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서 3장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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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주님을 사랑할 수가 없어요. 사랑이 안 됩니다. 사랑은 주님이 하시지 ‘너희들이 날 사랑한 게 아니요.’라고 되어있어요.
주님의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이미 우리 손에 잔인하게 죽으신 분을 우리 안에 키우십니다. 그게 사랑이에요.
잔인함, 쫜인함, 주께서 아주 잔인하게 말씀으로 우리를 끊어내는 이유는 한 알의 밀알이 그대로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스스로 잔인하게 죽을 의사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주님의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이미 우리 손에 잔인하게 죽으신 분을 우리 안에 키우십니다. 그게 사랑이에요.
거기에 방향성이 있어요. 성도를 사랑으로 돌본다? 주님의 지체를 사랑으로 돌봤겠지요. 오늘 본문에 주님의 사랑을.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그것은 인간이 주님을 잔인하게 죽였다, 보다도 아버지가 아들을 잔인한 말씀, 진멸의 말씀으로 잔인하게 죽인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천사를 만났을 때 야곱 자기 관점으로 생각하지 말고 천사의 관점으로 생각해야 돼요. “오늘 내가 야곱 죽인다. 잔인하게 죽일거야. 죽여야 네 안에 이스라엘 자라난다. 너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 그러나 시작도 있고 끝이 있는 이스라엘을 네 안에서 내가 키울 거야. 그 이스라엘을 키워서 끄집어내면 너는 덩달아 구원되는 거야, 언약의 사람으로.” 이게 하나님의 멜기세덱적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걸 간추려 이야기하면,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십니다. 뭐로? 십자가의 사랑, 죽음을 집어넣어서 구원해주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