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미친 인생
2023년 3월 5일 본문: 디모데후서 1:9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개역한글)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개역개정)
9.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실을 따라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를 따라 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는 영원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표준새번역)
9.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불러 주셨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에 따른 것이다. 이 은혜는 영원 전에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우리말성경)
9.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은총은 천지 창조 이전에 벌써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공동번역)
9. who has saved us and called us to a holy life -- not because of anything we have done but because of his own purpose and grace. This grace was given us in Christ Jesus before the beginning of time,(NIV)
9. Who hath saved us, and called us with an holy calling, not according to our works, but according to his own purpose and grace, which was given us in Christ Jesus before the world began,(KJV)
9. who has saved us, and called us with a holy calling, not according to our works, but according to His own purpose and grace which was granted us in Christ Jesus from all eternity,(NASB)
사도는 세상을 향하여 대결하고자 합니다. “누가 은혜받은 자냐?”라는 겁니다. 이 본문을 이해못하면 결코 은혜받은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인간이 낄 자리는 없습니다. 사도는 노골적으로 언급하십니다.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즉 이 본문에 대해서 사도는 그 어떤 친절한 설명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복음의 오류’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아 듣는다’도 자기 행위에 속합니다. 참으로 은혜를 입었다면 ‘내가 알아듣지 못한 내용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알아듣게 하셨다’가 되어야 합니다. 도대체 오늘 본문에 무슨 내용이 있기에 은혜없는 자들을 못알아 듣는 이야기입니까?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말씀에 담긴 내용이 그 진실을 말해집니다. 즉 인간들이 생각하는 출발점보다 더 앞서서 결정난 사실을 말해줍니다. 인간들이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들의 출발점은 ‘선악과 과실 탈취 사건’입니다. 인간들은 ‘지식을 먹는다’는 형식으로 자아의 내용을 채우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즉 인간은 악마의 정신을 ‘지식’이라는 형태로 계속 공급받고서는 자기 신체를 그릇삼아 그득하게 쌓는데 급급합니다. ‘지식이 나를 살려 낸다’는 식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답게 나타나는데는 관심없습니다. 오로지 ‘나가 산다’에 집중합니다. 평소에 사람들은 “저 사람이 나에게 이익을 줄 자인가?”라는 의식을 지니고 타인을 만납니다.
그러다 보니 그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자라는 여부는 뒷전으로 밀리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내가 더 중요하다는 본성을 감출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자인 겁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이미 확정이 되면, 이로서 인간의 역사 진척은 무의미하게 됩니다.
역사 진행이 의미없다는 말은 인간들의 개인적인 여망이나 희망조차도 무의미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은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것마저 자기 역사 속에 집어넣고자 합니다. 즉 인간들의 역사 탐방은 사건이 다 떠나고 난 뒤에 뒷북치는 형식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현장성을 중요시합니다. 현장성은 인간의 소유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그것 가지고 어디 써먹을 수 없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지난 일을 현재에 와서 새삼 규정하는 것은 그 지식으로 늘 자신을 자기를 위해 출발점으로 삼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멸망받기로 내정되어 있는 형편입니다.
마태복음 3:12에 보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불에 태우신다는 것은 곧 ’열매없는 것들을 단호히 분질러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이 자신의 가치를 위해 모아놓은 모든 지식과 정보는 자신을 도리어 불구덩이로 몰아넣는 불쏘기개 역할을 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취지는 이런 겁니다. “너희들이 준비한 것 말고 내(하나님)가 준비한 것을 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취지를 밀어붙이는데 있어 인간의 기대한 자기 인생설계는 사정없이 분질러져야 마땅한 겁니다. 그 이유는 출발점이 인간이 스스로 자립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악마로부터 제공받는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인생설계를 좌절시키는 방법은 그들의 소망을 스스로 삼키게 하는 방식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예가 됩니다. 마치 연극이 한참 무르익는데 어떤 회랑에 앉은 관객이 배신자가 주인공을 모해하는 것을 미리 예상하고 그 극장 안에서 큰 소리가 “배신자가 뒤에 있어요!”라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 회랑관객이 틀린 말은 한 것이 아니지만 연극의 흐름을 망쳐놓은 겁니다. 연극의 재미는 미리를 미리 알면 안되는 겁니다. 모르면서도 내심 기대와 희망들이 어떻게 그 성취를 차근차근 보이느냐에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는 B.C. 2000년 경에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하란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이로서 아브라함은 낯선 인생 여정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기획하고 예상하면서 앞으로 쭉 미리 깔아놓은 모든 희망을 스스로 거두어들이는 방식으로 삼켜야 하는 겁니다. 즉 희망을 삼키고 소멸시키면서 하나님께서 해놓으신 낯선 희망을 보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본인 행함을 자기쪽으로 철거시키는 인생이 그의 인생입니다.
그는 갈길을 알지 못했습니다.(히 11:8)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개역한글)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개역개정)
8. 아브라함도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를 불러 장차 그의 몫으로 물려주실 땅을 향하여 떠나라고 하실 때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사실 그는 자기가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떠났던 것입니다.(공동번역)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분깃으로 받을 땅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난 것입니다.(표준새번역)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해 장차 유업으로 받을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우리말성경)
8. By faith Abraham, when called to go to a place he would later receive as his inheritance, obeyed and went, even though he did not know where he was going.(NIV)
8. By faith Abraham, when he was called to go out into a place which he should after receive for an inheritance, obeyed; and he went out, not knowing whither he went.(KJV)
8. By faith Abraham, when he was called, obeyed by going out to a place which he was to receive for an inheritance; and he went out, not knowing where he was going.(NASB)
그렇다면 그의 앞길에 깔려 있는 것은 감히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주님의 길입니다. 어떻게 땅에 평생 살아야 자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악마가 인간에게 계속해서 자기 정신을 먹이듯이, 우리 주님도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영생 양식으로 제공하게 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그 영생이 마련되는 것은 예수님 홀로 행하시는 행함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제사‘입니다. 제사로 끝입니다. 마감입니다. 앞으로 성도가 나타내야 하는 것은 일종의 틱 장애현상입니다.
즉 이미 마감된 것을 자꾸만 반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그 어디에서 무엇이든지 구애받지 않고 다 하게 하십니다. 이는 사실 제대로 미쳐야 가능합니다. 왜나하면 그 어느 누구도 자신만을 위한 인생 설계를 순순히 철회할 의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위한 자기 연극의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미리 그 경로가 확정되었고 그 사실이 미리 누설되지 않기를 인간들은 바랍니다. 하지만 인간이 기획되고 구성된 모든 인생 설계는 이미 분질러진 상태로 확정된 상태입니다. 그 이유는 악마가 나름대로 ’메시야상‘이라든지 ’성도는 이러해야 하고 그런 식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을 지정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악마는 그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 혼자 다 행하심‘ 도저히 견딜 수없어 배척합니다. 창세 전의 계획에 미친 듯이 받아들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이 제정신으로 살면 이 세상이 주는 저주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부적으로 폭발해 버리게 됩니다. 인간은 이미 악마가 주는 마약에 의해 걸신 들려있고 사단의 노예들입니다.
여기에 대처해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부르심입니다. 곧 ’이미 부르심‘입니다. 주님 홀로 행하신 바, 그것이 실효성 있는 부르심이 에너지로 작용하게 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이미 결정난 상태입니다. 본향쪽에서 이끄는대로 살면됩니다.(히 11:13-16)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단의 이름으로 살았던 모습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
4강-디모데후서 1장 9절(미친 인생)23030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1장 9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은혜가 은혜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단어들을 앞에 설치해 놓았습니다.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 결정적으로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가 필수적으로 개입됩니다. 우리는 맨날 행위만 쳐다보고 사는데 그것은 은혜를 적대시하는 거지요. 은혜를 파괴하는 것이고 은혜에 대한 모독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그리고 은혜가 은혜되기 위에서 또 앞에 설정한 단어가 ‘부르심’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를 불러서 해결될 것은 아무것도 없고 따로 이 부르심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은혜가 은혜되기 위해서 또 필요한 것은, 불러줄 때 앞으로 잘하라고 불러주는 게 아니고 이미 부르심 안에 옴팍 거룩이 들어있는 채로 불러준다는 겁니다. 미진한 거룩이 아니고 온전한 거룩으로 우리를 부르시는데 그게 바로 은혜, 선물이라는 겁니다, 선물.
선물 주시는데 뭘 했느냐? 거룩을 선물을 주시고 그 거룩의 선물을 우리가 보관한다든지 유지할 수가 없고 그 거룩 쪽에서 능력이 오셔서 우리를 당겨주는데 그걸 오늘 9절에서 ‘부르심’이라, 그래서 불러주심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게 되면 이 은혜가 목적이 뭐냐? 목적은 하나님의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9절에 나와 있고 그 뜻이 뭐냐? 그 뜻은 9절에 ‘영원한 때 전부터’ 이미 확정된 사실, 그 사실이 뭐냐?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입니다. 이게 한 구절인데 한 구절에 대해서 이 디모데후서 1장 9절 마지막 끝이 선물, 은혜입니다, 다른 말로 선물이에요, 선물 받은 자에게 ‘너희에게 이런 선물이 주어졌다’가 이 한 구절 안에 함축해서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니 이 말은 뭐냐 하면, 사람들이 알아먹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이것은 은혜가 빠지기 때문에, 은혜가 빠지기 때문에 이것은 실수한 거예요. 1장 9절은 못 알아먹으라고 준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세팅된 추가적인 은혜가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분간하느냐 하면, 1장 9절을 쭉 이야기하면서 “알아듣나? 알아들었어?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들었어?” “모르겠는데요?” 그것은 영구지요. “모르겠는데요.” 모르면 그것은 제대로 이야기하신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빠진 채 이걸 설득하려면 1장 9절의 내용을 뒤집어서 다 반대로 해야 돼요. 우리의 행함으로, 우리의 열성과 종교적인 행함으로, 우리의 기도와 성경공부로 구원되었다, 이런 식으로 나와야 되는데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은혜와 대치되는 겁니다. 1장 9절 이 짧은 것 가운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이걸 함축해서 이야기하면 바로 하나님의 은혜 선물인데 그 선물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 현장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 현장성이 굉장히 중요해요. 은혜는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내용이 아니고 우리가 손을 떼야 될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를 이야기할 때 항상 해야 될 것은 ‘내가 나한테 손을 뗀다.’ 이걸 기정사실화 해야 돼요. 내가 내 인생에서 손을 떼는 겁니다.
내가 내 인생에서 손을 떼지 않게 되면 그 현장을 두고 우리가 어떤 해석을 하려고 덤벼듭니다. 이걸 가지고 ‘규정성’이라고 하는데 상당히 어렵지요. 현장성의 반대말은 규정성, 규정성의 반대말은 현장성. ‘나 그거 이렇게 규정할래. 나 이렇게 이해할래. 이렇게 의미를 던져줄래.’ 그것은 현장성을 훼손하는 겁니다.
‘네가 왜 은혜에 대해서 그렇게 규정하고 의미를 들이대느냐? 하나님이 하는 일인데, 하나님의 행위로 하는 일인데 왜 거기에 숟가락 얹듯이 네 행위를 거기에다 집어넣느냐?’ 하는 거지요. 이 현상을 가장 알기 쉽게 이야기하게 되면 역사의 답사는 항상 사건이 끝나고 난 뒤에, 그 뒤에 들어가는 것이 역사탐사입니다. 사건이 이미 지나갔는데, 사건은 이미 없는데 둘러보는 것이 역사탐방이고요, 그 역사탐방이 기껏 인간들이 하는 일이에요.
그 역사탐방을 왜 하느냐? 규정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에서 뭘 어떻게 하고, 한산대첩에서 뭘 하고……, 그걸 왜 하느냐? 그 현장에 가면 이순신 장군 코빼기도 안 보입니다. 그걸 왜 하는가? ‘이순신 장군 덕분에 우리나라가 살게 되었다.’ 그걸 왜 생각을 하느냐 이 말이에요.
그게 학문이거든요. 학문을 하고 연구를 하는 이유가 뭐냐? 그게 지식을 습득하기 위함인데 지식을 왜 습득하느냐 하면, 그것은 내 행위를 포기 못 하겠다는 겁니다. 언제까지 은혜 주고, 언제까지 하나님의 은사가 내려오는 것을 기다릴 수 없다는 거예요. 성질 급해서 못 기다리고 우리가 할 바대로 다 하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해서 그다음에 하늘의 명을 받겠다는 이 자체도 행위가 되는 겁니다.
학문 중에서 하나의 예를 들면 여러분이 다 아는 거지만 ‘TCA(Tricarboxylic Acid Cycle) 회로’, 다 아시지요? 세포질의 미토콘드리아가……, 이건 여러분이 다 아시잖아요, 에너지를 발생하는 순환구조. 1930년대의 생물학자가 이걸 발견했어요. 세포 내의 미토콘드리아에서 ATP를 어떻게 생산하느냐에 관한 것인데 산소 말고 질소가 어떻게 관여해서, 산소는 나중이고 질소 때문에 생명체가 일어났다는 것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하는 이런 것을 발견을 했는데 그 TCA 회로, 그 에너지 생산과정을 밝혔다.
그래서? 왜 밝히는데요? 왜 지식을 습득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디모데후서 1장 9절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뭘 거부하느냐? 창세 전에 결정 난 것이 난 싫다는 거예요. 인간들이 싫다는 겁니다. 창세 전에 결정 난 것.
그러면 인간은 뭘 원하는가? 창세기 3장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었다 했잖아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먹는 거예요, 먹는 것. 선악을 먹는 것입니다. 어디에? 자기신체에 먹는 겁니다. 악마의 정신을 먹는 겁니다. 어디에다? 자기신체를 그릇으로 사용해서 악마의 사고방식과 정신으로 계속해서 먹는데 그것은 마귀가 계속해서 그것을 먹여주는 거예요.
‘혼자 살라고 인간들아, 이제 독립해야지. 언제까지 하나님께 휘둘릴 이유 없어. 네가 신처럼 이제 될 수 있는 거야.’라는 것이 모든 인간이 다 알아듣는 이야기로 전환되고 말았어요. ‘모든 인간’입니다. 경상도 표준말로 ‘막하’ 영어로 하면 ‘all’ 모두가 똑같이 지식을 습득해서 그것을 행함으로 하기 위해서는 세상눈에 띄는 것을 규정하는 거예요. 따로 분류를 하는 겁니다.
학문을 하려면 분류를 해야 되는 거예요. 속(屬)과 종(種) 생물학적으로 분류하고 과(科), 목(目), 분류하듯이 분류하고 분석하고 쪼개고. 그런데 그 학문전개와 지식습득에 무엇이 묻어 있는가? 공포가 묻어 있어요. 이걸 사람들은 모르는 척 하고 있어요. 뭔가 하나 안다는 것은 두려움을 동반해서 알게 되는 겁니다.
두려움이 없이 학문을 실시할 수가 없어요. 인간의 모든 행함은 거기에 두려움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려움이 없으려면 어떻게 하느냐? 그것은 바로 이 먹는 것, 악마가 계속 집어넣어 주거든요, 악마의 마음을. 쉽게 해서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선악과 요소만 계속해서 이제부터는 허기지듯 그것만 찾게 되어 있어요. 중독되어 있어요. 마약 같아요. 지식이 마약 같아요.
선악을 아는 지식, 그걸 달리 성경에서 보면 그냥 지식이에요. 왜? 지식이 힘이 되니까, 아는 게 힘이 되니까 ‘선악과를 먹어야 내가 산다’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공부하는 것도 마약같은 것으로 계속해서 뭔가 더 더, 더, 더 알지 않으면 공포가 나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공포, 어떤 두려움이, 미진함이 나를 망칠 것 같아요. 미진함이요, 모자람이 내 인생을 토막 낼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두려움으로 끊임없이 사방을 헤매면서 더 알아야 돼요. ‘호르몬이 어떻고, 죽을 때 섬망 현상이 어떻고, 죽을 때의 인간을 분석해서 그걸 알고……’, 오늘 같은 기도는 충격이에요. 그런 기도는 처음 들었어요. 전 세계 사람들도 다 처음 들었을 거예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기존의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을 만날 때도 ‘저 사람이 나에게 무슨 이익을 주는 사이냐’를 따집니다. ‘나한테 이익을 가져다 줄 사람이 누구냐?’ 그런데 이렇게 되면 저분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에 대해서는 우리가 모독하게 되지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나는 모르겠고 나에게 이익이냐, 손해냐? 그 정체를 밝혀라.’ 이런 식으로 다가서니까 나라는 존재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고 있는 거예요. 나에게 이익이 없는 사람 안 만나고 싶으니까.
선악과에 관한 것만 줄 때 하나님의 대처방법은, 고맙게도 성경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지식을 먹는 게 아니고, 허겁지겁 허기져서 ‘새로운 것, 새로운 것 더 알아야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고 인생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아. 나는 낙오자가 되는 게 싫어. 중간쯤이라도 가고 싶어.’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소스와 유튜브의 정보를 알아야 되는데 주의 대처방법은 뭐냐?
“내가 들어가게 되면 너는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너로 더불어 먹으리라. 왜? 네가 탈 난 것은 먹어서 탈 났잖아.” 그래서 이제부터는 선악 지식을 주는 게 아니고 그것보다 더 이전에 있는 “창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성립되었던 그 영생을 너와 내가 같이 공유해서 먹고 마시자.” 이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거예요.
뭘 먹고 마신다는 말이냐? 거기에 대해서는 아까 디모데후서 1장 9절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 우리의 행함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거룩한 것, 그것도 모자람이 없는 거룩함, 인간이 더 추가해서 보탤 필요 없는 그 거룩함, 이것을 주님만 먹는데 주님만 먹던 그 주님의 것을 우리에게 나눠줘서 “너는 나로 더불어서 이 온전함을 같이 먹자. 너는 먹는 것밖에 모르니까 그렇게 같이 먹자.” 이렇게 나서는 거예요.
특히 인간이 주의할 것은 “우리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에 유념해야 돼요. 이 말을 달리하게 되면,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야 돼요. 우리가 어디에서 어떤 장소이든, 누가 앞에 있든 뭐든지 할 수 있어야 돼요. 그래야 공포가 없는 사람이에요. 뭐든지 할 수 있기 위해서 어떤 것에도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내 행함이 나를 구속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행함이 여러분을 꽁꽁 묶어 두도록 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그걸 허용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기 때문에 전에 하던 행세대로 공포심에 휩싸여서 ‘내가 이거 하면 이익일까, 손해일까? 내가 사람 잘못 만난 게 아닐까?’ 그런 식으로 단독적인 삶의 프레임에서 못 벗어나면 계속해서 마귀의 시달림을 받게 되지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도록, 어떤 것을 해도 하나님께서 책하지 않고 나무라지 않는 조치를 주께서 하셨습니다. 그게 뭐냐? 제사였습니다. 끝! 제사였어요. 끝났어요. 주께서는 우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가 희생물이 되어서 제사를 해놓고 그 제사 앞에 불러모으는 거예요. “이리와, 이리와! 내가 제사로서 너희들이 달성할 수 없는 그 거룩, 그것을 창세 전에 아버지하고 약속한 바에 의해서 너희들은 아버지의 시나리오를 몰라. 모르고 내가 미리 모든 제사를 끝내버렸으니까 이리와, 이리오라고!”
그 제사에서 살과 피를, 이 생산된 영생을 나누고 마시는 거예요. 무슨 ‘TCA회로’가 어떻고, 그런 게 천국 가는 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제사 앞에서는 네가 너를 규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나 어떤 인간일까? 지금 잘하고 있는 거야, 못하고 있는 거야?’ 그걸 따지지 말라는 거예요. 너는 네 행함, 쉽게 해서 너 자신을 안 봐도 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홀로 있는 게 아니니까요.
사람이 혼자 있으면 맨날 자기를 쳐다보는데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더이상 나를 안 봐도 되는 인생을 사는 거예요. 나를 안 봐도 되는 인생, 내가 나를 규정 안 해도 되는 인생을 사는 거예요. 내가 나를 정리 정돈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정리정돈이야 요즘 젊은 사람들 집에 들어가면 정리정돈 되는 게 이상하지요. 어지럽게 살지만.
다시 말씀드릴게요. 인간들은 자기가 자기를 다듬으려고 해요. 규정하려고 합니다. 차곡차곡 정리해서 질서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바람 지나가듯이 사건이 지나가기 위해서 그 현장성에서만 나타나는 거예요. 현장성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그 바람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게 하는 식으로 그냥 와서 닥치고 통과해버리고 빠져나가 버립니다. 사건을 내 사건으로 쥘 수 없게 만들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사건 터지고 난 뒤에 맨 날 현장에서 내가 왕년에 이랬다고 자꾸만 규정하기 때문에 거기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냥 사건 일으키고 그 현장성 그 현장에서만 이야기하고 그냥 지나가 버려요. 왜? 너의 행함을 네가 두고두고 그걸 되새기지 말라고. 네가 행했던 것, 이건 네 행함이 아니고 나의 행함으로써 사는 거지요.
여기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반대하는 세력이 드디어 서서히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눈에 들어오게 돼요. 1장 9절을 원천적으로 반대합니다. 전부 다 반대하는 거예요. 디모데후서 1장 9절, 창세 전부터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주의 행함, 주의 뜻대로 선물로 줘서 우리가 거룩한 구원이 되었다.
이걸 전면적으로 다 반대하는 세력이 등장하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몰랐지요. 왜 인간들은 마귀가 주는 그 규정성과 지식과 학문습득, 공포 속에서 벌벌 떨면서 그걸 배워야 된다는 그런데 길들여진 우리가 인생이라는 게 이게 전부고 그 외에는 없다고 여기거든요.
그런데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성령께서 묘하게 예수님에게 누굴 붙여주는가? 마태복음 4장, 광야에서 악마를 붙여줘요. 광야에서 사탄과 예수님을 만나도록 주선을 해줍니다. 주선을 할 때 악마 쪽에서 가만있지를 않고 자기 본색을 톡 털어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하라는 거예요.
이게 왜 고마운 일이냐 하면, 성도가 된다는 것, 네가 메시아가 된다는 것을 악마 쪽에서 규정을 해주는 거예요. 왜? 규정을 하는 것은 악마의 주특기니까요. ‘너는 이렇게 될 때 구원받는 거야. 이렇게 행할 때 구원받는 거야.’라고 우리는 내가 내 생각에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는데 마태복음 4장에 보니까 내 생각이 아니고 맨날 허기져서 악마로부터 선악 지식을 먹고 또 먹고 해도 또 목마르고 또 먹어야 될 뭔가 제공자, 그 제공자가 예수님 앞에서만 자기 정체를 드러내면서 그동안 막하, 모든 인간에게 꾸준하게 인간의 자기 정신을 거기다 제공해왔고 심어줬다는 것이 들통나버린 겁니다.
구원받으려면 이렇게 구원받아야 되고, 메시아는 이렇게 되어야 된다는 규정을 악마 쪽에서 이미 전 세계 모든 인간 종교계와 인류에 그것을 유포시켜 왔다는 것이 발각되었지요. “이렇게 하라.” 딱 그거예요. “이렇게 하면 구원받는다. 이렇게 하면 복 받는다.” 이거는 뭐냐? 우리에게 우리의 행위를 촉구하는 행위지요. 마귀입니다.
살아가면서 마귀 정도는 한 번씩 만나봐야 사는 재미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마귀는 괜찮은 지식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리 소유화시키는데 진력을 다해요. 네가 가진 게 너를 구원한다는 거예요, 네가 가진 게! 사건은 그냥 빠지고 가버렸는데 악마는 자꾸 어떤 주특기 같은 것을 내가 지니고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와 만났을 때 네가 갖고 있는 것, 무기 내놓고 나도 내 무기 내놓고 둘이 한번 싸우자고, 한번 해보겠다고 덤벼드는 것이 매일의 일상생활처럼 그렇게 된 겁니다. 여기서 주님의 은혜, 성령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면 무엇이 아작나느냐 하면, 우리의 인생사가 완전히 다 깨져요. 우리 인생, 내 나름의 시나리오가 다 깨집니다.
내가 규정한 내 인생,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것이 다 허물어집니다. 그 허무는 방법은 간단해요. 외국 연극 보면 관객들이 앉아 있거든요. 그리고 헐값 주고 들어온 관객들이 있어요. 음악회나 오페라에서 염가로 들어온 사람들, 정식으로 앞에 앉은 VIP 자리 말고 회랑에 자리를 마련해서 무대가 잘 보이지도 않아요. 보다 보면 목 아파요. 두 시간 동안 보려고 들면.
파리 오페라 무대에 그런 게 있어요. 회랑에 어설픈 좌석에 앉은 사람, 그것도 성질 급한 일곱 살 먹은 애들이 있거든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연극 지금 한창 잘 되고 있는데 “주인공! 배신자 바로 뒤에 있어요!” 큰 소리로 다 일러줘요. 지금 연극의 흐름을 망쳐버려요.
그 일을 주님이 하십니다, 그 일을! “창세 전에 너는 이미 확정되었어.” 그 이야기를 해버리면 소박한 내 아름다운 꿈, 소녀의 꿈, 소년의 꿈, 계획, 이렇게 잡아서 이렇게 출세하고 나는 이렇게 성공한 인생이라는 그 소박한 내 꿈이 순진하기 짝이 없는 성령의 도발적인 미리 알려줌에 의해서 인생이 재미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재미있는 이야기인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하잖아요. 역사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그 근처에 있던 중국 아줌마가 “이토! 누가 당신을 총으로 쏘려고 합니다. 빨리 피하세요!” 하면 어떻게 돼요? 안중근은 영웅이 되지 못합니다. <영웅>이라는 뮤지컬도 안되고 영화로도 못 나와요.
아브라함 링컨이 죽을 때 극장에서 구경하다가 관객이 권총으로 쏴서 죽었거든요. 그런데 미리 그걸 알았으면 아브라함 링컨은 안 죽었어요. 지금 우리가 뭘 모르느냐 하면, 내가 모르는 어떤 사람이 내 인생을 꼰질렀다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고 있어요. 내 인생이 왜 이렇게 풀립니까? 누가 꼰질렀거든요. 누가 고자질했어요. 천사가 했지 뭐 누가 했겠어요? 성령이 그렇게 했지요!
내가 규정하는 나만의 인생을 주께서 분질러 버리는 겁니다. 분질러 버려요.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이 그릇이라는 신체, 신체라는 그릇은 계속해서 악마가 주는 악마의 정신이 쌓이고, 쌓이고, 쌓이는 거예요. 그동안 너무 쌓여서 이걸 버릴 수가 없어요. 너무 아까워서, 공부한 게 아까워서 이러한 길로 가서 진짜 멋들어진 피날레를 내가 보고 싶은 거예요. 나는 이렇게 노력해서 내 행함으로 이렇게 성공했다는 것을 떠벌이고 싶은 거예요.
왜? 그래야 내가 신처럼 되니까. 잠깐이지만 신인 양 행세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창세 전부터 이미 주께서는 작살 내는 겁니다. 작살 내면서 마태복음 3장 12절에 이런 말씀을 남기고 있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열매 없는, 거룩한 열매 없는 자들은 분질러서 지옥 불에 불쏘시개로 집어넣기로 이미 확정났다는 겁니다. 확정 났어요. 그러면 열매 없는 이유가 뭐냐? 이유가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가 인간에게 계속해서 자기의 정신을, 마음을, 심정을 인간의 신체에 계속 집어넣어 줘 왔거든요.
그 말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알곡 될 수 있는 행함을 내세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께서 인간이 망했던 그 처음 사건, 선악과, 그 선악과로 들어가게 해요. 선악과로 몰아넣어요. 요리조리 선악과로 몰아넣습니다. 선악과로 몰아넣으면 그것이 뭐냐? 우리가 기피하고 싶었던 원래 인간의 출발점이 바로 그쪽이 돼요. 선악과가 됩니다.
그때부터 이미 우리는 죽은 자로서 시작을 한 겁니다. 그러면 죽은 자로 시작한다는 것, 죽음은 뭐로 넘어갈 수 없느냐 하면, 생명 나무 있는 그 에덴동산 쪽으로 해서 다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인생은 뭐냐? 돌아갈 수 없는 자에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기껏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소망만 생각하는 거예요. 소망만, 희망만 생각하는데 오늘 본문에서 ‘부르심’이라는 말이 9절에 나와요. 이 부르심의 대표적인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어요. 우르 왕국이 BC2천 년 경에 있었어요. 소위 메소포타미아라고 해서 인류 최초의 제국이 있었는데 BC2334년 아카드 제국이 있었고요, 2334년이니까 1년 차이로서 단군 할아버지가 2333년이잖아요. 그 시기에 아카드 제국이 있었고 180년 후에 곧장 망하고 우르 왕국인데 그 우르 왕국이 있을 때 약 BC2천 년쯤에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란에 머물게 됩니다. 하란에서 오래 있게 돼요. 지금의 이라크를 떠나서 터키 쪽으로 갔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부르심을 받는다는 이게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소망을 가지는 게 아니고 자기가 걸쳐놓은 소망을 자기가 삼키듯이, 삼키듯이 가는 여정, 이게 부르심의 여정입니다. 내가 구상한 모든 희망을 내가 삼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희망은 마귀의 정신에서 온 희망이기 때문에 내가 삼켜서 소화해 버리는 거예요.
마치 비밀스러운 장부가 있는데 갑자기 검찰이 등장하니 시간상 못 버리니까 꾸겨서 자기 입에 집어넣어서 그 비밀 장부를 없애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펼쳐놓은, 내가 양탄자처럼 펼쳐놓은 그것을 내가 수습해서 내 희망을 내가 삼켜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계속해서 희망이 없는 사람으로 가는데 그것 삼키는 데 평생 걸립니다. 내가 깔아놓은 소망과 희망, 그것을 다 마저 삼키는데 그 희망과 목표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 그것이 주의 부르심이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가는 곳은 마귀가 설정한 유황불, 멸망의 길, 악마는 다 알고 있지요,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쪽 각도가요, 그쪽으로 가면 안 되거든요, 방향성이. 방향성을 다른 데로 돌려야 되는데 인간은 자기가 악마의 정신으로 살기 때문에 다른 희망이라는 대안이 없어요. 그저 내가 하고 싶다, 갖고 싶다, 저렇게 되고 싶다, 그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사건을 일으켜서 그것을 거두어들이는 거예요. 어떻게? 희망을 삼키게 함으로써 희망 너머를 바라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신약에 와서 제사로 모든 것이 끝이 났거든요. 결국은 제사가 끝나는 것은 성도로 하여금 인간이 갖고 있는 자리에서 희망을 거두고 보니까 거기서 뭐가 등장하느냐?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그 제사, 주께서 친히 제물이 되는 십자가 제사가 등장을 했다 그 말이지요.
이미 인생의 모든 것은 성도한테는 은혜로 마감이 된 것을 발견해요. 마감이 되고 나니 거기서 나오는 현상은 뭐냐? 틱장애 현상이에요, 틱장애 현상. 읍! 읍! 밧데리가 거의 떨어진 시계의 초바늘이 중력에 의해서 30분을 가리키는 자리에서 다시 올라가야 되는데 이게 힘이 없으니까 올라가다가 다시 내려오고, 올라가다가 다시 내려오듯이 계속해서 무한한 진보와 무한한 발전과 전진이 이제는 다 왔기에 안 가도 되는 거예요. 항상 마감의 반복이에요, 마감의 반복. 끝의 반복, 끝장난 그 지점의 반복.
희망을 자기 안으로 거두어들여서 희망마저 넘어서는 것, 이게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여정입니다. 그 여정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 8절에는 아주 불친절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좀 친절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불친절하게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불친절하게 합니다. ‘갈 바를 알지 못했다.’
아~, 이거 뭐 하나님의 은혜 없는 사람들은 공포에 휩쓸립니다. “나는요, 갈 바를 알지 못해요.” 그러면 나는 5개월 뒤에, 6개월 뒤에, 3년 뒤에 어떻게 됩니까? “이대로 진정 끝이란 말입니까?” 주께서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은 ‘출발했다’가 중요해요. 출발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모르는 자에게 돌아가는 거예요. 모르는 자에게.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해를 돕는 것인지 그것은 애매하지만, 또 여기에 상투적인 유행가 가사가 동원될 타이밍이 찾아왔어요. 중요한 것인데요.
너에게로 또다시 돌아오기까지가 왜 그리 힘들었을까~
그다음 가사는 아주 충격적입니다.
나는 이제 알았어 내가 죽는 날까지 널 떠날 수 없다는 걸~
<너에게로 또다시>라는 노래인데 변진섭이 이 노래 부를 때 은혜받았습니까? 그 가사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하겠습니다.
나는 이제 알았어 내가 죽는 날까지 널 떠날 수 없다는 걸~
이걸 복음적으로 설명하면, 죽고 난 뒤에도 먹고 마시고 함께 주와 함께 있는 거예요. 이게 창세 전에 확정된 거예요. 결정 난 거예요. 그러니까 혼자 살다가, 혼자 사니까 혼자의 희망과 계획과 미래를 설계하면서 나 하나 영광 받는 것으로 주의 영광을 가리면서, 교회 와서 또 혹시 행운이라도 올지 싶어서 그렇게 하는데 그러한 악마의 정신으로 살다가 이제 그게 절단 난 거예요. 분질러 놨어요, 주께서.
“네 뒤에 배신자 있다. 그게 마귀짓이야!” “누구야, 나에게 이 실상을 알려준 게 누구야?” 회랑관객, 돈 비싸 게 안주고 염가로 들어온 그 비겁한 관객이 알려줘 버렸어요. 나만의 행복한 설계가 완전히 재미 하나도 없게 만들었어요. 내 힘으로 어떤 성과가 이뤄져야 나에게 즐거움이 있는데 그 즐거움을 빼앗아 갔어요. 내 사는 보람을 뺏어갔어요. 나만의 존재의미를 뺏어가 버렸어요. 나만의 존재의미.
분노가 일어나지요. ‘나 이제 성경 안 봐’ 성경 덮어버려요. ‘성경 보면 뭐 창세 전부터 확정됐다며? 뭐 재미없어 보겠어?’ 안 봐요. 그 대신 ‘하면 된다’ 이런 것 보고 싶은 거예요. ‘목적으로 이끄는 삶’ 그런 것 보고 싶은 거예요. 더 놀라운 사실은, 그러면 왜 주님한테 죽을 때까지 이제는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느냐?
내 깊은 방황을 변함없이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던 너~
이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이에요. 내가 그동안 혼자 살면서 방황했던 그 모든 것을 주께서는 내치지 아니하시고, “저리 가, 너 잘렸어!” 이렇게 하지 않고 따뜻한 눈, 그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시는 그분, 그분의 은혜를 받으니까 “너에게로 또다시” ‘너에게로’ 할 때 ‘너’는 주님이지요, 주님에게로 또다시……, 갑자기 가스펠 송이 되어버렸네, “주님에게로 또다시 돌아오기가 왜 그리 힘들었을까~”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악마의 정신으로 무장해서 사니까 뭘 포기 못 하느냐? 내 행함의 실적을 내가 놓지를 못하는 거예요. 내 행함의 실적이 있어야 그게 나다움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경우가 되면 이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이 뭐냐? 이렇게 살게 되면 이것은 미쳐야 됩니다.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 1장 9절의 말씀은 세자로 줄인다면 “미쳐라”에요. 여섯 자로 늘이면 “제대로 미쳐라.” 그야말로 미친 자가 아니면 신앙 자체가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뭘 따집니까? 내 행위에 대해서는 따질 게 없어야 돼요. 주께서 행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통보하는 형식이거든요.
내가 이렇게 했고, 내가 이렇게 했고, 내가 이렇게 했다, 통보한다는 말은, 이것은 미치지 않고서는, 멀쩡하게 지금 내 행함 내 계획이 다 있는데, 내 비전이 있고 희망 다 있는데 그걸, 멀쩡한 이것을 주께서는 나를 선악과로, 다시 말해서 그 출발점을 바꿔치기한 거예요. 무덤에 가게 만들어요. 지금 천사가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나의 무덤으로 계속 가게 하시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 조금 어려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11장 9절입니다. 제가 그 본문 자체를 읽어 볼테니 여러분이 해석 보세요. 이 말이 무슨 뜻인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
제가 쓴 것 아닙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이 뜻입니다. 프레임 자체를, 악마의 정신을 수용하고 시작한 그것을 인간은 자기의 출발점으로, 물론 악마라는 말은 안 하지만 ‘내가 아는 지식과 내 노동과 내 노력으로 살겠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출발점인데 그 프레임 자체를 뭘 로 보느냐 하면, 어둠으로 봤다 그 말입니다. 그 틀 자체를.
프레임이라는 이 말을 쓰는 이유가 뭐냐? 인간은 자기에게 덮쳐진 틀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다, 그 뜻이에요. 그 프레임의 생산물이에요. 그렇기에 인간은 마귀의 노예예요. 마귀의 자식이고. 인간은 사탄의 이름으로, 악마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본인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주님 홀로 하신 그 일에 대해서는 결사적으로 그걸 밀어내고 반대하는 속성을 보이게 되는 겁니다.
어디서 보이느냐? 교회에서 보이지요, 교회에서. ‘그래서 목회하겠나? 그래서 교회유지 되겠나?’ 결사적으로 밀어내요. ‘주님이여, 그래서 우리 가정이 화목하겠습니까? 나는 내 식대로 하겠습니다. 주님 방식은 참고로 하되 전적으로 주님방식을 따르지는 않겠습니다. 내가 아는 식으로 내 가정 내가 건사하겠습니다. 내 자식은 내 식으로 키우겠습니다.’
거기에 대한 주의 답변은 뭐냐 하면, 그것이 바로 네가 어두움에 속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로 실족하게 한다. 길을 엉뚱한 방향으로, 각도가 점점 더 엉뚱한 길로 자꾸 가요.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거예요. ‘내가 하는 일을 내가 포기 못 하겠습니다. 그동안 먹고 살려고 얼마나 일했는데.’
그러한 현상,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자기를 뭐든지 규정하면서, 의미를 제공하면서 그것을 자기 소유화시키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디모데후서 1장 9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겁니다. “네가 준비한 것이 옳으냐, 아니면 주님 내가 준비한 것이 옳으냐? 어느 것이 맞느냐?”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어느 것이 옳으냐?”
자, 그렇다고 해서 요한복음 11장 9절이 해석된 것이 아닙니다. 프레임 가지고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그러면, 씌우면 ‘그다음에 우리가 할 것은?’라고 묻지 마세요. 성경은 어떤 구절이라도 “주여, 제가 뭐하면 됩니까?”를 묻지 마세요. 그것은 해당 사항이 안 됩니다. “주께서, 함께 있는 주께서 나에게 뭘 계속 퍼부어줍니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우크라이나 전쟁 가운데서도 비가 오고 눈이 온다고요. 인간은 전쟁하는 가운데서 하늘에서 눈이 내려와요. 이게 뭐냐 하면, 하늘에서 안 놀고 계신다는 뜻이에요. 눈이 오는데 눈이 오라, 해서 눈이 오는 게 아니잖아요. 인간은 인간대로 망하는 길로 가고, 주님은 주님대로 자기 일 하고, 세상은 그런 겁니다.
사람이 그냥 주의 하는 일에 따지지 말고 미쳐 버려야 되는데 만약에 제정신으로 살면, 미치지 않으려고 하고 제정신으로 살면 이 저주의 무게를 감당 못 합니다. 사람이 이 주의 일의 행하심에, 홀로 하심에 미치지 않으면 우리는 내부적으로 폭발해 버려요. 왜 그러냐? 세상 하나하나가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게 마약 같아요. 모든 것이 마약이에요. 마약이라 하는 것은 정신없이 계속 허겁지겁 공포에 쫓겨 가면서 계속 뭐든지 건지려고 하고, 뭐든지 가져야 되고, 뭐든지 소유해야 되고,뭐든지 알아야 되고, 정말 어이가 없어, 어이가 없어. 이것은 어이가 없다. 유아인, 유(you), 당신, 아(我), 나, 인(人), 사람들, 막하 사람들 전부 다 어이가 없어요. 전부 다 마약이에요. 마약 종류대로 다 먹었어요.
자기가 자기 맘대로 어떻게 결정한 게 없어요. 안에 있는 결핍, 욕망의 결핍으로 휘둘리다 보니까 그냥 그렇게 가면 되는 줄로 알고 우르르, 막하 우르르 넓은 길로, 원래 멸망의 길은 넓은 길이에요, 우르르 다 가는 거예요. 그래서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그 말이지요.
창세기 11장에 바벨탑 나오는데 그 바벨탑이 뭐냐? 그 당시 벽돌 만드는 기술, 건축기술이 발달했어요. 그냥 진흙으로 뭉치던 벽돌 대신 불에 구운 벽돌이 나오면서 탑을 쌓기 시작했는데 그 탑을 쌓는 이유가 신이 쉽게 인간 쪽으로 올 수 있도록 마중 나가는 것이 바벨탑입니다. 이게 인간의 아이디어고 이게 인간의, 사탄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모습이에요.
이 바벨탑이 교회 다니는 교인들의 행동하고 똑같아요. 똑 닮았어요. 그 인간이 그 인간이니까 똑같은 거예요. 신이 쉽게 우리 집안에 복 주기 위해서 내 쪽에서 마중할 수 있는, 성의 있는 채비를 하겠다는 거예요. 기도하고, 말씀 듣고, 열심히 헌금도 해가지고 섭섭지 않게 좋은 게 좋다고.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이미 거덜 난 것을 알아요. 그러면 성도와 성도끼리 만나서 둘 다 마지막에 틱 현상, 틱장애 현상, 읍! 읍! 딸국질 같은 그런 인생이라면 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만났을 때 무슨 이야기 해야 됩니까? 최후에 관한 이야기하면 되지요. 그래서 나중에 예배 마치고 식사하면 그게 무슨 만찬? 최후의 만찬입니다. 물론 가룟유다처럼 비스듬하게 있을 수도 있지만.
사람을 만났을 때 최후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돼요. 이렇게 하면 달성할 수 있습니다, 복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 하지 말고 끝장난 소망 그 너머, 사망 그 너머 주께서 주신 생명, 주와 함께 먹고 마시는, 그 모든 내 행위에 대해서 일체 묻지 않는 제사로 끝, THE END, 제사로 끝나버린 그 상태에서 우리는 뭘 할 것인가, 어떤 혜택을 입을 것인가, 그 이야기가 압축된 것이 바로 오늘 디모데후서 1장 9절입니다. 정말 쉬운 거예요.
자, 그게 좋아 보이는데 또 이렇게 이야기해요. “목사님, 그렇게 되면 좋은데 그렇게 되려면 뭐하면 됩니까?” 뭐 행하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해도 안 돼요. “뭘 하면 우리가 그런 상태에 놓일 수 있습니까?” 할 때 요한복음 11장 14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주님께서 나사로 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움직입니다. 사랑하는 나사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쪽에서 나에게 내는 사랑이 멈춰져야 되고 마감되어야 돼요. 틱장애 현상,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만해라. 많이 들었다, 그만해라.”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해줬을 때 당신의 사랑은 끝났어요. 그런데 당신의 사랑이 끝나게 되면 내 사랑이 시작됩니다.’ 헤어질 결심 영화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제발 날 사랑하지 말고, 날 소망하지 말고, 제발 부탁하는 데 날 믿지 마라. 이 예수를 믿지 마라.” 그러니까 네가 너한테 속아 넘어가고 네 속의 마귀한테 속아 넘어가는 거예요.
이렇게 살아도 끝장났고 하루 더 살아도 끝이에요. 우리는 틱장애 현상으로 맨날 끝장난 이야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옛날에 그랬었었었지.’라고 하면 돼요. ‘그랬었었지’가 로마서 8장에 나와요. 로마서 8장 30절에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여기 부르셨다 했지요? 오늘 본문에 ‘부르심’ 나오지요?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셨느니라’ 마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셨느니라’ 하는 것을 앞에다 다 붙여 볼게요. 미리 정하셨고, 미리 부르셨고, 미리 그들을 의롭다 하셨고, 성화 없습니다. 이게 거룩함이에요. 미리 의롭게 하셨고, 미리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왜?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주님 주시는 그 영생을 먹고 마시기 때문에 마감, 모든 희망의 끝장 그 너머에서 주어지는 그 생명을 미리 주님으로부터 얻어먹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내가 나 자신과 손절해야 되지요. 나보고 바이바이, 해야 되지요. 바이바이, 안 하면 또 계획 세워요. 내 미래 일을, 내 인생의 나그네 길을 내가 설계한다고요.
끝으로 성경에서 깜짝깜짝 놀랄 일은 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어떤 인물에 대해서 실제로 실습을 시켜놨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예요. 히브리서 11장이 아브라함 이야기, 그 후손들의 이야기인데 11장 13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믿음이 앞장서고 그들은 믿음을 따라가는 거예요. 자기 믿음을 거두면서, 자기 믿음을 부정하면서.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약속이 앞장서고, 본인이 약속을 소유하지는 못 했지만 약속이 앞장서니까 자기가 지금 약속을 소유할 이유가 없지요.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여기 나그네 인생 나오지요. 14, 15절에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우리가 돌아갈 곳은 이미 바통 터치했어요. 우리가 있는 곳, 선악과가 우리가 죽은 자리입니다. 그게 우리 무덤이었어요. 그 무덤에 우리가 되돌아갈 이유가 없어요. 주께서는 아직까지 나 혼자 사는 사람한테는 기어이 우리의 무덤에다 집어넣어 버려요. 자기 무덤에 오기까지 그토록 우리가 그렇게 힘들었어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내가 그걸 수긍하고 인정하고 그걸 동의할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도 힘든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 인생은 애초부터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마귀가 자꾸 ‘네 인생 살아라. 네 인생 살아라. 한평생 사는 것 칼 꺼냈으면 무라도 찔러 봐야지.’ 이런 식으로 격려 독려하는 식으로 우리를 속여 왔던 거예요. 악마가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마약을 주고요, 자유라는, 자율성이라는 마약을 주면서요.
16절에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우리가 무슨 수로, 땅에 있는 존재가 무슨 수로 하늘로 갑니까? 폴짝폴짝 뛰어도 뛰어봐야 우리나라 대표선수도 2미터 35까지밖에 못 뛰었어요. 뛰어봐야 3미터도 안 된다고요.
주님께서 “이리와!” 주님께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 그 코스, 그 코스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오는데 완벽한 거룩이 올라가서 우리를 거기서 불러주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 전체가 어두움인 것을, 어두움, 어두움이고 죽은 자니까 그 새로운 프레임, 우리 안에 빛의 프레임, 빛의 틀이 와서 어두움이 무엇이며 빛이 무엇이며, 그걸 분간할 수 있는 영안을, 성령을 우리에게 날마다 허락하셔서 마지막, 성령이 마지막 영이거든요, 종말에 오는 영, 마지막 다 끝나야 오는 영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이 자리가 바로 모든 마지막을 마감한 그 이후의 자리인 것을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다시 보게 하옵소서. 그저 아는 지식으로 보지 않게 해주시고 다른 참신한 안목을 허락해 주옵소서. ‘다 이루었다’를 같이 다 이루었다고 동의할 수 있는, ‘참으로 다 이루었습니다.’라고 인정할 수 있는, 그래서 남들에게 미쳤다, 소리를 들어도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의 남은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