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1 이 성경말씀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지옥가고, 성경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은 천국 갑니다.
■2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이 땅보다 하늘나라가 더 중요하다는 그런 마음을 생기게 하실 때, 그때 오늘밤에 죽더라도 여러분만은 천국에 가 있을 것입니다.
■3 “네가 관심 두고 있지 않은 그 일에 하나님께서 관심 두는 이 책에 대해서 네가 이해할 수 있느냐?”
■4 천국은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세계
■5 “이 갈라디아서를 모르면 천국백성 아닙니다. 그런 뜻에서 이 책을 줬습니다”
■6 안 태어나도 손해가 아니고, 태어나도 손해가 아니에요. 태어나다가 죽어도 손해가 아니고, 30년 살다가 죽어도 손해가 아니고, 60년 살다가 죽어도 나에게는 손해가 아닙니다.
■7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종교인이지 신앙인이 아닙니다.
■8 “죽었다가 살아난 그분에게 모든 것을 걸겠습니까?”
■9 ‘네비나스’란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특징이 있느냐 하면, 마치 세탁소에 걸려 있는 세탁된 외투와 같아서,
■10 구약의 언약은 언약이 하나 추가될 때마다 반드시 인간이 퍼질러 놓은 죄가 있어요.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홍해를 건넌 사람은 다 죽었어야 합니다. 홍해를 건너왔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다 죽어야 돼요. ‘요단강이라 하는 것은 그동안 아직 인간이 드러내지 않은 그 죄를 드러냈을 때, 그 죄마저 극복이 되는 식으로 앞으로 더욱 더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라는 차원에서 그 다음 언약이 부여 됩니다.
그러니까 더 쉽게 말하면,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더한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를 더해준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를 더해주는 거예요. 애가 “국이 짜다”고 하면 “얼마든지 더 짜라. 얼마든지 하면서 물을 부어 주는 거예요.” “짠대?” 또 물 부어 버리는 거예요. “지금도 짜?” “이제는 안 짜” 그래도 물 부어 버리는 거예요. “이제는 어때?” “이제는 물 뿐이야.” “그래. 물뿐이야.” 하나님의 용서뿐이야. 사랑뿐이야. 마지막에 사랑만 남기기 위해서, 사랑만 눈에 보이기 위해서, 자기 지은 죄가 안보이기 위해서, 인간이 지은 죄를 더욱 더 나타나게 하고, 나타낸 죄보다 더욱더 큰 사랑과 용서를 퍼부어서 결국은 사랑만 남게 하는 이 방법을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실시했습니다.
사랑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자기가 자기를 용서해서 구원받는 방법이 없어요. 자기가 스스로 의로워서 구원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예수님을 안다고 해놓고는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방법인 율법과 행함을 가지고, 자기를 열심히 단련시키고, 절제하고, 낮추고, 자기를 때려서 구원하고자 하는, 즉 사람에게서 나는 방법으로 자기를 구원하려는 이런 방법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그것이 언약의 완성입장에서 그것이 아니라는 쪽에서 갈라디아서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2강
■1 옛언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자기 행함을 발휘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이것이 옛언약의 공식이라면, 새언약은 모든 인간을 죽여 놓고, 오직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만 그 말씀이 납득이 되고, 이해되고, 믿어져서 ‘나의 구원은 행함이 아니고 주님의 공로구나’하고 알아지게 하는 것이 새언약의 법칙입니다.
■2 어떤 인간도 갈라디아서가 해석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뿐만 아니고 다른 책도 다 마찬가지인데, 성령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경도 인간의 해석으로 되지를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그것으로 갈라디아서는 해석이 되는 거예요. 이것이 인간에게서 나온 지혜로는 해석이 안 된다는 것을 폭로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해석하지 못하지만 갈라디아서 자체가 우리를 해석하는데 충분하게 성공을 하는 거예요.
■3 갈라디아서는 우리가 지키는 입장에서 갈라디아서를 접근하면 안 되고, 갈라디아서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의 죄가 뭐냐? 그것은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죽였다”는 이 사실뿐이에요. 십자가입니다.
■4 그 새언약 봉투를 열어 보니까 노선이 두 노선이라. 한 노선은 약속에 의해서 영생 줄 사람의 노선, 그런 봉투가 있고 또 한쪽 노선은 뭐냐?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을 노선이 있더라는 말이죠.
■5 얼마나 복음적으로 살았으면 마귀가 바울을 알겠어요. ‘그러한 새로운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이 갈라디아서가 해석이 안 되고, 그 해석이 안 된 사람은 사람도 아니다’ 하는 것이 이 갈라디아서가 우리보고 외치는 소리입니다.
■6 갈라디아서 1장 4절, 5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데, 예수님이 영광을 받는 방법에 대해서, 우리가 제시한 방법을 사용합니까? 아니면 주님 자신이 홀로 행했던 방식으로만 홀로 영광을 받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예수님 자신이 행한 방법으로 영광을 받지요. 그 방법이 뭐냐?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자기 몸을 드리신’ 그 범주 안에 있을 때만 비로소 예수님께 영광이 되는 그러한 공식이 성립되는 겁니다. 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기가 구원받은 것이 내 쪽에서 뭘 드린 것이 아니고, 주님 쪽에서 자기 몸을 드린 것, 그것으로 인하여 영생을 얻는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을 놓쳐버리면 그 사람은 이미 지옥가기로 준비된 사람이에요.
3강
■1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갈라디아서 1장 4절에서는 이야기해 줬습니다. The Lord Jesus Christ gave himself for our sins, that he might deliver us from this present evil world, according to the will of God and our Father:
하나님의 뜻이 장마 비 오듯이 인간에게 쏟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한테는 아예 오지도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내용을 우리가 생각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왜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내용을 기도할 수 없느냐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은 성경말씀인데, 그 성경말씀 어느 구절도 우리가 지킬 수가 없어요.이 갈라디아서에 보면 성경말씀을 한번 지켰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항상, 그것도 한두개가 아니라 전부다, ‘전부 다를 항상 지키지 아니하면 그 인간을 저주 하겠다’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우리 인간은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그 대신 죄에서 올라오는 하나님의 뜻을 요구하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오게 하지 않고, 우리 예수님한테 일괄해서 다 몰아넣어 버립니다. 예수님한테 하나님의 뜻을 다 몰아넣는 그것이 주의 뜻이에요.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주의 뜻을 이제 알았으니까 여러분들은 이제 두 번 다시, ‘주의 뜻이 뭔지 모르겠다. 주의 뜻이 희미하다. 주의 뜻이 모호하다.’ 앞으로 그런 이야기 하면 됩니까? 안됩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하나가 다 주의 뜻이니까, 달리 주의 뜻이라는 것을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 주의 뜻이 다 몰렸는데,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 1장 4절에 보니까, “자신의 몸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몸을 드렸다.” 이게 아주 기분 좋은 말입니다. 왜 기분이 좋으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요구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은 사람에게 뭘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예수님이 자기 몸을 드려요. 드린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상대의 가치를 묻지 않고, 아예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를 묻지 않고, 그 사람의 허점을 따지지 않고, 시비를 걸지 않고, 드리는 쪽의 기쁨으로 그냥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정리해 보면, 하나님의 뜻이 뭐라고요? 우리가 하는 것은 다 죄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것은 일체 받지를 아니하시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에게만 몰려 있고, 하나님의 뜻이 몰려 있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자기 몸을 주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땅땅땅!’ 결정을 내렸어요. ‘더 이상 없음.’ 이게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유혹하더냐?”
“여러분! 제 몸 갑니다. 지금.” 하고 ‘자기 몸을 가져다 바침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룬 것이고, 그 몸 안에서 우리에게는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이 주의 뜻이에요. 여러분! 이거 이해되십니까? 그 다음에 이것이 어렵기 때문에 글로 쓰겠습니다. ‘말씀대로 세상을 만들어 나가신다.’ 이게 어려워요. 이게 어렵다고요. 이 말씀에다 괄호를 해서 ‘말씀(복음)대로 세상을 만들어 나가신다.’ 이 뜻이 굉장히 어려워요. 왜 어려운가 하면, 우리들은 자기가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말씀을 가지고 위로 받기 위해서 말씀을 찾아오게 되지요? 그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 여기 있고, 말씀 저기 있고, 내가 어려울 때 말씀을 가지고 위로를 받으련다.’ 그것은 왜 잘못이냐 하면, 내가 다가가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말씀이 만들어 나가다 보니까 나 같은 인간이 생긴 거예요.
내가 여기 있고, 말씀이 저기 있어서 쪼르르 말씀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없었는데 나보다 말씀이 먼저 있어서, 없는 나를 이것도 만들고 저것도 만들고, 여러분도 만들어 낸 겁니다. 말씀이 알아서 말씀을 증거 하는 증거물로서 하나둘씩 만들어 낸 것이 저와 여러분들이다 이말 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이것을 이해하겠어요? 상당히 어렵지요?
구체적으로 더 분명하게 말하기를, ‘복음을 위하여 복음대로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복음대로.’ 복음대로 세상을 만들어 나가면, 여기서는 반드시 지옥 갈 사람도 만들어야 되고, 천국 갈 사람도 만들어서 둘 사이에 분명한 차이를 두는 식으로 이세상의 모든 것이 다 만들어 지는 거예요.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여기 있고, 자, 나를 어떻게 하면 천국에 보내지?’ ‘옳지 복음을 믿어야지.’ 이런 식으로 하면 그것은 옳지 않은 거예요. ‘자, 나무가 여기 있는데, 이 나무가 말하기를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옳지 말씀을 믿어야지.’ 이런 식으로 하면, 나무가 자기 주제파악을 못한 거예요.
다시 합시다. 하나님의 모든 뜻이 다 어디로 쏠렸다? 예수님에게 쏠렸다. 하나님의 뜻이 다 예수님에게 쏠렸으면, 그 다음부터는 이 세상의 모든 것,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나뭇잎새 하나하나 까지도 전부다 예수님이 갖고 있는 복음의 뜻을 위해서 바람에 흔들려야 하는 겁니다. 밤중에 소리 없이 활짝 핀 그 달빛도. ‘그 달빛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오늘도 그렇게 비추이나 보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인 이 복음을 위해서 다 있어야 되는 겁니다. 따라서 심지어 나중에 있는 천국과 지옥까지라도 복음이 기준이 되어서 천국과 지옥이 쫙 갈라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1장 8절에 있습니다. 제가 읽어볼게요. (갈라디아서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찌어다
■2 죄에서 나온 복음이 다른 복음이고 이 복음이 이어져서 저주를 받습니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지옥에 놓여진다는 말 입니다. 인간은 어떤 죄를 짓느냐 하면, 죄에서 나오는 것은 환상, 또는 상상입니다.
어린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어린아이가 있는데, 점점 나이가 들수록 시체가 될 정도로 늙어가고 죽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처음에는 건강해 보이지만, 세월이 갈수록 점점 본색을 드러내면서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느 시점, A라는 시점, B라는 시점을 딱 끄집어내서, ‘이것이 나다. 이것이 참다운 나다’라고 끄집어내어 봤자, 그것을 붙잡을 수가 없어요.
“목사님! 저는 항상 웃음이 넘치거든요”라고 웃는 순간, 사정없이 귀때기를 때리면 “왜 때려!” 하고 화를 낸다는 말이죠. 한순간 웃더라도 그 다음에 하나님의 어떤 돌발적인 사태가 닥칠 때, 그 사람은 어떻게 될지 상상도 못하죠. 우리는 늘 우리의 것을 상상하면서 사는데,하나님편에서는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일들이 항상 준비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우리는 날마다 허구만 상상하는, 꿈만 꾸고 껍데기밖에 없는, 나중에는 이 껍데기마저 바삭 바삭 다 부서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채로(새우튀김이나 닭튀김 할때 바삭바삭 다 부서지잖아요),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메일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목사님! 제가 평생 동안 힘든 일을 해서 제 몸이 아픈데,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몸이 아픈 나에게 ‘항상 기뻐하라’는 그런 심한 말을 합니까? 저는 항상 기뻐하려고 애를 쓰는데 몸이 안 좋아서 항상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까? 그런 편지를 제가 받았어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답장할래요? 제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이라는 기계를 죽음을 향하여 망가지도록 하고 계신다는 그 자체를 항상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답변이 어려워요.
여기 지금 종이가 있습니다. 이 종이가 하는 말이, “목사님! 제(종이)가 이렇게 지금 꾸겨져 있는데 어떻게 하면 반듯한 종이가 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답변은 “꾸깃 꾸깃 꾸깃!(종이를 마구 구겨버리는 소리). 없지!”
예수님께서 내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이 종이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는 일을 하시는 것을 가지고 ‘항상 기뻐하라’ 이 말이죠. 지금 우리의 아픈 몸도 언젠가는 다 고장 나서 없어집니다. 그렇게 없애시는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가지고 기뻐하자는 말이죠.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웃느냐를 가지고 기뻐하지 말고, 나라는 자체보다 나라는 자체를 가지고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퍼붓고 있다는 이점이 좋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모자라는 나에게도,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계속 일을 나에게 퍼붓고 계신데, 그 퍼붓는 이유 중에 하나가 뭐냐? 이 망가진 몸 가운데 있는 나를 위해서 지금도 죽음으로 죽음으로, 기계가 망가지고 완전히 부서지도록 없애는 일을 지금 하고 있다는 그 것을 보고 기뻐하라는 말이죠. “주님! 오늘도 기뻐합니다.” “왜?” “오늘도 이 몸이 부서지고 죽어가니 감사합니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 내 소원대로 되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뜻이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기쁨의 근거가 되고 기쁨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맨 날 상상하는데, 상상하는 것이 누구 위주냐 하면 예수님 위주가 아니고, 전부 다 자기 잘되기 위한 자기위주의 상상을 합니다. 사람들의 죄의 모습을 글자로 쓰면 이렇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세우면 용서가 안된다.” 이것은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모든 문제가 다 이것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누구든지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세운다면 나는 그자가 누가 되었든지 나는 용서를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말은 결국 뭐냐 하면, 사람들이 평소에 모든 노력과 노동과 행동을 하는 그 목적이 어디 있느냐 하면,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나를 나쁜 사람에서 건져 내기 위해서 행동을 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지독한 ‘자기의’입니다. ‘자기의.’
■3 복음이라는 것은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고, 복음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오로지 예수님에게만 모여 있는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복음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 예수님에게만 일어난 뜻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 되기 위해서 자기를 가꾸는 일에 봉사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자기 몸을 드림을 모독하는 다른 복음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보니까 다른 복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지요? 제가 아까 순복음 교단을 이야기 했지만 순복음뿐만이 아니고 순두부도 마찬가지이죠? 순복음이든, 순두부든, 순곱창이든. ‘내가 여기 있다’는 이 말은 나에게서 다른 복음이 튀어 나온다는 뜻입니다. 다른 복음이 계속해서 튀어 나오는 거예요. 다른 복음이란 나와 하나님 사이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확 빼버리는 것이 다른 복음이에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확, 뿌리채 뽑아버리고 직접 하나님과 맞상대 하겠다는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4 다른복음을 한 설교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눈감고 성경 아무 본문이나 펼치겠습니다. 딱 펼치니까 빌레몬서가 나오죠. 1장에 떡 보니까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몬 1:22).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교회들아 사도바울이 방문할 때 잠자리 좀 마련해줘” 이말 이거든요.
” 이 본문을 설교할 때 어떤 것이 비복음이고 다른 복음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목사님 갈 때 제발 잠자리좀 준비 잘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를 믿습니까?” 이렇게 하면 그것이 다른 복음이에요.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복음이냐 하면, “사도바울이 가는데 처소를 예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 뭘 할 때, 자기 공로와 자기 의로움이 추가가 되어야 할 텐데, 처소를 예비할 때, 자기를 부인하고 처소를 예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 오늘 서울에서 오셨는데 제가 처소 하나 예비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일을 하다니 참 부끄러워요. 어떻게 제가 죄인인데도 이런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자기를 낮추면서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하게 되면, 어떻게 상상하냐 하면, 그 행동에 의해서 반드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어떤 보상을 기대하는 쪽으로 상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상상으로 인하여 또 다른 복음이 우리 속에서 생산되고, 양산되고 있는 겁니다.
진짜 복음은 “아무개야!” “예!” “너는 어떤 목사님의 처소를 예비하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라”하는 주님의 지시와 명령(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만 되기 때문에)에 따라서, 오직 주께서 지시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을 때, 그때 모든 공로는 누가 가져가시는가 하면 내가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홀라당 다 가져가 버립니다.
어떻게 행동을 해도 모든 공로와 영광은, 예수님이 다 가져갈 때, 그렇게 되는 그런 마음이 생길때, 그 마음이 바로 바른 복음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내 모든 공로를 다 가져가려면,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죄인으로 남아야 돼요. 죄인으로 남아야 되고, 예수님만이 의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이 바른 복음으로 남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바가 되는 겁니다. 다른 복음이란 항상 눈만 뜨면 나 위주로 상상한다는 것이 다른 복음이 아주 활발하게 생산되고 양산되는 그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백성 같으면, 예수님께서 자기의 공로를 자기백성에게는 담지요. 담기 위해서 그 사람이 상상하고 예상한대로 일이 안되고 꼬이기 시작합니다. 꼬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런 예수님에 대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지요. 그 미워하는 그 순간과 더불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자기 몸을 드렸다는 것을 마주하게 하실 때, 비로소 나는 죄인이며, 오직 모든 구원은 주님의 공로에서만 나온다는 것이 짧은 순간(어떤 분은 0.2초라고 하는데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난 2.5초 정도는 봐줬는데. 주일에는 2.5초, 보통날은 1.5초. 하여간 0.1초든 뭐든간에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같으니까 시간과는 관계없고), 뭔가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 ‘이것은 다른 복음이야’라는 것을, 그때 그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어요. 느끼는게.
느껴진다고요. ‘아~! 내가 또 상상을 해서 나를 기준으로, 나 위주로 하다 보니까 하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구나.’
자기 애가 시험을 쳤다. 성적표를 받아왔다. ‘지난번 시험에서는 반에서 중간쯤 했는데 이번에는 공부를 열심히 했으니까 아마 좋은 성적 나왔을 거야. 잘하면 1등이나 2등도 할 수 있을거야’라고 잔뜩 상상하고 기대를 했어요.
그렇게 기대를 했는데 막상 성적표를 받아서 보니까, 일이등은커녕, 끝에서 일이등을 해버렸어요. 그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원망스러워요. ‘주님도 자식 낳아 보세요. 이것이 기뻐지는가? 예수님은 경험을 안 해봐서 모르시죠. 애를 낳아서 경험을 해 보세요. 이것이 기뻐지는가?’ 이러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누구든지 어떤 경우라도 나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세우면 나는 용서가 없다. 나는 못참는다’는 말입니다. 그게 예수님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참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항상 십자가와 무엇과 견주냐 하면, 십자가와 자신의 의와 항상 이렇게 견주어요.
왜냐하면 십자가라 하는 것은 인간의 본색, 자기는 나쁜 사람 안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색, ‘내가 나쁜 사람입니다’라고는 하지만, 나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 때문에, 약간이나마 전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의식을 갖고 싶어 하는 그 심정. ‘내가 나쁜 놈입니다’라고 자인했다는 그것이 얼마나 뿌듯하게, ‘약간이나마 그래도 선한 사람 되었지 않느냐’ 하고 자부를 느낄 정도로 인간들은 자기 절대성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도와 함께 계시면서 성도를 다룬다는 것이, 예수님 편에서 보통 고역이 아니에요. 성질 더러운 인간들하고 상대하려고 하니까 주님께서 애가 다 타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성령의 탄식’이라고 합니다. 탄식이 뭐냐? 무릎을 치는 거예요. “어이구! 어이구! 어이구!” 이 탄식이 아모스에 보면 뭐라고 나오냐 하면, “어이구! 화로다.” 이렇게 나옵니다.
탄식하는 거예요. “어이구 인간아! 인간아! 그렇게 네가 잘났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환난중에 기뻐하노니, 환난당하는 것이 나에게 유익이라. 내가 약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보통이 아니죠? 내게 환난이 주어질 때, 환난을 통해서 나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가 다 했다는 것을 알아서, 예수님이 하신 것 때문에 행복하고, 예수님이 하신 것 때문에 내가 맘 편하고, 기쁘고. 그게 더 기쁘다는 거예요. 내가 뭘 했다는 기쁨보다도.내가 하는 것은 매일 상상해서 하는 그것이기 때문이죠. 내 애가 만약 10등이라면, “잘했는데 다음에 5등해.” 10등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5등이라는 것을 상상하고, 5등 안되면 7등했다고 또 화를 내고, 매일 매일 자기 위주로 상상하고 또 상상하다가 볼일 다보고. 여기에 무슨 행복이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조바심과 안절부절, 신경통, 류머티스, 편두통, 변비,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안 아픈데 없이 오만 군데 다 아프고.
세상이 그렇게 안절부절 하는 것은 오직 하나, 매일같이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같이 상상해요. 그게 바로 우리가 만들어내는 다른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