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흔적
2018년 11월 11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6:17-18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6: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사도는 예수의 흔적이 있는 사람과 예수의 흔적이 없는 사람을 구분 짓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일종의 정신 속에 생겨버린 큰 구멍같은 것이라서 그 속으로 모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신체상 차이 같은 것을 다 함몰시키는 장소입니다. 즉 '예수의 흔적‘이 있으므로서 그동안 세상 사람과 견줄 수 있는 요건은 사라지는 겁니다. 비교할 거리가 없어져 버린 겁니다. 사도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인간들이 알아듣는 방식으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의 자기들 행함으로 이런 결과를 내지 못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뭐든지 듣게 되면 자기 행함으로 재현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행함의 위력을 즐기려 합니다.
사도는 이점을 알고 도리어 인간들을 놀랠키려고 합니다. 이는 엄청난 비약이요 도약입니다. 사도는 인간들이 못 알아듣는데 성공코자 합니다. everybody 즉 ‘누구든지’를 사도는 겨냥합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으로 비교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비교할 가치도 없다는 겁니다.
예수의 흔적은 ■일종의 분화구와 같습니다. 표면에 보이지는 않지만 새로운 피조물 속에서만 ■새로운 피조물을 장악하는 힘이 작렬하고 발산하는 곳이 바로 ‘예수의 흔적’입니다. 이 ‘예수의 흔적’의 성격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3:18에 잘 나와 있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이 천국가느냐 지옥가느냐의 결정권은 인간의 결정에 넘기는 그런 기회를 사랑의 차원에서 제공했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3:18에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하늘에게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주셨는데, 그 분의 관점에서 볼 때 이미 인간은 심판 속에 갇혀 있는 처지라는 겁니다. 즉 ‘벌써 심판 속’의 존재들입니다. 이 사실을 통보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내가 구원의 당사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흔적의 장소란, 두 번 다시 인간은 ‘이것은 내가 행했습니다’라는 것을 도리 끄집어낼 수 없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나를 날마다 잊고 죽은 존재임을 확인하는 장소가 바로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사도에게 ‘산다는 것’은 본인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흔적’이 주도적으로 살아나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의 흔적은 곧 ■인간의 모든 힘을 빼버리는 곳입니다.
따라서 악마는 기를 쓰고 이 지점을 틀어막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마음에 그 어떤 구멍도 없음을 알려줍니다. 그렇게 해서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으로 인하여 자랑스러운 자랑거리를 유지하게 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6:14에서 사도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여기서 오직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즉 다른 자랑거리와 합체될 수 있는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유독 십자가만 자랑하기 위해서 다른 자랑거리는 이 십자가 자랑에 섞이거나 포함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지옥에서 자랑할 거리와 천국에서 자랑할 거리를 분간 못하고 있습니다. 즉 버려야 할 것과 간직해야 할 것을 구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악마의 사주에 의해서 반대로 나갑니다.
옛날 초등학교 근처에 달고나를 파는 상인들이 있고 그 앞에 초등생 꼬마들이 앉아서 열심히 달고나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각설탕과 소다와 작은 쪽지에 담고, 일산화 탄소가 솟아나오는 연탄불 위에 놓고 열을 높여 젓게 되면 액체 덩어리가 되지요. 그것은 평평한 철판에 쏟아 붓고서는 거기에 형식을 만들어냅니다.
정성드려서 바늘을 가지고 홈을 따라 조심스럽게 파다보면, 원하는 형체와 그리고 떨어져나갈 우수리가 분리됩니다. 가차없이 버려야 할 것이 오늘 본문에 보면, ‘모든 인간’들이 자랑거리으로 품고 있는 것, 곧 자기 인생입니다. 하지만 사도에 의하면 반드시 채택해야 될 것은 오직 ‘예수의 흔적’뿐입니다.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신 자랑거리입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이를 위하여 주님은 망치로 ‘예수 흔적’에 방해되는 우리네 인생자랑이 떨어져나가도록 조치하십니다. 이것이 ‘성경해석의 완결판’입니다. ‘예수의 흔적’이란 모든 것의 종결을 뜻합니다. 마지막 남을 것은 이것 뿐입니다. 율법의 할례의 정신이 바로 이런 겁니다. 율법의 대다수는 자기 몸으로 행할 것으로 간주되지만 ‘할례율법’은 도리어 거세를 요구합니다.
있는 것도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 ‘없음의 자리’가 나머지 모든 ‘있음의 자리’를 주도하는 자입니다. 즉 ‘없음’을 자랑하는 자가 천국가는 자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의 모든 이 생의 활동은 ‘없음’을 지향하는 활동이었습니다. 이 ‘예수의 자리’가 있는 성도들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흔적으로 인하여 뜯져져 나가는 인생’임을 감사합니다.
이 우주의 모든 변동은 ‘예수 흔적’ 중심으로 재편됩니다. 이는 곧 성도의 본향은 율법 안에 이미 창세전부터 정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에게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는 말은 곧 하늘나라에 사도의 자리가 이미 마련되어 있음을 통보하는 겁니다. 이로서 사도는 예수님의 가신 길을 그대로 답습하게 됩니다.
즉 흔적 말고는 모든 것을 없애겠다는 주님의 취지에 동의하고 있고 감격하고 있고 놀라고 있는 겁니다. 예수의 흔적이 없는 세상사람(=누구든지)은 오늘도 알 수없는 것에 쫓기고 있습니다. “이것만큼 다치지 않게 해달라는 식‘으로 쫓기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가져봐야 정작 원하는 것은 어느새 저만큼 달아나 있습니다.
뒤에서 쫓아오는 것은 죄의식으로 인한 징벌입니다. 귀한 내 자랑거리가 깨어질까봐 늘 불안합니다. 겉멋과 잘난 척 하는 것으로 악마에게 계속 쫓기는 생활, 이 모든 것은 내가 누군지를 몰라서 그러합니다. 나를 자랑하지 맙시다. 기도합니다.
313강-갈 6장 17-18(예수의 흔적)1811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6장 17-18절입니다. 신약성경 309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6:17-18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찌어다 아멘.”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를 끝내면서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만나서 어떤 결과가 있었다는 것으로 마감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종결이지요.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겁니다. “더는 다른 해석이 없다. 또는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갖지 말라.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뭔가, 확실하게 끝내줄게.”라는 것을 확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이것이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알고 있는 모든 이해의 마지막 종결입니다. 예수의 흔적이 없는 인간과 예수의 흔적을 가진 인간으로 구분지어서 예수의 흔적이 없는 사람은 죽어도 지옥 가는 사람이고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예수의 흔적이 있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새롭게 지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이야기는 사도가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못 알아듣게 하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작용해서 일하셨기 때문에 본인이 생겼듯이 나처럼, 자기처럼, 예수님이 직접 다가가서 그 사람을 건져내는 작업으로 인하여 나처럼 예수의 흔적이 있게 되었으니까 이것은, 사람이 어떻게 뭔가 배워서 해보겠다는 그 모든 것을 이 말씀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뭔가 듣게 되면, 그걸 자기가 알아듣는 방식으로 이해해서 그걸 행함으로 재현해내려는 의도가 있어요. 남이 뭐 되었다 하니까, 새로운 피조물 되었다 하니까 자기도 행함을 동원해서 나도 새로운 피조물 되어볼까, 라고 시도하는데 그렇게 시도할 수 있는 내용 같으면 내가 말을 안 한다 그 말입니다.
너희들이 ‘아, 누구든지 행하면 저렇게 될 수 있구나.’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내가 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이 흔적이 내가 파내서 만든 흔적이 아니잖아요. 그 흔적이 예수의 흔적이에요. 예수님의 흔적이라는 말이지요. 이 말은, 여러분들이, 머리 좋은 사람은 아시겠지만, 나라는 것이 있는데 나에다가 예수님이 뭔가 가한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라는 인격체가 원래 나에게는 하나인데 나라는 인격체가 하나가 아니고 둘이 된 겁니다. 나에게 나만 달랑 있는 것이 아니고 나 말고 예수님이 함께 작업을 이루어서 만들어낸 것이 뭐냐?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거지요.
그것을 예수님의 몫으로 돌려야 되기 때문에 “여러분, 나 이렇게 예수의 흔적을 가졌기 때문에 여러분도 알아서 열심히 하세요.” 라고 사도바울이 권면할 내용이 아닌 거예요. 이것이 예수님의 해석의 끝판입니다. 갈라디아서 마지막에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해석의 종결을 의미하는 거예요. 마무리 지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결국 마무리 지음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이 안 받는다는 겁니다.
그동안 사람들이 사도에 대해서 굉장히 오해를 한 이유가, 사도가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되면 사도에게 일어난 일을 우리 자신도 행함으로 그대로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사도의 말을 경청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나에게 일어난 일을 주님 하는 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한 실적을 내 몸에 걸치는 식이 되어버리지요. (#빨리 벌을 잡아야 계속 설교를 하겠는데 벌이 설쳐대서 설교를 …….) 흔적이라는 말은 하나의 정신적 무늬라고 보면 돼요. 정신적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사도바울이 이걸 본인이 원했던 것은 아니에요.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이 흔적이 무늬인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안에 일종의 구멍이 나 있는 것, 우물, 또는 분화구, 맨홀, 이렇게 보시면 돼요. 구멍이 나 있는데 이 구멍은 사도바울에게 어떤 구멍이냐 하면, 그동안 남과 견주고 남과 비교할 수 있는 모든 사회적, 정치적, 비교거리, 그런 조건들, 문화적조건, 경제적 조건들을 전부 다 집어넣어서 함몰시키는 구멍이 났다 그 말이지요.
‘네가 잘났어, 내가 잘났어?’ 견줄 수 있으려면 인간들이 자기 행함의 어떤 실적을 통한 의로움이 있어야 되는데 그 의로움을 가지고……, 쉽게 가겠습니다. 사도바울의 인생이라는 정신적 몸에다가 구멍을 파는 거예요. 드릴로 구멍을 파서 모든 이 세상에 있는 사회적인 차별, 정치적인 차별, 그리고 남자냐, 여자냐, 자유자냐, 종이냐, 그런 차별, 잘사느냐, 못사느냐, 그런 경제적인 것, 수입이 얼마냐 하는 그 모든 것을 그 구멍에 다 집어넣는 거예요.
주께서 구멍을 파고 다 집어넣어버린다는 말이지요. “그런 구멍이 있습니까?” 하고 사도가 지금 묻는 거예요. “저는 그런 구멍이 있는데 여러분은 그런 구멍을 갖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사람들이 사는 것이 걱정스럽게, 힘들고 늘 불안하고 뭔가에 쫓기듯이 사는 이유는 그런 모든 세상적인 조건을 함몰시키고 없애버리는 그런 구멍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그런 구멍이 없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행해서, 내 자식 잘 키워서, 돈 벌어서 이 잘한 것 가지고 남과 견주기에 나서고 평생을 경쟁을 하다 보니까 정신이고 육체고 피폐해져 가는 거예요. 성경을 왜 보느냐? 그동안 인간들이 성경을 왜 보는가 하면, 성경 봐서 행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걸 왜 행해야 되는데? 그걸 왜 지켜야 됩니까? 지키면 남보다 더 나을까 싶어서. 이걸 지키면 예전보다 더 우수한 사람이 될까 싶어서. 종교적인 어떤 차이가 나로 하여금 죽어서도 천당 가는 조건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과거에 자기 잘난 것을 계속 간직을 해야 되는 거예요. 없애는 것이 아니고 계속 간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흔적은 일종의 우리 정신에 놓여 있는 화장실이라고 보면 됩니다. 화장실의 기능은 배설하는 기능이에요. 없애버리는 겁니다. 빼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의 흔적이란 인간이 가꿀 수 있는 힘을 빼는 곳, 자랑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쏙 빼는 그런 빈 홀, 구멍, 어디로 통하는지 모를 그 구멍을 가지고 예수님의 흔적이라 한다는 말이지요.
이 말은 뭐냐? “사람들아, 나 사도바울, 내 가슴에 구멍 났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천당 가려고 내가 노력해서 뚫은 것이 아니고 주께서 와서 나를 구멍 나게 만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게 모든 성경해석의 종결이라는 거예요.
이 구멍의 특징이 뭐냐? 한 번 들어간 구멍은 도로 끄집어 낼 수가 없어요. 내 속에 들어온, 이 구멍 속에 빠진 것을, 예수님이 낸 구멍 속에 빠진 것을 내가 행했다고, 내 손에 쥐고 ‘이것은 내 기도덕분, 내 헌금 덕분, 내 노력덕분’ 이렇게 도로 끄집어낼 수 있는 구멍이 아니에요. 그냥 들어가면 끝입니다.
그런데 그거하고 누구하고 비교하느냐?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했거든요. 여기에 ‘누구든지’ 그 ‘누구든지’와 사도바울은 지금 대결하고 있습니다. 에브리바디, 누구든지, 누구든지 오라 이 말입니다. 구멍 안 난 사람 누구든지 다 오라는 말입니다. 네가 구멍이 안 났기 때문에 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 시비를 걸고 있는 겁니다.
“사도바울아! 그것은 네 개인적인 견해 아니야?” 이런 식으로 시비 거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예수님이 계시를 전할 때에 반응이 있어요. 그 반응은 무엇이냐? 너무나 이야기하는 것이 도발적이다, 또는 너무 비약적이에요. 인간의 행함으로는 해 낼 수가 없는 거예요. 사도바울의 모든 말씀이.
그러니까 그들이 화가 나서 사도바울에게 시비 걸 수밖에 없잖아요. 시비 거는 그 무리, 집단을 오늘 본문에서 ‘누구든지’라고 해요. 누구든지 오라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의 하는 이런 이야기가 사도만 독특하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도 그런 이야기를 했고 사도들이 다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요한복음 3장 18절에 보면,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는 말을 사람들은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봐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너무 사랑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지 않는구나, 라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심판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심판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반대로 생각해야 돼요. 이미 너희는 심판 중에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어떻게 하면 심판 안 받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심판에서 면제될 수 있습니까?” 하는 그 질문 자체가 성립 안 된다는 겁니다. 어려운 이야기죠.
왜 그러냐 하면, 독생자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했어요. 독생자가 내려오는데, 하늘에서 독생자 아들을 주시는데 그 독생자가 오기 전에는 ‘내가 죽으면 좋은데 가야지. 살아 있을 때 착한 일 많이 해서 천당 가야지.’ 했는데 막상 독생자가 오니까 내가 죽어서 좋은데 가야지, 라고 여유를 부릴 입장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독생자가 옴으로서 비로소 우리가 알게 되었다는 그 말입니다.
독생자가 뭘 갖고 오느냐 하면, 너는 지옥가고 천국가고를 결정할 권리가 애초부터 없었다는 소식을 품고 독생자가 이 땅에 온 거예요. 바로 그 분의 이야기를 믿으라, 그 말입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믿으라, 그 말이에요.
정말 에브리바디, 누구든지 오해해요. 모든 인간이 다 오해하고 있습니다. 올림픽 때 중계방송을 하잖아요. 항상 그런 사람이 있어요. 개회식 할 때 메 스타디움의 관객을 죽 비춰줍니다. 큰 피켓에 영어로 “Jhon 3:16” 써서 들고 있는 사람들 꼭 있어요.
전 세계 40억에게 중계되는 그 화면에 요한복음 3장 16절을 집어넣는 거예요.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 그게 맞는 말이냐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걸 보고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들이 그래요.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엉터리라는 것이 사도바울의 최종적인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아요. 인간을 사랑한다면 심판 자체를 없애야 돼요. 여호와의 증인처럼. 요새 군대 안 가려고 여호와의 증인에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는 거예요. 인간을 사랑한다면 여호와의 증인처럼 심판이 아예 없어야 돼요. 지옥이 아예 없어야 돼요.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8절에 보면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할 때 심판을 하나님 쪽에서 없애준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생각을 반대로 해야 돼요. 이미 심판 중에 있는 겁니다. 우리가. 참, 선입감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워요. 교회가 장사하려고 이런 선입감을 유포시킨 거예요.
교회가 복음을 가로막아요. 교회가 없으면 복음을 이해할 텐데 교회 때문에 복음을 정반대로 이해하는 겁니다. 교회가 아니고 불교 절간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주께서 너무 잘 아시지요. 열왕기하 5장에 나아만 장군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아만 장군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아람나라, 지금 내전중인 시리아, 그 시리아의 군대장관이에요.
국방부장관인데 갑자기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자기 몸 나아보겠다고 이스라엘에서 기적을 베푼다고 소문난 엘리사선지자를 찾아온다는 그 대목입니다. 거기서 나아만 장군이 가장 잘못되게 오해한 것이 뭐냐? 나 자신의 몸은 건강해야 된다는, 건강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 이것이 나아만 장군의 결정적 잘못이었습니다.
내 몸은 문둥병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예요. 평소에는 몰랐는데 문둥병 걸리고 난 뒤에는, 이 문둥병이 나한테 걸린 것을 비정상이라고 보는 거예요. 주님 보기에는 그게 정상인데 문둥병 걸렸다는 것을 비정상이라고 봐요. 문둥병 안 걸린 것을 비정상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고 문둥병 걸린 것을 자기 입장에 어울리지 않는 비정상이라고 보는 거예요.
자기 자신은 문둥병 걸리면 안 되는 존재라고 일방적으로 설정을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런 설정된 엉터리 자아를 갖고 있으니 성경구절 어느 곳을 봐도 똑바로 해석될 리가 없어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인간을 꼭 두 종류로 나눕니다. 예수의 흔적이 있는 사람과 예수의 흔적이 없는 사람.
예수의 흔적이 없는 사람은 지옥가고 예수의 흔적이 있는 사람은 천국가고. 그게 성경해석의 끝이에요. 그래서 지금 사도바울은 “나에게 예수의 흔적이 있다. 누구든지 다 덤벼.” 예수의 흔적이 나에게 있다는 이 말은 사람들을 놀래 키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여러분은 전혀 놀라는 표정들이 아니거든요. 왜 우리가 이 말씀 듣고……, 사도는 지금 놀래 키려고, “너희들 지금 이 말 못 알아듣지? 그지?” 하고 놀래 키려고 하는 말인데 전혀 우리는 무덤덤하게 ‘무슨 이야기지?’ 하고 모르고 있는 것은 이미 자랑거리가 우리에게 확정되어 있어요.
우리에게 자랑거리가 뭐냐 하면, 내가 행한 것이 질적으로 높은지, 네가 평생 살아오면서 행한 성과가 높은지, 그것을 자랑거리로 확정지어 놓았어요. 14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도바울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뭐 밖에 없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사도바울은 이야기했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평소에 자기가 살아온 자랑거리에다가 추가밥, 국밥에서 밥 하나 더 추가하듯이, 십자가를 거기에 같이 보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평생 이렇게 잘 살아왔고, 반듯하게 살아왔고, 아주 조심스럽게, 그야말로 오류가 적은 쪽으로, 실수를 줄이는 쪽으로, 내 인생을 약화시키지 않는 방법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 해서 가장 정직하고 옳은 길만 가겠다고 조심조심해서 살아서 이만한 성과를 이룬 내 인생, 그 내 인생에다가 그동안 미처 챙기지 못하고 빠진 것, 십자가 복음을 추가해서 이제는 이것도 괜찮고 나머지도 괜찮게 했으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에 완벽을 기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그런 사람을 에브리바디, ‘누구든지’에 집어넣어 버립니다. 바로 그게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누구든지 행함으로 할 수 있는 거예요. 예수 십자가 복음을 평소에 자기 인생을 관리할 때 행함을 동원하듯이 천당 가는 방법조차도 자기 행함의 방식을 그대로 집어넣어서 내 선택과 내 결정으로 예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여겨서 이것을 한 바구니에, 한 비빔밥 그릇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래놓고 앞에다 나의 자랑이라고 브랜드를 붙이는 거예요. 사람들이 어떤 말 하나, 행동 하나할 때마다 툭툭 떨어지는 것이 있어요. 출렁출렁 할 때마다 툭툭 떨어지는 것이 뭐냐? 나의 자랑이 막 툭툭 떨어져 있어요. 누구한테 이야기하거나 누구한테 행동을 보일 때에도.
직업이라 하는 것은 나의 자랑거리의 집대성이 나의 직업이 되는 겁니다. 나의 자랑거리의 집대성. 그런데 그 자랑은 사도바울이 보기에는 ‘누구든지’에 해당되거든요. 그 자랑은 어디서 자랑할 자랑이냐 하면, 지옥에서 할 자랑질이라는 그 말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자랑할 것은 뭐냐? 오직, 오직, only, 오직, 십자가뿐이에요. 십자가가 다른 자랑을 옆에, 곁에 두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진 것만이 인간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거기 때문에. 인간의 자랑거리라 하는 것은 자기 몸에서 양산된 거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 몸에 구멍을 팠다는 말은 “이거, 이거! 이 썩어빠진 것.” 구멍을 파는 거예요, 구멍을! 구멍을, 홀을 파는 거예요. 거기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가신 행적과 예수님의 삶을 거기에 집어넣어 버린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여러분, 제 말을 잘 들어보세요. 예수님의 흔적이 나의 흔적이 아니고 예수님의 흔적이에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예수의 흔적이 나의 흔적이 아니라 그 말이지요. 내가 기도 빡세게 하고 금식해서 얻어낸 나의 행함의 흔적이 예수의 흔적이 아니고 그냥 예수님이 찾아온 예수님의 흔적이에요. 예수님이 찢어버린 거예요. 내 정신을 다 찢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흔적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다 털어내야 될 그거예요. 예수님의 흔적이 장악권을 갖고 있어요. 예수님의 흔적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이지 내 안에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내 것 중에서 예수님의 것도 일부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흔적만 돋보이기 위해서 털어낼 인생이 나의 남은 인생이 있는 거예요.
지금 사도바울은 놀래 키려고 하는 겁니다. “너희는 너희를 자랑하지? 나는 예수를 자랑한다.”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진 것을 자랑한다는 그 이야기가 갈라디아서 6장 14절의 이야기고, 오늘 본문 17절에서는 그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예수님에게 있던 그 분화구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우리 몸은 외피고요, 우리 속의 예수님의 흔적은 안감이에요. 안감과 외피사이에 연결이 되어 있어서 외피는 외피를 자랑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안감에 들어 있는,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그 내용이 외피를 통해서 내 인생을 장악하고 주관하고 있다는 그 말입니다.
그저 뭘 해도, 장사가 되든지 잘 안되든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왜 자랑이 되어야 되는가? 그것은 장사 잘되어서 자랑질 하는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수모를 당했다, 고난당했다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썩어빠진 외피에 구멍을 내서 예수의 십자가라는 안감이 외피를 통해서 바깥으로 흘러나오게 하는 식으로 인생을 산다. 내가 그런 인간이야. 누구든지(everybody) 덤벼라 인간들아!
지금 그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흔적을 모시는 거예요. 창세기 1장26절에 보면, 신학자들이 제일 큰 오해를 하는 것이 나옵니다. 우리의 형상으로 인간의 형상을 만들자고 하는 그 대목이에요. 신학자들이라 하는 것은 원래 믿음이 없어서 신학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개척교회 하려니 힘들고 부끄러우니 신학해서 교수나 하려는 사람들이 신학자들이에요. 이 사람들이 뭐라고 해석하느냐?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들었으니 우리 속에 하나님의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겁니다. 해석을 그렇게 해버렸어요.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고귀하다는 겁니다. 2천년 교회역사에서 사람들은 이 신학을 환영하고 난리 났어요. “날 무시하지 말라. 난 고귀한 존재다.” 그런 자랑질을 하는 빌미가 되어버렸어요. 그러나 골로새서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아들의 형상을 말합니다.
이것은 뭐냐? 떨어내는 작업이 필요해요. 하나님의 형상을 가렸던 것을 뜯어내는 작업이 있을 때에 거기에 담겨 있던 숨어 있던 형상이 드러나는 식으로 신약에서 형상을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그 해석이 갈라디아서 마지막 오늘 본문에 와서는 뭐냐 하면, 아예 everybody, 모든 인간과 자기 자신의 예수의 흔적가지고 절대적 비교, 최종적 비교를 하는 거예요.
예수의 흔적이 살아 있었지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예수님의 흔적덕분에 살아있지 나를 위해서 내가 있지 않다는 거지요. 여러분이 어릴 때 많이 봤을 겁니다. 저도 국민학교 때 학교 앞에 늘어선 장사치들 늘 봤어요. 연탄불 위에 조그만 종지위에 각설탕 얹어놓고 일산화탄소 마셔가면서 쪼그려 앉아서 ‘달고나’ 만들어요.
머리가 아프기도 한데 그래도 거기 앉아 있는 이유가 달고나 그 형상 유지하게 되면 하나 공짜로 더 준다는 거에 낚여서 바늘가지고 홈을 파 나가요. 파 나가면서 그 곁가지, 그거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걸 다듬어야 코끼리든 뭐든 형상이 나오잖아요.
버릴 것과 취할 것을 구분하는 예민한 바늘로 긁어내는 예리한 손놀림이 어린애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돈 내고 달고나 만드는 것. 지금 사도바울이 고백하는 것이 뭐냐 하면, 네 인생, 그게 곁가지고 우수리라는 거예요. 예수의 흔적만 남아야지. 버릴 것과 취할 것을 인간들이 분간도 못하고 있어요.
자랑할 것과 자랑 못할 것을 분간도 못하고 있어요. 나는 주님 앞에서 심판 받아야 될 대상이었다. 이것을 살려야 돼요. 이것을 살려야 되고, 나는 잘하면 구원받는다는 이것을 죽여야 되거든요. 이게 바로 불교거든요. 예수 잘 믿으면 구원 받는다. 이게 불교란 말이지요. 이게 절간이에요.
예수 잘 믿으면 구원받겠다는 이것을 버려야 돼요. 왜냐하면 그것은 내 솜씨이기 때문에. 내 지난 과거기 때문에 그래요. 인생, 여러분들이 인생에서 왜 쫓깁니까? 왜 자꾸 불안하게 쫓깁니까? 누가 쫓아옵니까? 바로 견주고 싶은 라이벌 대상자들,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니까, 저 사람이 모델이 된 거예요.
‘나는 빙신인가? 저 사람보다 왜 못사나?’ 이런 식으로 계속 그걸 따라가면서 그걸 복이라고 여기고 그걸 선이라고 여기거든요. 선은 잡았다 싶으면 달아나고 뒤에서 쫓아오는 것은 저주가 쫓아와요. “내 다리 내놔라.” 비는 부슬부슬 오는데 “내 다리 내놔라. 네가 이런 짓을 했으니까 네 집안 저주받으면 너만 손해다.”
매일같이 원인도 알 수 없는 공포는 뒤에서 쫓아오지요. 행동 똑바로 안하면 집에 우환 끓는다는 이런 알 수 없는 공포심은 따라오고, 따라잡고 싶은, 내가 되고 싶은 저 복은 쥐었다 싶으면 참기름을 발라놨는지 어느새 도망치고. 따라잡으려는 것은 안 잡히고 뒤로부터 계속 쫓기고.
도대체 뭐하는 세월입니까, 이 세월이? 우리 인생을 누가 이렇게 조져놨어요?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단 하나밖에 없어요. 내 인생 내가 살아야지 누가 살릴 것이냐, 하는 그 생각이거든요. 하나님은 묻습니다. “그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 네가 봤냐?” “내 인생이 내 인생이지요.” “하나님 보시기에 그 인생이 어떤 인생인줄 아느냐?” “모르지요.” “그게 저주받고 심판받고 지옥 갈 인생이야.”라는 거예요.
십자가 복음만 자랑하지 않는 교회는 다니지 마세요. 왜 그러냐 하면, 그 교회가 이단이니 뭐니 그렇게 나빠서가 아니라 나를 제대로 나라고, 너는 이런 인간이라고 지적을 안 해주는 교회는 다니지 마세요. 복을 주는 교회는 가지 마세요. 복 주는 교회는 가면 안돼요. 복을 받게 되면 내가 마치 복을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나에 대해서 착각을 하고 오해를 한다니까요.
그러면서도 쫓기기는 매일 쫓기고 결국 늙어서 죽고. 결국 죽으면 남는 게 뭐가 있어요? 가루만 남잖아요. 아예 없어요. 신성일은 죽기 직전까지 운동한다고 했어요. 잡아당기면서 근력 키운다고 했어요. 영천에서. 지금 신성일 어디 갔습니까? 없어요. 그 신성일이나 구성일이나 우리와 똑같다니까요. 우리도 마찬가지 여기 있다고 곧 없어요.
우리의 원래 자리는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게 율법이에요. 그 율법의 대표가 할례입니다. 할례 안에 우리의 고향이 들어 있다는 거예요. 6장 13절을 봅시다.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사도바울이 할례를 언급한 것은, 할례라는 이것은 제거하는 겁니다. 그게 할례라는 율법의 특징입니다. 모든 율법은 내가 살아서 뭘 지키는 거지만 할례언약만큼은 내 몸에 있는 내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걸 제거해버려요. 절개해 버려서 없애버려요. 있는데, 내 것으로 있는 것을 끊어버리는 것이 할례입니다.
그 취지를 여러분이 아셔야 돼요. 없음의 표시가 나머지 있음을 대표한다는 그 말입니다. 그게 할례언약의 취지입니다. 할례하기 전에 ‘어? 있었는데?’ 할례하고 난 뒤에 굴러 떨어졌거든요. 내 것인데 굴러 떨어졌다는 겁니다. 콜라 뚜껑이 있다가 벗겨져 날라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냥 뚜껑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이 대화할 수 있는 모든 중재기능이 그 뚜껑에 다 들어 있어요. 그게 날라 갔다는 말은, ‘나는 너와 이제 상대 안한다.’는 그 말입니다. 할례를 받았다는 말은, 기존의 내 몸은 하나님께서 안 받는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할례 받은 자만 받는다는 말은, 없음이 너의 중심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 없음을 쳐다보면서 나머지 있음이 없음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말씀의 계약의 나라, 율법의 나라, 천국에 가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는 말은 뭐냐? 이 흔적이라는 것은 낙인찍힌다는 뜻이거든요.
17. Finally, let no one cause me trouble, for I bear on my body the marks of Jesus.(NIV)
17. From henceforth let no man trouble me: for I bear in my body the marks of the Lord Jesus.(KJV)
17. From now on let no one cause trouble for me, for I bear on my body the brand-marks of Jesus.(NASB)
낙인 찍혔다는 것은 종속되었다는 그 말입니다. “나는 없는 분에게 종속되었다. 누구든지 오너라. 너희들은 너 있음으로 평생을 버티잖아.” 나는 없음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는 거예요. 제가 서울강의에서 그렇게 했는데, 기능을 살리고 나를 없애요. 달고나 만들 때 형체는 살리고 나머지 자투리는 버리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이 집어넣은 기능은 살리고 나를 없애요.
없어진 나에 뭐가 달려 있느냐 하면, 바로 윤리와 도덕이 달려 있거든요. 선악이 달려 있다고요. 우리를 평생 쫓겨 다니게 만든 그 요인이 그 없어진 것에 있다는 말이지요. ‘나 나쁜 짓 했으니 이번 달 벌 받을지 싶다.’ 또는 ‘내가 착한 일 했으니까 이번 달 복 받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주님이 신경을 안 써요. 주님이 신경을 안 쓰는데 우리는 거기에다 신경을 쓰고 있어요. 바보 등신 같아요, 주님이 관심 두는 것은 예수의 흔적인데 우리는 뭐냐? 나에게 주님이 관심 있어 한다고 오해들을 하는 거예요. 희생제물이 되려면 절개될 부분이 있어야 희생제물로 받습니다.
주님께서 주시고, 주신 것을 가지고 다시 끄집어내는 이것을 교환체제, 또는 순환체제라고 이야기할 수 있거든요. 이것은 문화인류학에서 많이 이야기들 해요. 예를 들어 19세기말에 백인들이 호주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 호주원주민들이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있어요.
‘저 사람이 우리 같은 사람이냐, 아니면 외계인, 신령한 영의 세계에서 왔느냐? 또는 짐승에 불과하냐?’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냐 아니냐를 측정하는 방법이 뭐냐? 선물을 주고받는 순환체제에요.
돼지를 낯선 이방인들인 백인들에게 선물로 줘보는 거예요. 돼지를 선물해 주니까 백인들이 조개껍질로 선물을 해줬거든요. 그러니까 원주민들이 “야호!” 하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저 사람들은 우리의 순환체제 속에 포함이 된, 우리와 ‘주고받고’ 가 성립되는 같은 인간이라고 결정 내려고 대환영을 한 겁니다.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거예요.
같은 인간이란 모양새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준 것을 받고 그 받은 것에 대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되돌려줄 수 있을 때 더 이상 우리는 적이 아니고 같은 동질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주님께서 우리에게 준 선물이 뭐냐는 거지요. 독생자를 보내셨거든요. 독생자를 보내셨을 때에, 그 독생자의 의미를 알 때,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주님과 한패가 되는 겁니다. 순환체제가 돼요. 주께서 주신 것을 주께로 그대로 돌려드리는 것, 이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게 성경해석이에요. 주로부터 말미암아 주를 통해서 주께로 돌아가는 것이 성경해석입니다. 주께서 주신 그것을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율법의 방식으로 표현했는데 그 율법의 방식의 대표가 뭐냐? 할례. 네 몸을 그대로 받지 않고 잘라내서 받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냥 잘라내서 나머지를 받는 것이 아니고, 잘라냄 그 부위가 주님과 인간이 접속이 가능한 유일한 부위에요.
율법에 의해서 나는 있어도 없는 존재로 간주되는 거예요. 그게 할례언약의 취지입니다. 그것이 나중에 오게 되면, 이 땅에 보였던 분인데 보이지 않는 분의 희생, 그게 바로 세자로 십자가입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 그 말이에요.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그 말은, 그동안 악마가 나를 물고, 뜯고, 달래고, 유혹하고, 주의 얼굴 못 보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토록 애썼던 그 악마가 나로 하여금 집중 치중하고 관심 두게 하고 똑바로 보도록 만들었던 그것이 밝혀졌습니다.
그건 뭐냐? 내가 착하게 살았느냐, 나쁘게 살았느냐? 어떻게 하면 나를 천국에 보내느냐, 하는 나의 나머지 있음에다 집중해서 신경 쓰게, 인생을 다 소모하도록, 거기에 다 투자하도록 만들었던 그거, 그 덩어리, 그 덩어리를 이제는 자투리로 툭툭 쳐서 날려 보내버려야 되지요. 그래야 예수의 흔적만 남으니까.
이게 성경해석의 끝판, 끝장이에요. 이게 갈라디아서의 마지막에 나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해서 그 다음에 누굴 만나야 되느냐 하면, 여러분이 사도바울처럼 만나야 돼요. 이제는 누구든지 만나야 돼요. 이래가지고 도 닦는다고 지리산에 올라가지 말고요. 지리산 개발도 안 되고 거기 살지도 못해요. 어차피 장날 되면 또 내려와야 되니까.
누구든지 만나야 돼요. 누구든지 만나야 될 이유가, 그 everybody, ‘누구든지’ 하고, 예수의 흔적이 된 나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이제는 넉넉한 마음에서, 쫓기지 않는 마음에서 한 번 비교해 보세요. 그 상대방의 말투나 내용이나 행동 속에서 주님이 찾아오기 전에, 내가 살았던 그것이 그대로 리바이벌 하듯이 다 들어올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흔적이 나의 흔적이 아니고, 내가 열심히 충성한 흔적이 아니고, 예수님의 오신 흔적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흔적이 뭐냐?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했잖아요. 율법을 완성했다는 것은 뭐냐? 세상, 온 우주의 감추어진 비밀, 그 원리가 예수님의 흔적, 십자가를 통해서 해석이 이미 완료가 되었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의 흔적이 우리의 속에 있다는 말은, 창세전에 우리가 있어야 될 자의 자리를 주께서 이미 지정해 줬다는 것이 됩니다. 본래 내가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에요. 예수의 흔적이 내 안에 있다는 말은, ■율법의 완성이 내 안에 있다는 말이고, 율법 안에는 내가 구원되어야 될, 이미 창세전에 주께서 선택될 ■내 자리를 주께서 친히 마련하시고, 그 자리로 나를 지금 데려가고 있다는 증거로서 나에게 예수의 흔적을 주신 거예요.
이렇게 길게 설명한다고 이해될 문제는 아니거든요. 아니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리면, 나에게 예수의 흔적이 있다는 말은, 뭘 가졌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버려야 될 것이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고 생각하시면 여러분은 이 해석에 동참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버려야 되는데 안 버리기 때문에 평생을 여러분은 겁박과 협박,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공포에 늘 휘둘리면서, 쫓기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지금까지. 안되어도 너무 안 되었어요 정말. 불쌍해서 미치겠어요, 정말.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로마서 2장 28절에서. “유대인들아! 왜 너희는 외피에 할례를 행하느냐?” 내피에, 이 안감에다 할례를 행해야 돼요, 안감에다가.
그 대목이 나와요.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예수님이 내 정신에 구멍을 뚫어야 돼요. 그런데 교회 교인들이 어디에 구멍을 뚫느냐? 자기에 평소에 살아왔던 그 행세를 그대로 발휘해요.
뭐냐 하면, ‘뭐든지 이만한 사업과 이만한 가정을 꾸린 것은 내가 노력해서 했다. 그렇다면 천국 가는 것도 목사 말 듣고 그 말을 내가 믿어주면 되잖아. 믿는다는 행함을 발휘하면 되잖아.’ 이런 식으로 앉아 있어요. 그 방식은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들이 했던 방식이에요.
착하게 살아왔는데 그 착하게 살아온 그 가치를 못 버리겠다는 거예요. 오히려 착하게 산 그것에다 뭘 보태느냐? 예수 믿어주는 그 착함까지 더 보태겠다는 겁니다. 비빔밥도 그런 비빔밥이 없어요. 이것은 말이 안돼요. 그러면 이것이 나의 자랑거리가 된다고요.
많은 사람이 복음 듣고 도로 집으로 다 가버렸어요. 다 떠나버렸어요. 많은 사람이 그래요. 누구든지 그렇지요. 안 그런 사람이 이상하지만. 복음 듣고 가는 사람들이 왜 가느냐 하면, 화가 나서 가는 거예요. 왜 화가 나느냐? 평생을 애지중지 하면서 제발 이것만큼은 안 다치게 해달라고 하는 그것이 딱 있어요.
그게 숨어 있는 자랑거리에요. 그게 숨어 있는 자랑거리거든요. 그거 건드리면 벌컥 화를 내는 거예요. 그래놓고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한국교회가 썩었다, 목사가 그래서야 되겠는가, 돈만 밝힌다, 그루밍이 어쨌다, 저는 첨 듣는 용어에요, 성추행이 어떠하다, 교회가 교회다워야지…….
또 정치 이야기는 오죽 잘해요? 전원책이 쫓겨났단다, 한나라당은 왜 그러냐……, 온갖 것 다 이야기하는데 정작 복음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너를 아느냐고 묻는 것이 복음이에요. 그 딴 소리 하지 말고 너는 너를 아느냐, 그 말이지요. 남 이야기 할 것 없어요.
그런 소리를 해서 또 자기에게 자랑거리가 더 보태져요. 내가 키운 애가 죽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 그 애가 뭐냐 하면 자기 자랑거리거든요. 얼마나 공들였습니까? 결혼해서 포르투갈 갔는데 이혼해서 애 하나 죽고 뭐 그런 이야기, 이것은 실제 이야기가 아니고요.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드라마를 좀 보세요. 우리가 떨어내야 될 것들, 이제 망치를 가지고……, 조각품을 다 만들었잖아요. 주님이 망치를 가지고 칩니다. 이것은 잘라내고, 이것은 부숴버리고, 이것은 떨어내고, 아낌없이 버리는 거예요. 여러분, 낙엽 보세요. 무슨 예쁜 낙엽이 있습니까? 낙엽은 예쁜 낙엽 없어요. 낙엽은 다 같아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아니에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람’이에요 우리가. 인간자체가 세월 따라 지금 연어가 바다에 흘러가듯이 그냥 다 가버려요. 계속 변화되고 가버린다고요. 가는 세월 누가 막습니까? 서유석이 막아요? 아무도 못 막아요.
남 걱정하지 말고, 남 교회 걱정하지 말고 나 자신이 누구냐? 다시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를 놀래 킵니다. “너는 이 해석 모르지? 나 예수 흔적 가졌다. 까불지 마! 나한테 덤비지 마. 나 예수 흔적 가졌다.” 다시 말해서 “내가 노력해서 가진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구멍 냈다. 구멍 없는 사람 나와 봐! 이 불쌍한 인간아!”
이것을 무슨 행함으로 구원받습니까? 주께서 드릴로 매일같이 뚫어서, 그 다음에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내 인생, 내 강아지, 주께서 망치를 가지고, 고양이고, 강아지고, 내 자식이고, 남편이고 전부 다, 내 인생 자체를 착각하지 않도록 주께서 떨어내는 이 변화에 주께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붙들자 하는 그것이 바로 마귀의 노림수라 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우리가 붙들고자 하는 것 때문에 지금껏 쫓겨 온 것처럼 앞으로 더욱 더 심하게 추궁당하고 악마한테, 선악체제에, 윤리도덕에 쫓겨 다닌다는 사실을 저희들은 몰랐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낸 구멍만 자랑하고 예수의 흔적만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