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80810a야3장13절(역신학)-이 근호
야고보서3장13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약간 야고보가 좀 시비조로 이야기하지요. 말을 긍정적으로 해도 될 문제를 부정적으로 바꾸어서 이야기해요. 누가 건방떠느냐, 그런 식으로. 시비조로 거는 겁니다. 왜 성경에서는 그냥 나를 믿어라 하면 될 것을 나를 사랑하라 하면 될 것을 너희 자신을 미워하고 사랑하라. 왜 자꾸 부정적인 것을 앞장세우는 이유가 뭐냐 말이죠.
그것은 이미 긍정적인 것은 충분히 해왔던 거예요. 하나님은 위에 계시다. 우리의 하나님은 여호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 주셨다. 말씀 따라가면 하나님과 하나 되어서 우리는 하늘나라 이룬다. 이미 긍정이 아주 넘쳤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냐 하면 부정적인 것을 사전에 다 빼버렸기 때문에 그래요. 유대인들이.
어떻든 간에 유대인 나라를 하나님 백성 만들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것을 빼버리고 누구나 긍정만 하면 합격되는 그러한 해답 같은 것을 분배했다 할까, 이렇게 나누어준 거예요. 현재 지금 초등학교 애들한테 우리는 대한민국 사람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무 문제없잖아요. 우리는 북한 인민공화국이 아니고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했을 때에 학부모들이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왜 갑자기 애들한테 긍정적인 것을 선생님한테 받아드리도록 해야지 우리는 북한 인민공화국이 아니고 라고 하는 말을 해버리면 요새 예민한 학부모들 바짝 교장에다가 교육청에 막 항의할 거예요. 북한에서 내려왔나? 이런 식으로.
무슨 말이냐 하면 “초등학교 학생 여러분! 여러분들은 내가 살던 그 조선민족인민 공화국이 얼마나 괴로운 줄 모르지요? 하지만 이 나라는 너무 좋아요.” 라는 취지로서 북한인민주의 공화국이 아니고 한국이다. 라고는 할 수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경우잖아요. 개인적인 경험이라고요.
그런데 이 야고보서가 이야기하는 것은 야고보는 어느 계통이냐 하면 열두 사도의 계통이지요. 왜냐 하면 야고보서1장에 보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여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되어있지 않습니까. 되어있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그 당시 사회와 대치관계에 있었습니까?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그 당시 유대사회와 대치관계 적대적 관계지요.
그러면 적대적 관계에 속한 야고보가 이야기할 때에 부정적으로 할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따로 나와서 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속해있는 곳이 적들 속이에요. 그러니까 적들 속에서 “저쪽 아닌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요.”라고 지금 야고보는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면 이걸 오늘날 교회에다가 적용시켜 봅시다. 세상 전체가 구원 받는 게 아니지요. 오직 믿는 자만 구원받지요.
그러면 안 믿은 사람들이 주변에 포진되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에 예수 믿읍시다! 라고만 나올 게 아니라 그냥 예수 믿읍시다! 되어버리면 지금 내가 세상의 일부잖아요. 세상의 일부인데, 내가 이만큼 양으로 6을 가지고 있다. 양으로 6을 갖고 있는데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6+예수 믿으라는 새로운 정보 하나 더 추가하게 되면 이게 7이 되잖아요. 그렇지요.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사람인데 예수 믿으세요. 추가했으니까 나는 남보다 추가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이게 구원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땅에서 추방된 분이잖아요. 추방된 분을 믿는다는 말은 이 6에 의심을 하라는 이야기에요.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6이, 숫자 6. 이 6이 잘못된 사고방식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본인을 의심하라는 겁니다. 이게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성경에서 뭐는 아니고 뭐라고 할 때, 항상 부정적인 것을 앞에 내세웁니다. 안 믿는 사람한테는 뭐로 들리느냐 하면 시비조로 들리는 거예요.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거 인정해 달라고 요청할 수가 없어요. 사도한테는. 그러면 한 5년 믿으면 이제는 부정적인 것이 없겠지요? 하는데 아니에요. 5년을 믿던 죽을 때까지 부정적인 것은 계속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30년 믿었다면 30년 그 자체가 어느새 부정으로 모은 것이 긍정덩어리로 되어버려요. 내용은 부정적인데 그걸 이렇게 하나로 뭉쳐버리니까 이게 마치 내가 지식을 많이 아는 긍정적인 요소가 되어버린다 이 말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 교회 설립자는 일제 강점기 때 신사 참배를 했다. 상당히 고난을 받았다. 그 당시 교회들이 다 배신했을 때 우리 설립자 목사님께서는 목숨 걸고 피를 흘리면서 교회를 세운 교회다. 상당히 부정적인 요소가 많지요. 제가 부정적인 요소가 많다는 것은 기존 세상과 확연하게 차이나는 요소를 우리 교회는 품고 있다. 이리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뒤에 그 교회 출석했던 사람은 어떻습니까? 신사참배를 했든 안했던 간에 괜찮은 교회에 내가 등록한 거예요. 괜찮은 교회는 벌써 부정이 뭐로 바뀌었느냐 하면 긍정으로 바뀐 상태에요. 괜찮은 교회에 + 하나 더 첨가하게 되면 나는 괜찮은 교회에 소속이 되어버립니다.
결혼할 때 교회를 안다녔는데 아내가 만약에 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 남편이나 자식은 교회가 그다지 나쁜 단체는 아니니까 이단에 안 속하면 뭐 신천지 그런데 안가면 돈 빼먹는 그런 교회에 안가면 그냥 아내가 마음 착해진다는데 반대할 남편이 어디 있습니까. 독한 아내를 원해요? 아니잖아요. 교회라는 것은 괜찮은 동네고 교회가게 되면 회개하는 단체니까 아내 자기가 보기에는 회개할 게 없다고 하지만, 제3자 입장인 남편보기에는 전체가 아내가 회개할 요소가 있으니까 내가 잔소리 못한 거 하나님에 의해서 잔소리해주니 그 아내가 달라져서 가정이 화목하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지요.
교회 가는 걸 그다지 뭐 가정 안 돌보고 자식 안 돌보고 하는 것은 미친 거지만, 그렇지 않고 짬 내서 가는 것에 대해서는 소위 교양 있는 남편 티내기 위해서라도 아내 교회 갈 정도로 이 정도로 용납이 될 정도로 나는 한 교양한다. 성씨가 한 씨가 아니지만, 한 교양한다. 이걸 자랑하기 위해서 또 보낼 수도 있어요.
있는데, 만약에요. 아내가 교회가고 난 뒤에 한 5년 뒤에 남편까지 끌어당기려고 한다면 그 때는 이제는 잠재되어있는 충돌이 발생되는 거예요. “나, 이런 남자 당신 몰라? 나, 괜찮은 남자야. 나, 남들한테 해코지 한 적 없고 어디에 가도 사람 좋다는 소리 들어. 매일같이 들어. 이렇게 사업하는 것도 사람이 좋아서 하는 거야.” 내가 고칠게 어디 있다고 고치느냐 말이죠. “당신 알잖아. 내가 당신 교회 가는 거 봐주는 거. 이 정도가 내가 바다같이 넓은 사람이다. 뭘 봐서 내가 고쳐야 돼? 고칠 거 없어. 나중에 늙어서 할 일 없으면 갈게.” 이런 식으로 하지요.
그런데 그 아내가 뭘 하나 들었는지 “우리는 죄인이고.”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갑자기 긍정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남편은 생각했는데 아내가 교회가고 난 뒤에 갑자기 점잖은 나를 향하여 부정적인 요소를 가할 때 드디어 핍박을 시작하지요. 교회 갈 때 일부러 등산가자고 꼬시고. 일부러 일을 만들어서 제사지내러 가자고. 핍박을 가하지요.
그처럼 인간들은 근원적으로 자기를 부정적으로 대하는 것에 대해서는 근원적으로 부정합니다. 그 자체로 완결이고 싶어요. 완전, 완벽이고 싶어요. 그게 유대사회에요. 예수님께서 그 애비가 악마라고 하는 겁니다. 악마는 긍정을 집합하라. 총집합하라. 다 모아라. 긍정에 긍정을 플러스하게 되면 그게 전체적으로 총체적으로 긍정이다. 이건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겠지. 그게 요한복음7장에 나옵니다. 우리에게 모세가 있었고 모세는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독대한 것뿐이에요. 독대. 하나님과 직접 만난 분이고 빈손으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독대한 분에게 십계명을 가져왔을 때 이건 어느 민족에게도 혜택이 없었던 획기적인 특혜 입었다는 자부심, 유대인들이 갖고 있어요. 어떤 고난이었고, 어떤 세상에서 흩어져서 모든 게 흩어져서 가족끼리 찢어진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모세의 율법이 있는 이상은 그 자부심은 어떤 천만금을 줘도 바꾸지 않습니다. 아주 강한 결속력을 갖고 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 율법에 보면 하라와 하지마라가 있어요. 안식일 지키라고 되어있지만, 그 뒤에는 하지 말라는 말도 있잖아요. 앞에도 하지 말라는 것도 있지만. 또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도 있지만. 하라고 하면 하면 되고. 하지 마라하면 안하면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걸 이스라엘 민족에게 줬다는 말은 이미 하나님도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 하라하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자질이 있고, 하지 마라 하는 것은 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전제로 해서 그걸 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면 되지. 하면 되거든요. 하지 말라하면 안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누가 기쁘다? 하나님이 기쁘다. 뭐? 더 뭐가 필요해요? 지금도 교회가면 목사들이 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사도바울이 있잖아요. 예수 믿으라 하면 믿으면 되고. 하지 마라하면 술 안 먹으면 되고. 성경 보면 다 이해가 되는데. 하라 하면 하면 되고. 하지 말라하면 안하면 되고. 뭐가 그리 어려우냐 말이죠. 뭐가 그리 복잡하냐 말이죠. 오늘 제목은 일단은 이렇게 정해보겠습니다. 역발상 신학. 거꾸로 신학. 뒤집기 신학 이만기의 씨름 한판 뒤집기. 뒤집기 신학.
긍정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지켰는데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의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자기의 완벽과 완전함에 자기긍정에 딱 맞는 그러한 하나님 말씀 지키기를 악마 쪽에서 이미 유포를 시켜놨습니다. 하라하면 하면 되고 하지 말라하면 안하면 되고 만약에 하라했는데 안했을 때는 그건 매 맞거든요. 매 맞으면 돌이키면 되잖아요. 뭐가 어려워요. 그게.
이사야에 보면 안식일 날 북 치고 장구치고 놀았거든요. 장사하고.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가 망했다고 되어있어요. 그럼 선지자 이사야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안식일 날 왜 금식 안했느냐 이리 되어있거든요. 그러면 그 이사야 선지자가 600년 지나고 난 뒤에 그럼 우리가 만약에 이스라엘사람이라면 이사야를 어릴 때부터 공부한 사람이라면 그럼 안식일 날 뭐하면 돼요? 금식하면 되지요. 뭐가 어려워요. 그게.
금식 안 해서 망했다면 금식하면 누가 도와준다? 하나님이 도와준다. 전혀 어렵지 않지요. 이건 예수님이 오시던 누가 어떤 메시야가 오던 여기에 토 달면 이건 정말 이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당시에 이단 또는 귀신들린 자, 귀신의 왕초. 이런 별칭을 갖고 있었어요. 예수님이 지나가면 귀신 오야봉이 간다. 이랬습니다.
그게 오늘날 교회 목사들, 교인들한테는 그게 안보이고 안 들리는 거예요. 왜?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열심히 해서 복 받아서 교회 크게 지었으니까. 그리고 교인들은 헌금하라 해서 했고 헌금 안하면 매매한다 해서 아껴가면서 했고 그게 모아져서 예배당을 부동산을 건립했거든요. 여기에 대해서 누가 토 달수가 없어요. 부정은 없습니다. 긍정만 있을 뿐이에요. 그런데 야고보나 12제자는 이걸 부정으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야고보서3장13절입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라고 누구뇨라고 따지듯이 이야기하지요. 따지듯이. 왜 따지느냐 하면 이 야고보가 예수님 계열이기 때문에 따지는 거예요. 예수님 계열.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느냐 하면 추방된 자거든요.
이 세상에서 추방됐다는 것은 세상과 바이 바이가 아니라 예수님은 빠져나갔지만, 여전히 거기에 누가 있어요? 예수님이 건져내야 될 자기 백성이 예수님을 추방시킨 세계에 지금 함께 살고 있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요소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부정적인 요소가 들어있는 거예요. 나가시면서 부정적인 요소가.
예수님이 좋았다면 기뻐서 붙들겠지요. 그런데 죽어서 나갔다는 말은 예수님 존재 자체에 이 세상과 틀어지는 요소가 있는 겁니다. 안 맞는 요소가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안 맞는 요소에 본인은 나왔는데 사도를 왜 보냈느냐, 예수님과 영원히 천국에서 살아야 될 사람이 예수님이 전에 살던 그 세계에 그대로 있는 겁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이 세상이 4장4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세상과 벗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의 뭐가 됩니까? 원수가 되지요. 얼마나 부정적입니까. 얼마나 부정적이에요.
사람이 살다보면 같은 아파트 옆 동에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 이게 아니고 아예 뭉뚱거려서 세상전체를 테두리를 쳐버립니다. 테두리 치면서 하는 것이 원수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야 될 사람들도 원수의 일원으로서 있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원수가 있었다는 말은 호소로 하는 것이 아니고, 호소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애걸복걸하는 것이 아니고 부탁이니까 이 세상에서 나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 힘으로 못 빠져나온다는 겁니다. 너희 힘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이니까 빠져나왔잖아요. 그것도 죽음으로 빠져나왔지요. 사실은 그 쪽이 밀어냈고 아버지는 끌어당겼고. 이걸 이중결정이라고 했는데. 다른 사람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니까 세상 전체를 다 알기 때문에 너희들이 그 성깔을 그대로 내 인생에서 도망가라 해서 빠져나왔지만, 지금 예수님과 영원히 살아야 될 사람은 아무리 세상이 악하고 험하고 뭐든 부정적이라 할지라도 본인이 평생 살아오면서 배웠던 것, 들었던 것, 아니 평생 본인이 지금 살고 있는 삶의 터전 자체가 자력으로 발을 빼기가 본인이 싫어해요.
예수 따를래? 세상 따를래? 막상 물으면 “예수 따르겠어요.” 할 수 있어요. 그럼 질문을 바꿔보는 겁니다. “예수님이 좋아요? 세상이 좋아요?” 세상보다 예수님이 더 좋아요. 그럼 질문을 또 바꿔보는 거예요. 예수님이 좋아요? 자식이 좋아요? 이럴 때는 답변하기가 점점 더 난감해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좋아요? 은행의 잔고가 좋아요? 그럴 때는 주님께서 무슨 또 일을 벌이는가 싶어서 주저하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정답을 알라는 것이 아니고 정답을 알아도 못 빠져 나오는 것을 분명히 하겠다는 겁니다. 정답을 알았으니까 못 빠져 나온다는 자책감을 갖지 말라는 겁니다. 아는 것은 아는 거고, 못 빠져나오는 것은 못 빠져나오는 거예요. 주님이 살아계십니다. 살아있는 분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해내시는 걸 너희들이 한 번 그 때 그 때마다 보라는 말이지요.
그럼 그 때 그 때마다 어떻게 보느냐 하면, 세상을 부정하는 동시에 세상과 함께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우리 자신부터 우리 자신과 더불어서 같이 부정이 되어야 돼요. 세상은 더럽다. 나는 깨끗하다. 하지 마시고 세상이 더러운데 그 더러움에 내가 한몫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이지요. 나도 기여한바가 커요.
세상을 떠나고 싶다고 하는 것은 내가 아는 머리로 아는 것은 정답이지만, 몸은 싫어요. 가 솔직한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뭐냐 하면 율법을 줘요. 마치 예수님이 야고보에게 했던 것처럼 12제자에게 했던 것처럼 율법을 줍니다. 율법을 주니까 제자들이 잘난 척을 얼마나 하는지 “주여, 지키겠습니다.” 마치 모세가 율법을 주니까 유대인들이 하라하면 하고, 하지 마하면 안하면 되지 뭐. 그것처럼 마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착각해가지고 자기가 지켰다고 우기는 것을 그걸 늘 기억하는 것처럼 제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야고보서는 율법이 많은 이유가 야고보 자체가, 12제자 사도 계열자체가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율법적인 그런 교류를 했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여기다가 쓴 겁니다. 율법을 주니까 하면 되지 뭐. 그걸 못 지킬 게 뭐가 있어. 하고 그 다음에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위로부터 주는 은혜와 그 다음에 내가 율법을 지켰다는 것과 이렇게 나란히 대조를 시켜보는 겁니다.
어떻게 대조를 시키느냐 하면 “내가 너희들에게 주의 말씀대로 내가 하라 한 거 했나?” “예. 했습니다. 충성.” “그러면 안했을 경우에 처벌은 니가 기억하고 있나?” 그걸 기억할 필요가 없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니까. 하면 하는 사람들입니다. 라고 했을 때 뒤에 나오는 처벌은 너무 가혹해요.
그러니까 이 야고보서 보는 사람들이 당황스러운 거예요. 왜? 처벌이 뒤에서 잡아 캥기고 자꾸 잡아당기는 거예요. 처벌이. 말을 할 때 좀 긍정적으로 말을 하게 되면 처벌은 이렇게 안했으면 좋겠는데. “하겠느냐?” “예썰.” 해놓고 안했을 경우에는 말을 아예 우리한테는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겁니다.
교육에 있어서 자녀를 교육할 때 항상 비전을 주고 긍정적으로 애는 하면 할 수 있다고 부추겨가면서 기를 돋아주고 하면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나중에 성공할 희망을 가진다. 라는 식으로 그렇게 가르치거든요. 실험할 때 어떻게 실험하느냐 하면 실험할 때 비닐하우스가 동원됩니다. 비닐하우스에 작물들을 해놓고 거기다가 욕을 하는 거예요. 주인이 실험할 때. 식물에게 욕을 했을 때의 작물 작황과 긍정적으로 했을 때의 작황이 달라요. 베토벤 클래식을 들었을 때와 랩이라든지 로큰롤을 들었을 때 하고 작황이 달라요. 비트가 강하게 되면 그만큼 움츠리니까 내 꿈을 못 펼쳐요. 뭔가 주저주저하면서 점점 더 자기 아는데 응축이 되면서 사회성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 심리학이 교육학에서 진행되는 겁니다. 몬테소리가 뭡니까? 몬테소리는 이태리 아줌마고. 이태리 아줌마가 교사 빠지고 은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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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애들이 갖고 있는 장난감 가지고 스스로 창의성을 개발하는 것이 나중에 그것이 시민이 되었을 때에 창의적인 국가발전에 이바지한다. 이게 몬테소리 아닙니까. 남들이 이해 못하는 그걸 걸어놔야 이건 뭐 새로운 기구라고 생각해가지고 유아들 모이거든요. 원아모집이 잘돼요. 몬테소리 빼는 것과 차이가 나요. 아로나민골드 먹는 날과 안 먹는 날이 차이나는 것처럼.
몬테소리 있는 게 달라요. 엄마들은 몬테소리가 무슨 대단한 건지 알고 그거 하면 자동적으로 아이 천재 만드는 것처럼 하지요. 그거와 비슷한 게 있어요. 피아노학원 할 때 페다고지 들어가는 거예요. 페다고지가 뭐냐 하면 그냥 피아노 교습이에요. 코스가 있다고요. 석사코스가, 페다고지 코스가 독일 같은 데는 코스가 달라요. 전문교습. 독일에서는 페다고지 따지 않으면 학원에 취직이 안돼요. 페다고지 4자인데 아주 내용이 심플하고 참신해 보이잖아요. 페다고지가 애들 유인책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이것처럼 긍정적인 것, 긍정적인 총집합이 뭐냐 하면 세상이에요. 그런데 세상은 그 만한 자격이 못돼요. 이미 예수님을 추방했기 때문에. 메시아를 추방하고 하나님을 추방한 세상이 없애놓고 우리끼리 문을 닫아버리고 우리끼리는 보다 긍정적으로 그러나 그 세상에 누가 들어있다. 예수님과 영원히 살아야 될 예수님의 백성들이 거기 있거든요.
그러면 백성들을 끄집어낼 때는 그 예수님이 했던 부정적인 코스를 그대로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본인에 대해서 인정할 건 인정하는 사람은 주의 백성이고, 끝까지 그 세상의 긍정적으로 해가지고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남보다 얼마나 착실하고 반듯하게 사는데. 이렇게 밀어붙이는 사람은 뭐를 놓쳤는가 벌칙 조항을 계속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사람이에요. 벌칙조항을.
한 번 봅시다. 그래서 여기 13절에 보면,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과 그 행함. 여기 선행이라고 나오는 이야기는 율법적인 차원에서는 율법을 지켰을 때 선행이라고 나오는 겁니다. 율법적 차원에서. 십자가 그 이후가 아니고.
물론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알지만, 십자가 말을 안 끄집어냈을 때에 이 세상을 볼 때에 뭐로 보느냐 하면, 여기 14절 봅시다.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라고 내용이 뭐냐가 아니라 야고보가 이 복음을 전하면서 의도적으로 부정적인 것을 집어넣었다는 사실이 중요해요.
설교를 긍정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긍정할 수 있는가를 기대하면서 교회에 오잖아요. 따라서 긍정적인 것, 계속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적인 것을 빼고 적극적인 것, 잘될 겁니다. 잘 될 겁니다. 주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긍정적으로 하는 것이 교회의 타입 이라면 그게 교회의 성장의 기쁨이 된다면 야고보는 그게 전혀 아니에요.
부정적인 것은 나 들으라고 준 거지 어디 집사님, 권사님 들으라고 준 게 아니에요. 우리 각자 나 들으라고 준 거예요. 나 들으라고. 그러면 나한테 이런 부정적인 요소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있지요. 있는데, 있다 하면 틀려요. 나한테 이런 요소 있다 하면 틀리고 이렇게 해야 돼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발생된다. 해야 이게 맞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내 몸을 가지고 이 성경책을 내 몸하고 지금 한 20Cm 띠웠습니다. 나는 내 몸 여기 있고 성경책은 이 바깥에 있잖아요. 보고 성경에 지킬 건 지키고, 못 지키면 회개하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했는데 어느 누구도 이 성경책이 배 째고 이 안에 들어있어서 성경책 내용대로 확대된다는 사고방식은 사람들은 잘 안 갖게 돼요. 성경책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대상으로 보면 성경은 성경대로 독립되어 있고 나도 나대로 독립되어 있어요. 따라서 성경 볼 때만 말씀 지키고 성경 안 보면 말씀이 내 안에 전혀 무능력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위험한 생각이에요. 그게 바로 구언약입니다. 옛날언약. 구 언약은 내가 지킬 경우에만 지키고 안 지키면 안 지킨 게 되지만.
새 언약 십자가는 허락도 없이 이 성경 전체가 지퍼열고 내 안에 넣어버린 거예요. 지금 실제로 못 보이고 있어. 단추열고 이 안에 품어버려요. 품어버리면서 전에 내가 품지 않을 때는 이 성경을 “아이고, 내가 지켰구나! 또는 아이고, 못 지켰어! 어쩌나?” 이리 됐는데 이제는 그게 아니고 품어버리면 “나한테 이런 요소를 발생시켰구나!” 성경이 주가 되고 나는 성경이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시다발이로 거기에 종노릇하고 있는 그런 관계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이나 야고보서를 이렇게 설교하게 되면 그 이야기가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지킬 필요도 없어요. ‘아~ 어제 참, 그런 요소가 어제 나왔어. 맞아. 어제 내가 3시에 누굴 만났는데 그런 요소가 나한테서 나와 버렸어.’ 이리 되는 겁니다. 나와 버린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오늘 제목이 간단히 해서 역신학 했는데, 두자를 한 번 집어넣어봅시다. 역발상 신학이에요. 역발상 신학. 역발상이 아니고 그냥 신학 같으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교인 여러분, 저도 보고 여러분도 지금 성경 보고 있지요. 그대로 사세요.”라고 돼버려요. 역발상이 아니면.
그런데 역발상이 되어버리면 진짜 성경대로 하게 되면 “저는 이런 요소가 나왔는데 여러분들도 어떤 요소가 나왔지요?” 라고 되는 거예요. 각자 지배하고 있는 주님께서는 지난 어제 토요일날 주께서는 여러분을 어떻게 사용 하셨나요? 라고 나와요. 나는 목사는 이렇게 사용했습니다. 가 나오고 저쪽은 아! 그래요. 저는 이렇게 사용하셨습니다. 라고 나오면 목사가 여러분들의 영혼을 지배할 이유가 없고 중간에 나설 지도자 될 이유도 없어요.
그런데 가르친 자가 돼버리면 본인은 아무것도 먹통이니까 조금이라도 목사한테 가르침을 받아야 겨우 하나님께 말씀을 지키는 게 돼버리면 이건 목사의 종속이 되잖아요. 그럼 주님한테 종속 되는 게 아니고 목사한테 종속돼버리면 이건 옛 언약구조로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거예요. 옛 언약 구조로.
제가 여러 번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께서 교회 짓는데 헌금을 하세요. 지시가 온 거예요. 성령 받은 나는 지시 감을 못 느끼는데 목사가 주의 뜻이라고 하니까 같은 성도라면 저쪽 지시에 이쪽 지시가 동의 되어야 돼요? 안 되어야 돼요? 반드시 동의가 되어야 되는데 아무리 지시해도 저건 감이 안 온다 말이죠. 그리고 목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30배, 60배 대주니까 내가 약간 변경해서 하면 “돈을 빌려서라도 하게 되면 백만원 빌려서 헌금하면 30배 같으면 계산 딱 나오잖아요. 삼천만원 나오지요. 백만원만해도 이천구백만원 남는 장사 아닙니까. 그런 믿음을 가지고 하시기 바랍니다.” 하니까 그러면 집사님이 “그러면 잘됐습니다. 목사님 그 백만원 저한테 빌려주시겠습니까? 목사가 보증서고 그럼 당신도 손해 볼 거 없잖아요. 30배주시니까.”
그러니까 목사가 그런 소리할 때는요, 목사한테 기 안죽으려고 목사가 교인한테 노리는 심리가 그래요. 그렇게 하게 되면 목사한테 기 안 죽으려고 백만원하면 이백만원 할 거야. 인간은 자기가 최고가 되고 싶은 악마의 속성이기 때문에 그런 심리를 이용해서 목사가 그런 소리를 할 때에 진짜 그런 것을 대처하는 방법은 믿음 있음을 하지 말고 믿음 없음으로 가면 돼요. 믿음 없음으로. 안하면 망합니다. 어차피 죄인인데 망하지요. 이런 식으로.
그래서 요번 수련회에서 했잖아요. 성도는 성령 있는 사람은 누구한테도 협박이나 공갈을 받지 아니한다. 그 누구한테도. 어떤 망신살도 능가해야 돼요. 벗어나야 돼요. 망신살에 주눅 들면 평생 그건..., 아~ 이러다가 우리 집안 망신당하는데. 이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아니고 갈수록 짐이 늘어나요.
그래서 이 율법을 주신 것은 바로 지키지 않았을 때, 그걸 같이 병행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그걸 병행하느냐 하면 이미 우리 존재가 지킴보다도 못 지킴이 당연하기 때문에 야고보는 이 자체가 율법적 기능을 주는 겁니다. 지키라고 준 게 아니에요. 이미 예수님이 다 끝내서 못 지켜요. 못 지키는데 어떤 사람이 구원받느냐 하면 못 지킴을 고백하는 자가 구원받아요. 그 말은 못 지켜서가 아니라 못 지킴이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나를 사용했거든요.
말씀은 깨끗하지요. 말씀은 거룩해요. 그런데 우리는 죄인이지요. 그러면 그 거룩함을 어디서 티를 내느냐 하면 거룩하지 않는 죄인을 가지고 거룩함을 상대적으로 티내기 위한 주님의 작전입니다. 간단한 문제에요. 아주 수월해요. 오기로 지키지 마세요. 그래서 어떤 말씀에 의하면 100개가 있다면 하나로 어겨도 다 어겼다는 취지로. 왜 그런 취지가 나왔겠어요?
지킨다? 못 지킨다? 못 지킨다. 주께서 미리 알았다? 못 알았다? 미리 알았다. 그럼 왜 그렇게 하는 겁니까? 지켜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못 지킴을 발각되면서 발각된 당사자가 구원 받는 거예요. 왜 그런가, 그럴 때 야고보서 1장에서 하늘에서 주신 은사가 돋보이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분이 저한테 이런 메시지를 보내서 제가 얼마나 은혜 받았는지 모릅니다. 어떤 메시지를 보내왔느냐 하면 우리는 성도지요. 주님의 영광 앞에 노출됩니다. 이런 취지로 보냈어요. 우리는 주님의 영광 앞에. 이 말은 그런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무슨 뜻이냐 하면 같은 옆에 있는 인간과 인간이 누가 잘났느냐를 비교하는 짓은 제 인생관이 아닙니다. 하는 뜻이에요. 같은 인간들끼리. 아~ 저 사람 믿음 좋다. 나는 언제 믿음 좋을까. 이게 아니고 저 사람 믿음 없는데 나는 믿음 있으니까 내가 더 잘났다. 이게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 영광 앞에 설 때에 서게 되면 무엇이 자동적으로 제거되는가 하면 나보다 못난 사람도 제거가 되고 나보다 잘난 사람도 나한테 의미가 없어지는 거예요. 주님의 영광 앞에 서있으면.
그러면 주님의 영광 앞에 선다는 것은 주님의 은사를 내가 알아야 되거든요. 그럼 주님의 은사라는 말은 다른 말로 선물이다 말이죠. 그럼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내가 준 선물 외에 니가 얻어질 의는 율법을 다 지키는 그런 것은, 내가 니를 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너 주제를 아는데 율법을 계속 주는 거예요. 그러면 99개는 지켰는데 하나는 못 지켰다고 이렇게 변명들해도 그런 인간은 원하지 않아요. 그래도 90%는 지켰는데. 90점인데. 그걸 원하지 않는다니까요.
왜 자꾸 추궁을 하시느냐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은 못난 인간이라도 주께서 솜씨를 부려서 천국에 데려갔을 때 누구 솜씨가 주님의 영광이 되겠어요? 주님의 영광이죠. 그 영광 속에 나의 못남이 포함돼 있잖아요. 주님은 못난 자리. 그 영광 앞에 설 때에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하등의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렇게 하라 해놓고는 그 다음에 거기에 극단적으로 안 지킬 경우에 대해서 딱 이야기한 거죠. 상당히 부정적이죠.
그 다음에 15절에 봅시다. 부정이 들어갑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라고 되어있지요. 그럼 이런 요소가 우리한테 잠재돼 있다? 없다? 있는 거예요. 악마적이고 세상적이고 세상을 자랑하고 싶고 이런 요소가 있는 겁니다. 그럼 있으면 우리가 이걸 버릴까요? 버릴 것 같으면 우리는 메시아를 뭘 좋아합니까? 우리가 알아서 천국가면 되지. 못 버립니다.
따라서 지혜는 어디서 온다? 하늘에서 오지요. 만약에 하늘을 차단시켰다고 합시다. 하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열심히 산다고 봅시다. 교회는 안 나오는데 사람 좋다고 소리 듣는 남편들. 상당히 의외로 많아요. 집안에서는 개판인데 바깥에 나가면 사람 좋다고 소문 난 사람 많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뭐가 차단되어있습니까? 위에 것이 차단되어있지요.
그럼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자기 선함에 주목하는 사람들이에요. 자기 선함에. 하나 해놓고 자기 선함에 주목하는 사람. 그럼 이 반대되는 성향이 뭐냐 하면 희생자의 고통에 주목하는 사람. 이게 예수님이죠. 희생의 고통에. 희생자의 고통에 주목하는 사람. 1번하고 2번하고 확연히 달라요. 2번은 사람들이 볼 때 부정적 내용이 들어있지요. 희생물도 부정적이고, 뒤에 뭐가 붙습니까? 고통도 부정적이죠. 여기에 만약에 주목한다면 뭐가 날아갑니까? 나의 선함이 부끄럽게 되는 겁니다. 부끄럽게 되는 거예요.
자,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하면서 1번을 설교하느냐, 2번을 설교하느냐에 따라서 확실하게 교회의 질이 달라지겠습니다. 1번을 하게 되면 여기 자기의 선함 속에 뭐가 터지냐 하면 자기의 고생, 자기의 헌금, 자기의 희생 이런 것들이 전부 다 다 들어가요. 자기의 봉사, 교회 오는데 엎어진 사람이 있는데 그냥 지나가려고 하다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생각나 가지고 돈을 더 주고. 중요한 것은 이거에요. 주목.
어디에 주목합니까? 내가 교회 올 때까지 3Km 걸어왔는데 3Km걸어오면서 했던 그 자기의 선함에 주목이 되는 거예요. 어텐션. 주목이 되겠지요. 그런데 보세요. 만약에 어느 교회에서 십자가의 희생을 이야기하게 되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희생의 고통에 주목하면서 뭐가 날아가 버립니까? 자기의 선함에 주목하지 않게 되지요. 왜냐하면 사람은 두 쪽을 동시에 못 보기 때문에. 이쪽을 보게 돼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어느 쪽이 제대로 된 감사가 나오겠어요? 이쪽은 자기 선행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100%감사가 되겠지요. 100%감사. 왜냐하면 자기 외부에서 이미 다 했던 것에 감사하게 돼요. 자기 선함에 대해서 주목해버리면 여기서 뭐가 뜨느냐 하면 더 강렬하게 선함을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제가 여러 번 촌스러운 예를 들었습니다만, 어느 교회에 집사님이 자기 병든 남편을 위해서 밑반찬 100가지를 해줘가지고 교회에서 혼자서 온유와 화평의 모델이라 해가지고 칭찬이 자자했는데 그 주에 어떤 사람이 등록했는데 자기 남편 병수발한다고 1000가지를 했어요. 1000가지 밑반찬을 병에다 담아왔어요. 100가지는 자기 시대는 끝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시어머니 5년을 수발해가지고 목사가 강대상에서 칭찬하면서 정말 이웃사랑의 표본이라 했는데 다음 주에 왔는데 12년 동안 받아내는 사람이 왔을 때 “씨~ 어디서 5년이 개기고. 눈깔아. 나, 15년이야.” 15년 다음에 그 다음 주일에 30년이 왔어요. 그 다음에 30년 한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발 40년 하는 사람 오지 않았으면 하고 기도하고 있어요. 내가 착함의 끝판왕 되고 싶어. 나로 이 교회에서 나만큼 선한 사람 없기를 하늘에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를 보면서.
주님의 고통이라는 것은 의외로 주님의 고통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아요. 어디에 고통스럽냐 하면 자기 선함에 주목하는 사람이 지가 점점 미쳐가는 거예요. 고통스러워요. 주님의 고통에 한 사람이 의외로 고통스럽지 않는 것은 뭐냐 하면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아이고, 더운데 고생하셨지요?” “그게 뭐 고생입니까?” 이래 버리는 거예요. “그래 한소리해가지고 욕 얻어먹으니 어떻습니까?” “뭐 한 소리 했는데.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걸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씨 없는 복숭아’ 여러분, 복숭아가 씨 있어요? 없어요? 씨 없는 복숭아 봤습니까? 없지요. 인간은 반드시 행함 하게 되면 씨 있는 복숭아처럼 씨가 딱딱하지요. 잘못하면 이빨 복숭아 먹고 치과에 갈수가 있습니다. 성질 급해서 물어버리면. 딱딱해요. 어떤 인간도 행해도 항상 어디로 돌아오느냐 하면 딱딱 부분으로 되돌아와요. 오늘 또 착한 일 하나 해가지고 영광 돌렸구나! 이런 식으로. 딱딱하단 말이죠.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의 모델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씨가 없어요. 안에 씨가 없어요. 다시 돌아올 구석이 없어요. “아이고, 그렇게 착한일 했네요.” “누가 했어요?” “본인이 했잖아요.” “내가 했나?” 이건 배알이 없는 건지, 등신인지 모르겠지만. 딱딱한 구석이 성령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암에 걸렸다. 심하다. 원자력병원에 가지요. 어디를 쏘아댑니까? 암세포 있는 곳에 선별해서 쏘아대지요. 그런데 제대로 성공했다 칩시다. 그러면 암세포는 있던 자리가 암세포가 타가지고 없지요. 암세포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암세포가 그냥 머물러있는 사람 같으면 뭐를 먹어도 암세포 지 영양분 키운다고 다 들어와 버려요. 그런데 암세포가 죽은 자리에는 돌아갈 구멍이 없어요. 모든 게 하나님께 영광이고, 감사뿐이에요.
제가 너무 이상적인 것을 이야기해서 죄송합니다.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본인 속에 있는 딱딱한 구석이에요. 씨 없는 복숭아 특징이 씨가 놀라운 사실은 바깥에서 안 보인다는 겁니다. 안 보이니까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감추어진 것. 감추어져 있어요. 내가 뭘 감추었는지 본인도 몰라요. 그런데 어떻게 아느냐 하면 누가 이야기를 했는데 분노가 일어났을 때. 분노가 일어났을 때 그 분노가 나온 프로세스를 추적해 보세요. 왜 분노가 일어났는지. 분노가 일어난 이유는 노림수가 있어요. 뭔가 노림수가 있어요.
처음에 할 때는 순수하게 했어요. 어디서 들었다고 나 씨 없는 여자 해가지고. 순수하게 했는데 나는 칭찬을 기대했거든요. 했는데 누가 일을 이런 식으로 했어요? 하고 슬쩍 이야기했는데 갑자기 욱~ 하는 게 있지요. 사실은 그쪽에서는 미워서 노리고 한 소리는 아닌데 왜 갑자기 그 소리 듣고 왜 분노하는가, 그것은 나의 기대치가 이만큼 데시벨이 높은 거예요. 높은데 돌아온 평가는 반 토막 난 겁니다. 그 사람은 아무 악의 없이 그냥 이야기했는데 이만큼을 기대했는데 그냥 반 토막 난 거예요.
그런 경우가 부부에서 보면 많이 있지요. 남편이 피곤해서 집에 돌아왔는데 “뭐 달라진 거 없어?” 뭐 되지도 않는 퀴즈를 막 내는 거예요. 달라진 거 없어. 눈은 피곤해서 감기고 지하철 방금 타고 와서 땀범벅이 돼가지고 와서 빨리 샤워 좀 하려고 하는데 “여보, 오늘 달라진 거 없어?” 스무고개도 아니고 말이죠. 문제 풀려고 하면 집중해야 되는데 지금 기 다 빠졌는데 집중해서 풀립니까. “잘 모르겠는데.” “흥!” 머리 또 만진다. “그러니까 당신은 평소에 나한테 관심이 그만큼 없다는 말이야.” “아이고~~ 집구석 노니까 맨날 그런데 관심 있지. 나는 이제 피곤해 죽겠다. 이제.” 이리 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또 교회 다니면 뭐합니까? 인간 안 달라지는 걸.
데시벨을 이만큼 뭔가 내가 높이면서도 우리는 내가 너무 과하게 높였다는 것을 본인이 알 길이 없습니다. 감사한 것은 주께서 옆에 붙여줘요. 붙여서 나를 묵사발 만들어요. 어떤 방법으로? 내가 실망하는 모습을, 내가 분노하는 모습을 보이게 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어디서 오는가, 진리라 하는 것은 어디서 온다? 세상을 경유하는 거예요. 기차 뒤에서 보는 겁니다. 세상을 경유해서. 분노 없이 구원받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분노하세요. 그리고 레시벨 소리 좀 낮추세요. 너무 높이지 말고. 아~~ 나, 이것 밖에 안 되네. 조금 낮추시면 되는 겁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 볼륨을 낮추라는 겁니다. 빌립보서2장. 아~~ 이것 참, 어렵지요. 어려울 땐 10분 쉬어야 됩니다.
■ 안양20180810b야3장13절(역신학)-이 근호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역발상적인 신학이 뭐냐 하면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주의 뜻은 이런 것은 좋아하고 이런 것은 싫어한다는 그 자체를 죄인인 우리를 통해서 들추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은 육은 사라져도 말씀은 영원하다는 말이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그 말씀이 실현되는 시대가 뭐냐 그것을 종말이라고 해요. 종말.
과학적인 시각으로 종말을 보면 이해가 안돼요. 어디서 봐야 되느냐 하면 구약 약속에 의해서 종말을 봐야 돼요. 구약, 먼저 준 선지자의 말씀에서 종말은 메시아가 오게 되면 끝이에요. 메시아가 오게 되면. 그러면 종말이란 지나간 역사의 도착지점이에요. 도착지점. 종말이 지나간 역사에 플러스 되는 것이 아니고 종말이 돼버리면 지나간 역사는 어디 속에 들어가느냐 하면 종말 속에 다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이런 걸 이야기하려고 하면 상당히 어려워하는데 나름대로 쉽게 하려고 제가 애를 써볼게요.
종말이란, 지나간 역사의 모든 진행과정이 이 안에 다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역사라는 것은 뭐냐 하면 시간흐름을 이야기합니다. 역사라 하는 것이. 시간이 없으면 역사가 없잖아요. 시간 흐름이 역사거든요. 역사가 종말 속에 들어왔다는 말은 여기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되어버려요. 다 들어왔으니까. 잠자리를 확 담아버리면 그 잠자리채 안에서 잠자리가 막 몸부림치지요. 그걸 가지고 잠자리가 움직인다고 보면 안돼요. 잡혔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그 안에서 나름대로 애쓰고 노력하고 있더라도 그 시커먼 망 안에 잡힌 거예요. 시간이 종말 안에 종말이란 매미채 안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의식은 이 세상에는 어떤 민족이든 없어요. 오직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그것이 주어졌습니다. 그게 바로 구약에 있는 선지자가 말한 말씀이 인간의 시간마저도 요렇게 이해해져야 맞다, 라고 말씀 안에 그게 담겨있어요.
선지자는 천상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천상회의에 참석한 그 내용을 전달했지요. 학교 다닐 때 교무실 앞에 주번을 죽 모아놓고 당직 선생님이 이야기하게 되면 그 주번이 각 반으로 흩어져가지고 그 지시한 그대로 이야기하지요. 그 천상회의 때 천사들도 있어요. 선지자도 있고. 선지자가 천상회의에서 참석해서 하게 되면 그 알게 된 전달사항을 그냥 그대로 전해버려요. 그 전한 내용이 무엇에 관한 내용이냐 하면 종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어렵지 않지요. 이해했다 치고. 그러면 종말되기 전에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니까 역사라는 것이 있어요. 역사가 있는데 거기에 누가 등장했다? 선지자가 등장했지요. 무슨 회의? 천상회의. 등장하게 되면 역사에 뭐가 첨가 되느냐 하면 종말 사상이 역사 속에 같이 합쳐져 버려요. 중첩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역사로 볼 때에 종말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이 돼요. 아직. 아직 오지 않았음이 되지요. 이것도 어렵지 않지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이미 어떻습니까? 이미 시간이 오지 않았지만 이미 온 것이 돼요. 이미 온 것이 된다고요 온 것. 지금까지 잘 이해하다가 이 대목에서 드디어 정신이 복잡해지기 합니다. 오늘 8월 10일이라면 8월 12일은 이틀 뒤는 아직 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이 8월12일이라고 하면 이건 미친 사람이에요. 오늘 8월 10일인데, 어떻게 8월 12일입니까? 말이 안 되지요. 그러니까 이쪽에 앞 쪽에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은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를 추방하겠어요?
선지자를 추방하겠지요. 추방하면서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선지자의 고난이 발생되는 겁니다. 선지자의 고난이 발생되는 거예요. 말이 통하는 게 있어야지요. 아벨과 스가랴의 피가 너희에게 돌아간다. 하는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것처럼 스가랴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 것은 선지자가 말을 할 때 선지자가 그냥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수련회 때 후딱 지나간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인간이 이리 있다면, 인간이 이리 있는 것이 아니고 비눗방울 그린 기억이 나는데 혹시 기억나십니까? 인간은 비눗방울에 이렇게 휩싸여 있어요. 제주도에 가면 이런 놀이가 있답니다. 애들 어릴 때 장난을 두꺼운 합성수지로 만들어가지고 이것타고 둥글게 내려오는 놀이가 있답니다. 사람은 이리 있는데 이렇게 둥글게 그렇게 비눗방울 안에 표현되어 있지요. 우주인처럼.
그러면 각 사람이 이렇게 거리에 범계역에 있다면 사람을 이리 보지 말고 뭘 봐야 돼요? 전부 다 각자 동그라미가 있다고 봐야지요. 어떤 엄마가 유치원애가 있다면 그냥 보면 안 되고 엄마 인생관 있고 애 인생 뭐 5년 살았잖아요. 그 고난의 인생을 살았잖아요. 5년 살면서 그냥 산 게 아니고 여기에 뭐가 형성되어있습니까? 자기 나름대로의 비눗방울이 형성되는 겁니다.
인간을 단독적으로 보지 말고 비눗방울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이 비눗방울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폐쇄적인 양식이기 때문에 여기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애는 어디서 답변하기를 요거 자기 형성된 5세까지 살았던 형성된 세계관에서 개념으로 이용해서 지 마음대로 답변해요. 엄마는 엄마 마음대로 지시하고 지는 마음대로 답변하고. 식구가 셋일 것 같으면 세 식구 전부 다 헬멧 쓴 것처럼 각자 놀아요.
처음에 결혼할 때는 부부가 하나 돼가지고 커플 티 입고 까불고 놀러가고 하다가 싸우다가 하지만, 좀 살아보면 아하! 부부라 하는 건 각자 노는구나! 각자. 아~ 이게 이래야 부부가 오래가는구나! 각자 놀아야. 전에는 악을 썼잖아요. 내게 맞추라고. 각자가. 그런데 뭘 빠트렸어요? 비눗방울을 빠트리는 거예요. 비눗방울을 고려하지 않았던 거예요. 오히려 이런 이야기는 이 세상의 어떤 철학도 이걸 안 가르쳤기 때문에.
현대 코스모에서는 약간 이야기는 해요. 그런데 그 전까지는 인간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해준 만큼 되돌아온다고 그렇게 가르친 거예요. 아주 순박하지요. 순진하기도 하고. 해주면 되돌아온다는 겁니다. 뭘 빠트린 거예요? 비눗방울을 빠트린 거예요. 인간은 해주면 그 해준 만큼 비눗방울이 더 확대돼가지고 여기서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있는데 둘 다 비눗방울을 갖고 있다 말이죠.
“아이고, 불쌍해라. 내가 도와줄게.” 하면 “고맙습니다.” 라는 말은 물론 해요. 하지만, 도와주기 전에 작았던 비눗방울이 도움 받고 난 뒤에 얼추 도와준 사람과 도움 받은 사람이 같아지거나 더 커지게 되는 계기로서 기회로서 이 사람의 도움을 이용하게 되겠지요. 이용하게 되어있습니다.
처음에 부부가 남편은 의사고 아내는 의사 사위 받다고 좋다고 했는데 그 둘이 월급 받고 살고 그들끼리 살고 예상되는 그거거든요. 비눗방울이 없었던 거예요. 순박하게. 나중에 보니까 의사가 월급쟁이 못하겠다고 처갓집에 해가지고 처갓집에 장인어른 집에 담보대출 좀 받겠다고 왔을 경우에 물론 돈 빌려서 할 수 있어요. 한 동시에 아내가 내 일에 도와줬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의사 남편은 착각입니다. 도와준 게 아니에요. 이제는 그 병원의 이름은 누구 이름? 이사장은 아내가 되는 겁니다. 커진 거예요. 모든 비눗방울이.
현실이라는 것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스라엘도 몰랐지요. 그런데 선지자를 핍박을 하게 되면서부터 핍박하는 동시에 핍박을 하는 이유가 뭐냐, 분노가 일어나서 그런 거예요. 분노가. 그런데 그 분노를 유발한다 하면서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나는 어떤 확정된 나의 고집이죠. 나의 응축된 주관이 나를 현재의 지금 나로 계속 유지시켜 준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그 선지자가 하는 이야기가 틀린 말도 아닌데 괜히 화가 나는 겁니다. 화가 났을 때는 분풀이를 해야 되지요. 공박하면서 여기서 그 비눗방울을 제가 수련회 때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이것을 권력이라 했어요. 권력이라 하면서 그 권력을 정당성하면서 성경 말씀을 이용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의 해석은 하나님의 법 해석은 곧 무슨 작용이냐 하면 권력행위라고 해요. 권력행위. 후딱 지나가서 잘 모르겠지요.
인간은 어떤 해석을 할 때는 그 해석은 그냥 객관적으로 해석을 못해요. 나한테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말이야! 라는 말을 밑에 깔고 그 해석을 해버려요. 연애편지 주고받을 때 순수한 연애편지로 보시면 안 됩니다. 그 어떤 이야기도 내가 이만큼 잘해준 만큼 또 나한테 잘해줘야 된다는 권력에 대한 그런 고집, 욕심 같은 게 있어요.
어쨌든 선지자들이 왔지요. 그럼 선지자들이 추방됐습니다. 자, 이제부터 어려워요. 선지자들은 비눗방울을 갖고 있습니다. 그건 천상회의 때 갖은 거예요. 종말이 미리 온 거예요. 종말이 미리 온 것을 가지고 사건이라고 합니다. 사건. 밑에는 존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전통과 역사가 있어요. 존재는 반드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역사의식을 가지고 전통을 꾸준히 이어가게 마련입니다.
우리 집안의 관습이고 우리 집안의 관행이고 그리고 전통이라 했을 때는 뭐냐 하면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고 대대로 내려오는 구축된 권력, 그 권력에 니가 순종해서 하려거든 우리 집안 며느리로 들어오던지 아니면 니 남자가 좋다고 오면 안 돼. 우리 집안에 전통적이 있는데 그래, 너희들끼리는 아무것도 안하고 싶지. 하지만, 우리 집안에 그런 집이 아니고 시아버지, 시어머니한테 이렇게 가방정도는 하는 게. 다했다 우리 동서들 봐라. 다했다. 이게 우리 집안의 내력이다.
벌써 말할 때부터 역사를 깔고 하는 거예요. 역사를 깔고. 그렇게 만만히 보면 안 돼. 니가 그냥 니 몸 혼자 몸으로 오면 안 돼. 이 정도 해줘야 우리 며느리 값으로 다른 사람이 추잉, 인정, 추가적으로 인정해주는 게 되면 너는 이미 시집살이 참 편하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선지자가 올 때에 하나님의 종말에 대해서 왔지요. 그 다음 어렵습니다. 종말이란 뭐냐 하면 역사를 끝장냈잖아요. 그러면 역사 속에 미리 던져버린 모든 예언이 완성된 상태에서 종말에 포함이 되어있어요. 한쪽은 종말을 기다리고 만약에 종말이 2022년도라면 우리는 지금 2018년도 아닙니까. 한4년 남았잖아요. 4년을 남았기 때문에 우리들의 모든 것은 2022년도를 모르기 때문에 내용이 미흡해요. 모자라고 어설프고 오류가 있고 그런데 2022년도 미리 아는 사람이 이야기해버리면 완벽하게 내용이 진리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그 둘 사이에 의견이 통할까요? 안 통할까요? 안 통하지요.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는 비눗방울 자체가 역사기 때문에. 나 줄곧 이런 식으로 알고 있다. 어디서 나한테 까부냐,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전통 찾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되새김과 검토에 완벽에 완벽, 이단요소는 다 빼버리고 옳은 것만 남겨서 액기스만 남겨서 그걸 가지고 연결해서 그러니까 우리는 곧 죽어도 천당 간다. 라고 확신됐던 그 전통.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하는 업무가 그 업무였습니다.
자, 그렇게 되면 역사에서 그렇게 뺄 건 빼고 추구할 건 추구할 때 어떤 근거해서 빼고 어떤 근거해서 추가합니까? 그것은 바로 역사는 실제로 원하는 대로 현실화되어야 돼요. 더 쉽게 해서 나라가 잘 될 것 같으면 해석 바르게 한 것이고, 나라에게 불리하게 되면 그 해석은 잘못된 겁니다. 마치 옛날 고려사회가 왕 옆에 누가 있느냐 하면 점쟁이가 있어요. 제사장이라 하는데, 점쟁이들이 이번 전쟁에 승리할 거냐, 말 거냐, 승리하게 되면 그 전쟁에는 값이 올라가는 거예요. 예언을 맞췄으니까.
그러면 그 점쟁이가 승리합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그 승리라고 하는 게 뭐냐 하면 기존의 전통적인 이 나라가 계속 존속하면서 커지는 걸 말하지요. 그러면 임금님은 자기 나라가 망하는 걸 원합니까? 커지는 걸 원합니까? 커지는 걸 원하지요. 그러면 이미 예언, 해석하기 전에 진리는 이미 정해진 거예요. 니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 나라를 크게 하게 되면 그게 신의 뜻이다. 하고 자기 비눗방울이 그걸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설교를 할 때 설교가 진리라 하는 것은 어떻게 증명하고 확인할 수 있습니까? 그 설교에서 헌금이 더 나오고 교회가 커지면 교인수가 불어나면 이 목사의 설교는 주의 뜻이 되어버리고 목사가 설교를 했는데 사람들이 빠지고 헌금이 줄게 되면 그건 주의 뜻이 아닌 거예요. 왜? 역사적으로 점검되어야 되니까. 남의 이야기 할 것도 없지요.
우리 집안이 대대로 불교집안인데 이걸 기독교로 바꿨다. 종교 바꿨다. 종교를 바꿨으면 종교 바꾼 것이 하나님이 보기에 진리라면 앞으로 내 자식 취직 잘되고 딸은 시집 잘 가고 남편은 월급도 오르고 집도 더 넓은 집으로 옮기면 하나님께서 내가 잘 바꿨다. 인정해 주는 거고, 만약에 종교를 바꾸고 난 뒤에 집안에 불나고 자식은 교통사고 나고 아들 사고 쳐서 합의금보고 이리 되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이게 전부 다 점쟁이 말 안 듣고 종교 바꾼 그 화근이 돼서 저주 받아서 그렇다. 이리 되잖아요.
그럼 처음부터 그냥 종교 바꾸려고 아니라 바꿀 때 의도가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있었던 거예요. 주여! 바꾸고 난 뒤에 잘되게 하옵소서. 라고 빈 게 있다 말이죠. 그게 바로 역사 전통이란 비눗방울이에요. 비눗방울. 나 이정도 돼야 나답다는 거예요.
그러면 종말이 되면 어떨까요. 종말. 종말이 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모든 비눗방울은 전부 다 자기 입으로 후~ 부는 거예요. 매일같이 산다는 것이 자기 영역을 보다 단단하고 으리으리하게 만들고 남한테 자랑거리 만들기 위해서 그냥 하자 없이 망신살 당하지 않고 훅~ 부는데 불어봤자 고무풍선이거든요. 풍선은 바늘하나만 있으면 돼요. 결정적 순간에 하나를 탁 건드려보면 빵하고 다 터집니다.
남편하고 사이좋다고 사진 찍고 해가지고 방송에 나와 가지고 둘이 우리 아기 잘 키운다 해도 이혼 그걸로 다 날아가요. 왜 풍선을 바람을 부느냐 그게 문제에요. 미리 종말을 앞당겨 살면 될 문제를 가지고 나는 이 정도 돼야 나답다 라는 것을 계속하니까 마귀가 시키는 대로 바람을 후후~~ 바람을 계속 부는 거예요. 옛날에는 남자들이 많이 했어요. 허세와 허풍. 풍이 그 풍 아닙니까. 계속 술 먹고 허풍, 나왔다 문 열어라! 해가지고 자는 애들 다 깨워가지고 용돈 오만원씩 주고 아침 깨어나면 후회하고. 모든 자기 위세 키우는데 십자가 끝에 보면 날카로워요. 십자가가지고 한방에 터트려버리면 그 풍선 다 터지고 그 침 뱉은 거 다 터져 나오지요.
그 순간이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입니까? 그걸 돈 주고 삽니까. 주께서 구원하기 때문에 그 바늘도 십자가 바늘로 터트린 거예요. 마귀한테 그만 놀아나라고. 인간의 힘으로 안 낮아집니다. 고무풍선이. 시장바닥에서 밟히면서 장사해서 벌어놓은 역사에요. 내 역사가. 보통역사 아니에요. 다들 고생 고생하면서 자식 키울 때 어떻게 키웠습니까? 먹을 거 안 먹고 쓸 거 안 쓰고 키운 거예요. 그 풍선 그거 남하고 교회 가서 비교 자랑하려고 거기 가는데 그걸 한 방에 탁 터트려보세요. 이혼하고는 교회 안 나옵니다. 망신 때문에.
그러나 선지자는 어떻습니까? 선지자는 주께서 이미 터트린 자가 선지자에요. 선지자는 자기가 주의 말씀을 들은 외에는 아무것도 금이나 은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찬송가대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거 없어요. 왜냐하면 본인이 종말의 사람이기 때문에.
종말이 나오는 드라마 <아들과 딸>이 있어요. 이미 이름 자체가 종말이에요. 거기는. 이름 자체가 종말이잖아요. 종말이 이름이 셋째 딸이에요. 마지막 끝이라고 이름을 종말이라고 지었다고요. 우리 이름이 이 종말이에요. 유 종말. 종말이에요. 종말.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베드로전서2장에 나오잖아요. 성경이 폼으로 있는 겁니까. 여기는 선지자라 했어요. 우리는 뭐 시시하게 잠도 오고 다 넘어가지요. 우리는 잠자고 넘어가는데, 성경 말씀이 내안에 들어와 가지고 나는 극구 신자아니라고 하는데 이 말씀이 니는 신자이어야만 해! 라고 주님의 고집이 내 고집보다 더 세네요.
나의 갈 길은 내 맘대로 안 됩니다. 운전대를 주님이 쥐었어요. 우리는 조수석에서 주님한테 매일 잔소리합니다. 주님, 이리가면 안됩니다. 내 인생 망합니다. 라고 자꾸 쥐어박고 하지요. 주님은 끔쩍도 안 해요. 오히려 발로 차버려요. 말씀이 나보다 더 중요한 거예요. 말씀이 말씀대로 드러나는 완성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이용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 앞에서 우리의 본성상 매일같이 분노합니다. 내 인생 이리 가면 내 인생 아니다. 정말 오늘도 짜증난다는 식으로. 매일같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화풀이 하지요.
그 다음에 더 진도 나가 봅시다. 분노가 되게 되면 희한하게 분노가 되게 되면 이게 기억이 돼요. 분노 없는 기억은 기억이 아닙니다. 사라져버려요. 요번 수련회 듣고 뭐 들었습니까? 하니까 다 잊어버렸다는 거예요. 그만큼 잘 들으신 거예요. 그만큼 순수하게 들었어요. 그런데 요번 수련회 듣고 분노가 일어났습니까? 이 수련회 잊을 수가 없어요. 분노는 기억이고 기억이 될 경우에만 역사 편집이 돼서 역사 속에 삽입이 되는 겁니다.
아플 때, 또는 반대로 너무 너무 좋았을 때도 그래요. 너무 좋을 때는 왜 기억이 나느냐 하면 특징이 뭐냐, 아주 좋았을 때 기억이 납니다. 이건 뭐냐 예상 밖이거든요. 예상 밖. 그러니까 예상 밖이나 분노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기존의 내가 얼추 생각했던 그 노선을 이탈했던 경우기 때문에 이게 기억이 되는 겁니다. 기억이 되고 그게 역사로서 꽂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되느냐 하면 복숭아 씨앗이 강력한 딱딱한 씨앗이 더욱 더 딱딱하게 되어버려요. 딱딱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누가 나를 건드린다? 16절에 뭐가 생기겠어요? 시기와 그 다음에 뭐가 있어요? 시기와 다툼이 있지요. 시기와 다툼.
지키지 말라가 아닙니다.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공개하는 거예요. 왜? 우리는 비눗방울을 포기할 수 없어요. 내 역사를 포기 못해요. 아무리 성경 말씀을 듣고 돌아서면 주차장에 몇 층 몇 번에 했지? 딱 기억해요. 왜? 내 차거든. 그리고 내 차인 동시에 그 차를 탈 때 어떤 사건들이 있어 탔다는 것을 그 차 속에 이미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이번 수요일날 미리 한 번 당겨서 볼까요. 다음 수요일에 할 거. 요셉이 보디발 집에 갔지요. 그런데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해서 동침하자고 했을 때 요셉이 17살 때입니다. 그 대목을 보면서 누가 잘못했어요? 누가 잘못했습니까? 보디발 아내가 잘못했고 요셉이 하나도 잘못한 것 없이 이리 되어있어요. 이건 악하니 라고 되어있으니. 이러지 맙시다. 된 거예요. 과연 그런가 한 번 봅시다. 수요일에 할 걸 미리 준비해 봤어요.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설교가 이런 거 하면 참 재미있어요. 젊은 총각이지요. 이쪽은 돈 많은 유부녀입니다. 돈 많은 유부녀가 젊은 총각을 유혹했잖아요. 우리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쁘다 하지요. 요셉도 이걸 악하다 했지요. 악하다. 한 번 바꾸겠습니다. 늙은 총각인데 돈이 많아요. 이쪽은 젊은 처녀인데 돈이 없어요. 이거 나빠요? 안 나빠요? 이거 나빠요. 지금 현재 상식에서 나빠요. 노리는 게 있기 때문에. 여기 70인데 여자는 50이다. 결혼하자. 이건 뭐 뻔한 거 아닙니까. 자식들 반대하고 난리나지요. 이게 나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앞의 나쁜 거 하고 지금 나쁜 거 하고 틀리지요.
왜냐 하면 여기서 뭐냐 하면 나쁜데 기준이 변경된다는 겁니다. 또 해볼까요. 자, 돈 많은 젊은 총각이 돈 없는 유부녀를 사랑한다. 나빠요? 안 나빠요? 나쁘지요. 그런데 여기서 셈해야 됩니다. 이 집 총각 집에서는 나빠요. 그런데 이쪽 여자 집에서는 좋아도 너무 좋아요. 벌써 기준이 다르지요. 본인 입장에서 비눗방울이 다르지요.
성경은 역사입니다. 구약 성경이 역사잖아요. 역사는 흘러가면서 종말이 아니다. 역사는 흘러간다는 종말이 아직 안 왔거든요. 안 오면서 주님께서 뭐를 변경시키느냐 하면 인간이 나는 옳다. 그르다. 선악과 따먹고. 옳다 그르다의 그 기준이 얼마나 자위적이고 주관적인지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계속 흘러가게 되면서 여기서 선지자를 통해서 수정작업에 나섭니다. 아무도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 결국 이렇게 따지고 보면 변수가 많아요.
돈이 있고 없느냐, 젊으냐 안 젊으냐, 어느 쪽에서 먼저 프로포즈했느냐, 이 세 가지 경우들이 작용해서 경우수가 여러 가지 있는데 결국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남자는 돈이 있고 여자는 약간 돈이 없어도 괜찮은데 나이차는 2살에서 4살차이 이쪽도 처녀고 이쪽도 총각이고 이럴 때 우리는 이걸 뭐냐 하면 이걸 옳다고 이야기했어요. 이게 옳은 근거가 성경에 어디 나옵니까. 성경에 이런 옳다는 근거가 나옵니까?
이게 남자 돈 좀 있고 직장 안전하고 여자는 약간은 아르바이트해서 돈은 벌었지만, 순종하는 타입 이고 나이는 2살에서 4살 차이 너무 넘어가면 문제 있어. 동갑내기는 또 여자가 남자한테 대들 가능성이 있다고 남자 쪽에서는 안 좋아해. 2살에서 4살, 4살은 궁합도 안 봐.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누가 어느 근거해서 그걸 동의합니까. 그 때 뭐라고 합니까? 이것이 보편적인 상식이고 전통이라. 그거 전통 아닙니까. 그게 전통이거든요. 역사고 관행입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그건 말씀 백날 이야기해도 소용없어요. 이미 보편적인 상식으로 교인들이 한 덩어리 되어있습니다. 한 덩어리 되어있어요. 믿음 좋다고 결혼하지 않아요. 믿음은 우선순위에서 저 뒤쪽으로 쳐집니다. 같은 교인들끼리 결혼할 때 믿음 수준은 순위에 저기 있어요. 교회 나오면 그만 됐다. 그건 됐고, 다른 거 넘어가고. 제일 먼저 나오는 건 키 크냐, 후세가 키 작으면 안 되니까. 키 크냐, 성격 좋으냐, 키 크고 성격 좋으면 그 다음에는 취직하면 되거든요.
요새는 추새가 기준이 또 바뀐다고요. 취직하면 되고 취직 안하면 장모집 궁중족발에 아르바이트 하면 되니까. 장모님 궁중 족발 하는데 딸만 시집보낸다면 놀아도 우리 집에 취직하면 되니까. 취직 보장해줄게. 키 크고 성격 좋고. 그 다음에 건강하고. 그 다음에는 시집 식구가 많은지. 시누이가 문제없는지 다 따지지요. 그걸 서로 따질 때 서로의 비눗방울을 가지고 협상하는 겁니다. 권력 대 권력으로 협상하는 거예요. 그래서 대기업끼리 하는 거예요. 대기업끼리. 어디 직원이 병원의 이사장 딸하고 사귑니까? 용납이 안 되지요. 드라마니까 <같이 살래요>드라마니까 봐주지. 안 그러면 콧대 센 이사장 사모님이 가만두지 않지요. 우리 은태 어떤 은태인데. 어떻게 딸 있는 여자가 들어 오냐고 반대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시기와 다툼을 유발 요인을 이미 우리가 안고 지나가는 겁니다. 역사의 비눗방울을 우리가 스스로 가위로 째고 못 벗어나요. 도대체 우리가 왜 의인입니까? 성경대로 한다면 말이 안 된다니까요. 말이 안 돼요. 늘 분노를 달고 사는데 그 분노가 우리의 역사인데 어떻게 우리가 의인이고 우리가 착하고 경건하고 거룩합니까? 성경을 안 보니 그게 세상적이에요.
그럼 하늘은 뭐냐, 17절, 위로부터 오는 것은 성결하고 그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하고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가 열리지요. 이 해답은 간단해요. 앞에 뭐를 전제로 했던가요? 방금 읽었던 17절은 15절, 16절을 배경으로 하고 뒤 배경으로 하고 이것이 피어나는 겁니다. 뒤 배경을 빼버리면 이건 말이 안돼요.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양순하고 긍휼하고 선한 열매 이런 거 인간은 없어요. 뒤 배경이 뭐냐 하면 우리 힘으로 내 분노를 참을 수 없어요. 우리 힘으로 우리는 내 잘났다. 를 스스로 포기할 그런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그걸 뒤 배경으로 깔자 말이죠. 깔고 분노할 건 분노하세요. 막 살자 이 말입니다. 막 살았을 때 여기서 뭐가 하느냐 하면 바로 선지자였습니다. 아까 묵시적 요소. 이렇게 ㉮막 살면 우리는 지옥 가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의 완료가 안돼요. 여기에 하늘에서 뭐가 내려오느냐 하면 ㉯구원의 완료된 것이 우리에게 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약의 구조하고 동일한 구조를 우리가 지니게 됩니다.
구약은 뭐다? 역사. 지 고집 센 역사는 흐르고 역사가 만약에 기관차라면 위에 천사가 낙하산을 가지고 그 달리는 기관차 위에서 그냥 내려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묵시세계는 천상회의는 시간이 흐르지 않거든요. 종말이기 때문에. 종말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종말은 모든 역사를 다 끌고 가다가 전부 다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역사의 흐름이 없어요. 팔딱 뛰어봐야 2020년도 2021년도 팔딱 뛰어봐야 역사는 의미 없어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아요.
사도행전을 했지만, 사도행전1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예수님, 언제 마지막 때가 됩니까? 물으니까 그 시와 그 때에 대해서는 니가 알 바가 아니요, 그건 알 바 아니요. 니 질문 자체가 오류된 니 존재에서 나온 질문이란 말이죠.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그냥 막 살았어요. 뭘 아는 데로? 자기가 아는 대로. 왜냐하면 선지자를 둘러 싼 그 비눗방울 안에는 본인 게 없어요.
뭐가 없습니까? 천상회의 게 온다고요. 그 천상회의 게 세상에 있는 것과 대조가 되는 게 있어요. 저 쪽에는 시기와 다툼이라면 이건 온유한 겁니다. 한 편 저도 온유하고 싶어요. 라고 막 하고 싶지요. 복숭아에서 뭐가 작살나야 되느냐 하면 시기와 분노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 레이저 광선이던 간에 성령의 광선이던 간에 그게 찢음을 당해야 돼요. 복숭아의 씨앗만 없으면 등신 되는 거예요. 남이 욕을 해도 그게 욕인 줄 모르고 칭찬을 해도 이게 왜 좋은 줄 모르고. 바보 등신처럼 되는 겁니다. 우리 집안에 니같은 인간 처음이다. 라는 소리를 들어야 돼요. 우리 집안에는 이런 DNA없는데. 어디 가서 뭘 들어가지고 이런 등신으로 사나.
아니 아버지 죽으면서 큰 아들 집주고 둘째 아들 밭 줬는데 나머지 하나도 없는데 아버지가 옛날 사람되어가지고 딸은 시집가면 시집 사람이지 내 사람 아니다. 시집 귀신 돼라. 이 한마디 해가지고 n/1 날아가 버리고 아무것도 없어요. 요새 같으면 당연히 고소하지요. 고소감입니다. 고소해야 되는데. 이건 뭐 복숭아의 씨앗이 없어. 허허 웃네. 실제로 있었던 일이에요. 실제로 그런 일이 있다니까요.
어머니가 얼마 전에 장사를 했는데 딸 형제가 있었어요. 뺀질이들이에요. 아플 때 코빼기도 안보였어요. 이 딸이 돈 치료비 대고 용돈 드리고 다 줬어요. 딸들은 교회가 안 나가요. “그래, 너 교회 나가는 천사 같은 딸이 많이 해라. 원래 교회 나가면 착해야지.” 에헴하고 있습니다. 다했는데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교회 안다니는 남동생이 있었는데 남동생이 엄마 집을 자기 집으로 돌려놨어요. 그래서 그 집사님이 너무 억울해서 못 참겠다고 저한테 상담을 요청 했어요. 도대체 분해서 못 참겠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엄마 용돈줄 때 뭔가 내가 기대하고 줬습니까? 엄마 사랑한다는 마음에서 줬습니까?” “네. 사랑한데로 줬습니다.” 기대 안했지요. 그럼 됐잖아요. 주고 뭘 후차적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주는 자체가 기뻤다는 마음으로 줬을 게 아니냐 말이죠. 그렇다는 거예요. 그런데 왜 분노하십니까? 오늘 제목을 “왜 분노하십니까?” 왜 분노하시지요?
자기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해요. 성령으로. 이건 야고보서3장에 나오는 이게 내가 할 때 남들은 안하지만 나는 해야 되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줬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자체가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손하고 긍휼이라고 선한 열매라고 여기고 야고보서대로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이 말이죠.
했는데, 분노가 일어난 것은 뭘 뜻합니까? 아까 했지요. 반드시 역사는 뭐로만 기입된다? 분노. 그 다음에는 회상. 같은 말 기억이에요. 회상할 때 보니까 내가 그 때 나름 순수했는데 개뿔같은 소리. 인간에게 순수가 어디 있습니까. 순수가. 순수 없습니다. 본인이 본인을 속인 거예요. 동생들에게 고맙다고 하세요. 니그들 아니었으면 싸가지 없는 니그들 아니었으면 내 자신을 몰랐을 뻔 했다고.
그 집사님이 비로소 머리로만 알던 그 십자가가 아까 했지요. 자기 선함에 주목한 거예요. 나 지금 온유하고 있지. 화평하고 있지. 아~ 나 성도 맞아. 이렇게 착한 일 해놓고도 내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니까 착하지. 주목을 어디에 하느냐, 자기 선함에 한 겁니다.
그럼 어디에 주목을 안 한 거예요? 희생물의 고통이 이미 완료된 거예요. 이 말이 어렵지요. 주님의 고통은 완료됐지요. 우리는 그 고통과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여튼 나쁜 사람들, 주님이 고통 받은 것도 모르고 너희들 예수 안 믿어! 손가락을 남한테 했어요. 이렇게 깨끗한 나한테는 그렇게 고통스럽다고 생각한 거예요. 나중에 따지고 보니까 이미 이런 인간인줄 알고 미리 이런 수준밖에 안 되는 인간인 줄 아시고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룬 거예요.
다 이루어놓고 그 이룸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우리의 본색을 들통내기 위해서 주께서 치밀하게 싸가지 없는 형제들을 주변에 만나게 해주신 겁니다. 엄마의 죽음이란 사건을 통해서. 미리 순수하지 마세요. 온유하지 마세요. 그리고 의심하세요. 내가 미쳤어. 내가 왜 이러지. 나중에 후회할 거야. 아주 짐작을 그리 하세요.
정작 자랑할 것은 우리 행함이 아닙니다. 미리 다 아시고 니가 어느 정도 밖에 수준이 안 되는지를 스스로 볼륨 낮춰봐라. 안 낮아집니다. 스스로 볼륨 낮추면 내가 진짜 바보 되는가 해서 약이 올라서라도 희생은 얼추하다가 아무도 안하잖아요. 자기도 내가 볼륨처리 하지만 다시 원상 복귀됩니다.
그래서 제 말은 그냥 사세요. 정말 주님 살아계시면 그냥 사세요.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주님 살아있다면 주님께서 이 말씀 그대로 우리를 통해서 표출할 거예요. 이 말씀이. 그리고 여기서 시기와 다툼이 있거든 그게 접니다. 하고 손들고 나오면 돼요. 지옥 가는 사람은 절대 손 안 들어요. 온유, 화평에 손듭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한다고. 그러나 시기, 다툼 나오거든 제가 주특기라고 손 들으세요. 이건 내가 그걸 지키는 게 아니고 지키고 말고 할 사항이 아니고 나를 그게 나오게 되어있어요. 혼자 주님 앞에 서면 시기, 질투 없어요.
마지막으로 어려운 거 해 봅시다. 진짜 어려운 거예요. 성경에 이웃사랑 있지요. 말 그대로 이웃사랑이 되려면 앞에 뭐가 있어야 돼요? 이웃이지요. 숫자로 쓰면 1이 아닙니다. 반드시 2,3,4 여러 명을 만나야 돼요. 여러 명을 만난다는 것은 아까 봤지요. 혼자 있는 게 아니고 비눗방울을 갖고 있지요.
내가 남한테 사랑을 주님 말씀대로 사랑을 할 때, 이 의도는 뭐냐, 옛날 내가 비눗방울이 1mm 라면 하고 난 뒤에는 1.5mm로 늘어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어요. 왜 의도를 갖고 있느냐 하면 1mm될 때가 언제냐 하면 2014년도 5월 6일이라 합시다. 그러데 내가 착함이, 거룩이, 성화가 1.50mm이 된다면 그건 2018년도 8월달에 보면 여기서 뭐가 흘렀습니까? 벌써 시간을 의식하고 있지요. 이미 시간이 있다는 것은 역사지요.
역사와 시간은 뭐냐 하면 시간이 흘렀지만, 기억 남는 것이 역사에요. 고 차이에요. 이 기억이 들어가면 기억은 뭐로 된다고 했습니까? 분노. 이 분노가 꼭 남한테 화나서 되는 게 아니고 자기의 어설픔에 대해서도 분노에요. 나 저 사람처럼 왜 못 사느냐, 이것도 분노에요. 왜 저 사람처럼 못 참나, 이것도 분노라고요. 이게 내 역사가 된다고요. 역사의식을 갖고 있으니까 항상 아무리 잘 되고 착해도 늘 무슨 가능성이 있으냐 하면 늘 분노할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는 뭐냐 하면 이 2014년도 이것을 어디다 집어넣습니까? 주님의 다 이루심에 이걸 집어넣은 거예요. 자, 그렇다면 2019년도 살았습니까? 안 살았습니까? 2019년도 안 살았지요. 안살은 것까지 예수님의 매미채 안에 다 들어있다니까요. 다시 말해서 “니는 니 내일을 모르지?” “나는 알아.” “그러면 해답을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해답이 뭐냐, 그게 십자가에요. 그게 수요 설교에요.
수요설교 때 해답은 십자가고 문제를 그 해답에 기준해서 다시 만들어야 돼요.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뭐냐 역사에 근거해서 얼추 이 정도 왔으니까 이전보다 더 착해져야 된다고 역사에 근거해서 올려버린 겁니다.
결국 우리는 그런 시도 자체를 주께서 익히 아시고 십자가를 최종적으로 우리의 결정판으로 극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말씀으로 인도하시지요. 왜냐하면 십자가는 위에서 오신 분의 희생 행함이고, 우리가 노력한 것은 땅에서 내가 꾸역꾸역 끄집어내는 행함이기 때문에 이 선함과 저 선함 사이에 차이가 모자람 정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추방당했잖아요. “아이고, 선생님 훌륭합니다.” 가 아닙니다. 필요 없다고 나간 거잖아요.
결국 내가 이걸 주목하는 순간 주님은 필요 없고 주님 보는 순간 내 행함이 필요 없어요. 내 행함이 내 운명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순간 수고하고 무거운 짐, 협박과 공갈, 망신살, 나하고 상관없어요. 전혀 상관없어요. 주변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니 좀 이상하다 싶으면 그건 선지자 노릇. 그건 자동적으로 선지자 노릇이에요. 노는 동네가 같은 줄 알았어? 당연하게 느긋하게 이야기하면 됩니다.
자, 마지막으로 18절 봅시다. 화평케 하는 자 했지요. 자, 이웃사랑을 복습해 봅시다. 이웃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다? 아니면 여럿이 하는 것이다. 여러 명하게 되지요. 이웃사랑 여러 명 합니다. 그러면 이웃사랑을 할 때 빠져야 하는 게 있는데, 나하고 그 다음에 이웃하고 만났습니다. 만났을 때, 요 관계가 뭐냐 하면 화평케 하지요. 화평. 쉽게 말해서 좋게 지낸다. 친하게 지낸다.
그럼 화평케 하는 것이 내 노력 같으면 역사에 속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역사가 아니고 은혜가 되지요. 화평과 온유와 자비와 양선과 긍휼, 이 모든 것은 해답에서 나옵니다. 해답이 뭐냐, 십자가에서 나오지요. 예수님의 희생을 내용으로 해서 제공되는 그것. 그것이 화평이에요.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 계시고 우리 죄인 있고 중간에 누굽니까? 예수님 있지요. 예수님은 이웃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 죄인인 우리를 일부러 만났습니다. 찾아왔습니다. 찾아오면서 예수님과 우리사이 집어넣은 관계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였던 그 화평의 관계 또 평화의 관계, 십자가의 관계, 다 이루다 관계, 그 관계를 주께서 이걸 집어넣어서 성령으로 집어넣어서 우리를 구원했다는 말이에요.
집어넣은 그것을 우리가 다른 사람 만날 때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주님 앞에 십자가를 경유해서 십자가는 정상 위니까 다 이루었다. 십자가를 경유해서 집어넣으니까 십자가를 경유하면서 나는 졸지에 뭐가 됩니까? 죄인이 되어버리지요. 십자가 앞에.
못난 자를 위해서 희생했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는 큰 소리 못 치잖아요. 큰 소리 안쳐도 되고. 그저 감사할 뿐이지요. 고 마음을 그대로 옆 사람한테 그런 마음 자세로 하는 거예요. 고린도전서에 보면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천사의 말일지라도 울리는 꽹과리라는 말은 은사를 집어넣고 이야기하라. 그 은사가 뭐냐, 사랑이다 말이에요.
사랑이 은사거든요. 은사라 하는 것은 위에서 내려온 선물을 은사라고 합니다. 택배란 말이죠. 그렇다면 내가 남한테는 뭐가 됩니까? 나, 죄인이군요. 라는 말은 그렇게 안 해도 나는 못난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자세로 다가서는 그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웃사랑이 성사된 겁니까? 아니요. 만약에 그 사람이 내가 십자가를 경유해서 나는 못 났습니다. 했을 때 그 사람도 십자가를 경유해서 하게 되면 나도 역시 못났습니다. 라고 해버리면 그 둘 사이에서는 누구만 영광 돌립니까? 예수님의 존재 영광만 돌리겠지요.
그래, 집은 니만 해라. 그 엄마 아플 때 돈 다대고 돈 다 댔거든요. 옆에서 지킨 것도 그 딸이에요. 내가 보기에는 답답해요. 했는데, 예를 들어서 주님의 사랑에서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주여, 이렇게 해서 남한테 내가 칭찬받으려고 한 짓은 아니고 남한테 해가지고 이용한다 할지라도 나는 주께서 하라 해서 할 뿐입니다. 라는 그런 마음으로 하여튼 그런 마음으로 했다고 칩시다.
했는데, 그걸 이용해 처먹는다. 그러면 화평 줄 가치도 없는 개한테 한 셈이라고 마태복음7장에 나오는 개한테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그 말씀을 주께서는 그 따님을 통해서 성취를 시킨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성도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기대만 안하면 돼요. 기대.
내가 2시간동안 입 털어서 전도했는데 니가 교회는 한 번은 나와 줘야 예의상... 기대하지 마세요. 사람이 모든 걱정은 기대했기 때문에 생깁니다. 기대. 역사를 따지기 때문에 그래요. 앞을 보지 말고 뒤돌아보면서 주신 것에 은혜인데, 살아온 것이 모든 것이 은혜라면 2020년도 날 더워도 괜찮아요. 그것도 은혜입니다.
항상 뒤돌아보면서 회상하면서 은혜가 회상으로 오거든요. 우리는 역사를 하게 되면 자꾸 기대하기 때문에 긴장이 되어있어요. 긴장되면 암에 걸립니다. 낭설이지만. 내 이론이지만. 너무 계획 잡고 목표잡고 이 정도니까 내년에는 이 정도 되어야만. 굉장히 힘들어져요. 자기가. 힘들어지고 선지자 노릇 못하고.
어차피 우리는 망 안에 들어있는 거니까 언 듯 보면서 아! 이것도 은혜고, 그건 왜 은혜이냐 하면 나를 박살내거든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그런데 상대방이 그걸 이용할 때 그걸 이용당하면 안 되겠지요. 이건 개한테는 안줘. 이리하고. 정말 한다면 아! 주님의 성도가 나 말고 또 살아있구나!
그러면 시기와 다툼이 어디서 나온다? 복숭아 씨. 이게 암세포 때문에 그래요. 암세포. 그래서 오늘 이렇게 오셨는데, 다음 달 할 때 달랑 2명 나왔다. 갑자기 안 나오면, “뭐, 놀면서 안 나오고.” 갑자기 없는 분노가 나왔을 때 그것마저 감사하세요. 들통 났어. 들통 났어. 주께서 그렇게 인도했는데 갑자기 나의 의도를 가지고 주님한테 압력을 가하는 나의 또 이 죽을 때까지 본모습 들어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일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고 세상에 주의 뜻대로 이미 종말의 끝장난 대로 잘 진척되고 있는데 우리 자신이 주의 일을 훼방했습니다. 근심걱정은 혼자 다하고 주님 앞에 압력가하고 철딱서니 없이 했는데 주여, 다시 한 번 십자가 바라보면서 일이 끝났음을, 파장임을 다시 한 번 감사함을 우리 속의 내용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