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큰 구원

아빠와 함께 2023. 11. 7. 09:08

강남-누가복음 19장 30절 (큰 구원) 231024a-이근호 목사



오늘은 19장 28절부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그렇게 시작하는 그 대목입니다.


예수님이 이 나귀 타고 오시는 이 대목은 큰 핵심으로 보면 이겁니다. 이별입니다. 인간과 헤어지는 단계. 헤어질 때 참 이상하게 헤어지지요. 나귀타고 헤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헤어지는 것과 인간들이 예수님을 쳐죽이는 것과 다른 문제에요.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의도적으로 보내는 거고 예수님이 나귀 타고 인간과 헤어지는 것은 주님의 의지가 강렬한 거에요.


내쫓아보내느냐 스스로 인간과 분리되느냐. 그 두 가지 양상을 예수님을 통해서 다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과 헤어지겠다는 뜻은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하면은요 인간이 스스로 우수함을 겨냥하며 사는 거에요. 자기 존재를 우수한 존재로 만드는데 인간들은 환장을 했습니다. 주의 뜻은 뭐냐 하면은 이것과 반대겠지요. 어떻게 반대냐 하면은 내 목숨을 드릴 곳이 어디입니까? 이게 반대가 돼요. 사람은 이 내 목숨을 드릴 정도로 가치 있는 곳에 제 목숨을 좀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식의 인간, 이런 인간은 찾아보기 힘들죠. 대부분이 반대에요. 제가 뭘하면 지금보다 더 우수한 존재가 되겠습니까? 거기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인간과 이별할 수밖에 없어요. 말이 통하지를 않으니까요.


그러면 오셔서 그냥 돌아가시지 왜 나귀는 왜 끌고 가시느냐. 이게 인간들이 이미 우수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하늘나라 들어갈 수는 없어요. 이걸 생각하면 딱 정답이에요. 벽. 하늘나라와 인간 사이에 예수님 자신이 벽이 되는 거에요. 벽의 구성 요소가 뭐냐? 둘로 되어있어요. 예수님의 몸과 그리고 인간의 몸. 이걸로 믹스해서 벽을 만들어버립니다.


제일 쉬운 예가 데이비드 카퍼필드 마술사가 만리장성을 뚫었어요. 만리장성 있잖아요. 그러면 카메라가 있고 카퍼필드가 여기 서 있고 그 뒤에 보니까 저쪽 카메라 보니까 막 벽 속에 들어가는 거에요. 보니까 벽을 뚫고 나온 거에요. 대단한 마술이었어요. 자유의 여신상 날리는 것보다 못지않게 큰 대단한 마술을 했는데 나중에는 밝혀졌지요. 카메라 트릭이라는 것. 어떤 타이거 마스크 쓴 사람이 그대로 흉내내가지고 이게 마술계의 허상이라고 보여주니까 사람들이 아! 그렇게 통과했구나. 사실은 인간의 몸이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만리장성을.


물리적으로 안 따져도 아시겠지요? 에너지 밀도 차 때문에 인간의 몸은 만리장성의 분자구조를 뚫을 수 없는 거에요. 인간의 몸이 내부적으로 예수님의 몸과 합체하거나 뚫고 지나갈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몸이 온 것은 마크하기 위해서 천국에 그 몸 가지고 오지 못한다고 마크하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인간들은 율법을 가지고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천국에 돌진합니다. 가자! 죽어서 좋은데 가자! 예수님께서 아서라 말아라 니가 왜 이러냐. 내 몸이나 뚫어봐라. 내 몸 뚫으면 천국 간다. 뚫립니까? 예수님의 몸이? 뚫리기는 커녕 죽이잖아요.


방금 한 이야기가 쉽게 하면 바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지옥 간 부자가 제안을 하지요. 이미 낙원에 있는 거지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지금 세상에 아직 죽지 않은 동생 5명이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게 나사로 부자의 생각이에요. 이 부자의 생각을 우리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이유가 오늘날 교인들의 생각하고 똑같아요. 교인들의 생각. 간증 집회 있잖아요. 기적. 똑같습니다. 획기적인 기적이 나타나고 두 번째 그 기적에 도달하는 방법을 주시면 우리가 그 방법을 따라서 해서 그 놀라운 기적 속으로 들어갈 용의가 되어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제 마음이 얼마나 가상합니까? 제 마음이.


아까 처음 이야기한 것처럼 이런 마음 가지면 그 사람이 우수해지지요. 마음이. 착해지고 고결해지겠지요. 인간은 지금 수준보다 제가 더 진실 되고 착실하고 착해지고 훌륭한 그것을 인간들은 얼마든지 상상해내는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들은. 그 본성은 어느 인간도 다 갖고 있습니다. 일등하면 좋고 꼴찌하면 싫고. 우수함이 딱 드러나니까요. 그럼 그 다음에 찾는 것은 너는 어떻게 공부해서 100점 받았어? 이게 탁 나오게 되어있어요. 수학 100점 맞는 것과 천국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인간은 간주하고 싶어 해요. 수학도 100점 맞는데 천국도 방법 알고 노력하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 방법이 뭐냐? 아 사람들은 죽어서 살아 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부자 이야기입니다. 제 이야기 아니고 죽어서 살아 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죽어서 다시 살아오게 되면 내가 천국 가봤거든. 가보니 이렇거든 그러니까 너희들 정신 차려. 안 가봤으니까 네가 그냥 아무렇게 살아가는데 내가 가보니까 너한테 이야기하는 건데 후회하기 전에 하나님 믿고 천국 와. 이런 말을 동생들이 아직 안 죽었으니까 죽은 나사로가 있으니까 해달라는 거에요. 어떻습니까? 이 부자의 아이디어가. 이 제안이. 사람들은 그건 아니지. 우리는 무조건 아니지. 무조건 아니지 하지 말고 이것까지 생각해야 돼요. 저게 지옥 갈만한 요소구나 이렇게 봐야 돼요. 이건 아니지 정도가 아니고 소극적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아! 저래서 지옥 가는구나. 저래서.


그러면 아브라함이 제시한 내용이 뭐냐 하면은 30절 보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절에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비교할 거리가 등장했지요. 두 개가 서로 비교됩니다. 한쪽은 뭐냐 하면은 부자가 제안한 거에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이 방법이냐? 죽은 자가 살아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이 간증을 듣고 거기서 동의하고 신뢰하고 믿고 지적으로 의지적으로 일치를 시키면 천국 가느냐 이 방법과 아브라함이 제시하는 것은 모세와 선지자에게 듣지 아니하면 소용없다는 거에요.


그러면 이 아브라함의 말에 의하면 이 논리에 의하면 모세와 선지자 글과 죽은데서 살리는 이걸 플러스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이게 없다는 거에요. 없다는 말은 이걸 쪼갤 수 있는 안목이 있느냐를 묻는 거에요 이걸. 그러니까 죽은 자가 살아나서 꿈에 계시 줬다 이렇게 할 때 정말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어디서 가짜가 들이대! 이렇게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에요. 이렇게.


아후라 마즈다 이런 신이 있어요. 조로아스터라는 사람이 주장하는 신입니다. 년도가 불확실한데 BC 2000-1000년 사이에 있었던 이란 북쪽, 지금의 키르키즈스탄 그 근처에 있던 사람이 배화교. 배화교라 하는 불의 종교가 여기서 나와요. 최고 절대 신이 아후라 마즈다에요. 빛과 지혜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이 이런 절대 신을 만난 게 뭐냐? 천사장을 만나 이런 계시를 받았다는 거에요. 천사장. 교인 수가 엄청났답니다. 그래서 국가적으로 교도소도 보내고 감옥도 보내고 했어요.


여러분들이 교주 또는 어떤 종교단체 이런데서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그 매력점은 바로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이 지옥 간 부자의 심성이 그대로 들어있기 때문에 그것과 매치를 시키는 거에요. 궁금했지?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 내가 알려줄게. 이러면 다 당기는 거에요. 왜? 자기가 자기 자신을 뭐로 본다? 우수한 존재로 되는데 있어서 기회를 붙잡으려고 모든 인간은 그걸 시도하기 때문에 현재보다 더 우수한 존재, 더 나은 존재, 지적으로 모든 것이 더 풍성한 존재, 지금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의미가 더 깊은 그런 존재를 누구나 추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걸 알고 주님께서 뭘 만든다 했어요? 벽을 만들죠. 벽. 벽은 뭡니까? 못 온다. 네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는 것은 모세와 선지자의 글의 완성자가 예수님 본인인데 너희들이 원하고 찾고 궁금해하고 바라고 있는 것 일체 내가 제공할 마음은 전혀 없다는 뜻이에요. 너희들이 얼마나 죽어서 천국가고 싶어 하는지 꿀떡같은지 내가 아는데 너희들의 그 욕구와 욕망을 나는 너무나 알기 때문에 나는 거부한다 이 말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를 부인하라.


그러면 내 속에 뭘 부인하라 말이냐? 하나님께서 아니다 하는 그것들이 네 속에 다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너 자신을 거부하라. 너나 저나 한통속이다. 왜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 왜 그들이 예수님을 대적했습니까? 어제 대전강의에서 제가 노래 하나 띄었지요. 무슨 노래입니까? 등대지기. 가사에 나오지요. 거룩한 마음, 고상한 마음. 이 등대지기가 우직스러워요. 우직스럽게 뭐냐 하면은 자기 청춘 인생 다 포기하고 뭐만 지킵니까? 등대만 지켜요. 왜? 이 등대를 지켜야 불빛이 있어야 암초있는 쪽으로 배들이 안 오니까 등대 지키는 거에요. 그래서 유대인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자기가 목숨 걸 것을 찾았어요. 뭐냐 하면은 모세 율법을 지키는 거에요. 모든 율법을 지키면 잘 지켰다고 우직하게 지켰다고 충성된 종이라고 해서 죽은 다음에 천국 간다는 것이 그들의 확고한 체계가 신학체계가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누구든지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 건드리기만 해봐라 이렇게 나온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쳤는데요. 아주 약을 올려버려요.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보고 가라고 안식일에. 그리고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에서 먹었어요. 소경된 자를 안식일에 눈 뜨게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 그러고 하시는 말씀이 “안식일의 주인은 난데” 이렇게 하시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의 몸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 인간의 내 몸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합치시키는 것 이것 전면 거부하시고 이 율법을 어느 몸으로? 예수님의 자신의 몸으로 인수인계시켜버린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몸이 있기 때문에 뭐를 추구하느냐? 구원을 추구하지요. 이 구원 다 헛방이었던 겁니다.


주님의 뜻은 뭐냐 하면은 네 몸이 구원받는 것은 애초부터 이런 일을 말씀해주신 적이 없어요. 우리 몸이 구원받는 것 없어요. 그러면 주의 모든 말씀은 뭐냐? 우리 몸의 구원이 아니라 구원 그 자체를 위해서 주께서 오신 거에요. 구원 그 자체. 구원 그 자체의 주인공은 우리 몸이다? 아니다? 우리 몸이 아니고 누구 몸이냐? 예수님의 몸을 구원해요. 왜? 예수님의 몸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골로새서 1장에 나온 말씀처럼 그 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주님 형상이니까 우리 몸이 주님을 따라가게 되면 우리도 하나님 형상 입어서 구원받겠네 라는 시도, 이거 오해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벽이에요. 벽.


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뭘 탔습니까? 나귀도 아니고 나귀새끼. 나귀새끼. 초라함의 극치죠. 너무 초라해서 민망할 정도에요. 아이고 그게 뭐야. 왕인데. 만왕의 왕이 그게 뭐야. 그것도 절뚝절뚝 나귀 새끼. 이게 뭐에요. 이게. 그런데 주님 뜻은 뭐냐 하면은 나귀 타실 분이 나 말고 누구 있어? 나귀새끼 타실 분이 나 말고 누구 있어? 나귀란 의미가 스가랴 9장 9절에 나오는데 그 말씀이 뭐냐 하면은 아예 없는 것보다 더 초라한, 없는 것보다 마이너스에요. 없으면 제로잖아요. 0보다 더 낮은 것. 없음보다 더 없는 것. 인간의 한계는 없음이 한계에요. 있다 없다 그걸로 끝이에요. 그런데 있는데 없음보다 더 없는 게 등장한 거에요. 분명히 있는데.


이것은 왜 그러느냐 하면은 예수님 자신이 벽이 되기 때문에. 이게 벽이라는 사실은 예수님이 우리 인간과 이별해야 비로소 점점 더 드러나요. 이별해야. 하찮은 나귀새끼. 하찮은 나귀새끼 위에 타신 왕, 어떤 왕이냐? 하찮은 나귀와 일치된 채 탔기 때문에 이 왕은 어떤 왕이냐? 하찮은 왕이에요. 이것은 그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모세 율법에서 밝혀낸 하늘에서 구름타고 오는 대단한 메시아하고는 너무나 안 맞아요. 너무나 맞지 않습니다.


사무엘하 22장에 다윗이 예언한 게 있어요. 왕이 올 때 메시아가 올 때 얼마나 대단하게 온다는 것. 너무나 대단하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구름과 땅이 다 갈라져요. 그 메시아가 올 때는. 그래서 어느 정도냐? 땅이 진동해요. 예언대로. 그 예언을 누가 파악했어요? 유대인들이 성경학자니까 파악했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 파악한대로 그 메시아 거기에 해당되는 합당한 어울리는 메시아를 고대했겠지요. 그걸 주님께서 염두에 두시는 거에요. 너희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어떤 큰 영광성으로 온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역으로 나가세요. 반대로 가시는 겁니다. 이래도 너희들이 나와 안 헤어질 거야? 이래도 나와 안 헤어질 거야? 뭐 나한테 붙어서 묶어서 같이 나 가는 곳에 같이 가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따로 떼어내는 거에요. 인간하고 인간이 추구하는 것 떼어내는 겁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어느 정도로 하찮은 존재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를 상상할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좀 더 우수한 존재가 되고 싶어 환장한 입장에서 내가 어디까지 망가지면 좋겠습니다 라고 요청하지도 않아요 사람들은. 지금은 양반이다 이런 인간 될 자격도 없습니다 라고 그걸 찾고 다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없습니다. 자진해서 종이 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어요. 여기 그 뒤에 보게 되면 37절 38절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예루살렘이 이렇게 성벽이 둘러싸여있어요. 성벽이. 있는데 이쪽이 동쪽이에요. 동문이 있는데 여기 지금 유대인들 공동묘지가 있어요. 유대인들 공동묘지가 감람 산에 메시아 오게 되면 제일 0순위로 빨리 부활될라고 대기하고 있는 거에요. 비싸요 전부 다. 여기 감람 산이 있어가지고 예수님이 기도하던 감람 산, 감람 교회가 있고 고개 넘어 베다니 나귀타고 내려오는 거에요. 내려와서 거기서 여기까지가 제가 보니까 한 500m 안돼요. 한 300m 정도 되는데 여기가 기드론 골짜기에요. 여기 천성교회 있고 여기는 대형 버스들이 막 있어요.


내려오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이게 어느 대목에 나오느냐 하면은 시편 24편 8절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호산나로 불렀어요. 호산나는 ‘우리가 구하오니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구원을 요청하니 우리를 구원하소서 이게 호산나 뜻이에요.


그런데 호산나 그것을 마태복음에서는 뭐냐 하면은 어린애들도 그 민중들에게 섞여가지고 군중들과 섞여가지고 불렀다는 거에요. 이 바리새인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애들이 뭐 안다고 애들 선동해가지고 뜻도 모르면서 메시아라고 하느냐 라고 되어있지만 여기 누가복음 오늘 본문에서는 더 심하게 이야기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40절에 하는 말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뭐들이 소리 지른다고 되어 있어요? 40절에 누가? 돌. 돌멩이들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입니까 도대체가.


저 군중들 찬양에 참여하는 예수님 따르고 참여하는 그들은 하나의 벽돌에 해당된다는 거에요. 벽돌. 하나님께서 계획한 것은 개인 구원이 아니에요. 구원이라는 하나의 곡을 만드는 거에요. 대곡을. 작곡을 하는 거에요 구원의. 또는 연극이라고 해도 괜찮고요. 또 건물이라고 해도 괜찮고. 구원 그 자체에 대해서 어느 인간도 만약에 구원받겠다고 개입한다면 그거는 본인 구원으로 쳐주는 게 아니고 하나의 전체 구원을 장식하는 하나의 벽돌 또는 돌멩이 이런 것을 너희들이 인정하라. 다시 말해서 내 구원을 위해서 구원에 참여할 수 없는 그 구원이 진짜 구원이라는 거에요. 내 구원을 거기서 얻고자 시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 그 구원이에요. 전체 구원.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기타가 있다면 줄이 여섯 줄이거든요. 지판이거든요. 지판에 기타 치는 사람 손가락 가지고 왼손 가지고 지판을 딱 짚잖아요. 그러면 줄에다가 손가락을 눌러요. 그리고 오른손으로 튕깁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디 해당되느냐 하면은 이 사물에 해당돼요. 프렛, 줄에 해당되고 누르고 어떤 지점을 누를 때 이게 바로 개인이 되고 그 개인을 튕기는 것은 주님이 튕겨버리면 거기서 뭐가 나오겠어요? 노래가 나오겠지요. 그 노래 작곡 누가 한 겁니까? 이거 주님이 하신 거죠. 나도 솔이잖아 이러면 안돼요. 솔도 기여했잖아 이러면 안돼요.


그런데 인간은 뭐냐? 너무나 계산적이라서 미, 솔, 라, 파, 레 각자 스스로 뭘 느끼느냐 하면은 여기서 어떤 결핍을 느낍니다. 아 나는 미인데 쟤는 솔이래. 아 죽어버릴까. 나는 낮은 도인데 쟤는 높은 도래. 아 언제 저렇게 출세했어. 아 쟤 높은 레래. 그러면 빨리 구원받는데 나는 구원도 못 받고 저 낮은 파에 속했다 이 말이죠. 나 빨리 노력해가지고 신앙생활 잘해가지고 높은 도가 될래. 이러고 있단 말이죠 지금. 그걸 가지고 사람들은 교회에서 구원이라고 가르치는 거에요. 지금 제자들을 염두에 두는 것도 있지만 먼저 그 당시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상대로 해서 이별을 한다는 것을 먼저 전제로 하면 되겠어요.


이제 내가 할 만큼 이야기했으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권력을 잡은 이 권력체에서 나 이제 너희들과 작별한다, 이별한다. 이별할 때 그냥 너희들 나보고 욕해라. 저게 무슨 저게 무슨 왕이야. 그냥 해프닝이지. 그런데 스가랴 한번 봅시다. 스가랴 9장 9절에 뭐라고 되어 있는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뭐하셔서 나귀를 탔지요?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이 겸손을 이해하고 겸손을 받아들일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나귀는 어떤 나귀? 큰 나귀? 대단한 나귀? 아닙니다. 어떤 나귀? 나귀의 어떤 것? 작은 것 곧 무슨 새끼? 나귀 새끼. 뭔가 타기는 타요. 왕이기 때문에.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은 해요. 왕이시기 때문에. 시편 24편 8절이 그러니까.


그런데 시편 24편 8절 그리고 아까 호산나는 시편 118편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118편 25절에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이렇게 되어있는데 이 시편의 이야기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이 말씀 가지고 그 당시의 유대 백성들을 통치하고 있었어요. 말씀을 그들의 정신 속에 다 삽입을 시켜놨다고요. 염려하지마. 로마에 압제 당한다고 너무 기죽지마라. 언젠가 이 말씀대로 그대로 성취할 날이 올 겁니다. 올 겁니다. 이렇게 한 거에요.


이제 주님은 그들과 헤어져요. 그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제자들과 헤어진다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제자들이 갖고 있는 의식이 기존에 있는 유대사상에서 조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것은 기존의 권력 세상과 이별을 안 할라고 그렇게 몸부림친 거에요. 주님 혼자 가세요 이런 뜻이란 말이죠. 난 안 갈랍니다. 나 죽어요. 이런 거에요. 결국엔 뭐냐 하면은 나귀는 아무나 탈 수가 없다는 것이 등장하지요. 나귀는 아무나 탈 수가 없어요. 왜 나귀를 아무나 탈 수 없는 것은, 쉽게 합니다.


나귀는 아까 스가랴에 겸손한 짐승이죠. 그것도 나귀보다 더 겸손한 게 나귀새끼죠. 나귀새끼가 지니고 있는 그 개념이 겸손의 극치 노골적으로 말해서 초라함의 극한이에요. 못나고 못난 가장 낮은 짐승의 대명사처럼 한단 말이죠. 그러면 나귀를 탄다는 것은 나귀를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고 나귀와 일치, 동치한다는 뜻이에요. “나귀야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해?” “하찮게 여겨요.” “그러면 좋아! 와! 이제부터 너는 나와 같이 되는 거야.” 하찮게 여기는 거에요.


마태복음에서 이 나귀 타는 대목에서는 바리새인들이 놀리는데 어린아이가 왜 거기에 와. 애들. 애들이 뭐 안다고 거기서 호산나 하면서 같이 합류해. 이 무식하고 무지한 이 군중들이. 예수님한테 현혹되어서 옛날에 병고치고 귀신 내쫓고 하니까 뭐 호산나 했다. 그렇게 해서 하는데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죠. 죽으러 가시는 거에요. 예루살렘에 죽으로 가시는 거에요. 나귀와 일치시키고 동치시키는 거에요. 그런 의미에서 아무도 이 나귀새끼를 탈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에요. 자기 품위가 있으니까. 인간은 지금보다 더 우수한 존재가 되고 싶어서 환장했는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자기가 점점 더 초라해지고 하찮은 존재가 되잖아요. 자기 수준 맞게 대단한 존재 그런 짐승을 타야 되는데 나귀도 아니에요. 그보다 더 못한 나귀새끼를 탔단 말이에요.


평소에 나귀에 대해서 어떻게 대우했는가. 그거는 성경 민수기 21장에 보면 나옵니다. 민수기 22장 23절에 보면 발람 선지자 이야기,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뭐하니? 채찍질하니. 때리죠. 너는 맞아도 싸다 이 말이죠. 인간에게 나귀라는 것은 뭐냐? 때리면 때리는 대로 그냥 고분히 맞아야 될 자기 개인 승용차 쯤 되는 거죠. 다시 말해서 나귀는 내 밑에 있다. 내 밑에 있다. 그러나 주님은 나귀새끼를 할 때 나귀새끼가 주께서 쓰시겠다 한다 했어요. 주의 개념이 하나님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쓰신다는 말은 지금 나귀 같은 신세가 되어서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다루어진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아무도 제자들 중에도 아무도 예수님이 왜 이런 해프닝을 벌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그 군중들 대중들 예수님을 호산나라고 외쳤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다 없어졌지요. 없어졌어요. 그러니까 그들하고도 결론적으로 작별을 고한 겁니다. 그럼 작별할 때 요란스럽게 작별하느냐 그냥 잘 있거라 나 다시 올게 이러면 끝날 문제를 왜 나귀를 타셔가지고 이슈를 만들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오해케 하는 진짜 왕인가? 진짜 메시아가 맞는가? 그런데 우리가 아는 메시아는 저렇게 초라하게 사람으로 오는 게 아닌데 그러면 우리가 지금 메시아에 대해서 뭔가 오해하고 있는가? 저분이 메시아라면 우리가 아는 메시아는 잘못된 메시아인가? 이러한 언지를 계속 제공하고 주고 있는 거에요. 그 행위 하나하나가. 그런 의미에서 또 작별, 이별되는 거에요. 그들이 자기 해석을 포기할 게 아니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한 걸 이렇게 한번 결론 내려봅시다. 보이는 것에는 반드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 속에서 보이지 않는 구원은 따로 있다 이겁니다.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 지금보다 자기 형편이 더 행복해지고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이건 모든 인간의 욕망이잖아요. 욕망 속에 보이지 않는 구원은 따로 분리되어 있어요. 어떻게? 초라함으로. 아무도 찾지 않는 초라함. 이 초라한 구원은 예수님의 개인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개인 구원.


왜 예수님의 개인 구원이냐 하면은 왕부터 초라해요. 왕. 왕으로 오셨는데 극히 초라해요. 그래서 초라한 왕이 굳이 초라해야 될 이유를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은 아까 처음에 누가복음 16장에 이야기한 것처럼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입니다. 듣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 스가랴도 선지자지만 왕이 나귀 타고 온다는 것이 스가랴 9장 9절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그럼 모세와 선지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많은데 예수님께서 딱 행위 하나하나를 하면서 그 많은 가운데서 얼마나 뭐 영광스럽게 대단하고 하늘이 진동하고 구름타고 오고 얼마나 좋은 게 많고 혹하게 하는 게 많은데 주께서는 뭐를 딱 꼬집어서 하느냐 하면은 천하디 천한 이게 뭐야 하는 나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그것도 나귀새끼. 나귀새끼가 사람 몸무게 감당하겠어요? 절룩거리죠. 뭐 힘이 어느 정도 차야 사람을 싣고 다니지 나귀새끼가 무슨 힘이 차겠습니까. 간신히 버티겠지요. 저거 죽은 거야? 산 거야? 분간도 안 될 정도로.


그 나귀새끼의 모습으로 영광의 시편에 기록된 모세와 선지자의 기록된 본 모습이 나귀새끼로 표출되고 있다는 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게 구원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겸손하지 않는 자다. 겸손하지 않는 자를 그걸 교만이라고 하지요. 여기서 정리해봅시다. 그럼 교만은 뭐다? 구원받고자 하는 사건, 보이는 거죠. 보이는 나를 의미를 두는 모든 것은 바로 구원이 될 수가 없는 것들이라고 보면 돼요. 보이는 것들의. 아까 기타의 솔, 라, 시, 도. 너는 미야. 솔이야. 나는 파야. 이거. 주께서는 미도 괜찮고 솔도 괜찮아요. 손으로 짚고 튕기면 여기 음악이 나와요. 작품이 나온다고 작품이.


말로 하는 것보다 실제로 하는 게 낫겠죠. 마침, 때마침 기타가 있네. 제가 주님이라고 생각하고 여러분들이 기타 사물체입니다. (기타 연주) “널 위한 나의 마음이 이제는 조금씩 식어가고 있어.” 방금 음악이 어디 나옵니까. 장필순의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라는 노래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노래 실력을 일부러 안내요. 그리고 반주도 들릴락 말락 해요. 반주가 들릴락 말락 가늘게 들려요. 이게 뭐냐 하면은 그 가사에 집중하게 하는 거에요. 그러면 그 노래 자체가 구원이라면 우리는 뭐했습니까? 눌렸지요 이렇게. 도, 라, 눌렸잖아요. 여기 내 구원이 어디 있습니까?


나귀 문제는 모든 보이는 것들의 시도와 헤어지는 거에요. 모든 보이는 것들. 대단하게 애들 따라다니면서 했을 때에 잠깐 보여주는 거에요. 이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돌들이 움직인다 해놓고 주께서는 자기에게 호산나 부르는 사람 구원해줬습니까? 아니죠. 그들의 몸과 자기 몸을 섞어서 뭐를 만들었습니까? 벽을 만든 거에요. 벽을. 어느 누구도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알아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그 말을 알아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내가 다 발각시키고 들추어내는 거에요. 거지 나사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면 내 동생도 구원되겠다고? 그걸 막는 게 모세와 선지자의 글이에요. 그걸 막기 위해서 완성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사적인 개인 구원이 나의 구원에서 포기할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들이 미가 되고 솔이 되고 파가 되고 레가 되고 몇 명 모이면 c코드가 되고 몇 명 모이면 d코드가 되요. 음들이 모이는 것을 코드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동안 우리가 성경 보면서 우리가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자, 그동안 사람들이 이 누가복음 나귀 타는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을 해왔는가 그것을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겸손해서 나귀 탔다. 따라서 우리도 겸손해서 구원받자. 낮추고 낮추고 목사가 됐으면 섬기는 자가 되고 섬김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돼야 한다. 100% 가짜지요. 그 목사 100% 가짜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없습니다. 왜 그 이야기를 못해요. 왜 그 이야기를 못합니까. 목사가 불확실해서 그래요. 본인이. 목사해서 구원받을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는 장로해서 구원받고 나는 목사해서 구원받고 너나 나나 지금보다 우수한 존재 되는 게 우리가 딱 까놓고 이야기해서 우리 소원이잖아. 모델은 누구? 예수님이 모델. 예수 본받아서 우리 우수하게 되자. 그 욕망 외에는 없었어요. 그러니까 여기 나오는 어린 애가 됐든 주님께서 우리를 표현할 때 뭘로 표현했습니까? 돌. 돌은 뭐냐 하면은 돌의 특징은 자신이 자신을 평가할 어떤 권한도 없는 것이 돌이에요. 내가 나를 나쁘다 좋다 잘했다 못했다 조차도 평가할 권한이 전혀 없습니다. 존재하잖아요. 그냥 존재하는 거에요. 그냥 존재하는 거에요. 뭐가 필요 없는? 타자가 필요 없는. 아무리 너는 나와 친구라 하지만 그 말은 결국은 나를 위한 친구로 되돌아와 버리는데. 있는 그 자체로 의미 없는 거에요. 그냥 있음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뭐를 모릅니까? 아까 이야기했지요. 없음보다 더 없는 그 세계를 몰라요. 없음보다 더 없는. 거지 나사로가 그렇게 고생했으면 하나님 믿는 자라 했는데 믿었으면 말년에는 좀 이렇게 편하게 살고 몸도 안 아파야 하는데 거지 나사로의 특징이 뭐냐? 끝까지 몸 아파요. 끝까지 거지에요. 나중에는 어느 정도까지 내려가느냐 하면은 개한테 사람 취급도 못 받는 개도 함부로 할 수 있는 존재. 돌보다 더 낮은 존재. 거기에 천국 백성이 생깁니다. 돌보다 더 못한 존재. 그러니까 이거는 누구 소관? 우리 소관 아니지요. 우리 소관 아니에요.


그럼 우리는 어쩌란 말인가? 이 누가복음 이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 들어와서 주님이 우리하고 헤어질려고 오셨다는 사실, 헤어질려고 오셨다는 그 사실을 우리가 받아들이면 돼요. 그러면 내 구원은 진작에 포기가 되면서 이제 남은 구원은 뭐 밖에 없습니까? 내 구원은 재꼈지요. 안되지요. 그럼 무슨 구원밖에 없습니까? 내 구원은 아니지만 누구 구원입니까? 주의 이름의 구원이 있지요. 주의 이름의 구원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것 바라보시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9장 30절 (큰 구원) 231024b-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9장 41절부터 보면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렇게 되어있지요.


두 번째 시간은 첫째 시간보다 더 어렵습니다. 왜냐 하면은 성사될 수 없는 일을 성사시키시기 때문에. 성사시키신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이유는 간단해요. 작은 크기에서 오는 세상관, 작은 세계에서 오는 작은 세상관 이것을 큰 세계에서 오는 큰 세계관으로 이걸 부수는 겁니다. 작업을 주님이 하셔요. 그러니까 작은 크기에 있는 작은 세계에 있는 여기 있는 존재는 주님이 하시는 큰 세계에 속한 큰 세계관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요. 어린 아이가 어른들 이야기를 이해 못하듯이 왜? 범주가 프레임이 차이가 나요.


같은 말을 할 때에 이렇게 작은 범주 안에서 이런 요소, 12개의 요소 이야기하고 큰 범주의 7646개의 그러한 요소 사이의 대화가 같이 일치될 수 있습니까? 왜 없느냐 하면은 이 사이에 뭐가 성립되느냐 하면은 이게 바로 변수라는 겁니다. 변수. 주고받는 변수. 변수의 다양성이 그만큼 폭발적으로 큰 거에요. 변수라 하는 것은 연관성을 이야기합니다. 원인과 결과의 폭이 다양하다는 뜻이에요. 이 일은 이것 때문에 생긴 일. 어린애들은 맨날 그것만 생각해요. 이 일은 이것만 하면 된다. 딱지치기한다든지 게임을 한다든지 이렇게 되잖아요. 이 좁은 프레임, 좁은 그 액자 안에서 그렇게 돼요.


그런데 엄청난 큰 다양한 변수 속에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Why Me? 왜 하필이면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납니까를 물을 수밖에 없어요.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결과적으로 뭘 주느냐 하면은 다 부수겠다는 겁니다. 다 부셔버리겠다 이 세상. 부수겠다는 이 결론, 이 결론은 주님만이 아는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할 때 다 부수겠다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 왜 제 것을 건드리십니까 이렇게 나와요. 왜 내걸 건드려. 내 것을 건드립니까. 내 것은 작은 크기의 작은 세계에 속하거든요. 큰 세계에 속한 게 아니에요.


큰 세계에 속한 것은 이거는 어떤 세계냐? 작은 크기에 있는 작은 인간이 성사될 수 없는 일이죠. 성사될 수 없는 일.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거에요. 대장금 드라마에 보면 대사 나와요. 여자 꼬마애하고 임금님하고 대화할 때 어린애가 고기를 씹었거든요. 고기를 입에 물고 있는데 임금이 물었어요. 고기 씹으니까 무슨 맛이 나냐? 물으니까 고기 씹으니까 홍시 맛이 납니다 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임금이 어떻게 고기를 씹는데 홍시 맛이 나냐? 홍시 맛이 나기 때문에 홍시 맛이 난다고 하는데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라고 한 거에요. 임금은 애가 느끼는 것을 못 느끼고 있어요. 그것은 임금이 홍시를 안 먹어봐서 그래요. 고기만 먹어서 그런가.


남을 위한다고요? 이건 있을 수도 없는 거에요. 인간은 남을 이해 못합니다. 인간은 남을 이해 못합니다. 남을 이해 못한다는 말은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도움을 줄 수 없는 게 맞는 말이에요. 따라서 이웃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이웃을 사랑할 수 없어요. 눈에 보이는 이웃도 사랑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요한일서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계명은 큰 그림에서 원인을 탁 쳐가지고 그게 어떤 결과로서 나한테 도달될 때 그때 우리는 주께서 하셨습니다가 되는 거에요. 주께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궁금한 게 있어요. 뭐가 궁금하느냐 하면은 세상을 때려부수는 결과를 나으셨는데 우리는 이해 안 되더라도 그러면 세상을 왜 부수셔야 되느냐 하는 그 문제, 그거는 알고 있어야 돼요. 세상은 왜 박살나야 되는가. 이 문장만 여러분들 이해하신다면 장담컨대 여러분 세상 전부를 다 아신 게 될 거에요. 이 문장을 보시면 이 세상이 왜 박살나야 되는지 이유를 우리는 동의하게 될 겁니다. 내 살과 내 피가 없으면 영생 없다 했지? 내 살과 내 피가 없으면 영생 없다고 내가 분명히 이야기했어 안했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게 큰 그림에 나오는 하나의 촉발이죠. 촉발.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새 언약이라고 하는 거에요. 새 언약. 대전강의에서 제가 새 언약할 때 언급했잖아요. 새 언약의 특징은 인간은 끼지 못한다는 것. 주님께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고 해도 마실 위인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 12제자에게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떼어줄 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떡을 먹었습니까? 안 먹었습니까? 포도주를 나눠줄 때 예수님은 나눠줬습니까? 예수님 본인도 마셨어요? 어떻게 돼요? 만찬이잖아요. 유월절 만찬에 예수님은 안 먹고 딱 버텼어요? 같이 드셨지요. 그건 뭐냐 하면은 제자들 제쳐놓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언약입니다.


예수님이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신다고 해서 언약의 완성이 아니고 예수님은 미리 성사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성사되기 이전에 거기에 대한 징후들을 징조들을 뿌리고 오신 거에요. 그중에 하나가 내 살과 떡을 떼고 포도주를 나누는 거에요. 또 그 중에 하나가 이걸 표적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행한 첫째 표적이에요. 이적은 아니에요. 인간들이 기대하고 고대하는 이적은 절대 안줘요.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아무도 이해 못할 이적, 그걸 표적이라고 합니다. 오병이어, 뭡니까? 표적이에요. 너희가 표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다. 그렇다면 표적의 의미는 깨닫지 못한다에 비중을 두고 일으킨 일이 표적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표적을 확장을 해봅시다. 표적 중에 아주 평범한 표적이 뭐냐? 내가 여기 태어나서 산다는 거에요. 살고 그 다음에 결국 내가 썩어서 늙어 죽는다는 것. 어느 것 하나 표적 아닌 게 없어요. 그런데 내가 태어나서 늙어 죽는 것은 주님의 표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성령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이에요 이게. 뭘 예수는 믿어요. 벌써 주님이 닫았는데. 주께서 부지런히 일을 벌렸는데 왜 우리가 짜증을 냅니까. 이상하죠. 지금 이게 내 일입니까? 나 좋아라고 하는 일이에요? 여러분 사는 것이 여러분 좋다고 삽니까? 어서 오세요~~밥 먹고 살라고 하는 일이에요. “그냥 뭐 둘러보고 갈게요.” 짜증이 확 올라오죠. 안 살 거면서 와가지고 두 시간동안 옷 다 만지고 더럽혀놓고 사는 것처럼 하고 안 사. 뭐야. 딴 데 가볼까? 이러고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오늘 재수 되게 없네. 왜 짜증을 냅니까? 이상해.


이게 왜 짜증을 내느냐 하면은 작은 세계에 놓여있기 때문에. 작은 세계. 작은 세계는 투박하게 원인과 결과를 내가 포착을 해내요. 내가 앞으로 잘하면 좋은 결과 있겠지. 내가 행동 바꾸면 새 사람 되겠지. 예수 믿으면 구원 받겠지. 예수 믿어서 아무도 구원 못 받습니다. 왜? 자기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공부하면 천국 가겠지. 못 갑니다. 말씀이 들어온다는 것은 내 세계가 깨지는 것을 말합니다. 내 세계가 깨지는 것은 징조에요. 전조에요 전조. 징후. 앞으로 모든 세상이 다 깨어지는 그러한 파장. 지진 오기 전에 새들이 떼로 날아다닌다 징후다 이렇게 미신이 있겠지만. 하나의 세상이 이건 이상하다 드디어 무너진다 징조 중에 하나로 우리는 이 땅에 천구백몇 년도에 주민등록이 나오는데요. 이 땅에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관련성, 주님과의 원인 결과 관련성. 다른 말로 하면 새 언약과의 관련성.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피와 살과 관련된 채 우리가 엮어져있지요. 우리는 주님이 작곡한 그 곡의 하나의 음표죠. 같을 수가 없어요. 어디는 #붙고 어디는 b붙고 같을 수가 없는데 모여야 노래가 되니까. 그래야 하나의 대곡이 되니까요. 어떤 때는 쉼표가 있어요. 쉼표라도 괜찮아요. 어떤 사람은 느긋하게 온음표야. 이건 세월아 네월아 아무 생각 없이 그런데 어떤 사람은 16분 음표. 하루 종일 바빠요. 하루 종일. 파탁파탁 뛰어다녀요. 하루 종일 스케줄이 빡빡해. 스케줄이 빡빡해가지고 있어. 박자도 달라요. 박자도 다르고 음표 차이도 다르고 모두 개성들이 다 달라요. 개성마다 전부 다 착각들을 하고 있어요. 나 이래서 구원받는데 너 구원받았냐? 상호 지금 구원 배틀하고 있어요. 구원 배틀. 다 망하는데. 다 무너지는데요. 무너져봤자 돌이고 안 무너져도 돌이잖아요.


19장 40절 41절 이 이야기가 44절 한번 볼까요.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알지 못했지요. 아까 그걸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인간으로 하여금 도저히 성사되지 않는 일을 주께서는 성사시키는 거에요. 처음에 제가 무슨 말 했던가요? 하나님의 전체적인 핵심은 뭡니까? 내 살과 내 피를 안 마시면 영생 없다 했어 안했어! 했지요. 내 살이야 니 살이 아니고. 내 피야 니 피가 아니고. 예수님이 제공해줘야 돼요.


성경 보면서 그거 발견 못했습니까? 맨날 묻기를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왜 니가 거기서 나와. 니가 영탁이야. 거기서 니가 왜 나와. 가만 있어 그냥. 너는 음표야. 온음표. 16분 음표. 32분 음표는 파닥거려요. 매일 바빠. 한쪽은 매일 바쁘고 한쪽은 느긋해. 느긋하게 살고. 이거는 뭐 살피고 연구하고 고민하고 걱정하고. 자신 걱정하지 이제는 이스라엘 전쟁 걱정 다해요. 드디어 메시아가 오는가 싶어서. 또 푸틴 쓰러졌데. 우크라이나 전쟁 멈추면 기름값 내릴까 걱정하지. 경제부 장관 대통령까지 다 해. 내년 대선까지 걱정 다 하고있어. 내년 대선까지. TV조선 봐가면서. 작은 세계에요. 작은 세계. 무너질 작은 세계에요.


무너뜨릴만한 세계 속에 우리는 그 자체로서 자기 존재를 우수한 존재로 바꾸기 위해서 나름 뭘 찾느냐? 원인과 결과를 찾아서 최적화된 성과를 얻을려고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어떻게 하면 되고 헌금은 어떻게 하면 되고. 하나님 말씀 어떻게 공부하면 내가 행복해질까요. 여러분 행복한 비결 알려드려요? 이거는 그냥 팁이에요. 말씀과 관련 없는데. 어떤 사람이 나보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행복이란 나보다 불행한 사람만 찾아다니면 돼요. 마약 했어요? 안 했지요. 그러면 이선균보다 행복한 거에요. 3억 5천 삥 뜯겼어요? 아니지요. 세상에 그런 행복한 사람 있습니까.


인간은 기어이 자기를 기어이 행복한 존재로 증명할라고 해요. 증명하고 그렇게 노린 결과를 합리적 추론으로 얻을려고 합니다. 그게 안 될 때 자살해요. 내가 나를 증명 못할 때 절망을 느끼고 자살해요.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 왜 없는 거야. 그동안 버틴 것이 나보다 불행한 사람 있어서 버텼는데 그 불행한 사람이 잘된다는 소식 듣는 순간 나는 뭐야 그럼 나는 뭐야. 나는 회복할 기미가 왜 안 보이는 거야. 그거는 자살에 가깝지요. 전조, 징후 그 다음에 증상. 이건 정신분석학에서 특히 많이 다뤄요. 정신과에서 다루는 게 아니라 정신분석학에서 많이 다루는 거에요. 정신분석학에서 많이 다뤄요. 전조, 징후, 증상.


이건 뭐냐 하면은 분열 증세. 분열됐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의 치료가 뭐냐 하면은 치료는 간단해요. 분열된 그것을 긍정하라 입니다. 분열된 그것을 합체하면 합체할수록 점점 더 난관에 빠져요. 전에 했잖아요. 우울증의 치료는 뭐라고 했습니까? 안 고치는 것. 안 고치면 되는데 고칠려고 하니까 우울증이 점점 심화되는 거에요. 그런데 성경의 해답은 뭡니까? 성경의 해답은 기다려봐. 이 징후, 증상, 전조가 나타난 그 원인을 그것을 내가 성사시킬게. 그게 뭐냐 하면은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자에게서 박살내는 것. 그게 바로 원인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최후의 언약, 마지막 언약, 새 언약, 약속의 언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약속이기 때문에.


그러면 누구를 성도라고 합니까? 자신의 현 처지를 무엇의 전조로 보면 돼요? 보이지 않는데 나타났으니까 이건 뭡니까? 전조, 징후, 증상이죠. 주일날 설교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대전 강의 때도 했는데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비유, 은유가 되는 거에요. 은유는 무의미한 게 아니에요. 은유는 대리하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했잖아요. 이제 우리가 주님을 대신하는 거에요. 동전의 앞이 뒤를 대신했다면 이제는 뒤가 숨어있는 앞을 대리하면 되는 겁니다. 말씀이 육신이 됐다고 했잖아요. 그럼 육신이 뭐 하면 됩니까? 말씀이 되면 되는 거에요. 말씀이. 주님의 새 언약이 뭐냐 하면은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가 아니고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뭐가 없다? 생명이 없다 라고 되어있어요.


없다와 없다를 연결시켰다고요. 없다와 없다를. 그걸 간단히 줄이면 뭐냐? 너는 없음에 속한다는 거에요. 없음에. 없음에 속한 나를 내가 말씀을 줌으로써 말씀이 도달되면 없음이 있음이 되는 게 아니고 없음인데 그 없음이 없음보다 더 못한 숨어있는 없는 존재의 징조, 징후, 증상, 비유로 내가 너를 다뤄줄게. 너를 사용해줄게 그거에요. 그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잖아요. 나는 십자가에 같이 죽고, 그럼 거기서 끝나야 되는데 그렇지 않지요. 내 안에 누가 살아있다? 그리스도가 살아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성경 읽어 본 사람에게 되묻고 싶어요. “니가 살았다는 말이야? 죽었다는 말이야? 둘 중에 한 개만 해.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어이~어이~~살았어? 죽었어? 죽었어? 살았어?” “죽었어.” “그럼 죽었으면 죽은 거지.” “그런데 죽은 내 속에서 누가 살았어.”


삼손이 힘 쎈 사자를 더 힘이 쎄서 때렸잖아요. 그럼 끝나야 되는데 사자는 죽었다 끝나잖아요. 삼손이 뭘 발견했는가? 죽음에서 뭐가 나왔다? 강한데서 단 것이 나왔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그걸 네 자로 수수께끼라고 하는 거에요. 수수께끼. 그러니까 주님께서 성도를 이 세상에 뭐로 보냈다? 수수께끼를 보낸 거에요. 그러면 우리 당사자는 앞으로 할 일이 뭡니까? 좁은 세계관, 좁은 세상관 그 위 크기의 범위가 넓은 데에서는 내가 모르고 있는 그 넓은 데서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를 알면 되겠지요. 우수한 게 아니에요. 우리가 달라진 건 없어요. 성령께서 알게 해주시는 거에요. 그보다 우수한 게 아니고 더 많은 것.


그럼 더 알게 하면 나한테 이익되는 건 뭐냐? 이익되는 게 뭐가 이익이냐 하면은 내가 고민했던 것이 고민할 건덕지가 없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시시하기 짝이 없는 것 가지고 내가 고민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또 여러분 분명히 이렇게 이야기할 거에요. 큰 세계에 안 데려가주면 어떡하는데. 이 말이 얼마나 불합리한지 제가 한번 써볼게요. 주님, 나를 지금보다 더 넓은 세계에 안 데려가주면 저는 어떡해? 나 어떡해? 이 말이 엄청난 모순을 갖고 있어요. 한번 따져볼까요?


주님 나를 지금보다 더 넓은 세계죠. 더 넓은 세계. 더 넓은 세계라고 했지요. 이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요? 이 사람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제 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까?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말은 지금은 내 세계가 이게 다가 아니다,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본인이 지금 감수하고 있지요. 그게 겸손이잖아요. 다른 사람이 와가지고 야! 너 진리 다 알았다면서?! 아니야. 더 넓은 세계가 있어. 이 말은 무슨 뜻이에요? 그럼 그 넓은 세계에서 지금 니가 아는 건 뭐야? 죄지 뭐 죄. 뭐가 죄인데?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전에는 내가 잘난 체했는데 이거는 내가 잘난 체할 그런 동기가 안 된다는 것, 내가 지금 변수를 제한된 변수로 따져가지고 나 잘했다 못했다 따졌는데 그 따질 처지도 아니고 입장도 아니고 내가 그전에 알았던 것 가지고 내가 잘했다 못했다를 평가할 내가 스스로 나를 판단할 그런 자격이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에요. 그것만으로 대단해요. 그것만으로 대단하잖아요.


만약에 이게 없으면요 남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욕을 하면 내가 굉장히 기분이 나쁜 거에요.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이만큼 살아왔는데 네가 뭔데 욕하느냐? 불끈 성질이 나더라도 저 사람을 주께서 보내셨다. 더 넓은 세계에서. 나로 하여금 성질나게 했다는 사실을 넓은 세계에 포함시키세요. 새로운 사건들과 맞닥뜨리는 모든 일상이 내가 노력해서 넓은 세상에 갈 수 있는 게 아니고 기도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가만 있어도 주께서 넓은 세계를 넓혀준다. 내가 넓혀주는 거에요. 그게 아까 했어요. 내가 이룰 수 없는 세계를 나한테 소개. 내가 이룰 수 없는 세계가 반드시 들어가야 돼요. 왜냐하면 내 노력으로 넓은 세계 들어가면 절대로 안 되기 때문에. 그건 벽이기 때문에. 내 쪽에서 벽을 뚫을 수 없어요.


그러나 이미 내 살과 내 피를 관계되어 있는 사람은 하나의 전체가 한 곡이기 때문에 노래이기 때문에 주께서 소개시켜 주는 거에요. 야 너는 기타의 몇 번 줄이었어? 5번 줄이었습니다. 그럼 생전 가도 4번 줄 구경도 못했겠네. 구경도 못했습니다. 그럼 4번 줄 소개해줄게. 4번 줄. 3번 줄. 죽기 전에 살아가면서 계속, 말로 하는 것보다 기타로. 1번 줄. 재미 하나도 없어요. (스트록) 아름답잖아요. 혼자 있어서 재미없는데 같이 하니까 어떻습니까? 아름다워요. 지금 6줄 쳤잖아요. 하나로부터 6개의 세계로 확장됩니다. 더 넓은 세계에요. 내게 없는 것을 타인이 갖고 있었던 겁니다. F로 한번 해볼까요? G7으로 한번 해볼까요? 이 세 개의 조만 있어도 노래 하나 나옵니다.


찬양한다는 것은 우리만 하는 게 아닙니다. 전체를 다 아는 자도 피조물도 찬양해요. 이사야가 만났던 바로 6개의 날개를 가진 천사. 스랍들. 그 천사들 하늘나라에서 뭐하고 있습니까? 쉬지도 않고 찬양하지요. 우리는 궁금해요. 찬양 한두 번 하면 지루하고 재미없을 건데. 저 천사는 지루하지도 않나? 재미 하나도 없이 왜 찬양만 하느냐? 우리 같으면 지루할 거 같은데. 왜 찬양이 지루하지 않을까요? 왜 찬양이 지루하지 않습니까? 천국에 가면 피조물은 모르고 창조주 되시는 분, 주님, 성령, 하나님이죠. 창조하신 분이 알고 있는 여러 가지 변수들이 있어요. 그 변수들이 불꽃놀이를 시작하게 되면 영원토록 해도 다 메마름이 없는 갈증 나지 않는 새로움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그걸 요한복음에서 목마르지 않는 샘이다. 목마르지 않는 샘. 끊임없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결핍이 없는 모자람이 없는 그게 계속 나오지요.


이 세상에서 우리는 그런 것을 이렇게 넓은 세계를 볼 때마다 그걸 잠시 느낍니다. 잠시 느끼는데 그게 얼마 가지를 않아요. 성질 급한 사람은 5분, 좀 성질 느긋한 사람 온음표 사람은 은혜 1시간 가지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지금보다 더 큰 세계를 보게 되면 이 사이에서 새로움을 느낍니다. 새로움을 느끼는데 새로움을 느끼는 순간 뭐가 뒤따라와요? 여기서 내 자아성이 뒤따라와가지고 이것마저 이미 내가 안다 안다 내가 알아버린 세계가 돼요. 재미가 없어요. 그러면 주께서 또 새로움을 또 이렇게 줍니다. 새로움을 줄 때 플러스 추가해서 주는 게 아니에요. 자, 한번 봅시다. 새로움은 어디서 나오는가? 인간이 지킬 수 있는 데서는 새로움이 안 나와요. 인간이 예상한 새로움이 안 나옵니다. 없음보다 더 없음.


아까 왕이 나귀 탄다 이야기했지요. 그걸 기존 교회에서는 어떻게 해석합니까? 예수님을 본 받아서 우리가 겸손하게 살자 이렇게 나오잖아요. 왕도 겸손한데 우리도 겸손하자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러나 겸손해버리면 이 겸손이라는 것이 벌써 어느새 자아가 돼요. 나 부르지 마 나 겸손한 나로 불러줘 이렇게 된다고요. 그건 뭡니까? 이미 교만이 되어버린 거에요. 교만 되니까 본인도 알아요 교만한 거. 그럼 겸손이 또 필요한 거에요. 내가 필요한 겸손은 이미 겸손이 아닙니다. 예상한 거에요. 내가 노력하면 성사할 수 있을 거 같은 겸손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수도원에 가는 겁니다. 기도하고 노동하고 늘 묵상하고 그걸로 평생을 보내겠다고 작심하는 것.


자,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천주교에서 많이 하는데 예수원이라는 곳에 그런 게 있어요. 만약에 1986년도에 마음의 결심해서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갔어요 수도원에. 들어갔으면 지금 2023년도잖아요. 그럼 2023년도에 처음에 수도원에 들어갔던 그 결심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까? 사람은 늘 변하거든요. 변하는데 자기가 자기를 속여요. 안 변했다고 속입니다. 위선자. 수도원 들어가서 위선자 돼요. 위선자. 만약에 제가 수도원 해가지고 수도원 원장이 되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묵상하고 이 세상에 모든 더러운 것과 세속과 끊어버리고 유행가 안 부르고 다 끊고 오직 찬양만 하기로 작심하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들어간 지 6개월 내지 1년도 안 되서 나오는 생각이 뭐냐 하면은 이겁니다. 수도세 전기세 걱정이에요. 이게 시공간에 제한된 인간입니다. 주의 복음 전한다고 목사 됐잖아요. 그러면 그 다음에 몇 년도 안 되서 생기는 걱정이 뭐냐 하면은 돈 걱정이에요. 돈 걱정입니다. 그럴 때 돈 걱정을 안 하면 되지 않겠는가? 어디 수도원 아닌 데가 없고 교회 아닌 데가 없지요. 왜? 각자 자기가 소속, 존재하고 있는 거처가 있잖아요. 그 거처는 시공간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돈 걱정 안 하는 수가 없어요. 그러면 그렇게 할 때 어떻게 하면 되느냐?


오늘 말씀이 얼마나 친절한 말씀인지. 걱정하지 마 내가 다 부숴줄게. 더 큰 세계의 더 큰 범주에 의하면 내 살과 내 피 빼놓고 다 무너지게 해줄게. 이건 처음부터 너한테 이야기했다. 그런데 처음에 1986년도에 그때 네가 알았다고 고개 끄덕였다. 분명히 끄덕였죠. 분명히. 그래서 나는 변하지 않으리라 스스로 맹세했잖아요. 성경에 맹세하지 말라는 데 다 이유가 있어요. 스스로 맹세해도 결국은 맹세한 게 그게 위선자가 되어 버리는데요. 왜 쓸데없이 맹세했어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쉽게. 왜 말씀을 지키느냐고 나무라시는 거에요. “말씀을 왜 지켜!” “지키라 했잖아요. 지키라 해서 지킵니다.” “그래서 되냐?! 안되잖아.” 왜? 내가 변하니까. 말씀은 변하지 않는데 내가 안 달라질 경우가 없었어요.


그런데 인간은 얼마나 고집이 쎈 지 안 달라졌다고 거짓말하니 거짓말에다가 거짓말을 제곱을 하는 거에요. 제곱만 해도 천만 다행이다. 세 제곱, 네 제곱 계속 나중에 가면을 썼는데 어느 쪽이 진짜인지 몰라. 가면 벗기면 가면, 가면 벗기면 가면 나오고. 가면의 중첩이 자아에요. 이게 기억입니다. 어쩌란 말입니까. 내 살이다 내 살. 내 살인데 왜 네 살을 고집했고 내 피인데 너의 피에 아직도 그렇게 집착을 하느냐 이 말입니다. 네가 하는 일이 아니고 네가 작곡가가 아니란 말이죠. 작곡가가 아니에요. 네가 작곡가가 아니에요. 네가 작사가도 아니에요. 전체 구원이에요. 전체 구원. 우리는 거기의 음표이고. 징후에요.


따라서 이 말씀에 대해서 제자들은 깜짝 놀랬습니다. 예수님이 우시니까. 하도 답답해서 우시니까. 제자들이 놀랬지요. 그런데 나중에 성령을 받고 난 뒤에 박수, 주님 잘했어요. 저 박살내어준 것 참 잘했어요. 그때는 나의 좁은 세계에 빠져있었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죠.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 이 말씀을 보니까. 여기에 43절에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라고 되어있지요. 이거 우리가 성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하지요. 못하는데 주께서는 말씀을 던져놓고 그 말씀을 주께서 성사시키는 그것이 우리보다 큰 세계에요. 범주가 넓은 세계에요.


따라서 우리 보고 뭐 하라는 게 아닙니다. 네가 말씀 지키면 이러한 어려운 점 봐줄게 이런 거 없어요. 그냥 이미 스케줄은 나와 있어요. 우리가 수정하고 고칠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밀어붙이는 거에요. 예수님의 살과 예수님의 피 빼놓고는 나머지는 다 날라가요.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답니다. 우리나라의 대학이 몇 군데 있느냐 물으니까 딱 두 군데 있어요. 서울 대학이냐 그 외의 대학이냐. 얼마나 믿음이 좋은지 모르겠어요. 왜 우리는 그런 믿음이 없습니까. 이 세상에 인간은 딱 두 종류 있지요. 예수님의 살과 피와 관련된 사람과 관련 없는 사람. 딱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자, 45절부터 보겠습니다. 44절까지 요약하면 이미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결정해 놓았다는 사실을 흔쾌히 부담 없이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들이세요. 이 말씀대로 다 부수어집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이보다 더 치열해요. 하늘의 별도 다 떨어져요. 누가복음에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임해요. 아주 신났어요. 고맙게 여기고 이 세상 다 무너지는 것을 요한계시록 보면 더 난리도 아니죠. 지진과. 정말 일 참 잘하십니다. 무너지는 이유는 알지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합니까 라는 말 하지 마세요. 그거 대처하는 단체가 신천지에요. 신천지는 자기 구원이 전부거든요. 14만 4천. 욕할 수가 없지요. 욕할 수가 없어요. 신천지나 구천지나 똑같은 천지인데. 자기 천지니까. 전부 다 작은 세계. 나 중심의 작은 세계라고요.


내가 이미 주께서는 벽을 쳐서 안 받아주는걸 확정된 나 라는 사실을 정말 우리가 성령 아니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걸 안타깝게 여기는 게 아니고 그동안 왜 몰랐을까를 감탄해야 돼요. 세상이 내 중심이 아닌 것을. 이제는 박하사탕 깨먹듯이 롯데껌 씹듯이 입안에 화하게 받아들여야 돼요. 병신같이 내 중심으로 살다니 병신이 따로 없어. 내가 천하의 병신이야. 그렇게 속고도 아직까지 몰라. 세상이 내 중심된다고? 미쳤지 미쳤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남들 다 그러니까 그런 줄 알았지. 기도하면 응답받고 그렇게 되는 줄 알았지요. 애초부터 성경은 그게 아닌데요. 벽인데요. 만리장성을 쌓아가지고 카퍼필드 와도 소용없어요.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죽어라 인간아 십자가로 찍어가지고. 사도 바울처럼 “이미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것이 빈말이 아닙니다. 그대로 우리에게 큰 세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자, 45절 봅시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이것도 뭐냐 하면은 표적입니다. 표적 아닌 게 없어요. 왜냐하면 아무도 이해 못하기 때문에.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제자들도 이해 못했어요. 제자들도 이 성전 쫓아내는걸 언제 알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부활하고 난 뒤에 알았다 하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그 말씀을 접근할 때 부활하고 난 뒤에 안 쪽으로 접근하지 말고 예수님 당시에 부활되기 전에 제자들의 심정을 우리가 헤아릴 줄 알아야 돼요. 지금 그들은 자기 청춘을 다 바쳤어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미 일가친척 다 버리고 재산 다 버리고 이제는 올인 했어요. 도박에서 보면 칩을 다 냈어요. 에라 모르겠다. 다 한방에 보냈어요. 이거 아니면 나는 끝났다. 12제자가 다 그렇게 했습니다. 주님께서 책임지겠지.


주께서는 나를 책임지는 게 아니고 내게 없음보다 더 있던 나를 책임지죠. 내게 있는 나를 있음으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있는 나를 취소시키고 내가 성사될 수 없는 나를 숨겨 있는 나를 예수 안에 있는 창세전에 예정된 나를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죠. 아브람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구원하는 거에요. 주께서는 이런 건 몰랐지?! 네가 없어지는 그것과 바꿔치기 하면서 등장하게 되어있어요. 나는 뭐냐 하면은 기존의 세상의 육적인 세상적인 나는 소유함으로서 존재하는 내 정체성, 소유가 없으면 정체성이 없어요. 뭔가 돈이라도 명예라도 뭔가 역사라도 과거라도 있어야 이게 ‘나’가 되는 거에요. 그 역사를 지워버리거든요. 그걸 무의미하게 만들면서 헛된 것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같이 동반해서 튀어나오게 되어있어요. 새로운 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를 비치게 만듭니다.


그러니 성전이 파괴될 때 그때 그 심정을 제자들이 하나의 징후니까 내 징후와 제자들 징후도 하나의 변수로 서로 다른 줄이거든요. 제자들이 1번 줄이라면 나는 6번 줄이다 이 말이죠. 같은 지판에 있잖아요. 팅~ 치면 저건 높은 팅 치면 낮은 도네. 역시 같은 거니까 성경은 그것 때문에 있는 거에요. 그들은 깨닫지 못하더라. 딱 내 이야기에요.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죽였더라. 딱 우리 이야기에요. 바리새인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다 같은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아담의 다 내 이야기에요. 다만 우리한테는 과거지사가 되지요. 신나는 과거지사.


그래서 성전에 갔을 때 제자들이 아무리해도 못 알아봐요. 표적이기 때문에. 주께서는 인간이 성사될 수 없는 것만 해놓고 성경을 보니까 성사될 수밖에 없는 일만 하셨다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왜? 내가 더는 개입할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죠. 추가적으로 내 할 일을 내 행함을 일체 거부하는 일체 내쫓는 그 일만 하는 거에요. 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 자의 복이라고 했어요. 드디어 나옵니다. 행복에서 뭐로 변했어요? 복이 되었지요. ‘행’자 빼버려요. 행복 찾지 마세요. 주께서 허락한 것은 복이지 행복이 아닙니다. 행복은 나의 행복이란 뜻이 있어요. 복이라 하는 것은 새로운 나를 주께서 거저 주신 거에요. 주님께 복속되라고 주신 복이에요. 주와 하나가 되는 관계를 맺는 게 복이고 이거는 단독적인 내 것 행복, 네 행복 말고 내 행복이에요. 주께서 일한 것도 없이 의인이 되는 복을 주셨다.


자, 이렇게 보니까 성경 전체가 뭡니까? 한결같지요. 두 말 안하지요. 내 살과 내 피,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십자가만 자랑하라. 내 살과 내 피, 복도 다 어디서 온 거에요? 주님에게서 온 거에요. 그런데 근거가 뭐냐? 내 살과 내 피 먹지 않으면 내가 영생 없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잖아. 이 말은 내 살과 내 피가 없는 사람은 복 반대말이 뭡니까? 얼마나 출세해도 얼마나 행복해도 그거는 저주가 되는 겁니다. 저주가 되지요. 너 누구야? 주님의 흔적이야. 이러면 될 거가지고. 주님의 징후야. 보이지 않는 분의 나타남, 보이지 않는 분의 대리자야. 이렇게 하면 될 거가지고 너 누구야? 내가 25년 동안 교회 다녔거든. 왜 거기서 그게 나와요. 십일조를 얼마 했고. 그게 왜 나옵니까. 아프가니스탄 선교했고 그게 왜 나와요.


다 좋아 헌금한 거 좋아 기억 속에 나온다 합시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25년 동안 십일조 했는데 비로소 죄였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선교했는데 선교가 죄였고 목사된 게 죄고 내가 강의하고 돌아다니는 게 이게 죄다. 설교한 게 죄고 복음 전한 게 죄였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거에요. 내가 살아있는 게 죄다. 왜 살게 했는가? 주께서 아담의 죄 때문에 살게 해주신 거에요. 그걸 이제 제자들이 표징이 된 겁니다. 이제 와서 제자들이 이야기하지요. 성령 받고난 뒤에 잘했어요 우리 주님 짝짝짝짝. 잘했어요. 아 그 말이 그 말이구나. 무너지고 몇 일 뒤에? 3일 만에. 아 이게 사물체 건축물이 아니구나 이게. 보이는 것은 표적이고 진짜는 그 안에 인물을 이야기하는구나. 홀로 이루어진 인물. 예수님이죠.


그 다음에 너희는 기도하는 집, 장소가 기도원이 아니고 예수님 안이 기도하는 곳이에요. 그다음에 47절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방도를 찾기 못했다는 말은 안 죽였다는 말이 아니고 요한복음에 나와요. 때가 아직 되지 않았기 때문에. 벽에 공격을 가할 때가 성경의 순서가 있어요. 큰 스케줄에 의하면 때가 돼야 이 변수가 도달, 도착하게 되어있어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때가 되야 은혜가 오던지 성령을 받던지 하는 거에요. 때가 되야. 말씀을 깨닫든지.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도 때가 돼야 되는 거에요. 때가 되었습니까? 그럼 때 되기 전에 우리는 마냥 기다리는가? 그냥 기타에 지판에 그냥 음표로써 조용히 있으면 성령께서 댕~ 누르시고 딱 눌러서 전체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전체의 일부에 속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댕~ 하고 울려버리면 다른 선을 댕~ 하고 울리는 선이 같이 저쪽에서 하는 복음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이게 서슴없이 징후와 징후가 서로 만나는 희한한 현상이 나옵니다. 너 어떻게 알았어? 당신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때 나오는 노래가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이렇게 나오죠. 그래서 항상 진리는 미리 아는 게 아니고 뒤돌아봐서 진리라는 것을 파악하게 되어있습니다. 지나고 난 뒤에 뒤돌아봐서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확정되었고 결정되어 있는데 우리는 무엇이 결정되었는지 무엇이 확정되었는지 아직 남은 생애가 있고 구원될 천국이 있기에 다는 모릅니다만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십자가에서 나오는 이 능력이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친히 주께서 이끄신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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