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상처

아빠와 함께 2023. 4. 19. 09:54

429강-YouTube강의(상처 요한복음 20:27)20230418-이 근호 목사


제429강, ‘상처’. 스가랴 13장 6절에 보면 “혹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상처는 어찜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상처라 하는 것은 누구로부터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공격을 받았을 때 공격한 주체들이 있을 거예요.

그들에게 메시아가 왔을 때, 메시아가 얼마나 지식이 많고 인간들이 기대할 정도로 얼마나 자비심이 많고 사랑이 많고 또 메시아가 얼마나 자기 백성들을 위로하고 다독거려주고 메시아를 믿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푹 빠지도록 그렇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메시아. 그런 메시아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했던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스라엘은 로마의 압제 하에서 비극적인 시간들을 보내고 있기 때문에 위로받고 싶은 거예요. 자신들의 신앙, 약속을 믿는 그 약속이 제대로 믿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막상 그들에게 나타난 메시아는 상처를 품은 메시아에요.

멀쩡한 메시아, 해같이 빛나는 메시아.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본 예수 그리스도는 해같이 빛났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아주 신이 났죠. 여기가 좋사오니 제가 농막 세 개 지어드리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막. 요새 농막도 비싸거든요. 이천 만원 넘어요. 그렇게 간이 건물 지어드려서 모시겠습니다.

지금 그 이야기할 때 베드로는 주님이 바로 베드로의 그 말로 인하여 상처 입을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못 한 거예요. 좋은 게 좋다는 겁니다. 나는 메시아 기다리고 주님은 메시아, 우리 사이에 더는 껄끄러울 게 없고 편하게 받아들이고 대화나 소통이 흐름이 잘 이어질 것이라고 여겼죠.

내가 생각한 내 생각과 내 행동으로 저쪽, 예수님 쪽에 상처가 주어진다는 생각은 상상도 못하죠, 제자들이. 서로 호의를 갖고 있는 사이이기 때문에 한쪽은 상처주고 한쪽은 상처받고 이런 적대적 관계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님을 생각한 것과 꼭 마찬가지죠.

요한복음 11장에서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평소에 많이 섬겼어요.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섬길 때 예수님은 섬김에 대해서 기뻐하셨고 그들은 그 기쁨을 보고 자기들 행동에 하자가 없고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 쪽에서 상처를 만들어버렸어요. 마음의 상처를 만들어버렸어요. 아직 돌아가실 때도 안 된 멀쩡한 자기 오빠가 아무 이유도 없이 아팠고, 이유도 없이 죽은 게 아니고 시들시들 아파가요. 갑작스럽게 돌발 죽음을 받은 게 아니고 시들시들 아파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르다, 마리아도 약간은 놀랐지만 그때까지는 예수님한테 어떤 상처도 없었죠.

남의 병도 잘 고치고 귀신도 잘 쫓아내시는 주님과 우리 사이가 보통 관계가 아니고 보통 사이가 아니니까 우리가 잘 해드렸으니까 주께서도 어떤 보답관계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이때를 위함이라 하고 예수님을 뭐 보험 들어놓은 것처럼 생각해가지고 예수님을 호출했죠.

‘예수님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우리 오빠가 시들시들 아파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 타이밍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오빠를 건강하게 함으로써 예수님과 평소에 우리 가정, 마르다 마리아 가정이 얼마나 우애가 돈독한지를 한번 보여주는 기회로 삼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역시 예수님께 대접을 잘 해줬더니만 어려울 때 주님 쪽에서도 보답이 있구나, 잘해주는구나, 그걸 은근히 마르다 마리아가 기대했죠.

사람이 누구한테 뭘 해줄 때 아무 생각 없이 해주지는 않잖아요, 인간이. 사랑하는 것도 해줄 때 뭔가 되돌아오는 게 있어야 사람 마음이 섭섭지 않은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기를 기다렸어요. 오빠가 죽기를. 그게 마르다, 마리아에게 큰 상처가 된 거예요. 큰 상처가 된 거예요.

메시아는 나를 죽지 않게 해주실 분이다. 아니 아니 메시아가 우리를 죽일 이유가 없어, 라는 식으로 메시아를 곡해한 겁니다. 나를 죽이는 메시아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죠. 상상도 못했어요.

만약에 어느 교회가 전도한다고 플랭카드 해놨는데 ‘아무나 오세요, 죽여줄 테니까.’ 뭐 이런 플랭카드면 그 교회 가겠어요? ‘아무나 오세요. 화끈하게 죽여 드리겠습니다. 90까지 살 걸, 40에 깔끔하게 죽여 드리겠습니다.’ 이러면 누가 오겠어요? ‘예수 믿고 복 받으시고 죽어서 천국 갑니다.’ 이런 식으로 하잖아요.

그게 거짓된, 세상에 있지도 않는 메시아에요. 있지도 않는 예수님이에요. 그런데 시작은 그렇게 해야 돼요. 왜? 마르다, 마리아도 그렇게 시작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빠가 죽고 난 뒤에 찾아갔다는 것이 마르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복인 줄 알아야 됩니다. 상처 없는 식으로 주님을 반길 수는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 예수님이 결국은 마르다, 마리아를 위해서 상처를 받을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게 요한복음 11장 이야기거든요. 요한복음 12장 들어가면 두 번째 여동생 마리아가 자기 향수를 예수님의 발에다 뿌립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해석내립니다. ‘네가 나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도록 도와주는구나.’ 마리아 너도 죽어야 되고 나도 죽어야 된다는, 같이 죽어야 된다는 것에만 부활이 있고 생명이 있다는 것을, 내가 너로 하여금 너의 행동을 그렇게 해석하겠다, 이렇게 했어요.

오빠 죽고 난 뒤에 마르다, 마리아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틈에 예수님이 찾아가서 이렇게 묻는 거예요. “오빠 죽을 때 상처가 더 깊냐, 내가 죽을 때 상처가 더 깊냐?” 이걸 미리 당겨서 마르다, 마리아에게 묻는 것 같습니다.

마르다, 마리아 너희들 세 남매가 나에게 잘 해줬지? 나도 너희에게 잘 해줄게. 오빠 죽여줄게. 그리고 네가 스스로 캐낼 수 없는 상처, 네가 너에게 해코지할 수 없는 상처, 예수님으로 인하여 난 상처가 있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나를 믿는 자’라는 말을 바꿔서 이야기합니다. 나로 인하여 상처가 발생된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상처 입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은 마르다, 마리아와 있는 제자들은 그걸 몰랐어요. 몰랐는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에 일괄적으로, 사실은 차등적으로 했지만, 거의 일괄적으로 열한 제자들에게 알려줬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7절, 보기 전에 20절,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멀쩡해진 몸을 보여준 게 아니고 상처를 보여줬어요. 손과 옆구리.

그때 도마가 없었고 도마가 왔을 때 27절에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여기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상처 확인. 주님은 인간에게 상처받아 돌아가셨다는 그 확인. 그게 믿음이에요. 다른 믿음은 일절 없습니다. 도마가 이야기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보고 말하기를,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메시아십니다.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상처받은 메시아가 비로소 눈앞에 말씀의 완성태로 주께서 홀로 다 이루었다는 사실을 도마가 받아들여서 도마는 ‘당신은 하나님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보고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이 있을텐데 그들이 복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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