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강-YouTube강의(윤리 시편 138:8)20230620-이 근호 목사
제436강, ‘윤리’. 윤리란 사람이 사람으로서 지켜야 될 도리, 이것을 윤리라 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있을 때는 도덕이라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윤리라 하는 거예요.
동양에 사는 공자, 맹자가 이 윤리를 굉장히 강조했죠. 공자, 맹자는 사람을 가운데 두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다섯 개로 정립했어요. 하나는 임금님에 관한 것, 또 하나는 부모님에 관한 것과 또는 부부에 관한 것, 그리고 형제, 친구에 관한 것과 동기생에 관한 것. 동기생 또는 같은 형제들. 뭐 동기생과 형제를 하나로 합치면 네 개라 할 수 있죠.
그렇게 관계를 정해놓고 가장 이상적인 세계라 하는 것은 그들과의 관계의 정도(定道)를 지키는 거예요. 정도를 지키려면 인간 속에 바른 삶에 대한, 이게 바르게 사는 거다 하는 지식만 있으면 안되고 그럴 능력도 갖고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겁니다.
바르게 산다, 이것이 옳다,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바르게 살 수 있는 능력이 인간 속에 들어있다고 보는 겁니다. 동양에서 말하는 윤리라 하는 것은 정신을 바짝 차리면 되겠죠. 정신만 차리면 못할 일이 없다. 정신만 바짝 차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네 가지 가지처럼 그 네 가지 관계에 있어서 정도, 바르게 살면 이상(理想) 국가가 된다고 보는 겁니다. 하자가 없는 이상 국가. 서로가 서로에게.
신하는 임금에게 임금은 신하에게 정도를 지키면 되고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그렇게 지키면 되고 부부도 마찬가지고 친구나 형제간도 마찬가지고 남편-아내, 아내-남편 서로 정도를 지키면 이상적인 사회가 된다, 라고 했어요.
동양철학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그 동양철학에 대해서 사람들이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는 게 참 희한해요. 동양철학 얘기를 하게 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신이 그렇게 이야기 안해도 평소에 나도 그렇게 살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라는 식으로 반응을 나타내요. ‘당신 말이 틀렸습니다.’ 가 아니라 ‘그거 우리 다 인정하는 진리입니다.’ 라고 인정하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윤리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공감을 할 때 완전한 윤리가 성취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공감을 한다는 것은 공감했다는 시작 자체가 다른 진리는 아예 없다, 윤리 외에 다른 진리는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벌써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는 이미 끝났죠. 확정됐죠. 삼강오륜, 그렇게 살면 되고 네 가지 관계성을 돈독히 하면 되는 겁니다.
자, 이런 마음을 가지고 교회 온다 이 말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에게는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그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정신 바짝 차리는 거예요. 집중하는 겁니다. 바르게 사는 데는 정신만 바짝 차리면 누구든지 바르게 살 수 있는 자질이 모든 인간 태어날 때 이미 함유되어 있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점에 대해서 사람들이 교회 올 때 빈 마음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교회 와서 하나님 말씀대로 듣고 내가 바르게 살아서 바른 인간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교회 오게 됩니다.
그 교인들을 맞이하는 목회자의 설교는 그들의 생각과 문제를 일으키면 안 되겠죠. 마찰을 일으키면 안 되겠죠. 충돌하면 안 되겠죠. 교인들은 이미 목표를 확고히 갖고 교회 왔단 말이죠. 바르게 살기. 교인들의 목표가 뭡니까? 내가 바른 인간이 어디까지 될 수 있는가를 본인이 확인하고 싶어서 교회 온 거예요.
그런데 강단에 뭐가 펼쳐져 있어요? 성경이 펼쳐져 있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 성경 펼쳐보나마나 성경도 ‘너 똑바로 안 살래? 바른 인간 돼야지.’ 그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 읽어도 건성으로 읽든지 아니면 설교시간에 주무시든지. 뭐 다 아는 이야기라 뻔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본인 목적이 바른 인간되기 위해서 지금 최선의 노력을 하기 위해 온 거예요. 정신 바짝 차리고.
그래서 목사 당신이 할 역할은 내가 원래부터 바른 인간이고 지금은 내가 좀 바쁘다 보니까 바른 인간에서 약간 뒤쳐졌지만 당신의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바른 인간 되기에 바짝 정신 차려서 앞으로 더 진전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러한 교훈 같은 거 설교단에서 우리한테 이야기하세요, 라는 태도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연 성경이 말하는 윤리가 인간들이 말하는 성선설,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해서 정신 바짝 차리고 최선을 다하면 지킬 수 있는 그런 윤리도덕적인 사람 만드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 그게 성경이 원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시편 138편에 보면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감사하라. 자, 방금 제가 동양철학에서는 최선의 노력을 하면 바르게 살 수 있다 했죠. 그런데 성경은 감사하라는 거예요. 시편 138편 2절에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감사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이야기를 듣고 교인들이 바르게 살기 위해서 왔는데 성경에서는 감사하라 하죠. 그러면 바르게 사는데 거기다가 감사를 더 보태버리면 내가 내 계획대로 감사하는 바른 인간되는 데에 성공을 한 셈이 되겠죠. 그렇죠? 바르게 살기도 하고 거기다가 뭘 추가한다? 성경 말씀대로 주께 감사하는 것. 하나님께 감사하면 이건 뭐 완벽에 완벽한 사람으로서 점점 더 자기가 훌륭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이 감사라는 것은 자기를 포기할 때 나오는 감사에요. 그것이 ‘주의 이름에 감사’가 되는 거예요. 주의 이름에 감사가 되게 되면 주의 이름이 가만 있어요, 아니면 주의 이름이 활동합니까? 활동하죠.
그러면 평소에 사람이 자기에 대해서 미련을 못 버리고 있고 바르게 살려고 윤리적으로 살려고 애쓰는 이유는 자기 자신이 아직도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내가 나한테 고마워하고 감사할 마음 준비가 되어 있는데 내 이름이 여기 있는데 거기다가 주의 이름에 감사하라 해서 주의 이름을 감사한다 해서 그 감사가 온전한 감사가 될 수 없죠.
바꿔치기해야 돼요. 주님의 활동에 감사하는 거예요. 주의 감사를 방해하고 훼방하는 당사자가 바로 나라는 것을 알고 자기를 미워해야 되겠죠.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방식으로 누구에게 감사한다? 내가 활동하지도 않지만 주께서 활동하심에 감사하는 것, 이게 바로 전쟁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감사하는 거예요.
시편 138편 7절에 보면 “내가 환난 중에 다닐찌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고” 내가 환난 중에 다닐찌라도. 환난을 내 노력으로 내 힘의 이름으로 이것이 온전하게 될 수가 없어요. 환난 자체가 내 힘으로 극복되는 환난을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습니다. 환난을 줬다는 말은 이제는 네가 네 일에 대해서 기대하지 말라고 환난을 준 거예요.
그러면 환난을 주신 것이 주의 활동에 들어갈까요, 안 들어갈까요? 환난 그 자체가 주의 활동에 들어가겠죠. 그게 감사한 거예요. 환난 주신 것에 감사한 거예요. 환난을 안 줬으면 계속 어디다가 기대 걸겠습니까? 내가 어느 정도로 대단한 존재가 되느냐, 거기에 기대 걸겠죠. 그럼 누구한테 감사하겠어요? 예수 믿어주는 나한테 감사할 거 아니냔 말이죠.
그러니까 주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전제가 뭐냐 하면 그동안 주의 일 행하심에 나의 활동이 훼방을 놓았고 가리워 왔던 거예요. 자기부인을 못한 겁니다. 자기부정을 못한 거죠. 성경에서 윤리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주께 감사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