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강-YouTube강의(경험의 충돌 역대하 30:24)20231121-이 근호 목사
제452강, ‘경험의 충돌’. 하나님 살아계시면 우리가 이 땅에 있고,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은 바로 경험적으로 실증적으로 체험되면 참 좋겠죠. 양쪽 다 살아있으니까. 하나님은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르고 우리만 살아있다면 우리가 용쓰는 것밖에 안되죠.
실제로 살아계시고 우리도 지금 실제로 살아있고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에서 필히 하나님과의 신성한 경험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란 말이죠. 그럼 그 경험이 뭐냐 하는 거예요. 어떤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의 신성한 경험, 진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라고 그걸 어떻게 단정 지을 수 있느냐? 뭐라고 확정지을 수 있느냐?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역대하 30장 21절부터 27절까지 제법 긴데요. 길어도 내용은 이거에요. 히스기야 왕 때에 하나님의 율법대로 무교절을 지켰습니다, 일주일동안. 유월절 그 다음부터 일주일 지키는 것을 무교절이라고 합니다. 빵을 먹기 좋도록 부드럽게 하는 누룩을 집어넣지 않고 일부러 빵을 딱딱하게 만들어서 우리가 애굽에 있던 그 시절, 애굽에서 어린 양이 고난 받던 그 시절을 먹는 빵을 통해서 경험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까 제가 처음에 얘기했잖아요. 경험. 오늘 452강 제목이 ‘경험의 충돌’이에요. 하나님 계시고 우리 있다. 그런데 둘 다 살아있는 주체가 만났다. 필히 경험이 있다면 그 경험, 진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어떻게 규정지을 수 있는가? 그래, 저 경험은 진짜 경험이야, 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기준이 뭐냐?
유월절 그 다음에 무교절이니까 합해서 8일, 무교절동안 그들은 딱딱한 음식을 먹은 거예요. 그러면 이 음식, 빵을 먹으면서 맛있게 먹는 빵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게 먹는 그 빵을 ‘고난의 떡’이라 하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과 인간, 성도의 만남은 중간에 어떤 경험이냐 하면 필히 고난이 들어가 있는 경험이어야 그게 맞습니다. 고난이 들어가야 돼요.
그 고난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어린 양의 수난에 같이 동참하는 의미에서의 고난입니다. 어린 양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를 자기 몸으로 이전시키는 경험, 그 경험을 무교절을 통해 하게 하셨어요.
그래서 역대하 30장 21절부터 보면 무교절을 크게 지켰다고 이야기하고 히스기야가 전체 레위지파를 다 동원시켰습니다. 23절에 보면 칠일을 지켰는데 24절에 칠 일을 지키면서 “수송아지 일천과 양 칠천을 회중에게 주었고 방백들은 수송아지 일천과 양 일만을 회중에게 주었으며 성결케 한 제사장도 많았는지라”
그래서 온 나라가 무교절 지키는 일에 전념을 한 거예요. 전념을 할 때 백성들은 굉장히 기뻐하고 히스기야 왕도 기뻐했겠죠. 하지만 자기들끼리 기뻐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하나님도 같이 기뻐해야 되겠죠. 같이 기뻐해야 ‘네 하는 행위에 대해서 내가 인정하마. 내가 너희들 희생 받았다.’가 되는 겁니다. 율법을 지킨 게 되죠.
그래서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26절, 27절 보게 되면 “예루살렘에 큰 희락(기쁨)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희락(기쁨)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 전무후무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그 기쁨,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이죠.
27절, “그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였으니 그 소리가 들으신바 되고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더라” 아, 이 정도 경험이라면 보통 영적 경험 아니고 최고의 영적 경험을 한 거예요. 그러면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제목이 ‘경험의 충돌’이에요. 그들은 많이 기뻐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셨대. 됐어. 이제 우리는 부러울 거 없어.’ 그렇게 했는데 32장에 가면 여기 앗수르에 산헤립이라는 왕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예루살렘 외에 다른 산성들은 미리 다 점령해놓고 이제 마지막 남은 예루살렘을 칭칭 감아서 포위하면서 굶어죽기를, 항복을 강요했어요.
그때 앗수르 왕 산헤립이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예루살렘아 너희들을 포위한 게 누구냐? 지금 와서 너희들이 여호와를 의뢰하겠다고? 그때 히스기야가 너희들을 꾀어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앗수르 왕의 손에게 건져내시리라 하거니와 너희가 벌써 주리고 목말라 죽게 되었잖아.”(32:10-11) 여호와가 너희를 후원한다는 말을 믿지 말라. “나와 내 열조가 이방 모든 백성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열방의 신들이 능히 그 땅을 나의 손에서 건져낼 수 있었느냐”(32:13)
이 앗수르 군대가 가는 곳에 가는 족족 나름대로의 하나님을 믿는 그런 하나님, 하나님들이 있었는데 어느 하나님이 이 앗수르의 군대로부터 실질적으로 너희들을 건져낼 신이 있었느냐? 없다는 겁니다. 이게 누구 경험이냐? 산헤립의 경험이에요. 경험의 충돌입니다.
그다음 14절, “나의 열조가 진멸한 열국의 그 모든 신 중에 누가 능히 그 백성을 내 손에서 건져내었기에 너희 하나님이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15절, “그런즉 이와 같이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꾀임을 받지 말라 저를 믿지도 말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은 없다,라고 엄포만 한 게 아니고 예루살렘을 완전히 실질적으로 포위했어요.
그럼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보세요. 아까 역대하 30장에서 예루살렘이 무교절 지킬 때 하나님이 응답하셨죠. 멋진 경험이었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준다.’ 참 좋은 경험,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경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 적들이 와서 그 기뻐하는 예루살렘을 포위하면서 지금 곧 다들 굶어죽을 판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면 이 경험은 무슨 경험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괜찮은 좋은 경험, ‘제사드릴 때 응답하고 기뻐했다.’ 이 경험만 주시면 되지, 한참 기뻐하고 있는데 초를 쳐도 이게 보통 초를 치는 게 아니에요. 앞에 있는 기쁨을 완전히 무색하게 만들고… 그것도 기쁨이냐? 현실을 봐.
자꾸 세상이 우리보고 정신 차리라고 촉구를 해요. 네가 교회 가서 새벽기도 하고 은혜 받았다고? 아이고 참, 현실을 똑똑히 봐. 현실을 똑똑히 보라고. 하나님의 은혜 받아가지고 신학교 원서 냈다. 기쁩니다. 합격했다. 기쁘다. 수능 얼마 받았는데? 현실을 봐. 현실을.
실제로 돌아가는 이 현실, 그리고 실제로 내 아름다운 미래, 이것이 어떻게 된다고요? 충돌되죠. 그 충돌을 어떻게 여러분들이 하나로 뭉치겠습니까? 제가 아까 이야기했죠. 진짜 하나님과 인간의 경험 속에는 뭐가 주어진다 했어요? 고난이죠. 고난이란 말은 인간이 은근히 기대하는 괜찮은 경험, 괜찮은 소망을 완전히 묵살해버리는, 초치는 경험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무참하게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인간에게 배척당했잖아요. 우리는 그 경험을, 괜찮은 경험 있으면 그 경험이 나한테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착각들을 하고 있어요. 내가 하는 계획대로 잘 될 때 우리는 이걸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어요. ‘역시 하나님은 우리 편이고 내 갈 길을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신다.’ 혼자 아주 깨춤을 추고 있는데, 내 뜻을 좌절시키고 내 뜻을 가로막고 ‘그것은 기껏 네 개꿈이야.’ 라고 윽박지르고 우리를 웃음거리 만드는 그 경험, 그 경험을 우리는 놓치면 안돼요.
우리는 그 경험마저 진짜 하나님이 주신 경험인 것을 받아줘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아 내가 혼자 깨춤 추고 혼자 착각해가지고 세상 잘 돌아간다,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우겼던 그것이 얼마나 망상에 불과한지를…
그리고 이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산헤립, 앗수르를 통해 그들은 이제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그 꿈을 깬 거예요. 히스기야가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는 꿈을 깬 거예요. 그 꿈을 깨니까 하나님께서 십팔만 오천 명,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하루 아침에 다 죽여버렸습니다. (왕하 19:35)
이건 상상도 못한 거예요. 그럼 그 군사가 물러간 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고 하나님의 경험을 안다는 그 공로입니까, 아니면 일방적인 하나님의 조치였어요? 일방적인 하나님의 조치였습니다.
우리는 내가 은근히 기대하는,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경험이 무산되지 아니하면 진짜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심이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해요. 앞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