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복음과 다른 복음

아빠와 함께 2023. 6. 27. 08:51

2023년 여름 수련회 교재

복음과 다른 복음

-갈라디아 속의 그리스도-

Ⅰ. 서론

1. 나와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살고, 어쩔 수 없는 방향으로 한데 몰리고 있다. 같이 나락에 빠져도 외롭지는 않다. ‘우리’ 는 ‘나’ 들의 합이 아니라 나의 단념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다. 우리는 ‘나들’ 의 집합체라 기보다 나임을 포기하고 넘겨진 나의 전달들을 합한 것이다.

버스를 기다리거나 신문을 읽거나 신호등을 보고 멈춰서는 등 산업 문명에 특유한 대부분의 행동을 수행할 때, 나는 혼자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상황에서 다른 모든 사람이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따름이며, 이것은 내적 동일성인데, 나는 자신을 타인이나 타자로 만들며 나의 행동 양식을 타인의 행동 양식에 의도적으로 맞추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존재 양식이 지니는 존재론적 아이러니는 내가 나 자신과 나의 행동을 외부 타인의 존재에 맞추고 있는 동안 다른 모든 사람도 나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계열성 seriality 에서 (즉 개개인이 하나의 ‘집단’ 으로 통합되지 않고 ‘계열체’ 로 배열되어 있을 때-사회적 줄 서기-) 타자에 대한 나의 기본관계는 고립과 함께 다른 모든 사람과의 깊은 획일성을 함축하는 통계적 익명성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성질의 것이다.

일단 계열적 상황에 처한 개인들의 무력함을 받아드릴 때 진정한 집단을 형성하려는 행동 동기는 새로운 형태의 통합과 결속을 통해 자율성을 회복하고 분산에 대응하려는 데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집단은 항상 계열성의 잔해 위에 출현하며 역사란 진정한 집단이 존재하는 시기와 장기간의 계열적 분산 사이에 존재하는 영원한 진자운동으로 이해하거나, 또는 다양한 발전단계에 있는 집단과 그들을 둘러싼 다수의 계열적 개인들 사이의 복합적 공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약의 연속성은 일종의 죄악이 세대 간에 전승되며 현재의 개인 책임이 과거의 모든 계급 책임의 무게로 강화되는 수단이기도 하다. 서약 개념과 더불어 초기에 융합 중인 집단구조에 관한 기술은 완결된다. 집단과 계열체의 구분은 이제 분명해졌다. 계열체에서는 아무도 중심이 아니며, 중심은 항상 누구에게나 다른 곳에 존재한다. 반면에 집단에서는 모든 사람이 중심이며 중심은 모든 곳에 집단의 구성원이 현존하는 곳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집단형성을 통해 구성원들은 자신의 상실된 존재와 세계 안에서의 계열적·개인적 분산을 만회한다. 집단형성과 서약은 ‘인간성의 시작’ 이다. 이제 처음으로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 만들어낸 자기 존재의 기초가 되었고 개인 실존이 추상적으로 고립되고 대상과 타자성 속에서 계열적 인간이 소외되는 것을 상호결속을 통해 극복하게 되었다.

이처럼 인간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행복감과 위로다. 뭔가 쫓기고 있다. 무엇에 쫓길까?

2. 십자가에 부딪힘

창세기에는 무로부터 아무것도 창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창조했고 그래서 모든 것은 무너진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무너지기 위해 설쳐대고 있는 모든 것이 무너지기 위한 동작으로 봐야 하고 그렇게 무너짐을 통해서 그것을 무너뜨린 분의 손길을 감지해야 한다.

말을 배우며 바보가 된다는 명제를 통해 우리는 이처럼 두 가지 죽음을 접할 수 있다. 그것은 타자의 언어 권력에 완전히 지배되는 첫 번째 죽음의 사태를 가리키는 동시에 그로부터 다시금 튕겨 나가는 방식으로 두 번째 죽음에 이끌리는 사태를 가리킨다. -인간은 애초부터 죽은 것이다. 따라서 이점을 확인하는 것이 이 세상 생활이다-

타자의 언어 권력은 사회 속에서 접하게 된다. 근대사회에서 우리는 ‘손상된 삶’이 된다. 노동분업과 전문화로 야기된 심리적 상처, 근대 삶의 모든 국면에 나타나는 전반적인 소외와 비인간화 등에 대해 아직도 온전성 내지 통일성이라는 것은 남아 있는가?

온전성의 꿈이 남아 있는 경우에도 그 꿈을 누구나 다른 사람의 미래로 돌려버리면 자신의 훼손된 현재를 체념하고 감수해야 한다. 이로써 진정한 자화상은 없다. 신적 경험조차 언젠가는 텅 빈 소리가 된다.

바깥 세계 및 객관적 실재와 유의미한 관계를 추구하지만, 주위 세계에서 접촉한 것이라고는 우리 자신밖에 없이 그림자 속에서 삶을 지속하다가 결국 빈손으로 돌아올 뿐이다.

평소에 죽음 충동은 자신을 환상화하는 방식으로 꿈속에서 자신을 관찰하며 관리에 나선다. 꿈은 자기 존재를 가시화하는 장소다. 그래서 꿈은 죽음의 살갗이다. 억압이 느슨해진 꿈속에서 인간들은 얼마나 자신을 아끼며 사는지 그 정성이 나타난다. 내가 나의 최종적 대상이었다.

이런 점에서 사회라는 계열적 집단은 거대한 착각이었다. 개인의 고독을 껴안고 그 계열체 속으로 그냥 사방으로 달아나고 숨고자 할 뿐이다. 여론이나 ‘우리’ 란 그냥 가상의 존재로 투사된 일종의 집단환자이다. 그러나 여론이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계열체 속에 통합하는 것은 여론에 대한 믿음과 그 효과일 뿐이다.

이 집단을 주시하는 분이 계셨다. 인간들이 쉴 새 없이 바르게 살기 위해 옳으냐와 그르냐를 따졌지만 실은 모두 예수님에게 적대적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가 맺혀 있는 그 십자가로 그들은 몽땅 심판의 대상이다.


3. 정신병의 증상들

정신분석 임상이란 증상을 다루는 기술이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를 찾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마비 증세나 실어증, 복통이나 두통, 우울증과 불면증, 대인기피증이나 공포증, 광장공포와 폐쇄공포, 공황장애와 충동조절장애, 집중력 결핍과 과잉행동 장애, 조울증 등등 현대 심리학과 정신의학이 명찰을 달아 놓은 수도 없이 다양한 증상들의 특징이란 실재의 속성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증상들은 주체의 질서를 교란하는 미지의 사태이다. 이것이 미지인 이유는 주체의 지식이 그것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의 발생, 이 순간의 주체에 증상은 실재의 방문이다. 증상 출현의 원인은 억압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억압이란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으로 충동에 둑을 쌓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무너지거나 또는 균열을 갖게 되어 그 사이로 충동이 흘러 넘치듯 초과하는 사태가 바로 증상이다. 이 실재를 상징화 하게 되면 일단 치료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억압은 자주 실패하고 그리하여 등장하는 것이 증상이라면 실재는 완전히 상징화되지 못한 것이 된다. 이렇게 출현한 증상을 다시 상징화 속에 집어넣어서 정신은 일시적으로 안정을 취한다..

증상이 출현하는 것은 의식의 차원이 파악할 수 없는 경로를 통해서 이고 그렇게 출현한 증상에 대응하는 의식은 반응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게 된다. 이것을 ‘주체의 분열’ 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외부의 도움을 요청되는데 여기에 타자의 지식이 도입된다. 타자의 힘에 또다시 굴복 당하는 상황이다. 타자의 언어에 또다시 사로잡히게 된다..

실어증이란 말을 못 하는 환자가 아니라 공백이 발음되는 사태이고 그와 같은 공백이 자신의 언어를 발명해 내도록 유도해야 한다. 실어증이란 타자의 언어로 말하지 않으려는 내부 저항의 표현이다. 따라서 타자의 지식의 힘을 빌리는 것은 기껏 균열을 봉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증상을 제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말하게 해야 한다. 그 사람에게 여태껏 없는 소리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이 주체가 되어 복음이 나오는 악기가 바로 성도이다. 곧 예수님의 죽으심과 우리의 죽음을 악기가 되어서 발설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4. 새로운 주체와 그 집단

주체성의 절차란 외부의 대상 쪽에서 출발하여 나라는 환영적 자아를 찾아오는 사건이다. 그것이 주체는 증상의 형식으로 도래하여 우리에게 자신의 가능성을 강요하게 될 것이므로 바로 그러한 없음을 ‘없음이 있다’ 라는 표현으로 공백의 존재를 선언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기존의 어떠한 언어 문법으로 나타낼 수 없는 의미가 나온다는 말이다.


공동체가 지배하는 담론에 자신의 신체를 온전히 장악 당한 주체 프로그램 된 로봇의 삶, 오류 없이 작동하는 신체와 정신. 이것이 인간의 이미지이다. 불안에 흔들리지도 않으며 우울의 나락으로 빠져들지도 않는. 스스로 욕망에 질문은 던지지 않는 인간. 초과하는 욕망으로 인해서 일탈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존재의 삶. 언제나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돌진하며, 부모 세대의 욕망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복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사유를 고정시키는 주장들, 즉 고정관념의 주어진 체계에 포획 당한 욕망의 주체들. 그래서 더 욕망이라 부를 것조차 소유하지 못하게 되는, 평온한 세계 공동체의 이미지. 이것이 첫 번째 죽음의 세계다.

그러나 신체는 이 한계를 넘어 초과한다. 기존 인간세계의 질서는 온전한 질서의 부분집합이다. 증상의 형식으로 찾아왔던 주체는 다시 어둠 속으로 물러간다. 당연히 잠시뿐 이다.

범주는 어떤 사람이 그것에 대한 태도를 보이는 방식으로 인해 그 사람을 서술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을 변화시킨다. 말씀 자체가 출현하는 순간, 주체는 다시 소환된다. 성도 자체가 말씀의 생산물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 타자의 세계 속에서 어떻게 초과하는 지점을 찾아내는가 가 중요하다. 말씀이 앞서 이끌면서 낯선 상황들을 일으키신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주체는 기존의 모든 타자가 아닌 모든 것이다. 타자가 실패하는 순간 그 자체이다. 더는 타자의 시선에 놀아나지 않아도 좋다. 타자의 실패 순간에 출현하는 것이 곧 주체다.

사라져가는 나를 다시 붙들어 주는 것은 예언이다. 무식하면서도 이 땅에 계속 살려고 협박하고 때로는 애걸하고 때로는 발목 잡는 타자의 질서가 미리 날아든 예언 때문에 심판 받아 무너져갈 때는 주체는 악마의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무식한 사람은 실은 이 땅에 살 가치도 없기에 성도는 무사히 이 땅에서 벗어나 스스로 이 땅에 살 가치가 없음을 확인하고 감사한다.

현실이란 내가 계속 깨어나기 위한 자리다. 달아나기 위해 인간은 산다. 나를 살리기 위해 달아난다는 것이 이미 우리는 상실된 존재라는 말이다. 이 인간세계는 모두가 잠든 세계다. 출애굽 되던 그날 밤처럼(출 12:42).

Ⅱ. 본론

(줄거리)

편지가 시작되는 문구로 봐서 갈라디아서는 두 이론의 대립을 통해 복음의 진수를 소개하는 형식이 되어있습니다. 한가지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죽은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1:1).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어떤 기준이 이미 성립되어 있는데 그것은 사도 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내용이 일치되어야 합니다(1:8). 여기에 자연적으로 일반 사람들의 반발이 있게 됩니다. 거기에 대하여 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하랴” 라는 어조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의 주장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도 역시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1:12). 그 이야기는 또 다른 사도들에게 배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다만 자기가 다른 사도들을 찾아간 것은 자기가 받은 계시가 결코 다른 사도들에게 배운 것이 아님을 밝히고 오히려 베드로의 잘못된 생각을 면책까지 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12사도가 이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나를 또 사도로 삼으신 것은 베드로의 같은 경우에는 할례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나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사도가 되기 위해서랍니다. (2:8)

그러면 이 둘 사이의 복음의 내용이 다르냐 하는 문제가 생기겠지만 대상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는 없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2:16).

그렇다면 만일 예수 믿고 난 뒤에 죄가 또다시 나타난다면 예수 믿는 것이 소용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죄를 정죄하는 율법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한 다른 면입니다.

죄로 인해 이미 사형 선고되어 집행된 자신을 어디서 고백하느냐 하면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죽음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2:20). 이제 내가 살고자 하는 탈출구는 이미 경험한 율법의 세계가 아니라 앞으로 개방된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2:19). 이것이 또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은혜에 대한 믿음의 다른 면입니다(2:20).

죄라는 것은 율법과 관계없으면 나타나지도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율법으로부터의 죽음으로 이해함으로 인간에게 정죄를 가할 근거를 제거하게 되니 의와 죄의 기준이 그만 달라졌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을 무색게 하는 시도가 곧 사단의 시도로 보입니다(3:1).

성령님은 항상 십자가를 새 창조의 근거로 내세우기 때문에 십자가 의식을 무력게 하는 율법에 따른 육체의 시도는 성령의 거스르게 됩니다. 십자가에 동참하려는 의식이 믿음으로서 이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복의 진단형식과 같습니다(3:9). 만일 율법을 그대로 고수한다면 이는 항상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3:10).

또 한 가지, 만약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이방인들은 의롭다 함을 얻을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행한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이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하려고 그 율법으로 인해 주어질 저주를 예수님 자신이 받아 자기를 믿는 자는 다시는 율법의 저주가 해당하지 않게 하였습니다(3:13-14).

그러면 율법의 저주 대신 믿는 자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는 아브라함의 약속에서 자손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성취로 채우듯이 땅의 약속 자리에 성령을 놓습니다. 성령이 곧 유일한 그 자손이 가져다줄 복이었습니다.

이로써 사도는 의의 문제에서 성령의 세계로 성도를 인도합니다. 율법으로는 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달성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약속이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에 아브라함 자손에게도 같은 원리 즉 은혜가 작용하여야 합니다(3:18).

성령께서 성도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함으로써 동시에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습니다(3:27-29). 이 사실은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약속된 바를 전부 지녔다면 그 약속된 기업에 자손들이 참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의 영을 보내어 함께 아들 되게 하셨습니다(4:6).

이러므로 그들은 이제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살아야 할 운명이 되었습니다(4:19). 이는 마치 아브라함에게 있어 약속으로 난 자녀 이삭과 하갈의 몸에서 난 자식 이스마엘의 관계와 같습니다.

율법이란 인간의 육체의 연약함을 지적하고 정죄하기 위해서 존재한 것입니다. 하갈의 자식이 약속의 자녀가 되지 못함을 들추어내기 위해 율법이 주어진 것입니다(4:24). 어쨌든 성령으로 난 사람은 율법과 상관없이 약속을 따라 났기 때문에 저주와 정죄로부터 풀려났습니다(5:1). 그 자유는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고 체험되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5:14)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므로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데 이는 육체의 소욕을 거부한 투쟁의 결과라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5:17, 24). 그래서 성도의 자랑거리는 이제 하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6:14). 그 십자가는 바로 성도가 세상에 나타내는 유일한 모습입니다.

Ⅲ. 결론

이 세상에서는 안 일어나면 안 되는 일들만 쉴 새 없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사건의 더미다. 사건은 이전의 것을 지우고 그 이후의 것도 그 어떤 여지를 주지 않는다. 나는 남이 될 수 없고 남은 내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이 나의 죄를 사해준다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사건은 나를 지우고 나를 계속해서 없앤다.

그 이유는 나의 존재감에서 십자가 사건에 대해 대항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나는 애초에 ‘다른 복음’이다. 저주의 자리다. 따라서 계속해서 나를 ‘다른 복음’으로 되돌아가게 전환해 놓고서는 자기 부정이라는 절차를 통해서 ‘참된 복음’이 비로소 성도 속에서 끄집어내시는 사건이 곧 십자가라는 반복적 사건이다.

그래서 성도라는 낯선 존재는 이중적 존재이다. 땅의 차원과 하늘의 차원 경계선에서 출현한 존재이다. 그래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말한다. “우리-사도라는 ‘나’라고 할지라도-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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