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 고기를 먹으라,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며,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찌라도 그들이 너를 청종치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지 아니하리니,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국민이라 진실이 없어져 너희 입에서 끊어졌다 할찌니라”
■“네가 그 고기를 먹지 말라”라고 하셨는데 오늘 본문에서 고기 먹으라고 하는 겁니다. 이래나저래나 해석이 문제인데, 하나님께서 율법대로 제사를 지내고 안식일 지키라고 하니까 인간들이 그대로 해요. 이게 문제였어요. 22절에 나온 것처럼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시면서 23절에 보면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라고 나와요.
번제 하지 말고, 제사 형식 취하지 말고 내 목소리를 들으라는 거예요. 내 목소리를. 이 말이 뭐냐 하면 또 어려워졌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속 비비 꼬시는 거예요. 율법에서 하늘나라 성전, 설비 다 갖춰서 만들라고 하셨고, 만들어서 거기서 정기적으로 안식일에 예배드리라고 다 해놓고, 거기에 제사하는 순서까지 일일이 매뉴얼로 다 줬단 말이죠. 그 준 것 중에 뭐냐 하면 번제물을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해놓고 지금 와서 뭐냐 하면 내가 너에게 제사법 주기 전까지는 번제물 먹지 말라는 말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거 없을 때, 제사하는 율법 없을 때, 그때 나는 너희들과 어떻게 사귀었고 어떻게 함께 했지?’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그때는 주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선지자 모세를 통해서 목소리를 전해주었잖아요’라고 대답하니까 ‘그래, 바로 그거야. 그거. 내 목소리를 들으라니까’ 그러면 목소리를 들으라고 처음부터 말하든 하지 번제, 속죄제 이런 거는 왜 하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율법이 있어야 인간에게 문제가 발생 됩니다. 인간이 얼마나 형식적이냐는 형식에 관한 법률 조항들이 투입될 때, 인간은 자기의 본색을 형식에 담아서 뿜어낼 수가 있어요. 하나의 예를 들면 시골 교회에서 투표를 통해서 새로운 장로를 선출하려고 장로투표를 하는데 노회법에 보니까 세례교인 3분의 2가 찬성해야 한다고 되어있어요. 그래서 자기가 미는 장로가 선출되게 하려고 사전 탐색을 해보니까 3분의 2에서 한 표가 모자라요.
그러면 투표하는 그날 일당 10만 원 주고 자기 친척을 교회 오게 해서 투표를 하도록 하는데 다른 교회 노회장이 와서 주관하니까 누가 누구인지 그걸 알 수가 없죠. 그러니까 ‘3분의 2 가결되었습니다. 땅! 땅! 땅!’ 이렇게 할 때 그 장로를 밀어준 사람들은 ‘음매, 기(氣) 살아~’라고 되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돈으로 한 표를 매수한 겁니다. 그러면 3분의 2는 뭐였던가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러니까 3분의 2 지키지 말고 내 목소리를 들으란 말이야”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3분의 2’가 있어야 인간의 수작 부리는 것이 밖으로, 행동으로 노출되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이 주어지지 않으면 인간 자체가 항상 자기가 깨끗하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자기가 늙어 죽는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율법을 주신 것에 하늘나라가 침투하는 거예요. 본문에는 침입이라고 나오죠. 침입해서 율법과 복음을 직접 맞닥뜨리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 안에 구덩이가 생겨요. 구덩이가 생긴다는 말을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고 난 뒤에 마리아가 올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부활하셨고 이제 재미나게 손잡고 덩실덩실 춤추면 되는데 “만지지 말라”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복음과 율법이 직접 관여할 때는 인간은 어떤 상태에 있느냐 하면 그 율법과 복음 성취에 있어서 관여가 끊어진 상태가 되어야 해요. 인간은 제로, ‘0’의 상태가 아니라 마이너스(-) 상태가 되어요. 푹 파여야 거기에 뭐가 담기거든요. 톡 튀어나온 플러스(+) 상태가 아니고 인간은 있는 것조차도 더 내려가서 마이너스(-)상태가 되어서 푹 파여야 해요. 파여야 한다는 것은 제가 뭔 뜻으로 이야기하느냐 하면 인간은 더는 원래 상태나 의로운 상태로 돌아갈 가능성이 전무 해야 해요. 아예 없어야 해요. 아예 등 돌려야 하고, 아예 얼굴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 원래 인간의 상태입니다. 푹 파여야 한다고요.
율법을 통해서 푹 파여야 한다고요. 나무 심기 할 때 땅을 파야 하잖아요. 그냥 나무 가져다가 바닥에 붙이는 것이 아니잖아요. 푹 파인 상태에서 나무가 뿌리를 내리듯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이 묻히고, 심기어지는 그런 구덩이 역할을 해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뭣이 어려우냐, 쉽지’라고 하시지만 이게 어려운 이유가 인간이 거기에 푹 파였을 때 훌라후프를 생각해야 해요. 훌라후프가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도넛처럼 동그라미 두 개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훌라후프 바깥쪽 테두리인 동그라미와 안쪽 테두리 동그라미 그 안에 빈 공백, 공기가 들어가 있겠죠. 빈 여백이죠. 안쪽이 율법이라면 바깥을 복음이 둘러싸는 겁니다. 우리 내부에서. 푹 파인 우리 내부에서. 율법이 날아간 것이 아니고 율법이 있고, 그다음에 그것을 복음이 둘러싸고 있는 입장에 있는 겁니다. 그 바깥쪽 원과 안쪽 원 사이에 틈이 있고, 그 틈이 무엇이냐 바로 단절성이에요. 왜 그렇게 단절되어야 하느냐 하면 그래야 예레미야 7장 24절이 성취됩니다.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며”라는 말씀이 성도 내부에 예레미야 7장 24절에 이 말씀이 영원토록 계속 살아있어야 해요. 그래야 뭐가 사느냐 하면 우리가 관여하지 못하고 복음이 율법과, 그러니까 복음도 주인공이 하나님이고 율법도 주인공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하나님과 직접 관련해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갔다가 성취가 되는 겁니다.
큐티하면서 예레미야 7장 24절을 보고 ‘오늘은 내가 등짝을 바깥으로 돌리고 얼굴을 주님 쪽으로 향하여야 하겠다’라고 이거 백날 해도 새로운 감사의 요건이 와버리면 한 방에 훅 갑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너는 너에게 단절성이 어디 갔지? 십자가라는 단절성이 지금 어디 갔어?” 저는 주님 주신 은혜로 감사합니다. “아니, 아니, 그런 감사 말고, 너는 너의 죽어 마땅한 마지막을 보여주는 감사가 있어야 해”
어떤 감사도 이제 더는 감사가 아니고 죽은 나를 살렸다는 그 감사할 거리가, 그게 있어야 해요. 여러분들이 두꺼운 책, 좋은 책 보면 안에 책갈피를 할 수 있는 천으로 된 줄이 있지요. 우리가 성도라면 나와 하나님 사이에 끊어놓는 선, 그 선이 십자가고, 그 선이 있을 때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끝으로 과연 이 말이 진실한지를 베드로전서 2장을 통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7절에 보면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건축자들의 버린 돌. 시편 118편 22절에 나오죠.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성도라는 새로운 창조물의 유일한 기초가 되는 돌이기 때문에 이걸 빼면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버렸고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버림받아 마땅하고, 그 마땅함이 여러분 마음속에 책갈피, 빨간 책갈피 끈으로써 계속 살아있기를 원합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만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우리가 해석하지 않게 해주시고 성령이 와서 해석하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우리의 종말, 최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이 기쁨이 세상의 어떤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