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처음 자리에 우리가 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지금부터는 무척 쉽습니다. 정말 쉬워요. 왜냐면 로마서 9장에 나옵니다. 9장 11절에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얼마나 쉬운지를 몰라요. 뭐냐면, “목사님 제가 뭘 믿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천국 가게끔 남은 자 속에 제가 합류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하나님 왈, 하시는 말씀이 “너한테는 방법이 없느니라. 왜? 네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고, 네가 아직 뭔가 한 것도 없을 때 이미 결정 났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좀 허망하십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 하는 것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구원될 자격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하는 말씀의 자리가 되는 거예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 하는 것은 아무도 몰라요. 오직 주님께서 하늘에서 하강해서 어디까지 떨어지냐면, 십자가에 죽을 때까지 떨어져요. 십자가 죽고 난 뒤에 그다음에 생긴 것이 뭐냐면, 아까 말한 포도나무에서 난 피입니다.
그 피의 의미는, 요한복음 19장에 나온 말씀처럼 ‘다 이루었다.’에요. 성도는 뭐냐면, 매일매일, Everyday, 그 다 이루심에 고개 숙여 굴복하는 삶만 살면 되는 거예요, 그 다 이루심에! 십자가로부터 시작해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십자가로 가는 그 노선, 절차에.
하강했거든요. 그 십자가로 하강했잖아요. 그 십자가로부터 어린 양, 그 당사자 되신 분이 계신 하늘까지, 하강한 다음에 상승이 되는 거죠. 상승 될 때 어떻게 상승하느냐? 치약 짜 올리듯이 상승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만만하게 복음 받을 사람이 아니에요. 여러분, 치약 안 나오면 “치약아 부탁한다. 제발 치약아 부탁한다. 치약 좀 나와줘. 지금 바빠. 빨리 양치질하고 출근해야 돼.” 이렇게 합니까? “에이 이 못된 치약!” 엄지손가락 동원해서 밑에서부터 짜 올립니다. 치약은 아파도 너무 아파요, 치약이. 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의 자기 모습이 나오니까 안 아플 수가 없는 거예요. 자기 의라는 괴물이 집어넣은 자기 성깔이 나오니까, 이 괴물이 집어넣은 자기 의는 안 나오려고 발악을 하고 있는데 주께서는, 성령께서는 밀어 올리죠. 그 자기의 올려서 빠져나오니까 그렇게 속이 시원한걸. 뭐 민트? 박하사탕?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속이 시원~합니다.
‘아, 주께서 이런 여행을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친히 내려오는 여행을 하셨구나.’ 주님의 여행 코스들을 그대로 밟아 나가서 주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우리를 다루어 줌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합시다. 우리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우리한테 어떤 행위도 원하지를 않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그 남은 자를 가지고, ‘은혜로 남은 자’ 이게 감람나무입니다. 이게 감람나무에요.
시편 52편 8절에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감람나무는 노아한테 그냥 배달될 뿐이에요. 성령을 통해서, 비둘기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왔잖아요. 그냥 미래에 감람나무만 여기 천국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11장에 보면, 그 감람나무에 대해서 주께서 어떻게 하냐면, 돌 감람나무에서 새 감람나무를 끄집어내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진짜 여호와와 만남으로서 가짜 여호와를 끄집어내는 것이 하나의 방식이라면, 내가 가짜 인간이에요. 왜? 인간은 없어요. 주께서는 인자 속에서 진짜 인간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을 끄집어내고, 야곱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내고, 사울에서 스데반 집사를 끄집어내면 그게 사도 바울이 되는 겁니다.
마지막 때에, 고통 하는 때에 주님의 고통을 유발하시면서 짜 올리죠. 그 마지막 감람나무가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3절에 보면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1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육십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2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그런데 이 두 감람나무가 그 뒤에 모습 보면 ■3 사람에게 맞아 죽습니다. 맞아 죽는 데 맞아 죽는 그 자리가 소돔이고, 애굽이고, 십자가 지신 곳이에요. 십자가의 그 과정과 절차를 주께서는 반복하십니다. 되풀이해요. 그러니까 우리는, 제가 광주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지만, 우리는 천국에서 일어나서 매일같이 지옥에 출근하고 다시 저녁 되면 천국에서 죽은 자로 잠을 잡니다.
제가 괜히 한 소리가 아니고 골로새서 3장 3절에서 4절에 나온 말씀이에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음이니라.” 그런데 이 요한계시록 11장의 말씀처럼 이렇게 이미 우리는 죽었고 생명이 있는데, 있는 이들이 요한계시록의 이 땅에서 지옥, 마지막 때에 소멸돼야 할 이 지옥에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증인 하는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출근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도 매일 같이 그렇게 출근하고 계시죠? 묻는 게 지금 힘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유명한 믿음의 선배들이 갔던 그 길이 뭐냐? 11장 13절 유명한 말씀 나오죠. 이들은 외국인이었고, 나그네였고, 그들은 떠돌이였던 거예요. 그들이 나온 고향이 있다면 그게 피난처로 간 것이 아니고, 도피처로 간 것이 아니고 도피성으로 간 거예요.
도피성은 특징이 뭐냐면 제사장의 죽음에 합류할 때만 그 도피성에서 나올 수가 있어요. 예수님의 죽음, ‘네가 당했던 살인죄라는 억울한 죽음, 억울하지? ■1 그 체험이 바로 최후의 순간에 비로소 알 수 있는, 미리 너에게 찾아온 예수님의 억울하기 짝이 없는 체험에 같이 참여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2 우리의 기억 속에는 포도나무에서 난 것만 기억하게 되죠.
성도는 뭐냐? 포도나무 전달체, 운반체, 그 피를 운반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네가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했죠. 값을 주고 산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종이 되지 말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23)
우리 안에 피만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이 말씀처럼 이런 신앙의 선배들은 15절에 보면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상승하고 있습니다. 상승하면서 주님께서 얼마나 많은 수모와, 얼마나 많은 오해와, 곡해와 억울함을 당했는지를 성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억울함에 동참하게 만드는, 체험하게 만드는 그 일을 하게 하셨던 거예요. 하지만 그 성도들은 비록 그런 아픔을 겪으면서도 본질상 자기 진노의 자녀에게 주님께서 피로서 사함을 받게 했다는 사실을 예수님과 동참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성령께서 감람나무 잎사귀를 우리 안에 집어넣고 우리 속 안에 담음으로써 비로소 알게 된 거죠. 에베소서 1장에 보면 그 값이 피로 되어 있어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선행이 아니고, 복음 아는 우리의 착함이 아니라 너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기 때문에 어떤 것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뭐로 밀어붙이는가? 네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기 때문에 본질상 나올 수밖에 없는 너의 의, 너의 의에 대해서 내가 나의 의로, 그리스도의 의로 그것을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그 투쟁의 장이 일어나는 겁니다. 밀어붙이는 거예요.
우리한테 뭘 요구하지 않는데 자꾸 우리는 주님께 드리려고 해요. 주께서는, 너의 것은 안 받는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말씀 참 고맙습니다. 안 받으면 그러면 안 하면 되지.’ 안 하면 된다는 내가, 그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의 본색을 유감없이 다 드러내는 거예요.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하늘을 나는 새들처럼 사세요.
바람에 실려, 비둘기에 실린 감람나무처럼, 이미 구원받은 거예요. 우리가 이미 생명입니다. 이미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 소유하지 마시고 생명이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내려왔다가, 몰락했다가 어떻게 상승되는가, 주님이 가신 그 절차를 보여주는 그 모습으로 살아가시면 되는 겁니다. 십자가 피로 시작해서 피로 말미암아 십자가 피로 전달하는 그 전달체, 피의 운반체.
어떻게 우리가 주의 말씀을 증거 할 수 있느냐? 누가복음 21장26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34절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기절할 정도로 임할 것이다. 주님께서 치약 밑에서부터 짜 올릴 때 그 치약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 나 잘난 맛, 나의 의만 우리 몸을 통해서 마구 쏟아내시면 되는 겁니다. 아~ 이걸 가지고 노폐물이라고 하는 거예요. 육의 노폐물. 주께서 육 속에 들어와서 영으로 살린 것처럼 우리가 맨날 육만 보여주면서, 더러운 노폐물만 드러주면서, 나의 잘남만 보이면서 주께 영의 길로 가시는 그런 자유로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다 하셨다’라는 그 말씀 앞에 그 어떤 상황이라도 고개 숙여 굴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이 상상 못 하고 예상 못 한 하나님이 주신 영생의 자유인 것을, 이제는 더는 죽기 무서워서 발발 떠는 마귀의 종이 되지 말고 주님만 증거 하는 주의 자녀로서, 종으로서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면서 그것마저 주의 은혜인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즐거움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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