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눅17:22) . 보지 못한다고 하는 말은 인자의 날에 갈수가 없다.
전혀 다른 체계를 생각해야 돼요. 사람의 날. 현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상 일상적인 체계와 인자의 날은 달라도 너무 달라요. 사람들은 이 누가복음 17장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상 사람의 날을 살다가 나중에 인자의 날이 오게 되면 인자를 맞이하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합니다.
사람의 날하고 완전히 다른 요소, 다른 요소로 구성되어있다. 다른 말로하면 주님의 날이 인간의 날에게 소급적으로 적용된다.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미완료 속에 완료가 이렇게 미리 앞당겨 와서 주입되는 겁니다. 주입되는 거에요.
완료된 것이 미완료에 주입되어버리면 이 세상 인간의 세상은 이건 미완료로 드러납니다. 살아도 소용없다 이 말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4절에 나옵니다.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번개 특징은 사람들이 예상 못한다는 거죠. 우발적이고 우연적입니다. 번개가 없다가 아니라 있는데 예측 못한다 에요. 현재 사람의 날 이거는 완전히 인자의 날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됩니다. 하늘로서 불과 유황불이 비 오듯이 하여 나타나는 날.
불과 유황불을 가지고 쳐들어오는 거죠. 납득되고 예측되는 일만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과는 너무도 다른 체계입니다. 불과 유황불로 떨어지는 것은 주께서 하늘에서 사람을 겨냥해서 이 사람의 일상을 겨냥해서 사람 세계를 겨냥해서 떨어지는 이유는 너희들이 평소에 인자의 날을 생각 안하고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달라도 그 세계가 너무 다릅니다.
예수님의 모든 행적의 행함은 인간이 이해됨과 전혀 상관없이 움직여버립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개역한글) ‘보이는 것은 안 보이는 것에 의해서 나타났고 보인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럼 사람들은 그럼 보이지 않는 것은 뭡니까? 질문하는데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거에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막혀 있으니까. 그러면 믿으란 말인지 믿지 말라는 뜻입니까? 왜 네가 예수를 믿고자 하느냐 이 말이죠. 그게 죄다 이 말이죠. 네가 알아서 안다고 해서 네가 불과 유황불에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보고 어쩌라고” 바로 그 말이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해서 주의 날을 소급적으로 본다. 이미 나중에 그게 과거 지나면 현재되고 현재 지나면 뭡니까. 미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시간에서는 미래에서 과거를 미리 본다 할 수 있잖아요. 그 미래는요 과거 현재와 연결된 미래이기 때문에 그것도 틀린 말이에요. 인자의 날은 미래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자의 나타남 자체가 인간들이 사용하고 있는 과거, 현재, 미래를 적용할 수 없는 식으로 오는 거에요.
그러면 주의 날의 안목, 그 관점에서 본다면 그 사람은 지금 어디 가있는 거에요? 뚫지 못하는 벽을 뚫어버리죠. 그런데 인간은 이 벽을 뚫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간들의 집단이 예수님을 버렸기 때문에. 딴 사람은 버려도 저는 안 버렸습니다란 말하면 안돼요. 그러면 다 버리는 상태에서는 내가 벽을 통과해서 주의 날에 또는 천국에, 예수 안에 또는 성령 안에 내가 있어가지고 내가 봐야지 라는 그러한 계산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마치 나는 빼주세요 라는 것 밖에 안 되니까 그런 건 없어요. 그러면 뭐냐?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져야 되지요. 재료는 죄인입니다. 죄인을 가지고 주께서 의인을 만들어줄 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을 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를 새로운 피조물로 주께서 만들어버리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나는 인간의 세계에서 죽었고 주의 날에 새로 살았다는 안목을 갖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거에요.
사도 바울 표현대로 ‘성령 안’, 같은 말이 ‘십자가 안’ 또 같은 말이 ‘예수 안’ 또 같은 말이 ‘언약 안’. ‘다 이루었다 안’. 똑같은 거에요. 그 안에서 “예수 안에서 너희는 의인이 되었나니” 이 말이거든요. 한번 적어볼게요. 너희가 의인된 것은 예수 안에서 라는 구성요소 안에서 뭐냐 하면은 의인이 되는 거에요.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 의인 되니까 이 의인은 어디의 통제를 받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안목과 예수님의 생각에 통제를 받고 지배를 받는 그러한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겁니다. 전에 내가 세상에 살았던 그 안목은 여기 완전히 죄 된 것으로 드러나지요. 주여 저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여 죄가 많습니다. 죄를 용서하소서. 이건 다 뭐가 돼요? 아직까지 살아볼라고 주님 덕분에 죄 용서받고 천당 갈라는 그 얄팍한 심보를 가진 그런 사고방식은 예수 안에서 용납됩니까? 용납 안 됩니까? 어디서 수작질이야. 어디서 요령 부려.
하나님이 구약에서 분명히 출애굽 시내산에서 내가 인간을 만든 것은 인간이 나의 불쏘시개 되기 위해서 만들었다. 왜? 나는 소멸하는 불이기 때문에. 신명기 4장 24절. 신명기 5장 한번 봅시다. 지금 어떤 극단적인 말을 해도 지금 실제하고는 많이 거리가 있을 정도에요.
신명기 5장 24절에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에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직접 특정 공동체에게 한 것이 시내산에서 처음이고 마지막이에요. 집단적으로 보이지 않는 형태에서, 육신이 아닌 형태에서. 천사 보낸 거 말고 했단 말이죠. 그럴 때 말씀을 그냥 보낸 게 아니고 불에 담아서 보냈어요.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곧 뭐를 받는다? 불덩이를 받는 거에요. 이게 주의 날이 소급해서 먼저 도달한 거에요. 주의 날이.
주의 날은 주님 나타나는 날이에요. 어떻게 나타나느냐? 불로 나타나요. 불로써. 누가복음에도 그런 말씀 나오지요. 누가복음 12장 49절.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아직 불이 덜 붙어서 계속 하겠다 이 말씀이거든요. 불을 던지러 왔다. 불을 끄러 오신 분이 아니고 불을 싸지르려고 오신 거에요 주께서. 여호와께서 말씀을 던지실 때 불과 함께 불로 더불어서 말씀을 던지는 것처럼 예수님 말씀도 불과 함께 던진 말씀이었던 거에요. 왜? 여호와가 주님이시기 때문에. 불을 번지게 하시는 분이에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불같은 오순절 성령이 와가지고 그들이 성도들이 바빠요. 왜? 세상 불 싸지르기 위해서 바빠요. 빌립 집사가 바쁘고 스데반 집사가 바빠요. 불같은 성령의 말씀으로 그냥 싸질러버려요. 어떻게 할까요 하지 마. 왜? 의미 없다는 거에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 고넬료 만날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계시해줬거든요.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 이런 말씀 하셨어요.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8장 2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는 곳에 왔어요. 그리고 머리 둘 필요도 없는 곳에 오셨습니다. 머리 안 둘 거에요. 떠날 거에요. 주님께서 떠날 거에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7장 29절에서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그런데 그 날이 이미 소급해서 앞당겨서 소돔과 고모라에 떨어질 뿐이지 실제 인자의 날이 되면 그 소돔과 고모라의 맛배기로 보여줬던 그 순간의 날이 마지막에 우리가 믿던 안 믿던 기다리던 안 기다리던 관계없이 그냥 사그리 해서 다 옵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버렸으니까 너희들 불바다 되도 너희들은 할 말 없다. 이유는 딱 그거입니다. 하나님 뒤끝 있지요. 뒤끝 있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못 알아봤다. 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너희들은 보이는 거고 너희들은 나타나는 거고.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 것을 설명하거나 해석할 수 없다. 너희들이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 말을 그동안 내가 너희에게 해왔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불 타 없어질 이 세상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굉장히 쉽지 않습니까?
죄인이 천국을 가는 게 아니고 이미 완료된 인자의 나라가 완성의 의미로 이곳에 오게 됩니다. 그날이 뭐냐? 그것이 예수 안이에요. ‘예수 안’, ‘성령 안’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주께서 결국은 불로 다 싸질러버리는 이 세대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미리 앞당겨서 성령 받는 사람을 이 세상에 출현시키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렇게 살아가면 되지요. 불 속에서 살면 돼요. 참 쉽지요. 불 속에서 살면 되지요. 불 속에서 산다는 말은 그냥 내 모든 일을 불과 관련해서 바라보는 거에요. 불과 함께 불과 관련지어서 모든 것이 불타버릴 수밖에 없음을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 용서받지 못할 것들이라고 느끼는 것. 그럼 불 속에서 산다는 말을 이걸 풀이해보면 이거는 종말이죠. 끝이죠. 불 속은 끝입니다. 심판입니다. 심판 속에서 살면 되지요. 불 속에서 산다는 말은 이미 심판을 다 완료 받은 받을 심판 다 받은 사람으로 살면 되는 겁니다. 갑자기 굉장히 수월해지지요. 불 속에서 살면 사람의 날에 살았던 기억이 반복해서 소환되고 반복해서 제거된다. 사람의 날에 살았던 기억이 반복해서 소환되고 반복해서 제거돼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은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주님이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 그 주님의 의가 죄 바깥에 있거든요. 죄 세계 바깥에 있는 주님의 의의 명예와 자존심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그걸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내가 너희에게 해주는 것이 싸그리 불로 타버릴 이후의 없어질 이후에 새로 만든 거야 라는 새로 만든 가치를 위하여 그들 성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기억을 반복해서 소환시키고 반복해서 제거, 피로써 또는 불로써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제거해주는 거에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무의미하잖아요. 무의미를 뭘로 바꾸느냐? 탈의미로 바꿉니다. 탈의미라 해가지고 얼마 전에 제가 강의, 제가 언급한 적이 있어요.
무의미, 의미가 없는데 거기서 의미 없는 것을 다시 의미를 끄집어내버리면 기존의 의미체제에서 탈출했다. 탈의미가 생겨요. 탈의미. 왜? 주님이 탈출했기 때문에. 모든 의미는 최종적으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그 세계에서 모든 의미가 완료가 됩니다. 그 완료된 의미가 이 세상에 살게 되면 우리 같은 경우는 죄인인데 졸지에 의인이 되었지요.
기존의 체계에서는 오는 체계를 상상도 못합니다. 예상도 못하죠.
그래서 “너 죄인이야? 그러면 너 지옥 가” “난 아니야. 나 의인이 되었어.” 할 때 “의인이 뭔데?” “나도 몰라.” 다만 중요한 것은 죄인 되었다는 것은 나쁜 짓해서 죄인 된 게 아니고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죄인 되는 거고 새로운 피조물이란 이유 때문에 의인된 거에요. 그러면 그 사람이 묻지요. “도대체 누가 널 그렇게 만들었어?” “예수님이 만들었지.” “예수님이 누군데?” “몰라.” 예수님을 언어로 모르면서 어떻게 설명해요. 그분이 하셨는데요. 소통이 환장할 지경이에요. 얼마나 평소에 예수님께서 말이 안 되는 말씀을 계속 했는지요.
마태복음 17장에 보게 되면 17장 20절에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이게 극단맨이에요. 예수님 자신이 극단맨이에요. 안 되는 말만 하는 거에요. 안 되는 것.
멸망 대상이 알아서 뭐할 건데. 알아서 구원받는다 없습니다. 알아서 구원받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의 앎을 극단으로 하여튼 극단맨은 모든 게 극단이에요. 내가 안다는 것은 불 심판 받을 이 세상에서 알았던 거고요. 그러면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세계에서 안 것이 나를 구원한 거죠. 주님이 알아서 나를 구원한 거에요. 주님이 알아서.
노아의 홍수때 물 지나가고 난 뒤에 살아남은 게 있습니까? 하나도 없지요. 노아 방주는 물 위에 떠있었으니까 해당사항 없고요. 아무것도 없지요. 없애버리는 거에요. 하나님의 뜻은 모조리 다 없애버리는 거에요. 말 궁시렁 궁시렁 하지 말게 다 없애버리는 거에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7장 26절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온다는 말은 다 없애버리는 거에요. 왜? 처음부터 없애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없어지라고 태어난 거에요. 그들이 나를 밀치고 나를 버리라고 그들을 만든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불쏘시게 되기 위해서 만든 거에요.
진정한 저주라고 하는 것은 이겁니다. 내어버려두는 거에요. 그냥 살도록 내어두는 게 저주에요. 로마서 1장에 나오는 “내어버려두사”. 저주받아요. 그러면 주께서 천국의 자기 백성 할 때 내어버려둔다의 반대는 뭡니까? 기어이 간섭한다 이렇게 되겠지요. 기어이 간섭한다. 간섭하는 이유는 간섭하는 방법은 주께서는 이런 아이디어를 냈어요.
뭐냐 하면은 자신이 택한 백성 이마에 도장을 찍어놓고 본인이 특정 인간에게 도장 찍어놓고 이마에 도장 찍어놓고 자기가 찍은 도장 찾으면서 가만 놔두지를 않는 거에요. 여기서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나옵니다. “내 다리 내놔.” 자신의 피로 이마에 표시를 해놓고 에스겔 9장 44절과 46절에 천사가 와서 이마에 표시를 해요. 십자가 모양 표시를 하는데 그건 뭐 큰 의미를 두시지 마시고 그걸 신약에 와서 요한계시록 22장 “그들의 이마에 주의 이름이 있느니라” 그들 이마에 주의 이름이 있느니라.
문둥병자가 회복됐을 때 드리는 제사가 있어요. 율법의 제사. 율법 제사 드리고 들어와.새 두 마리 잡아서 한 마리 죽이고 피 바르고 피 발린 새는 공중으로 날아가는. 너는 피 때문에 산거야. 다시 말해서 네가 피 때문에 고침을 받은 게 아니고 피를 내가 되찾은 거야. 피를 되찾는 하나의 매개체로서 어떤 멀쩡한 인간을 문둥병 만들었고 문둥병 된 인간을 하나님께서 치료시킨 거에요. 인간은 주의 일의 시다바리인데 자체적으로 인간은 아무 의미 없어요. 자체적으로.
그러면 의미가 있을려면 어떻게 됩니까? 의미는 애초부터 없어요 인간은. 그러면 천국 가는 건 뭡니까? 탈의미. 기존의 의미에서 구멍이 나야 되죠. 탈의미. 기존의 인간체계의 의미체계에서 버림받아야 되지요. 누구처럼? 인자처럼. 예수님처럼 버림받아야 되지요. ‘미쳤구나. 돌아도 저렇게 미치는 수도 있구나’ 이런 식으로 욕 얻어먹어 가면서.
인간의 모든 기억을 주의 말씀이 다 뜯어냅니다. 없앤다는 말이 아니고 탈의미라는 것은 덮어씌우는 거에요. 우리가 하는 것에다가 파스를 갖다 붙이지요. 죄보다 많은 털이 있는 거기에 파스를 딱 붙입니다. 파스 뗄 때 파스만 떼어졌습니까? 털 뽑혔습니까? 탈의미. 나의 개성, 나의 나됨이라는 것이 완전히 다 뽑혀버렸죠. 다 뽑혀버린 거에요. 그래서 이게 뭐냐 하면은 최후의 날 이후의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게 성령이에요.
죄를 도말하는 거에요. 뽑아버려요. 완전히 우리를 대머리 만들어 버려요. 털이 홀라당~완전히 대머리를 만들어요. 대머리를. “이것 봐, 이 죄 없는 것 봐 반들반들 모습 한번 봐.” 지금 주님 뭐라고 하십니까? 성령의 파스를 갖다 붙여버리면 우리의 죄가 없는 게 아니고 어디 달라붙어 있어요? 성령 파스에 붙어있어요. 우리는 그 성령 파스 보고 “어! 내 죄가 저기 다 달라붙어 있네” 저기 다 붙어있어요.
매일같이 소환된다고 했지요. 매일같이. 계속 죄 생산되면 매일같이 성령 와서 매일같이 뜯어내는 거에요. 성경 공부도 죄고 기도하는 것도 죄고 선교, 전도, 헌금 다 죄거든요. 그 죄를 계속해서 극한보다 넘어서는 완료된 성령께서 와서 그것을 ‘이거는 내가 가져갈게.’ 왜? 예수님의 예수님의 피 됨을 증거하는 재료가 되기 때문에 주님 가져가셔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의의 관계 의를 생산하는 대상자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의는 우리의 소망이다? 아니다? 주님의 소망이죠. 천국은 우리의 소망이다? 아니죠. 주님의 소망이죠. 내가 양이 되는 게 소망이다? 아니죠 목자의 소망이죠.
문제는 불쏘시개 같은 이 세상에서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네가 왜 그게 믿어지니?’ 이 질문을 하게 되어있어요.
이렇게 답변하죠. ‘내가 해도 해도 너무 했지? 그렇지? 나도 이걸 못 믿겠어.’ 그게 정답이에요. ‘너는 어떻게 믿었어?’ ‘아니 아니 난 안 믿었어. 내가 믿어질 거 같으면 내가 믿었지. 이건 내가 믿지 못할 일이 나한테 일어난 거야.’ 믿지 못할 일이 나한테 일어난 거야.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장기판의 알입니다. ‘장기 알’.
장기판의 장기 알은 주체가 따로 있고 숨어 있는 주체의 활동을 드러내기 위해서 주체로부터 움직여지는 거에요. 광주의 목포의 장로님이 질문한 댓글에서 질문한 유명한 말.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걸 내가 어떻게 지킵니까? 어떻게 지키는 게 아니고 우리가 누구의 장기 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장기 알의 특징이 있어요. 특징이 뭐냐 하면은 늘 달라요. 왜냐하면 장기 알은 그 놓여있는 지점에 의해서 전체 판에 배치도가 다 그때그때 다 달라요. 다 달라요. 분명히 주일날 국수 한다 했잖아요. 더워서 냉면 한다. 왜? 국수 한다 했는데. 배치가 달라.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고. 이 말은 뭐냐? 자기 행동에 내가 책임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내 행동에 내가 책임질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면 적절해요.
자, 불은 여호와죠. 여호와가 불이라는 것은 여호와가 뭐다? 심판주가 된다. 좀 더 깊이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는가? 그 정답은
■1 하나님이 창세전에 아들 되신 예수님이 심판받기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2 심판받는 아들이 하나님 형상이에요. 인간은 그 형상대로 만들어졌거든요.
■3 심판받고 심판받아야 되는 피조물로 만들어진 이유가 하나님의 아들, 세상을 통일하실 에베소서 1장 10절 통일할 그 분이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언약대로 일한 그 모습이 심판이고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 예수님의 행하신 일어난 일이 원형이에요. 다른 원천은 없어요. 그분만이 원형이고 원천이고 형상이라는 거에요.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성령이라는 파스를 붙인 사람 외에는 몰라요 이게. 제가 파스라고 한 이유는 우리가 성령을 소유한 게 아니고 갖다 들러붙어서 떼이지도 않아요.
우리는 우리를 극단까지 몰아넣을 능력이 없고 극단으로 몰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는 요령껏 살고 싶어요. 적당하게 균형 맞춰서. 너무 밀면 자빠지는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를 그 규칙을 내가 정해요. 갑자기 장기 알 됐다가 자기가 장기판 자기가 잡아당기는 것과 똑같아요. 네가 장기판으로 한번 맞아볼래? 네가 구조로 한번 맞아볼래? 네가 이것 잘못했다 저것 잘못했다가 문제가 아니라 구조를 왜 잊어버렸냐고. 구조적 차원에서 맞는 수가 있어요.
그걸 우리는 세 자로 이야기합니다. ‘망했다’. 나 망했다. 개인적으로 잘못해서 망한 게 아니고 네가 속해 있는 영역, 환경, 그 구조를 왜 놓쳐버리느냐 이 말이죠. 이거는 미래의 구조가 아니고 새로운 구조에요. 새로운 세계의 구조. 물 심판, 불 심판 이후에 모든 심판이 끝나고 난 뒤에 생성되는 그 구조의 인물인데 왜 구조를 놓쳐버리니까 주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징계를 줄 수밖에 없지요. 장기판으로 맞아보세요. 퍼래요. 눈탱이 밤탱이 퍼렇습니다. 너 차 맞았나? 포로 맞았나? 말로 맞았나? 하면 판으로 맞았다. 구조로 맞았다. 구조.
그러니까 회개한다는 말은 구조를 이해한다는 거에요. ‘다시는 안 할게요’ 가 아니고 내가 완전히 다른 체제인지를 모르고 ‘내가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았는데 내가 나쁜 짓해서 벌 받았구나’ 이런 체제 자체가 바로 우리가 지금 잘못, 이 자체에서 관계없는 사람이란 걸 잊어버린 거에요. ‘내가 그때 행동 똑바로 했으면 이런 사단이 없었을텐데’. 아닙니다.행동과 관계없어요.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할 뿐이죠. 김흥국이 지옥 갔을 때 본인이 했으면 본인이 남긴 호랑나비 다 회수해서 가야하는데 자기는 죽었는데 호랑나비는 남아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본인이 호랑나비 부른 게 아니고 주께서 부르게 하신 거에요. 주께서 태어나게 해서 호랑나비 히트 치게 만들었어요.
지옥의 구조와 심판의 구조. 구조로 때리는데 구조로 때리는 장소가 그 공간이 바로 지옥이라는 겁니다. 구조적으로 맞아요 구조적으로. ‘네가 이렇게 불 뜨거운 세계에 올 줄 네가 왜 몰랐나’ 이 말입니다. ‘내가 분명히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 떨어지게 했지. 알아 몰라?’ ‘창세기 19장 성경에서 본 적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안 믿었어?!’ ‘난 그때 뿐인 줄 알았지요.’ 그때 뿐인 줄 알았다는 거에요. 자기가 주체가 돼서 그래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소리 들었지?’ ‘네 들었습니다.’ ‘왜 그거 안 믿어?’ ‘예수님이 해당되는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이게 성령이 안 와버리면 그 구조에서 오는 파스가 오지 않으면 혼자 살아요. 사실은 혼자 사는 게 아니고 악마의 말을 들으면서 살지만.
‘탈의미’. 탈의미가 될려면 예수님을 심판주로 봐야 돼요. 심판주니까 재판관이죠. ‘재판관’. 재판은 이미 끝났어요. 재판은 알 것도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에 재판은 그걸로 끝났어요. 안 버린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아담 안에 있는 자는 다 예수님을 싫다고 내치게 되어있어요. 그건 죄의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 재판 끝났습니다. 살려주세요. 해도 소용없습니다.
죄인들 가운데서 이마에다가 딱지를 붙여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여버려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가장 큰 저주는 뭡니까? 딱지가 안 붙어있는 게 저주에요.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 어차피 끝난 인생’ 어차피 끝난 인생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그 자체로 지옥가야 되지만 할 수 없지.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마에다가 주의 이름이 붙어있어요. 요한계시록은 이마에 붙어있지요. 그 사도 바울에서는 마음속에 성령이 찾아온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걸 성령의 인 받았다. 장소를 이야기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같은 구약적 표현을 썼기 때문에 이마에 탁해요. 이마.
그런데 왜 이마에 하느냐? 악마가 이미 선점해서 악마가 자기 사람 이름에다가 마귀 이름을 숫자를 전부 이마에다가 박아놨어요. 666. 숫자를. 찜한 거에요. 내 사람이라고. 찜한 거에요. 마태복음 24장인가 보면 24장 24절,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누구를 미혹하게 한다? “택하신 자들”, 택한 자들도 했다는 말은 이미 다른 사람들 다 수중에 넘어갔다는 뜻이에요. 다 넘어간 거에요.
베드로전서 5장에 8절에 봐도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그 다음에 뭡니까? “삼킬 자를 찾나니”. 마귀가 하는 일이 뭐냐 하면은 삼킬 자를 찾아서 삼키는 일을 하는 거에요. 이게 보이지도 않고 나타나지도 않는 거에요. 그러나 보이지도 않고 나타나지도 않고 배후에 있는 악마가 지금 이렇게 보이는 세계를 만들었고 나타나는 세계를 만든 거에요.
보이는 세계, 나타나는 세계 그 배후에 주님도 계시고 악마도 있는 거에요. 여자의 후손도 계시고 뱀의 자손도 있는 거에요. 주께서 말씀을 해줘야 알지 어찌 알겠습니까. 우리는 자기 일상 생활하는 거 외에는 없잖아요. 그것만 생각하지 뭐 다른 거 생각합니까? 오늘 날씨 덥지요? 그것만 생각하잖아요. 에어컨 좀 높이면 안 됩니까? 이런 것만 생각한다고요. 카메라 이거 불타는 카메라에요. 항상 불과 관련시키세요. 어떤 사람이 옷 잘 입는다 할 때 불 잘 타는 옷 입고 잘 가고 있는 거에요. 어떤 사람이 벤츠 타고 가거든 불타는 벤츠타고 불타는 밤을 즐기기 위해서 불타는 데로 가는 거에요. 나이트 가서 불타라.
주님께서 성도에게 부탁하는 것은 모든 극단적인 건 다 끌어모아라. 모든 극단적인 것은. 왜? 너도 망하지만 남들도 같이 망하니까 위로 삼아라. 다 망하니까. 별로 섭섭지 않지요? 다 망하니까.
성령으로 인을 박아버리면 그 사람은 주의 것이 그 사람에게 도달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 땅에 보내는 택배 물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인 줄 알고 불덩이에 들어오는 거에요. 다니엘 세 친구처럼. 불 속인 줄 알고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놀라운 현상이 일어나지요. 우리가 생각도 못한 일을 합니다. 그게 뭐냐? 원수를 사랑해요. 원수를. 다들 사랑해봤지요? 원수를 사랑합니다. 그래 많이 저주 짓 많이 해라. 너 끝났어. 너 끝났어. 원수를 사랑하라. 그걸 아주 실제적으로 표현하면 원수에게 친절을 베푸세요. 친절의 친절을. 심지어 어떻게? 원수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고 그러면 원수 머리 위에 숯불을 피워올라가지고 원수가 미안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요.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여기서 사람들은 이제 묻고 싶지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준비된 정답이 있습니다. 준비된 정답.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나머지는 누가 책임진다? 나머지는 내가 책임질게. 네가 몸이 아파? 몸이 아픈 것도 뭐다? 그 나라와 의를 위한 적절한 장기 알의 배치입니다. 네가 시험에 또 떨어졌어? 그것도 그 나라와 의를 위함이다.
구하라고 되어있지요. 이건 십자가 전에 산상설교에서 한 거죠. 그러면 십자가 이후는 뭡니까? 주께서 이 말씀을 우리 속에다가 성령 속에다가 그걸 박아서 우리 속에다가 파스로 발라버리죠. 너는 이제 그 나라 의 외에는 다른 의미가 너한테 없어. 그 나라 의를 위하여 예수님 이 땅에 어떻게 왔다가 어떻게 갔다 어떻게 떠났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기존에 있는 이 세상의 의미는 탈의미가 되요. 다 그 의미가 불이라는 심판과 더불어서 그 현장에서 전부 다 탈락하는 겁니다. 탈락돼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좋은 일이 있으면 갑자기 뭐 목돈이 생긴다든지 갑자기 돈이 20억 생긴다면 이렇게 생각하세요. ‘아이고 20억 생기면 뭐하겠노.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그게 그 나라와 의라면 제가 마지못해 20억 받겠습니다. 그 나라 의라면.’ 그런데 반대로 20억이 날라갔어. ‘아이고 어떻게 살지. 아니지 그 나라 의를 위해서 필요한 조치라면 그것마저 제가 감사하겠습니다. 고마워하겠습니다. 죄인 주제에 그동안 밥 먹고 살아온 것만 해도 어딘데요.’
그래서 다 같은 인간이지만 주의 날의 의미가 우리한테 덮치는 거에요. 이걸 어떻게 총괄적으로 정리하느냐. 총괄적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거에요. 자, 사람의 날과 주의 날이 대립되어있습니다. 사람의 날은 체계가 선악체계입니다. 선악체계. 선악체계는 사람의 날이에요. 그런데 인자의 날은 무슨 날이냐 하면은 선악체계의 반대말은 뭡니까? 나무 두 가지 있잖아요. 안 다친 나무 뭡니까? 생명체계입니다. 생명체계. 우리가 어느 장소에 어떻게 살든지 간에 하나의 생명과 연관된 생명에서 창조한 인물로서 그 현장을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노아는 노아의 날 때 노아가 그전에 홍수 이전에 노아는 누구와 동행했습니까? 여호와와 동행했지요. 그걸 창세기 6장에서 그걸 의인이라고 합니다. 동행했다는 것 때문에 의인이에요.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이 의인된 것은 아 참 말 극단적인데 말 알아들으시고 의인된 것은 여러분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가만두지 않아서 그래요.
성도와 성도가 만날 때 왜 상대방을 존중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냐? 주님이 그 사람을 때렸기 때문에 그래요. 뭘로? 장기판으로. 장기판으로 때렸기 때문에 그게 최고의 성도입니다. 주님한테 얻어맞고 사는 사람 최고의 성도입니다. 주님이 손댄 사람이에요. 어디 감히 인간이 평합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이 맞을 때 나도 주께서 때려주는걸 영광인줄 알아야 되지요.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산은 뭐겠어요? ‘자식들아 내가 하나님한테 많이 맞았다.’ 많이 맞았다. 내가 너희에게 남겨줄 것은 내가 많이 맞았다는 이야기. 주님 살아계시다 이 말이에요. 맞았다는 말은 기존의 내가 의미가 있는 의미를 탈의미, 그 의미가 선악체계에서는 의미 있었지만 생명체계에서는 그런걸 아예 묻지도 않는다는 거거든요.
그 다음에 28절 봅시다. 노아 때 여러분들 이해하셨습니까? 노아는 혼자 있는 게 아닙니다. 언약의 하나님이 함께 있기에 홍수 이후의 존재가 되는 거에요. 홍수 이후의 존재가 노아 홍수 이전의 존재에서 사람들에게 홍수 이야기를 선포한 거에요.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같이. 사람들 몇 명 설득 당했습니까? 단 한명도 설득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존 체계의 극단 넘어가기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일체 믿음 없습니다.동행하시는 분의 믿음이 우리 믿음을 대체하고 대신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장기 알이라니까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에요. 이 세상이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주님 마음대로입니다. 마치 우리의 운명이 내 마음 선에서 떠난 것처럼.
■지금 이미 우리는 이 땅에서 주의 날을 살고 있습니다. 박탈당한 탈의미된 운명. 그게 나의 운명이라는 말이 탈락 되서 주님의 운명으로 바뀌어버린 그런 탈의미된 상태에서 주와 살고 있습니다. 불과 유황불 오는 것 그거는 우린 놀랄 일이 아니지요. 왜? 말씀이 그렇게 되어있으니까. 말씀을 믿어버리면 다른 것은 실제로 되고 안 되고 기다려보자는 게 성립이 안돼요. 기다려보자는 것은 말씀을 못 믿는다는 뜻이니까. 지금 성경말씀 기다리자 하지 말고 지금 내가 하루하루 감사하느냐 이 말입니다. 지금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주께서 파스 붙여가지고 주님의 가신 길 있잖아요. 죽고 부활하신 그 길로 주님이 어떤 길로 가서 어느 골목으로 가서 어디로 빠졌느냐그 좁은 길로 이끄신다는 것이 새록새록 날마다 느껴지고 동시에 내버려둔 자들이 불구덩이에 빠지는 것이 뻔해도 너무 뻔하게 보이는 것. 나타난 것 보이는 것 그 배후에 안목 가지고 이 나타나고 보이는 것을 이렇게 볼 수 있는 것 이거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고 내가 해명할 수가 없는 찾아오신 거저 주시는 생명, 영생의 효과입니다. 움직이는 영생 덩어리에요 구원 덩어리에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을 주님의 공로를 증거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아쉬워서 내뱉는 말이 다 부질없는 의미 없는 말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아쉽다 하지 말고 뭐를 주셨는가를 찾아가면서 감사의 감사를 더하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