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중첩된 믿음

아빠와 함께 2023. 2. 19. 16:56

중첩된 믿음

2023년 2월 19일                본문: 디모데후서 1:3-5

 
(1:3)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1: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사도에게 있어 디모데의 신앙은 신기함과 동시에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당연한 현상이 아니라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는 곧 ‘사건이 있어야 생겨나는 일’로 보고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있는 이 신앙은 디모데의 외할머니에게도 있었다고 말합니다. 구약의 율법이 이해하면서 새로운 관점으로 보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거짓 없는 믿음’이라고 표현입니다. 즉 진짜 믿음은 거짓의 내용을 지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믿음’ 앞에 ‘거짓’을 붙이고 또한 ‘없음’을 붙이는 것은 2중 부정(否定)을 통해서 거짓된 믿음이 참된 믿음 행세하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사도는 이 거짓된 세계 안에서 기준세우기에 사력을 다합니다. 진정한 믿음이라면 마땅히 거짓된 믿음이 무엇인지 설명이 가능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거짓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거짓된 믿음은 인간의 자기 결정과 자기 선택에 의해서 내놓은 신앙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의 기준에서 본인이 빠지지 않게 됩니다.

거짓 믿음은 자기 믿음에 충실하고 성실히 임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간다”와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에서 어느 것이 거짓 없는 믿음입니까? “예수 믿으면 지옥간다”가 참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 ‘예수 안 믿는 것’ 외에 다른 선택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를 믿는 자들입니다. 자기 선택을 믿고 자기 결정을 믿는 자들입니다. 시작을 자기로부터 하고 마감도 자기에게서 이루어집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인간들의 이러한 ‘거짓 믿음’을 가지고 ‘거짓 없는 믿음’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 시작이 되고 마감이 되는 그 자체를 잣대로 해서 그 잣대보다 더 늘어진 다른 시작과 끝을 보게 하는 겁니다.

달리 말해서 이러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참으로 참담한 지경은 하나님과 이별입니까 아니면 자기와 이별하는 겁니까? 이론상 하나님과의 이별이 참혹한 결과를 낳는다는 알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는 자기 겁나는 것은 자기와의 결별입니다. 자꾸만 인간은 자기를 안 놔줍니다. 자기가 자기와 상관하려 합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지킬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자신의 목숨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봐서 인간의 목숨은 지켜야 될 것이 아니라 갖다 버려야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이미 하나님과 결별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건지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지체입니다. 자신의 몸의 연장체입니다. 구약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일화가 하나 나옵니다. 나봇이라는 사람이 포도원을 하나 갖고 있었습니다. 그 포도원이 탐이 난 옆집에 나는 왕 아합이 그 포도원을 자기에게 팔아라 고 합니다.

나봇은 말합니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 조상 때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것이고 나는 단지 관리인이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아합왕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본 아내 이세벨이 코웃음칩니다. 자기가 뺏아주겠다는 겁니다. 즉시 나봇에게 모함을 하여 죽여버렸습니다. 왕을 모독했다는 누명을 쒸운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신앙인 나봇을 죽였으니 이세벨은 필히 죽여서 개들에 의해 핥아먹는 저주를 내리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억울한 나봇에게 개인적인 그 어떤 보상이 주어지지 아니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봇은 이미 죽었으니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에게만 보상합니다. 나봇은 하나님의 지체요 하나님 몸의 일부로 간주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나봇 입장에서 자기를 생각하고 자기를 상관해서 바른 신앙을 근거로 그 어떤 보상을 고대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즉 거짓이 아닌 신앙은 엄살 떨지 않습니다. 자기 목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로 하여금 이 세상 일에 충실하게 조치하시는 이유는, 본인이 열중하는 그 일이 자신을 무너뜨리고 갈수록 주저앉게 하는 일임을 실습시키기 위함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인간들이 새삼 바르고 성스럽게 산다고 해서 있는 죄가 없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본인도 자기 선택과 결정에 의해서 자기 운명을 확정하려 했던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므로서 자신의 천국에 갈 것이라고 여겼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눈부터 감겨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행 9:8) 그렇다면 참된 믿음은 무엇일까요?

참된 믿음은 ‘자리’로 결정되는 겁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이 찾아오신 떨기나무쪽으로 끌려들어 갔기 때문입니다.(출 3:2-5) 이 안 쪽에서는 더는 인간의 자기 선택이나 결정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거기는 두 현실이 2중으로 중첩된 곳입니다.  하나의 현실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택이 내려진 곳입니다. 다른 현실이 인간들의 ‘자기 결정’이 실시되는 현실입니다. 즉 거짓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나타내는 곳입니다.

 

강제 조치에 의해서 모세는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종속된 자가 된 겁니다. 신약에서 그런 인물이 나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그분을 조롱한 뒤에 그들이 자주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분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그분을 끌고 나가니라.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에서 와서 지나가매 그들이 그에게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고”(막 15:20-21)

여기에 나오는 시몬은 나중에 로마서 16:13에 나오는 루포의 아버지입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 곧 나의 어머니께 문안하라.” 즉 하나님의 선택은 오로지 복음을 위함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 가운데서는 ‘광야 교회’라는 말이 나옵니다.

‘광야 교회’란(행 7:38) 개인적인 선택과 결정이 통하는 곳이 아니라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택 작용이 작용하는 곳입니다. 일종의 ‘워터 볼’과 같은 세계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이처럼 신기합니다. 일방적으로 예수 안으로 ‘들어와서 이야기’하는 곳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신기함을 자신의 결심으로 바꾸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2강-디모데후서 1장 3-5절(중첩된 믿음)2302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1장 3-5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1:3-5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라는 사도바울의 제자를 통해서 참된 믿음, 거짓된 믿음을 사도바울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이라는 것은 거짓이라는 내용을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냥 ‘참된 믿음’이 아니고 ‘거짓 믿음이 아니다’, 거짓 믿음이 아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거짓’이라는 용어는 부정적 용어지요. ‘없다’는 것도 부정적 용어잖아요. 왜 믿음을 설명하는데 두 개의 부정적 요소를 통과해야 믿음에 도달되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걸 배제시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사람의 인위적인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신앙은 이것이 전형적인 거짓 믿음이라는 겁니다, 거짓 믿음.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가 자기를 선택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자기를 선택하는 것은 기대할 것이 있다는 거예요. 희망할 게 있다는 거예요. 자기 기대와 자기 희망, 다시 말해서 내가 나와 상관있다고 여기는 그 믿음, 하나님은 그걸 자율성이라고 보고 그 자율성에서 나오는 믿음은 믿음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그걸 거짓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왜 이렇게 거짓 없는 믿음, 믿음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두 개의 부정어를 사용해서 믿음에 접근하는 이유가 뭐냐? 사도바울이 전에 사울이었을 때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믿는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어떤 열중과 열심히 있다는 것을 본인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경험한 것은, 인간이 열중하는 그것으로 인간이 서서히 무너지고 그것이 인간을 망가뜨린다는 사실이에요. 내가 나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만큼 그만큼 우리는 무너지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게 철저히 종속되기 때문에 자기 말만 듣고 외부의, 타인의 말을 절대 듣지 않는데 그것은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무섭기때문에, 알 수 없는 무서움에 둘러싸였다는 것을 느끼고 거기서 견뎌내기 위해서 자기의 자율성을 발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선택하고 자율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그만큼 주변이 무섭다는 것, 공포스럽다는 겁니다. 해결책은 없지요. 나는 건져야 되겠지요, 나는 지켜야 되겠고, 그러니까 뭐라도, 지푸라기라도 믿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믿는데 절대자를 믿어야 되지요. 신을 믿어야 되는 거지요. 하나님을 믿어야 되는 거지요. 그게 바로 거짓 믿음이에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처음으로 여기고 또 자기 자신을 최종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끊임없이 나를 선택하고 나를 지켜내기 위해서 어떤 성스러운 삶, 고상한 삶을 추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울이라는 사람이 사도바울 되기 이전 사울 시절에 알았던 것은 성스럽게 산다고 해서 있는 죄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바르게 산다고 해서 죄가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이 말은, 죄라는 것은 내가 죄지을 때만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에게 죄를 집어넣었다는 사실, 그걸 발견한 겁니다. 하나님이 집어 넣어준 죄는 내 쪽에서 못 끄집어내요. 파헤칠 수가 없어요. 끄집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알게 된 것은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어요. 본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은 자기의 지체를 구원하지 나를,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하나님은 자기 몸을 구원하는 거예요. 구원을 이야기하는 교회는 전부 다 사기가 되는 거예요. 이단이지요. 거짓 믿음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한 적이 없는데, 구원할 생각이 전혀 없는데 평소에 인간이 자기가 자기를 선택하고 자기를 지키는데 몰입하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하나라도 들리면, 딱 걸리면 그거라도 잡으려고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자꾸 애를 써요. 노력을 하고 애를 쓴다고요. 그리고 그 상황에서 내가 망가지지 않기 위해서 아주 분투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은 주님을 위한 거예요. 나를 위한 상황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복음을 알고 난 뒤에 구약성경을 다시 봤어요. 다시 보면서……, 그것은 사도바울만 본 게 아니지요. 성령 받은 스데반 집사도 구약성경을 다시 봤어요. 죽 보면서 구약은 구약대로 설명해서는 안 되고 신약의 예수님의 죽으심 가지고 설명해야 된다, 라는 것이 신약성경이에요.

다시 말해서 십자가 지신 분의 선택이 천국이지, 그게 구원이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천국도 아니고 구원도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하나의 문항을 드릴 테니 여러분이 골라잡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 둘 중 어느 것이 거짓 없는 믿음입니까? 이 세상 인간의 선택에서, 내가 나를 선택하는 입장에서요,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가고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 간다. 그렇게 돼요.

출발점이 나의 선택에 있거든요. 내 선택을 묻는 질문을 던진 거예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뭐냐? 예수 믿어도 지옥 가요. 거짓 없는 믿음이라는 것은 로마서 1장 17절에 벌써 나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에서 믿음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온다고 되어 있어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장 17절의 이 말씀은 현실에 없는 믿음에서 믿음이 나온다는 겁니다. 현실에 없는 믿음에서 믿음으로. 현실에 충실한 사람들이 믿는 믿음은 현실에 유통되는 믿음이지요. 통용되는 믿음입니다. 소나 개나 다 믿는 믿음이에요. 그것은 전혀 신기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의 믿음이라 하는 것은 처음부터 자기 선택을, 자기 자율성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괜찮다, 싶으면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하지요. 그러니까 인간 세상은 시작도 인간이고 끝도 인간이지요.

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이 디모데를 예로 드는 것은 디모데도 보통 인간이니까, 사도바울 본인도 물론 마찬가지지만, 시작도 디모데고 끝도 디모데다, 이 잣대, 자 있잖아요, 30센티자, 이것을 잣대로 해서 ‘시작도 인간이 아니고 끝도 인간이 아니’라는 세계를 ‘시작도 인간이고 끝도 인간’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측정을 시도하는 거예요.

측정을 시도하는데 그 시도하는 게 뭐냐? 오늘 본문에 보면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성경에 대해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있던 그 믿음이 지금 디모데 너희 집안에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 집안이 나오는데 두 사람 이름이 나오지요.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성 두 분 등장합니다. 외조모 로이스, 네 어머니 유니게. 구약에 주어진 율법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석했느냐 하면, 절대로 이방인들은 유대인과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율법해석을 그렇게 한 거예요. 구약 때부터 그게 나오니까. 이방인은 진멸의 대상이고 저주받은 자기 때문에 이방인과 혼인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외조모 로이스라는 사람은 뭘 허락했는가? 자기 딸이 이방인, 헬라인이지요, 이방인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을 했다는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거짓 없는 믿음이 티가 났다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방인과 혼인을 하게 된 그것은 구약에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을 복음 안에서 다시 해석한 효과요, 결과라고 보는 겁니다.

지금 이 이야기가 에베소서 2장 사도바울의 편지 속에 나와요. 유대인들이 여호와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데 그 유대인들이 믿음을 갖는 것이 대표적인 거짓 된 믿음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어느 인간도 거짓된 믿음에서 포함 안 될 위인이 없어요. 모조리 다 거짓된 믿음뿐이에요. 인간세계는 출발점을 그렇게 해야 돼요. 왜? 인간은 다 자기와 상관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실 때는 너는 너와 상관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게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내 문제를 내가 상관하지 남이 알아서 해주는 것 아니잖아요. 너라는 존재는 너와 상관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네가 어떤 결정을 내려서 나는 이제 예수 믿기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손들고 나온다면 그게 뭐냐 하면, 네가 너와 상관해서 네 문제를 네 쪽에서 해결하려고 시도한 거짓 믿음의 시발점이라는 거예요.

구약성경을 보시면서 그냥 대충 보는 경향이 있어서 제가 한가지 예로 세세하게 설명 해 드리겠습니다. 이게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이야기인데요. 이게 설명이 돼야 앞으로 제가 설명하는 것이 약간은 이해가 될 것 같아요.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북이스라엘 아합왕 때 나봇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아름다운 포도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너무 포도원을 잘 가꾸어 놓았으니까 왕이 그걸 탐을 냈어요. “더 넓은 포도원을 줄 테니 바꾸자.” 그때 나봇이 하는 말이 “포도원이 내 것 같으면 내 맘대로 바꿀 수 있는데 하나님이 조상한테 주신 것이라서,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신 포도원이기에 후손인 내가 함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왕이여, 미안합니다.” 하고 이야기 끝냅시다, 이렇게 됐거든요.

아합이 자기가 명색이 왕이잖아요. 왕인데 자기 나라에서 원하는 것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화가 나겠지요. 남편이 화나 있으니까 못된 아내 이세벨이 물었어요. “왜 화가 났는가요?” “저 포도원 주인이 나한테 포도원 안 판대. 나 어쩌면 좋아?” 이렇게 된 거예요. 북한의 김여정하고 비슷한……, 정치적 발언이 갑자기 나오는데요, 하여간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그 부인이 하는 말이 “당신이 뭐야? 왕이잖아.” ‘당신이 김정은이잖아.’ 그 말하고 똑같아요. “당신이 왕이잖아.” ‘오빠는 이 북조선의 위대한 지도자잖아요.’ 하고 똑같은 거예요. “당신이 못 갖는다는 그게 말이 돼요?” ‘못 갖는다면 대포로 쏘아버리면 되지 간단한 문제해결을 왜 그걸 못 하느냐.’

자, 이 이세벨이 남편에 대해서 같잖다는 듯이 왕이면서도 왕 행세도 못 하고 포도원 하나 못 차지해서 벌벌 기는 이 모습이 참 같잖다, 하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이겁니다. 인간의 그 참담함, 인간의 참담함이……, 제가 예를 들 테니 잘 들어보세요. 내가 하나님과 끊어지는 그것이 참담합니까, 아니면 내가 나한테 끊어지는 게 참담한 거예요?

이것은 평소에 우리가 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돼요. 내 것이 몽땅 다 떨어져 나가는 게 참담한 상황이에요, 아니면 하나님과 끊어지는 게 참담한 상황입니까? 답변 나오기 전에 제가 빨리 답변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이론에 대한 정답을 묻는 게 아니고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물어보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끊어진 것을 애타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과 끊어진 그것을 애타 한다면 그것은 신기한 일이에요. 지금 사도바울은 신기한 것을 지키고자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사도바울이 지킬 수 있는 것은 신기함이에요. 인간에서는 나올 수 없는 신기함, 그게 지금 디모데 너한테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신기하다는 거예요. 어째 그런 게 다 있느냐 이 말이에요, 그런 게!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지키기 위해서 사는데 네가 왜 너를 안 지키는 신기한 게 왜 거기서 나오지?’

사도바울이 자기 자신을 천국 보내기 위해서 얼마나 여호와를 섬겼습니까! 그 사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완전히 사람이 달라졌어요.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것은 벌써 인간은 어떤 노력과 어떤 애씀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미리 캐치한 거예요. 이게 뭐냐? 진리를 안 거예요. 내가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거예요. 내가 진리 바깥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겁니다.

저는 TV를 거의 안 봐요. 안 보는데 딱 지나가다 휙 보니까 드라마에 대사가 나오는데 그 대사가 얼마나 충격적인지. 짧은 대사예요. 손님이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안에 들어와서 이야기합시다.”

 
그게 뭐냐 하면, 성경에 나오는 ‘예수 안’의 세계에요. 예수 밖에서 이야기하지 말고 예수 안으로 들어와서 이야기합시다. 그 말은 예수 밖에서는 누구하고 이야기하느냐? 사람은 남하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끊임없이 자기하고 이야기하는 그 이야기 내용을 정리해서 바깥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이야기를 하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자기 안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혀 이 세상의 모든 상황은 신기하지 않아요. 자기가 자기 지키는 것 신기하지 않습니다. 시작도 나고 끝도 나고, 맨날 나와 상관하는 것 전혀 신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신기한 존재인지 아닌지 제가 한가지 또 말씀드릴게요. 집에 빚이 늘어나는 게 무섭습니까, 집에 귀신이 늘어나는 게 무섭습니까?

정답은 알고 있어요. 하나님과 끊어지는 게 참담하지 내가 나에게서 끊어지는 게 참담한 게 아니라는 사실, 정답은 알고 있는데 실생활은 그렇지 않고 집에 귀신이 늘어나는 게 무서운 것은 알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집에 빚쟁이가 들어온다든지 빚이 늘어나는 그것이 더 무섭지요. 우리의 실생활에서는.

따라서 이러한 무서움과 공포, 이것은 죽더라도 자기 자신을 못 버리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아합왕과 나봇의 차이점은 뭐냐? 나봇은 남들 보기에 포도원을 갖고 있어요. 나봇은 포도원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하나님의 포도원을 관리하는 관리자 입장에 있어요. 철저하게 나봇은 누구한테 종속되어 있어요.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어요.

그래서 나봇의 특징이 뭐냐? 나봇의 참된 신앙, 거짓 없는 믿음의 특징은 엄살하지 않습니다. 엄살이 없어요. 내가 날 지킬 것 같으면 맨날 엄살을 부리는 식으로라도, 동정을 받는 식으로라도 내가 나를 지키고 싶은 것이 인간이 본성이거든요. 한국 사람이 터키 지진 일어난 곳에 스팸을 주니까 안 먹는다는 거예요. 왜? 돼지고기 들었다고. 배가 불러도……, 배가 불렀어요, 배가 불렀어.

이 게 엄살이거든요. 엄살이라 그 말이지요. 지진에 다 무너지니까 그 사람들이 “우리는 신에게 죄를 지어서 이렇게 지진 나도 마땅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묻지요. “죄가 뭔데요?” 하나님께 죄지었으니까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보상을 해줄 것이라는 생각 그 자체가 바로 거짓 믿음이에요. 그게 여전히 시작을 내가 시작하고 중도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끝장을 내가 끝장내겠다는 그 심보, 그게 바로 거짓 믿음 아니에요? 그게 거짓 믿음이라는 말이지요. 그게 종교고요, 그게 교회고, 그게 우리 일생생활이고.

오늘 본문에서 ‘거짓 없는 믿음’ 부정어 두 개를 집어넣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신기함, 네가 봐도 네가 신기해야 된다는 거예요, 네가 봐도! 나봇은 엄살부리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이 포도원 내 것 아닙니다. 하나님 겁니다.” 그러나 이세벨과 아합은 하나님에게서 끊어지는 그것은 신경 쓰지도 않아요. 내가 자기가 갖고 싶은 것에서부터 자기가 끊어지는 것, 이것 도저히 용서 못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봇을 모함해서 왕을 모독했다는 거짓범죄를 뒤집어씌워서, 그렇게 모함해서 죽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엘리야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제가 말씀하고 싶은 것에 아직 안 왔어요. 제가 말씀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습니다. 제가 뭘 말씀하고 싶으냐? 엘리야가 와서 그렇게 나봇을 죽였던 그 이세벨, 이세벨이 처참하게 죽는다는 거예요.

열왕기상 21장 24절 보면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이세벨이 하는 이 모든 악한 일이 열왕기하 9장 36절에 보면 “돌아와서 고한대 예후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로 말씀하신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고기를 먹을찌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이세벨을 죽였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거예요. 이미 나봇은 죽었잖아요. 그게 무슨 위로가 되고 보상이 됩니까? 본인이 죽었는데. 본인이 죽고 난 뒤에 자기를 모함해서 죽였던 그 이세벨이 죽든 말든 이미 자기는 죽어버렸잖아요. 그 죽은 사람에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자기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망하든지 해야 기분이 좋지 자기는 이미 죽었고 포도원도 다 빼앗겼어요. 가정 완전히 다 깨졌습니다. 그 적이 교도소를 가든 사형을 당하든 그게 무슨 위로가 되겠어요?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이겁니다. 나봇이라 할지라도 나봇의 것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고 자기 지체를 구원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한테 보상하느냐? 하나님은 자기에게만 보상해요. 나봇을 건드린 것은 곧 하나님의 것을 건드렸다고 해석하는 겁니다. 성경은!

너는 네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 것이라고 생각해야 되는데 자꾸 우리는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려 하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나와서 예수 믿으려고 하는 거예요. 본인이 누구 것인데요? 누구 것인데 그런 망발을 벌입니까? 자기 인생도 아닌데 남의 것 가지고 구원시키려고 해요, 자기 게 아닌데요. 착각을 해도 보통 착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나봇을 왜 태어나게 해서 왜 처참하게 죽게 했는가? 실습시키는 겁니다. 성도의 일평생은 내 것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한 평생 실습시키는 거예요. 일생을 거쳐서. 사람이 바르게 산다고 일체의 보상은 없습니다. 보상은 주님이 가져갑니다. 왜? 우리는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에게는 어떤 권리도 없고 어떤 권한도 허락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거짓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충실한 거예요. 자기에게 충실하고 자기에게 착실하고. 이 세상에서 착실하다, 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덕담이고 칭찬이잖아요.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그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선택한 천국 가는 길과 지옥 가는 길은 동일한 길입니다. 천국 가는 길이 곧 지옥 가는 길이에요.

그래서 사도가 디모데를 붙들고 하는 이야기는 필사적으로 기준을 지키는 거예요, 기준. 자기가 알던 기준 말고, 기준을 지키는 겁니다. 이를 위하여 사도바울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른 것을 알아야 했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 8절에 보면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울이라는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가 언제냐 하면,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해서 잡아가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내려가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정면으로 부딪혔습니다. 거기서 사울이 알게 된 것은 뭐냐? 이 세상은 중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이중으로 중첩되어 있어요.

쉽게 말하면 위에 있는 서랍이 있고 아래쪽에 있는 서랍이 있는데 위쪽의 서랍은 보이지 않아요. 진리는 인간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왜? 인간의 세계는 죽음의 세계고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가 되어서 모든 것이 어둡고 왜곡된 세계에요. 이 진짜 있는 위쪽 서랍은 열리지 않는데하나님이 사건을 통해서 아랫 서랍을 열어버려요. 아래쪽 서랍이 열리니까 비로소 아래쪽 서랍을 통해서 내가 그동안 세상을 엉터리로 거짓되게 봐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내가 태어나서, 내가 시작해서 얻었던 정보에 의해서 아는 것이고 이것은 위쪽 서랍, 인간에게 철저히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진리 입장에서는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래 서랍에 있던 나는 어떻게 살았는가? 그것은 장님이 되기 전에 사도바울의 모든 세상의 판정은 율법주의적이었어요. 율법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줬고 율법대로 살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율법대로 살지 않을 경우에만 저주받는다.’ 이러한 생각이 옳다고 장담하고 살아왔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에게 그것이 왜 틀렸느냐 하면, ‘그 율법을 지킨다, 안 지킨다.’의 그 기준점에 본인이 거기에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 이게 말썽이었던 거예요. 자기가 건전하고 순수하다고 시작한 이것이 말썽이었던 거예요. 처음부터 나는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사도가 되기 전에 사울 시절에는 필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지킨 거예요. 항상 옳은 선택을 하려고 애를 쓴 거예요.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잠을 잘 때 목마를 것을 대비해서 컵을 두 개를 준비하는 거예요. 하나는 빈 컵을 준비하고 다른 하나는 물이 들어있는 컵을 준비해서 잠을 잔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물었어요. “목마르면 물이 든 컵 하나만 있으면 되지 빈 컵은 왜 준비하느냐?” 물으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목마르지 않을 경우를 위해서 빈 컵을 준비한다고.

목마르지 않으면 물 안 마시면 되는데 빈 컵을 준비한다는 거예요. 이것은 농담인데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항상 선택을 할 때는 남겨진 것,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을 항상 남겨두고 선택에 나선다는 겁니다. 이 사실은, 인간이 뭔가 선택할 때는 인간이 죄성에서 선택하기 때문에 내가 선택함으로 내가 구원받을 수 없음을, 구원받을 수 없음을 내가 확인하는 쪽으로 인간은 선택, 선택, 선택을 죽을 때까지 계속하는 거예요. 나는 구원 될 수 없다는 선택을.

그러니까 선택하면 할수록 구원되는 여지는 항상 나로 인하여 선택당하지 않는 쪽이 구원되는 쪽이에요. 하나님은, 주님은 인간을 그렇게 다루시는 겁니다. 네가 인위적인 결정을 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이 점점 더 크게 다가오게 될 것이다. 네가 선택하지 않는 그것으로 인하여 네가 구원될 것이라는 사실이 네가 열심히 선택함으로써 더욱더 너한테 느껴지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복음의 구조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거짓 없는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거짓된 믿음부터 먼저 설명해야 돼요. 그것은 사울이 율법을 가지고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고 율법과 누구의 만남, 자신의 건전하고 순수한 자기의 신앙과의 만남으로 인해서 자기의 운명이 최종 확정된다는 그 거짓된 믿음, 그 거짓된 믿음을 사도바울은 이미 자기가 체험을 하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가 된 거예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사도가 복음 전한다는 것은 만나는 사람마다 “그거 아니야. 그거 아니었었어. 내가 다 해봤거든! 다 해봤는데 그거 아니야.” 그러면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그러면 뭐야? 그게 아니라면 거짓 없는 믿음은 어떤 게 거짓없는 믿음이야?” 그게 바로 ‘자리 선점’입니다, 자리. 자리가 결정하는 거예요.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어떤 특정 자리가 결정하는 겁니다.

이게 같은 성령 받은 스데반 집사, 사도행전 7장 35절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약간 길지만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지금 스데반 집사가 구약을 복음에 의해서 재해석하는데 죽 들어보게 되면 ‘이건 지나간 구닥다리 옛날 역사 이야기 아니냐?’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러나 스데반 집사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떨기나무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한 모세의 방식으로 똑같이 하나님의 선지자가 마지막에 나타난다, 라고 하나님에 의해서 모세에게 예언된 바 있어요.

민수기 17장에도 나오는데 여기 떨기나무라는 게 뭐냐 하면, 이중적이에요. 그 떨기나무 있던 그 자리에 모세가 거기에 끌려 들어간 겁니다. 빨려 들어간 거예요. 자리가 세냐, 모세의 선택이 강하냐? 모세가 있던 자리가 모세를 옴팍 잡아맨 거예요. 딱 붙잡은 겁니다. 모세는 워터볼 속에 들어간 거예요.

워터볼 알지요? 투명한 유리알이 있어서 그 안에 눈도 막 내리는 그런 것 있지요. 글루건이라고 어떤 소재를 풀로 붙이고 해서 만들 수가 있어요. 투명한 유리에 집어넣고 뒤집으면 위에서 막 쏟아지고 그런 것인데 뭔가 갇힌 모습을 밖에서 투명하게 볼 수 있는 그러한, 작아 보이는데 신기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사로잡힌 바 된 특별한 세계, 옴팍 사로잡힌 세계, 그게 모세입니다. 모세는 이중구조이지요. 중첩된 겁니다.

남들 보기에 “모세, 너 그 안에 왜 들어가 있어?” 하고 싶어도 모세는 철저하게 종속되어서 이것은 그 세계에서 하나님이 만든 절대 믿음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만약에 모세가 거기서 빠져나온다면 다시 옛날처럼 내가 나와 상관있는 존재가 돼요. 내가 날마다 선택해야 살아가는 그런 세계, 주님 안의 그 바깥세계에 놓여 있는 거예요.

지금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가 그 이야기하고 있어요. 성령에 의해서. 그러면서 사도행전 7장에서 아주 도발적인 표현을 씁니다. 그게 뭐냐? 광야 교회에요, 광야 교회. 구약에는 교회가 없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해서 생기느냐 하면, 교회는 집단화되어야 돼요.

개인이 자기 선택에 의해서 자기의 운명과 숙명을 자기가 결정하는 것, 자기 선택에 의해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 문제잖아요. 그러나 교회는 개인이 결정해서 모인 사람들이 아니고, 본인의 선택을 완전히 배제하고 집단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성령이라는 자리에 옴팍 사로잡힌 자들의 단체, 그걸 교회라 해요.

그 교회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사도바울은 교회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들이 집단적으로 세례를 받았잖아.” 집단적으로 세례를 받은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홍해 건널 때 구약에서 이스라엘 그들이 바다를 건널 때 가운데 길이 났고 그 길을 그냥 지나왔어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 10:1,2)

본인의 어떤 결정이나 선택이 아니고 그냥 뒤에서 밀어붙여서, 애굽 군대가 밀어붙여서 갈 데가 없어서 가다 보니 물속에 들어왔고 더 가다 보니까 물속에서 빠져나왔어요. 뭔가 통과한 것 같은데 이상한 데를 통과했어요. ‘뭐지? 이거 뭐지?’ 물속, 죽음 속이에요. 죽음 속으로 들어온 거예요, 죽음 속으로. 그것도 강제로, 내가 선택하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는데 죽음 속으로 들어왔다가 ‘나’로 인하여 죽고 ‘우리’로 인하여 태어나는 그런 과정을 세례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2장에 오순절 성령도 마찬가지예요. 오순절 성령 때 120명 모였는데 집단적으로 위층에서 바께스로 물 붓듯이 갑자기 위해서 성령이 쏟아져 버렸습니다. 성령이 쏟아지니까 다 ‘조금 받았어.’ 혹은 ‘더 많이 받았어.’ 이게 성립이 안 돼요. 글루건으로 붙인 동일한 워터볼, 워터볼 안의 세계가 형성된 거예요. 찐득찐득한 그 풀 속에서 똑같은, 우리의 모든 선택과 결정을 무효화시키는, 무의미화 시키는 그 세계에 우리가 놓이게 된 겁니다.

그럴 때 어느 누구도 그중 예수 믿는 사람 한 사람도 없었고, 어느 누구도 십자가 믿는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믿음에서 믿음’이 나오게 된 거예요. 믿음이라는 그 끈적끈적한 풀이 우리를 옥죄는 겁니다. 우리를 ‘꼼짝 마라’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믿음의 결과가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가? 로마서 16장 13절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

루포가 누구냐? 상당히 이름이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에요. 루포가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마가복음 15장 21절에 나옵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 구레네 사람, 요새로 하면 리비아, 프랑스 남쪽에 있는 북아프리카의 나라가 리비아입니다. 굉장히 멀어요. 거기 있는 유대인이 명절에 한 번씩 오는 모양이지요. 그렇게 연결되어서 예루살렘에 오고 했어요. 유월절이니까요. 그 리비아사람 시몬이 가족끼리 왔는데 그게 누구냐?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되어있어요.

그 루포가 로마서 16장 13절에 나오는 그 루포에요. 이 사람은 본인이 ‘예수님이 십자가 지면 나도 십자가 져야지.’ 평소에 십자가 깎아서 들고 다닌 게 아니에요. 그 무거운 십자가를 왜 들고 다니겠습니까? 자기가 돈키호테도 아닌 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고 가고 있는 거예요. 자기는 그냥 빈 몸으로 가고 있어요. ‘저분이 왜 저렇게 가고 있느냐?’ 이렇게 구경삼아 보고 있었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비틀거리면서 쓰러지니까 빨리 행정적인 일은 처리해야 되겠고 그래서 “당신, 이리 와 봐.” 일방적으로 끌려 들어간 거예요. 자기가 지고 싶지도 않은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예수님은 맥이 빠져서 가고 있고 “십자가, 네가 져라.” 해서 십자가를 자기가 지고. 자기 십자가가 아닌데도 예수님 십자가를, 자기가 뭔데 자기가 지고 주님하고 같이 동행하는 그런 삶이 되고 만 거예요. 그게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절대로 십자가 지는 것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라 하는 것은 사람에게 창피스러운 것이고, 내 인생 조지고 망하는 것인데 그걸 왜 선택합니까?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천국 가는 길은 인간에게는 없거든요. 인간에게 천국 가는 길이 없어요. 천국은 예수님이 길을 열어줘야 갈 수 있습니다. 인간은 뭘 해도 지옥만 갑니다.

신기한 일은, 주님이 이 땅에 오셨다 이 말이지요. 오셔서 자기 지체, 자기지체만 건져요. 자기지체만 건지는데 그냥 건지는 것이 아니고 억지로 십자가 지게 만드는 조치를 하면서 주님과 같은 몸의 지체라는 것을 확인시켜 가면서 우리를 자기 안으로 끌어당깁니다.

그래야 마태복음 16장의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가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는 이걸 통해서 모든 성경 말씀은 첫째, 어떤 인간도 지키지 못한다. 성경 말씀 지켜서 구원받겠다 하는 것은 거짓 믿음입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떤 인간도 성경 말씀을 지킬 수가 없다.

두 번째, 성경 말씀은 모든 사람이 지키지 말라고 주신 것이다. 세 번째, 성경 말씀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지키지 못한 너 자신, 성경 말씀 하나 지키지 못한 너 자신을 제대로 보라는 거예요. 이 말은, 성경 말씀도 하나 못 지키면서 구원을 넘보지 말라는 겁니다. 천국을 갈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네 번째 마지막, 네가 용도지 네가 간직할 용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목숨과 생명은 어디다 버리느냐가 중요해요. 버리기 위해서 주신 거예요. 이것은 우리 자아와 더불어서 자아를 묶어서 이 지옥에 버리고 오라고 우리에게 목숨을 준 겁니다. 그래서 목숨, 생명을 준 겁니다.

그런데 거짓 믿음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거짓 믿음의 주장을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이런 주장 합니다. “정신 차려 보니 너무 멀리 와 있다.” 이게 아주 전형적인 거짓 믿음이에요. 왜냐하면 아직도 자기 기준점으로서의 자기를 포기 못 하고 있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어떤 정신과 의사가 14년 동안 연구도 많이 하고 유럽에서도 강의도 하고 그런 사람인데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 우울증 걸린 사람을 치료하면서 많이 상대해 봤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살 직전에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질문했어요. “자, 죽을 뻔했다 살아나니 기분이 어떻습니까?” 하니까 그 사람들이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안 죽었기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정신과 의사가 주장하는 것은 생명이 참 고귀한 것이라고 그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귀한 겁니다.”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거짓믿음이에요. ‘참 큰일 날 뻔했다.’ 큰일 났어야 돼요. 큰일 나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건이 없으면 신앙도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 단도리하면 안 돼요. 내가 나 추스르면 안 됩니다.

갈 때 갔어야 했어요. 다시 살아 돌아오면 안 돼요. 굳이 돌아오는 자리가 무슨 자리입니까? 옛날 그 자리잖아요. 옛날 그 자리, 이것은 전혀 신기하지 않습니다. 이건 납득이 되는 거예요. 납득이 되는 것, 이해되는 거예요. 그것은 다시 공포 속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아이고, 이 목숨 먹고 살아야 되는데……’ 맨날 살아야 되는데, 살아야 되는데, 맨날 인간의 존엄성이 어떻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죄를 많이 지어서 지진이 일어났다고요? 죄인인 줄 알면 보낼 때 깔려 죽어야지, 보낼 때! “왜 주께서 죽게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나와야지요. 보내줄 때 가야지, 보내줄 때 가야지! 뭘 큰일 날 뻔했어? 큰일 나기는 뭘 큰일 나! 끊임없이 자기 선택에 하자가 없기를 바라고, 자기가 옳은 결정을 했다는 것을 자기의 의로움으로 챙기려는 것, 이게 공포를 아주 자처하는 짓이에요. 그 무서움을 자처하는 짓이라고요 그게 얼마나 인위적입니까!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먼저 가야바의 집에 들렀어요. 지금도 예루살렘에 가면 가야바의 집이 있습니다. 가야바의 집에 갔다가 그다음에 어디로 가느냐 하면, 본디오 빌라도의 재판정으로 가는 그 코스가 있어요. 그 코스로 가보면 가야바라는 것은 그 당시 대제사장입니다. 종교의 제일 우두머리예요.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는 거예요.

정신적인 지주라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 그 정보에 대해서 독점하고 있는 자가 가야바예요. ‘네 지금의 인생이 어떠하지만 중요한 것은 네가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이 더 중요한 거야.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율법이 주어졌기 때문에 네가 이 율법을 무시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살아 있을 때 그럭저럭 살아도 죽으면 너는 영원한 지옥 불에 가는 거야. 알았어? 그러니 내 말 들어.’ 그게 가야바예요. 인간의 정신을 완전히 가스라이팅하는 것, 완전히 쥐고 있는 겁니다.

“그래! 나 지옥 갈 테니까 좀 날 죽이세요.” 사람은 이렇게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가야바가 잘 알고 있어요. 아무리 큰소리치고 아무리 권력자라도 죽음 앞에서는 끽소리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가야바가 잘 알고 있어요. 종교적으로 쥐고 있으니까요. 그 가야바에게 예수님이 옵니다. 그 종교를 넘어서요. 그다음에 실질적인 권세자 본디오 빌라도 앞에 가요.

본디오 빌라도 앞에 가서 본디오 빌라도를 제낍니다. “네가 나를 놓아준다고? 풀어준다고? 나에게 잘 빌면 너를 봐준다고? 지금 아버지께서 천사 보내면 나는 언제든지 풀릴 수 있어.” 거기서 하시는 말씀이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중첩이에요. 이게 이중성입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5-36)

신기해요. 엘리야도 마찬가지예요. 엘리야도 죽을 때 불수레 타고 올라갔어요. 이게 이중성이에요. 오순절에 성령이 왔다. 이중성입니다. 성령은 눈에 안 보이니까, 사람들 보기에 육체만 보이니까 그게 다인 줄 알고 있어요. 육체는 율법을 지켜야 되고 말씀을 지켜야 구원받아요. 복을 받고. 내가 바른 선택을 해야 내가 구원받아요.

그러나 성령 안에서는 나의 모든 바른 선택과 바른 결정을 거짓 믿음이라고 규정하고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이 위치, 성령의 위치, ‘예수 안’의 위치, 위치가 결정합니다. 그 위치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있는 위치고 그게 복음입니다.

구레네 시몬의 아들이 루포에요. 루포가 로마서 16장에 보면 사도바울을 돕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이것은 누가 누굴 돕는 게 아니고, 우리가 아니에요. ‘나’가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복음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라는 것은 우리가 있는 이 장소, 이 신기한 장소를 드러내기 위해서 서로서로 돕고 있는 거예요. 서로서로. 거기서 생산되는 것이 거짓 없는 믿음이 비로소 나오는 겁니다.

끝으로 말씀드려서 거짓 없는 믿음은 두 개의 부정을 동원해서 철저하게 이 믿음에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어 버려요. 인간의 자기의 노림수를 가지고는 못 들어오게 만들어버립니다. 왜 그러냐 하면, 믿음은 오직 믿음에서 나와야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바로 예수님의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믿음을 우리에게 선물로 줘버리면 율법주의에 속했던, 내가 뭘 지키고 안 지키고, 내가 장래에 뭐가 될까 안 될까, 모든 기대감, 나의 목표와 목적, 그것과 전혀 관계없이 별개로 우리에게 이미 선물로 줘버렸습니다.

그래서 더이상 나는 나하고 상관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일 주님의 지체가 되어서 주님으로 상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된 겁니다. 그래서 주신 그 생명은 온 우주보다 더 무겁습니다. 더 소중하고 더 귀한 것이 내 목숨보다 주님의 주신 생명이 더 월등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내 의도와 내 기대와 희망과 목적이 좌절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사로 우리에게 늘 새롭게 새롭게 느끼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하는 모든 것이 거저 주신 것을 실습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이 땅에서 꺼져 줘야되고, 망해야 되고 실패해야 되는 가를 즐겁게 그 일 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목숨을 지탱하려고 하지 말고 어디다 버리면 되는지, 버리는 즐거움을 저희들에게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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