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 간격
2023년 4월 9일 본문: 디모데후서 2:8-9
(2:8)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2:9)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2:10)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하나님께서 그냥 쉽게 “날 믿고 나 있는 곳에 오라”하시면 될터인데 ‘죽고 다시 살아나실 분’을 따로 보내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아무나 ‘씨=후손’이 되게 하셔도 되는데 유독 ‘다윗의 씨’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것은 모든 인간이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죽은 자로 보십니다.
베드로전서 3:20에 보면,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겨우 여덟 명’이다는 말씀은 실은 모든 인간은 다 죽어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건짐받은 자가 있다는 것 자체서 신기해해야 하고 의아해할 일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시는 식으로 구원을 해내신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씨’라는 말은 ‘다윗’+‘씨’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다윗의 혈통이 메시야라는 말이 아니라 다윗조차도 하나님께서 두신 ‘그 분의 씨’계열에 속한 속했다는 말입니다.
그 증거가 사무엘하 7:14에 나옵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든 인간은 다 죽어있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아버지가 되시고, 그 아버지됨과 유일하게 관계 있는 아들을 통해서만 구원을 실시하시겠다는 말입니다.
마치 노아 때, 살아남은 여덟 명도 오직 방주 ‘안에서’만 가능했던 것과 같습니다. 아들만 오신다는 것은 노아 때도 아니요 아브라함 때도 아니요 모세 때도 아닙니다. 오직 다윗 때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씨’입니다. 인간의 혈통과 ‘씨’라는 것도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창세기 3:15에 나오는 약속 때문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일에서 인간을 배제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인간을 배제하시는 방식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환경은 ‘선악을 아는 지식’입니다.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두려움에 쫓기듯이 살아갑니다. 이 알 수 없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식’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즉 보다 깊은 많은 지식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고 그 자신의 행복상태를 인간은 ‘선’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불행한 것을 ‘악’이라고 규정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끊임없이 지식 탐구에 몰두하고 더 많은 정도를 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인간을 사냥하십니다. 왜 인간들이 죽어 마땅하며 구원될 수 없어야 하고 왜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지 말아야 될 존재인가를 분명하게 하십니다. 그 알리는 방식은 전쟁이었습니다. 구약 때부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주변 나라와 전쟁을 벌리게 했습니다.
주변 나라는 이스라엘보다 숫자도 많고 더 강력한 군사 체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소위 선과 악에 관한 지식으로 버티는 민족들이었습니다. 신약의 전쟁은 인간들이 하나님과 전쟁을 버리는 겁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이야기입니다. 돈이 많다는 것은 ‘자신이 죽을 이유가 없음’을 반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말씀이 좋아 돈이 좋아?” 돈 많은 것은 착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으로 알았던 그 청년은 근심하고 주님 곁에 떠났습니다. 신약 때, 하나님쪽에서 제시한 무기는 십자가에서 토해져 나온 말씀입니다. 즉 ‘이미 다 이룬 상태’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그 어떤 식으로 말씀을 해석해도 다 이루었음을 말해주는 그런 말씀이 하나님쪽의 무기입니다. 이런 무기를 장착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마치 비늘과 같은 기능을 보여줍니다. 물고기가 ‘비늘’이 있다는 말은 일단 물 속에서 산다라는 뜻이요 또 하나는 물 속에 있으면서 도 물이 몸까지 스며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온,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입니다. 풀이하면 이러합니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하며 그 어떤 인간도 천국에 들어가서는 아니된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은 이미 하나님 품으로 하나가 되는데 성공하심”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예수님의 몸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비늘처럼 말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구원되어야만 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티켓’을 주십니다.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쥐고 있는 타켓은 자신이 죽어도 자신이 천국에 필히 가야 한다는 티켓입니다. 즉 죽지도 않고 살아있는 채로 부활을 노리는 티켓으로서 이는 악마가 인간들을 그런 쪽으로 몰아세웁니다.
많은 지식을 자신을 살릴 수 있다고 믿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자기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마치 옛날 사진관에 있는 증명사진 촬영용 카메라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렌즈만 바라보게 합니다. 하지만 옆으로 보면 렌즈 있는 곳에 상이 맺히는 곳 사이에는 주름진 검은 천으로 막혀 있습니다. 간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간격을 믿게 하십니다. 두 분 사이에 이미 구원이 완료되었음을 압니다. 구원이란 이미 완료되었기에 비로소 움직이는 겁니다. 이런 작용으로서 성도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자기의 주인공이 아님을 압니다. 자신은 전이나 후로서 종에 불과함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에게 간섭하여 최후의 결과를 만들어내시고 그 만들어진 결과를 위해 모든 인간의 과거가 하나님의 구원성공 사례로서 뒤바뀌게 됩니다.
이처럼 말씀은 그 어떤 인간에게 구애받음이 없이 스스로 성취하십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7-1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나의 역사가 말씀으로 쪼개져 그저 주님의 일으키시는 그 사건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9강-디모데후서 2장 8-9절(내부간격)2304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2장 8-9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2:8-9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하나님 등장하시고 하나님 말씀 주실 때 그냥 말씀으로 우리에게 찾아와서 이야기하시면 구원이 될 수 있는데, 우리 생각에는 그렇게 간편한 것처럼 생각하면 되는데 여기 8절에 보니까 ‘복음에 관해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렸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저기 계시고 우리 여기 있으니까 너 천국 오라, 이러면 아주 간단한 문제인데 여기 다윗의 씨가 왜 굳이 등장해야 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될 분이 또 등장해야 될 이 이유가 뭔가? 왜 하나님이 하는 일에 이렇게 복잡한 요소가 계속 끼어드는가?
그리고 ‘다윗의 씨’라 했는데 왜 아브라함의 씨는 안 되고, 그 유명한 사람들 많이 있는데 그 사람 씨는 안되고 딱 굳이 ‘다윗의 씨’에만 하나님께서 그 주목을 하시는 이유가 뭐냐?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우리와 협력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게 아니라 따로 하나님께서 다 구원을 이루어 주시고, 구원이 완료되었기에 본격적으로 구원하는 작업에 움직일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진한 요소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제공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는 상대자로서 이 많은 사람 우리를 상대하지 않고 특정인을 붙잡았는데 그것이 뭐냐? ‘다윗의 씨’라고 되어있어요. 다윗을 붙들어서 하나님께서는 미진한 구원이 아니고 완벽한 구원, 더 이상 손댈 게 없는 그런 구원을 다윗의 씨와 더불어서 완성을 시켜놓았습니다.
그 전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바쳐야, 바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고 구원을 해주신다’는 그런 인간의 행함이 조건으로 삽입돼 있는 그런 하나님을 인간들은 선호했지요. 그런 하나님을 생각한 겁니다. 사람들이 그런 하나님을 생각한 것은 평소에 사람이 다른 사람하고 딜(deal)할 때, 거래를 할 때 줄 것 주고, 받을 걸 챙긴다는 그런 식으로 일상생활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상대해서 장차 좋은 나라 가서 사는, 천국을 그런 식으로 획득하려고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러나 그런 천국이라는 것, 진짜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그것을 피해서 우리에게 오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인간을 철저하게 배제하십니다.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천국에 가고요,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천국에 갈 수 있고, 인간이 열심히 천국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하더라도 지옥에 보내는 하나님이십니다. 천국, 지옥이 인간의 행함과 전혀 무관하게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 다녀서 신앙생활 하는 거 전부 다 무용지물로 만드시는 하나님, 그것이 아무짝도 소용없게 하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다윗의 씨’로 다윗과 더불어서 일을 벌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다윗 이전에 누가 있었는가? 다윗 이전에는 노아라는 분이 있었어요. 노아라는 분이 있는데 그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는 뜻은 이겁니다.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일은 일단 모든 밑밥, 인간의 기본적인 모든 토대 그 전제가 죽음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간들은 인정 못 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다 물에 빠져 죽어 마땅함을 전제로 하고 구원을 시작하십니다. 노아 언약, 노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계시에 의하면,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여기에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여기서 ‘뿐’이라는 말에 주목하세요. 구원을 얻는 자가 몇 명뿐이니, 그리고 ‘겨우’라는 말도 주목해야 돼요.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방주에서 물로 구원받은 자가,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가.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은 ‘일단 죽어라.’ 이 말입니다. 일단 죽는 거예요. ‘일단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일단 받아들이고, 이미 우리는 물에 빠져 죽은 인간이라고 칩시다. 물에 빠진 거예요. 심판의 물, 이미 심판의 물에 빠져서 다 죽었습니다. 다 죽었기 때문에 이 규정을 나의 규정으로 받아들여야 해요. 그러면 이미 죽은 자한 테는 하나님 아무것도 안 받습니다. 받지를 않아요.
어떤 마술사가 예수님의 부활을 재현한다고 자기가 죽었다가 살아나겠다고 한 마술이 있어요. 조수들한테 관을 하나 짜게 해서 그 관에 마술사 자기 본인이 눕는데, 누울 때 그냥 눕지 않아요. 관 안에 쇠사슬이 있어서 자기를 꽁꽁 묶어 놓는 겁니다. 꽁꽁 묶어서 관 안에 엮고 못을 치게 만들었어요. 위에서 못을 탕탕 쳐서 마술사가 두 번 다시 못 나오도록. 또 묶여있는 상태죠.
그러고 난 뒤에 마술사가 포크레인을 가져와서 흙을 자기 무덤 위에 다 덮으라고 부탁했어요. 다 덮어버렸어요. 조수들은 이제 걱정이 늘어졌죠. 시키는 대로 하기는 하는데. 그러고 난 뒤에 뭐 휘장 하나 딱 앞에 쳐놓고 나왔는데 조용해요. ‘진짜 마술사가 죽었구나. 우리 마술사 죽었구나. 우리 이제 영업 다 했다.’ 걱정하고 있는데 그 덮여있는 흙에서 꼬물꼬물하며 손이 보이면서 거기서 기어 나왔어요. 부활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살아있는 채 바라보는 부활의 의식이죠. 살아있는 채. 그 마술사는 계속 살아있으면서 ‘내가 죽을 뻔! 했는데’ 죽은 게 아니고 죽을 ‘뻔’ 했는데 이렇게 용케 살아난 거예요. 살아나는 방법은 간단해요. 그 지정된 장소, 관이 묻힌 장소 옆에 또 다른 구덩이를 파가지고 지하에서 따로 통하는 문이 있어서 이미 묻힌 관짝에서 그쪽으로 넘어가게 돼 있고, 그쪽에는 흙을 붓되 얕게 부어놓습니다. 그래서 관짝 옆을 발로 차고 옆 공간으로 빠져서 빈 공간에서 기어 올라오면 간단한 거예요. 흙이 덮여있으니까 무슨 수로 꿈쩍거리는지 알 수가 있어야죠.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다 죽이는 겁니다. “제발 좀 종교 생활하지 말고, 교회 좀 다니지 말고, 그런 것 좀 하지 말고 그냥 죽어. 그냥 죽어있어.” 그런데 여기에 겨우 여덟 명 밖에 없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릴 의사가 없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이 인간을 살릴 의사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여덟 명 살아났잖아.” 이런 이야기 할 때 그 살아난 자는 겨우 살았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함이에요. ‘나 이렇게 해서 부활되기를 기대했는데 주님께서 내 기대에 호응했다.’ 이게 아니라, ‘내가 왜 부활되지? 이건 말도 안 돼. 내가 왜 살아나야 돼?’
다시 말해서 ‘나는 죽어서 기어이 천국 가야지.’가 아니라 ‘내가 왜 천국가야 돼? 나는 천국 갈 그런 처지가 아닌데. 그럴 대상이 아니야. 아무리 봐도 내가 천국 간다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하고 내내 내가 아는 나와 천국에 도달한 나가 이게 이질성, 이질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노렸더니만 드디어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 뜻을 아주 짓밟는 결과물로 주께서 구원해주셨구나.’ 구원받고자 하는 내 구원의 욕심을 아주 밟을 대로 밟아버리고 그래서 “너는 구원될 자격도 없어. 너는 아예 죽어.” “어떻게 구원 좀 되지 않겠습니까?” “그냥 죽어 인간아! 구원 생각하지 말고 그냥 좀 죽어.” 그게 주의 뜻이에요, 그게.
그게 노아입니다. 노아 홍수였어요. ‘뿐’이라. 겨우 여덟 명뿐이라. 그 취지가 있을 때 인간 쪽에서 어느 누구도 ‘내가 죽어서 하나님 만나야지.’ 하는 생각 그 자체가 이게 거짓된 악마의 생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께선 어떻게 하느냐?
오늘 본문에서 ‘다윗의 씨’라고 되어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 노아의 씨는 안 되고 왜 ‘다윗의 씨’가 굳이 들어가야 되는가? 그 뜻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7장 14절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노아 때는 방주가 있었거든요. 노아 때는 방주를 약속했습니다. 방주를 약속한 것은 모든 ‘인간은 구원될 수 없어야 된다’는 그 원칙, 그 원칙을 알려주기 위해서 방주를 줬고요. 인간 자체가 구원 대상이 아니니까요.
그다음에 사무엘하 7장 14절도 마찬가지예요. 인간 자체는 하나님이 구원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굴 구원하느냐? 사무엘하 7장 14절을 보면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아들만 구원합니다. 자기 아들만 구원해요.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들만 구원하는 겁니다.
이거는 뭐 요지부동이에요. 주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내 아들이 아니면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아들의 나라에요. 골로새서 1장 16절의 말씀처럼 천국은 아들의 나라지 그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천국 가고,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해서 보내준다는 것은 다 구라입니다. 다 거짓말입니다. 그건 교회가 장사하려고 거짓말한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저주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다른 생각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국이 있긴 있고, 천국에 간 사람은 있긴 있지 않느냐?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떤 취지로 어떤 차원에서 갔느냐? 그게 ‘다윗+(플러스)……’, 다윗, 그다음에 ‘씨’가 나와요. 오늘 본문에.
그게 ‘씨’와 관련돼 있습니다. 씨앗, 자손이죠. 자손, 씨.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 2장 8절에 ‘다윗의 씨’라 되어있어요. 그럼 ‘씨’가 처음 등장하는 대목이 어디냐 하면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범죄 하고 난 뒤에 인간이 저주받기로 확정 난 뒤에 그다음에 하나님 쪽에서 움직이시는데 인간이 모두 저주받아요.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됩니다. 생명은 인간과는 아무 상관 없어요. 인간은 죽어야 될 운명입니다. 죽기 위해 태어난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관계없고요, 하나님께서 거기서 이제 꿈틀거리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등장하는게 여자의 씨앗이에요. 여자의 후손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진행하는 세상의 다루심은 이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이 줄기차게 계속해서 사건을 유발하면서 이어지고 이어진 그 기간이 오늘날 인류의 역사입니다.
일종의 어묵 꼬챙이, 오뎅 꼬챙이와 똑같은 거예요. 꼬챙이에다가 오뎅 집어넣고, 오뎅 집어넣고, 오뎅 집어넣고 계속 집어넣는 겁니다. 하나님의 그 꼬챙이는 일관 돼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등장. 인간은 빠지고. 이 여자의 후손, 여자의 후손이니까 남자의 후손이 아니니까 남자 없이 출현한 존재, 남성 없이 출현한 존재.
여성을 통해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고 여성을 통해서 스스로 나신 분. 마리아를 통해서, 마리아에 의해서 자기를 잉태한 게 아니고 마리아에 의해 스스로 잉태되어서 나신 분, 마리아라는 여성을 이용하신 분. 그 마리아는 관계한 남성이 없음이 분명한 어떤 여성, 그 여성을 통해서 스스로 나신 분, 스스로 여자의 후손이 되신 분, 그분이 누구냐?
그분이 누구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하 7장 14절을 한 번 딛고 신약까지 점프해요. 그 딛을 때 나타나는 명칭이 뭐냐?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입니다. 그것을 합쳐서 ‘다윗의 씨앗’이라 되어 있어요. 그 다윗의 씨앗은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여자의 씨앗, 여자의 씨앗만 구원이 돼요. 다른 사람은 구원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그대로 다시 한번 디모데후서 2장 8절에 보면,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그다음에 뭐냐 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예수”라고 되어 있어요. 다윗의 씨로,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으로 이 땅에 들어온 그분은 이 땅에서 어떤 일이 있어야 되느냐 하면, 죽으셔야 돼요.
죽으신다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죽으신 이 분이 독생자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에요, 성자 하나님이에요. 그냥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10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하나님이 내 주에게’ 할 때 그 주님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하나님이 죽어야 될 이유는, 인간들이 죽지 않는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들은 본인이 살아있고, 내가 여기 살아있으니까 하나님이 저쪽의 하늘나라에 살아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가짜인지를 인간은 몰라요.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생각이 자기는 옳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저 땅에 살아있어서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고, 나중에 우리를 구원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본인이 죽어있다는 생각을 못 하고 살아있다고 생각하니까 계속해서 어떤 아이디어를 거기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걸 비켜 갑니다. 비켜가는 방법은 인간이 만들어낸 그 하나님의 생각에 의해서, 쉽게 말해서 인간에 의해서 진짜 하나님이 죽으시는 방법 외에는 피해 가는 방법이 없어요.
인간은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가짜인 것을 상상도 못 하니까 가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손에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맡겼어요. 그 가짜 하나님을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여호와라고 한 거예요, 여호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죽어버린 여호와의 자리에 하나님 독생자가 계신 겁니다. 여호와 이름으로 여호와가 죽게 만들어요. 그 중간에 인간이 끼어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결과는 뭐냐? “봐라, 너희 인간들 모두 죽은 거 맞잖아.” 그걸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죽었으니까, 죽을 수밖에 없는 짓거리가 나오잖아.”라고 하는 거예요. 노아 언약에서 그냥 하나님께서는 이유 묻지 않고 그냥 죽였어요. 그냥 난데없이 폭우 내려서 다 죽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그것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인간이 죽으면서도 죽는 이유를 하나님 입장, 하나님 자신이 죽음으로써 인간들이 죽어 마땅함을 신약 시대에서 더 깊이 있게 죽는 이유를 알려줘요. 창세기 3장에서 인간들이 선악과 따먹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정녕 죽으리라’ 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계속 죽어야 될 이유는, 인간 속에 뭐가 살아있느냐? “너 선악과 왜 따먹었느냐?” 하는, 선악과의 원리가 계속 살아있는 한 인간은 계속 죽어줘야 돼요. 그러면 선악 지식 가지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이시는데 어떻게 사용하는가? 선악이니까, 선악 지식이니까,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에요.
다 결합하면 됩니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악한가를, 그것을 분별하는 그 지식이 인간을 죽이게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언제 알고 싶어 하는가 하면, 무서움에 쫓길 때, 공포에 쫓길 때 인간은 뭔가 아는 것으로 도피하는 그런 본능을 나타내요.
예를 들어 관절이 안 좋다. 관절이 안좋을 때는 ‘콘드로이친’을 찾게 되어 있어요. 지성이가 그렇게 광고하는, 관절에 좋다는 ‘콘드로이친’ 뭐 알아야 되잖아요. ‘아 콘드로이친이 관절에 좋다!’ 안다는 것은 뭔가 쫓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뭔가 쫓기고 있다는 거예요. 무엇에 쫓기는 가? 행복해야 될 내가, 지금 인생이 불편해져 있으니까 내가 뭔가 다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지식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무엇이 선인가? 내가 행복해지는 게 선이에요. 내가 행복한 것. 내가 불행해지는 것은 악이라고 규정합니다. 내가 불행에서 행복으로 가기 위해서 알려면 뭐냐, 선악 그다음에 지식, 아는 것에 계속 집착을 해야 하는 거예요. 더, 더 알고, 심지어 아는 게 어디까지 쫓아오느냐면, 교회 와서 성경까지, 성경 지식까지, Q.T까지 해서 습득하면서, ‘성경을 알면 내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교회나 성당을 찾아서 선악 지식으로 쫓겨서 옵니다.
그게 하나님이 인간 사냥하는 방법이에요. 사냥해서 죽이는 겁니다. 교회 다니는데 한 50년 다니고 드디어 운명 다해서 교회 문 열고 나가니까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대한 예수 장로회’ 문을 여니까 거기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선악 지식을 버리지 않고 아주, 아주 유용하게 활용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이 다윗의 씨, 하나님의 아들, 오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유용하게 사용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여 버렸습니다. 인간이 죽임을 당하니까, 죽는 순간 인간 세계에서는 없어진다는 의미로 다가오는 거예요. 없어진다.
그런데 오늘 디모데후서 2장 8절에 보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했거든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으니까 이것을 ‘죽음 + 부활’, 이걸 합쳐보면 여기 뭐가 들어있냐 하면, 하나님의 다윗의 씨의 본 내용이 거기 담겨있어요. 씨에는 죽음도 들어있고, 다시 죽음에서 살아나심도 중첩되어서 살아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걸 아주 쉬운 표현으로 하게 되면, 물고기 비늘 같은 겁니다. 비늘은 분명히 뭔가 있어요. 뭔가 있는데 비늘이 육지에 사는 동물한테는 필요치 않지요. 왜? 비늘 없이 사니까요. 비늘이라는 것은, 첫째 물속에 있다는 사실, 그게 비늘, 물고기들이죠. 두 번째, 물속에 있으면서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는 사실. ‘물속에 있다.’ 사실 하나, 그런데 ‘그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 둘. 그래서 두 가지 사실을 중첩해서 보여주는 게 비늘, 비늘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은 필히 죽어야 마땅하다, 하나. 그런데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의 씨, 복음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다, 둘. 이 두 개의 내용이 예수님, 다윗의 씨로 오신 분 안에 거기에 같이 겹쳐져 있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오늘 9절에 뭐라고 하느냐? 이걸 복음이라고 합니다.
9절, “복음을 인하여”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뭐냐? “내가 죄인과 같이” ‘죄인’은 아니에요. “죄인과 같이”라는 것은 비늘 기능이에요. 이 땅에서 분명히 죄인으로 취급받지만 사실은 의인이라는 거예요. 죄인 1, 의인 2, 1과 2가 겹쳐져 있는 것, 이게 누구냐? 그걸 고난이라고 말하고 예수님처럼, 이 고난을 받은 자가 뭐냐 하면, 성도라는 겁니다.
성도는 비늘 같은 존재에요. 물에 빠져 있으면서도 물에 빠지지 않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 빠지지 않는 존재에요. 원래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이 기능을 해 왔었어야 됐어요. 이스라엘 특징은, 그들이 죄가 많고요, 그들이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을 비늘 같은 기능을 작용해서 숫자도 얼마 안 되고, 죄도 많고, 또 목이 곧은 백성, 신명기 9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 백성인데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숫자 많고, 키도 크고, 힘 세고, 그리고 군사력으로 단련된, 훈련이 잘 된 그런 민족과 의도적으로 마주치게 만들었어요. 자꾸 부딪히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이렇게 보면, 이건 뭐 숱한 전쟁 이야기가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이뤄집니다, 전쟁 이야기가. 왜냐하면 이스라엘 이름 자체가 전쟁하는 나라에요. 끊임없이 전쟁하는 거예요. 구약 때는 그런데 신약 때는 뭐하고 전쟁하는가? 신약 때는 하나님과 인간과 전쟁하는 두 가지의 내용을 다 품은 자가 바로 하늘나라의 신약에서의 이스라엘입니다.
마지막 때는 인간이 하나님하고 전쟁해요. 구약 때는 마치 인간과 인간하고 전쟁하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우리는 이 사실을 지금 알았잖아요. 예수님이 이 비늘 같은 존재라고 아는데, 막상 예수님이 딱 이 땅에 태어나서 장성하고 난 뒤에 활동을 개시하니까 주변 사람이 뭐라고 하냐면, “저거 목수 아들 아니야? 목수 아들이잖아.” 이렇게 됐어요.
그러니까 다윗의 씨라는 그 특수성을 빼고 보는 거예요. 다윗의 특수성을 빼고 보는 이유는, 그 보고 있는 그 사람들이 자기가 중첩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세계에만 속해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신약 때에 하나님과 인간이 싸울 때 인간들에 제시된 무기가 뭐냐 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대표적인 것이 종교지요,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게 함으로 꾀어서 자기의 영생을 획득하고자 시도했던 겁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대표적인 사람이 나오죠. 부자 청년. 돈, 세상에서 좋아하는 돈이 자기에게 많으니까, 이 돈 가지고 영생을 따내려고 했지요. 그런데 그런 꼼수를 사실 감추었습니다. 감추고 뭐라고 하냐 하면, “제가 어렸을 때부터 십계명 다 지켰습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누굴 속이려고?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이 십계명 지키는 네 모습이 좋아, 돈 많은 네 모습이 좋아? 어느 게 좋아?” 이걸 단도직입적으로 물은 거예요. 여러분이 부자 청년에게 주님이 이렇게 묻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지요.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묻지요. “돈이 좋아? 주의 말씀이 좋아?” 기도할 때 “주의 말씀대로 살게 하옵소서.” 하면 “돈 뺏어간다!” “그건 아니고, 어느 정도는 주셔야지요.” “최종적인 게 뭐야? 돈이야, 말씀이야?” “돈입니다……” 근심하여 돌아갔다고 해요. 근심하여.
인간이, 돈이 왜 귀하냐 하면, 선악 지식에서 자기가 행복해지는 게 선이니까, 돈이 있을 때 선할 가능성이 많아요. 선한 사람 특징이 다 돈 많은 사람이에요. 돈 없는 인간은 선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한 자입니다. 거의 짐승이에요, 돈 없으면. 좀비 레벨, 레벨이 좀비에 가까워요. 돈 있는 사람은 여유가 있고 배려가 있어요. 그러니까 선해 보인다고요.
그러니까 이제 추가적으로 영생까지 고려해보죠. ‘돈은 많은데 이제 교회나 가서 천당이나 가볼까?’ 이렇게 오는 거예요. 돈 없는 사람은 이 시간에 돈 번다고 교회 나올 시간도 없죠. 인간이 내세우는 것은 선악 지식의 결과물을 내세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십자가로 이미 완료돼서 십자가에서 토해지는 말씀, 십자가에서만 나오는 말씀이기 때문에, 십자가 따라, 말씀 또 말씀 따라가게 되면 ‘내가 선하다’가 아니라 십자가, ‘내가 죽어 마땅하구나.’로 이끄는 그 말씀 그게 주님이 내세운 무기에요.
‘아, 내가 말씀 못 지키는구나. 죽어 마땅하네.’ 이런 쪽으로 최종 해석이 되는 말씀, 그게 이 전쟁이에요. 주님은 이 두 가지가 다 중첩되어 있습니다. 바르게 살았는데 결과는 아버지께 버림받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다 이루었다.” 했잖아요. 십자가에서. 십자가 부활하고 난 뒤에 부활해서 서서, 무덤에 앉아서 “다 이루었다”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룬 거예요, 십자가에서.
이렇게 해서 인간을 배제하시는 데 성공하신 거예요. 어떤 인간도 중첩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면 예수님의 두 세계 다, 죽음의 세계와 부활의 세계, 다 중첩됐다는 이 사실이 오늘날 죽어있는 우리에게 어떤 효과로 다가왔기에 죽어 마땅한 우리가 다시 살 수 있는가? 어떤 효과가 있느냐? 그 효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효과, 방식은 그냥 말로 하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그냥 예를 들겠습니다. 양자 물리학에서 간섭 효과 실험 같은 게 있어요. 기술이 늘어나서 보통 전자를 다발로 보내는데 에너지를 적게 해서 전자 하나 수준으로 낮춰 보낼 수 있는 기술이 발달되면서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슬릿(slit), 칸을 두 칸을 만들어요. 전자를 하나 수준으로 줄여서 총알 쏘듯이 딱 튕깁니다. 튕겨서 두 틈, 슬릿으로 딱 보내니까 스크린에 무슨 파동 같은 게, 짙고 옅고, 짙고 옅고, 파동 같은 게 등장한 거예요, 스크린, 막에. 원래 이게 총알 같으면 탄알 자국이 하나만 딱 있어야 하는데, 그게 옳은데, 그렇게 예상하고 과학자들이 전자 하나를 쏘아보니까, 탄알 자국 하나가 구멍이 뚫린 게 아니고 마치 파(波)를 보낸 것처럼 된 거예요.
슬릿을 두 개를 설치했 때문에 한 개인데, 전자 하나가 어떻게 두 구멍을 동시에 통과해서 도착할 때는 ‘나 입자 아닙니다, 알맹이 아닙니다. 파동입니다.’하는 티를 내듯이 쫙 깔려 있는 거예요. 원래 파동이란 물결처럼 높은 데가 있고 낮은 곳이 있으니까 그림자를 비춰보면 짙은 그림자, 옅은 그림자 있잖아요. 이것은 파동, 어떤 파가 여기 도달했다는 뜻이거든요. 파의, 파동의 흔적이라는 그 말이죠.
‘분명히 입자인데 왜 파동이 생기지?’ 그래서 과학자들이 관측기를 달아놨어요. 중간에. ‘내가 한 개를 쐈는데 어떻게 한 개가 구멍 둘을 동시에 통과할 수 있어? 이건 말도 안 돼.’ 관측기를 달아놨더니 관측기 달았다는 그 소식을 어떻게 알고 파동이 사라져버렸어요.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무슨 결론을 내야 할 텐데 주저할 수밖에 없어요. ‘광자가 파동이냐, 입자냐? 입자냐 파동이냐?’ 입자도 되고 파동도 되고, 이거는 말이 안 되거든요. 한 개가 둘을 동시에 지나갔고, 한 개도 지나갔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예요.
동시에 지나가면 파동의 간섭 효과가 생기지만 하나만 지나갈 때는 탄알 자국은 하나만 남는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과학자들이 약이 올라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인간이잖아요. 인간이 자연한테 진다는 것은 용납이 안 되잖아요. 기어이 진리를 찾아야 하니까.
그래서 안 되겠다는 오기로서 스크린 뒤에다가 관측기를 달았어요. 다 통과하고 난 뒤에, 그러니까 ‘결과가 다 끝나서 과거 지나서 현재 결과 끝나고 난 뒤에 이제 미래는 인간 내가 관여할게.’ 미래에다 관측기를 딱 달고 실험을 해보니까 미래에 관측기 달아놓은 거 어떻게 알았는지 또 다 날아갔어요. ‘지연된 간섭 효과 실험’이라는 겁니다.
거기서 과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뭐냐 하면, 이 간섭 효과란 둘이 있을 때 간섭하거든요. 하나가 있을 때는 간섭이 없어요. 내린 결론은 뭐냐? 광자가, 광자 하나가 본인에게 간섭한다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에게 간섭한다는 거예요.
이걸 하나님에게 바꾸면,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간섭해서 일을 결과 내는 거예요. 그리고 다 이룬 거예요.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카메라가 옛날 카메라, 옛날 사진관에 있는 카메라 있잖아요. 카메라로 찍을 때, 옛날에 증명사진 찍을 때 이렇게 앉아서 찍는데 구식 카메라를 썼거든요. <8월의 크리스마스> 그 영화 보면 나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바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옛날 카메라 특징은 렌즈 있는 곳과 망막있는 곳 사이에 주름진 천으로 가리운 간격이 있어요, 간격이. 주님은, 주님입장에서는 중첩돼 있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이 중첩된 채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본인이 중첩이 안 됐어요. 본인 자아가 중첩이 안 되고 하나밖에 없으니까 하나님도 나처럼 ‘난 여기 있고 신은 저기 있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저기 계셔서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다는 그자들이 하나님을 죽였어요. 유대인들이. 창조과학회가 그래서 문제 되는 거예요.
하나님 믿는 것이 지옥 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간격을 모르는 거예요, 간격을. 옆으로 보면 간격이 보이는데 앞으로 보니까 간격이 안 보이는 거예요. 아들과 아버지의 간격을 못 보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서 구원받는 자가 나타나느냐?
하나님께서는 성도한테는 티켓을 두 장을 줘요. 성도에게만. 모든 인간은 선악 지식을, 이미 낙원에 있는 나무 둘 중 하나를 이미 인간들은 획득했어요. 선악과를 획득했어요. 하나를 획득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과실을 차단시켰습니다. 인간은 그 선악 지식을 가질 때 하나님의 것을 가졌다고 악마로부터 미혹 받아서 “나도 하나님 거 차지했다! 나도 하나님처럼 됐다!”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거 죽는데? 그거 죽어! 그거 너 죽는 거야, 그거”
하나님이 유도했지요. 덫을 놓은 거죠. 인간은 죽는 쪽, 그것도 저주받아 죽는 쪽을 선택해버린 거예요. 그리고 생명나무는 따먹지 못하도록 차단시켰습니다. 인간은 티켓을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를 가지고 있으니까 하나를 가지고 있는 본인이 선악 안에서, 악에서 선으로 나가려고 하는 거예요. 악에서 선으로.
그 주인공이 누구냐? 본인이 주인공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뜻입니다. 어렵더라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 약속에서 사건을 유발시켜서 사건으로 이어지는데 인간은 사건과 사건 사이에서 그 사이를 자꾸 자기 속에서 통합을 시켜 버립니다.
통합을 시켜버리면 사건이 되는 게 아니고 그게 역사가 돼요, 역사. 역사가 되면 그다음에 나오는 문제가 역사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주인공이 나예요. 본인이 주인공이에요. 역사의 주인공,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예요.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가 자꾸 사건을 끌어모아서 나만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려고 하는 겁니다.
그걸 간단히 말해서 ‘내 인생 잘 살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한 문장으로 하면 ‘내 인생 참 잘살았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의 주인으로, 사건은 사건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걸 끊어버려요. 잘게잘게 끊어버린다고요, 이 역사를. 역사가 끊어지면 누가 끊기냐 하면, 누가 텍사스 전기톱에 의해서 끊어지느냐? 내가 날마다 작살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부정하게 하는 방법은 어제와 오늘을 잇지 못하도록 끊어버리는 거예요. 그날 염려는 그날에 족하도록 끊어버리는 겁니다. 말씀으로 끊어버리는 거예요. 사람이, 인생이 스트레스받아서 힘든 것은, 어제와 오늘을 잇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어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 와서 집사님 만날 때, “안녕하세요, 집사님? 잘 지내셨어요?” 하면 “누구세요?” 이렇게 하세요. “누구시더라?” 이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어제를 몰라야 오늘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제를 알게 되면 지금의 내 주인공을 빛내기 위해서 “네가 내 인생에 개입해서 된 게 없어! 가! 가란 말이야!” 낙엽 막 뿌리면서 “가란 말이야! 얼마면 돼?” 이런 식으로 자꾸 자기 과거에 자기가 꼬여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손해는, 본인만 맨날 울어요.
그러니까 누구와 이별해야 되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하고 이별해야 됩니다. 참,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이별할 때 아파서 눈물 흘리는 거예요. 자기와 이별한다고.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남을 사랑할 여유가 없습니다. 매일같이 인간은 자기 자신을 흥분케 하는 식으로 살아가요. 그런 데에 열중합니다. 자기가 주인공이니까, 자기가 누구의 종이라는 것을 굉장히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고, 자기에 대한 모든 걸 생각합니다.
그런데 로마서 6장 17절에 보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라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었더니,” 하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인간을 ‘죄의 종’이라고 규정하고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종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절,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그러니까 인간은 전에도 종이었고, 지금도 종이고, 주인공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다만 죄의 종이고, 지금은 다만 의의 종이에요. 주님의 종이에요. 내가 의의 주인공이란 말, 의의 주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보면 그걸 거부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이지 우리가, 내가 나의 의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냥 누구의 흔적, 주님의 의인 됨을 증거 하는 종이에요. 종 됨을 감당할 수 있어야 됩니다. 평소에 우리의 인생이 아픈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그래서 이별하게 하시는 겁니다.
어떤 노래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노래 가사 나올 타이밍이 됐지요?
사랑이란 것은 나에게 아픔만 주고
내 마음 속에는 멍울로 다가와
우리가 잡으려 하면 이미 먼 곳에
그땐 때가 너무 늦었다는데
이 가사는 남녀 간에 헤어질 때 이야기에요.
차마 어서 가라는 그 말은 못하고
나도 뒤돌아서서 눈물만 흘리다
이젠 갔겠지하고 뒤를 돌아보면
아직도 그대는 그 자리에
아직도 그대는 그 자리에
‘어디서 많이 들어본 가사인데?’ 할 거예요. 내가 이야기 할게요. <암연> 고 한우가 불렀던 ‘암연’이라는 노래입니다. 속 시원하게 알려줘요. 사랑은 나에게 아픔만 주고. 나하고 헤어지려니까 ‘이젠 갔겠지, 떠났겠지. 아니 돌아보니 아직 그 자리.’
‘이제는 복음으로 살겠습니다. 나는 이제 주의, 의의 종으로 감사하겠습니다.’ 했는데 교회 문 열고 어느 날 보니 다시 합쳐져 있어요. 아이고, 독한 것, 지독한 내 사랑. 그래서 주님께선 티켓을 하나를 주는 것이 아니고 티켓을 두 개를 줘요.
그러면 우리는, 나는 분명히 하난데 티켓 둘이 와서 어느 티켓이 어느 방향인지를,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사건에 접하게 만듭니다. 어느 티켓으로 가야 하는가? 내가 어느 티켓을 사용할 것이냐, 의 이야기 아닙니다. ‘내가 어느 티켓을 보호해야 할 것인가?’ 종이니까.
내가 티켓을 가지고 사용하는 게 아니고 티켓이 날아오게 되면 그 티켓이 가는 곳, 그 티켓 자체를 보호하는 용도로 우리가 바뀝니다. 전에는 ‘천국 가는 티켓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얻기 위해 교회 나왔다면 예전에 그것은 내가 주인공이에요. 내가 주인공인데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 티켓에 의해서 티켓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가 종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종으로!
그게 뭐냐 하면, 아까 양자 물리학에서 결과가 이미 미래를 결정해버려요. 결과라는 두 번째 티켓이 들어 와버리면, 과거에 이 땅에서 뭘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일체 묻지를 않습니다. 왜? 다 이루었다. 의를 다 이루었다, 에 부합되는 과거로 과거가 다 변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은 자가 죽기 위해서 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땅하고 당연하다고 보는 거예요. 그거에 대해서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회개하고 반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으라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해서 죽는 것은 마땅하죠.
그래서 티켓 두 장을 주는데 티켓 첫 장은 뭐냐? 첫 장의 내용은 모든 인간이 다 가지고 있는, 성도든 성도 아니든 다 가지고 있는 티켓의 내용은 뭐냐?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이 티켓입니다.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를 위해서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구원받기 위해 무진 애를 쓰게 만들어버려요. 이게 이 세상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악마가 인간에게 구원받는 방법을 교회를 통해서, 성당을 통해서 제공해주기 때문에 그랬어요. 그러면 인간은 희망을 갖게 돼요. ‘야, 구원될 수 있구나.’ 희망을 가져요. 이게 종교라는 거잖아요. 그게 티켓 하나에요.
그런데 베드로에게 마귀도 와서 그렇게 했어요. 마귀가 베드로마저 자기 지옥으로 이끌기 위해서 베드로로 하여금 자기가 아는 메시아, 자기가 알고 있는 천국, 자기가 알고 있는 여호와, 자기가 알고 있는 율법, 거기에 충실하도록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알고 있는 천국과 자기가 알고 있는 메시아 입장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면, “제가 예수님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했어요. 티켓 한 장 들고. 한 장 들고 갔어요. “오지 마라. 너는 나 있는 곳에 오지 못한다.” 누가복음 22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34절, 35절 쭉 나오는 말씀이에요. 34절에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곧 “네 티켓 값은 안 받는다. 네 티켓은 마귀가 너를 꼬시기 위한 티켓이야.” 천국이 있고, 나중에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그 악마의 티켓, 그것만 있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이야기 한 것은 ‘예수를 믿어라’가 아니라 ‘예수님과 아버지의 간격을 믿어라’ 이 말입니다. 그것이 ‘다윗의 씨’ 거기에 굳이 들어가야 하는 내용이에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간격을 네가 볼 수 있어야 해요. 카메라 정면 보지 말고 그 뒤쪽에 있는 렌즈와 망막 사이에 있는 주름진 검은 막, 간격이 왜 필요한지를, 왜 주님은 중첩 돼야 되는지를 알아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선 두 번째 티켓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그 악마 가는 그 지옥에는 하나님에 의해서 못 가게 만들어요. 이게 중요합니다. 내가 판단해서 ‘야, 이건 지옥이니까 가지 말고, 천국 가야지. 예수 잘 믿어야지.’ 이래서 가는 자는 전부 다 지옥 가요.
예를 들면 나이트클럽이라는 게 있어요. 저는 가본 적이 없지만 또 알아야 하니까 간접적으로 드라마를 통해서 나이트클럽이 어떻게 되는가를 알았는데, 영업을 시작하고 난 뒤에 직원들 모아놓고 이야기합니다.
“영업 시작! 여자는 폭탄만 아니면 입장이 가능하고, 남자는 아저씨 대학생 무조건 못 들어가, 제외시켜. 예약한 손님인데 스타일 꽝이다? 그럴 때는 평민 아니면 VIP니까 따로 구분해서 보내. 영업장이 꽉 찼으면 수질 관리에 바로 들어가는데 여자는 하마와 돼지는 안 돼.”
안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친구가 매달려도 열어주지 말라는 거예요. “남자는 부티 나고 스타일 죽이면 보내. 하지만 스타일 꽝이면 절대로 ‘입뺀’ 해야 된다.” 자, 여기서 ‘입뺀’이 뭐냐? 입구에서 뺀치 사용하는 거예요. 입구에서 뺀치, 입구에서부터 무조건 뺀다는 겁니다.
이걸 성령께서 하십니다. 모든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어디로 홀리느냐? 천국으로 가려고 갑니다. 그런데 ‘입뺀’, 입구에서 뺀치로 쳐서, 성령은 “안 돼! 너는 비늘 기능을 해야 돼. 비늘 기능.” 이미 죽었고, 죽었는데 아직 살아있는 이유는, 이미 네가 주인공이 아니고, 네 인생이 주인공이 아니라 너는 예수님이 새롭게 다 이루었다, 에 의해서 시간을 역순해서 우리의 결과를 하나님의 의의 결과로 만들어버릴 그 정답 하라고, 종으로 하기 위해서 입구에서 빼버려, ‘입뺀’ 오늘 설교 제목 ‘입뺀’으로 해버릴까요?
빼버려요. 그러니까 이건 우리에게는 내가 내 인생의 역사가 있는데 역사를 난도질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되돌아가는 겁니다. 그 사건의 주인공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걸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하냐? ‘고난’이라 하는 겁니다, 고난. 내가 죄인같이 됐지만,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이것은 바로 우리 선배가 되는 요셉이 어떻게 살았는가, 가 시편 105편에 나옵니다. 17, 18절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 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 2장 9절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다 이뤘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티켓 두 장에서 우리는 두 번째 티켓, 주님이 주신 성령의 티켓에 철저하게 매이게 하는 거예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말씀이 말씀되게 하나님이 하셨다.’ 그것을 우리는 증거 하기 위해서 아직도, 우리는 이 땅을 못 떠나고 있습니다. 온몸에 비늘 달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죄와 의, 죽음과 부활의 세계 가운데서 아무도 갈 수 없었는데 주께서 성령주셔서, 복음 주셔서 예수님처럼 반복되는 똑같은 예수님의 반복의 삶을 허락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의의 종이 된 것을 늘 감사할 수 있는 사건화 되는 하루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