알고. 이 기회에 권사님 믿음 혼자 다 좋은 줄 아는데, 이 때 순간뿐이에요. 내일 되면 또 몰라요. 복음 알고 재미있는 것도 없고 어떤 재미있는 일이 없어요. 미국에가 봐도 재미가 없고, 태국에가 봐도 재미가 없고, 초등학교 동창생 만나도 재미가 없고. 경중이라 하지요. 가벼움과 무거움.

왜 주님께서는 그렇게 놀러가고 하게 하시는가. 경중할 수 있는 체험을 주시는 겁니다. 계속 체험하세요. 앞으로도 제주도도 체험하고. 이 십자가 복음 다시 말해서 나한테 돌아오지 않게 되게 되면 나는 사람의 무게가 점점 가벼워져요. 왜냐 하면 내가 십자가 여기에 두지 말고 없어질 사라질 지구 속에다가 내가 거기다가 집어넣었다. 껍데기 같은 나를 거기다가 집어넣어야 돼요. 무슨 말이냐 하면 주님과 함께 있다. 이럴 줄 알았지요. 그게 아닙니다.

그냥 벼 껍데기 있잖아요. 바람 불면 무게 없이 날아가는 것. 그쪽 편에 나를 달아야 된다 말이죠. 망하라고 복음 주신 거예요. 모든 세상의 기도가 다 엉터리고 전도, 헌금, 예배, 성경공부, 다 엉터리인 이유가 이거 해도 안 망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의도가 그 모든 주님의 복음이 엉터리로 끝나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태어나자 문제가 있어요. 문제 있으면 어떻게 돼요? 안 망해야 돼요? 망해야 돼요? 망해야 돼요. 이왕 망한 거 쫄딱 망해야 되지요. 쫄딱. 재산도 한 70억 있다가 50억밖에 없는 거 쫄딱 망한 거예요. 애들도 좀 산다는데 자식이 잘 돼도 그것도 의미 없고, 의미 없으면 그건 망한 거죠. 나도 내 실천력, 내 행함도 의미 없고 이럴 때 믿음을 보여주는 행함이 되는 겁니다.

내가 안 망하려고 한다면 주님의 십자가를 누가 방해하느냐 하면 내가 마귀노릇해요. “주여, 오늘도 망하게 하옵소서. 이왕 망하면 제대로 망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고 그것이 응답으로 느껴지는 순간 그날 하루는 룰루랄라입니다. 기분 좋아요. 이제는 나이트가도 괜찮고 이왕 망하는데 골프 쳐도 괜찮고 노래방가도 괜찮고 이왕 망하는데 자기관리 자기절제 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뭔가 안 돼! 안 돼! 이건 뭐예요? 갑자기 자기 더러운 자기 본색을 또 노출시킨 거예요. 안 돼! 안 돼! 뭘 안돼요? 사람이 자기 처소가 이미 이동을 했다 말이죠. 자기 처소가. 그리스도 안에 했으면 우리가 처소를 할 때 우리 힘으로 옮겨지지 않았잖아요. 그럼 성령께서 우리를 확인시킨다. 니 처소는 그 쪽이 아니고 이쪽이라면 성령 말을 들어야 돼요. 그쪽이 아니고 이쪽이다. 한 번 적어볼게요.

~~가 아니고 ~~다. 사람은 이상한 버릇이 있어가지고 뭐가 아니고 하면 이걸 자꾸 끊어내려고 생각하는데 이걸 둘 플러스 시켜줘야 이고의 의미가 생겨요. ~~아니고가 ~~이고의 의미가 생생히 살아난다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고에 들어가면 안돼요. 뭐 아니고부터 들어가야 돼요. 그래야 이고가 신이난다니까요. 신바람. 신바람 나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에서 있어야 돼요. 아니고에.

아니고에 서있으면 야고보서2장에 나오는 요 본문 말씀은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바로 다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에요. 이게 성경해석의 기본 전제입니다. 이건 뭐 나한테 해당되는 게 아니고. 이러면 성경은 매직으로 시커멓게 도배를 해버려야 돼요. 성경 한 말씀, 한 말씀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아니고에 있는 우리보고 니가 왜 아닌가를 설명해주기 위해서 이 말씀이 있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나의 증인으로 방향성이 나한테 꽂히는 게 아니고 주님에게로 꽂히는 주의 믿음의 증인으로서의 행함을 보이는 겁니다.

처음부터 강의를 다시 하게 되면 뭐를 빠뜨리지 말라고 했습니까? 행함에서 행함으로 나오면 안 된다 했어요. 믿음이란 것을 놓치면 안돼요. 그런데 그 믿음이라 하는 것은 믿음의 원천은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살았는가. 요단강에서 성령 받고 살았다. 성령 받고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굉장히 부지런떨었는데 그 부지런떨음이 예수님 자신을 증거한 게 아니고 아버지와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을 증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럼 아버지와 나와 함께 있어서 하는 일이 뭐냐, 언약이라 했지요. 언약. 그런데 언약에 사람들이 모방하거나 흉내 내고 끼어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 언약과 언약바깥에는 죽음이 끼어있기 때문에. 그럼 어떻게 되느냐,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베드로처럼, 내치고 난 뒤에 죽고 난 뒤에 다시 베드로를 영원히 내쳤습니까? 성령이 왔습니까? 베드로에게. 성령이 왔잖아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뭐냐 하면, 니 힘으로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예수님이 초청하겠다는 거죠. 그걸 저는 처소라고 이야기했지요.

처소에는 아버지계시고 아들 계시고 성령 계시고 베드로 있고. 베드로면 성도도 있고. 이것이 예수님이 이루었던 언약의 완성태입니다. 언약의 완성 상태. 언약의 완성형식이 된다 말이죠. 그것이 딱 왔을 때 그게 언약이다 말이죠. 언약이 왔을 때, 주님께서 뭐냐, 뭐 아니고 뭐 니까 우리는 어디에 끼어들면 돼요? 뭐 아니고에 끼어들면 돼요. 뭐 아니고에.

부자가 천국가기가 힘든 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했지요. 그럼 우리는 어느 자리에 가야 돼요? 구원받은 자리에 가면 안 되고 부자 못돼서 환장한 자리에 가야 한다고요. 그게 가난한 사람이 더 심하지요. 장애자들 가난한 사람들, 부자 되고 싶어서 환장한 겁니다. 그들은 구원되지를 못해요. 우리도 마찬가지고. 가난한 이유 때문에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걸 팔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어차피 주님이 주신 그 낙타는 어떤 누구도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심지어 베드로도 통과하지 못하거든요. 통과 못하는 자리에서 성령이 와서 통과했다는 말은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낙타를 죽였다는 결론밖에 안나요. 죽여 버린 거예요. 죽을 때 착한 사람을 죽여 버리면 주의 일에 실패에요. 죽는 이유가 있어요. 나쁘기 때문에 죽인 거예요. 죽을 만해서 죽인 거예요. 진작에 망해야 되기 때문에 죽이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차피 늙어 죽어가는 입장에서는 왜 망하느냐 하는 것을 미련두지 말고 나중에 또 죽어버리면 더 이상 나쁜 짓 못하니까 살아있는 내내 이 짓해서 내가 죽어 마땅하구나!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짓이 어떤 짓이냐 하면 바로 말로 때우는 짓을 한 거예요.  야고보서2장14절 이 말씀이.

야고보서2장14절의 말씀이 절대로 우리를 비켜가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오늘도 나를 지적하는 참 좋은 말씀이에요. 딱 우리에요. 10년간 고아원에서 남 봉사했다. 그 다음날 또 이게 우리에요. 20년간 어려운 사람 돌봤다. 그 다음날 보면 또 내 모습이 어떠냐, 또 말로 때워요. 옛날에 많이 해줬잖아. 옛날에. 옛날에 많이 해줬잖아! 더는 못해준다. 이리 되지요. 더는 못해주지요.

궁중족발 혹시 아십니까? 궁중족발 이야기. 9년동안 그 자리에서 궁중족발을 했어요. 어떤 부부가. 건물 빌려서 세를 얼마줬냐 하면 삼백만원 내고 있었습니다. 건물주가 이제 바뀌었어요. 가게가 요지 건물이거든요. 몫이 좋은 가게에요. 자기가 뭐 하고 싶어요. 그런데 궁중족발이 9년을 하다보니까 유명 맛 집이 되었어요. 손님들이 많고 몫도 좋고 주차하기도 좋아가지고 주인이 탐이 나겠어요? 안 나겠어요? 탐이 나겠지요. 집세를 약간 올렸어요. 약간. 삼백만원에서 천이백만원으로 올렸어요. 약간 올렸습니다. 궁중족발 주인이 부부가 돌아버렸어요. 재판 걸었습니다. 5년 이상 됐기 때문에 임차대보호가 안돼요. 그리고 계약을 새로 하면 돼요. 그 주인은 간단히 생각하면 돼요. 전 주인에게 삼백만원 줬잖아요. 천이백만원 주면 돼요. 주든지 나가던지 하면 돼요. 일이 깔끔하게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주인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돈으로 보이는 천이백만원 생각을 안하고 “니, 나 억지로 무조건 내쫓으려고 이 만큼 4배나 오렸지? 이 동네 천이백만원 올린 데가 어디 있느냐?”이리 나온 겁니다. 그런 소리는 그 궁중족발 그 사람의 욕심이에요. 9년동안 했던 은혜를 다 까먹은 겁니다. 시민단체에서 데모했어요. 9년 족발편을 들었습니다. 집달리 와가지고 졌기 때문에 가게 내놔야 됩니다. 시민단체 믿고 버틴 거예요. 세상이 한국이 이게 지옥인지 뭐야 이게? 하고 버텼습니다. 주인이 집달리를 해가지고 지게차가지고 밀었어요. 벽 뚫고 들어갔습니다. 그것 때문에 신문에도 대문짝으로 났어요. 가진 자의 건물주의 횡포. 이리 또 나왔어요.

집주인이 점점 약이 올랐습니다. 집주인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족발의 값을 누가 정합니까? 주인이 정하지요. 그러면 이 집의 주인이 누굽니까? 나지요. 그러면 가게 세는 누가 정합니까? 내가 정하지요. 뭐가 나쁜데요? 뭐가 나쁜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궁중족발 천번 백번 나빠요.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자기 받은 은혜 다 모르고 시민단체해가지고 버티려는 겁니다. 주인이 천이백이던지 일억이천 달라 해도 주든지 나가던지 해야 돼요.

한국사회가 이렇게 각박해가지고...., 무슨 이 세상에서 무슨 인정을 원합니까?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이 세상에서 무슨. 초코파이입니까? 인정 원하게. 이 세상이 인정으로 살겠다 하면요, 이 세상이 지옥이 아닌 게 돼버려요. 이 세상이 지옥입니다. 그동안 그럼 목사님 우리는 편하게 삽니까? 좋은 불신자 만나서 편하게 사신 거예요. 지금. 주의 은혜인줄 알아야지요. 좀 잘해주면 그 은혜 다 잊어버리고 그만큼 대우 받을 만해서 받는다 하는데, 궁중족발 그 사람이 뭐를 놓쳤는가, 자기가 망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놓쳐버린 거예요. 망해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내가 망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 그 폭만큼이나 모든 은혜와 영광을 주께 돌립니다. 그게 바로 성령의 사람이에요.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입니다. 마음을 낮추지 않는데 무슨 은혜와 자비를 알겠어요.

내가 어려운 사람을 헐벗었을 때 그냥 있지 않고 도와줬고, 배고플 때 도와줬으니까 내 자식이 잘되고 내가 이렇게 편하구나! 지금 이따위 소리를 하는 것은 지금 행함의 방향성이 완전히 지옥으로 엉터리로 향하고 있는 거예요. 그건 믿음 아닙니다. 그건 불신앙이지요.

그 다음에 19절 봅시다. 지금까지 쉬운 거고 어려운거 해봅시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감당이 되니까 어려운 거 합니다. 자, 어렵게 합니다. 정말. 예수님의 믿음이 원천이지요. 그럼 예수님께서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잖아요. 아들인데, 하늘나라 계셨다 말이죠. 그냥 하늘나라 계시면 되지요. 왜 이 땅에 오십니까? 이 땅에 왜 와요? 이 땅이 지옥인데.

이미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추방했잖아요. 그럼 추방했다 하면 추방한 동시에 그 땅 무슨 땅이 되느냐 하면 저주가 확산돼요. 뭐가 어려운가 하면 죄가 있는 곳에 저주가 확산되는 원리가 이렇게 같이 연결되게 되어있어요. 저주 있는 곳에 인간이 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죄 때문에 저주가 유발되는 어떤 장소든 저주가 유발되게 되어있어요.

전에 여러 번 예를 들었습니다만, 지중해 모습을 보면 파란 지중해에 하얀 성들의 건축물이 아름답지요. 포카리스웨트 아닙니까. 따다다다다~~ 그 노래 나오는 거. 달려가면서 나오지요. 참 아름답지요. 이 아름다운 곳에 내가 아름다우니까 구경가보잖아요. 지중해 버려났습니다. 왜? 내가 끼어들어가서. 풍경 다 버려났어요. 특히 여기 술꾼들 들어와 가지고 지중해 본다고 해서 술 먹고 개판치고 완전히 좋은 지중해에 내가 끼어들어서 버려놓는 거예요. 왜 풍경에서 본인을 뺍니까?

하나님께서 아담 보내면서 저주도 함께 유발된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할 때에 원칙대로 해요. 죄가 있는 곳에 저주 있고, 저주 있는 것으로 봐서 그 안에 분명히 수상한 독소들이 들어있다. 암세포 들어있다. 이건 당연한 거잖아요. 방귀 냄새나는데 아무도 안 꿨다. 이건 말이 안 되지요. 분명히 뀐 사람이 있어요. 이 세상이 저주스럽다. 집사님 때문에 저주 받아요? 이 세상이. 집사님 때문에 날씨 더워요? 다함께. 애브리 바디. 다함께 전부 다 원인제공자가 되는 겁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이란 영화가 있거든요. 소설로도 나오고. 범인이 한 사람이 아니고 거기에 탑승한 전체가 범인이에요. 이 세상은 새끼가 새끼치고 새끼가 새끼쳐가지고 전부 다 태어날 때부터 저주유발자를 계속 양산했던 겁니다. 아파트 저녁 때 되면 촘촘히 불을 켜잖아요. 단지 아파트 보면 전부 다 하하 웃고 해요. TV보고 웃고 있지만, 하여튼 웃고 있다 말이죠.

제가 서울 올라올 때 그 집들이 많은데 내 집이 하나도 없어요. 미치겠어요. 남들은 그렇게 행복한데 꼭 성냥팔이 소녀 느낌 있잖아요. 자기는 추운데 한데 가있고 저쪽에서는 따뜻한 벽난로가에 케이크 자르고 있고 성탄절 노래 부르고 있고. 내가 성냥팔이 소녀 보면서 창문열고 좀 도와주지. 어릴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고요. 커서는 그 집 말고 같은 거지 동네 같이 살면 행복할 건데 괜히 그런데 와서 상대적 빈곤을 느끼고 가요. 왜 거기 갔느냐 말이죠. 성냥 팔러 갔지만.

이미 유발된 요인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아담에서 아담으로 건너오는 거예요. 같이 망하는데. 망했다는 기준점이 없어요. 분명히 세상사는 것은 빡빡한데 왜 빡빡한지, 언제까지 빡빡한지, 언제까지 힘들게 해야 되는지, 사는 게 언제까지 이렇게 공포스러워야 하는지. 글쎄 여자 분들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남자 분들이 50대되게 되면 아~ 진짜 이건 사는 게 불안해요. 사는 게. 자영업자 10명중에서 1년 내에 망하는 사람이 8명이 문을 닫아요. 1년 내에. 3년 내에는 다 망하고. 평균 들어갈 때 자본금이 1억6천에서 8천봅니다. 월세 얼마냐, 이것 떼고 저것 떼고, 백만원 번다고요. 자영업을 하고 난 뒤에는 백만원짜리도 좋으니까 제발 그냥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나와서 해요. 나와서.

그러니까 이게 뭐냐, 평소에 뭘 하면서도 공포스러워요. 직장생활 할 때는 6시 되면 퇴근이잖아요. 개인 사업하면 밤12시가 퇴근이에요. 출근시간이 배가 늘어났어요. 지난 대구강의 할 때 교재에 보면 이 내용이 나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경쟁체제잖아요. 저주인데 덜 저주받기 위해서 내가 받을 저주를 남한테 인수인계해버립니다. 조저버리는 거예요. 남이 죽어야 누가 산다? 내가 산다. 아담을 죽여야 아담 내가 살아요. 이건 잘 살아도 공포스러워요.

내가 화분 던지고 가위 던지고, 서류봉투 던졌다. 일반인이 그랬다면 이건 입건도 안 됩니다. 이건 사건 처리도 안돼요. 돈1억 가지고 매수할 필요도 없어요. 미안합니데이, 욱하는 성질이 있어서.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이게 잘살기 때문에 한진그룹이기 때문에 구속판정이 난리 나는 거예요. 굉장히 불공평해요. 이 세상은. 지가 하면 죄가 아니고 남이 하면 나쁜 놈이 되고. 이 잘사는 것들아. 판사들이 죽을 지경이에요. 이건 문제거리도 안 되는 거예요.

아담에서 아담으로 나가는 겁니다. 뭐가 없느냐, 기준이 없어요. 세상사는 기준이 없으니까 만들어야 돼요. 누가 만드는가, 내 잘났다가 기준 되는 거예요. 내 잘났다가 기준 되는 겁니다. 오늘 제목은 이겁니다. 만남. 하늘나라에 그냥 계시는 분이 왜 이 땅에 오셨는가, 죄인을 만나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혼자 도 닦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늘나라에서 혼자 도 닦으면 안 됩니다. 기도원에 혼자 도 닦지 마세요. 주님께서 반드시 만나게 해줘요. 나보다 잘사는 친척을 만난다. 갑자기 어느 날 와가지고 “니, 나 모르겠나?” “모르겠는데요.” “나, 니 할머니다.” 할머니가 “내가 자식이 없었는데 니를 10년동안 찾았는데 이제 찾아서 반갑다.” “그런데 할머니 저에게 나타났습니까? 뒤늦게.” “내가 니한테 줄려고 내 양자로 삼고 이거 50억밖에 안되지만, 니 나중에 나 죽고 난 뒤에 니해라.” 이런 사람 만나면 괜찮아요. 만나도.

오늘 본문에 보면 헐벗고 배고픈 사람을 만나요. 이건 내가 선택했다? 내가 선택 안했다? 그냥 출현된 거예요. 출현. 그냥 내 앞에 나타난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본성이 뭡니까? 안 본 걸로 치지요. 저쪽이 죽어야 내가 살기 때문에. 실력이 있는 사람만 나는 이용가치가 있어서 원하는 거예요. 실력이 없으면 나를 뜯어먹을 인간이에요. 내가 어디 뭐 LA갈비입니까? 통닭입니까? 6촌 8촌이 와가지고 좀 맞벌이한다는 소문만 들어도 뜯어먹으려고 와요. 이게 전도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많이 벌면 뜯는 사람도 많다.

아파트 좀 산다하면 와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말하는 뽐새가 수상해. “아이고, 아이가 넷인데, 공납금을 못내 가지고.” 이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느냐 말이에요. 나한테. 그것도 오랜만에 와가지고. 잘풀리는 집이 얼마나 한다고 그거 사와가지고 화장지 좀 내놓고는 그 다음부터는 구구절절 아가 사고 쳐서 요번에 합의보라 하는데 합의 보려면..., 그것도 촌의 사촌의 8촌 생전에 보지도 않고 이판인데, 잘산다는 소문을 듣고 와가지고 맞벌이하게 되면 더 많이 와요. 또. 꿀 있는데 날 파리 들끓듯이 맞벌이하면 꼭 내민다니까요. 좀 살자는 이런 식으로. 만남이에요. 우리의 반응은? 정신 차리자!입니다.

이럴 때 냉정해야 돼요. 왜냐하면 한 번 물리면 그쪽의 밥이 돼요. 한 번으로 끝날 일이 아니거든요. 우리 잘 알잖아요. 그 알기 위해서 이만한 나이 먹었잖아요. 인간이란 진심은 없고 상대방을 이용가치로 보는 인간들밖에 없다는 것을 나이 50쯤 먹어야 정신 차리지요. 명분이란 것은 그건 구실에 불과합니다. 내 이익이 없는 명분은 명분도 아니에요. 철두철미하게 우리는 그것 때문에 젊을 때 얼마나 속아 넘어갔고 보증 섰다가 다 날리고 얼마나 많은 경험을 했습니까? 

특히 주위에 보면  교회 보증.  교회에 돈을 얼마나 갖다 바쳤어요. 목사 말 듣고. 두 번 다시 안하겠지요. 만남이다 말이죠. 만남. 이단 목사가 되던, 3단 목사가 되던 만남이에요. 만남. 뭐 배우라고? 너 믿음 없지? 니 믿음 없는 거야. 니는 니밖에 몰라. 아담이 아담에게. 새로운 아담 없어요. 내가 주인공이에요. 아담이 아담에게. 그거 지적하면서 집사님이 이야기한 겁니다. 우리한테 믿음 없는 거예요.

믿음 있다고 했지만, 막상 난데없는 엉뚱한 인간이 쳐들어오면 졸지에 믿음 없어요. 아재요, 평양냉면 사줄테니 그냥 가세요. 우리도 지금 이거 한다고 대출 많이 냈는데 돈 못 갚습니다. 보기에는 번듯하게 보이지만, 이거 3분의 2가 대출입니다. 안됩니다. 가세요. 허풍이지만, 팍 쳐야지 우이 하겠어요? 안 그러면 무는데 어이 하겠어요. 물어요. 무는 정도가 아니고 옆집으로 이사 갈 수도 있어요. 문제는.

내 조카인데 서울에 취직해서 집 얻을 때까지만 옆에 있게 해 달라. 집을 언제 얻는데? 서울 집이 얼마나 비싼데. 언제까지 있게 합니까. 와가지고 형수님 해가지고 지 방 주니까 또 친구들 몰고 오지. 이건 골칫거리다. 이게. 아~ 참, 우리 살아온 것이 그거 무서워서 오늘도 맘 편하게 잠 못 잡니다. 벌벌 떱니다. 언제 그런 난데없는 만남의 사건이 있을지. 그럼 이것을 이 믿음 없음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10분 쉬고.

 

 

안양20180608b약2장14절(구성)-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 끝에 만남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냥 하늘나라에 사셔도 되는데 누굴 만나려고 오셨느냐, 예수님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또는 자기 실익을 위해서 오셨는가, 그건 아니고 죄인을 구원하려 오셨지요. 오늘 본문도 구원이란 말이 있지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리 되어있지요. 여기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자신을 두고.

예수님이 오셔야 그게 구원이 되는 겁니다. 이쪽에서는 갈 수가 없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이 계세요?”라고 묻는 거예요. “이렇게 하면 구원받습니다.”가 아니라 “이미 당신 안에 예수님 계신 거 맞지요. 그지요?” 라고 동의를 요청하는 말씀이에요. 왜냐하면 야고보서1장에 보면 하늘의 은사를 받은 사람에 국한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야고보서1장1절에서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 계신 거 맞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두 번째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계시면 예수님이 계신가, 아닌가를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겁니다. 정말 궁금한 거잖아요. 그때는 “이렇게 하시면 예수님 계십니다.”가 아니라 “귀신이 여러분에게 먼저 무엇을 가르쳤던가요?” 라고 묻지요. “귀신이 먼저 여러분들을 영혼을 어떻게 갖고 놀았습니까?”묻고 그것과 대치되면 됩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이 아니고 ~이다.’ 라는 방식. 성경 전체 내용이 그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 라 하지요.  not but용법이라 하지요. ~~아니고 ~다. 반드시 아니고가 들어가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왜 그러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지려고 할 때는 인간과 예수님 사이에 어떤 인간을 둘러싼 먼저 선점해서 인간을 둘러싼 세력이 있어요. 힘이 있어요. 귀신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제자들이 전도하니까 하늘에서 귀신들이 떨어졌다 했을 때 제자들이 그걸 가지고 자랑하면서 예수님한테 얘기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니까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나도 그거 안다. 하지만, 너희들은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걸 좋아하지 말고 네 이름이 처소지요. 아까 이야기한 장소개념, 소속개념입니다.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좋아해라.” 만약에 그냥 귀신이 떨어진 걸 좋아하면, 아담, 나, 나라는 이름의 아담, 이게 계속 유지가 되어버려요. 소속이 없고. 내가 잘나서 내가 구원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내가 잘나서 내가 구원받는 게 그게 뭐가 문제냐, 그럴 수도 있지. 꼭 안 그래야 될 이유가 뭐냐. 이렇게 하게 되면, 구성 문제에 있어요. 구성. 뭔가 다른 요소를 꾸며서 하나로 만드는 것을 구성이라고 합니다. 구성 문제에 있어서 그 구성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어야 하거든요. 그래야 소속이 그 만들어진 처소가 주님의 처소가 되니까.

내가 구성하고 내가 만들면 내가 주인공이 되잖아요. 우리는 주님이 하는 구성에 뭐로 가담되느냐 하면 기능으로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용도로 여기서 개입하게 됩니다. 기능으로, 용도로. 오늘 사실은 제가 미리 생각한 제목은 이겁니다. 기능이었습니다. 기능. 기능이라 하는 것은 무엇을 염두에 두느냐 하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는 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촌에서 공부 좀 잘해가지고 서울 법대가가지고 동네에서는 플래카드 붙이고. 소년 천재가 돼가지고 졸업하기 전에 만약에 고시에 합격됐다. 합격되고 난 뒤에 연수원에 가가지고 상위 10%에 들어가지고 졸업하자마자 검사로 취직했다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의 주변에 있는 사람은 누굴 칭찬합니까? 검사된 사람하고 그 검사 잘 키웠다고 부모한테 칭찬하겠지요. 그럼 검사 본인은 어떻습니까? 흐뭇하겠어요? 출근할 때 흐뭇하겠어요? 책상에 뭐가 있겠어요? 지가 처리할 서류가 이만큼 있겠지요. 제가 전에 알던 사람이 검사실에 사무관으로 있는 사람인데 검사실 수사관쯤 된 사람인데 그 때는 그 사람이 6급이었어요. 일반 검찰청 공무원은 퇴근시간이 6시에 퇴근해요.

검사는 몇 시에 퇴근하느냐 밤11시에 퇴근합니다. 월급은 초봉이 월5백정도 돼요. 서류 이거 다 봐야 돼요. 서류 이거 다 처리해야 돼요. 자기만 쳐다보고 있어요. 유치장에 있는 범인들과 이 변호사들이. 그럼 자기 동네의 부락에 플래카드 붙인 거 자기가 그거 신경 쓰겠어요? 안 쓰겠어요? 신경 못쓰지요. 왜? 매일같이 감당해야 될 처리할 범죄서류가 계속해서 수시로 계속 오기 때문에 동네 내려와 가지고 금의환향 할 시간이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이게 성도의 일상이에요.

성도가 구원받은 것은 기뻐요. 기쁜데, 계속 처리해야 될 업무가 주어져요. 주님이 살아계시니까 계속 숙제를 주는 거예요. 숙제를. 차이를. 마귀에 속한 인간들과 달라야 된다는 숙제. 마귀에 속한 것은 뭐냐 하면 여기 19절에 나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마귀가 뭐를 믿느냐 하면, 귀신이 뭘 믿습니까?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믿습니다. 믿고 그 다음에 뭐합니까? 부들 떤다는 거예요. 참, 오늘 중요한 거 합니다.

자, 누구 앞에서 내가 떤다는 것은 만남이 제대로 구성된 거예요? 구성 안 된 거예요? 만나기는 만났는데 각자 따로 구성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 하나님 중심이지요. 예수님 나라. 하나님 나라. 귀신이니까 악마라고 보면 되지요. 악마. 악마가 하나님이 한 분이신줄 믿고 존재를 믿고, 자기가 벌벌 떠는 존재가 됐다는 말은 구성이 지금 두 개라는 뜻이에요. 따로 놀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까 무슨 족발 했습니까? 궁중족발. 궁중족발 월세삼백만원에서 천이백만원 이게 팩트입니다. 달라했다 말이지요. 지게차로 밀어붙였다 말이죠. 이 사건이 뭐냐 하면 이 궁중족발 사업자가 혼자 시위하고 있는 거예요. 사회가 왜 우리를 동정하지 않느냐 시위하고 있으니까 주인이 또 약 올리러 왔는기라, 왔는걸 흉기로 찔러 죽이려고 하다가 입건됐어요. 이젠 살인미수가 되어버렸어요. 그냥 망하면 되지. 그런데 단골이 많으니까 이게 아까운 거예요. 맛 집이라 유명하니까. 궁중족발 이 사람이 자기 세력 구성돼있지요. 그리고 새로운 집주인도 구성돼 있지요. 둘 다 각자의 존재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아까 모든 실천과 행함은 방향성이 있지요. 이 사람이 모든 칼들고 설치는 방향성은 시위하는 방향성은 누구한테로? 집주인 좋아라고? 미쳤어요. 자기 좋아라고. 그럼 집주인은 삼백만원 같으면 삼백4십만원, 오십만원 올렸으면 절대 안 나갑니다. 천이백만원 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거 누구 좋아라고? 자기 좋아라고. 둘 다 구성돼 있습니다. 둘 다 자기의 가성비를 챙깁니다. 내 사업 본전 찾겠다는 겁니다. 내가 사는 노고, 수고, 고생한 만큼 내 인생 빛내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고생해놓고 이것밖에 안되면 나 억울해서 못 죽는다는 거예요. 억울해서 못 죽으면 그러면 귀신 될래.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뭐라고 하는가 하면 주님의 존재를 보고 자기는 벌벌 떨지요. 벌벌 떨었다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아직 합치되지 않았다. 한 처소에 있지 않았다. 한 공간에 있지 않다는 뜻이에요.

결국 교회에서 믿고, 믿음으로 모자란다고 하니까 주위에 도와주는 사람 고아나 과부 어려운 사람, 과부는 또 도와주면 수상해서 안 되고 고아를 이렇게 도와주면, 도와주는 이유가 방향성이 있지요. 고아원을 돌본다. 우리 교회이름으로 어려운 사람도와주고 세월호해서 위로하고 방향성이 있어요. 방향성은 누구 좋아라고? 자기가 이미 양보할 수 없는 자기 존재에요. 자기 존재를 위한 기능으로서의 행함이 나온 겁니다. 내 인생 이대로 망할 수 없고 나를 빛내야겠다는 이것이 이 땅에서 줄곧 줄창 계속해왔던 악마가 통제하고 악마가 다스리고 있는 이 세상의 생리고 속성입니다.

나는 존재를 포기 못한다는 거예요.  나라는 존재를. 억울해서 못 죽겠다는 거예요. 억울해서 못 죽겠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야고보서2장 말씀을 보면서 전에는 믿음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추가로 행함까지 추가해가지고 칭찬받겠다는 낯선 그 자체가 이게 귀신들이 자기 존재성, 자기 구성세계를 포기 못하겠다는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자기 본색을 드러낸 거예요.

그러면 제가 말하는 기능은 뭐냐, 기능뿐이지요. 용도로 하다가 죽으면 용도 폐기돼서 죽으면 그만이고. 기능만 이야기해요. 검사가 동네에 가서 금의환향 생각하지 말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가지고 이렇게 잘하는 게 공부밖에 없어 공부를 했더니만 검사가 돼가지고 이건 내가 죄 지은 것도 아니고 누가 죄 지었는지 분간이 안 돼. 왜냐하면 죄지은 놈은 따로 있고 죄 지었다고 처벌해달라고 오는 서류를 보고 있는 본인이 저런 나쁜 놈들이 없었으면 지가 이런 고생 안하잖아요. 내가 이 머리가지고 어디 가도 오백만원 받는데, 이건 아침 6시에 출근해가지고 밤11시까지 이게 무슨...., 검사하고 또 결혼해서 좋다고 했던 마누라는 또 무슨 죄가 있어요. 생과부가 될 판이라. 물론 검사하고 잘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재벌 집 딸이 돼가지고 지는 또 화분 던지고 가위 던지고 하겠지만.

자기 영광을 추스릴 시간적 여유를 사건은 허락을 안 하네. 우리 성도한테. 교회가면 지 구원받은 자랑 그리 하는데 성도는 지금 지 구원받은 자랑할 새도 없어. 늘 다가오는 과제가 뭐냐 하면 기능적으로 일을 해요. 기능적으로. 니가 지금 할 때 니 방향성이 어디냐를 물으시는 거예요. 니가 기도를 했는데 자, 니 기도내용을 한 번 보자. 기도 누구 좋아라고 기도했냐? 늘 이렇게 이미 우리는 망할 인간에게 주님의 만남을 통해서 주께서 죄인을 만나고 싶거든요.

의인을 만나는 게 아니고 죄인을 만나 구원하셨다면 이미 그게 믿음으로 확정됐잖아요. 확정됐으면 끝나야 되는데 믿음에 행함을 내놔라하니까 막상 믿는다하고 내놓는 행함 보니까 귀신들의 행함이 막 나오는 거예요. 그걸 누가 인식하느냐 성도만 인식이 돼요. 성도만.

그러면 그 행함이 어떻게 나오느냐 새로운 과제, 새로운 기능을 부여받을 때 그 행함이 계속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 아까 예를 아주 지저분하게 했지만, 첫째시간에 죽 이야기했잖아요. 촌에서 올라와서 맞벌이한다고 돈 빼먹고 하는 그럴 때 우리의 마음가짐이 어떠냐 말이지요. 용돈 한 오만원주고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아재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마세요. 바쁩니다. 나도 이리 봐도 한가하지 않습니다.” 내보내던지 뭐가 조치를 해서 어느 선에서 뭔가 끊어주는 게 필요하잖아요. 끊어주는 게.

그 때에 유명한 말이 뭐냐 하면 생선을 주지 말고 생선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는 탈무드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내가 당신을 미워서 안도와주는 게 아니고 내가 도와주면 인간 버릴까 싶어서 내가 못 도와준다고 사실은 돈이 아까운데. 어느 정도 끊을 때 끊어줘야 된다 말이죠. 제가 지난겨울 강의 때 했잖아요. 제발 좀 누구 도와주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도와주지 말라고 했던가요? 기억 안 나지요. 니가 그 사람에 대해서 뭐 좀 알아? 알지도 못하면서 왜 도와줘? 알지도 못하면서.

실제로 보면 여호수아에 보면 그런 게 나와요. 가까운데 사는 기브온 사람이 마치 멀리서 온 사람처럼 온갖 연기와 연출을 다 피워놓고 일부러 전부 다 조작해 내요. 떡을 일부러 곰팡이 피게 해가지고 “보스여, 여기까지 온다고 떡이 다 시들어서 곰팡이 폈습니다.” 이렇게 속여 놓고 안 죽인다는 정치적 조약을 맺었어요. 북한 김정은 같애. 떡 맺어놓고 알고 있는 옆집에서 와서.

우리가 누굴 도와줄 때는 뭐 알고 도와줘요? 그래서 저는 도와준다는 말을 안 믿습니다. 그럼 뭐냐, 그 사람의 말에 공동 투자한 거예요. 빚 보증서서 망했다. 제발 그런 변명하지 마세요. 은행이자보다 더 쳐주니까 투자한 거예요. 투자했다가 망했다고 하지만. 절대로 인간은 귀신에 매여 있기 때문에 하는 행세가 아담에서 아담입니다. 귀신에 들린 아담이 귀신들린 아담을 만날 수밖에 없어요. 따라서 우리한테는 행함이 있는 믿음은 있다? 없다? 없습니다. 없어요.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기 때문에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는 누구에 기능인이 싫어요. 우리는 내 사람 되고 싶어요. 나는 내 사람 되고 싶어. 내 존재를 지켜주는 기능만, 나한테 회수되는 기능만 나는 실천에 옮길 뿐이지 나는 손해 보는 장사는 우리는 어림반푼어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났다. 우리는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왜? 평소에 지가 하던 행세가 있어가지고. 참 교회 50년 모태신앙 바르게 살았다. 바르게 살았는데 행여 진정 어려운 사람이 와가지고, 아이고~ 동서 형님. 형님요, 요번에 한두장만 그렇다고 이만원 주지 마세요. 이천만원입니다.  두 장만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은 이 두 장만 달라는 사람은 신경 안 써요. 50년 동안 모태신앙해가지고 자기가 순수하다고 하잖아요. 할 때, 이 사람이 뭘 생각합니까? 야고보서 2장 생각하겠지요.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이참에 도와주면 자기는 어떤 신앙이 있다? 이건 하나님이 인정하는 믿는 자라는 것이 다시 티내는 그런 멋진 기회가 왔는데 과연 이천만원이 그만한 가치가 있느냐를 계산해 나가는 복잡한 계산에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럼 이건 뭡니까? 뭘 지키는 거예요? 나의 존재. 내가 평생 살아온 나의 구성된 나의 인생을 본인이 지키려하는 거예요.

그래서 됐다 잃었다 치고 이천만원 줬다. 꼭 갚으래이. 꼭 같으라고 해도 안 되지요. 또 지 육신을 생각해서 이런 소리를 하면 안돼요. 왜? 거저 주어라. 하는 이것도 마태복음5장에 보면 오른손이 한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 괜히 말씀을 알아가지고. 돈 생기면 줘. 아이고, 형님, 역시 교회의 권사님 되니까 다르긴 다르구나! 나는 절에 가는데 이제부터는 절에 안가고 나 교회 가야지. 뭐 더 뜯어먹으려고? 뭐 종교 바꿔? 하여튼 간에 이렇게 나온다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모습이 바로 믿음이냐, 믿음이 아닌 걸 알기 위해서 주께서 이런 경우를 50년 만에 처음으로 당하게 하시는 겁니다. 니가 니 믿음 지키려고 평생 헛수고 했다는 것을 들통 내게 만든 겁니다. 과연 주님의 만남이 우리 믿음 있다는 걸 과시하려고 만났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니 야고보서2장 전개가 그래요. 하나님이 한 분인 줄 믿고 떤다는 자체가 왜 떨겠어요? 자, 아까 궁중족발 이야기했거든요. 궁중족발의 그 사람 쫓아내고 이 집 주인 아들이 이름도 궁중족발. 등록 안됐으니까 쓸 수 있거든요. 간판 크게 걸고 새 맛 평양 궁중족발 냈다 합시다. 그러면 여기에 집주인이 아들이 여기에 운영하게 되면 아들이 집주인 앞에 벌벌 떱니까? 칼 들고 설칩니까? 아니지요. 아버지이기 때문에. 구성이 하나로 구성됐잖아요. 소속이 같잖아요.

아버지가 와가지고 “뭐 좀 보태줄까?” “아버지 내가 돈 벌면 집세 낼까요?” “아니다. 아니다. 무슨 소리하고 있노. 니 성공만 하면 더는 소원이 없다. 그저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며늘아하고 잘해가지고 니도 전에 내쫓은 사람 봤지. 그 사람처럼 돈 많이 벌어가지고 니 맛집 해가지고 해라~ 이. 열심히 친절하게 잘해라~ 집세는 아버지니까 이 집세 받겠나? 나중에 돈 생기면 내던지 말든지 그렇게 하고 아 그거 걱정하지 말고.” 아들은 그 집주인을 만나도 벌벌 떨지를 않는 거예요. 아버지게 내거고 내게 아버지 거고.

주님의 나라가 내나라고 내 나라가 아버지 나라기 때문에 벌벌 떨지를 않는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 올 때 해필 설거지하다가 그릇을 깼네. 어째? 이를 어째? 아버지가 “아이고, 그릇을 깼어. 내가 해줄게. 내가 해줄게. 그릇 걱정하지 말고 내가 사줄게.” 벌벌 떨지를 않아요. 그릇 사가지고 돌아오다가 또 엎어가지고 뭔가 또 형광등을 깼네. 아이고~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해줄게. “아버지, 나 어설퍼요.” 니가 어설프니까 어설픈 걸 알고 이 집을 세운 거예요. 니는 니가 장사하는 게 아니고 내 이름으로 장사하면 돼. 니는 내 기능자야. 내 용도야. 그 일을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에게 마주치게 하는 겁니다. 설교 들어도 잠 오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아무리해도 그건 하나의 어설픈 기능이에요. 어설픈 기능이라니까요. 그게 만남이에요.

그게 주님이 뭐든지 실천이든 행하든 누굴 만나야 될 게 아닙니까. 만남이 성사되려면 주님이 마귀 구하려고 오신 게 아니고 귀신 구하려고 오신 게 아니에요. 자기 백성 구하려 왔습니다. 그러면 일단은 그 믿는다는 말은 아까 이야기했지만, 소속이 같은 소속이에요.

그럼 그 소속에 대한 행함이 있어야 되는데 그 행함은 뭐가 나오느냐, 크게 쓰겠습니다. 행함은 예상 밖입니다. 예상 밖이란 말은 전제는 뭐냐 하면 예상했음이에요. 예상했음 그런데 빗나갔음. 우리 성도의 일생이라 하는 것은 한평생 내 뜻대로 되는 법이 없어요.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기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다니엘 세친구가 그 바벨론에 살았지요. 그 사람들 어떤 사람이냐  하면 하나님의 뜻이라면 양보 없는 사람이에요. 고기 먹으라 하니까 그 고기가 우상에서 나왔기 때문에 안 먹습니다. 안 먹으면 니가 바짝 마르는데 내기합시다. 채소만 먹어도 살찌는지. 최초의 채식주의자로 보시면 됩니다. 살찌는지 아니면 바짝 마르는지 해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살쪘어요. 자, 이 정도 같으면 한 신앙들 하지요.

그 정도 신앙 보였으면 하나님께서 다른 기능을 보여주시면 안 되잖아요. 인간들 입장에서. 그 정도하면. 테스트를 왜 합니까? 그거 이겨내면 그 다음부터 어려움이 안와야 그게 테스트 치른 보람이 있는데. 허들 한 번 넘었다고 그 다음 허들은 무슨 허들이냐, 우상에게 절하면 어디에 들어갑니까? 용광로 불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자, 여기서 한 번 생각해봅시다. 다니엘 세 친구가 본인의 행함으로서 채소를 안 먹었느냐, 기능이냐 하는 겁니다. 주님의 하시는 일에 기능자였어요? 아니면 자기 존재 믿음 과시하기 위해서 안 먹었느냐 하는 겁니다. 누가 봐도 그 사람은 자기 믿음 있는 걸 과시하기 위해서 안 먹었을 거예요. 그렇다면 그 다음의 허들에서 다 넘어져야 돼요. 그 다음 허들. 그 다음 장애물에 다 넘어져야 돼요.

그 다음의 장애물은 뭐냐 하면 이 번에는 먹고 안 먹고가 문제가 아니고 절 안하면 그냥 불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불속에 들어가는 상황을 미리 당겨서 예상할 수 있지요. 예상이 되지요. 자, 주일오후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신체는 단백질 아미노산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350도 되면 다 녹아요. 시커멓게 다 타고 없어버리니까. 전에 이야기했지만 머리카락 촛불에 닿으면 이상한 냄새나지요. 단백질로 돼있기 때문에 단백질 냄새거든요. 그러면 내 몸이 불속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전부터 이제 슬슬 녹아들어가기 시작하고 내가 완전히 죽습니다.

그걸 다니엘 세 친구가 이게 공무원들이에요. 그러니까 이건 지성인이지요. 지성인이 알만큼 아는 사람이다 말이죠. 앞으로 무슨 예상이 된다는 것을 모를 바보가 아닙니다. IQ가 20, 30이 아니에요. 치매 걸린 사람이 아니에요. 똑똑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쪽에서 똑똑한 니도 예상하는 똑똑한 이야기를 한 거예요. 상처처럼 파고 들어왔겠지요. 죽으면 풀무 속에 들어간다. 그게 얼마나 뜨거운지 그 불 때는 사람도 타죽었어요. 얼마나 뜨거운지. 포항제절 용광로처럼 되는 모양이라.

그런데 그 사람들은 뭐했습니까? 타서 죽는다 할지라도 절은 할 수 없습니다. 이리 되거든요. 여기서 분리시켜 볼게요. 여러분, 물어봅시다. 타서 없어지는 게 뭡니까? 자신들의 몸, 자신들의 존재지요. 그럴지라도 내가 하지 않겠습니다. 하는 것은 기능이죠. 기능이란 말은 일처리 바빠서 누굴 생각할 수 없다? 나 생각할 수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검사가 서류를 이만큼 한다는 것은 검사는 국가에 종속된 사람이죠. 그러면 기능으로 산다는 것은 나는 누구에게 종속된 사람밖에 없다. 이리되지요. 종속된 사람이에요. 심수봉이가 그런 이야기했는데 사랑밖에 난 몰라. 사랑은 혼자 하는 게 아니에요. 같이 구성하는 겁니다. 구성하기 위해서는 혼자하는 게 아니고 나, 너 없어지기 위해서는 나, 너를 없애는 대신 나, 너 대신 기능이 나와 줘야 돼요.

그 기능이 뭐냐, 내 것을 상대방에게 넘겨주는 겁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다음에 뭡니까? 저주를 받을지어다. 고린도전서16장. 이 말은 뭐냐,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니 누구한테 니 몸 넘겨줬지? 누구한테 니 인생 넘겨주었지?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나는 이미 주님한테 넘겨주었는데 너도 마찬가지 넘겨줬지? 그지? 그렇지 않으면 저주받는다. 이리 되는 겁니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라는 영화 나오지요. 피아노레슨 하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인데. 그 주인공 전도연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 넘겨준 사람이 아니에요. 안 넘겨주고 믿기만 했거든요. 믿기만 했는데 자기 아들을 유괴해서 죽인 사람이 교도소가서 전도하는데 그쪽이 피해자의 전도를 받기 전에 먼저 본인이 알아서 교도소에서 예수를 믿었다 하니까 전도연이가 미쳐버리는 거예요. 밀양의 그 영화의 주제는 이거에요. 모든 인간은 실성했다. 미쳤다. 치매 걸렸다. 자기 자신한테 치매 걸린 거예요.

믿던지 뭐하던지 넘겨주는데 이건 자기를 위한 이익을 위한 자기 존재를 빛내기 위한 기능이지. 정말 완전히 나를 드러내가지고 적출이라, 적출 오려내는 것. 간, 쓸개 적출하듯이. 드러내서 주님 앞에 던져내어서 내 것을 주님한테 주는 게 아니고, 주님도 내게 줬으니까 내 것 주님께 돌려드리고 이런 상환이란 없었던 사랑이 새롭게 구성되는 기능을 주님 쪽에서 먼저 했고 거기에 반응해서 우리도 주님에 의해서 기능을 하게 된 겁니다. 이게 언약이 드러남. 언약구성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죽으셨고 우리는 죽을 죄인으로 같이 합세를 한 겁니다.

언약이에요. 우리보다 먼저 있었던. 그 관계를 가지고 구원이라 하거든요. 그러니 예수 믿는다. 믿씁니다. 쌍시옷하는 것은 안 믿는다는 뜻이에요. 믿씁니다. 미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는 거예요. 오늘날 한국에 있어서 교회가 뭐냐 비는 집이에요. 교리고 절이고 필요 없어요. 비는 게 교리에요. 조직신학이 비는 거예요. 하도 답답하니까 죽기 직전에 빌고 죽자는 거예요. 악착같이 엎드려서 순례의 길을 행하고, 십자가 메고, 예수님의 15단계를 십자가지고 올라가고, 티벳하는 사람은 무려 10Km를 사흘동안 시속1Km 달라이라마 불교에서 티벳에서 순례의 길을 해요. 목요일날 9시40분에 KBS에서 순례의 길을 했어요. 어제 했어요. KBS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의 가신 그 길도 나오고, 티벳부터 해가지고 천주교도 나오고 인간의 순례, 자기를 낮추고, 낮추고 낮춤으로서 뭔가 얻고자 하는 그러한 종교성이 그대로 다 노출되었어요. 바라기는 그거 틀어놓고 방해하고 싶은 생각이 막 났는데,

그게 주로 기도하는데 오체투지 온몸을 던져서 지면에 던지는 이 정도로 낮아져야 이게 기도지, 어떻게 요렇게 기도하는 게 되느냐 말이지요. 소녀의 기도처럼 옥색 드레스 입고 오늘도 무사히 해가지고 이게 폼 잡는 거지 무슨 기도냐 이 말입니다. 진짜 기도는 땅에다가 던져야 되지요. 그렇게 티벳 불교에서 이야기해요. 그 비슷한 경우가 진짜 교회마다 있다 말이죠. 교회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교리고 뭐고 성경이고 몰라요. 그냥 답답할 때 비는 집. 가가지고 앞자리에 앉아서 그냥 정성이 지극하면 뭔가 되지 않겠느냐 하는 그 희망. 절망이 오기 전까지 마지막 하나의 겨자씨만한 희망이라도 거기다가 의지해서 투자하겠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건 만남이 아니고 일방적인 쳐들어가는 거지 만남이 아니에요. 서로 구상한 것도 없어요. 기존의 자기로 살기위해서 사는 거예요. 야고보서2장22절부터 나오는 그 믿음의 증거들이 행함의 증거가 뭐냐 하면 전부 다 예측불허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바치라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자기가 지어낸 거예요? 자기의 성의 표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지시였습니까? 하나님의 지시지요. 그게 언약이에요.

언약은 아브라함도 언약의 내용이 어떻게 되는지를 몰라요. 장차 올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지 몰라요. 다만 자기는 주님의 기능을 앞당겨서 보여주는데 아버지가 누굴 바친다? 아버지가 아들을 바치는 그 기능,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죄인을 위해서 바치는 그 기능을 아브라함이 미리 자기 아들 이삭을 통해서 미리 보이도록 주님의 존재에 입각한 기능이에요. 그 기능을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걸로 행함이 된 겁니다. 누구 좋아라고? 나는 아니에요. 아브라함 아닙니다. 이건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언약을 이룬 겁니다.

자, 그건 아브라함 경우고 오늘날 성도의 경우 같으면 어떻게 이렇게 예상 못한 것을 이렇게 하게 하시는가, 그건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예상한 것이 실패작으로 두드러지게 드러내게 하십니다. 밀양 영화 했지만, 지가 전도해서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 증명하려하다 저도 되받아졌어요. 가해자가 먼저 자기 없이 구원받아버렸어요. 그러니까 화가 난 거예요.

아까 뭐라 했습니까? 실성해서 미쳐버렸지요. 어두운 그늘, 밀양. 그늘이에요. 그늘. 인간은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상인이 아닙니다. 미쳤거나, 실성했거나, 치매 걸렸거나 전부 다 똘 아이들이에요. 전부. 가장 똘 아이들입니다.

아브라함도 자식 준다 하니까 자식을 자기 힘으로 이루기 위해서 행함을 보여줬는데 그 행함이 뭐냐 하면 종 하갈하고 동침해서 이스마엘을 낳잖아요. 지는 뭐 아이고 산풍 됐다. 하고 편하게 있었지요. 그런데 그 동침하기 전에 애를 못 낳게 하든지 말리던지 해야 될 텐데 뒤늦게 와서 하는 말이 뭐냐, 그 애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진작에 말해주지. 인간 쪼다 다 만들어놓고. 인간 쪼다 다 만들어놨어요.

아내 사라는 애기를 못 낳고 아직도 아브라함 본인은 자녀를 배태할 수 있는 능력자인 것을 티낸 거죠. 남자는 능력이 있는데 여자는 능력이 없어요. 그래서 주도권이 언약의 주도권이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입니다. 기어이 모든 가능성을 제로로 만들어버려요.

우리가 구원되는 근거를 구원되는 이유를 우리가 성도는 평생을 살면서 우리가 없음을 제로임을 증거하는 기능하라고 우리를 이 땅에 계속 살게 하십니다. 미장원에서 머리 잘나왔다고 구원받는 거 아니거든요. 어떤 것도 붙들어도 방언한다고 구원받는 거 아니에요. 병 고쳤다고 구원받는 거 아니에요. 어떤 경우에도 없다. 제로. 구원받는 근거는 없다. 없는 거예요.

그걸 이렇게 하면 됩니다. 왜 사랑할 필요도 없는데 왜 사랑하십니까? 요한일서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사랑한 것도 아닌데 왜 저를 먼저 사랑하십니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사랑을 사랑답게 구성하기 위해서”오늘 제목을 구성입니다. 구성.  사랑으로 구성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사랑에는 여기 있나니. 없었는데 있다. 없었는데. 주님은 그냥 사랑이 아니에요. 주께서 죄인을 사랑할 때 주님이 사랑돼요. 우리는 사랑 받을 자격도 없는 것을 사랑을 했다는 점에서 사랑받는 용도로 기능자로 주님의 사랑 구성에 재료로 이게 가담되게 된 겁니다.

같은 궁중족발하면서 집주인이 무섭지 않은 자로 들어가는 거예요. 음식솜씨 개판이고 두 번 다시 그 집 안 간다. 온 장사는 안 되는데 안 되도 괜찮아요. 집세 안내도. 인생 개판인데. 지옥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요. 왜? 먼저 손댄 분이 주님이기 때문에. 먼저 손댄 분이. 예수님 찾아온 중풍병자가 요구한 것은 죄 사함 이었습니까? 중풍병 낫기 위함이었습니까? 중풍병 낫기 위했지요. 그리고 또 묻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 오신 것이 중풍병 낫는다는 이야기를 했습니까? 죄 사함에 대해서 언급했습니까? 죄 사함 언급했지요. 세 번째 묻습니다. 중풍병은 그대로인데 죄 사함 받았다. 기분 좋아요? 안 좋아요? 죄 사함 받으면 안 나아도 좋지요. 이게 검사에요.

왜냐하면 중풍병 나아야 된다는 것은 내가 생각했던 내 원래의 내 기능이었지만, 주께서 오셔서 중풍병자체로 검사일 하라고. 내게 주어진 숙제, 죄 사함을 어떤 근거 없이 죄 사함 받게 해주신 분이 주님이란 그 증거 하라고 그 기능을 계속하는 거예요. 아픈 것도 죄 사함에 예속된 거예요. 죄 사함을 보여주기 위한 기능이 바로 아픈 것이에요. 아픈 사람이 지금 화 날 거예요. 니 한 번 아파봐라. 그렇게 나오는가. 어떻든간 내 말이 맞아요. 아파도 나는 천국 간다. 이거 하라고 주께서는 아프게 하시는 겁니다. 아~ 제가 참 이런 말을 하는 게 제 뻔뻔스러운 제 입을 일단 치고 이야기하겠습니다.

모든 본질은 기능에 있지 그 사람의 개체에 있지 않습니다. 개체는 예수님 한 분으로 족합니다. 예수님 증거 하라고 성령 왔지 내 증거 하라고 성령오신 게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능인입니다. 쓸데 쓰다가 이제는 사라지면 돼요. 사라지매 우리는 희망 겁시다. 이 짓하다가 언제 없어진다는 것. 망해도 결국은 사라진다는 것. 그러니까 사라지기 직전까지 우리는 망하는 꼴을 봐야 된다는 겁니다. 망하는 꼴을.

자, 이제 남은 시간은 어떻게 망하는가. 그게 25절에 나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라합도 그냥 라합이 아니고 기생 라합이에요. 몸 파는 라합입니다. 몸 파는 라합이라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여리고성에서 몸 파는 기생 라합의 가족이 구원받았다는 말은 구원받을 만한 존재에서 나오는 어떤 기능이나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는 거예요. 그럼 창녀하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뭐냐, 기생 라합의 특징은 만남이에요.

아~ 오늘 또 제목 헷갈린다. 만남. 만남을 할지 구성으로 할지 모르겠는데. 기생 라합은 아무도 안 만났으면 여리고성이 망할 때 같이 망합니다. 어쩔 수 없어요. 어차피 인간은 망하게 돼있는데. 망했습니다. 요단강이 있는데 여리고가 여기 있거든요. 요단강 건너가서 제일 먼저 만나는데 그리고 아이성이 여기 있는데. 여기 여리고성에 있는 기생 라합에서 정탐꾼이 오지 않았으면 기생 라합은 그냥 같이 폭삭 망합니다. 그러니 이 말은 뭐냐, 기생 라합에 기능은 뭐냐 하면 “나 원래부터 거짓말 잘해. 그리고 이 거짓말로 나는 망해도 나는 거기서 대들 수 없어.” 라는 것이 이미 거기에 장착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개과천선할 이유 있다? 없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거예요. 그저 만남이에요. 만남. 만남인데 무엇과 무엇의 만남이냐 하면 이스라엘 안에는 언약이 들어있어요. 언약. 하나님의 언약. 근원적인 것. 기온적인 것. 아담과 아담이 아니고, 아담과 아담 있기 전에 있던 그 언약이에요. 언약이 있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는 곳에는 어떤 소문을 들었느냐 하면 창조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어서 만나는 민족마다 다 알아서 다 엎어지더라. 라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런데 그 소문을 기생 라합만 들었겠어요? 다른 모든 사람이 들었잖아요. 여기 안양에 있는 사람이나 안산이나 교회 가는 사람 많을 거 아닙니까. 그 사람들이 전부 다 들을 때 무슨 생각합니까? 자기 존재 생각하겠지요.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면 알아서 기어야 된다. 이리 나오겠지요. 그래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나는 지금 하나님이 오시면 나는 괜찮겠지. 이 정도로는 봐주겠지. 왜? 아담에서 아담이니까. 아담끼리 비교해서 내가 전보다 월등하니까. 이러는데 기생 라합은 월등할 젤 것도 없어요. 낮아도 그렇게 낮을 수가 없어요. 니는 남자가 50명 다녔지만, 나는 5명 다녔다. 이런 걸 젤 랍니까.

기생 라합한테 거짓말하는 것은 조금도 양심의 가책이 성립되지 않아요. 인간은 사는 거 자체가 거짓말이에요. 인간은 누구든지 하루에 300번 거짓말합니다. 거짓말한다는 말은 일부러 속여서 하는 것도 있지만, 과도하게 표현한다든지 말 할 걸 말을 안 한다던지 다른 걸로 대체한다던지 아주 많이 있잖아요. 어쨌든간에 그 거짓말은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지킨다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 앞에서는 그게 무용지물이라 하는 것을 미리 자살한 거예요. 미리 자폭했다 보면 돼요.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거 이왕이면 언약 앞에서 망하자. 언약 앞에서 내 주제파악하자 이 말입니다. 뭐만 살린다면? 언약만 살린다면. 언약만 구성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언약의 기능으로 되겠다. 나선 겁니다.

찾아온다는 것은 예측 못했어요. 왜냐하면 몰래 왔기 때문에. 정탐꾼이. 미리 온다고 카드 들고 이리 환영하고 안했잖아요. 몰래 왔잖아요. 이것은 지 복이에요. 기생 라합이 구원받은 것은 이건 지 복이라니까요. 보통 여자 어른들끼리 이야기하면서 “그래, 그 둘째 딸이  좋은 남편 만나서 그렇게 행복하게 그렇게 잘 산다면서.” 이리 하니까 자랑하고 싶은 마음 눌러야지요. 자랑하고 싶은 걸 누르면서 자랑 대체에서 나온 말이 “뭐 내가 잘 키운 것도 아니고 지 복이지 뭐.” 이러거든요. 성도는 지 복이에요. 법정 직업이라든지 어차피 거짓말대장들이거든요. 어차피 미친 인간들인데 지 복이지요. 뭐.

평소에 거짓말을 유감없이 발휘한 겁니다. 다 계획적 거짓말한 거예요. 거짓말도 더블로 했어요. 더블로. 벌써 왔는데 갔다는 거예요. 안 갔는데. 갔다 하고 자기 조국을 배신한 겁니다. 그 정탐꾼이 누구의 대표자입니까? 이스라엘의 대표자죠. 이스라엘 대표자와 기생 라합 사이의 유일한 한편이란 표가 무슨 표입니까? 붉은 밧줄이에요. 붉은 밧줄.

붉은 밧줄이란 그걸 통과해서 대표자 이스라엘이 산겁니다. 나중에 여리고성에 쳐들어갈 때 그 다녀갔던 흔적을 매달아 놓은 거예요. 어린양의 피를 보고 넘어가는 거예요. 우리는 십자가 보고 넘어간 겁니다.

십자가라는 게 뭐냐, 주님께서 다시 가시면서 내놓은 아버지 앞에 기능이에요. 기능.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인생의 삶과 인생의 끝 사이에는 유일한 길밖에는 없어요. 누구나 죽는다는 길밖에는 없어요. 그 죽는다는 길 말고 다른 길이 주어진 겁니다.

우리는 예상하기를 살다죽지 뭐. 요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길이 소식이 들려온 거예요. 그렇다면 길이 하나의 길밖에 없는데 이 하나의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증거 하는 기능으로 이게 우리가 취직된 겁니다. 소속이 된 거예요. 살다가 죽읍시다. 그런데 그 길이 나의 길이 아니고 주님 가신 길. 주님가신 십자가의 길이에요.

자, 물어봅니다. 기생 라합이 그 다음부터 직업이 총회장으로 바뀌었습니까? 직업이 뭐로 바뀌었지요? 냉수팔고 몸 팔고 그랬지요. 안 바뀌었어요. 자기 존재는 바뀔 필요 없어요. 그럼 지가 거짓말했기 때문에 또 거짓말을 솜씨 있게 자랑질 하겠어요? 아니에요. 처음부터 인간은 거짓말하는 존재에요.

따라서 기생 라합의 의미는 뭐냐 하면 그렇게 죄인이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의 무엇이 구성되었느냐를 보라는 겁니다. 무엇이 구성되었을까요? 바로 주님이 기생 라합을 구원했다는 주님의 행함, 그 행함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통해서 기생 라합의 기능으로 나온 겁니다. 기능으로.

마지막으로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아까 아픈 이야기했지만, 12년 동안 병들었다. 병들면 짜증나요. 화나요. 그런데 12년 동안 귀신들린 여자, 남보다 더 나쁜 짓했을까요? 안했을까요? 안했지요. 그리 했으면 남들도 다 귀신들려야지요. 그게 아니고 자기는 너무나 재수 없는 거예요. 재수 없어야 되는데 오히려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개 같은 여자에게 이 병 말고 무슨 병이 온들 그건 지당한 거지 내가 거기에 대해서 시비 걸 거 없습니다.

예수님이 놀래가지고 세상에 이스라엘에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언약 때에, 언약을 아는 사람 중에 이 정도로 언약을 아는 사람 처음 봤다는 거예요. 여자여, 니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병도 낫고 죄 사함도 받고. 이게 하나의 우리는 내 존재를 생각할 틈이 없지요. 이미 서류가 이만큼 있는데 나는 촌에 가서 검사됐다고 자랑질해야지. 자랑질하지 마세요. 그냥 업무나 처리하세요.

아~ 이렇게 이게 내가 기생 라합이고, 이게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니까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이 주의 약속이라고 내 나름대로의 믿음의 티를 냈다고 최선을 다하는 이 어설픔. 이런 것을 내놓는 모습. 오직 십자가외에는 우리가 죄 사함 받을 길이 없음을 고백하는 거, 이게 성도의 행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놓을 것은 죄밖에 없는데  세상에 그 죄가 십자가를 증거 하는 용도로 쓰여 지게 하신 것이 주님인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하고 내 존재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안에서 일하는 주님의 기능만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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