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로마서 4장에 어제 말씀드렸듯이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것 가운데 바랐다 이랬잖아요. 바랄 수 없는 것 아브라함이 미리 바랐습니까? 그 말 자체가 맞지요. 바랄 수 없는 것은 바랄 수 없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바란 적이 없지요. 바랄 수 없는데 자기가 바랄 수 없는 걸 그럼 안 바라면 되는데 왜 바랍니까? 주께서 쓱SSG 들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들 낳은 것도 어쩔 수 없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믿어야 생기는 일이 아닙니다. 믿든 말든 생겨야 될 일이 덮쳐버린 거예요. 그 말은 왜 자기 아내 사라가 애 낳는데 하등 쓸데없는 여인인 것을 비로소 발견한 겁니다. 왜 내 아내는 아기를 못 낳는가? 그거는 바랄 수 없는 것이 쳐들어오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방어에 나서선 안 되기 때문에 우리 아내는 아기를 못 낳아야 돼요. 아기 없는, 잉태치 못한 자가 될 때 비로소 새로운 잉태가 생기는 겁니다.
이걸 새롭게 성립되는 그다음에 부재의 세계, 없는 세계. 이미 아브라함언약 가운데서 여기서 나오고 있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뭐냐? 딱 그대로에요. 새롭게 성립되는 없는 세계. 없는 세계가 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 된 거예요. 주님께서 거기서 기다리겠다는 겁니다. 다윗이 뭘 기다려요. 뭘 기다리느냐? 바랄 수 없는 것을 기다립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율법으로 재판하는 위치에 있다가 졸지에 뭐냐? 상한 심령이 돼버려요. 우리가 드리는 제사와 번제 노선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노선이에요. 나를 소급해서 상한 심령으로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최종 마련되는 그 세계, 그 세계를 기다려요.
쉽게 이야기하면 주님이 다윗에게 올 때 나는 너를 이토록 철저하게 너는 나의 죄인이고 원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근거를 내가 나중에 꼭 마련해줄게, 약속해. 나 너 박살낼 수 있는 너는 구원될 자격도 없는 그 이유를 내가 꼭 너를 위해서 마련해줄게. 이게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가 하는 겁니다. 왜냐? 그분 하는 일이 원수를 지 발 앞에 두는데 그 원수에 속하지 않은 인물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바리새인은 자기가 하나님 원수면서도 모르면서 주님이 준 질문에 답변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선 해답을 줬습니까, 주지 않았습니까? 마태복음 22장에서 안 줬습니다. “답변하라.” “잘 모르겠는 데요.” “끝났다. 너는 영구나 돼라.” 끝났어요. “너는 몰라야 돼.” 개혁주의신학을 하는 사람은 복음을 몰라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