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장
2023년 2월 26일 본문 : 디모데후서 1:6-8
(1: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1: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서, 일반 사람에게는 찾을 수 없는 바를 주목합니다. 이것을 ‘불일 듯’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즉 금속에 용접할 때 불꽃이 튀듯이, 존재에 담긴 에너지가 불꽃으로 전환됩니다. 존재에서 기능으로 달라지는 겁니다. 이런 경우는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경우와 같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출 3:2-3)
즉 피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타내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나타나시는 이유는, 더는 자기 백성이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은사를 받으면 주를 위해서 살고, 은사가 없으면 인간은 자신을 위해 살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기를 위해’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을 말하는 겁니까?
십계명 중 제일 마지막 계명이, “탐내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류의 조상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디고 선악과 과실을 따먹게 됩니다. 탐심이란 어떤 결과물을 인간이 자기 앞으로 가져오는 것을 의도하는 겁니다. 모든 결과물과 결실은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야 하는데 악마는 이게 싫은 겁니다.
악마가 모든 것을 하나님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자율성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자율성이란 독립적이고 싶어하는 마음의 성질입니다. 자기를 최종적인 목적이고 싶어합니다. 인간은 악마로부터 이 마음을 습득하여서 하나님쪽에 있는 선악 열매를 자기쪽으로 갖고 왔습니다.
성경의 내용이란 결국 인간들이 병들었음을 알리고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백성을 도로 하나님쪽으로 돌려놓기 위한 책입니다. 이를 위하여 율법을 가지고 인간에게 완벽한 의와 선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자신이 자율성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의 법에 완벽하게 충족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서 인간은 자기 행위에 자기가 책임을 지고자 하며 자신들이 하나님을 지켜드릴려고 합니다. 과연 인간은 하나님을 상대할 권한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사는, 자기를 못버리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 계속 지적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문제있음을 찾아내어 그 해결책을 하나님에게 요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문제를 거론한 자격이나 권한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13-14에 보면,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하고 거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사람에게 나무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마의 일을 멸하기 위함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18)
여기서 말하는 죄란 당연히 인간의 자율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란 인간의 자율성 자체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진리가, 예수님의 하시는 일, 곧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은사가 자율성에 빠져 있는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십니다.
인간 세계의 형편은 마치 고려장과 같습니다. 늙고 병들어 양식만 축내는 부모를 지게에 지고 집으로부터 먼 곳에 갖다 버려서 거기서 이 세상에서 먹을 약간의 최종 양식으로 주고서는 강제로 서서히 굶겨죽이는 그런 장례 문화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이런 고려장에 갇혀 있습니다.
산 채로 무덤에서 자기 최후를 기다려야 할 그런 체험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현재 이 현실을 사는 모든 인간들이 그런 실습에 돌입되어 있습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곧 성도는 살아도 죽어도 상관없음을 느끼는 체험을 이 고려장인 세상에서 마음껏 가져야 하는 겁니다. 실제로 이 고려장에서 빠져나가신 분이 계십니다. 사도행전 7:55-56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님입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고려장 안에서 사는 인간들은 아무리 사방으로 질주해도 거기 끝으로 사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보편적 저주’입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죽어가는 몸짓에 불과합니다. 이런 거대 무덤 안에서 승진, 발전? 진화? 성공? 상받음?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어떤 강도도 같이 달렸습니다.
구원받은 강도를 가장 모독하는 행위는 그 십자가에 달린 강도를 구출하여 남은 여생이 이 고려장에서 더 살게 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성령받은 자는, 본인이 성령받아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성령이 그 인간을 택배로 아예 예수님쪽으로 붙여버리는 식입니다. 즉 성령께서 그 성도를 이끄십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가 천국가는 것이 아니라 앞상 서신 성령님께서 예수님 만나러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성도는 멀리 보던 예수님을 가까이 얼굴을 보게 됩니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성령님이라는 강력한 낚시줄을 성도에게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잡아당기는대로 당기시면 성도는 예수님께서 계시는 공간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성령님께서 우리 것으로 결과물을 전환시키는 이 모든 것을 사정처럼 처버리십니다. 마치 사울왕이 잡아왔다는 아말렉의 아각왕을 사무엘 선지자가 사정으로 머리를 내리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이 절망적인 무덤 안에서 경쟁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강-디모데후서 1장 6-8절(고려장)23022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하박국 1장 7-10절까지입니다.
하박국 1:7-10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사도가 디모데에서 찾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불일 듯하게’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불꽃이 튀는 것을 뜻하지요. 용접할 때 불꽃이 튀잖아요. 그것은 바로 존재가 기능으로 바뀌는 겁니다. 불꽃이 튄다는 것은 안에 내재 되어 있는 요소가 바깥으로 튀어나오면서 불꽃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뜻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사도바울이 철저하게 디모데에게서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그거 너한테 있잖아. 그거 발휘해야지.”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걸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 가지고 어디에 써먹을 것인가? 그 써먹는 것이 여기에 나옵니다. 8절에 보면 ‘주의 증거’와 또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것’ 쉽게 하면 그 나라 의를 위하여 사는 것, 거기에 하나님의 불꽃같이 튀는 거예요.
불꽃이 튄다는 말은 다시 말씀드리면, 산소 용접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이 밋밋한 상태인데 뭔가 갖다 대니까 불꽃으로 에너지가 변해버리는 거지요. 하나님의 능력이하나님의 복음과 만나서 이 세상에서 디모데라는 존재는 없고 디모데에서 주의 능력이라는 그러한 기능적 활동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이러한 경우는 출애굽기 3장에서 이미 언급되어 있어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날 때 떨기나무를 통해서 만났는데 이 떨기나무 자체가 피조물입니다. 모세도 피조물이지요. 그런데 그 떨기나무를 하나님이 쓰시려고 할 때 출애굽기 3장 2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그래서 모세가 자기 상식을 동원합니다. ‘어떻게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 않는가?’ 상식이지요. 우리 인간들의 경험담입니다. ‘불이 붙었는데 왜 타지 않느냐? 불은 불대로 있고 나무는 왜 나무대로 멀쩡하냐?’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여기에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 가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을 때, 은사가 없었을 경우에는 인간은 뭣하고 사느냐?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은사가 임했을 때는 뭐냐? 8절에 나오지요.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그러니까 ‘주를 위하여’가 되지요.
은사가 주어지게 되면 ‘주를 위하여’ 은사가 없으면 ‘나를 위하여’ 그렇다면 은사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못 버리는 사람을 향하여 계속 따라 붙이면서 지적질하는 것이 은사의 일입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인간이 나를 못 버리는 이유는 뭐냐? 자기가 자기에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를 못 버리는 상태에서 교회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여, 제 문제 해결해주세요.” 교회에서 엎드리고 기도하고 난리도 아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내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예 문제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인간 차원에서는 시건방지게 피조물이 문제를 거론하는 자체가 건방지기 짝이 없는 일이에요. 피조물인데 왜 문제를 언급해요? “주여, 고민이 있습니다.” 네가 뭔데 고민을 할 권한이 있어요, 네가 뭔데? “형이 내 아버지 유산을 다 가져갔습니다.” 동생이 찾아와서 예수님에게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주님이 오은영 박사도 아니고 그런 시답지 않는 자기 문제 해결하려고 왜 주님한테 찾아옵니까? 주님의 뜻은 뭐냐? ‘너는 너 존재 자체가 문제 있다, 없다.’를 거론할 어떠한 권한도 너에게 없는 거예요. 우리 자신에게 문제 자체가 없으니까 문제 해결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사시면 되는 겁니다. 불꽃이나 튀기면서. 불꽃 튀기면서 그냥 존재하면서 기능을 발휘하면 되는 거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성경은 뭐냐 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인데 지금 성경이 왜 주어졌느냐? 인간들이 뭔가 잘못되어 있어가지고 자기 문제가 거기서 발생이 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 이거 피조물이 자기 문제가 있다? 이건 말도 안 되는데?’ 그래서 피조물의 자기 문제라는 것을 주의 문제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성경을 주신 겁니다.
그 한 가지 예가 십계명 제일 끝에 나오는 계명이 뭐냐? 탐내지 말라는 거예요. 자, 탐낸다는 것은 뭐냐 하면, 어떤 결과물을, 최종결과물을 나에게 잡는 것을 탐심이라고 해요. 어떤 생각된 결과물, 이게 주님한테 가야 될 결과물을 나에게 가져오는 이게 탐심이에요. ‘우리 아들 잘 되어야 되겠다.’ 누구 아들? 우리 아들. 네 아들이 어디 있는데? 네 아들이 어디 있어요? 없어요. 우리는 ‘내 아들 잘되게 기도해야 되겠다.’ 그러니 그 기도 자체가 탐심이 되는 거예요.
그냥 사회적으로 좀 우스꽝스러운 일 중 하나가, 형편 어려운 두 할아버지가 어디서 싸우고 있어요. 어디서 싸우느냐 하면, 무료급식소 앞에서 싸우고 있어요. 그런데 무료급식소 앞에서 싸운다는 게 이게 성립이 안 돼요.
왜냐하면 거기는 돈을 받고 음식을 주는 게 아니고 무료로 주잖아요. 무료로 주는데 왜 싸우지요? 그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사라 하는 것은 무료급식소에요. 무료로 주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의 ‘나’라는 것, 그것은 뭐냐? 세자로 그걸 앞접시라고 합니다.
중국집 가면 앞접시 하나씩 두지요. 하나님은 무료급식소고 우리는 앞접시, 그냥 받는 거예요. 은사를 받게 되면 그 은사 가지고 싸우는 게 아닙니다. 은사는 싸우는 게 아니에요. 어차피 은사 발휘의 결과물은 나한테 오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로 귀결되기 때문에 어차피 내 것이 없는 거예요. 어차피 내 것이 없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 목숨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주님께서는 이 복음을 주시고, 주를 위해서 은사를 주시고 복음을 알게 하신 이유는, 인간들이 어디서 문제가 되었는가를 실험해보라는 겁니다. 무엇을 가지고 실험을 하느냐 하면, 그 어느 것보다, 거저 주시는 영생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을, 그것을 이 땅에서 실습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목숨을 줬어요.
목숨을 주시고 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실 때 어떤 식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사셨는가? 그리고 너는 지금 어떻게 사는가를 한번 대조하고 비교해보라는 겁니다. 로마서 14장 7절, 8절에 보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면 여기서 죽어도 나를 위해 죽고 사는 것은 문제거리가 안 되는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서 목숨 가지고 살게 만들어요. 이 땅에 나가서 한번 실습해 보라는 거예요. 내 목숨조차도 영생보다는 덜 귀한 거예요. 그래서 영생 놔두고 자기 목숨에 대해서 바짝 신경 쓰는 것은 바로 영생에 대한 모독입니다. 모욕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 주신 것에 대한, 그리고 무료급식소 앞에서 지금 싸우고 있는 싸움판이 되는 거예요.
이러나 저라나 은사라는 것은, 아까 기도하실 때도 그런 내용이 나왔습니다만, 은사라는 것은 우리 안에 문제 있다는 겁니다. 우리 안에 문제 있다. 지금 목숨 연연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뭔가 지금 병들어 있어요. 뭔가 잘못되어 있어요. 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우리는 일종의 환자입니다. 그래서 그 환자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탐내지 말라, 그런 말씀을 하신 거예요.
우리가 환자라면, 우리가 뭔가 잘못되어 있다면 처음의 인간은 어떤 모습인가? 그것을 알 필요가 있겠지요. 처음에 인간은 그 삶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처음 인간은 제한되어 있었어요. 한계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마귀가 와서 인간을 부추겼고 인간은 그 제한을 넘어서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제한을 두는 게 뭐냐 하면, ‘하지 마’ 였습니다. 뭘 하지 마? “선악을 아는 과실을 먹지 마.” 제한을 뒀습니다. 선악과는 네 몫이 아니고 그 결과점이 하나님께 가게 되어 있는 그 선악과거든요. 그런데 그 선악과실을, 하나님께 가게 되어 있는 선악과실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는 것 이걸 아까 제가 탐심이라고 했습니다.
선악과까지 알도록 악마가 뒤에서 부추겼는데 그 악마가 왜 부추겼느냐 하면요, 악마는 무엇을 주장했느냐 하면, 자기의 자율성을 주장한 거예요. 자기의 자율성. 악마는 인간에게 이렇게 속입니다. 인간은 자율성과 자유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반대에요. 하나님이 말하는 자유는 인간의 자율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자유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32절에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말은 네가 어떤 식으로 자율성을 발휘할 때는 반드시 그 목적과 기대와 소망이 있는데 그것은 그 결과물이 내 앞에 도달되는 것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율성을 실행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잘했다, 내가 이렇게 의롭다, 이렇게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사람다운 삶을 살았다, 반드시 내 앞에 결과물을 가져오는 쪽으로 악마가 계속 부추기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처방법이 뭐냐? “정녕 죽으리라”(창 2:17) 했거든요.
이 대처방법이 뭐냐 하면, 인간을 고려장(高麗葬) 해버리는 겁니다. 고려장 알지요? 고려시대 때 순장제도, 이건 순장제도도 아니고 뭐냐 하면, 연세 많은 부모와 더 이 상 살 수 없을 때 자식이 그 부모를 지게에 얹어요. 요새 말로 하면 보람상조 회사가 제시하는 고급세단차지요, 리무진 차에 태워서 저 멀리 두 번 다시 찾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가서 한 백일 치 또는 한 달 치 양식 주고 토굴 파서 거기에 부모를 던져 넣는 거예요. 고려장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산채로 무덤 속에 들어가서 최후를 맞이하기를 기다려 본다고 칩시다. 그러면 토굴 안에서 못 빠져 나와요. 완전히 차단되어서 못 빠져나올 때 양식은 좀 있는데 거기 가만 앉아서 한번 살아보지요. 그게 자율성입니다. 그게 마귀가 준 자율성의 결과물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고려장으로 집어넣습니다. 백날 동서남북 뛰어다녀봤자 거기서 만나는 것은 사방을 질주해도 사망만 기다리고 사망만 맞닥뜨립니다. 빠져 나갈 데가 없어요. 이 땅에서 승진하고, 이 땅에서 출세하고, 이 땅에서 돈 벌고, 상, 노벨상 받고, 온갖 귀한 것 다 받고 좋은 직업 가졌다고 자랑질하고 노력해봐도 마지막에 만나는 것은 갇힌 것, 사망에 갇혀있는 거예요. 이걸 ‘저주의 보편성’이라 하는데 저주의 보편성 안에 꼼짝 못 하고 갇혀있어요.
그 고려장하고 비슷한 이야기인데 이렇게 보면 됩니다. 나라에서 지키려고 하는 어떤 귀한 보물, 선조 대로부터 내려온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유물과 보물을 지키고 싶은데 나라에서 가만 생각해 보니 이걸 누가 도굴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이렇게 제안을 합니다. “누구든지 죽을 때까지 그 보물을 누가 가져가지 못하도록 지키는 사람에게 그 후손들에게는 귀한 상을 내리고 너한테는 그 안에서 약 두 달이나 석 달 치 맛난 양식을 주는데 단 그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채로 보물 곁을 지키면서 서서히 죽어갈 사람 손들어보세요.” 이렇게 사람을 뽑지요.
그러며 그 사람은 남은 가족 자기 몸 하나 희생해서 살리기 위해서 자기는 그 토굴 속으로 보물과 함께 들어가고 자기 가족들은 호강하겠지요. 자기는 대신 죽고. 그럴 때 자기 신세가 어떻겠습니까? 행복을 느끼겠습니까, 처량함을 느끼겠습니까? ‘이게 뭐야, 이게 인생이, 이게 뭐야!’
물론 거기는 보물이 가득해요. 귀한 것 가득합니다. 뭐 금목걸이, 다이아몬드, 번쩍이는 게 있지만 자기가 지금 갇혀 있잖아요. 이게 이 세상 삶입니다. 비록 거대하고, 비록 거대할지라도 어떤 인간도 자기의 죄에 갇히고, 저주에 갇히고, 욕심에 갇혀서 거기서 못 빠져 나옵니다. 거기서 경쟁한다는 것은 아무 무의미한 거예요. 거기서 성공하고 발전, 진화,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거기서 발전한들.
인간이 거기서 뭐 대책 없습니다. 굴 파봐야 자기 손톱만 갉아요. 진리, 진리와 끊어진 상태를 하나님이 진리적 차원에서 인간을 가두어 둔 겁니다. 진리라는 것이 “네 안에 있는 것, 네 속의 그 자율성 세계 속에서 너는 마귀와 함께 영원히 지옥 불에 들어가라.” 바깥에 있는 진리가 인간과 악마를 그렇게 만든 겁니다.
어느 누구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를 지켜요? 성경을 여러분 보셨습니까? 성경에 인간은 자리를 못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 135편 4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시편 121편 3절, 유명한 말씀이지요.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옥 같은 교회에서는 뭐냐? 우리가 하나님을 지켜야 된다는 거예요. 이런 거짓말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못 지킵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은사를 받아라.”가 아니라 “네가 은사한테 너 자신을 맡기라.”는 거예요.
은사가 택배로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꽁꽁 묶어서 택배로 만들어서 은사를 따라, 성령을 따라 주님에게 택배로 보내야 돼요. 왜? 우리도 결과물이니까. 결과물의 도착은 주님 앞에 도착해야 돼요. 나한테 오면 안 돼요. 이 모든 게 반대로 되어 있어요, 반대. 교회에서.
내가 이동해야지 왜 주님이 이동해야 됩니까? 은사라는 것은 뭐냐? 이런 거예요. 성령께서 오셔서……, 성령이 아니면 합류할 수가 없거든요,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꽁꽁 묶어서 데리고 가는 거예요. 데리고 어디로 가느냐? 성령 주신 예수님 앞에, 성령은 예수님 영이니까, 주님 앞에 우리를 끌고 가는 그 기능이 은사의 기능이에요. 그게 뭐냐? 진리가 너희를 빼내 줄 것이다. 자유케 한다는 거예요.
그동안 우리는 뭐 했는가? 날 위해 사는 거예요. 왜? 마귀와 한통속 되었기에, 나를 위해서.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나는 왜 날 위해서 사느냐? 내가 내게 목적이 되기 때문에. 내 삶이 내게 와서 내게 도달점이 되거든요, 나한테.
그래서 오늘 본문에 ‘주를 위해서’라는 말씀이 그만큼 중요한 말씀이에요. 은사가 아니면 ‘나를 위해서’가 되지 절대로 ‘주를 위해서’가 성립이 안 됩니다. 은사가 와야 돼요. 은사가 와서 나를 꽁꽁 묶어야 돼요. 뭐 연세 많은 여자분도 그렇겠지만 젊은 여성분들이 결혼할 때 최대한 자기 매력을 끌어올려요. 매력을 끌어올려서 어떤 괜찮은 남자가 나를 데려가기를 원합니다.
그 사람이 나 대신 밥 먹여주고, 나 대신 옷 입혀주고, 나 대신 잠자리 채워주고, 내가 아플 때 병원 데려갈 그런 보디가드 같은 ‘웬 다이아~’ 알지요, 보디가드 같은 그런 남자가 오기를 바라는데 그걸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지닌 매력이 쏙 빠져버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그 남자가 나를 갖다 버릴 건데요? 그것까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러니까 결혼이고 뭐고 모든 것까지라도, 모든 것까지라도 사람은 자율성을 못 벗어나요. 혼자 뭘 어떻게 해서 내 것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 그것 외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 자율성이 아까 이야기한 고려장처럼 이 세상에 갇혀있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뭐냐 하면, 은사가 없을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건지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한테는 아무것도 묻지를 않습니다. 책임을 묻지를 않아요.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같이 십자가에 달린 그 강도 있잖아요. 그 강도에 대해서 가장 몹쓸 짓을 한 게 뭐냐 하면, 그 강도를 십자가에서 구출해내는 거예요. 그게 가장 강도에게 화날 일입니다. 지금 다 왔는데 왜 다시 고려장 만들어요? 다시 세상에 살게 만듭니까? 주와 함께 떠나게 되었는데! 이
비슷한 이야기가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 이야기입니다. 스데반 집사께서 구원을 받았는데요,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사도행전 7장 55절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성령이 충만했다. 그러니까 은사가 찾아온 거예요, 은사가.
은사가 와서 56절에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그러니까 낚시를 누가 했느냐 하면, 주님이 낚시한 것을 알게 된 것이 은사 받은 사람의 특징이에요. 주님께서 “다 왔어, 다 왔어.” 하면서 낚싯대 릴을 막 뱅뱅 돌려 감는 거예요.
바다낚시 할 때 릴을 막 감으니까, 점점 더 멀리 있다가 가까이 오니까 스데반 집사가 주님 서신 것을 보는 거예요. 아~,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 2절에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라고 되어 있어요. ‘아, 주님 저렇게 생겼구나.’ “그래, 나 이렇게 생겼다.” 좍좍 잡아당기는 거예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사입니다.” 주께서 당겨준 거예요.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에게 용접 불꽃이 뭐냐 하면, 전부 다 주의 일이에요. 자기 일이 없어요. 그런데 저쪽에서는 뭐냐? 스데반 집사에게 돌멩이를 던져서 스데반 집사가 얻어맞아서 피 터지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때 스데반 집사가 죽어가면서 하는 말이 유명한 말이 있지요. 뭐냐 하면 60절에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왜냐하면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를 본인들이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의 자율성을 발휘한 거예요. 저런 인간은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인간의 자율성으로 했기 때문에 스데반 집사님은 전혀 부럽지를 않아요.
왜? 자기 자율성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누가 나에게 강력한 나일론 끈으로 자기를 잡아당겨 주는 이 은사가 있기 때문에 더이상 스데반 집사님은 세상이 부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그런 짓을 한 그들조차도 용서할 정도로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이런 은사가 없으면 사람은 자기 혼자 밥을 먹고, 자기 혼자 영화를 보고, 자기 혼자 TV를 보고 울고불고, 전부 다 “나 혼자 울고불고~”. 이게 <씨스타>가 불렀던 노래 아닙니까? ‘나 혼자’라는 노래거든요.
주님께서 누가복음 11장 44절에서 이런 말씀 했습니다. “화 있을찐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들 자체가 무덤 안에 있는데 위에서 밟아도 알지 못한다. 너희 자체가 이미 공히, 공통적으로 죽음의 동일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여자 산악인 가운데 고미영(1967-2009)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전 세계 8천 미터 11좌를 다 등정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 이야기를 어제 SBS에서 한 시간 이상 했어요. 그 사람이 얼마나 악바리같이 산을 찾아서 헤맸는지. 제가 보기에는 완전히 마귀 들렸어요. 동상 걸려서 얼굴이 시퍼렇게 되어가면서 14좌를 다 등정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느낀 게 뭐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하는 가운데 인터뷰를 해도 미사일 타격받은 그 현장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거기에 눈이 오고 비가 왔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이 전쟁을 하든 말든 눈 올 때 눈 오고 비 올 때 비 와요. 그러면 전문산악인들 산에 올라가지 말고 산을 좀 그냥 놔두면 안 됩니까? 산을 그냥 놔두세요. 정복하지 말고.
그런데 마귀는 인간에게 뭘 주느냐? 너 나름의 명분을 줘요. 명분을 주고 그 명문에 환장하게 만들어요. 미치게 만들어요, 그 명분에. 그 명분은 뭐냐? 다른 말로 개성이거든요. 나만의 개성이에요, 나만의 개성.
그런데 무료급식소에서는요, 메뉴가 똑같아요. 나만의 개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료급식 속에서 눈 오고 비 와요. 산 위에 눈 덮여 있습니다. 그게, 산 위에 눈 오는 게 그렇게 보고 싶으면 헬리콥터 타고 보든지 그걸 왜 기어 올라갑니까?
그 사람이 결국 산에 올라갔다가 죽었는데 젊은 나이에 11좌까지 등정하고 죽었어요. 왜냐하면 선배 여자 산악인이 14좌를 이미 등정했거든요. ‘너 하는데 나도 못할까?’ 이게 고려장 안에서 경쟁이 붙어서 억지로 가다가 죽은 거예요. 물론 그거 안 해도 죽지만.
은사가 단일해야 될 이유가, 심판을 똑같은 차원에서 심판하는데 그게 말씀의 단일성 때문에 똑같이 심판해요. “탐내지 말라. 탐냈어? 죽어.” 이거거든요. 그러니까 무료급식소에서 색다른 메뉴를 얻을 생각하지 마세요. 주시는 것은 똑같은 것만 주는 겁니다. 왜?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똑같이 취급하시기 때문에.
이 말은 “네 개성에 대해서, 사적인 네 노동과 행동에 대해서 내가 너한테 입을 다물게. 너에게 묻지 않겠다.” 그러면 그 책임을 어디서 묻는가? 요한1서 3장 8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주님께서 감사하게도 “나 너하고 상대 안 한다. 내가 마귀하고 상대해 줄게.” 그래서 은사는 선물인데요. 마귀하고 상대해서 획득된 그 성과를 자기 백성에게 똑같이 동질의 것을 주시는 거예요. 그럴 때 그 하나님의 백성이 아는 것이 요한1서 4장 13절에 나옵니다.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이게 12절이고요, 그 뒤에 13절에,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걸 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 성경 말씀이 굉장히 쉽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주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를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는 거예요. 고려장 한계를 넘어서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시는 이유는, 주께서 마귀의 일을 멸했다는 이미 확정된 사실을 우리에게 통보하기 위함인데 그 통보하는 것조차 하나의 세트로 그걸 아는 것조차 성령이 임하게 되면 비로소 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성령이 임한 사람은 뭘 아느냐 하면, 나에게 나의 일이 일체 없고, 나에게 문제라는 게 없고 내가 지킬만한 나의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내 존재보다 나에게 주께서 하신 기능이 계속해서 발휘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지요. 천국은 내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고 성령이 앞서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에.
그러면 성령이 앞서 들어갔다는 말은 그 방식이 어떠하냐? 그것은 이미 먼저 성령 받은 예수님이 미리 보여줬어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예수님의 재현’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재현입니다. 예수님의 재현에 있는 본질적인 요소에 대해서 요한복음 8장 22절과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했는데 지금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해도 괜찮아요. 이 이야기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얼마나 산뜻해요?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오지 못한다. 평면 좌표계에서는 평행선은 만나지 않습니다. 곡면좌표에서는 만나는데 평면 좌표에서는 그 철로 두 선이 아무리 가도 안 만나요. 그런데 그림이나 사진에 보면 저 멀리서 만나는 것처럼 보이지요. 한번 가보세요. 만나는가. 여기 철도공사에 계시니까 아시잖아요. 선로가 만나던가요? 안 만나요.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나 있는 곳에 오지 못한다. 얼마나 깔끔합니까? 그리고 23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위에서 났고 너희는 아래서 났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정말 이것은 이 고려장 같은 이 세상에서는 이것은 미친 소리예요. 나는 위에서 났고 너희는 이 땅에서 났잖아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내가 네 아버지 안다. 네 아버지 요셉이고 목수잖아. 소문 다 들었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우리 아버지는 하늘에 계셔.”
이게 미친 소리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예수님이 뭘 받았기 때문에? 은사를, 성령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거침없이 이런 이야기를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는 거예요, 자신만만하게. “딸랑딸랑, 딸랑이 누가 줬어?” “친구” 아주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는 겁니다.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어떤 은사 없이, 성령 없이 어떤 방식으로도 인간은 본래 인간의 자리로 찾아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거지요.
그렇다면 성도가 구원받는 그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성경에 요나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첫 번째 말씀을 받는 요나. 두 번째, 그 말씀 받고 도망치는 요나. 세 번째, 바닷물 속에 빠진 요나. 네 번째, 하나님 일 하면서 남의 심판 구경하는 요나. 다섯 번째, 물에 빠져 이미 죽어놓고 다시 자살하려는 요나. 성질이 있어서, 자율성이 있어서 자살하려는 요나. 마지막 여섯 번째 중요하지요. 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 있던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요나.
빨리 했는데 다시 하겠습니다. 처음에, 요나가 말씀 받지요. 두 번째는, 말씀 받고 도망치지요. 두 번째, 도망치는 이유는 이해가 돼요. 왜냐하면 니느웨성을 심판한다 할 때 하나님의 자율성이지요. 그러니까 요나는 자기 자율성을 여전히 갖고 있으니까 ‘그러면 내가 할 것이 없네.’ 이렇게 된 거예요. 내 자율성 가지고 ‘내가 할 게 없으니까 주께서 심판받을 자에게 심판 때리는 것 내가 뭐 관여할 것 없으니 나는 빠지겠습니다.’ 하고 그 당시 다시스, 오늘날 스페인으로 빠졌지요.
그런데 가다가 중간에 걸렸어요. 걸렸을 때 요나가 착각한 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일을 제대로 안 했기 때문에 나에게 벌주는 차원에서 나를 잡아서 바닷물 속에 집어넣는다고 잘못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귀한 게 아니에요. 요나 속의 은사가 귀한 거예요.
우리가 이런 점을 오해하면 안 돼요. 하나님은 우리가 귀한 것이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주의 것이 귀한 거예요. 우리가 마음대로 지옥을 못가는 이유가, 하나님의 자기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끝까지 따라옵니다. 내 다리 내놓으라고. “내가 집어넣은 것 그것 왜 네가 갖고 도망쳐? 안돼! 네 안에 내 것 있어. 네가 도망치면 안 돼!”
요나는 자기 자율성을 발휘해서 “제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바르게 하겠습니다. 신앙생활 잘 하겠습니다.” 지금 그런 차원이 아니에요. 그래서 요나 예언서가 어려워요. 요나 예언서가 왜 어려우냐 하면, 우리 같으면, 소설 같으면 요나가 물에 빠져서 개과천선해서 바르게 했다, 이렇게 나올 건데 그게 아니고 뒤에 나오는 후편이 이상해요.
분명히 물에 빠져 죽였다가 살렸으면 정신 바짝 차리고 개과천선해서 말씀대로 해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물에 빠져서 고래가 토해놓으니까 그곳이 바로 니느웨 성과 가장 가까운 지중해 해변가, 그래서 걸어서 3일 동안 니느웨 성에 심판을 선포했지요.
다 전하고서 자기는 언덕 위에 올라가서 팔짱 끼고 ‘주의 말씀대로, 약속대로 멸망하는 것 구경이나 하자. 나는 살았다.’ 이게 모든 것이 자기 자율성이잖아요. ‘나는 하나님 일 다 했습니다. 훌륭하게 했습니다. 시키는대로 했습니다. 저 하자 없지요?’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심판한다, 해놓고는 심판을 안 하고, 전부 다 회개하고 은혜를 줘서 사죄처리 용서를 해버렸거든요.
어느 쪽에서 삐졌는가? 요나가 삐져버린 거예요. 삐져서 “이럴 것 같으면 나는 하나님하고 일 못 합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하고 죽으려 하는데 날씨가 너무 더워서 못 죽겠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뭐 이 자율성이 도대체 어디까지냐?’ 시원하게 죽겠다는 건지, 너무 더워서 못 죽겠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요나야, 네가 지금 여전히 내가 너와 상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요나는 자꾸 하나님하고 상대하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하고 우리하고 상대할 잽이 됩니까? 상대할 잽이 안됩니다. 결국은 요나서 마지막에 “저 사람들 내가 살린 것처럼 이스라엘 한번 봐라. 그 사람들 내가 은혜 준 게 있는데 내가 이스라엘을 멸망토록 하겠는가?”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러면서도 온전히 멸망이 아니고 멸망 가운데 이스라엘을 건지는 이유,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율성에서 진리로 자유케 하기 위함이에요.
나의 자율성에서 해방되는 겁니다. 나 이거 했다, 저거 했다, 이것 평가해달라, 저것 평가해달라, 그 자체로부터 나는 벗어나는 거예요.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리니, 내가 너에게 일체 책임을 묻지 않는데 왜 네가 너에게 책임을 묻고 그 난리냐, 하는 거지요.
인간은 하나님 앞에 이러한 복음을 듣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인간은 악마한테 미쳐가지고 매혹되어서 스스로 자기가 망쳐버리는, 망해버리는 그러한 실습을 이 땅에서 해야 됩니다. 망해도 정답은 알아요. 망하고 목숨 없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우리가 이론은 아는데 우리의 실습은 ‘안돼, 안돼! 망하면 안돼!’라고 하면서 점점 더 늪에 빠지는 거예요. 제가 학교 때 배웠던 노래, 여러분도 배운 노래 이런 것이 있어요.
옛날부터 전해오는 쓸쓸한 이 음악이
가슴속에 그립게도 끝없이 떠오른다
구름 걷힌 하늘아래 고요한 라인 강
저녁 빛이 찬란하다 로렐라이 언덕
로렐라이 언덕이라는 독일노래인데요. 2절의 가사가,
저편 언덕 바위 위에 어여뿐 그 소녀
황금빛이 빛나는 옷 보기도 황홀해
고운 머리 빗으면서 부르는 그 노래
마음 끄는 이상한 힘 로렐라이 언덕
<로렐라이(Die Lorelei)>
지나가는 어부들, 어선들 다 꾀어서 암초에 부딪혀 다 죽게 하는 고운 머리 빗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그 소녀. 이게 바로 뭐냐? 이 세상이 악마가 마련한 어떤 명분에 미쳐버린, 자기가 자기 꾐에 모든 목적지를, 결실물을 내 앞에 딱 갖다 놓기를 소원하는 우리의 자율성, 이게 바로 탐심입니다.
주께서는 율법을 주셔요.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으로 우리를 극한으로 몰아넣습니다. 우리가 미처 모르는 우리의 자율성이 우리를 얼마나 망치게 하고 처참하게 망가지게 하는지, 율법을 주시지요. 그러면 우리는 율법 지킨다고 거기에 매진합니다. ‘하나님 율법 지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교회 나와서 그런 거래를 하지요.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라는 기적이 나오지요. 오병이어의 핵심이 뭐냐? 5천 명을 먹일 때 똑같은 것을 준다는 거예요. 숫자가 5천 명이지만 주시는 분은 한 분입니다.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5천 명을 예수님 일에 맞추기 위한 그것을 은사라, 은혜라고 해요.
그런데 예수님에게 먹은 5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 하나에 와야 되는데 하나에 오지 않고 각자 자기가 배불렀다는 그 결과물을 자기 앞에 딱 둬버리는 거예요. 5천 명이 5천 명 그대로 있어요. “나는 주님 덕분에 살았다. 우리가 저 귀한 주님을 지켜야지.”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내게로 오지 않는다. 나를 끌고 너에게 오라고 끌고 가지만 너희들이 내게로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이유를 대봐? 내가 말할 게. 내 살과 내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다.” 이렇게 하니까 과연 그들이 자기 본색을 들키면서 성경 말씀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많은 제자들이 다 떠났다.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재미있어요.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복음 전하면 나타나는 현상을 그대로 지금 보여줍니다. 아, 복음이 나한테 맞다, 혹은 안 맞구나, 하는 그 말을 하는 게 아니고 “‘그런 복음’은 나한테 안 맞네. ‘그런 복음’은, 나의 자율성을 개무시하는 ‘그런 복음’은 나한테 안 맞네.” 복음 앞에 ‘그런 복음’을 집어넣었어요. 그래서 복음 듣고 분노하는 거예요.
제가 아까 시편 언급했지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키거나 우리가 하나님을 지키는게 아닙니다. 주께서 친히 우리를 지켜주시는 겁니다. 바로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진행된 나라가 무슨 나라냐 하면, 구약 이스라엘이지요.
자,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인가? 두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첫 번째 예는 사무엘상 15장 9절과 33절에 나옵니다. 사무엘상 15장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스라엘 왕 사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나라를 하나님 앞에 드릴 만한 나라로 자기가 왕 노릇을 잘하려고 했던 왕이 사울 왕이었습니다.
사울 왕은 본래 자기가 왕 될 때의 취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사울 왕의 특징은 뭐냐? 암나귀 찾으러 왔다가 왕국을 접한 사람이에요. 지난번 오후 예배에서 설교한 것 다시 이야기하면, 기스의 아들 사울이 자기 집 잃어버린 암나귀 찾으러 갔다가 어느 장소에 들어가느냐? 사무엘이 있던 장소에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사울 왕이 예언을 해버렸어요.
그러면 구원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자기가 상실되는 절차를 통해서 그 장소가 우리의 구원을 결정한다. 이게 바로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온 구원의 방식이에요. 약속의 땅이 그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거예요. 어떤 공간에 들어가니까 자동 구원이 되는 거예요. 어떤 공간에. 그것이 신약에 오면 성령의 은사라는 공간에 들어가면 자동 구원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4장, 사실 성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원받은 사람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은 뒤에 나오는 믿는 사람들의 모범이 된다, 그게 하나의 표준이 된다, 이 말이지요.
거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브라함은 자기 구원받는데 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바랄 수 없게 만들었어요. 아브람은 아브라함 자리에 가야 돼요. 이삭은 자기 이름도 없는 원래 자리에 가야 되고, 야곱은 이름뿐만 아니고 자기가 죄인인 자리에 가야 돼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소개하고, 이삭을 통해서 이삭의 하나님을 소개하고, 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소개하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특정 공간과 장소를 만들어주시고, 어떤 인간이든 묻지 않고 그 장소에 들어가면 누구든지 구원되는 방식이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가? 그것은 아까 말씀한 대로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에 이끌려 가게 되면 성령이 앞장서서 가면, 우리는 뒤따라 가면 바로 그곳이 주님의 계신 곳이에요. 그러면 참 말은 쉬운데요. 문제는 뭐가 우리에게 무거운 스트레스고 짐이 되는가? 이 자율성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한 게 뭐가 되는가? 그걸 지금 사울 왕을 통해 소개하는 겁니다. 사울 왕은 원래 아무것도 한 게 없이 그냥 왕 되었어요. 그러면 내가 한 게 없다는, 내 자율성이 소용없는 그 자리를 유지해줘야 이스라엘 왕이 되는데 하나님께서 명령을 줬어요. “아말렉 왕을 네가 쳐서 그들을 다 죽여라.” 사무엘상 15장 3절에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분명히 명령을 했습니다. 명령을 했거든요. 하나님께서. 그러면 사울 왕이 명령대로 해야 되는데 사울 왕이 자율성을 포기를 못 해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이스라엘 왕을 맡겨줬으니까 내 식대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어 바치겠다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이 내 나라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9절에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사울 왕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이 이스라엘 나라와 자기를 자기의 결과물로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보내서 하는 말이, 22절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당신 제사는 드렸는데 그 제사도 내가 이스라엘 왕의 위신을 유지하기 위한 제사를 드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순종이 아닌 거지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33절에, “사무엘이 가로되 네 칼이 여인들로 무자케 한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가 무자하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아각이 살아 있을 때, 아말렉 왕이 살아 있을 때 사울 자기 위신이 높아지잖아요. 그래서 아각 왕을 사무엘이 찍어 쪼갠다는 것은 사울의 머리를 사무엘이 찍어 쪼개는 거예요.
바로 이 작업을 누가 하시는가? 이 작업을 하나님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행하십니다. 우리의 머리를 쪼개는 거예요. “네가 한 것 아니다. 네가 하면 내 영생이 모독받는 거야. 너는 기능만 발휘해. 그 나라 의를 위해서.”
그러면 또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시편 51편에 나오는 다윗. 다윗은 용감하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6절에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율법의 행위 일체 받지않는다는 것, 이게 복음 아닙니까, 이게! 우리가 말씀 지킨 것을 하나님이 일체 안 받는다는 것, 이것 복음이거든요.
왜 하나님은 우리가 드린 것을 안 받는가? 우리가 드린 것을 하나님이 받아버리면 하나님은 내 소유물이 되고 내가 하나님을 지키는 자가 되어버려요. 우리가 뭐 애 키웁니까? 강아지 키웁니까? 강아지 키우듯이 하나님 키웁니까? 키워서 뭘 빼먹을 게 있고, 하나님이 뭐 인공지능이에요? “지니야, 8번 틀어줘.” 이런 겁니까?
다윗의 고백은 뭐냐? 내가 하나님을 지키고 키우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지키고 키운다는 고백을 했어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상해버린 나를 원한다는 것.
그런데 시편 51편에서 그런 고백은 뭐냐? 하나님의 성신이 임할 때나 나올 수 있는 고백이다. 성령이 임할 때 나올 수 있는 고백. 마귀한테 그 명분이라는 것, 그만 속으시고요, 마귀한테 그만 놀아나시고, 주께서 하루하루 여러분을 살려주실 때 여러분 지켜주는 게 아니라 너같이 자율성만 알고 너같이 체면이나 챙기는 인간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 너희 가운데서 바랄 것 없는 중에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게 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행하셨음을 할 수 없는 가운데 바라게 하시는 것, 그 은사 준 것, 은사 준 것만 주께서 찾으시는 겁니다.
끝으로 에베소서 4장 8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그 선물, 이 고려장 통과 아직 안 했거든요. 이 고려장 같은 세상에 살면서 성령께서 여러분을 빼내 주시면 빼내 주시는 그 선물, 우리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책임질 것도 없는데 우리가 알아서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건방짐이 우리의 전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우리를 평하지 않는데 남들 보기에 내가 어떤 모습인가를 스스로 자평하면서 몸부림치는 우리의 가련한 모습, 이제 거기서 해방시켜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