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압축-삭제-대체

아빠와 함께 2023. 6. 26. 19:21

바르게 사는 것이 큰 유혹이요, 실은 이것이 최후의 유혹 

왜 살아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어야 돼요.  
금 신상을 엎어놓으면 역사가 되고 세워놓으면 이게 묵시가 되는 거예요.  
다니엘보고 “인자야” 부르는 것은 주님이 다니엘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똑같은 거죠. ‘너 나지, 그렇지?’ 이런 뜻이에요. 주님이 주님의 자기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불러주는 거예요.

 


[아이는 말을 하면서 자기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 아이는 말을 하면서 자기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어른들이 요구하는 말을 하기 때문에 자기와 상관없어요. 어른들의 욕망이죠, [말의 능력이 아이를 말하게 해버렸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은 망한다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   망함의 끝을 몰라요.

주님의 모든 활동의 완성은 이 땅에서 인자가 죽으시는 거예요 구약과 신약이 죽음을 통해서 같이 예수님 안에서 완료가 되고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럼 이것은 십자가니까 이게 사건이 되죠.

묵시에서 역사로 갈 때 세 가지 순서에요. 압축되고 그다음에 삭제되고 그다음에 대체돼요. [압축→삭제→대체] 압축이 되고 삭제가 되고 대체되는 방법으로 다른 노선, 노선이 달라야 돼요. 노선이 다른 것을 설교시간에 제가 방향이 다르다 했죠. 방향이.

바르게 사는 것이 엄청난 악마의 유혹이라 할 때, 그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이미 우리 죄로 망했잖아요. 망했는데 아직도 잘 살아야 된다는 미련을 갖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잖아요, 이유가.

 

 

 



압축을 하면서 삭제하는데요. 압축한다는 것은 누군가 대신하려면 우리가 역사적으로 미진한 것이 오늘 있고 내일 또 내가 있으면 압축이 안돼요.  한꺼번에 압축되는 요건이 있어줘야 돼요.  

압축이란 말은 쉽게 말해서 세례 요한이 앞으로 자기 의지로 활동으로 어떻게 하겠냐 그런 것을 전부다 제거한단 말이죠. 네가 어떻게 살 것이란 것은 네 행동 여하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고 그전에 이미 확정된 거예요주께서 뽑아낼 것은 뭐만 뽑아내느냐 하면 예언된 것만 뽑아내요. 예언된 것. 그게 누구여야 된다고요?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그렇게 되어야 돼요.

죄가 나오지 않는 자는 성도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도는 죄짓는 게 목적이에요. 본인이 의도해서 짓는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압축파일을 푸는 거예요. 너희들이 이런 죄가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과 짝을 이뤄서 그 죄를 위해서 이렇게 죽었다.

 

 

 

묵시와 역사의 만남에서 반드시 심판이 작용한다는 것을 빠뜨리면 안돼요. 심판이 작용한다.

1이 ½+½이 된다는 것은 1의 내부성이에요. 1의 내부성이고 이것은 분석적입니다. 1 내부를 분석하는 거예요우리가 복음을 이해하고 예수님을 이해하고 묵시와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히 유대교를 분석해야 돼요왜 주님이 우리를 괴롭히느냐?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감추기 급급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외부의 압박에 대해서 첫째는 외면하고 도피하는 경향이 있고 또 하나는 거부하는 경향이 있어요. 도피하는 경우를 가지고 히스테리, 신경증이라 하고 거부하는 것은 정신병이라 하는 거예요.

신경증과 정신병 둘 다의 특징이 있는데 둘 다 공통점이 범사에 감사가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지를 않아요. 하나는 바들바들 떨고 있고 한쪽은 극렬하게 반대하고 있어요. 하나는 버들버들 떨고 있고 한쪽은 ‘나는 내 식대로 산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산상설교 하실 때 생명의 길은 유대교 속에 있다는 거예요. 생명의 길이 유대교 속에 있다. 쉬운 예를 들면 숲속에 잡풀이 무성하죠. 숲속에는 잡풀이 무성하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가보면 거기에 길이 나 있어요. 잡풀만 있었는데 길이 나 있다고요. 왜 길이 나 있죠? 누가 밟았어요. 누가 밟은 거예요.

길은 어디에 있느냐? 밟힐 때 있는 겁니다. 유대교를 밟아줄 때 주께서는 산상설교로 유대교를 밟아준 거예요. ‘왜 너는 너 자신을 분석 못하고 왜 너 자신을 근원적으로 비판 못하느냐?’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괴롭히고 괴롭힘을 당하는 대상과의 만남이에요.

주께서 말하시는 성도라 하는 것은

■1 ‘네가 주님한테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는가? 어떤 점에서 당했는가?’를 우리에게서 찾는 거예요.

■2 찾을 때 자기가 다 홀쭉하게 된다 할지라도 ‘지금에 있는 나를 기꺼이 폐기처분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동안 내 걸 내 거라고 여겼던 그 지긋지긋한 자기의 예속관계, 철저한 자기에 대한 집착을 이제는 그만두게 된 기쁨, 그걸 자유라고 하거든요. 그 기쁜 자, 그 사람이 바로 성도에요.

인간의 시작은 망상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망상이라 하는데 보통 정신분석학자들은 그걸 다른 말로 상상이라 해요. 상상. 상상이란 이미지를 우리말로 번역한 건데 이미지의 세계에요,

어린 애들의 세계는. 어린 애는 이미지 속에 자기가 하나의 이미지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애가 자아가 생기고 자립을 할 때는 ‘저건 이미지야. 거울에 비친 내 이미지지. 내가 그 이미지가 아니야.’하고 더 이상 그 이미지를 붙잡지 않는 데서부터 자립해요, 인간은. 독립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모호한 이미지 세계에서 갑자기 절대적인 나라는 것이 따로 거기서 구성이 돼버렸어요. 구성이 되니까 그다음부터는 더 이상 이미지에 놀아나지 않는 독자적인 존재가 되면서 인간은 자아가 발생됩니다.-상상계
물론 그걸 부모가 용납하지 않죠. 짐승처럼 제 맘대로 되면 안되니까. 그때부터 계속해서 ‘너 말이야. 너 말이야.’ 너라고 지칭할 수 있는 대상자로 굳어졌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너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부모의, 아버지 이름의 압박감, 억압이라 하는데 그냥 쉬운 말로 압박감을 갖게 되면서 내 자신이 누군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구의 심볼(symbol)이며 누구의 상징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이걸 상징계라고 이야기해요.
‘너는 이런 사람이어야 돼’라고 누가 지시해줘야 비로소 나라는 것을 확인하는 겁니다. 상상계에 처음 나올 때는 자아가 되지만 상징계에서는 이걸 자아라 하지 않고 주체라 이야기합니다. 주체는 외부에서 지시와 연결되기 때문에 본인이 책임감을 갖게 돼요. 책임감.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 했죠. 자아가 형성되기 전에 어린아이는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내가 만약 어린 애다. 아직 자아가 형성되지 않는 어린 애다. 그런데 어린 애인 내가 누구 다른 애를 때리잖아요. 때리면 뭐가 우당당 쾅, 하고 앙, 우니까 그때 부모가 무슨 일 있지 싶어서 올 거잖아요. 그러면 때린 내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엄마, 쟤가 나한테 맞았어.”라고 이야기해요. 맞은 애가 울잖아요. 같이 울어버려요.
동화가 돼버린 거예요. 나로 따로 분화가 안 되는 겁니다. 한 몸이 되어버려요. 한 몸이 되는 거예요. 맞아 우는 애도 나고 때린 자도 나고. 이것이 성경 에베소서 1장 22절에 나옵니다. “그는 우리의 머리고 우리는 그의 몸이다” 예수님이 더 이상 타인이 아니에요. 성령께서 그렇게 한 몸으로 한 겁니다.

어떤 것도 나한테 필요한 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다 누구한테 필요한가? 그 나라 의를 구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에요. 그 나라 의를 구하는 데에. 주님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고 우리는 공유된 겁니다. 그걸 세례라고 이야기하죠.  
애굽에서 나왔다는 자체를 이미 주께서는 그들을 죽은 자로 만들었어요. 홀쭉하게 다 빼앗긴 거예요. 이제는 율법의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저주받느냐 둘 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시 돌아갈 곳이 없어요.  성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가 망했던 이유를, 그 내력을 너희들이 압축해서 받아들인 자가 남은 자에요. 남은 자가 그다음 62이레를 통과할 수 있는 거예요. 이 두 개의 칸막이가 심판입니다. 저주입니다. 묵시는 역사와 만나서 우리를 심판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개념 자체가 갑자기 하나에서 둘로 분열된 거예요.

7이레에서 62이레로 오면서 [인간이 이해하는 모든 개념은 분열된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분열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아까 그림에서 나왔던 S→ $, 주체인데 분열이 된 주체. 묵시(사건)냐 아니면 존재냐.

존재로 홀로 살래, 아니면 너를 사건으로 만드시는 다른 큰 존재에 의해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올래, 이런 거에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지켜줄게.’ 누가 들어도 이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거예요. ‘내가 너를 분열시켜줄게’ 그 뜻이거든요. 내가 너 쪼개줄게. 두 토막으로 쪼개줄게. 꿈, 희망? 아예 꿈, 희망 완전히 작살내줄게. 홀쭉하게 만들어줘봐? 가진 거 다 날리게 해줘봐? 이래서 결국 청년들이 교회 봉사한다고 피폐해가지고 교회에 다 바치고 기껏 간다는 게 필리핀 선교 가고.

그건 분열이 아니고 나와 없는 나, 있었던 나 없는 나의 분열이죠. 인간과 인자의 분열입니다. 주님께 속한 자의 분열이에요. 이것을 나중에 사후적으로 일이 끝나고 난 뒤에 다시 이스라엘을 보게 하는 겁니다. 따라서 S→ $로 갈 때 여기 심판을 경유해요. 구원은 없습니다. 심판 뿐이에요. 구원은 없습니다.

왜 구원은 없느냐하면 주님께서는 작은 s를 구원 안해요. 구원은 S가 큰 S를 (S→S), 본인이 본인을 구원하죠. 그게 뭐냐? 나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나 스스로 있는 자를 쉬운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카페에 손님이 한 50명 있잖아요. 그러면 전화와요. “야, 지금 손님 몇 명인데?” “나 혼자 있어.” 나 혼자 있어. “49명 소리 들리고 다른 사람 많은 것 같은데?” “그건 다 나를 위함이야.” 나의 나됨을 그들은 몰라. 나의 나됨을 증거하기 위해서 확인하기 위해서 폐기되어야 될 49명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아예 없는 게 아니고 있는 이유는, 그런 과정에 포함된 자는 나중에 주의 백성으로서 혼자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의 사람으로서 그 카페에 같이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의 일이 아니다]를 아는 사람이에요.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눈이 아프고 그래도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의 일이 아니에요. 그게 주의 일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항상 주님을 경유해서 오기 때문에 ‘가라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가 본인 일이 아니고 ‘가라 오라’ 하는 주의 일속에 본인이 거기 소환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백부장이 가라 오라 할 때 본인이 나선 게 아니고 자기는 자기만의 일이 있고 자기만의 갈 일이 있고 올 일이 있는데 주께서는 그걸 압축하고 나를 제거해버리고 그다음에 뭡니까? 제거하고 끝나면 안되죠. 주의 종으로 대체해버렸으니까 ‘가고 오고하는 이게 나의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의 일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모든 것은 경유하는 거예요.

 


분노가 감사로 바뀌는 요령 

첫째는, 내가 현재 있는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왜? 이게 중요해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까 호일 있었죠. 호일이 왜 분노하냐 하면 이게 잘 안펴져서 분노하거든요. 주께서는 구겨버려요. 그러니까 자기가 형편없는 존재라고 생각 안 드니까 분노가 일어나는 거예요.
두 번째, 주님의 지시에 의해 존재하기에 그 어떤 일도 내가 상관하면 안되고요. 내가 책임지면 안돼요. 이럴 때 기쁨과 감사가 나와요. 이번 일은 내가 어떻게 수습하지? 그러지 마세요. 수습하면 안돼요. 이미 끝난 거예요. 이미 쭈구리 돼서 끝났는데 무슨 수습을 해요? 내 인생을 왜 수습해요, 내 인생을?
왜 분노하는 줄 알아요? 수습하려 하니까 분노하는 거예요. 자꾸 수습을 하고 정리를 하려 하니까 분노하는 거예요. 우리는 정리할 자격도 없고 정리할 권한도 없어요. 주께서 사건화 시켜서 지금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는 거니까 내가 상관할 일도 아니고 특히 내가 책임질 일도 아닙니다.

주께서 유대인에게 맞아죽음으로써 그게 유대인에게 마지막 남은 복입니다. 지금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마저 죽이게 함으로써 네가 어떤 하나님 없는 민족에게 밟히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네가 감사하라는 뜻이에요.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대항했어요. 대항한 이유가 있어요. 그들은 이 묵시를 찾아가는 데 있어서 역사를 통해서 묵시에 간다고 생각해요. 역사를 통해서 묵시에 이른다고 본 거예요. 그들은 이미-아직, 완료-미완료를 알았어요. 어떻게 알았나? 바로 안식일, 절기 기념.
순환되는 시간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는 점점 더 발전해간다고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대로 따라가게 되면 그 역사의 완성에 자기들은 참여되는 거룩한 진짜 백성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오늘 강의 마무리에 와 있어요. 이제 왔으니까 여러분들이 이해했는가 물어봐야죠. 이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방금 유대인의 잘못은 뭐에요? 실컷 들었는데 그만 응용문제에 꽉 막혀버립니까?

그들이 삭제되어야 될 대상인 것을 그들은 조금도 의심할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신앙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신학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지혜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인간은 원래 그걸 모르게 되어 있어요. 마치 오늘날 우리처럼. ‘내가 왜 안 죽지?’ 라는 질문을 절대로 안 하고 ‘왜 아직도 안 망하지?’ 라는 질문을 못하는 것은, 우리가 아담의 죄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바로 죄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분노하거나 불평할 권한 자체가 아예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모든 범사에 대해서 주께 감사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또 이렇게 하면 또 걱정되는 것은, 제가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왜 안 망합니까? 내가 왜 아직 살아야 됩니까?’ 그 질문을 알려주셔야 되지 않습니까 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알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거 안다고 해서 안 망하는 게 아니고 그거 안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결국 마지막 1이레 시점에서는 더 이상 칸막이가 존재하지 않아요. 여기는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운명이 자기 운명이고 예수님의 아픔이 자기 아픔이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만 있으면 되지, 자기가 쟁반에 모가지 날라가는 거 그거는 뭐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니까요. 내가 죽는 일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불신자가 보면 완전히 미친 거예요, 정말. 자기가 죽는데 왜 자기가 상관할 일이 아니냐. 우리가 내가 죽는데 차 오는데 박아라 할 사람 없어요. 피하죠. 뭐냐 하면 압축→그다음에… 우리 죄가 압축돼서 차 올 때 ‘죽어야 돼, 죽어야 돼.’ 하다가 ‘어? 차온다. 피해라!’ 이거 뭡니까? 나는 죽어야 돼. 이게 십자가 안의 정답이야. 하는 그 정답하고 내가 죽는 것하고는 하나의 지식이고 하나의 이론에 지나지 않죠.
압축은 주께서 압축시키고, 너는 죄덩어리라고 압축시키고. 호일이 구겨지는 것은 이론이고 지식이고 우리의 삶은 아침마다 이미지에 담아요. 나 어때? 어때? 정말 우리는 우리가 감당 못합니다. 우리는 본능대로 해요. 죄된 압축된 본능대로 해요. 날마다 압축해서 삭제하고 대체되는 이 뺑뺑이 도는 이것으로 반복시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사적인 반복이지만 큰 반복, 이스라엘 전체 반복은 너희가 성전 만드는데 망쳤잖아. 내가 성전 삭제시켜줄게. 그런데 다시 1이레에 의해서 내가 대체해줄게. 예수님 자신이 인자이기 때문에 여기서 묵시와 역사가 같이 만납니다. 1이레를 통해서 처절하게 역사의 끝이 되고 부활을 통해서 묵시의 세계가 죽고 부활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여기서 완성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철딱서니 없지만 우리도 못지 않습니다. 저 철없는 인간들을 통해서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 사건만 완성했음을, 나중에 십자가를 믿는 유대인들은 비로소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자기 일이 아니고 주께서 죄인을 가지고 활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하면서 구원받죠. 그걸 성령 연합, 성령으로 확장, 성령 세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유대인을 분석하면서 그들이나 우리나 진배없고 똑같다는 사실이 어쩜 그게 감사와 기쁨이 되는지요. 십자가 예수님 죽인 자가 그들이 아니라 오늘날 일상을 사는 우리 자신인 것을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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