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2006 갈라디아서 10강

아빠와 함께 2023. 5. 18. 14:06

갈라디아서 제 10강 (이근호목사, 2006년 11월 10일(2), 서울의존교회)

‘전 시간에, 율법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율법이 십계명인데 그 십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십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다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 저주 받기 위해서 있는 셈이 됩니다. 물론 아직까지 언약과 약속, 이 두 가지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 ‘사람이란 율법의 저주를 받기 위해서 있다’고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아! 이것은 억울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저주 받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리는 없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저주를 주기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지요. 그러면 뭡니까? 그 앞에 뭐가 있지요? 언약이 있습니다. 언약을 위하여 사람이 있는 겁니다. “금방 목사님은 율법에 의해서 저주를 받기 위해서 사람이 있다고 해놓고는 왜 다른 이야기를 또 하십니까?”

제가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기 위해서 사람이 있다. 언약을 위해서 사람이 있다’고 자꾸 이야기하는 것은, 언약이나 율법이나 약속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람이 언약과 율법과 약속을 위해서 있는 겁니다. 그 증거란, 우리는 풀의 꽃과 같이 없어져야 되지만 무엇은 영원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언약, 율법, 약속 이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거든요. 이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영원하지 말아야 돼요.

언약이 영원해서 약속이 되거든요. 언약이 약속이 됩니다.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이니까 아직 약속은 등장하지 않을 때가 언약이니까 그 언약의 영원함을 위해서 사람이 갖고 있는 언약은 무너져야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해 줘야 합니다. 언약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언약을 이야기 합니다. 아브라함 언약에서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것이 어린이들에게는 참 어려운 이야기 될 겁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의 아버지가 데라가 아닙니다. 데라가 낳은 자식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브람입니다. 야곱의 아버지가 누구지요? 이삭이지요. 그런데 이삭은 절대로 이스라엘이라는 자식을 낳은 적이 없습니다. 이삭이라는 아버지가 낳은 자식은 야곱입니다. 더 알기 쉽게 이야기를 하면 처음 내 몸에서 내 자식을 낳을 때는 내 자식이라고 낳았는데 나중에 그 자식이 열 몇 살이 되어서 하는 소리가 “엄마! 나는 하나님의 자녀야.”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란 말이죠.

‘나는 이상하게 하나님의 자녀를 낳은 적이 없고 내 자식을 낳았는데 누가 가로채서 저 자식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었는가?’ 그 말입니다. 언약이 그렇게 한 겁니다. 쉽게 하겠습니다. 성경 두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 13절을 보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여기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죠. 사람은 아니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라고 했을 때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했어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고(네 부모가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예수님의 아버지)시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아버지가 바뀌었어요. 태어날 때는 부모님이 있었는데, 예수 믿고 난 뒤에는 하나님이 부모님이 되셨기 때문에 앞으로 그 아들의 모든 인생은 하늘에서 책임집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에 보면 그 이유가 나오지요.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누가 불러 줬다고요?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 와! 이것은 얼마나 황홀한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날 불렀대요. 여러분을 불렀대요. 장례식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당장 안 죽더라도 이런 고백이 있어야 돼요. 군대 가서,

“어이! 김일병! 너는 누구야?”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이게 미쳤나? 여기가 교회냐, 군대냐? 너 누구야?”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너의 아버지는 누구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입니다.”

천사만이 하나님이 만들었고, 천사만을 하나님이 불렀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십니다. 못나고 천한 우리를 하나님이 불러줬습니다. 못나고 죄 많은데 왜 불러줬는가? 그 이유가 뭐냐? 하나님의 진짜 아들 되시는 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포기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었기 때문에, 우리보다 더 낮은 자리로 가셨기 때문에 그 낮은 자리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칭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정하고 안정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과 의논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하시는 일은 간단해요. 이 세상에서 아버지와 자신의 의논된 바, 하나님의 자녀로 확정된 자에게만 이 믿음을 주기만 하면 끝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전까지는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전까지는 믿음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믿음을 줄때 그것을 가지고 갈라디아서에서는 “믿음이 왔다”고 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에 보면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아래 매인 바 되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믿음이 오기 전에.” 믿음은 하늘에서 와야 된다는 겁니다. 보통 알기를 믿음은 누가 만든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알아서 만든다고 믿잖아요.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만들 수가 없습니다. 보통 믿는다고 할 때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럴 수 있는 믿음 같으면 우리는 백번이라도 먼저 합니다.

“우리는 운전사를 믿습니다. 택시 운전사를 믿고 택시를 탔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신념이고 확률이죠. 믿음이란 우리 속에는 없는 거예요. 왜 믿음이 없느냐 하면, 원래 언약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맺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언약을 맺을 때 여기에 믿음이 발생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도 물론 예수님을 믿지요.  그런데 이 믿음은 우리가 죄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믿음은 우리에게는 없어요.

믿음이 오게 되면 저주 안에 있는 우리에게 침투가 됩니다. 침투가 되면 그 때부터 우리에게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갖고 있었던 그 속마음, 심정이 들어오게 됩니다.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어떤 내용으로 약속을 했는가’가 나옵니다. 그 약속이 뭐냐? “창세전에 너를 사랑했다”는 겁니다. 믿음이 오기 전까지는 중심이 누구 중심입니까?

나 중심이기 때문에 “하나님! 다른 사람은 다 죽어가도 저는 구원해야 합니다. 저는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하고 자기의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 희망사항이죠. 자기가 살고 싶고 기어이 자기를 살리고 싶어서 내가 내 맘대로 만들어 낸 겁니다. ‘만약에 내가 내 맘대로 살고 싶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사도 바울이 한 이야기를 이해 못합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비록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우리 형제 동포들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우리 형제가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이 말을 이해 못하고, 하지도 못해요. 언제 그 말을 할 수 있느냐 하면, ‘나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고, 예수님하고 하나님 사이에 있던 그 언약의 내용이 담기는 그릇이라고 이해 할 때만 비로소 그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주여! 주의 약속(말씀)만 제 빈 마음에 그저 담기게 하옵소서.” 이것을 두자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는 사람은 뭘 알아요? 예수님하고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아요. 믿음의 눈으로만 성경은 다 보이게 되어 있어요. 믿음이 오기 전에는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왜 알 수가 없는가? 그 이유는 꽁꽁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묶여 있다는 이야기가 갈라디아서 3장 21-24절까지입니다.

그 말이 어렵기 때문에 그것을 그림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아까 언약 더하기 율법을 하면 무엇이 나온다고 했습니까? 약속이 나오지요. 사람은 율법을 위해서 만들어 놓았다고 했지요? 또 사람은 언약을 위해서도 만들어 놓았다고 이야기 했지요? 율법을 위해서 사람을 만들어 놓았다면 사람이 율법을 못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저주 받지요. 저주 받는다는 말은 반드시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느냐? 죄가 있지요.

그래서 사람은 율법과의 관계에서 어떤 관계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저주 받는 관계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사람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제가 언약에 대해서 이야기 했지요? 언약은 누구와 누구만이 압니까?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 사이에서 이미 다 결정 난 사항입니다. 사람은 여기에 못 들어갑니다.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이미 죄 속에 있기 때문에 안됩니다.

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이 왔고, 율법이 오고 나니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율법 아래 갇혀 있습니다. 이렇게 갇혀 있는데 그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그 언약이 누구에게 들어오는가? 이 율법에 속한 사람에게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속한 사람은 저주 안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게 참 어렵습니다. 율법에 속한 사람은 그냥 죄로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에 속한 사람 말고 여기서 다른 사람을 만들어 내요.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고 야곱은 이스라엘이 됩니다. 또 요한복음 1장에 나오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아들이 됩니다. “혈통이나 육으로 나지 않고” 무엇으로 났다고 했습니까?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됩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에 보면 우리는 누구의 부르심을 받습니까? “하늘의 부르심을 받아” 같은 한 형제가 되었지요.

이것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생기게 되면 여기에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맺은 언약이 담길 때, 이것은 율법관계가 아니고(즉 율법의 행함관계가 아니고) 믿음의 관계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이미 인간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가 있어요. 죄가 있고 그 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인간은 저주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으로 끝입니다. ‘인간은 저주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저주받고 죽어야 한다’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다 그길로 가야 합니다.

가는데 이 바깥에 누가 계시는가? 예수님이 계셨고 그 예수님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고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범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창세전부터 약속한 것이 있어요. 약속한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활동을 개시하는데, 두 분 사이에 맺은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새로운 인간을 만듭니다. 새로운 인간을 만들 때는 하나님이 직접 불러줘야 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구나 이것을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예수님의 아버지)가 알게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는데 예수님이 모델이 되어서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놓습니다. 만들어 놓으면 그 인간 속에 예수님과 하나님사이에 있는 그 내용이 담기게 돼요. 이것을 가지고 “믿음이 왔다”고 합니다.

몽학선생이라는 것이 뭡니까? 몽학선생, 가정교사라고 하니까 잘못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식선생님한테 배우는 학교에 다니기 전에 기초학력을 닦기 위해서 집에서 가정교사를 두는 그런 경우를 몽학선생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그러면 몽학선생은 하나의 준비단계가 되고 몽학선생을 통과하는 사람은 다 구원받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율법이 몽학선생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율법아래 있는 사람은 다 구원받는다는 뜻입니까? 그것이 아니거든요. 몽학선생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작업을 벌리기 전에 자기 힘으로 구원될 수가 없음을 가르치는 것이 몽학선생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어떤 선생이냐 하면, ‘네가 아무리 해도 네 힘으로는 스스로 구원될 수 있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되새기고 되새기고 또 되새기는 거예요.

예를 들면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십계명 지키면 구원 받잖아요”라고 했을 때 로마서 7장에 보면 십계명 중에서 어느 계명도 못 지킵니다. 심지어 십계명 중에서 마지막 계명이 무슨 계명입니까? “탐내지 말라”입니다.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못 지키는 이유가 뭡니까? 객관식 문제입니다. 1) 너무 어려워서 2) 무슨 말인지 몰라서 3) 그걸 지킬 능력이 없어서 4) “탐내지 말라”는 것이 우리를 지배해서.

위에서 답이 몇 번입니까? 4) 번이죠. 우리는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지키고 싶더라도 율법이 우리를 율법아래 두기 위해서는 율법이 우리를 못 지키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율법은 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속에 있는 잠자고 있는 죄를(콧털을 건드리는 식으로) 발동시킵니다. “탐내지 말라”를 보는 순간 우리는 ‘탐내지 말아야지’하는 마음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센 세력으로 작용합니다.

‘탐내야 돼. 탐내야 돼. 탐내야 돼’ 이것을 온 천지에 다 퍼지게 만들어서 나는 탐내고 싶지 않은데 내 속에서 원치 않는 죄가 나로 하여금 기어이 탐내게 만들어요. 그래서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율법이라는 몽학선생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어요. 단단히 지키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이야기가 이런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도리어 너희들이 자력으로 깨닫고 자력으로 알아서 돌아올 까봐 내가 저지한다.”(마 13:13-15)

‘믿음이 오기 전에 자력으로 말씀 지켜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예수님이 저지 한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증거 하는 주님의 천국의 특징은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특징’이 있어요. 이런 소리는 여러분이 최초로 들었을 거예요. 참된 천국은 인간이 구원되지 못하도록 적극 막는 겁니다. 이것이 천국의 능력입니다. 구원을 시켜주는 천국은 가짜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마태복음 12장 28절에 보면 진짜 천국은 내가 탈출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고 탈출할 엄두도 못냅니다.

왜? 죄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죄 짓는 방향으로 나가도록 나를 몰아  넣게 되어 있어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부터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알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기도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우리는 필요한 것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주께서 아시니까 너는 무엇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그런 것을 구하지 말라”(마 6:8)는 겁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8-15) 아무리 당부를 해도 하지 말라는 그것이 우리 속에서 더 큰 울림이 되어서 그것을 하고 싶어 해요. 그것은 몽학선생인 율법이 우리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죄와 상대하기 때문에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뽑듯이 율법이 오면 잠자는 사자를 일부러 깨워서 우리가 죄안에 갇혀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겁니다.

용인에 가면 에버랜드 동물원이 있습니다. 동물원 바깥에서 동물을 봅니까? 아니면 동물우리 안에서 동물을 봅니까? 바깥에서 보죠. 안에 들어가면 사자에게 잡아먹히죠. 바깥에서 동물을 바라본다는 것이 뭡니까? 우리는 오해하기를 말씀은 내 바깥에 있고, 나는 그 바깥에서 말씀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아요.

내 안에 양심이 있고 내 안에 율법이 있어서, 이 율법이 나로 하여금 사자우리 안에서 사자와 함께 있는 것처럼 죄와 함께 있음을 들춰내는 일을 하나님의 말씀이 하는 겁니다. ‘나에게 이런 죄가 있구나.’ 어떤 어린이가 있는데 아주 깨끗하게 사는 것을 소망해요. 공주처럼 살아가고 싶은 거예요. 공주처럼 살아가기 위해서 행동도 공주처럼 하는 겁니다. 선생님이 이름을 부르면 공주처럼 대답하고요.

하루는 이 공주가 학교에서 앞에 나가 칠판에 문제를 풀다가 그만 방구를 뀌었어요. 그럴 때 부끄러워서 어찌 할 줄을 모르잖아요. 자기가 뀌고 싶어서 그랬습니까? 나오는 것을 어떻게 해요. ‘아무리 숨겨도 숨겨도 나에게 이렇게 지저분한 것이 있다니!’ 그것은 숨길수가 없는 거예요. 그처럼 사람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자신을 곱게 곱게 숨겨도 어떤 순간이 오면 자기의 본색을 나타냅니다.

젊은 여자분들의 고민은 자꾸 늙어간다는 겁니다. 젊을 때는 젊기 때문에 ‘삼십이 되면 삽십대로 살고, 사십이 되면 사십대로 살고, 오십이 되면 오십처럼 사는 것이 인간이고 그것이 성경적이고 풀은 지면 그만이지’라고 이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사십이 되고 오십이 되니까 늘이고 높이고 깍습니다. 나중에는 사진도 안 찍으려고 합니다. 우리교회 장로님은 사진도 찍지 말라고 합니다. 왜? 늙은 모습이 보기 싫다고요. 거울도 안보는 분이 있어요.

잘나가던 미남시절의 추억을 계속 간직하고 싶지 그 추억을 깨는 처참한 짓을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울을 보면 매일 보는 거울이기에 좀 덜 늙어 보이죠. 가끔씩 사진을 찍으면 ‘왠 귀신? 무서워라. 여기 귀신이 왜 있지?’ 젊은 분들은 그것을 잘 모르지만 연세 많이 드신 분들은 사진을 보면서 질겁을 합니다. 자기보다 십년은 더 늙어 보이는 자기가 거기 있을때 두 번다시 사진 찍기 싫어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사진 삼, 사십년 전에 찍은 것을 그대로 가지고 다니면서 자기라고 우기고 다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율법의 사람이기 때문에 율법의 조목  조목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가져다주는 가를 보여주는 죄의 진열장, 죄의 쇼윈도로 우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안 죽고 싶어도 있는 죄를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주머니 속에서 하나하나 다 끄집어내는 것처럼 살아가면서 십계명 지키기는커녕 십계명 못 지키는 것으로 다 튀어 나와요. 결론은 뭡니까? ‘그래서 너는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죄가 담겨있는 줄을 몰랐지요.

나이가 적으면 죄지을 기회가 적기 때문에 때가 아직 덜 나와요. 그런데 연세가 들면 들수록 죄짓는 기회가 점점 많아지기 때문에 죄가 계속 나와요. 끊임없이 나와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기가 막히게 알고,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데 맨 날 아침에 눈만 뜨면 염려하고, 남의 눈의 티를 보지 말라고 했는데 전부 다 남의 티를 보는 것이고, 연예인들에 대해서 험담하고, 남 욕하는 재미로 삽니다. 어른이 되면 하루 일과가 그겁니다.

욕도 못하는 사람이 운전을 하면서부터는 욕이라는 욕은 다 배워서 합니다. ‘여자인데 어떻게 욕을 해.’ 나중에 보면 여자가 남자들 보다 더해요. 식당에서 보면 연세 많은 아주머니들이 소주를 왜 그렇게 드시는지. 제 나이대에서는 여자가 술을 먹는다는 것은 용서가 안 되는 나이입니다. 술을 드셔도 한 60쯤 되어서는 그런대로 봐줄 수 있지만 그 전에는 안된다는 겁니다.

지금은 술집에 여자가 더 많을 정도입니다. 술 없이는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꼭 술이 있어야 여자들끼리 대화가 되니까 내 선입관을 고쳐야 되는 문제인지, 누구를 고쳐야 될지를 모르겠어요. 철학적으로 이야기 해 보면 죄라는 것은 자기가 짓고 싶지 않더라도 세상이 요구하게 되어 있어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같이 동조해서 죄를 짓자고 요구하는 거예요. 만약에 함께 죄를 짓고 싶지 않거든 직장에서 나가라는 식입니다.

개인 사업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정직하면 혼자 망하게 되어 있어요. 다 같이 노조 만들어서 같이 나쁜 일을 해야 같이 살아요. 사회가 그래요. 학생 때 부정부패를 바로잡자고 시위하고 데모했던 사람들이 대기업에 입사하고 나서는 달라집니다. 경제정의? 남북문제? 그런 생각없습니다. 그저 보너스만 많이 주면 고맙다고 여깁니다. 언제 그랬냐 싶게 속물로 변해버립니다. 남 짓밟고 승진해야 되고, 그저 ‘나’밖에 모르는 인간으로 달라져 있습니다. 그것은 그래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전에 했어요. “제발 몸이 편찮아서 몸져 누워있다든지 할 때에 자책을 하지 마세요. 선생님보다 더 나쁜 사람도 지금 90세까지 살면서 세상에서 활개치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아픈 것이 평소에 죄를 지어서 그렇다는 식의 마음을 절대로 먹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죄를 지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교체하라는 것이고, 새 몸이 있기에 바꿔치기 하라고 누워있는 것입니다.”

“두껍아! 두껍아! 헌것 줄게 새 것 다오.” 그 노래를 하고 있어야지 ‘내가 죄를 지어서 이렇게 고생 한다’고 여기면 내가 지금 죄를 지었다고 여기는 그것이 ‘자기 의’가 됩니다. 그것은 마귀의 시험입니다. 다시 이야기 할까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구원 하더라.’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약속입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아무것도 안하고 은혜로 하나님의 아들 된 거예요.

그것이 그냥 그대로 우리에게 주입이 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그냥 하나님의 아들 되는 겁니다. 아들 되고 난 뒤에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아들 되고 난 뒤에 무슨 작업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사이에 소곤소곤 했던 그 이야기들, 그 내용들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 속에 담기게 됩니다. “목사님! 그렇다면 그 믿음의 내용이 궁금합니다. 그 믿음이 무엇입니까? 무슨 이야기를 두분이 속닥거리면서 했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경전체입니다. “창세전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롬 9:13)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 모든 것이 다 이야기된 사항이구나.’ 그것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믿어지고, 율법에 매여 있는 사람은 당최 믿어지지 않는 겁니다. ‘나의 가치를 왜 무시해? 내가 잘할 수 있는데. 뭐가 창세전이야. 그러면 돌아가신 내 어머니는 선택 못 받아서 지옥에 갔겠네. 이것은 불공평해. 이런 모순된 하나님은 못 믿겠다.’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그 내용물이 들어와야 되는데, 율법아래 있는 사람은 뭐든지 자기가 지키려고 애쓰기 때문에 자기가 성경말씀은 자기 맘대로 자기 유리한대로 해석을 해버려요. 즉 ‘나는 이런 일을 하게 되면 구원받는다.’ 자기가 자기한테 의논하고 자기가 결정을 내리는 거예요.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가짜로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예수 믿어 주었기에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하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믿음이 오기 전”이라는 말은, 그리고 “몽학선생 아래 묶여 있다”는 말은 전부다 거짓말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묶여 있는 주제에 자신이 무슨 믿음을 만들어 냅니까? 지금 죄가 발동하고 죄가 폭발하고 있는데 언제 무슨 착한 맘을 행사합니까? 사람이 착한 맘을 먹더라도 그 착한 마음이 다 죄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장 자기 영광을 위해서 소비되기 때문에 다 죄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착한 일을 했다고 칩시다. “이 떡 너 먹어라” 했다면, 내가 내 떡을 먹지 않고 남에게 줌으로 말미암아 날름 혼자 다 먹은 사람과 차이가 생겨나면서 ‘나는 저 사람보다 훨씬 우수 합니다’라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값없이 주는 은혜를 모독하는 겁니다. 그것이 왜 은혜에 대한 모독이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평생토록 강도짓을 했던 예수님 십자가 옆에 달렸던 강도를 향하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눅 23:43)라고 했던 겁니다.

그 강도는 값없이 낙원에 갔어요.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그냥 와서 그 믿음의 내용물을 앎으로 말미암아 구원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믿음을 누구 자격으로 줍니까? 그게 세 번째(언약, 율법 다음으로) 등장하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약속된 사람이 몇 명입니까? 객관식문제입니다. 1) 세명 2) 두명 3) 한명 4) 네명. 몇 번입니까?

갈라디아서 3장 16절을 보겠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여기 보면 “오직 하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 사람한테 약속이 주어지면 한 사람에게 묻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약속을 캐낼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약속된 자손이 단 한명이라면 그분 빼놓고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는 약속이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력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겁니다. 뭘 알아야 구원을 받지요. 약속된 분만이 약속된 모든 사항을 알고, 약속된 그 분이 예수님인데 예수님을 빼놓고, 어디서 무엇을 알아서 자기가 그것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완전히 사기지요.

약속된 분이 몇 분입니까? 한분이죠. 그러면 구원받는 사람은 여러 명입니까, 한 사람입니까? 여러 명이죠. 그러면 그 여러 명들이 서로 서로 ‘내가 더 높다. 네가 더 낮다.’ 이렇게 자랑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왜냐하면 서로 경쟁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약속된 한분의 축복에 의해서 혜택을 같이 받았기 때문에 둘이든 셋이든 그들 사이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차별이 없는 그것을 전체를 포함해서 ‘하나’라고 합니다.

이것을 ‘하나’로 만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갈라디아서 3장 20절입니다.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중보는 양쪽 다 위하니까 하나가 아니고 둘이 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둘이 되게 하지 않고 하나로 묶었다는 겁니다. 자꾸 하나로 묶는 이유는 “너희들은 죄에 묶여 있는 존재였잖아. 왜 그것을 잊어버려. 네가 잘나서 구원된것이 아니잖아” 하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내가 어떤 상대방을 꺽었기에 이긴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오직 한분의 축복으로 구원을 받아 놓고는 묶여 있었던 주제에 왜 내 자랑을 하느냐’는 말입니다. 맨날 죄만 짓는 주제에. 나올 것이 예수님뿐이어야지, 어떻게 예수 믿고 난 뒤에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착합니다. 저 사람보다 내가 성화 더 되고 저 사람은 성화가 덜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올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우리 속에 들어가는 내용이 동일한데요.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보겠습니다. 여기에 코가 있고 입이 이렇게 벌여져 있죠. 이 안에 고기가 들어가요. 펄떡펄떡 뛰는 물고기가 입속으로 삼켜집니다. 물고기를 삼키는데 이 사람이 삼분의 일을 삼켰습니다. 삼분의 일을 삼키나 반을 삼키나 똑같은 물고기가 들어가는 겁니다. 주님의 약속이 들어가잖아요. 주님의 약속이 들어가면 이 안에 무엇이 들어갑니까? 주님의 약속이 들어 있지요?

이 사람 속에 들어있는 것이나 이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이나 똑같은 물고기가 들어 있잖아요. 이것을 가지고 하나라고 하는 겁니다.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로따로라는 말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같은 것이 들어 있는데 어떻게 따로따로가 되냐’는 겁니다. 같은 것이 들어 있으면 여러 명을 나눠놓아도 같다는 겁니다.

이렇게 같은 것을 가지고 ‘하나’라고 했는데 나중에 보면 ‘한 몸’이라고 합니다.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입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4-6)

어떤 사람이 교회 재정이 어려우니까 교회 잘되기 위해서 서로 서로 강제로 돈을 떠 맡겨서 교회 운영을 하기로 제안했을 때, 어떤 분이 “헌금이라는 것은 강제로 액수를 정해서 강제로 떠맡기는 것이 아니고 은혜대로 하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강제로 하자고 제안했던 사람이 화를 내면서 “그래 가지고는 교회가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공격받은 사람이 말하기를 “교회가 안 된다는 그 말이 어떻게 주님 앞에서 될수 있는 말이냐?”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왜?”
“예수님의 몸이 안 되네요.”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몸이 안 되다니. 예수님 자체가 몸인데 몸이 안되는 게 어디 있어요? “당신은 팔을 어디에 놔두고 왔습니까?” 몸이 있으면 팔은 붙어 있는 것인데 “집사님들! 팔이 없으니까 돈을 다 같이 내서 팔을 하나 붙입시다.” 이럴 수는 없다는 겁니다. 10만원이 모여도 그것이 몸이고, 5만원이 모여도 그것이 몸이지, “교회가 안된다”고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회가 그냥 가만히 있는 교회가 아니고 진짜 교회를 가리우고 훼방하는 엉터리 교회가 되는 겁니다.

왜 교회를 인간적으로 만들려고 하느냐면, 하나되게 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랑을 비켜가 버리니까 남은 것은 자존심입니다. 내 교회 운영이 이정도로 잘 되어 간다는 그 자존심을 억지로 보상해야 되고 보충하려고 하는 겁니다. 아까 제가 보상이라는 말이 언제 등장한다고 했습니까? 사랑을 잊어버리면 무엇이 남습니까? ‘나’가 남고, ‘나’만 남으니까 ‘나’의 위신이 결핍된 것을 보충하고 싶어 하죠. 그때 억지가 들어오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어떤 이는 이렇게 반론을 펴요. “우리가 이렇게 교회가 어려울 때 몇몇이 부담을 지자고 하는 것조차 복음으로 이해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나는 그것을 억지라고 보지 않고 하나의 제안으로 한 것인데 이것을 듣는 사람이 너무나 꼬아서 듣기 때문에 그것이 복음을 방해하는 하나의 인위적인 교회운영방법론이라고 오해들을 하시는데 오해하지 말고 순수하게 교회의 어려움을 생각해서 일해보자는 이야기(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일이 안되니까)지 교회를 부수자든지 복음을 방해하는 그런 생각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럴 경우에 그것이 무조건 복음이 아닌 것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경우 복음이 되려면 뭔가가 빠져 있어요. “십만원씩 부담합시다” 라는 말만 해서는 안 되고, “십만원은 저의 제안이지만 믿음대로, 형편대로, 마음대로 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뒤에 집어 넣어줘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림으로 그려 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형제들, 아닙니까? 형제들이거든요. 이쪽 손가락이 이쪽 손가락보고 이야기를 한다고요.

“십만원 내세요. 내가 이십 만원 낼게.” 같은 몸으로서 형제 같으면, 바로 가면 안 되고 머리를 거쳐서 가야 합니다. 바로 가면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머리를 거쳐서 가면 어떻게 됩니까? “십 만원을 내든, 오 만원을 내든, 오십 원을 내든 복음이 중요하지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라는 말을 뒤에 붙여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그 말을 붙이게 되면 그 말을 곧이듣고 혹시 십 원만 달랑 내면 어떻게 할까?’를 걱정하는 겁니다.

이럴 경우에는 말만 복음을 통과했지 실제는 통과 하지 않고 바로 직선으로 나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것은 무엇이 빠졌습니까?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무엇이 없으면? ‘사랑’ 이 없으면 그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사랑이 뭐라고 했습니까? ‘보고 싶다.’ 누가? ‘우리 주님이 보고 싶다.’ ‘나는 교회 운영보다 더 주님을 보고 싶은 것이 급선무다.’ ‘돌 던져라 나는 지금 죽어도 좋다.’ 이런 마음이 있거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집사님! 십만원만 내세요” 라는 말을 해도 괜찮아요.

“형광등을 갈아야 됩니다.”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형광등 없어도 교회 되는데 그 말 왜 합니까?”

맞아요. 그 말은 맞는데 말을 하실 때 머리를 거쳐서 해야 합니다. “형광등이 없으면 설교하는데 지장이 되니까 하시되, 그것을 꼭 해야(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안 해도 뭐 그만이죠.” 이처럼 그것을 안 했다고 해서 형제가 아니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반드시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주님을 보고 싶은 그리움’ 이라는 것을 은사로 바탕에 깔고서 해야 하는 겁니다. 그게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하나’ 입니다.(갈 3:28)

25절을 보세요. “믿음이 온 후로는.” 그전까지는 믿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믿음이 온 후에는 몽학선생(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율법아래 있지 않습니다. 율법아래 있지 않다는 말을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해합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부터 구약성경 안 봅니다. 더불어 이 성경 자체를 안 봅니다. 왜? 율법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 구약성경이 율법 아닙니다. 복음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전부다 복음이지 율법이 아닙니다. 창세기나 레위기도 율법이 아니고 복음입니다. 십계명도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로 들려야 돼요. 이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이 전부다 지켜야 할 법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못 지키는 나 같은 더러운 죄인을 주께서 사랑으로 용서했다’ 는 것이 보이는 그런 말씀입니다.

눈 감고 아무데나 펼쳐 보니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딤전 6:8)가 나왔다고 칩시다.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아는 경우’ 가 어떤 경우일까요? 하루에 두 끼만 먹으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게 됩니까? 그런 겁니까? 하루 두 끼만 먹으면 그것이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아는 삶으로 합당한 겁니까? 아프리카 거지한테 그런 소리 하면 매 맞습니다.

예를 들어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용서라는 말을 하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그러면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라고 물었어요. 그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네가 남을 용서할 인간이라고 생각이 드느냐?” 라는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어요. “네 주제를 파악 못하고 용서를 운운해? “용서하라” 는 말은 “네가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인간이 못된다” 는 뜻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제가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라고 했어요.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490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계산해서 490번이라고 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일흔번의 일곱 번씩 용서하라” 고 했습니다. 이것은 비꼬는 겁니다. “자기 주제도 파악 못하는 인간이 무슨 용서를 한다고 나서냐” 는 겁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뭡니까? “어떤 사람이 부자로 있었는데 자기에게 돈 몇 푼 안 갚았다고 빚 진 사람을 닦달 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부자는 임금에게 엄청난 부채를 탕감 받아 놓고는 자기에게 푼돈 몇 푼 안 갚았다고 사람들을 닦달했다” 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주제파악이 안 되는 인간이죠. “자신이 누구에게 용서를 받았는지도 모르면서 용서를 운운해?” “주여! 나는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인간이 못 됩니다.” 그런 자세로 남에게 다가서는 그것이 바로 남을 용서하는 거예요.

“내가 당신을 용서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하이고! 선생님! 교회를 다니시더니 나를 용서 하는군요.”
“천만의 말씀이고 만만의 콩떡입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만한 위인이 못 됩니다. 주께서 아마 당신을 용서했겠지요. 나를 사용해서.”

너무 고차원적 윤리? 가만 보니 부담을 안 주려고 한 이야기인데 부담이 더 되어 버린 셈 같아요. ‘율법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에 만족하지 마시고요. ‘주님의 사랑 안에 있다’ 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겁니다. ‘율법아래 있지 않다’ 고 하니까, ‘율법아래’ 도 없고 ‘사랑 안에’ 도 없고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처럼 자기 맘대로 사는 것으로 아는데, ‘사랑 안에’ 거합니다.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은, 주님의 사랑이 나를 사용해서 바깥으로 드러내는 겁니다. ‘율법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가지고 자기 맘대로 사는 것으로 오해 하시면 안 됩니다. 율법아래 있지 않고, 사랑 안에 있습니다. 둘 중에 어느 것을 하시렵니까?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율법이냐, 사랑이냐 둘 중의 하나를 해야 되지 제 삼의 것은 안돼요. 율법을 지켜서 잘난 체를 하렵니까? 사랑 안에 거하면서 용서를 받으렵니까? 어느 쪽입니까?

주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을 읽겠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인다는 말은, “너희들은 이제 십자가사랑 앞에 함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미 사랑 속에서 혜택을 입기 때문에, 그 십자가 사랑을 이제부터는 마음껏 증거하는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스스로 독립하려고 하지 말고요.

십자가 사랑을 퍼뜨리는 사랑의 네온사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사랑이 저희들을 구원했기에 그리고 십자가의 피를 흘렸기에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더 이상 두려움이나 무서운 것이 없이 다만 그 사랑에 감격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을 저희들이 보고 싶습니다. 주님을 만날 때 까지 이 땅에 살면서 아무 일한 것도 없이 거저주시는 용서, 그 사랑을 증거 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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