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도살장에 합류

아빠와 함께 2023. 3. 27. 10:29

정해진 강의 시간 안에 도착하기 위해 시간을 계산하고 예의상 미리 도착할 수 있게 30분 정도를 가산하여 도로에 차를 올린다. 도로 위에는 차의 성능대로 그리고 안에 담긴 운전자의 성질대로 빨리 달리는 차도 있고 뒤따르는 차의 짜증을 돋우며 천천히 달리는 차도 있지만, 나는 여전히 ‘각자의 사정이 있겠지’라고 모든 차를 관대히 포용할 수 있다. 여전히 달릴 수 있는 도로가 2개여서 나의 예상시간에 손해를 입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길이 있으면 자기 이익에 실패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고속도로 보수공사로 길이 한 개가 되면서 제일 앞에 있는 차의 속도에 모든 차가 동일하게 맞춰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100 이상으로 달려야 할 고속도로에서 60을 유지하며 달리는 트럭으로 말미암아 예상한 시간에 해가 미치면서, 이렇게 나의 원천이 공개될 수 있는 절호의 기호를 만난다. 바로 앞차를 졸졸졸 뒤따라 가며 잘 보이지도 않는 맨 앞차를 향한 분노게이지가 폭발 수준에 이를 때, 세상의 모든 것이 말씀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이론을 배우러 가고 있는 나는 말씀이 내 의견 따라 언제는 용납되고 언제는 안 되는 불일치를 경험한다.

처음과 끝이 맞지 않고 수시로 정정되는 미흡함의 굴레에서, 나는 처음도 아니고 끝도 아니고 중간에 놓이며 사람은 말씀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하나의 결론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주장하는 평균, 그리고 도달하려는 균등함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균등함으로 공격하시면서 공평은 오직 한 분에게만 성립되는 것을 알리시기 위해 모든 인간을 불공평의 자리에 두셨다.

복음을 만나기 전이나 복음을 만난 후나 다름없이 항상 나의 역할이 이미 모두 이루어진 절대 완성의 주인공과 대치를 이루는 것만 보이지만, 지금 달라진 하나는 지옥으로 끌려가야 할 나와 방향이 바뀌어 십자가로 향하고 있는 나 아닌 누군가로 갈라져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의견으로는 후자는 분명 지옥으로 향하는 모습이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도살장 진입을 거부하는 원수의 모습으로 발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아닌 타인의 뜻으로 이미 옮겨진 도살장 안에서 나의 죽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억이 마디가 잘리고 조각나기에 나는 점점 희미해지면서 유일한 진짜 죽음인 어린양의 죽음이 선명하게 부각 된다.

이미 죽어서 태어났기에 사람은 죽을 수 없는 것이었다. 죽음이 죽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음이 죽음을 만든다. 아버지 품에 있는 아들이 그 품을 떠나셨을 때 예수님은 하늘에서 아버지에게 잃어버림이 되고, 이 세상으로 나실 때 소위 인간들이 말하는 탄생이 아니라 벌써 벌어진 십자가 죽음으로 태어나신 것이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생명으로 나셨기에 예수님만이 죽음을 맛볼 수 있으시고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성사시킨 죽음을 원하시는 자에게 선물하실 수 있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따르다가 자살을 하고 어떤 목사가 복음이라 믿고 말씀을 전하다가 진짜 복음을 듣고 자살을 했을 때 그들 안에서 계속 살아서 작동하는 것은 ‘나는 알고 있다’이다. ‘너는 틀렸다’라고 사람 자체를 상대하며 반박하기 위해 지식을 총동원하겠지만, 악마가 가둬놓은 선악적 거푸집 안에서 생성되는 지식이기에 반박할 재료가 그럴싸하고 논리적이고 많다는 것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지식이 있음 쪽이기만 하면 양에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마귀가 자살로 이끌어 주는 데 아무 부족함이 없다. 나는 구원을 생각한 적이 없다는 주장이나 나는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선악적 지식 있음에서 나오기에 진위를 따질 필요 없이 모두 거짓이 된다. 그래서 인간이 진짜 복음을 만나면 너무 불공평하고 독단적인 이론에 납득 안 가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본능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에 신경이 쓰이고 그것이 무엇일까 성경을 보게 되면 저절로 내 의견과 상상작용이 펼쳐지는데 이는 마치 음식점에서 메뉴판을 보고 맛이 어떠함을 생각하며 원하는 것을 주문하는 모습과 같다. 정작 사건의 들이닥침은 웨이터가 메뉴판 대신 주문하는 자의 몸을 수거해서 주방으로 데려가 요리의 재료로 참여시키는 모습이다. 도살당하신 어린 양의 세상으로 함께 함몰되는 그 도살장 입구가 ‘지식 있음’을 지식 없고 무지함으로 바꿔주시는 성령의 일하심에 출발지점이다.

수영할 줄 모르는 자를 일단 먼저 물에 넣어버리실 때 물속에서 나는 수영이 뭔지도 모르고 수영하는 법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우선 옛사람의 기질을 발휘해 각자의 타고난 역량대로 물속에서 겨우겨우 허우적대거나, 힘있게 허우적대거나, 일단 본능적으로 허우적댄다. 성령께서는 수영법을 가르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수영하시는 주인공을 위해 힘을 빼는 법을 알려주신다. ‘너는 수영할 필요가 없는 시체다’라는 진실만 알려주시며 대신 수영하고 계신 분을 보게 하신다.

시체는 수영할 수가 없기에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물 위로 둥둥 뜨는데 이미 도살장으로 끌려 들어간 자들에게는 물 위에 잠시 떠 있는 것이 다른 관점으로 다가온다. 물 위에 떠 있으니 허우적댈 필요가 없는 편안함에서 마치 자신이 살아있다고 착각을 하게 되는 시간이 허락되는 것이다. 숨을 쉬기에 답답함 없이 스스로 통제가 되는 듯한 착각에 빠져 ‘나도 이제 뭐 좀 아는 자이다’라고 헤헤거리게 될 때, 마치 주께서 감당치 못할 시험을 당하지 않도록 피할 길을 주셨다고 착각에 빠진다. 주님은 나라는 인간에 아무 관심도 없는데.

내가 뭔가를 열심히 해서 된 것이 아니라 시체이기에 저절로 물에 뜨는 것이고, 시체가 모여있는 곳에 새들이 와락 몰려들어 뜯어먹히는 일에 시달리는 것이 이미 어린양의 죽음과 함께하고 있는 자들에게 벌어진다. 세상은 이와 반대로 이런 물 위에 삶을 성실하게 정상적으로 열심히 사는 모습이라 생각하고 새들의 뜯김이 강한 곳이 돈이 몰리는 곳임을 아는 것이 삶의 지혜로 여긴다.

만약 시체 안에 생명이 거하면 물 아래로 가라앉아 주의 생명이 홀로 작업하시는 효과로 말미암아 도리어 물속에서 내가 시체로 발각되는 혜택을 누린다. 항상 모든 시험은 예수님의 담당이었지 살아있지도 않은 내가 당한 적은 없음만 고백 된다. 시체가 분명히 위로 떠야 하는데 물속에 있게 되는 불가능함이 몸을 통해 표출될 때 나 아닌 다른 분이 살아계심을 알게 된다.

이미 도살장 안에서 완성된 말씀 중심의 시간으로 말미암아, 시체임을 인지하며 생명이 활동함을 깨닫는 때와 그리고 시체인 줄 모르고 살아있다 착각하며 둥둥 떠서 악마에게 뜯기고 당하는 때가 교차로 발생하면서, 이용당하는 몸이 가라앉고 뜨고 오르락내리락하는 현상을 만들어낸다.

어떤 이들이 복음을 듣고 말하기를, 뭔가 이해하고 알아들어서 쉽다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쉬워서 쉬운 거라고 한다면 이것이 교만하게 들리거나 말장난이 되어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그 어떤 이들이 만약 거지나 고아나 과부나 사마리아 이방인이라면 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 주변에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공분을 사거나 무시와 천대를 받게 되면서 그 자체가 주의 일이 말씀대로 진행되는 증거가 만들어진다.

거지 나사로가 하나님에게 복 받아서 부유해졌다고 믿는 부자를 향해 ‘하나님이 저를 돕고 계시기에 저는 거지가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전한 것이 아니라 그냥 거기 있었다. 누가복음 18장의 과부는 전도를 하려고 재판관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아무 쓸모 없는 말, 하나님께 저주받아 이 모양새로 살아간다는 한탄을 늘어놓으며 그냥 거기 소품처럼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배치로 말미암아 부자나 재판관은 하나님 앞에 불의한 자가 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되어버렸다.

여호와를 믿는 이스라엘 앞에서 이방인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면서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진짜 이스라엘을 세우시는 주의 일이 이미 성공했음이 증거되도록, 두 이스라엘 틈에서 생산된 남은 자를 통해 원래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불에 사를 가라지임을 외치게 하신다. 남은 자는 없는 자이다.

그냥 자기가 거기에 왜 있는지도 모르고 있고,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말하는 것을 뒤늦게 확인받는 작업이 복음의 작용인 것을 알 뿐이다. 복음을 이해한 것이 아니기에 당사자들이 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쉽다고 하는 것이다. 더 쉬운 이유는 알게 되었다는 그 작용조차도 순식간에 강물처럼, 동사처럼 흘러가 버려서 머무르지도 않는다. 더해지는 것이 없으니 가벼운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복음이 어렵다는 판정이 만약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말씀의 이해 여부가 아니라, 돼지가 돼지답고 개가 개다워야 하는 실험실에 들어갔을 때 발생한다. 주님에게는 정말 개만 필요하고 개 아닌 척하는 모든 자는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도, 착한 돼지, 지혜로운 개, 자비로운 돼지가 되고 싶은 욕망을 이길 수 없다. 악마는 언제나 나를 이기고 나는 구원이라는 말조차도 언급할 수 없는 지경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다. 내가 선택해서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장 16~18)

낙심할 일을 반드시 만나야만 왜 우리가 낙심할 일이 아닌지 말씀의 해석이 온다. 우리가 얼마나 바벨론 스럽고 블레셋 스러운지를 마귀의 일에 온종일 능욕당한 후에야 안다. 겉사람이 악마에게 마구 뜯겨 후패하게 하시면서 보이지 않는 분이 스스로 드러나시는 말씀작용에 휘말려 내가 기뻐 춤추는 것이 아니라 흔들어대는 진동에 같이 흔들거릴 뿐. 내가 스스로 될 수 없는 개와 돼지다움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질 때 우리의 속이 어린양의 뿜어내는 피의 영광으로 새로워진다.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도 바랄 수 없다. 그러나 바라고 있다면 그건 내가 예측하고 생각한 것이 아니고 몸 안에 계신 유일한 생명의 일하심이다.

 

이근호 230327

“시체는 물에 뜬다. 마치 살아있다는 듯이”   함께 도살장으로 들어갈 자를 모집하시면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도살장 밖에는 영생이 없다는 뜻일 겁니다.

구자근 230330

은근히 지적당하는 말로 작용되었을까요? 곧바로 시원한 숨이 뱉어집니다. "나는 구원을 생각한 적이 없다는 주장이나 나는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나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선악적 지식 있음에서 나오기에 진위를 따질 필요 없이 모두 거짓이 된다.”

물론 거짓임을 아는 죄인이라는 것도 구원과는 아무 상관없는 인간들의 평균치 의견일 뿐이라는 의미도 새롭습니다. “나는 처음도 아니고 끝도 아니고 중간에 놓이며 사람은 말씀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군. 모든 그럴싸한 접근들이 평균치들의 아우성이었어...

어떤 이는 복음으로 쓰이는 것으로 보이고, 또 어떤 이는 아무리 복음, 십자가, 죄인, 감사 떠들어대도 자기 잘났다는 지식의 나부랭이에 불과하다고 서로가 그렇게 우겨대도 이 역시 선악과 후예로 타고난 마귀의 비전체 작용 안에 속해 있음을 어찌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결국은 그냥 거기 있었다는 ‘거지 나사로’, 그냥 거기 소품처럼 있었다는 ‘과부’에 대한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의 서로 고하는 그 시끄러움 자체가 어쩔 수없이 평균치들의 주장으로 드러남을 인정하게 됩니다. “...주의 일이 말씀대로 진행되는 증거로 만들어진다.”는 말씀의 해석판에 기쁨으로 동의하는 순간입니다.

빛과 어두움의 반응체, 순수도 없고 어린아이도 없고 선악을 아는 어른나무들끼리의 깜깜한 만남에서 말씀이 지나가는 자리에 배치되어 있음이 어찌 감히 인간의 일이 될까요. 차라리 그 자리에 속해있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부수입이 즐겁다고나 해야겠습니다.

쉬는 시간 10분. 저 앞쪽에서는 조용한 지적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듯. “너무 완벽하려고 하면 자기 의가 됩니다.” 한편, 우리가 못 본 사이, 구불구불 파마머리로 변신한 한 여성의 분위기가 갑자기 너무나 탐스러워 보여서 우루루 몰립니다. 그 말에 동의된다면서 또 떠드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만지나마나 언제나 예뻐야지, 만져서 예쁜건 사기 아닙니까?” 은근한 지적도 우연이라나...
 
이 말이 참 기분 좋은 것이 아닌데 어째서 저 여자는 생각 없는 사람처럼 기쁘게 듣고 있는지. 마치 남 욕하는 현장에 기분 좋게 참예하고 있는 것처럼. 혹시 ‘두 개의 나’로 분리된 현실가운데 있었는가? 저 쪽 의견과 이 쪽 현실이 똑같은 기쁨 마당인 경우는 이 쪽 현실의 효과가 저 쪽 의견을 무작정 품었다는 의미일 터인데.

치밀한 계산을 했든 그냥 터져나왔든 복음 아니기는 마찬가지인 것이, 우리 인간들에게는 똑같은 수평선상의 점으로 나타난 우연의 연속체에 속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우연이지.’ 내 의를 부정당하는 이 말로 마쳐지기 위해서 모든 말과 행동이 예수 안의 선택작용으로 필히 나와야만 할 때, 주님의 현실로 작용된 지적이라면 의견 하나 표정 하나 머리카락 하나, 그 어느 것도 다 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버림과 교체의 그 과정을 선물로 받았다면.

“주님에게는 정말 개만 필요하고 개 아닌 척하는 모든 자는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도 착한 돼지, 지혜로운 개, 자비로운 돼지가 되고 싶은 욕망을 이길 수 없다. 악마는 언제나 나를 이기고 나는 구원이라는 말조차도 언급할 수 없는 지경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 이미 멸망당한 자들에게는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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