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성전의 기능

아빠와 함께 2024. 6. 20. 08:28

성전의 기능 


2024년 6월 19일                     본문 말씀: 말라기 1:9-10

(1: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성전’이라는 단어가 우리들에게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그만큼 평소에 인간들의 성전 중심이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성전’이라는 단어보다는 ‘가정 행복’, 혹은 ‘출세’, 혹은 ‘재벌’이라는 단어에 친숙해져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전 중심으로 다가오기에 인간들의 성전 태도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전 중심이 아니라는 바는 제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수치심을 느끼고 계시고 그 하나님께서 느낀 수치심을 자기 백성에게 되돌려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단정 내리십니다.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성전 문 닫자” 바로 이러한 선지자의 발언도 하나님의 수치심을 그대로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당연히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지적해주시고 수정하면 되잖아요”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취지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필히 망해야 하고 제사 제도도 멈춰야 하고 성전문도 필히 닫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수치를 느끼지 않을 정도의 제물은 이스라엘이 망하고 난 뒤, 신약시대에나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내뿜은 수치는 인간이 스스로 제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다 근원적입니다. 창세기 2:25에,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태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조성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뿐만아니라 선악과 과실을 때먹고 일어난 변화도 인간이 의도적으로 조성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7) 그냥 인간 존재의 속성에서 수치가 나오기에 인간이 뭘 해도 이 수치스러움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구약에서는 ‘성전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은 성전 안에서 이 수치심이 제거된다는 말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자없는 ‘양’이라는 제품으로 천국에 납품됨을 뜻합니다. 반면에 신약에서는 ‘믿음으로 구원’이지요. 그런데 구약의 성전 중심을 전제로 하지 아니하면 신약의 ‘믿음의 구원’로 실내용이 없는 바가 됩니다.

그것은 구약 성전을 통해서 레위언약이 가동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양은 레위언약이 가동되면서 생산됩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양을 생산하는 공장이며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그 종업원이고 공장주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전 안에서 어떤 식으로 양이 생산되는 걸까요?

민수기 3:12-1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여기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천국의 양이란 죽어야 될 자에 해당되고, 그것도 스스로 죽는다고 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죽어야 합니다. 레위지파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처음 태어난 자들을 대신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들은 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진즉에 죽은 자’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위지파의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언약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그런 자를 희생제물의 정결한 피로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즉 온전히 죽여서 온전한 양을 생산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취지는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 자신부터 유지되어야 합니다. 비록 자신들이 살아 있지만 성전에 들어오면서 죽은 자가 되고 오로지 살아있는 것은 레위언약, 즉 제사에 관한 약속만큼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자들이 됩니다.

그런데 말라기 시대에 이 제사장들의 드리는 제물에 대해 하나님께서 수치심을 느꼈다는 것은 실제로 완벽한 제물과 제사장은 말라기 다음 세대에 준비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은 더 이상 양이 아니라 인물로 나타나는 그런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기준으로 봐서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은 실제로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하지 않고 산 자로 여기면서 레위언약을 수행해 왔던 겁니다. 산 자로서 죽은 자 흉내를 내면서 대충 묻혀 갈 수있다고 여겼던 겁니다. 이것은 동화assimulation입니다. 나름 열심히 하고 드리면 하나님께서 얼추 받을 것이라고 여긴 겁니다.

그 이유는 성전은 인류의 근원적인 것을 모두 포함되어서 작용하는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인간인지라는 단편적인 기억들을 발췌하면서 그 지식으로 최선을 다해서 제사하려고 했습니다. 그만큼 온전하지가 않은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문을 닫자’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내리십니다.

성전의 문을 닫음으로서 여기서 ‘성전 안’과 ‘성전 밖’이라는 구별된 두 공간이 발생합니다. ‘성전 안’에서 CCTV를 달아 감시체제에 나선 하나님께서는 이제 성전 밖, 즉 모든 세상 지역을 감시체제로 돌입하시는 겁니다. 이는 곧 세상의 모든 곳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수치를 느끼는 것들을 모두 챙기겠다는 겁니다.

신약에 와서 양의 생산은 오로지 예수님 의해서만 성립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요 10:1)라고 하시면서 진정한 양은 다음과 같이 생산된다고 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즉 실질적으로 죽지 아니하는 목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안 받아주는 양입니다. 반면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삽입된 양은 하늘에서 반드시 받아주시는 양이 됩니다. 이로서 천국은 다음과 같은 사람으로 채워집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

그래서 진정으로 천국이 양이 된 사람은 이 예수님의 죽으심이란 복음이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는 방식으로 자기에게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7)

복음의 하나님의 자랑이요 또한 성도의 자랑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삶이 늘 유월절의 피 발린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강-말라기 1장 9-10절(성전의 기능) 240619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라기 1장 9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아멘.

여기 말라기에 나오는 단어, 성전이라는 단어 세상에서는 상당히 낯선 단어가 됩니다. 세상에서는 다른 단어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서죠. 성공, 출세, 그리고 돈, 재벌, 뭐 이런 단어. 그런 단어에 우리는 익숙해졌고 그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고 삶의 이유가 된 겁니다. 행복 이런 것, 잘 사는 것, 번영하고 번창하는 것, 만사 형통하는 것. 그 단어가 이세상에 유행하는데 이 말라기 성경 오늘 성경에 보면 성전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러면 평소에 우리가 성전이라는 단어 중심으로 안살았다는 것이 벌써 성경보면서 들통납니다.

“성전? 그래서 뭐.” 이런 식이에요. “성경에서 밥이나와 뭐 떡이나와” 이런식이다 이말이죠. 그래서 성전이라는 단어 조차도 우리에게는 무의미하게 한다면 성전 중심을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 말씀을 할 때에 우리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갖게 됩니다. “너희들은 왜 성경 중심이 아니냐?” 그것이 우리에게 쌩뚱맞게 들리는거에요.

우리는 우리의 삶, 풍요로운 삶이 목표인데 말라기의 선지자는 성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성전의 취지에 맞지 않는 제물들을 바쳤다.”라고 그걸 닦달 낼때에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성전 중심으로 사는 것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들어가면서 여기서 하나님의 뜻과 우리뜻 사이에 갈라져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일단 인정하고 전제로 해야됩니다.

그러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오늘 말라기를 통해서 그당시 유대인 제사장에게 불만을 터뜨리는데 이것은 인간쪽에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은 자기의 목숨 부지와 삶이 중요한데 성전에서 제물 제대로 안드렸다고 불평하는 그것이, 하나님의 불평이 우리한테는 못내 불편한거에요. 불만스럽죠.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이 말씀에 접근하는 것을 피하는 변명을 늘어 놓기가 일수입니다.

하나님은 그걸 알고 “그렇게 하나님 중심이 되지 말고 니 행복이 중심이 된다는 사실을 이 성전의 제물로서 내가 확실하게 증명해 줄게” 이런식으로 말라기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예언을 하신겁니다. 그러면 인간쪽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또 달려들어요. 하여튼 인간은 가만히 있지 않아요. 뭐라하면 자꾸 달려들어요.

그게 뭐냐하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가 바치면 그 성의를 생각해서 아무 소리 안하시고 그냥 받아 챙기면 되지 뭐 제물이 좋다 안 좋다 눈먼 희생이다 병든 것이다 왜 시비를 거시고 시시콜콜 그걸 따지는가. 그것보다도 더 기분 나쁜 것은 왜 성전에다가 CCTV를 왜 달았냐. 왜 감시체제, 왜 인간을 감시하시느냐는거에요. 그게 기분 나쁘다는거에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목사가 각 교인들 가정에 심지어 침실까지 CCTV 달아가지고 24시간 감시한다면, 아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끔찍한 일이죠.

그렇게 해서 살겠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겁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CCTV달아서 감시하는게 싫어?” “우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데 감시까지 하면 곤란하죠. 그러면 우리는 앞으로 더욱더 성전 운영하기가 곤란합니다.” 인간쪽에서 그렇게 나올줄 아시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나옵니다. “그래 그럼 문 닫자. 교회 문닫자. 성전 문 닫자.” 오늘 내용이 그거에요. 성전 문 닫았으면 좋겠다. 사고가 안맞는거에요.

성전을 와서 하는 행동, 자기는 성의껏 바쁜가운데서도 성전에 와서 제사드리고 나름 제사장이라고 나름 자기의 성심성의껏 하고 있는데 주님쪽에서 선빵을 날리네요. “성전 문닫자.” 성전을 문닫는 이유가 성전의 기능이 뭐냐? 천국 백성의 양을 생산하는거에요. 하는데 이 납품 업자가 이게 하자가 있는 제품을 납품 하는거에요. 사업 해봐서 아시잖아요. 하자 있는 원료를 납품하는데 그걸 안받죠. 옳은 생산품이 안나오니까.

성전은 천국 백성을 만드는거에요. 성전 없으면 천국 백성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전을 통해서 천국백성을 도대체 어떻게 만드는 것인가. 민수기에 나옵니다. 민수기 3장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를 택해서 성전 관리를 맡겼습니다. 종업원이에요. 레위 지파는 성전 관리하는 종업원이고 공장주가 누구냐?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뭔가 제품이 납품이 잘 돼야 이것이 하나님의 양이 생산되는데 어떻게해서 죄인이 천하 죄인이 깨끗한 천국의 의인되어서 백성이 되느냐? 그것은 대신해야 돼요. 대신한다고 되어있거든요. 레위 지파 사람들이 열두지파의 사람들을 대신하는데 다 대신하는게 아니고 첫 번째 난 아이를 대신하는겁니다.

첫 번째 난 자를 대신 한다는 말은 왜 그걸 대신해야 천국백성이 되는가? 그냥 제사드리고 맛있다 하고 받으시면 니 믿음 있기로 하고 천국 백성 만들면 되지 왜 대신해야 되는가? 이게 하나님께서 애굽에 나올 때 천국 백성이 아닌자가 천국백성 되는 원리가 거기에 유월절에서 수립되었어요. 그건 뭐냐하면 현재 산사람을 죽은자로 만드는것과 죽은자를 위해서 대신 희생한 양이 투입되면서 그게 진짜 죽은 양의 취지의 확산에 의해서 하나님의 천국 양이 생산되는겁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세상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인 예수님이 죽어서 예수님이 부활한 원칙처럼, 나는 양이라고 하면 나는 양 같지도 않고 양 될 자격도 없기에 양을 위해서 나라는 양이 죽어야 된다는 원칙을 아는 사람이 천국백성입니다. 내가 스스로 죽이진 않고요. 레위인을 통해서 하나님이 첫째아들 죽인다는 것은 인간이 내려온 그 모든 상속자를 죽인다는 뜻이에요. 그 집안의 첫째아들을 죽인다는 것은 인간의 육에대한 부정을 의미하는겁니다. 할례언약도 마찬가지고 인간이 낳은 자식은 안받는다는 뜻입니다.

“니가 자식낳았어?” “예” “그럼 나 안받는다.” 그 낳은 자식이 만약 천국을 갈 수 있다면 그 낳은 자식이 어떤 장치에, 공장에 가야돼요. 성전이라는 공장에 들어가서 그 들어갈수 없는 양과 그걸 대신해서 다른 양이, 다른 제물의 양이 그 양을 대신해서 바꿔치기 함으로써 새로운 양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났다는 증거를 가질 때 그 사람은 천국백성이 됩니다. 더 쉽게 말해서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의 요소가 삽입이 될 때 그걸 검사해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양의 피가 있는지를 검사하고 있으면 통과에요. 천국으로 가고 안 그러면 천국으로 못가는겁니다.

그 일을 누가하느냐? 레위인들, 또는 제사장. 레위지파가 해야돼요. 그걸 레위 언약이라고 합니다. 말라기에서는. 언약대로 그걸 실시를 해야합니다. 언약대로 실시 할려면 그 제사장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 하면 모델이 되어야 돼요. “나는 평소에 지성소나 성소나 또는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는 나는 일반인이지만 이미 성소에 딱 들어서서 일할때에는 나는 사람으로서는 죽고 하나님의 언약안에서는 비로소 일거리를 맡은 이 하나님 나라의 종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해야돼요. 나는 죽고 주님의 언약이 살아있음으로써 나는 주님이 살아있는 일을 내가 그것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그것이 레위지파에요.

그래서 레위지파는 그 하는 일을 살려야지 내가 있고 내가 나를 이런 일을 해서 내가 밥먹고 살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되는겁니다. 레위 지파는 다른 열두 지파의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구원 받은자는 이런 자이어야 한다’라는 것을 시범 모델로 보여 주는게 레위지파이기 때문에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언약이 우리 안에서 살아있으면 비록 우리가 죽는다 할찌라도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생명이고 영생나무의 효과다. 이렇게 보여주는겁니다.

그런데 그래야 될 이 레위지파 또는 이 제사장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가 막판에 저물 즘 나라가 망할 입장에서 그들은 제대로 된 제물을 바치지를 못했어요. 책망 들을 그런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했지만 도대체 이 제사장들이 레위지파들이 도대체 하나님께 책망받을 제물을 그걸 왜 바치는가? 왜 드리는가? “우리 같으면 깨끗한 것 드렸을건데 그들은 왜 무성의 하게 계속 생각도 없이 하나님 계시는 곳에서 아무렇게나 저는 제물같은 것을 왜 바쳤지?”라고 우리 제 3자 입장에서 그렇게 걱정하며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지금 오늘 제사장들과 레위지파가 하나님이 받지 않는 제물을 드렸다 할 때에 하나님이 책망할 만한 제물이냐 아니냐는 우리가 그 현장에서도 몰라요. 그럼 언제 아느냐? 이 이스라엘이 망해야 아는 겁니다. 망하고 난 뒤에 레위 언약은 지속 되어야 되고 말라기를 통해서 이스라엘은 망해야 되고. 그래서 지속되어야 될 때 나타나는 그 제물의 입장에서 볼 때 말라기의 제사장들은 “아, 잘못된 제물을 드렸구나”를 그제서야 판정이 나는겁니다.

이것은 말라기 첫 번째 시간때 이야기 했어요.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했다”할 때 야곱은 누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한다”라고 했거든요. 그게 바로 신약 성경이 없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최선인데, 신약 성경이 나타나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로 시작되는 새로운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게되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사랑받는다.” 이것 자체가 그제서야 이게 틀렸다 잘못됐다 엉터리다라는 것이 밝혀지는겁니다.

그래서 이 말라기를 할때는 말라기 특히 신약을 접근하고 있는 신약에 거의 가까이에 있을때에 구약 이스라엘이 왜 망해야 되는 이유를 아셔야 돼요. 흔히 단촐하게 이야기해서 신약에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구약에는 성전으로 구원 받는데 구약에서는 성전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은 잘못 되었어요. 성전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지 못하는 시대. 성전의 제사로 구원받지 못하는 시대가 신약시대이며 성전으로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구약을 통해서 성전의 취지를 드러내고 그 성전의 취지가 완성된 것을 신약 시대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거에요.

그렇게 될려면 구약의 성전에서 그들은 제사 드려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그것이 먼저 전제적으로 꼭 필요한 사실입니다. “성전으로 구원 못받았으니까 성전 취소하고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으면 된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뭐가 문제냐 하면 구약에 성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인간 구원은 아예 없고 성전의 취지 자체를 구원하기 위해서 성전을 줬다는 그 취지가 구약에 남겨졌는데 구약 성도들은 그것이 실패한 이유가 성전의 취지를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구원 못받은 거에요. 그러면 신약에서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나는 성전 몰라도 되고.”이게 아니라 성전의 그 취지가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완성 되었는가를 성전과 예수님과 연계시킬줄 모르면 예수 믿어도 구원 못 받는거에요. 신약에서.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성전의 취지가 뭐냐? 왜 CCTV를 달고 그 제사 지내는 제물까지 다 감시체제에 갔는가? 그거는 성전은 단절을 의미해주기 때문에 그래요. 단절, 끊어짐을 의미하는거에요. 지금 말라기에 나오는 제사장은요. 제사장과 레위지파는 신약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전혀 몰라요. 전혀 모르고, 지금껏 해왔듯이 지금껏 모세 율법에 제사드리라 하니까 레위지파니까 제사장이니까 그냥 꾸준히 제사를 드린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걸가지고 하자 있는 양들을 양산해냈다고 보는거에요. 문제가 있는 오류가 있는 하나님께서 안받는 양을 생산하게 되었다는거에요. 그걸 닦달 내시는거에요.

“너희들은 하나님이 받지도 않을 그런 백성, 양들을 제사 지낸다고 생산 되는게 아니다.”라고 할 때 제사장 입장에서는 신약 성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뭘 더할 수 있단 말입니까. 뭘 더할 수 있어요? 더 할수없어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제사장이 성전에서, 그당시 보잘 것 없는 성전이에요. 보잘 것 없다는 것도 그들이 감을 잡아야 돼요. 왜 성전이 보잘 것 없는지. 이 보잘 것 없는데서 보잘 것 없는 제사를 드리게 하시는 이유가 이스라엘이 망하는 그 상황에서 그들 심하게 수치를 유발시키는 발언을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치.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제물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 보기에 참 수치스럽다.”라고 이야기 하시는 거에요. 계속 이야기 해요. “더러운 것. 이것 가지고, 이 병든 것 저는 것 너희들 총독한테나 줘봐라 받냐.” 이 발언 자체가, 하나님의 이 발언 자체가 “아 참, 추접해서 못보겠네요.” 이러한 수치심을 안기는 발언이에요. 하나님이 수치심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받은 수치심을 제사장에게 되돌려 줌으로써 너희들이 하는 행위가 수치스럽기 짝이없는 행위라는 것을 나의 수치를 받음으로 너는 그걸 알아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 제물을 가지고 수치심을 유발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시는가? 그것은 성전 자체가 뭘 갖고 있느냐 하면, 처음 근원적인 사건들을 성전에서 이미 그안에 품고 있는거에요. 근원까지 가는거에요. 창세기 3장 7절에 보면,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이렇게 했어요.

이게 창세기 2장 25절에는 “둘이 한몸이 되어서 아담과 아내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했다”는 발언을 하시고 창세기 3장 7절에 와서는 그것이 부끄러워서 서로 옷을 입고 있었다는 이야기. 치마를 입었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선악과 따먹어서 생긴 현상인데 이것이 생명나무에 대해서는 영향력이 없이 그냥 멀쩡하다고 이렇게 사람들은 짐작하게 되겠죠. 그러나 말라기에선 그게 아니고 너희들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그 수치심이 생명나무 되신 우리 하나님의 소유인 생명나무까지 영향력을 입혔다고 보는겁니다.

“내가 너희들 하는 것 더러워서 못보겠다.” 더러워서 못보겠다는 이 말은 우리를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고 “제대로 생명나무의 그 가치를 가지고 너희들에게 다가가서 너희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백성으로 만들어주겠다”의 시작입니다.

“너거 하는 꼴이 더러워서 못보겠다. 나 너 책망하겠다.” 이것이 이게 미움이 아니고 사랑의 시작은 그렇게 되는겁니다. 만약 어떤 직장생활 하는 딸이 와서 집안에 오랜만에 와가지고 “아빠, 엄마. 내가 설거지할게.” 하게 되면 엄마가 옆에서 떡 보면서 니는 공장에서 일해라. 설거지하는 것 더러워서 못보겠다. 집나가란 뜻이에요?

그게아니고 “니가 안해도 내가 다 해줄게.” 분명히 니가 하는 것은 수치스러운데 그 수치스러움을 내가 가져갈게. 그래서 우리 성전의 취지를, 거룩한 성전. 제대로 양을 만들어내는 일에 내가 나설게. 그 시작은 책망이고 그 시작은 수치를 언급하는거에요. 그래서 이 제사장이 왜 하나님 보시기에 책망 받을 이 제물을 꼭 드렸는가? 그것은 어떻게 짐작할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그 제물에 대해서 수치를 받았다는 점. 수치를 받았다는 그 점을 통해서 그동안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망할 때 한결같이 지적하는게 있었어요.

“내가 너희들을 왜 저주하고 나라 망하는줄 알아? 너희들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그렇다.”라는 줄곧 수백군데 계속 이야기해왔어요. 선지자를 통해서. 그래서 제가 소개하는 구절을 들으면 이게 제물의 수치성과 이 이스라엘 멸망과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실거에요. 이사야 42장 17절, “조각한 우상을 의뢰하며 부어 만든 우상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는 자는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말라기에서는 제물을 “헛된 제물을 해서 내가 참 수치를 느낀다. 내 수치를 너희들이 알아야 돼.”라고 이야기 했다면, 이사야에서는 뭐냐? “너희들이 우상을 섬기는거? 그게 그거 너희한테 수치로 내가 되갚아 줄거야”라고 하는거에요. 이사야 44장 9절에도 같은말씀 나옵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다가 CCTV를 달아놓고 수치를 그냥 유발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말씀을 지키는지 그걸 보셨는데 내린 결론은 뭐냐? 수치가 유발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 그들이 나 말고 다른 신을 섬겼기 때문에, 우상을 만들어 섬겼기 때문에 너희들은 내 수치를 당해야 마땅하고 내 진노와 분노를 당해야 마땅하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수치 여부가 등장해서 우상을 섬겼다는 여부와 연계시켰다면 그 우상섬기고 수치스러운 그 품성이 이 제사장이 제사드리는데에도 그것이 사그라지지 않고 여전하더라 이말이죠. 이건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수치를 받고 하는 것은 수치라는 것은 창세기 3장에 근원적인 것을 볼때에 인간의 손으로 자기의 수치성을 자기가 떼 낼 수가 없는 처지에 있어요 인간은. 인간은 성심성의껏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려도 자기 몸에 달라붙어있는 이 수치스러움을 본인이 그걸 떨어지게 하지 못하는 그런 한계를 지니고 있는겁니다. 책망을 받더라도 그게 개선의 여지가 없는거에요.

그래서 말라기를 보는 사람이 신약을 모른 채 말라기를 봐버리면 도대체 무슨 내용인줄 몰라요. 무슨 내용인줄 모르기 때문에 흔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 그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 그 제물 깨끗한 것 드리지. 깨끗한 것 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실텐데.” 이렇게 오해하고 있는겁니다. 이걸 제물을 깨끗한걸 드린다고해서 그들이 구원받는게 아니에요. 이 문제는 이거는 구약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거에요.

다시한번 민수기 3장을 다시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유월절날 이스라엘 구원할 때 “제사 깨끗한 것 드려라, 깨끗한 양 드려야 돼. 날 섬기라.” 지금 이래서 그들이 애굽에서 나온게 아닙니다. 그들의 맏아들을 죽이고 그 맏아들 대신 어린양의 피가 들어가서 그들을 살렸잖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우리가 성의껏 최선을 다하면 받는다”가 아니라, 우리는 죽어마땅하다는 거에요. 죽어 마땅하다는 이것을 인간이 스스로 이것을 그런 마음을 품더라도 실질적으로 죽어마땅함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이 말라기 자체가 인간으로부터 어떤 질문 자체를 내놓을수 없게 만드는게 말라기에요. “그냥 기다려, 신약이 올때까지. 그냥 기다려 예수님오실때까지.” 이겁니다. 양 생산이 제대로 안되면 그거는 성전 아니거든요. 유월절 양가지고 양을 생산하는 장소와 공장이 바로 성전이다 그말이죠. 요한복음 10장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세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 말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양 생산하러 왔는데, 그 양 생산 하기 전에 먼저 기존의 율법에 의한 제사법으로 양 생산 하는 것은 그거는 도둑이고 절도고 사기꾼들이다 이 말이에요. 왜 인간으로서 제사드리고 예배드리고 율법대로 제사하면 그게 왜 하나님께서 안 받는 제품이냐는 거에요. 왜 엉터리 양이라고, 왜 하자 있는 제품이라고 안 받는 이유가 뭐냐? 그게 요한복음 10장 15절에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이 나도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노라.”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노라 라고 되어있어요. 양을 생산하는 공장. 그 공장에서 제대로 된 제사장, 제대로 된 레위 지파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일을 해야 양이 생산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더러운 제물이라고 안받습니다. 더러운 제품이라고 안받아요. 그래서 말라기로 다시 돌아와보면, 말라기에서는 그 제사장들이 이런 책망받고 반발을 할 뿐이죠. 어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고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요. 왜? 아예 신약을 위해서 말라기가 마지막으로 구약에 이 수치스러운 민족하고 단절을 시킨거에요 단절을.

다시말해서 어떤 대책에 대해서 침묵을 해버리는거에요. “너희들은 이렇게하고 이렇게 해라.” 그게 아니라 침묵을 해버려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의 수치는요, 자기가 스스로 떼어 내질 못해요. 그냥 감춰요. 제사드리고 예배드리고 뭐 교회다니면서 감추기 급급해요. 감춰버리면 자기가 뭐가 되느냐? 자기가 감추면서 어떻게 감추느냐?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간주합니다. 어시밀레이션이라고(assimilation) 하는데 ‘동화되다.’ 다시 말해서 제사장은 “나는 죽었다.”라고 생각해야 되는데 죽었다고 치고 죽은 척 하고 산자가 죽은자 흉내내기 하는 그런식으로 동화되면서 “그냥 우리 성의껏 제사드릴테니까 하나님 기쁘게 받으소서.”

하나님쪽에서, “더러워서 안받는다. 그거 니 다른사람 줘봐라 받나. 나는 너한테 안속아. 니가 하는 종교 행위 예배참석, 선교, 헌금 안받아. 더러워서 안받아. 왜? 너는 살고싶어 하잖아. 너는 죽기보다도 니 수치를 가리는것에 급급해서 율법과 말씀을 총동원 시켰잖아.” 그래서 주님께서는 400년전에 선지자가 안와요. 일종의 침묵입니다. 말 안해요. 망할 때 까지 기다려요. 예수님의 침묵은 3일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고난뒤에. 3일동안 침묵했어요.

박세리의 침묵은 60초였습니다. “그동안 아버지하고 뭐 사이좋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잘 지냈습니까? 왜 아버지가 그러한 사기에 나섰는지 이유를 아십니까?” 박세리는 눈물만 뚝뚝뚝. 63초동안 눈물만 흘리고있어요. 침묵이 말보다 더 무서운거에요. 아버지를 고소하겠다는거에요. 단절하겠다. 관계를 끊어내는거에요. 십자가가 뭡니까? 단절이잖아요. 3일동안 단절. “너희가 어떤 짓을 하고 어떤 노력을 해도 양 아니야. 내가 죽지 아니하면 양 아니야. 너희들이 죽는 척이나 하지 섬기는 척하고 찬양하는 척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사랑하는 척하지. 다 더러워서 못받겠어 더러워서. 수치스러워서 못받겠어. 너의 모든 그 행위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보면,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했거든요. 죽도록 충성하라 했는데 ‘죽을 지경으로 충성한다.’ 이렇게 이해하고싶은거에요. 죽을 지경은 아직 죽은게 아니기 때문에. 자기 죽는게 아까워 미쳐요. 아까워 미친다고요. 아니 제대 한달 남았는데 죽으면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고생했는데. 죽더라도 제대하고 죽어야지. 인간은 사는 이유를 개발하는데 몰두하고있습니다. 사는이유를.

“앞으로 잘할게요, 열심히 주의 영광돌리겠습니다. 선교사할게요.” 뭐 온갖 그럴싸한걸 내놓으면서 하는데 주님의 답변은 딱 이겁니다. “성전 문 닫자.” 성전 문 닫아버리면 세상은 성전 바깥이 되고 성전 바깥에서 주님의 CCTV가 다 달립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에 주께서 감시체제 들어갑니다. 더러운걸 더럽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 마련에 들어가요. 인간은 총체적으로 불심판 받아도 합당하다. 왜? 레위지파를 모르기 때문에. 레위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그게 말라기의 주제입니다. “성전 문 닫자. 교회같은 소리하고있네. 교회문 닫자.” 교회 문을 닫아야 교회가 보여요. 교회문을 닫아야. 다시 말해서 성전은 인간의 근원적인 것, 선악과 따먹은 사건부터 노아사건, 홍수사건, 모세의 심판 사건 모든 것을 근원적으로 다 품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성전입니다. 그걸 품었기 때문에 성전 자체 내에서 내린 결론은 하나님이 죽어야 양이 생산된다 이겁니다. 강의 시간같으면 이것 따라하세요 하고싶어요. 내가 죽어야 내가 사는게 아니고 우리 죽어도 소용 없어요. 가룟유다 자살한다고 구원 받는게 아닙니다. 내가 죽는다고 내가 사는게 아니고 예수님이 죽어야 내가 살아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기 때문에 그래요. 왜냐? 우리는 죽을 만 해서 죽는거에요.

왜? 더러워서. 살아있는 것 자체가 더러워요. 어시밀레이션에서 이제는 뭐로가느냐? 시뮬레이션으로 바뀌어요. 허상으로 바뀝니다. 망상. 흉내내는 것. 조작된 현실. 우리가 하는 재주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조작된 현실. 말라기의 제사장들은 그걸 몰라요. 왜? 모든 기억가운데서 근원적인 것은 모르고 발췌된 기억만 끄집어 내어가지고 발췌된 기억은 “우리 선배들도 제사 드리는데 제사드리면 하나님 받겠지 그지?” 이게 그당시 제사장으로서는 한계고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 이제 해결책이 있어야 되겠죠. 양이 생산되는 성전은 어떻게 되느냐? 일단 성전 문 닫습니다. 성전이 문을 닫으면 뭐가생기느냐? 교회가 생겨요. 교회는 구약에 없습니다. 교회는 신약에 마지막 종말의 영, 성령이 와야 교회가 생기는 겁니다. 그게 오순절 성령 오심입니다. 그러면 성전에, 교회에 성전이 없어지면 그 성전은 미완료냐? 아니요 완료가 됩니다. 성전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모퉁이 돌을 딱 끄집어 내요. 모퉁이 돌을 확대시키면 그것이 오늘날 완성된 교회가 되는겁니다.

그런데 그 모퉁이 돌은 사람들에게 배척받아야 비로소 생기는 돌이에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생겨야 교회가 생겨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사람들이 그 돌을 버릴까요? 왜 장차 교회 새로운 성전의 모퉁이 된 돌을 왜 사람들은 그걸 버릴 수밖에 없었는가? 그건 제가 이야기 했습니다. 근원적인걸 인간이 몰라요. 옛날을 몰라요. 자기의 단편적인거. “그것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잖아.” 맨날 “최선을 다하면 되잖아”에요. 전체 다를 못봅니다.

전체 다를 못보니까 단편적인 것 가지고 이정도 하면 우리의 성의를 알아 주겠지 하고 자기의 의 자기의 최선을 가지고 출발을 하고 하나님 앞에 납품할려고 양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어요. 양이 된다는 것은 양이 죽어서 양이되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이 제시한 근원에 빨려들어가야 돼요. 마태복음 20장 16절에, 예수님께서, “천국은”하고 시작됩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천국은”하고 괄호. 천국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다. 라고 성경에서 이렇게 제시하고 있어요.

뭐 이 성경에 관심이 있어야 궁금하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지만, 천국은 16절입니다.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되고” 먼저된자가 나중되는거에요. 그래서 천국은 바꿔치기. 뭐냐하면 자기자신이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제일 꼴찌에 해당되는 존재인 것을 발견하는 자로 하여금 주께서는 하자없는 양으로 간주합니다. 왜그렇냐 하면 내 의, 나의 성의가 포함이 안되고 빠져있으니까 100프로 온전히 주님의 십자가 공로만 대신 희생을 다 치뤘다는 공로만 남아있으니까 왕의 완제품이에요. 천국 백성의 완제품이 되는겁니다.

억수로 쉽죠. 주님입장에서는. 그래서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내가 스스로 성도 될려는 시도를 다 빼앗아 버려요. 내가 성도라는 목표 자체를 빼앗아요. 모든 환경속에서. 그러면 어떻게 빼앗는가? 우리는 어떠한 종교적인 일, 또는 종교적인일 아니더라도 어떤 세상일을 하더라도 나름대로 우리는 성의것 최선을 다한다고 하지만 주님보시기에는 우리가 스스로 뗄수 없는 수치가 계속 발산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다 들통내는 겁니다. 특히 이 말라기 말씀. 성의껏 예배드리는데 주님께서, “아, 더러워서 참 못듣겠다.”라는 그것이 바로 말라기가 현장성이 적용되는 방식이에요.

그러면 구원 받은 사람은 도대체 어떤 고백을 하란 말인가. “열심히 다 했습니다. 받아주세요. 우리의 찬양은 성령을 통해서 찬양하기 때문에 설마 성령을 통한 찬양은 받겠지.” 뭐 이런 꼼수 같은 어디서 알아 들은건 있어가지고 꼼수쓰고 있는데 안 받습니다. 그럼 뭐냐? 로마서 1장 16절 사도 바울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세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여기 부끄러워 라는 이야기.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그러니까 이 사도 바울은 복음 앞에서 더 이상 내 목숨이 살아 있다 죽어있다가 전혀 이거는 문제될 필요가 없다는 거에요.

복음이 나를 장악했기 때문에 살아 있어도 복음나오고 죽은것도 복음을 위해서 죽게 되었기 때문에 사나 죽으나 복음을 자랑하기 때문에 나는 도대체 내것이 있어야 부끄러울텐데 내가 이미 복음안에서 사로잡혀 죽어버리는데 “새삼스럽게 니는 뭐 행동을 그렇게 하고 어떻고 말은 힘이 있는데 실제로 보니까 별로네. 글은 보니까 힘은 있는데 말하는 것 보니까 시원찮네” 뭐 이런 것. 사투리가 심하고... 그런데 대해서 문제가 안되는거에요. 왜? “어떤 소리해라. 내가 부끄러워 하지 않기 때문에.”

그거는 뻔뻔스럽다는 뜻이 아니고 내가 먼저 복음 앞에서 늘 부끄러운 짓으로 복음이 나를 발췌해내고 들통내는 이 관계를 지금 사도바울은 너무너무 감사하고 있습니다. 한달 수입 해봐야 뭐 요세. 1500정도. 대충. 뭐 그것가지고 우예 1500만원가지고 어떻게 사냐?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요번에 뭐 취직했다면서, 한달 월급 얼마 주는데? 연봉 처음 했다고 연봉 7천하는데. 하, 부끄러워서 우예 작은 돈을 받냐? 그래도 난 복음으로 자랑한다.

매사에 스스로 부끄러워 하지 않는 작업을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스스로 행함으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작업을. 그걸 이제는 그만두는 가벼움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라기를 통해서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멸망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신약을 준비해서 예수님 준비해서 천국에 합격되는 오류없는 하자없는 완벽한 양을 생산하기 위해서 주께서 말라기를 준비하시고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것을 기뻐하는 저희들 되게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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