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9장 46절 (또 다른 안목) 231107a-이근호 목사
내가 나로 갈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지금 내가 구원받는 내가 될 수가 없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막혔기 때문에. 막혀있어요. 뭐가? 천국 가는 길이 막혀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막느냐 하면은 이런 식으로 막아요. 간단해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느니라. 너무 간단하죠. “누구 만나러 왔어요?” “하나님.” “나 보고 살 자 없다. 저리가. 저리가.”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어떻게 된다? 누가 선이고 악이고 할 때 일단 나를 선으로 봐요.
그럼 악 보고 “너 내게서 나가” 이렇게 되지요. 그런데 악은 그냥 안 나가요. 왜냐하면 선악이 붙어있기 때문에. 선악이 붙어있기 때문에 선만 있는 경우는 그게 선악과 아니에요. 반드시 선이 있는 곳에 악이 같이 동반해서 있을 때가 선악 구조가 유지가 되는 겁니다. 인간이 따먹은 것이 바로 그걸 따먹은 거에요. 인간은 따먹지 말아야 했어요. 선과 악이 대립개념이거든요. 비슷한 거 같으면 대충 넘어가면 되는데 선악은 서로 충돌하고 대립하고 대조하는 관계에요. 그래서 정체를 분명히 밝혀라.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묻지요. 하나님 저 선해요? 아니면 악해요? 회색 그런 거 없어요. 선하면 선하다 하고 악하면 악하다 분명히 이야기해달라.
그러나 선한 인간은 없고 악한 인간, 인간이 생각하는 악한 인간도 없어요. 왜냐 하면은 깡패들도 양심 있다고 하거든요. 검사가 너는 사람을 장난삼아 죽였기 때문에 사형이다 이렇게 하니까 교도소 있으면서 하는 말이 유족에게 사과하며 남은 생애 선처를 부탁합니다 찔찔찔 울고 있잖아요. 정유정. 나쁜 개만 없는 게 아니고 나쁜 인간도 없다고 인간들은 그렇게 알고 있어요. 고양이만 착한 게 아니에요. 인간은 아무리 누가 악하다고 해도 자기 자신에게 선한 것을 반드시 쥐고 있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독한 사람이라도 어떤 점에서 인간은 결국은 착하느냐 하면은 자기가 나쁘다는 것을 아는 그 점이 자기에게 마지막 남은 착함이에요.
그래서 끝까지 자기를 착한 자기를 건지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 마지막까지 쓰다 쓰다 결국 남아 있는 방법은 뭐냐 끝까지 결국 나를 건지는 방법은 자살입니다. 자살이에요. 내가 너 책임져줄게. 자살한 대표적인 사람은 누구지요? 예수님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죠.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가 왜 자살했느냐 하면은 다른 사람 보기에는 자살할 이유가 안돼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들으면 너무 착해서 자살했어요. 내가 스승님을 팔아먹다니. 가룟 유다한테는 예수님이 스승이지 주가 아니었어요. 스승이었어요. 가룟 유다는 뭘 몰랐는가? 주님과 스승의 차이를 몰랐습니다. 한수 배울려고 교회 온 거에요. 한수 배울려고. 나 착하기 위해서 주님한테 한수 배울려고 온 거에요. 절에 가서 부처한테 한수 배우듯이.
인간에게는 주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주님은 확정했어요. 누가 주님이에요? 나보다 더 한 주님은 없어요. 착한 나를 착하다 해주면 같이 좋은 관계 유지할 용의가 있고 나보고 악하다고 한다면 그게 누구라도 내치고 싶은 게 인간입니다. 그게 바로 12제자 가운데서 가장 12제자를 대표하는 제자가 가룟 유다에요. 가룟 유다만 스승과 주님을 분간 못한 게 아니고 가룟 유다 하나 사단 나니까 나머지는 다 흩어졌잖아요. 가룟 유다야 그러면 안돼. 스승님, 가룟 유다는 떠났지만 우리는 지켜드리겠습니다. 이런 거 없어요. 누구 하나 터트리니까 다 도망간 거에요. 12제자 체제 자체가 다 무너진 겁니다. 마치 12지파 이스라엘이 다 무너진 것처럼.
인간은 자기에게서 자기를 쫓아내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악하고 아무리 내가 악독해도 끝까지 어미의 사랑으로 사랑해주는 것은 나한테는 나 자신밖에 없어요. 지켜줄게. 심지어 착한 나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자살 아니더라도 나는 나를 포기할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를 볼 자가 없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요 없어요? 여기 보면 없어요. 구약 때부터 없습니다. 나를 보고 살자가 없기 때문에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매개자를 보내지요. 모세가 대표적인데 매개자를 보낼 때 중보자라고 하는데요. 매개자 중보자 헛갈리니까 성경에 있는 용어로 통일하겠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 이렇게 보면 돼요.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나타나면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평화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평화. 이 세상에서 평화라는 것은 누가 날 간섭 안하면 평안해요. 왜냐하면 인간은 홀로 있고 싶은 거에요. 인간은 어디에서 홀로 있고 싶으냐 하면은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홀로 있고 싶어 해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인간이 제일 평화를 느낄 때가 언제냐 하면은 아름다운 대 자연 속에 자기 홀로 있을 때 그걸 감상하고 있을 때 파노라마처럼 360도 전체 아름다움에 푹 잠겨있을 때 뭐 배 좀 고파도 괜찮아요. 극상의 희열을 느낍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가을철에 한번 나가봐야 되는데. 사람들은 그걸 마음의 평정을 얻는다. 도시의 삶에 찌들렸다. 그러면 대책은 뭡니까? 대책은 제주도 한 달 살기. 요새는 제주도도 안 되지요. 복잡하니까. 지리산 자연에서 한 달 뭐 이런 거. 지리산 가고 제주도 가면 뭐가 있습니까?
거기는 사람이 없어 좋아요. 사람이 없다는 말은 나 혼자라도 아름다워지면 그것이 어릴 때 동화를 보고 살아왔던 내 어릴 때 꿈이 잠시 느껴지는 거에요. 하늘에는 조각 구름 떠있고 바깥에는 붉은 단풍이 쌓일 때 더 먹지 않더라도 배부르고 이걸로 족하다고 느끼지요. 그래 인간은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구나 이렇게 하는데 메시지 딱 뜨는 거에요. 메시지 딱 뜨면서 대출이자 갚으세요. 휴대폰을 왜 들고 갔는가. 휴대폰을. 휴대폰을 왜 들고 갔는가. 아무도 나를 터치하지 않을 때 인간은 평화를 느낍니다. 그 평화는 뭐냐 하면은 상대가 없는 평화. 제발 나 가만 나둬. 제발 건드리지 마. 이 평화. 그것을 불교에서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합니다. 하늘과 땅 아래 나만 있을 때 그걸 해탈이라고 보는 거에요.
그러나 성경은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하늘나라를 가고 싶은데 나를 하늘나라 집어넣어서 하늘나라 백성 만들고 싶은데 하나님은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으니까 들어갈 수가 없지요.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 인간은 뭐냐 하면은 결국 인간은 결국 출구가 막혀있다. 출구가 막혀있는 거에요. 막혀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궁극적으로 도달되는 곳이 없다. 야~ 이거 참담한 저주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걸 윤회라고 하지요. 윤회. 불교에서 구원은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걸 해탈이라고 하거든요. 계속 떠도는 거에요. 어느 속에서? 본인 안 속에서. 본인 안에 뭐가 있다고? 선악체계. 내가 선할까? 내가 악할까? 아니야. 착한 일 좀 했잖아. 그럼 선이겠지. 예수 믿고 하니까 선이겠지. 그런데 내 행동은 왜 이렇게 엉망이야. 아! 악하구나. 계속 그 안에서 윤회하고 있는 거에요. 윤회. 떠돌고 있는 거에요. 대책 없습니다. 떠돌고 있으니까.
가끔은 제주도 한 달 살기 편한데 한 달 살면 누가 마트에서 그냥 공짜로 줍니까? 안 주잖아요. 뭐 라면이라도 먹을려면 돈이 있어야할 거 아닙니까. 돈 떨어지면 다시 도시로 와서 돈벌이 해야지요. 한 달 살기 평화 다 깨졌습니다. 다 깨졌어요. 그래서 깨닫는 게 뭐냐 하면은 제주도가 평화가 아니고 지리산이 평화가 아니고 돈이 평화라는 사실을 알게 돼요. 돈. 돈이 평화에요. 초등학교 애들한테 물었어요. 너 장차 커서 뭐될래? 건물주. 딱 답이 나오잖아요. 건물주. 건물주의 특징은 있는 돈 쓰기 거든요. 있는 돈 쓰기. 가만 있어도 사실은 가만 있는 게 아닌데 정신적 노동이 많거든요. 애들은 모르니까. 가만 있어도 건물주는 가만 있어도 세 들어오니까. 세 들어온 거 가지고 백화점가서 양쪽에 선물 들고 돌아다니고 그 모습을 보는 거에요.
오로지 평화라는 것은 누구로부터 간섭받지 않고 나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 그게 평화지요. 그래서 요즘 그 평화에 가장 가까이 있는 직업이 뭐냐? 유투버. 직장 때려치우고 되도 않는 조그만 지식 해가지고 ‘좋아요’ 좀 부탁해요. 그걸 왜 구걸합니까. 구독 눌러주시고. 그걸 왜 구걸해요. 자체적으로 평화, 돈이죠 돈.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궁극적으로 도달할 수 없어요. 자, 그러면 이 사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 그러면 아까 성경에 기름부음 받은 자가 평화라면서요. 기름부은 자가 죽거든요. 모세 죽었지요 예레미야 죽었지요. 왕 죽었지요. 제사장 죽었지요. 기름부은 자 다 죽는데요. 없어요. 있던 시절도 있지만 없던 시절이 더 많아요.
그러니까 기름부은 자가 없는 시대가 그 간격이 더욱 더 길어요. 그때 기름부은 자 모세 있으면 좋겠다. 그때 모세 말 왜 안 들었지? 이렇게 하지만 만약에 모세 때 죽은 자가 벌떡 일어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네가 모세랑 한번 살아볼래? 네가 모세 죽일 거야 아마. 기름부은 자와 동행하기? 차라리 지리산에 가서 너 혼자 살아.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모르지? 율법으로 간섭하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되게 이끄시는데 그걸 어떻게 감당할려고. 감당 못합니다. 이 시대에 기름부은 자 있으면 좋겠다. 있어요. 누구? 성령. 성령의 기름부음 있잖아요.
그럼 성령이 여러분께 뭐하던가요? 죄와 의에 대해서 맨날 책망하지요. 기도하고 나면 그것도 기도야? 내가 분명히 했지. 너 기도할 줄 모른다고. 응답 같은 소리하고 있네. 기도도 제대로 안 하면서 응답은 어디서 비복음적이야. 맨날 책망하고 있는 거에요. 신약 때는요 살 가치도 없는 자에게 기름부음 있어서 평화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로마서 3장. 로마서 3장 잠시 한번 볼게요. 3장 23절에 보게 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지요. 모든 인간, 모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의 그 ‘모든’ 이에요. 모든 인간은 율법의 저주 받기 위해서 율법을 줬다. 모든 사람에게. 그 ‘모든’ 입니다. 그 ‘모든 사람’은 죄를 범했으매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만나면 죽는다. 어디를 넘봐! 천국? 천국에 누구 계시잖아요. 하나님 계시잖아요. 죽어요. 못갑니다. 막혀있다니까요. 인간이 궁극적으로 갈 데가 없어요. “죄를 지었으매” 그런데 25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의 그 화목제물, 하나님의 성령 받아서 믿는다고 했는데 믿는다 의 특징이 뭐냐? 로마서 3장 25절에서 나 믿습니다 라고 확정지을 수 있는 근거는 뭐냐 하면은 나의 의가 아닌 나의 선악체계에 의해서 의가 아닌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닌 율법 외의 의가 나에게 도착했습니다. 도착했습니다. 중요하지요.
내가 천국에 도착했습니다가 아니라 천국이 내게 도착했습니다. 새벽 특송.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뭐가 왔어. 뜯어보니 하나님의 의. 이건 뭐 횡재한 거죠. 평화가 온 거에요. 평화가 온 거에요. 자, 평화란 것은 단독적으로 혼자서 도 닦는 게 평화가 아니고 상대가 있다. 상대가 없으면 평화가 안돼요. 상대가 없으면. 상대가 없으면 하나님의 의가 발현되지 않아요. 반드시 모든 사람, 내가 죄 지었음을 인정하는 것과 짝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의가 사하심의 의가 나오는 거에요. 화목제물에는 반드시 이처럼 상대가 있다는데 그 최초의 상대는 하나님과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기름부은 자의 상대지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화목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확장된 겁니다. 확장된 거에요.
이걸 누가 방해하겠어요. 인간들의 죄란 뭐냐? 죄라고 하는 것은 홀로 살고 싶어 하는 거에요. 왜? 자체 안에 뭐가 들었다? 선악이 들어 있으니까 선악 관리를 자기가 알아서 해서 이 안에서 뭘 원한다? 평화를 원한다. 내가 착하다 악하다 판정해서 그걸로 인하여 나만의 고유한 평화를 원하는 거에요. 이걸 가지고 죄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걸 죄라고 하는 겁니다. 네가 왜 선과 악 사이에서 선한 쪽으로 하려고 하느냐. 이걸 문제 삼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악에서 선으로 가는 것이 인간은 의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럼 악은 뭐냐 하면은 이 세상, 선은 뭐냐? 천국. 인간의 죄는 뭐냐? 구원받고자 하는 게 죄가 돼요. 구원받고자 하는 것.
카프카, 실존주의 20세기 초에 체코의 문학 단편 소설을 보게 되면 단편이 여러 있어요. 총체적으로 그 사람 사상이 뭐냐 하면은 단독자로서 심판 앞에 설 때 인간은 해답이 없다. 이게 정답이에요. 그 사람이 말하는 부조리한 세상이에요. 단독적으로 인간이 지리산에 단독적으로 혼자 살면 되는데 자기가 연구해보니까 인간은 반드시 그냥 사는 게 아니고 착한 척하면서 산다는 게 그 사람의 결론입니다. 착한 척하면서 사는 것. 문제는 나는 분명히 나한테 착해요. 착한데 과연 내가 착한 것이 다른 분, 다른 분 앞에서도 착한지를 알려면 심판, 판정을 받아봐야 돼요. 그래서 판정 받기 위해서 나보다 더 아는 제목이 비슷한데 내용이 비슷해요. 전부 다. 더 높은 위치에 세상을 보다 넓게 보는 신이죠. 그 앞에 심판을 받고자 그 앞에 내가 왔는데 재판 문이 아무리 기다려도 열리지 않는다는 거에요.
결국 아까 제가 말한 것은 인간은 궁극적으로 내가 누구냐를 확정시키는 그 분에 대해서 어떠한 해답도 받지 못하고 그냥 계속해서 그 재판 문을 두드리다가 죽을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래서 일찍 죽었어요. 폐병 걸려서 죽었는지 일찍 죽었어요. 다른 사람 같으면 대충 살지. 결혼해서 애 키우고. 그게 본인이 안 되는걸 어떡해요. 본인이 안돼요. 우리나라에 비슷한 사람 있죠. 이상. 본인이 그걸 말릴 수가 없다고요. 진리가 무엇이냐? 세상 어떠냐? 항상 감수성이 있는 20대에 그냥 일제에 이름 바꿔서 살면 될 걸 가지고 친일파로 살면 되는데 이게 안 된다는 거에요. 남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은 이것은 사회, 기성 사회에 문제가 있어서 그래 이렇게 하잖아요.
그러나 이상, 카프카는 그게 아니에요. 그거 다 핑계라는 겁니다. 뭐 나라가 어떻고 조선이 일본의 압제받고 핑계고 근원적인 문제는 내 내부에서 내부 자체가 해답이 없고 해결이 안 된다는 거에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면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거에요. 질문을. 그 질문 하나하나가 예수님의 자신의 일이에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사흘 만에 부활한다. 이게 예수님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하는 형식이에요.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인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제자들 알 리가 있습니까. 모르지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사탄아 물러가라” 한방 먹이고. 모든 것을 묻는 거에요. 질문해볼테니까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예수님이 왜 무덤 열고 왜 부활합니까? 이게 질문이에요. 우리는 주께서 무덤에서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 알잖아요. 왜? 왜라고 질문해본 적 있습니까? 주님이 알아서 하시는데 뭐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주님이 하는 일은 우리의 실존과 무관한 일이 하나도 없어요. 여태 그걸 모르고 살았지요. 몰라도 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는 주께 답이 있을 것이다 주께 가까이 가자 라는 이런 사고방식이나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늘나라 가보자 하는 사고방식과 차이가 없지요. 똑같아요. 주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질문인데 우리는 그 답을 다 회피해버립니다. 모릅니다. 모릅니다. 모르면 가만 있는 게 아니에요. 모르면서 뭔가 시도하고 있어요. 가자 천국으로. 너 알아? 막혔어. 막힌 이유를 아냐 이 말이죠. 네가 천국 가는 길이 막힌 이유를 아느냐?
가룟 유다 자살할 때 가룟 유다는 노골적으로 모른다고 자살했고 다른 제자들은 에이 고기나 잡자 고기 잡으러 가버리고. 이것도 회피 아닙니까. 회피거든요. 행복해서 해피가 아니고 얼굴 돌려버린다고. 회피. 지금도 성경 보면서 전부 다 막연해요. 막연함. 남들처럼 아는 수준만 해도 괜찮지 자꾸 이러고 있다고요. 주께서 무덤에서 나온 이유는 정답 말씀드려요? 심판을 확장시키신 거에요. 심판을 본격화시킨 거에요. 댐이 있잖아요. 댐을 터트려버린 거에요. 저주의 댐을. 하나님께서 참다 참다 저주의 댐을 터트려버린 거에요. 그게 뭐냐? 예수님이 죽음 가운데서 부활해버린 것입니다.
언젠가 그런 강의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The dead is alive. 이게 두 가지의 뜻을 할 수 있어요. 죽었던 그 사람이 지금 살아있다. 이 해석도 하나 가능하고요 두 번째는 뭐냐. 죽음 그 자체가 살아있다. 이 해석도 가능해요. The dead is alive. 죽음 그 자체가 살아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저주 그 자체가 살아있다. 심판 그 자체가 살아있다. 그러면 이건 인간세계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부터 이미 저주의 대상이라는 뜻이에요. 선악과 따먹고 쫓겨날 때부터 저주의 대상인겁니다. 자, 욕조가 있지요. 욕조의 물이 가득 있습니다. 욕조에 어떤 한분이 들어갑니다. 이 욕조 이것이 심판이고 저주라면 아까 이야기했듯이 누구도 하나님 만나면 뭐된다? 죽는다. 누구도 하나님 만나면 죽는다 라는 사실을 지식이 아니라 실제화시켜서 계시, 현실 자체로 계시화될 필요성을 그러한 결정적 타이밍 시점이 온 거에요. 기름부은 자가 한 거에요. 평화를 위해서.
이게 오늘 누가복음 19장 보겠습니다. 19장 42절에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42절에도 “숨겼다”고 되어있고 44절에도 “알지 못함이다” 라는 말이 나오지요. 뭐를 숨기고 뭐를 알지 못했습니까? 그들이 갑작스럽게 심판을 받는 그 날에 대해서 예루살렘이 알지 못했고 그 점에서 결국 숨긴 것이 되지요.
왜 그들은 심판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까? 본인을 심판의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내가 뭐?! 선악을 알고 있는 이상 나는 뭐하다? 선하다. 선악을 알고 있으니까 선한 거에요. 이거는 선이고 이거는 악한 겁니다. 나쁜 일하면 나쁘고 남 도우면 선합니다. 알고 있다는 자체가 자기를 선한 존재의 확실한 증거로 보기 때문에 심판? 자기하고 상관없다고 보는 거에요. 그리고 자기는 선을 유지하는 한 자기는 평화로울 권한, 권리가 있다고 본 거에요. 일반교회 교인들이 새벽기도회 나가는 이상은 내가 새벽기도까지 나와주는데 주께서 우리 집안 거덜낼 일은 없다. 왜? 새벽기도를 나가니까요. 새벽기도는 착함이잖아요. 어떻게 하나님이 착한 자를 쳐버릴 수 있나 선함에 모순된다고 보는 거에요. 진짜 죽을라고 환장했나.
그들은 아무리 예수라 하지만 따지고 보면 기름부은 자가 필요치 않은 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들은 내 착함이 필요하지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아요. 예수님은 날 도와주기만 하면 돼요. 구원하기만 하면 돼. 나한테 필요한 사람은 나 자신이에요. 왜? 내 인생이니까. 누가 내 인생을 책임져요. 이거는 실제로 경험해보면 알잖아요. 누가 인생을 책임져요. 책임 못 집니다. 살쪘다. 누가 빼줘요? 내가 운동해야지. 그걸 고상한 말로 실존주의라고 합니다. 실존이라는 의미는 뭐냐? 살찐 사람은 지가 빼야 된다는 게 실존주의에요. 머리는 누가 대신 깎아준다고? 머리를 남이 깎아준다고 내 머리 깎이는 게 아니에요. 맞죠? 맞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그럼 천국 가기 위해서 선을 쌓는 것은 내가 해야 되지 누가 내 대신 선해서 천국 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거에요. 이게 왜 믿음이 없는가? 선악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생명나무 체계가 들어올 자리가 없는 거에요. 대신한다는 게 들어올 자리가 없는 거에요. 왜 미쳤다고 대신해 내가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왜 대신해. 나에 대한 모독이라고 보는 거죠. 내 존재에 대한 모독. 이 저주받은 욕조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심판. 주님 한 분만 여기 주님 몸으로 들어가요. 말로 들어가는 게 아니고 몸으로 직접 들어가요.
쉬운 질문인데 한번 답변해보세요. 오늘 날씨 춥지요? 추운걸 어떻게 알았지요? 누가 가르쳐 주던가요? 오늘 날씨 춥다고 누가 가르쳐 주던가요? 일기예보가? 아니에요. 일기예보 안보면 안 춥습니까? 내 몸이 나에게 알려주는 거에요. 으으 춥다. 인간은 자기의 자아가 아무리 투철하더라도 인간은 자기 몸을 못 이깁니다. 그리고 인간의 몸의 생리와 충동을 아무리 도 닦고 공부 많이 하고 지식적으로 훌륭해도 자기 몸의 충동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지식을 보는 게 아니에요. 그 몸에 있는 그 괴물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의 충동대로 나온 거죠.
요한복음 19장 15절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논리적으로 따졌어요. 나는 재판자 입장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소리를 안했어요. 다만 빌라도가 이야기한 것은 죄 없다는 이야기를 한 게 아니고 사형시킬만한 죄는 없다. 사형시킬만한. 어느 정도로? 채찍 30대 치고 그냥 돌려보낼 생각이었어요. 국가문란소란죄로. 어떤 경우라도 사형까지는 이건 할 수 없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법률을 익힌 사람이에요.
인간의 법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의 집대성입니다. 인간의 지혜가 모인 거에요. 인간이 인간과 더불어 어떻게 질서를 잡느냐 최고의 지혜들은 바로 법률가에요. 공부 제일 잘해요. 서울대 법대출신들. 요모조모 따져서 오류를 최소한 줄이는 쪽으로 법을 정한 겁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법을 정한 거에요. 징역 1년 살 것을 사형시키면 이건 어떤 의미냐 하면은 사적인 복수가 들어가는 거에요. 사적인 복수. 자경단입니까? 자경단 아니거든요. 그런데 인간 내부에 자경단이 있었던 거에요. 이론은 그런데 네가 나를 건드리면 죽여버린다. 자동차 전용도로 달리다가 갑자기 차 세워놓고 언제 준비했는지 야구방망이 들고 왜 그렇습니까? 야구방망이로 뭘 할려고 하는 거에요? 왜 빵빵거렸어!
자, 빵빵거린 것이 사형에 해당됩니까? 그 빵빵거림을 듣는 사람한테는 사형에 해당돼요. 왜? 이유? 없어요. 충동이에요. 내 몸이 그렇게 반응하는 거에요. 내 몸이. 내 몸이 그렇게 반응하는 거에요. 애를 키울 때 “어머님 아버님 잘 주무셨습니까? 저를 위해서 희생적으로 아침밥을 준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렇게 인사하면 안돼요? “밥줘!” 이게 뭐에요. 맡겨놨어? “밥줘!” 여러분 다 그렇게 컸지요? 부모한테 밥 달라는 권한이 본인한테 어디 있습니까. 어릴 때부터 충동이 감추지 못하고 그냥 충동이 충동적으로 나오지요. 교육을 통해서 좀 눌르는 거에요. 남도 생각해야지 너만 생각하면 되나. 그 충동이 못되는 사람이 술 먹고 와가지고 행패부리고 하는 거에요.
제가 어떤 설교를 준비하면서 예화를 준비했는데 그 예화를 써먹지를 못했는데 이겁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받는 것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제가 준비한 예화는 이렇습니다. 과장이 회사에서 신경질 나는 일이 있어가지고 술 잔뜩 먹고 들어와서 아내가 집에서 앞치마 두르고 열심히 반찬을 쫙 준비해놓으니까 술 먹고 와가지고 하는 말이 식탁 왼쪽에서 오른쪽부터 치워라! 밥하고 밥그릇하고 우르르 다 떨어지죠. 인간이 주는 것 하나님께서 어떻게 합니까? 오른쪽에서 왼쪽까지 치워라! 확 밀어버리죠. 충동. 말, 율법이 어떻고 신앙이 어떻고 싹 치워버려라. 네 몸이 가는대로 나한테 행동해. 네 몸 가는대로.
왜 사람들은 말도 안 되게 비약적으로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인이 아니에요. 정확한 제삼자의 눈으로 볼 때에 질서문란죄 해가지고 여러 가지 피해 입은 거 해서 그냥 채찍으로 30대 맞고 끝낼 문제인데 굳이 사형을 하라니까 이게 납득이 안 되는 거에요. 또 친절하게 묻지요. 왜? 왜? 굳이 죽이려고 하는가 물어요.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그런데 그쪽 답변이 뭡니까? 강조, 반복을 해요. 심지어 협박도 합니다. 당신 우리 말 대로 안하면 당신 로마에 꼰질러버린다. 찔러서 당신 자리 그만 두게 할 거야. 민란이 일어나가지고. 본문 뭐라고 되어있지요? 두 번 반복했지요. “없이 하소서 없이하소서”
왜 그렇게 행동했습니까? 예수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들을 모욕을 했다. 모독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모독했다 본거에요. 자기들의 천국 방식에 대해서 모독했다고 보는 겁니다. 자, 그러면 유대인들의 천국 방식은 뭐냐? 그 당시 유대인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천국 간다고 자신만만했을까요? 힌트는 사두개인에 있습니다. 뭐만 있으면? 성전의 존재지요. 성전의 존재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특별히 허락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 성전이라고 본 겁니다.
그래서 비록 그들은 자기 성깔대로 살지만 자기가 부족한 게 많지만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도 자신들이 안 놓쳤다고 자신하는 것이 있어요. 내가 이런 죄만큼은 안 저질렀다고 자신만만한 게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나님이 성전을 주셨다는 하나님의 행함에 대해서는 우리가 확실히 믿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런 믿음마저 하나님께서 부정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의 하실 일은 정해졌지요. 어디로 들어가면 돼요?
자, 인간은 천국에 막혀있다는 것을 주님 몸으로 확인하는 방법은 뭡니까? 주님 성전에 와서 깽판 놓으면 되죠. 그게 바로 그 뒤에 본문 아닙니까. 너희들 어떤 경우라도 너희들의 방식으로 하나님이 화해, 평화를 주지 않는다. 내가 장담할게. 너희들 다 포위당해서 다 죽는데 여기 자식들까지. 자식은 정말 인간들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게 자식이잖아요. “자식들이 땅에 메어치고 돌 하나도 돌 하나위에 남기지 아니하고”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나 있지 이거는 12개의 돌도 없게 만들어버려. 어떤 것도 다시 살 희망을 제로로 만드는 그날이 올 것이다.
그런데 그 날이 어떤 날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은 42절에 보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으면 좋았을 뻔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숨겨놓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의 화해하는 평화를 완성하는 그 방식에 대해서는 하나님 쪽에서 예수님 쪽에서 이미 숨기고 있다는 거에요. 숨기고 있다는 말은 지금 내가 너에게 당하고 있는 모든 일이 결국은 평화를 드러내는 일과 관련성이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내가 성전에서 하는 이 모든 행위 하나하나가 하나님과의 화목과 연계되어 있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45절에서 48절까지 읽어보면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쭉 되어있지요.
자, 이것을 이제부터 설명이 돼야 됩니다. 주께서 성전에서 성전을 청소했습니다. 성전 청소했지요? 청소했잖아요. 왜냐하면 이 집이 네 집이 아니고 내 집이다. 인수인계한 거에요. 주님이 일방적으로 인수인계한 거에요. 너희들이 천국가기 위해서 정성들인 이 성전, 이 방식은 하나님께서 안 받는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이 성전을 자기가 인수인계해서 내가 청소함으로서 성전이 천국 가는 길이 되게 해주겠다. 청소를 한 거에요. 그럼 질문 들어갑니다. 청소한 것이 1. 추방입니까? 2. 영접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추방하는 행위입니까? 영접하는 행위입니까? 몇 번입니까? 딱 둘 중에 하나에요. 여러분 선악과 잘 알잖아요. 어느 쪽이겠어요?
추방입니다. 추방하는 거에요. 누구든지 하나님을 본 자 다 죽는다를 현실화시키는 거에요. 앞으로 불심판 될 때까지 현실화시키는 거에요.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 만나보지도 않았는데 그런 억지부리지마세요 라고 할 거잖아요. 내가 하나님인데. 너 나에게 어떤 짓을 했어? 사형에 해당된다고?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했지. 너희들이 날 추방했잖아. 너희가 날 추방했잖아. 영접기도하지 마. 추방한 자를 영접하면 추방이 정당화되잖아요. 그런 일은 없어요. 어떤 인간의 행위도 주님이 인간에게 추방당함으로서 인간 쪽에서 내세울 어떤 카드 모두 다 추방 하나님을 영접할 권한은 전혀 없이 된 겁니다. 주님께서 이걸 막아버리는 거에요.
욕조에 주님 혼자 이렇게 누웠지요. 주님이 십자가에서 뭐 받았습니까? 저주받은 거죠. 가득 차있는 저주에 누웠어요. 왜냐하면 예수의 몸은 어떤 몸입니까? 이 땅의 죄의 몸으로 오셨거든요. 죄의 몸으로 온 값을 해야지요. 아버지가 주는 모든 저주, 저주를 홀로 들어갑니다. 홀로 들어갔지요. 그럼 이 욕조를 하나의 댐으로 봅시다. 댐을 터트려버려요. 그러면 이 저주가 그것도 정당성이 있는 저주. 아 인간은 저주 받아야 합당함, 마땅함이라는 그 소식이 욕조를 통해서 남은 시간까지 쫙 온 천하에 흘러넘치겠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추방용입니다. 나가에요. 나가. 천국 못 들어가 나가. 그게 십자가에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취지를 받아들인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기에 십자가를 못 믿는다. 요한복음 3장 17절, 18절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걸 그들이 왜 못 믿는가? 그들은 빛이 왔으되 어두움이 깨닫지를 못했기 때문에. 그러면 백성들 없지 않느냐? 누가 백성이냐? 본인이 어떤 행동 해야 백성 되느냐? 본인이 행동한 건 없어요. 그러면 빛을 비취는 사람은 뭐냐? 그들의 모든 행위는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행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수단으로서 정해진 자가 백성이에요. 하나님이 자기 행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도구로 쓰여진 자가 바로 천국 백성입니다. 요한복음 3장 20절, 21절. 도대체 성경을 보면서 뭘 상상합니까? 목사님 우리는 뭘 하면 됩니까? 그냥 죄 지으세요. 그냥 죄 지으세요. 죄가 뭔 줄 알아야 죄를 짓지요. 기다려보세요. 주께서 당신을 추방시킨 이유를 말씀으로 이야기할 겁니다. 십자가로 이야기할 거에요.
자, 예수님이 설교하고 했을 때 그들은 모독감을 느꼈어요. 그러면 질문입니다. 오늘날 성경을 통해서 복음이 나올 때 사람들은 모독감을 느낄까요? 안 느낄까요? 느끼죠. 다 같은 아담의 사람이니까. 저는 모독감을 못 느끼는데요. 그거는 말씀만 듣고 복음은 빼서 그런 거에요. 복음은 빼버렸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심판의 욕조에 들어간 사람 누구밖에 없다? 예수님 한 분밖에 없어요. 한분밖에. 그러면 댐 터졌다는 이야기는 어디에 나오느냐? 휘장이 찢어졌어요. 휘장이 찢어지면서 안에 지성소에 있던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가 성전을 통해서 본격화되었어요. 세상으로 다 퍼지는 거에요.
사람들이 이걸 방어로 생각해서 휘장 찢어졌다 우르르 들어가자 천국으로. 대기하고 있다가 주여! 휘장만 찢어지면 우리가 들어갈텐데 휘장만 찢어지면 들어갈텐데. 어찌 그리 꼭 반대로 이야기하는지. 반대로 이야기해요. 들어간다가 아닙니다. 못 들어간다에요. 못 들어간다. 지성소가 어떤 데인데 들어가요. 전에는 지성소가 못 들어간다는 걸 제사장은 알았지요. 그들도 벌벌 떨면서 혹시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방울 들고 들어갔어요. 그 제사장이 누구십니까? 마지막 제사장이. 예수님이 그래서 죽었잖아요 여기서. 이 욕조에서 혼자 들어가서.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9장 46절 (또 다른 안목) 231107b-이근호 목사
그 놀이동산에 워터파크 있듯이 휩쓸리는 겁니다. 예수님 한 분이 들어갔어요. 예수님 한 분이 들어가셨는데 누가 들어가라고 했습니까? 안 그러면 자진해서 저주 받았습니까? 자진해서 저주 받았지요. 예수님의 단독결정이죠. 그럼 예수님이 하시는 심판을 말릴 위인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얼마나 신납니까. 주께서 받으신 그 저주가 심판받는 인간이 있죠. 인간. 그런데 심판 받고 나오면서 뭐가 되느냐 하면은 심판주가 되어버린 거에요. 심판주가 되어버리면 뭐가 성취가 되느냐 하면은 그 누구도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는 것이 성취가 되어버린 거에요.
그럴 때 창세기 3장 23절에 생명나무에서 인간을 추방하는 이유가 생명나무 때문에 그런 거에요. 선악과를 아는 자는 절대로 생명나무를 먹을 수 없다는 생명나무 취지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 생명나무를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을 저주해버리는 겁니다. 인간은 안 따먹으면 될 걸 가지고 괜히 따먹어가지고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차이성, 그 차이성을 확실히 하는데 말려들어가지고 확실하게 저주를 받지요. 피조물이 알 필요없는 걸 가지고. 마귀는 진작 알아가지고 진작 짤리고요.
악마가 왜 생명나무 따먹으라는 말을 왜 안했을까요? 그것은 본인이 해당사항이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기 때문에 그래요. 왜냐하면 악마는 하늘나라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이미 본인은 알아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예수가 우리를 멸하러 오셨지요.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짤린 거에요. 자기 짤리면서 하나님 복수한다는 식으로 하나님이 만든 인간을 인간 방패로 해가지고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식으로 같이 망하자 해가지고 인간을 자기 부하로 삼았지요. 왜냐하면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든 인간을 하나님이 설마 폭격을 할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진짜 인간 따로 있다 해가지고 진짜 하나님의 형상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모든 인간을 주께서는 아낌없이 심판해버리지요. 그러니까 하마스 가자지구에 하마스에 인질로 잡혔잖아요. 그 인질이 자발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이야기해요. 우리 잡힌 거 신경쓰지마 우린 이미 죽었으니까 마음껏 폭격하라 이렇게 이야기해요. 우리 살려주세요 하면 안돼요. 인간은 살려달라 할 자격도 없어요. 모든 인간은 없이 하소서 했으니까. 주님께서 감추어놨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주님에 대해서 아는 바 없어요. 제자들도 스승으로 알았지 심판주로 알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절대로 주님에게 그런 일이 생기면 안됩니다 하고 자기 의견을 성격상 거침없이 이야기했지요.
자, 성전에는 뭐가 있나? 지성소가 있다. 지성소는 어떤 공간이다? 어떤 인간도 들어오면 죽는다. 죽는다. 이 휘장 찢어지면 큰일 나는 거에요. 바깥으로 쏟아지면 큰일 나는 거에요. 그러면 왜 주님 죽으셨을 때 휘장이 찢어졌는가? 그게 바로 뭐냐 하면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46절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다시 말해서 성전은 누구 집이다? 내 집이다. 내 집. 거기 아버지가 계시지요.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가 계신 거에요.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신 거에요. 왜? 자기 집이니까. 자기만의 집이니까.
자기만의 집인데 청소가 필요했던 거에요. 왜냐하면 그 당시 인간들은 뭐냐? 천국의 돌파, 출입구로서 유일하게 믿은 것은 뭐냐? 성전에서 제사 기능이 계속 되게 되면 우리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용서받고 구원받는다. 이게 열왕기상에 나옵니다. 성전 있으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게 되면 모든 죄를 사하겠다 하나님이 약속한 바가 있기 때문에 성전을 믿는 거에요. 그래서 그들은 어떤 의식을 갖고 있느냐 하면은 우리는 여전히 아브라함 자손이며 이 세상에 많은 민족이 있어도 우리만이 유일한 택한 민족이라는 의식에 하자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철저하게 성전을 성전답게 율법대로 지킬려고 애를 썼습니다.
단 지성소에는 못 들어가고. 왜? 들어가면 안 되니까. 그런데 주님 자신이 지성소가 된다는 사실을 생각도 못했지요. 그래서 그들은 계속해서 언젠가 진리가 올 때까지 유보한 거에요. 언젠가 메시아 오게 되면 메시아 기름부은 자 오게 되면 그때는 평화가 온다.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어떻게 오는데? 성전을 완성할 것이다 또는 성전을 정결케 할 것이다 생각한 거에요. 히브리서 10장을 보겠는데요. 10장 20절 보기 전에 17절 18절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라고 분명히 되어있어요.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심으로 단번에 거룩함을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잖아요. 그러고 난 뒤에 19절 2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님의 육체라고 되어있지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 찢어놓은 휘장 그 자체가 주님께서 내가 찢어놓았다. 자 들어와 들어와 이게 아니고 육신 예수님 자체가 우리 안에 들어와버린 셈이에요.
그건 아까 제가 처음 강의 때 이야기했어요.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여기에 도달한다고요. 새벽특송 이야기했지요. 도달하는 거에요. 스스로 말씀을 이루는 그것이 우리에게 도달되는 거에요. 그 도달되는 것을 히브리서 10장 16절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한다”는 거에요. 친히. 주님이 친히 어디까지 들어온다? 우리 마음속까지 들어오는 거에요. 우리 마음속까지. 그분은 스승도 아니요 그분은 심판주요 그리고 그분은 화목제물 구원자가 되심을 어디서? 우리가 가는 게 아니고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거에요. 이것만 생각하면 어렵지 않아요. 쉽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을 때에 우리가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여기 대자연과 함께 있다고 했지요. 대자연. 아까 동영상할 때 로마서 12장할 때 했습니다. 주변의 환경은 뭐로 되어있어요? 시간 플러스 공간이죠. 시간+공간. 인간은 이렇게 되어있어요. 여기서 뭐가 있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의 있음이 확인되는 거에요. 그러면 건물로 된 성전이 있다는 것이 성전 있음으로 이해했거든요. 왜 사람들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성전이 있고 지성소 있고 성전 있는 것을 있다고 봤느냐? 성전이 거기 공간에 점령하고 있고 시간 따라서 유지함을 보고 있다는 거에요. 아니요. 좀 더 깊이 들어가요. 있다고 보이는 것은 그걸 보고 있는 내가 같은 시공간 안에 같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내가 있기 때문에.
그러면 내가 없애는 방법은 뭐냐? 성령이 우리한테 와버리면 성령은 십자가 이후에 성령 오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죽은 존재죠. 죽은 자잖아요. 아까 질문 다시 해봅시다. 왜 예수님은 무덤에서 나왔습니까? 예수님을 무덤에 누가 보냈어요? 인간들이 보냈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무덤은 뭐냐? 인간들의 모든 의견이 거기 집대성된 거에요. 인간세계가 무덤이에요. 인간세계가. 마귀의 세계고 무덤이에요. 우리는 자신만만했습니다. 어떤 인간도 못 벗어난다. 그런데 예수님 마귀 권세 이기고 무덤에서 나와버렸어요. 나온 입장에서 누가 죽었습니까? 죽었다가 살아난 입장에서 볼 때 살아난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 누가 죽은 자가 돼요? 이 세상 모든 인간이 죽은 자가 되지요. 있어도 없는 존재가 되는 거에요.
있어도 없는 존재가 자기가 있다고 우기니까 뭐가 보이느냐 하면은 우리 앞에 성전 있잖아 가 되는 겁니다. 성전 있잖아. 성전이 존재하잖아. 마치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성전 존재하잖아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그들은 이게 성전이 모형인줄 몰라요. 성전이 모형이면 누가 모형이겠어요? 내가 모형인거에요. 내가 환상인거에요. 내가. 누군가 만들어낸 환상이에요. 누군가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 낸 인형 같은 존재, 러시아 인형 같은 존재가 나라는 사실을 누가 나 스스로 그걸 인정하겠습니까. 아무도 인정 못하지요.
본인을 실체로 보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답변을 못하는 거에요. 사람이 왜 죽었다가 부활되지요? 제자들 답변은 “아이 그럴 일 없습니다.” 이게 답변입니까? 답변은 뭡니까? “주님 제가 죽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답변하면 얼마나 쉬워요. 이 쉬운 답을 시험 나오면 아무도 못 맞춰요. 아무도 못 알아맞춰. 주님이 “내가 왜 죽었다가 부활하지?” “제가, 우리들이 죽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이 답변을 못하느냐 말이죠. “그러면 네가 죽어있는걸 모르고 네가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지?” “예 저 살았다고 생각했어요.” “살았다고 생각하니까 너 할 거 뭐냐?” 뭐를 믿으면 구원 받겠느냐 구원받겠다는 그 탐욕과 욕망이 생기는 거에요. 왜? 지금 멀쩡하게 살아있으니까. 억지로 죽일 수 없지 않습니까. 살아있는 것. 어떻게든 더 살아봐야지요. 요양병원가고 그 다음에 천국에 도달해야 될 거 아닙니까.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노래 불러주고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좀 알아야 돼요. 인간의 시공간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우리가 여기에 대자연에 농락당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노래에 이런 것이 있어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10월달 마지막에 부르는 노래에 나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베드로후서 3장과 위배됩니다. 베드로후서 3장은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되 그런 유사한 문장 나오잖아요. 그거 아니에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그 다음에 나에게 뭘 준다고요? 나에게 꿈을 준다는 거에요. 왜? 살아있는 내가 내년에는 잘 될 거야. 희망과 꿈을 제공하지요. 왜? 살아있으니까. 내가 어딜 봐서 거울 보세요 내가 살아있지 죽어있습니까? 내가 죽어있다는 것을 확인할 길이 없어요.
그리고 내가 실제로 있지 내가 여기 허상으로 있다는 그 생각은 추호도 못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복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에요. 그걸 주장하면서 바깥에 있다고 하면 안돼요. 성도는 오히려 예수님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미 성전 안에 있지요. 성전에 들어왔지요. 그러면 심판 욕조에 와서 저주를 이제는 끝까지 밀어붙이는 그 안목과 동일한 안목으로 누구를 본다? 나 자신을 보고 타인을 볼 수 있는 안목이 발생된 거에요. 전에는 내 쪽에서 천국 바라보다가 이미 천국 안에 있으면서 십자가 안에 있으면서 그때 나를 다시 보는 거에요. 몸부림치는 나를 다시 보게 되면 우리는 진짜 계시의 말씀대로 에서도 알고 야곱도 알고 둘 다를 아는 거에요. 야곱도 알고 이스라엘도 알고 둘 다를 알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 앞에 살고자하는 하나님과 화목케하는 그 시도가 이게 다 쓰잘데기 없다는 것을 이미 화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면서 아 내가 헛짓했구나 발견하는 안목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성도는 어떻게 사는가?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꾸면서 살게 되지요. 왜? 헛꿈인줄 알기 때문에. 이게 새 사람 됐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고 본격화돼요. 본격화돼요. 왜? 주님은 저주 주시고 지옥도 만드시고 천국을 만드셨기 때문에 지옥이 뭔가를 아는 자에게만 짝을 이루어서 천국도 알기 때문에 그래요.
또는 세상 살다보면 눈물도 많이 흘려요. 남자는 보통 세 번 운다 하지요. 남자는 세 번 울어야 된다. 첫 번째 우는 것은 첫 번째 사기당할 때 울고 두 번째 우는 것은 사기 당한 인간이 또 사기당하면 울고 세 번째 우는 것은 사기 당하고 사기 당하고 또 사기 당하면 세 번 울지요. 나라 잃고 부모 잃고 뭐 그럴 때 우는 게 아니고. 국가를 잃을 때 우는 게 아니고. 그러나 인간은 울어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잃을 때 비로소 인간은 진정 웁니다. 나를 잃어버릴 때. 거기에 대한 노래가 있어요. 오늘 두 번째 등장하는 노래. 가사를 한번 볼 테니까 진리 아닙니다.
‘사랑한다 말 한마디 못하지만 그대를 사랑하오 그대 위해 기도하진 못하지만 그대를 사랑하오’ 벌써 가사가 이상하지요.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하면 되는데 사랑한다 말 한마디 못하지만 그대를 사랑하오. 사랑하면 기도하면 되는데 기도는 안 해요. 그대 위해 기도하진 못하지만 그대를 사랑하오. 그 이유가 뭐냐? 그 다음에 나와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그대를 사랑하오. 안 돌아오는데 왜 사랑하지요? 그대를 사랑했던 그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이 사람 그냥 사랑하면 되지 왜 우느냐. 그 다음 구절에 나와요. ‘사랑이란 얼마나 참아야 하는지’
자, 이 대중가요 없었으면 복음 이야기 못할 뻔했다. 자, 여러분 묻습니다. 복음이란 1번 참는 것이다. 2번 주님의 희생이다. 몇 번입니까? 이거는 다 압니다. 내가 참으면 구원받습니까? 참으면 구원받습니까? 주님의 희생으로 구원받습니까? 주님의 희생이죠. 내가 참는 것은 자기에 대한 집착이고 오기에요. 끝까지 자기 포기 못하는 겁니다. 참다 참다 못 참으면 나중에 자살하잖아요. 자살이라는 극단까지 안 나가더라도 비슷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은 ‘나의 사랑 그대여 내 마음 아나요 가슴속을 파고드는 그리움이 눈물 되어 흘러도’ 여기 눈물 나오네요. 가슴속에 파고드는 그리움이. I MISSING YOU. 가슴속에 파고드는 그리움이 나한테는 뭐로 응어리져서 나온다? 아침에 겨울에 찬 수증기가 아침 되면 뭘로 맺히지요? 이슬 맺히지요. 우리 마음에 이슬은 내 마음에 그리움이었답니다. 그리움. 밤새 그리움이 어느새 안경 썼으면 안경 너머로 물이 쭉 나오지요. 번져 나와요 눈물이 저절로. ‘가슴속을 파고드는 그리움이 눈물 되어 흘러도 내 모습 그대에게 잊혀져도 그대를 사랑하오.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대를 사랑하오’ 유심초 노래, 가사에 이런 복음이 담겨 있답니다.
자, 그러면 묻습니다 여러분 누구를 그리워합니까? 다른 말로 여러분 누구를 사랑합니까? 나 자신이죠. 내 뜻대로 안되니까 눈물을 보이는 거에요. 내 뜻대로 안되니까. 자식이 내 말대로 안 되니까 우는 거에요. 아파서. 하마스 난민들 슬퍼서 운다? 안 울어요. 그러나 내 자식이 아프면 울어요. 왜 그렇습니까? 그들하고 내가 별 관계가 없기 때문에. 나는 나를 놓지를 못하고 깨부수지도 못하고 나를 견고히 해야 돼요. 나를 사투를 벌리면서 나를 지키는 것이 나의 임무도 책무라고 여기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이걸 보고 우리는 이런 나를 보고 그렇게 기뻐하는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은 이미 성령을 받은 자만 기뻐하죠. 저게 나였어. 저 고집스러운 나였어. 내가 나를 사랑해서 내가 나를 잊지 못해서 기도한다고 교회 찾았는데 주께서는 그 기도 집을 내 집이야 하고 청소를 해버리는 거에요.
자, 추방입니까? 영접입니까? 나를 추방해주신 분에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나한테 떼어질 수 없는 것. 나는 나의 지독한 내 사랑을 내 힘으로 못 떼는데 이미 떼시고 주께서 그것을 지적하지요. 내가 와서 떼어냈다고. 대장 내시경을 했는데 나중에 검사 나왔어요. 검사하신 의사 선생님이 우리 부부한테 상당히 복음적인 이야기를 했어요. 본인은 그걸 못 느꼈겠지만 용종이 씨 뿌리듯이 있다는 거에요. 씨 뿌리듯이. 갑자기 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비유. 7개를 뗐다는데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닙니다. 그냥 용종입니다. 조선시대 같으면 그냥 넘어갈 일인데 문제가 이 저주 받은 세상이 되가지고 문제거리도 아닌데 이게 용종을 뗐다고 왜 대장까지 들여다보냐 이 말이죠.
그래서 대장내시경 한다니까 우리 교회 믿음 좋은 어떤 집사님이 아내 보고 한 소리를 했어요. 아니 성도라면 그런 검사를 왜 합니까?! 감사하면 되지. 죽어도 감사하면 되지 왜 합니까. 제 아내가 화가 나가지고 그때 무슨 말을 할지 몰랐대요. 나보고 이야기하지. 내가 현장에 있었으면 죽을라고 했습니다!! 됐습니까!! 뭘 하라 하지말라가 성립이 안돼요. 하라 하지마라가 성립이. 그러다 죽겠지 뭐. 그러다 죽겠지. 나 담배 피우다가 담배 끊었습니다. 잘했지요? 뭘 잘했어요. 담배 끊다 죽겠지요. 술 끊었습니다. 술 끊고 죽겠지요. 뭘 끊었다고 해서 전혀 상관없어요. 오히려 질문 대상이 되지요. 왜 끊었냐? 담배 피우는 거 왜 끊었어? 끊을 이유가 없어. 뭐지 이거. 정답은 주께서 끊게 하셨습니다. 너는? 죽어도 안 끊을려고 했는데.
이게 바로 아까 한 분이 욕조에 들어가신 분은 단 한 분이라서 어떤 누구도 그 분이 하신 일을 말릴 수가 없다는 것. 내가 뭘 하고 안 하고가 그 분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7장 4절 한번 보겠습니다. 오늘 여러분 참 좋은 거 배웠어요. 너 왜 그런 짓하느냐? 죽을라고 했다 왜! 7장 4절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그 다음에 무슨 말? 거짓말을 믿지 말라. 이게 왜 거짓말입니까? 여호와의 전이 있는데 왜 거짓말입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기를 모독한다는 거에요. 살아있으면서 열심 내고자 하는 모든 것을 일거에 모독한 죄로 예수님은 죽으신 거에요. 그런데 그 죽음이 살아있는 거에요.
자, 이제부터 진짜 어려운 게 남아있어서 제가 뜸들이고 있는 중입니다. 어려운거 남았기 때문에 한번 정리하고 들어갑시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 것은 모든 인간의 인간관계는 허망한 것이다. 인간관계. 아까 너희들 아이들이 땅에 내리친다 했거든요. 완전히 땅에 꼴아박는다 했지요. 자, 그럼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입니다. 인간의 관계망이 포위된 적군 앞에서는 어떠한 자애나 자비도 없지요. 그런데 누가 이렇게 했습니까. 우리 주님이 그렇게 했지요. 어떤 주님? 친히 성전에 들어가신 주님이 그렇게 한 거에요. 청소하는 이유는 이게 아버지하고 나하고 해결할 문제가 있기 때문에.
너희들 방식은 성전에서 제사하는 방식이라면 그거는 모형에 불과한 거에요. 문제는 그들이 드린 양이나 염소가 더 이상 재물이, 치워라 안 받습니다. 주께서 받지를 않아요. 그들 제사장 안 받습니다. 그럼 제사장 있다? 없다? 없다. 제물 있다 없다? 없어요. 그들은 성전은 성전이 아니고 다 멸망해야 될 것밖에 없지요. 없다의 3종 세트. 없어요. 그럼 구원, 그들 방식대로 생각한 천국 가는 방식은 있다 없다? 없지요. 그럼 막혀있는 거에요. 주님에 의해서 막혀 있다는 말은 막힐만해서 막혔다는 거에요. 막히기만 했습니까?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주어지는데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그 막힌 것을 성령을 통해서 직접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언약이 우리 안에 들어와버려요.
우리 안에 들어와버리면 뭐가 되어버리느냐 하면은 무덤 속에 죽었다로 우리 안에 들어있고 죽음에서 부활한 것도 성공, 구원 성공이죠. 성공도 우리 안에 들어와버린 거에요. 들어와버리니까 우리 안에 성도는 뭐냐? 무엇이 실패였고 무엇이 성공인가를 예수님 안목에서 같이 공감하는 그것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평화, 화목이 되는 겁니다. 이게 평화의 조건이고 평화의 계약이에요. 여러분 여기까지 아시겠지요? 그래서 다시 한번 적어보면 인위적 관계는 전부 다 뭐냐 하면은 오류다. 인간적인 관계는 오류에요. 그러면 이 오류가 어디서 생기느냐. 내가 있다, 내가 여기 있다 하니까 성전이 거기 있네. 그럼 내가 있는데 성전은 율법대로 성전 있으니까 그 성전을 존중해주면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아 내가 나중에 천국에도 있겠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게 바로 종교잖아요 종교. 종교지요.
현재 내가 있는 이것을 교회를 통해서 천국 간다. 내가 여기 있듯이 천국 가도 나 있을 것이다. 이거 장례식장에서 목사들이 얼마나 많이 이야기했던 거에요. 지금은 여러분들이 힘들지만 나중에 맨션아파트가 준비되어있다. 그런 이야기들 많이 했잖아요.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찬송 부르면서 있단 말이죠. 진짜 그 찬송 부르면 눈물 나요. 내가 그리워지니까. 1절만 들어봅시다. 이 노래 듣고 눈물 안 흘리면 진짜 비정한 사람이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훈계로써 인도하며 도와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 때까지 계심 바라네’ 2절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간 데마다 보호하며 양식 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 때까지 계심 바라네’
자, 이래도 죄 지을 거에요? 인간은 아무리 복음 알아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 왜 아프냐? 그 사람이 내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 전체가 나였기 때문에 내가 찢어지는 거에요. 내가 모르는 사람이면 이렇게 눈물이 안 나요. 그 사람이 있어야 내가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강제로 찢어지는 거에요. 이것을 그 당시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 죽는다고 우는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만 인간적으로 안됐지요. 그러니까 아이고 잘 죽었다 해서 가표를 던진 거에요. 잘 죽었다. 우신 분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은 예수님 본인이 울었지요. 사랑하는 예루살렘이 전혀 못 알아봤으니까. 그런데 제가 2절까지 들은 이유가 사실 있어요. 뭐냐 하면은 1절까지는 약간 덜 슬펐어요. 왜? 여자만 부르기 때문에. 2절 가사에 남자 부를 때는 그 근엄한 남자가 부를 때는 울음이 확 올라오는 거에요. 가락도 얼마나 애절한지요. 그게 바로 어려운 점입니다.
모든 있음이거든요. 있음. 있음을 창세기 3장에 보면 뭐냐 하면은 남성 있음이에요. 남성 있음. 이 세상의 모든 여성도 남성에 복속이 되기 때문에 있다는 것은 남성이 있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갔을 때는 예수님은 남성이 아니고 누구의 아들로 들어가요. 여자의 후손으로 들어가요. 남성은 있음. 남성의 반대는 여성. 여성은 뭐? 없음이 돼요. 없음. 현재 있는 성전은 가짜에요. 가짜인데 주님이 여자의 후손으로서 성전에 들어감으로서 비로소 성전은 이제는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고 그분이 들어갔던 단독이죠. 그분이 죽은데서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세계가 되는 거에요.
그것이 뭐냐? 기존의 모든 인간은 들어갈 자격이 안 되는데 예수님만이 남성 없이 태어난 여자의 후손입니다. 여자가 마리아라는 뜻이 아니에요. 없음의 후손이에요. 이 땅의 혈육과 무관한 분의 등장이에요. 정말 신기한 것은 부활도 신기하지만 남성 없이 태어난 것도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단순히 우리가 신기하다고 끝날 것이 아니고 그것은 왜 그렇게 남성으로 태어나는가? 모든 남성에서 태어난 모든 것을 저주하기 위해서. 부정하기 위해서 태어난거에요. 여성은 남성에게 복속됐다는 것이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나옵니다. 교회 참석한 사람들이 보는 게 마태복음이잖아요. 마태복음 1장 한번 보세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재미 하나도 없어요. 그것도 말도 안돼요. 남자가 남자를 낳았어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지요. 남자가 남자를 낳아요. 이거는 생물적인 족보가 아니지요. 다른 족보지요.
그런데 거기서 특이현상이 일어나요. 뭐냐 하면은 여성이 끼어들지 않는데 여성이 끼어드는 대목이 나와요. 그거는 남성족보가 끼어든 여성족보에 메시아적 역할 때문에 족보가 다른 족보로 기차선로가 바뀐 거에요. 지옥의 선로가 천국으로 바뀔 때 여자가 나타나요. 라합으로 말미암아 룻으로 말미암아 나중에 마리아로 말미암아 네 번 들어가요. 들어갈 때마다 방향이 조금씩 조금씩 틀어지는 겁니다. 천국으로. 그러면 천국은 어딘데? 세상 밖에? 아니요. 세상 안에 만든 천국이에요. 세상 안에 천국을 만들었어요. 하늘에 성전 있기 전에 세상 안에 성전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가 곧 성전이에요. 성전은 십자가 있는 곳이 성전이에요.
예수님 본인이 이 세상이고 본인이 제물이고 본인이 지성소입니다. 그래서 뭐냐? 더 어렵게 말해서 예수님 자신이 새로운 시공간, 어떤 공간? 없는 공간. 없는 공간, 이 모든 있음의 세계에서 사실은 환상인데 있음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있음이 망상이기 때문에 없음으로만 여기서 천국을 소개하는 겁니다. 이걸 주님께서 감추었다고 하는 거에요. 숨겨놓았다고 하는 겁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창세전에 있는 하나님의 비밀이 이제는 공개되었다고 이야기하지요. 그 말이 얼마나 어려워요. 비밀은 아는데 공개해놓았다는데 어디? 공개해놨다는데 어디 공개했는데? 공개했다는데 없어요. 따지겠지요. 공개했으면 보여야 되지 않습니까.
주께서 거기에 준비된 멘트가 있습니다. 본다고 하니 소경이다. 네가 지금 본다고 하는 게 네가 소경이다. 네 오류를 생각 안 한다. 모든 관계는 뭐다? 오류다. 아빠 엄마 관계 가족 관계. 부부 관계 다 오류에요. 오은영 박사는 이걸 몰라요. 정신과 의사는. 자꾸 해결할려고 하는데 그건 화목도 아니고 평화도 아니고 치료도 아니에요. 치료는 뭐냐? 내가 있는 게 아니고 내 안에 주님이 있고 나는 없는 채로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게 이게 치료된 겁니다. 교회 교인 수 헤아리지 마세요. 없는 귀신 세서 뭐할 건데. 귀신 하나, 귀신 둘. 여기 귀신 12명 왔습니까. 귀신 숫자 헤아리는 게 아닙니다. 두 세 사람이 나와 함께 있으면 그게 교회에요. 복음과 함께 있으면. 돈이 안 되서 문제지. 남성은 다 나가. 남성은 다 나가. 이겁니다.
진짜 말씀이 있는 교회에서는 남성은 나가. 남성은 다 나가라고? 그럼 나도 나가야 되겠네. 아 참 나는 남성도 있고 여성도 있지 그럼 앉아야 되겠네. 남성 여성 둘 다가 있는 거에요. 남성적 요소와 여성적 요소. 그래서 제가 지난 낮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반석 이야기했지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 자,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모래가 뭐라고 했습니까? 나의 기억이죠. 그래서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행함이 내 기억 때문에 나온 거에요. 전에 여러 번 했지만 이 기억에 대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설명 간단하게 돼요.
과거, 현재, 점점 미래가 되겠지요. 보통 인간은 이렇잖아요. 기억은 뭐냐 하면은 이쪽 과거가 스텝, 계단, 층, 과거1. 이쪽 과거는 이 밑에 과거2. 이 밑에는 과거3가 있는 거에요. 따라서 이게 평소에 말짱할 때는 항상 과거1이 나와요. 자주 만나는 사람은 이제 딱 보면 알아요. 그런데 가끔 온 사람은 과거2,3는 가만 있어보자 이렇게 돼요. 그러면 이쪽에서 과거2가 내가 왔잖아. 아~ 이렇게 되는 거에요. 잠복되어 있는 층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꿈속에는 이건 눈치코치도 없이 과거4, 과거5가 막 튀어나와요. 꿈속에서. 이 꿈에 나타나죠. 나이가 지금 70넘었는데 꿈에 자기 얼굴이 28살이에요. 이게 말이 돼요? 특히 남자들, 군대 갔다 온 남자는 나이 50, 60이 되도 계속 나와. 거기서 벌 받고 있어. 빨리 제대해야 되는데. 꿈속에서 빨리 제대해야 되는데.
압축되어있는데 꿈은 압축이라는 말은 그만큼 강화되어있다. 딴딴해져있다. 뭐 중심으로 딴딴해져있느냐 하면은 나의 자유성, 나의 자유성이 침해받을 때 인간은 가장 독하게 기억되게 마련이에요. 나의 나 됨을 침해받을 때. 공격받을 때 오래 기억돼요. 뭐 쿨하게 한잔하고 잊자. 잊을 수가 없습니다. 잊을 수가 없어요. 그게 기억에 많이 박혀있어요. 더 박히면 스트레스 받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위에는 껍데기에 불과하고 사실 인간의 속에 있는 이런 기억들이 층층으로 있단 말이죠. 이런 기억들이. 그래서 어떤 것은 이것이 의식되죠. 억지로 하면 의식되지요. 프로이트는 이걸 전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의식은 안 되는데 이상하게 충동으로 나오는걸 가지고 프로이트는 이걸 무의식이라고 해요.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내리느냐 하면은 나의 말과 나의 행동은 의식을 빙자한 무의식의 명령이다. 나는 과거가 나를 지시하는 거에요. 그러면 내 과거 때 내가 그런 행동한 것은 내가 결정했습니까? 그 과거 이전에 있었던 과거가 결정하는 거에요? 이전에 있던 그 과거의 이 시점에서 또 과거층이 또 무의식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 전에 과거 또 있겠지요. 결국은 인간은 뭐냐 하면은 나는 항상 붕 떠있는 상태고 처음부터 있었던 환경이라는 삶의 타인의 의해서 영향을 받지요. 그러면 그 타인은 엄마 아빠죠. 엄마 아빠가 나한테 이야기해줄 때에 한번 이야기해봅시다. 의식적으로 했겠습니까? 엄마 아빠의 무의식으로 이야기했겠어요?
방금 이야기했잖아요. 엄마 아빠의 무의식적으로 했겠지요. 그 엄마 아빠의 무의식은 엄마가 유치원 다닐 때 무의식이 엄마한테 작용해서 그 작용이 딸인 나에게 아들인 나에게 작용했다 이 말이죠. 그럼 엄마 아빠의 무의식은 누가 작용했습니까? 할아버지겠지요. 모든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한 통 속이죠. 아담은 누구한테 지시받습니까? 마귀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마귀한테 지시받지요. 어떤 행동을 하든. 내게 말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속에 괴물이 나를 통해서 말한다. 라캉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럼 그렇게 이야기했으면 해결점이 있어야 되는데 해결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다만 이 사실만 알면 정신병에서는 벗어나겠지. 그럼 정신병은 뭐냐? 자신을 모르고 착각을 하는 거에요. 왜 내가 행동하고 내가 결정하는데 왜 세상은 내 뜻대로 안 되는가. 아! 스트레스 받는다. 거기에 대한 치료는 뭐냐? 너는 너가 아니었다. 그게 치료방법이에요.
일단 치료방법은 뭡니까? 하고 싶은 말 다하세요. 이야기 다 하고. 정신과 선생은 그냥 듣기만 하면서 듣기만 하고 그냥 듣기만 하면 돈 값 못한다 싶어서 정신 안정제 줘가지고 보내면서 그렇게 치료시키는 거에요. 쉽게 말해서 당신 못 고치거든 나한테 이야기하지 말고 따지지 말고 느그 아버지한테 이야기해라. 너 친구. 너 아버지한테 따져라. 아버지 왜 그러셨습니까. 나한테 따지지 말고 돌아가신 네 할아버지한테 따져라. 이게 세상에서 말한 정답입니다. 이게 뭐냐? 인간은 아담의 다면체. 아담의 다면체.
아담이 크게 잘못한 것은 자기가 흙인데도 불구하고 있다고 주장한 거에요. 그 성질을 그대로 우리가 받았어요. 마귀에 의해서. 그냥 흙이 되어가는데 그냥 마냥 있다고 여기는 거에요. 나이 들어도 20대 그대로 있다고 하는 거에요. 몸은 거절을 못하는데 온천지 다 아프고 하지요. 나이 들면 눈꺼풀 어떻게 되요? 내려앉지요. 눈이 막 찌르고 난리도 아니지요. 모든 게. 쌍꺼풀 수술해서 올리고 해도 보톡스 해도 보톡스도 나중에 물처럼 녹아내려서 이거는 흉측하게 되지요. 진짜 좀 고치고 싶다. 누구 짓이다? 아담의 짓입니다. 아담의 짓이에요. 이런 것을 한꺼번에 아시는 분이 누구냐? 우리 주님이 아시기 때문에 해결해줄게. 대신 죽고 같이 살자. 이게 주님의 해결책입니다.
주께서 찾아오셔서 누가복음 이 말씀을 가지고 찾아옵니다. 내가 너와 같이 한 팀을 이루어서 너는 죄인 역할, 나는 죄를 용서하는 역할, 너 때문에 죽은 희생물. 참지 말고 희생물로 살아라. 성경에서 참고 기다리라는 말씀도 나와요. 그건 뭐냐 하면은 기뻐하라는 것을 반드시 깔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참으니까 이런 뜻이 아니고 참으라는 말은 뭐냐? 더 기쁜 소식이 속에 있는데 그거 그 시시한 거 못 참을게 뭐가 있느냐. 그것을 그냥 참는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귀신같은 인간들, 인간관계들 다 오다가다 만난 귀신들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인간관계 부부관계 자식관계 그거 믿지 마세요. 살아있는 것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허상으로 출몰될 뿐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 단독으로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거들고 끼어들 일이 아닌데 주제넘게 우리가 이거 달라하지 않게 해주시고 이것 주셨습니다 저것 주셨습니다 할 수 있는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