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이 여러분이 그 이야기 다 아시지요.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데 세 사람이 지나갔잖아요.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 도와줬다. 왜 이렇게 이야기가 되지 않고, 앞에 제사장 그냥 패스했지요. 레위지파, 요새로 하면 집사지요. 목사 지나가고 집사 그냥 지나갔어요. 이 이야기를 거기다가 왜 배치를 하느냐 이 말이에요. 그 이야기가 왜 배치를 하느냐 하면 지금 사마리아사람. 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주제넘게 자기가 끼어들 자리도 아닌데 끼어버린 거예요. 끼일 자도 아닌데.
그래서 “사마리아사람처럼 우리가 남을 도와주세.” 라는 교훈은 거기에서 나오면 안 돼요. 어려운 사람 도와주자. 어려운 사람이 이렇게 했으니 너도 자비를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주의 말씀 듣고 자비를 베풀 자를 찾으면 안돼요. 왜냐하면 사마리아 사람 자체가 그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줄 때에 내가 자비를 베풀 사람이 아님을 본인이 알기 때문에 도와준 거예요. 내가 자비를 베풀 그런 잽이 못 되고, 그런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알고 도와주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과 자기를 동격화시키는 거예요. 강도 맞은 거예요. 법적으로 하면 강도 잡아라! 되잖아요. 그러나 그 이후에 강도가 나타나지 않아요. 희한하게. 나쁜 강도가 나타나지 않아요. 피해 입은 사람과 피해 입지 않은 사람만 있을 뿐이에요.
자,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해서 세상은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있잖아요. 주님은 이 2항을 뭘로 바꾸느냐 하면, 피해 입은 자와 피해 입은 자를 도와주는 자로 이 구조를 이렇게 바꿔버려요. 그러면 선한 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피해 입은 자를 도와주는 자만 존재해요. 그러면 피해 입은 자를 도와주는 이게 예수님께서는 자비라고 한다면 그러면 자비는 무엇이 먼저 등장해야 자비가 등장해요? 피해 입은 자가 등장해야 자비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나 모든 인간은 본인이 피해자이고 싶지를 않아요. 피해자 되고 싶지를 않습니다. 내가 뭐가 못나서 이렇게 지질이 못난 피해자 노릇을 해? 나 그렇게 어리벙벙한 인간 되기 싫어. 이게 모든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 땅에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말씀이 왜 등장했느냐 하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이 등장하면서 그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율법을 지킬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인간에게는 이웃을 두지를 않습니다. 지 이용물이지. 이웃이 없어요. 자기가 특수자인데 무슨 이웃이 있습니까. 자기가 특수자인데. 그 이야기는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처럼 될 사람은 있다? 없다? 없다. 그게 예수님의 모든 말씀입니다.
말씀을 던져놓고 나처럼 지킬 사람 아무도 없다. 그래서 너희들은 전부 다 저주받아 마땅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너희 배후에는 죄가 있고, 너는 죄의 매개자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