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강-YouTube강의(추억과 기억 창세기 9:16)20230404-이 근호 목사
제427강, ‘추억과 기억’. 개인마다 추억이 없을 수가 없어요. 사람은 두뇌에 과거의 체험에 대해서 현재 본인이 그걸 편집하는 기능으로 두뇌가 움직입니다. 과거의 생각이 우리 속에 있는 게 아니고, 과거에 대해서 지금의 뇌세포가 그걸 편집해요.
편집하는 이유는 인간의 두뇌세포든 모든 신체기능은 지금의 환경에서 지금의 내 몸을 적응하고 방어하고 보호하고 지켜내는 본능으로 작용을 합니다. 그런데 현재 환경 속에서 내 몸을 지키고 싶은 이 본성은 과거의 내가 체험했던 것을 내가 그걸 그대로 받아들인 게 아니고 골라잡아요.
이게 아주 신비로운 정신활동인데요. 인간의 몸 자체가 본능적으로 자기를 지키고 싶다했죠, 방금. 자기를 지키고 싶을 때 거기에 반드시 사람은 이유를 달아요. 내가 나를 지켜야 될 이유는 내가 약간이나마 내가 정당하고 의롭기 때문에 그렇다는, 몸의 본능에다가 자아의 정당성까지 이렇게 추가를 해서 지금의 나로 구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의 두뇌를 아무리 해부해 봐도 자기 정당성, 자기 의로움, 나는 꼭 살아남아야겠다는 그런 의지, 이런 것은 보이질 않죠. 인간이 자기를 관찰할 때 그런 게 안 보여요. 마치 라디오 소리 날 때 뒤에 해부해보세요. 아나운서의 내용물이 나옵니까? 안 나오죠. 아나운서가 뉴스 할 때 라디오 뒤편을 뜯어보든지 TV 뒤편을 뜯어보면 그냥 우리 눈에 비치는 것은 반짝반짝 번뜩이고 있는 전자회로밖에 안 보여요.
그처럼 인간이 자기를 관찰하게 되면 어떤 목적, 의미는 없습니다. 뭐가 있느냐? 기능만 보이죠, 기능.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기능이 내 몸이 생존하는 데에 유리한 쪽으로 선택적으로 기능한다는 점에 대해서 현대과학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기계 그 이상이거든요.
성경에서는 그걸 가지고 ‘인간 속에 하나님이 살게 하는 생명력을 주었다’ 이렇게 돼요.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간섭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살리시기도 하고 죽이시기도 하는 그 주님의 손길이 신자든 신자 아니든 상관없어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지금도 통제하고 있고 관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마귀까지 통제하고 있어요.
이것을 인간이 알 리가 없죠. 그냥 그러려니 살아가죠. 나? 나는 나 잘난 맛에 살아가. 그 뿐인 겁니다. 제가 이렇게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기억이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위주이다, 이 이야기하려고 이렇게 길게 이야기한 거예요.
창세기 우선 40장을 보겠습니다. 창세기 40장 23절에 보면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분명히 요셉하고 술 맡은 관원장하고 같은 감옥 동기생이잖아요. 이야기가 있었던 거예요.
이상한 꿈을 꿨고요. 그 꿈에 대해서 관원장이 자기가 지난밤에 꾼 꿈을 낮에 기억하고 있는 겁니다. 자,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기억이라 하는 것은 그 취지가 이상하게 어떤 생리로 작용한다? 자기 자신의 몸을 내가 안 지키면 누가 지킵니까. 내가 지키는, 그걸 방어하는 그런 방식으로 기억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그래서 자기한테 도움 되는 기억은 기억하고 자기한테 손해되었다는 기억도 기억하는데 손해되었다는 기억을 왜 기억하느냐 하면 그때 아찔했다고 기억해요. 큰일 날 뻔했다고 기억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모든 기억에는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이 뭐냐? 어쨌든 간에 지금 나는 버텨야 되고 견뎌내야 된다는 식으로 기억하는 거예요.
그런데 술 맡은 관원장이 갑자기 임금님이 노해가지고 교도소 와서 언제 죽을지 몰라요. 그러니 뭐가 다급합니까? 자기 방어 본능이 지금 다급하게 움직이겠죠. 그런데 꿈을 꿨단 말이죠. 그래서 꿈 해석을 딱 들어보는데 옆에 젊은 사람 요셉에게 해몽을 맡겼는데 요셉이 어떤 미래를 예측하느냐 하면 ‘당신은 원대 복귀될 것입니다.’ 이렇게 했단 말이죠. 그러니까 술 맡은 관원장이 기분이 좋았죠. 일단 자기한테 희망이 생겼잖아요. 그리고 그다음에 정말 꿈대로 자기가 복직되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가 자기 일 잃어버릴까 염려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죠. 요셉? 기억할 필요 없죠.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거니까. ‘그때 당신 꿈 해몽 내가 잘했으니까 당신이 복직하게 되면 나 억울하게 교도소 있다고 임금에게 잘 말해주세요.’ 그거 다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41장 9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나의 허물을 추억하나이다” 이렇게 나와요. 아니, 40장 23절에서 요셉을 기억 못 했잖아요. 그런데 41장 9절에서 드디어 술 맡은 관원장이 기억을 해냅니다, 꿈을 매개로 해서. 임금님의 꿈을 매개로 해서.
자, 이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가? 이것은 창세기 9장 16절로 해명하면 다 됩니다. 창세기 9장 16절,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누가 기억한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기억은 자기 위주죠. 그런데 하나님의 기억은 하나님의 언약 위주죠. 인간은 비록 자기 유리한 것 챙기고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잊어버리는 그런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요셉에게는 뭐가 와 닿았어요?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준 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야곱 언약에 속해요.
아브라함 언약은 아들 이삭이 죽음으로써 아브라함 언약이 구현되잖아요. 그렇죠? 이삭 언약은 자기가 사랑했던 맏이가 저주받고 둘째 아들 야곱이 아버지의 상속을 받음으로써 이뤄지죠. 어쨌든 이삭 입장에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잃어버렸잖아요. 야곱 언약에서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요셉이었죠. 요셉이 야곱에게는 이미 죽은 존재죠. 자식들이 거짓말했으니까 이미 죽었다 했으니까 없는 존재에요. 잃어버린 존재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어떤 요소가 있느냐? 아버지께서 아들을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방식이잖아요. 그 되찾는 방식에서 예수님께서 흘린 게 뭡니까? 예수님의 피와 살이었단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은 자기 유리하면 생각하고 불리하면 잊어버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요셉이 언약 바깥에 나가지 않도록 기어이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국무총리 되도록 술 맡은 관원장에게 기억나게 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성도는 자기 기억으로 삽니까, 아니면 주님의 기억 아래 삽니까? 성도의 모든 삶은 내가 정신 바짝 차려서 사는 겁니까, 아니면 주님의 은혜 안에 사는 거예요? 주님의 은혜 안에 살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내용입니다.
“자기 백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에 다 살리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39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은 나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희들을 잊지 않고 반드시 살려내시는 기억력 좋으신 하나님 덕분에 우리가 구원받는 걸로 하나님께 찬양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