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말씀의 시간

아빠와 함께 2023. 3. 30. 23:13

425강-YouTube강의(말씀의 시간 시편 119:10)20230321-이 근호 목사


제425강, ‘말씀의 시간’. 말씀의 시간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말씀이 일하지 않는 시간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당연히 없죠. 이 세상 전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계속해서 말씀이 퍼부어지는 그 순간 순간들입니다.

말씀은 쉬는 일이 없어요. 말씀은 말씀 찾는다고 말씀이 일하고 사람이 안 찾으면 뭐 손님 안 오는데 내가 일할 필요가 뭐 있어? 이러질 않습니다. 이 세상에 공기가 빈틈이 혹시 있을지라도 말씀에는 빈틈이 없습니다.

말씀의 시간은 늘 모든 시간이 말씀의 시간이었어요. 우리가 딴전 피워서 그래요. 우리가 세상에 관심 두고 내 위신에 관심 두고 내 자랑거리, 나 관리하기 바쁘고 내 이익을 계산하기 바쁘다보니까 자기가 하는 일에 울고 불고 좌절하고 또는 좋다고 호들갑떨고 그러죠.

그런데 그게 말씀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가 호들갑을 떨든 슬퍼하든 말씀은 일하지 않은 때가 없는데요? 말씀이 우리 호응 따라 일하고 호응 없으면 일 안하고 그게 말씀이 아닙니다.

늘 말씀 생각을 못한 것은 다 우리 잘못이에요. 말씀이 일 안해서 우리가 모르는 게 아니고 말씀은 줄곧 일하는데 우리가 너무나 흔히 자주 자기 자신의 형편에다가 부질없는 신경을 너무 많이 썼기 때문에 말씀의 기쁨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 전하는 자, 특히 설교자는 뭘 해야 돼요? 인간들이 일반 교인들이 놓쳐버린 그 틈새에도 말씀은 이렇게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일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한 주일에 한 번 주일날 교회 왔을 때 생활에 쫓기고 여러 가지 일에 딴 생각하다보니까 놓쳐버린, 그동안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꾸준한 말씀의 혜택들과 은혜들이 우리가 심지어 잠자는 시간에도 말씀은 이렇게 말씀대로 많은 것을 행하셨고 주셨구나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설교자의 해야 될 일이겠죠.

물론 사람들은 말씀을 늘 묵상하고 늘 생각할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세상살이에서 내 신체에 자극이 오고, 신체 자극은 정신적으로 자극 준 쪽으로 얼굴을 돌리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사람은 동시에 두 쪽을 못 보잖아요. 말씀 생각을 못하고 이 문제가 빨리 원상 복귀되기를 거기다가 고민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대책 세우고 어떻게 원상 복귀가 될 수 있을까, 수단이 없을까, 하나님이여 도와주소서 그런 데에 푹 빠지죠.

그렇다면 말씀은 계속 일해왔는데 사람의 관심사는 내가 일하는 시간에 사람은 거기에 집착해요. 내가 일하는 시간. ‘하나님 보시옵소서. 제가 지금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어떤 성과를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의 모든 성과는 말씀의 성과이지, 내가 일한 성과를 우리에게 주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이건 노동의 삯을 받는 겁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는 일한 것도 없이 받는 삯이에요 (롬 4:4-6). 말씀이 일하고 그 혜택을 일한 것도 없이 받는 거예요.

이처럼 말씀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고 있다는 것을 소위 분주하다는 핑계를 대고 우리 쪽에서 그 말씀의 은혜를 느끼지를 못하고 그냥 본인 일 때문에 끙끙 앓고 살아오고 있죠.

그래서 시편 119편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여기 ‘떠나지 말게’라고 되어 있죠. 떠나지 말게. 벗어나지 않게. ‘않다’는 부정사(否定詞)가 붙어 있잖아요. ‘떠나는 것 말고요, 하나님’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원래 성도의 자리가 밖에 있다가 말씀 찾으러 오는 게 성도의 자리가 아니고 원래 성도의 자리는 말씀이 쉬지 않고 작렬하는 그 현장이 성도의 본래 자리이고 그것이 바로 계명의 자리이고 그것이 오늘 이야기한 말씀의 자리입니다.

성도를 비롯해서 인간들은 자기 자리를 어떻게 마련하느냐 하면 자신이 일해서 얻었던 돈 가지고 자신의 육신을 편하게 눕히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구입하는 방식으로 자기 터전을 잡죠. 쉽게 말해서 ‘집 샀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면 집 사고부터 그 사람은 집에서 나가면 떠난 거고 집에 있으면 머물러 있는 거고. 바깥에 출타했다가도 후딱 어디 가서 쉴 수 있다? 내가 내 노동으로 구입한 그 집에 가야 만사 잊고 편히 이 육신과 더불어서 마음도 편히 쉰다, 우리에게 너무나 상식적이고 일반화된 그런 패턴이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그 집에서 누구를 관찰합니까? 자기가 집에 머물 때 사람은 누구를 관찰합니까? ‘가만 있어봐. 지금 한 시간 동안 계속 잘 게 아니지. 지금 빨리 저녁을 해야 되지.’ 하고 일어선다면 지금 누가 누구를 관찰하는 거예요? ‘아, 이거 내가 화장실에 갔다 와야겠구나.’ 누가 누구를 관찰합니까? 본인이 본인을 계속 관찰하는 공간이 자기 집이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밖에 나가서 자기 집에 돌아오지 않고 밖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에게 돌아온다면 그건 시편 119편 10절의 말씀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옵소서”를 성취한 셈이 되겠죠. 내가 지금 집 바깥쪽에 있어도 말씀 안에 있다면 그건 집에 가나 안 가나 그 사람은 계속해서 말씀이 주는 그 능력과 그 혜택을 안 떠나는, 벗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왜 제가 이런 말씀을 하느냐 하면 성도냐, 성도 아니냐 그렇게 구분하는 방법 중 하나가 상대방하고 이야기하면서 자꾸 말씀이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말씀이. 여호와의 증인 말고. 달달 외워서 왕국 회관 거기서 가르치는 것 말고 삶에서 우러나면서 자기의 삶과 말씀이 연결 결합되고 뭉쳐져서 계속 나는 삶속에서 이런 말씀이 자꾸 생각이 나더라고 이야기할 때. 말씀이 나올 때.

그 사람은 집에 있으나 직장에 있으나 밖에 유원지에 있으나 놀러가나 상관없이 그 사람은 말씀을 떠나지 않고 사는 사람이에요. 저는 이것을 감히 성도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왜? 말씀이 턱하니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요.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안에 들어와 있어요. 들어가 있어요, 자기 중심부에.

집에 가스 불 안 껐는데... 자기 집 생각하는 게 아니고. 물론 집에 가스 불 안 껐으면 빨리 가스 불 꺼야죠. 그건 맞는데 가스 불 끄든 밖에 나가든 집에 있든. 집에 있더라도 말씀 생각 안하면 어딜 봐서 성도입니까? 집에 있으면서 TV나 보고 그냥 스포츠나 즐기고 낮에 누구하고 히히덕거리던 것, 이야기했던 것, 좋았던 것, 나빴던 것 그런 이야기한다면 그 사람은 집에서는 안 떠났지만 뭐 말씀이 나와야죠, 말씀이.

밖에 있을 때 친구하고 다투든... 그냥 다퉜다 하지 말고 그 다툰 것으로 인하여 어떤 말씀이 떠올라야죠. 말씀이. ‘아, 또 나의 탐욕이었구나’ 라든지 ‘내가 또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았구나’ 하든지 뭔가 말씀과 연결되어야 돼요.

성경말씀 다 외우라는 말이 아니고 주님 말씀에 속한 성도는 그때마다 적절하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말씀의 계명에서 떠나지 않게 한다는 그 증거자로 성도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자각하면서 이끌고 있습니다.

그래야 시편 119편 10절이 현실화될 게 아니겠어요. 이 시편이 성경책 안에만 들어있으면 안되겠죠? 그럼 성경은 말씀의 무덤이 되겠죠. 그게 아니고 성경말씀이 성경책 안에 갇힌 게 아니고 오늘날 성도라는 존재 안에서 말씀은 그 삶을 통해서 이건 이런 말씀이고 저건 저런 말씀이고, 이런 말씀을 떠오르게 했고 저런 말씀을 떠오르게 한다는 것을 실습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늘 말씀은 절대로 항상 말씀의 세계에서 너는 떠나지 않고 있음을 우리에게 비춰주는 그것조차 말씀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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