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요일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이준)

아빠와 함께 2013. 1. 27. 19:59

손목사님과 곽인영씨, 양무리씨 세 사람이 요일 3:9에 대한 논의를 주고 받는 것을 보고 나서 쓴 글입니다.

 

무지로 인해 제자리걸음만 일삼는 아담들의 상상력
- 부제 : 요일 3:9 이해 접근의 잘못된 출발점 고찰 -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일 3:9은 일상적 삶 속에서 온갖 크고 작은 구체적인 범죄들을 습관적으로 저지르는지의 여부가 죄인됨과 의인됨을 가르는 기준임을 뒷받침하는 구절이 아니다. 그 구절에서 사용된 "죄짓는다"는 말이 헬라어 시제와는 관계 없이 요한일서 전체의 문맥에 비추어볼 때, 생활 속에서의 이런저런 구체적인 범죄 행위의 습관성 내지는 반복성과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일 3:9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중생한 자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을 두고서  헬라어 시제를 반영하여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죄짓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는 것은 거의 보편적인 입장이다. 보수주의와 복음주의의 입장을 초교파적으로 대변하는 NIV 성경도, 심지어 지방교회(의 회복역 성경) 등의 유사종교 단체 등에서도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

<NIV>
『No one who is born of God will continue to sin, because God's seed remains in him; he cannot go on sinning, because he has been born of God.』

<The Recovery Version New Testament>
『Everyone who has been begotten of God does not practice sin, because His seed abide in him; and he cannot sin, because he has been begotten of God.』
**Footnotes**
-Not to practice sin does not mean that we do not commit sin in occasional acts, but that we do not live in sin.
-cannot sin : cannot live in sin habitually. A regenerated believer may fall into sin occasionally, but the divine life as the divine seed in his regenerated nature will not allow him to live in sin. This is similar to a sheep: it may fall into the mud, but its clean life will not allow it to remain and wallow in the mud as a swine would.

이러한 번역의 정확성에도 불구하고, 요한일서 전체의 문맥과 취지에 비추어 볼 때, 과연 이 구절을 의인됨과 죄인됨을 가르는 근거로 삼을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은 여실히 남아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죄의 습관성, 반복성은 어디까지나 마귀에게 속한 자들(요일 3:8)에 해당되며, 아울러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의 상태에 놓인 것을 묘사함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한 자가 죄를 짓지 않는다고 했다면(일단 그것이 습관적, 반복적이든, 경향적인 것이든, 아니면 그 반대로 일시적, 단회적인 것이든 간에) 말 그대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일 5:16-17에  보면 형제, 곧 중생인(성도)도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범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일단, 그것이 습관적인 것이든 아니든).  이를 요일 3:9와 조합해 보면, 성도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범하지만, 사망에 이르는 죄는 범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실로, 이러한 내막으로 인해 사도 요한 자신도 심지어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자들을 위해 굳이 구출 조치를 취할 필요조차 없음을 언급하고 있다(요일 5:16).
다시 말하면, 요일 5:16-17은 헬라어 시제가 어떤 것이든 간에(다시 말해, 그 습관성 및 반복성의 여부야 어떻든 간에) 형제(성도,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면 사망에 이르는 죄와는 상관 없으며,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와는 상관이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심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요일 3:9이 언급하는 바, 하나님께로서 난 자(성도)가 죄를 짓지 않는 다는 말은 곧,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를 규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요한일서 전체를 바라봐야 한다.

요한일서 전체의 대의는 "형제 사랑"과 관련된 것임은 누구나 수긍하는 바이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심지어 사망에 거한다고 하셨다.

(요일 3: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렇다면, '요한일서의 문맥 안에서(!)' 성도가 저지르지 않는다는 바로 그 "사망에 이르는 죄"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자들은 시 19:13 등의 "고범죄"라는 둥, 마 12:31의 성령훼방죄 라는 둥, 온갖 잡설들을 늘어 놓는다. 그러한 주장들 중에 일부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요한일서 안에서의 전체적인 맥락을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일차적 관건이다).  거짓말, 게으름, 음욕, 증오...등의 온갖 일상을 통해 불거져 나오는 이런저런 잡다한 크고 작은 감정적, 의지적, 이성적, 행위적 범죄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형제 사랑하지 않음(의 상태)"이라는 '명제'를 겨냥한 말이다.

그렇다면, "형제 사랑하지 않음"이란,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일서는 형제 사랑에 대조되는 또 하나의 사랑을 언급하고 있다.

(요일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렇다면, 요한일서의 전체적인 문맥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음"이란 곧 "세상을 사랑함"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해 보면, "형제를 사랑하지 않음" = "세상을 사랑함" = "사망에 거함"= "사망에 이르는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는 상태에 놓여 있음"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반대는 "형제를 사랑함" = "세상을 사랑하지 않음" = "사망에 거하지 않음" =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저지르며 살아가는 상태에 놓여 있음"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사용한 '상태'라는 말은 '신분(에 따른 상태, 처지)'이나 '처지' 등과 병용해도 되겠다. 굳이 '상태'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이 논의에 동원된 "습관적", "반복적", "경향성" 등의 용어들이 "상태"라는 말로 집약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조적인 상태를 두고서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요일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 = "세상을 사랑하지 않음" = "사망에 거하지 않음" =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저지르며 살아가는 상태에 놓여 있음"에 속한 사람들이요, ("우리"를 제외한) 온 세상 (사람들)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음" = "세상을 사랑함" = "사망에 거함" = "사망에 이르는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는 상태에 놓여 있음"에 속한 자들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요한일서 전체의 맥락 속에서 요일 3:9의 의미가 파악되어져야 하는 것임에도, 심지어 헬라어 시제까지 분석해 본들 요일 3:9만을 놓고서 제자리를 맴돌 뿐, 그 의미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나올 리가 있겠는가.

위와 같은 요한일서의 전반적인 맥락과 취지에 비추어 볼 때, 요일 3:9에 언급된 바, '습관적으로' 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거나 혹은 성도가 '반복적, 지속적으로' 범죄하지 않는다는 헬라어의 시제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들", 즉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이런저런, 크고작은, 내면적, 외면적으로 구체적인 죄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성도가 "사망에 이르는 죄에 거하는 상태"에 놓여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요일 3:9에 언급된 "죄(짓지)"의 의미가 과연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 - 성도들이 일상적으로 짓는 크고 작은 죄들 - 가 아니라 "사망에 이르는 죄" - 세상을 사랑하는 상태, 곧 불신 상태 - 임을 가리키는지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바로 앞의 요일 3:8과 바로 뒤의 요일 3:10이다. 우선 요일 3:8부터 보자.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8절과 9절의 죄를 짓는다는 말은 맥락적으로 볼 때 같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즉, 8절에서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했고, 9절에서는 (마귀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저런 잡다한 죄들을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짓느냐 아니냐의 여부에 따라 마귀에게 속했느냐 하나님께 속했느냐의 여부가 판정되는 것이 요한일서의 전체적 맥락과 맞아 떨어지는가, 아니면 사망에 이르는 죄의 상태에 놓여 있는가 아닌가 - 마귀에게 속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났는가 - 의 여부에 의해 판정되어지는가.

필자가 보기에는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의 상태에 놓여 있으며, "하나님께 속한 자"는 "사망에 이르는 죄 대신에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저지르는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고 표현하고 싶다.

습관적으로 죄를 짓느냐의 여부만을 가지고 판정 기준을 삼으려는 자들에게는 헬라어 시제가 참으로 중요할 것이다. 8절과 9절의 "죄짓는다"는 말의 시제가 서로 같으냐 다르냐에 따라서 해석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 자체가 별 소득이 없는 이유는, 오히려 문맥 때문이다.  왜냐하면, 8절과 더불어 10절까지도 그 내용 자체가 (헬라어 시제가 문제가 아니라) 형제 사랑의 여부라는 (문법적 시제라는 형식이 아닌) 내용물을 가지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요일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사도 요한은 "의를 행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대등하게 놓고 본다. 그렇다면, 앞서 정리한 내용에 한 가지 더 추가되는 셈이다. 즉,

"형제를 사랑하지 않음" = "세상을 사랑함" = "사망에 거함" = "사망에 이르는 죄를 저지르며 살아가는 상태"="의를 행치 않음"
"형제를 사랑함" = "세상을 사랑하지 않음" = "사망에 거하지 않음" =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는 저지르며 살아가는 상태"="의를 행함"

으로 다시 정리될 수 있겠다.

이러한 요한일서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기초로 하여 요일 3:9를 다시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죄를 저지르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성도가 사망의 죄에 거하는 상태에 더이상 놓여 있는 게 아니라 - 8절처럼 말하자면, 마귀에게 속한 상태에 더이상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 는 것을 두고 말한 것이지, 일상적인 크고 작은 구체적인 죄들을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지의 여부 자체가 의인됨과 죄인됨을 구분하는 기준을 뒷받침하는 게 아닌 것이다. 이 점을 9절을 사이에 두고서 8절과 10절의 문맥이 증거한다고 앞서 언급하였다.
필자는, 요일 3:9의  '죄의 습관성' 또는 '습관적인 범죄 행위(보다는 행위를 저지르는 상태라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는 요한일서의 전반적인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사망의 죄에 거하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는 바이다.

요한일서는 우리가 흔히 표현하는 바,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 혹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등의 표현에 담긴 실상을 "형제 사랑 = 사망에 속하지 아니함 = 악한 자에게 속하지 아니함 =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세상을 사랑하지 아니함) =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게 아님" 등으로 표현한다.

이런 전반적인 맥락과 취지를 간과한 채, 일상의 삶 속에서 습관적, 반복적으로 이런 저런 죄를 짓는지의 여부를 가지고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논하려 드니 요한일서 전체가 말씀하고자 하시는 원래 의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논의와 관련하여 최초에 손목사님께서는 자신의 글에서 분명히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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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략)...성경이 말하는 ‘의인’이라는 것은 도덕 윤리적 관점에서 의인이 아니라, 법적 관계적 측면에서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1) 도덕 윤리적 관점에서 본 의인 : 성도된 이후에도 아직 육체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도덕적, 윤리적으로 범한 죄가 있으면 ‘죄인’으로 규정하려는 것입니다.
2) 법적 관계론적 관점에서 본 의인 : 성도는 이전에 마치 주인과 종으로 있던 관계에서, 아버지와 자녀 관계가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성경에서 성도를 의인이라 할 때 2)번과 같은 ‘법적 관계론적’ 상태로 있는 의인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된 후에도 ‘아직’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 윤리적 죄를 짓는다 해도 ‘의인’이었다 ‘죄인’이 되는 그런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마치 아들 된 자가 아버지에게 도덕적 윤리적 죄를 범했다고 해서 아들의 지위가 탈락 되지 않듯이 말입니다. 육신의 행실(=종일 때의 행실)이 나온다고 해서 ‘죄인’이라 하지 않고 ‘의인(=아들의 관계)’된 관계 그대로입니다...(생략)...

출처 : 손무성. [re] '죄를 간과한다'와 '죄를 사한다'의 차이를 알고 싶습니다. 십자가마을 질문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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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혹자도 위와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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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이라 함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을 통하여 인간은 죄인이기에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시고, 알게 하셨습니다...(생략)...

출처 : 곽인영. [re] '죄를 간과한다'와 '죄를 사한다'의 차이를 알고 싶습니다. 십자가마을 질문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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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답변자들의 입장을 요약해 보면, 의인됨과 죄인됨의 결정 기준은 인간의 개인적인 (윤리, 도덕적) 행위 여하에 따른 것이 아니라 법적, 관계적 측면에 근거하고 있으며(손목사님의 주장),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게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 것이라는 말이다(곽인영씨의 주장).
그렇다면, 이러한 두 답변자들의 입장에 비추어 볼 때, 요일 3:8에 언급된 "죄짓는 것=마귀에 속한 것" 및 요일 3:9의 "죄짓지 않는 것=(마귀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은 개인의 행위 여하에 근거한 것인가, 아니면 죄인 아니기에 죄를 짓지 않는 것(곽인영씨의 표현대로) 또는 법적, 관계적으로 죄인 아니기에 죄를 짓지 않는 것(손목사님의 표현대로)인가.
다시 말해, 죄악된 행동 여하에 따라 성도라는 신분이 결정되고 말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성도라는 신분을 두고 볼 때 그 행동 여하에 관계 없이 죄를 짓지 않는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인가 말이다.

두 답변자들의 입장에 따르자면, 후자가 맞다는 것이다. 즉, 요일 3:9에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은(그것이 습관적이든 일시적이든 간에) 해당 구절의 표현 그대로 "마귀에게 속하지 않은" 신분(또는 상태), 다시 말해 법적, 관계적 측면을 근거로 하여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해당 구절의 후반부이다.

(요일 3:9)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는 표현만 보더라도 개인의 (삶 속의 이런저런 범죄) 행위(의 습관성) 여하에 따라 하나님께로서 났느냐 아니냐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는 죄의 상태가 아니라 간주될 수 있다는 뜻, 다시 말해 하나님께로부터 난 신분으로 인해 죄짓지 않는다는 식의 단정적인 표현이 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목사님은 요일 3:9을 두고서 죄짓는 행위와 관련된 헬라어 시제의 성격에 근거하여 "성도는 습관적, 반복적으로는 죄를 짓는 게 아님"을 가지고 법적, 관계적 측면을 결정지으려 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전제로 삼은 바, 관계적 측면, 즉 신분적 측면에서 행동 여하가 비롯된다고 해놓고서, 정작 요일 3:9을 논하면서 헬라어 시제에 얽매어, 앞서 삼은 전제는 어디에다 갖다내팽개쳐버리고서, 죄짓는 행위 자체의 습관성, 반복성 여부를 가지고 성도의 삶(또는 행위)의 진정성을 논하겠다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논의가 정당한 것인지, 요일 3:9과 같은 문맥에 놓여 있는 12절을 살펴 보자.


(요일 3: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자, 가인이 아우를 죽인 행위는 습관적, 반복적이었는가, 아니면 일시적, 단회적이었는가? 분명히 일시적, 단회적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성도의 '일상적인 삶 속의(!)' 범죄 행위들은 결코 습관적, 반복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연 설득력이 있는가?
성도의 일상적인 범죄 행위의 속성이 습관성, 반복성이 아니라는 말은 일시성, 단회성이라는 말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보라! 가인과 같은 성도 아닌 자의 경우에도 그 범죄의 속성이 습관성, 반복성이 아니라 일시적, 단회적 성격의 것이었음에도 그의 불신 상태를 드러내었던 것이다.
이쯤되면, 손목사님은 자신의 전제와 자신의 논의 과정이 상호 모순적임을 직감하게 될 것이다. 즉, 불신자들의 범죄 행위는 그것이 습관성을 띠든, 일시성을 띠든 간에 그 자신의 신분이 마귀에게 속해 있다는 데(손목사님의 표현대로 하자면 "법적, 관계적 측면에서")에서 그들의 행위가 비롯되는 것이지, 가인이 범죄 행위를 했다고 해서 그 행위적 원인이 마귀 자식이라는 신분이 되게 하는 것은 아니지 않던가. 그럼에도, 성도의 일상적인 범죄 행위를 논하면서 법적, 관계적 측면에서 행위가 유발된다고 전제해놓고서, 오히려 그러한 전제와는 반대로, 성도의 범죄 행위의 습관성, 반복성 여부에 따라서 성도의 삶, 행위, 범죄들을 논하려는 것은 어찜인가!

자, 이제 우리는 요일 3:9에 대한 접근의 출발점을 두고서 생각을 정리해 봐야 한다.
즉, 요일 3:9에 대하여 특정 구절 자체의 한 단어의 문법적 형식과 관련된 (범죄) 행위의 습관성, 반복성 여부를 논의의 중심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요한일서 전체의 맥락을 결정짓는 "형제 사랑", "세상 사랑", "사망에 이르는 죄",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 "마귀에게 속함으로 죄를 짓는 것", "하나님께로서 나서 죄를 짓지 않는 것" 등의 분명하고도 상호 관계적인 내용적 명제들을 가지고 논할 것인가.

 

P.S.

아울러, 사족을 좀 달자면, 요일 3:9에 대한 제대로 된 의미 파악을 놓고서 헬라어 시제를 중심으로 파고드는 것은 숲(요한일서의 전체적인 맥락)은 고사하고 나무(해당 구절)는커녕 나뭇가지("죄를 짓지"라는 낱말 하나) 하나에 매달려 온전한 해결을 못보고 제자리만 맴돌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는 것이다.

역시 사족 차원에서 첨언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옛날 바벨탑 사건으로 기존의 통일된 언어를 분산시키실 때, 그리고 히브리어 등으로 구약성경이 기록되게 하시고, 코이네 헬라어로 신약성경이 기록되게 하시면서 그러한 원어들에 대한 연구들이 굳이 없더라도 자국어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구원받는데 무리가 없게 하셨던 것이다.

필자는, 원어적 해석과 같은 화려한 "기술발차기"를, 그것도 어설프게 해대는 현상을 목도하면서 평범한 앞차기 기술 한방의 위력을 다시금 실감한다. 예수님께서는 원어를 전공한 신대원 교수급이 아니라 그저 거지 나사로라 하더라도 문맥 파악, 비교와 대조를 통한 읽기 등의 기본적인 방편들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언어적 장치의 측면에 대한 배려를 해 두셨기 때문이다.

김치는 화려해 보이는 '포크와 나이프'로가 아니라 '손으로 쭉쭉 찢어서 먹는 것'이 제맛을 내기에 제대로 된 방법이다. 어설픈 나이프질이 주변인들까지 망친다. 아울러 시도 때도 없이 나이프질에 의존하려는 자체적 사고방식도 문제다. 자기 자신부터 망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