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원칙 안에서

아빠와 함께 2023. 3. 13. 07:02

원칙 안에서 

2023년 3월 12일                 본문 ; 디모데후서 1:10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예수님께서 나타나지 아니하셨다면 완전히 감추어져 몰랐던 사실이 비로소 알려졌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은 죽기 위해서 살면, 썩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일깨어주시므로서 영생의 활동을 하십니다. 즉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이 죽는 이유에 대해서 모릅니다.

인간들은 기껏 괜찮은 결과, 보다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원인분석에 나설 뿐입니다. 그러나 ‘원인을 모르는 것’과 ‘이유를 모르는 것’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인간들은 원인분석을 시도하면서 여전히 선과 악을 아는 지식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지만 진정 선과 악을 재판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선과 악의 판정에서 손을 떼도록 만드십니다. 아담에게도 이를 실시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비록 선과 악을 알고 있었지만 자기 몸에서 올라오는 수치심은 선과 악의 지식으로도 해결될 수 없었습니다. 선악을 알지 전까지는 벌거벗어도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인해 자신으로부터 수치심이 피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참을 수 없는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이는 곧 자신의 몸이 자체적으로 아는 선과 악의 지식으로 해결될 수 없는 대상임을 말해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이름을 하와, 곧 ‘생명’이라고 붙이시고 그 후속조치에 나섰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만든 치마의 자리에 가죽옷을 해입혔던 겁니다. 곧 ‘가죽옷’은 생명으로 통하는 지점으로 작용하신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인간들은 예외없이 썩고 예외없이 죽음과 관련있음을 들추어내시는 일입니다. 그 들추어내는 지점은 어느 지점인가요?

인간들은 선악 지식을 본인들이 다루고 싶어서 선도 알고 악도 아는 중간 지점에 자리잡고 삽니다. 그런데 인간이 판단하는 선과 악은 이 판단자로서의 자신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확고히 하겠다는 의도를 보이게 됩니다. 즉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선’이고 자신에게 손해가 되거나 불리하면 ‘악’으로 규정합니다.

그렇게 하고서는 쉬지않고 선과 악 중간지점에 자신을 세우고 판단자로서 조정에 나섭니다. 고대 왕들은 백성들을 마음에 들기 위해서 각가지 정의롭고 상식적인 방침으로 법으로 시행했습니다. 왜 왕들은 백성들로부터 어질고 정의롭고 존경받는 왕이고 싶어할까요? 그것은 자국에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다른 나라에게 자국민이 간절히 원하는 바가 목표가 있다면 왕은 백성들의 후원을 입고 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따라서 왕이 내린 모든 결정이 자국가에 이익이 되는 조건하에 추진되는 겁니다. 내부 질서를 다지고 국력을 신장하는 것도 모두 자기 국가를 지켜내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을 이것은 ‘옳은 일’, 곧 ‘선한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같이 이런 제국들이 안 망한 나라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훌륭한 왕이라고 할지라도 안 썩고 안 죽은 왕이 없습니다. 이점을 무엇을 말해주는 겁니까? 인간들은 수평적 시간관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빠져나간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과거와 단절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런 원칙들은 로마서 7:9-10에 나오는 원칙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벌써 죽어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살아 있다고 여기고 악착같이 살려고 합니다. 즉 인간들은 살고자 애쓰는 것은 죄도 아니요 악도 아니라고 여깁니다. 인간들은 오로지 ‘나는 지금 살아있는 것 맞다’에서 신경 씁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죄가 살아 있다’, 혹은 ‘계명이 살아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본인이 살아있는 증거를 과거기억에 찾습니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수평적 시간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수직적 시간관을 투입하십니다. 그 투입되는 지점은 바로 선과 악을 판정하는 그 균형되는 중간지점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주어지면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해서 손을 떼야 합니다.

인간은 더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닙니다. 인간은 그저 이미 죽은 자요 썩을 자입니다. 살아난 계명으로 인해 인간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죄가 살아 있는 겁니다. 인간의 과거사는 그런 죽은 자의 과거입니다. 따라서 소위 살아있다고 우기는 인간은 계속 ‘죽어오고 있었다’로 바뀌어주는 분은 우리 예수님 뿐입니다.

과거는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과거는 우리 일이 아닙니다. 하루치를 살고 내일이 되면, 오늘은 예수님의 일이 됩니다. 예수님이 바라는 바는 이것입니다. ‘성도의 모든 나날은 다 영생의 나날이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들과 살아 있을 때 이별하기를 요청하셨습니다.

그 예가 성경 여러군데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7:27에서는, 예수님과 베드로 두 사람 분의 성전세를 조달하면서 우연히 잡히 물고기 입 속에 들어있는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해결지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모든 일이 ‘살아있다’고 자부하는 인간으로서 불연속적이게 하시는데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선과 악을 판정하는 판정관으로 살아 있다’가 되기에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인정할 수 없는 겁니다. 또한 마태복음 22:17-21에 보면, 거기에 로마에 세금 내는 문제를 가지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시비거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로마 황제에게 세금 내는 것이 합당한가 아니면 내지 않는 것이 합당한가를 두고 예수님에게 시비를 거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단절을 언급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주라”는 겁니다. 즉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기억의 영속성을 주님께서 일종 일정치 않으시는 겁니다. 끝으로 누가복음 18:1-8에 보면, 끈질기게 자기 원함을 갖고 재판장에서 판정을 요청하는 과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과부로 인해 그 현장에서 재판관은 ‘불의한 ’ 재판장으로 들통납니다. 곧 이 세상은 상식과 이성에 입각해서 잘 운영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모두 불의로 충만한 세상입니다. 성도를 통해서 이 실상을 들추어내시는 것이 오늘날 영생의 활동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과거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과거 일이 모두 다 주님이 주신 은혜의 날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5강-디모데후서 1장 10절(원칙 안에서)2303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디모데후서 1장 10절까지입니다.

디모데후서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이 짧은 10절 말씀 가운데서 상반되는 두 가지의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는 생명이고 또 하나는 사망이라는 거지요. 사망과 생명인데 그 사망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다.”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생명의 반대말은 썩는 것, 그렇게 되겠지요.

그러면 생명이 나타나실 때 할 일은 뭐냐? 생명이 나타나지 않으면 모두 썩는다는 겁니다. 썩는 것 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이 말씀을 듣는 우리 인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줄일 수 있어요. 인간은 뭐냐? 썩는 것, 썩어 문드러지는 것,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끼리 내버려 두게 되면 썩는다.’ 이 말은 ‘인간들 자체적인 자생력으로서는 자신이 썩는 것을 회복할 능력은 그 자체에 없다. 그래서 썩고 결국은 죽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다.’ 이걸 분명히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에덴동산에 심을 때는 짝을 이루기 위해서 심어놨거든요. 생명나무가 뭐냐? 생명나무는 생명나무 그 자체로 생명이 뭐냐를 알수가 없어요. 그러면 뭐가 있어야 되는가? 선악과나무와 같이 두 개의 나무가 중앙을 차지해야 돼요, 중앙. 에덴동산 중앙은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나무가 있는 곳이에요. 나무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두 개가 있는 거예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두 개가 같이 있어서 에덴동산이 축복과 그리고 낙원의 동산이 되는 근거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 살면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 땅에서 살고자 그렇게 애를 씁니다. 그렇게 살고자 애를 쓰면서 인간들이 추진하는 것은 어떤 결과를 낳기 위해서 원인이 무엇인가, 원인을 알아야 같은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고 그 좋은 결과를 위해서 원인부터 손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 원인을 모르는 것과 이유를 모르는 것을 구분할 줄을 몰라요. ‘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원인을 분석하면 결과가 나온다. 의사가 환자를 볼 때 원인 알면 병 낳을 수 있다.’ 사람들의 생각은 거기까지입니다. ‘원인을 추궁해서 괜찮은 결과를 도출하자.’

창세기 3장에서는 이것을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아담이 살기 위해서 몸부림친다. 이마에 땀이 흐른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은 왜 살기 위해서 땀을 흘려야 되는지 그것은 몰라요. 왜 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 애를 써야 되는지, 왜 가만히 있어서는 살지를 못하는지 그 이유를 몰라요.

원인을 모르는 것과 이유를 모르는 것과는 차이가 나는데 그 구분을 못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유를 모른다는 말이 뭐냐 하면, 내가 살기 위해서 희망을 가져야 되는 나 자체가 문제 있다는 그게 이유입니다. 썩도록 태어났는데 결국 이 땅에서 썩고 죽게 되어 있는 인간이 그렇게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이걸 애써 거부하고 살아야 되겠다고 애쓰는 것, 자기 썩어야 될 이유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헛된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스스로 왜 그렇게 고생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모른다고 분명히 단정하고 오늘 본문 10절에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굉장히 어렵지요.

‘우리 예수님께서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주님이 나타났다. 그래서 주님이 나타났다.’ 이건 같은 말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몰랐던 것, 왜 우리는 썩고 죽어야 되는지 그 이유가 비로소 나타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달리 이야기해서 인간은 뭔가 감추어진 것 위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는데 인간은 뭘 모르냐? 하나님이 숨겨놓은 감춰진 그것을 모르는 채 그냥 무작정 사는 게 남는 거라고 열심히 사는 거예요. 그래놓고 숨어 있는 것을 인간의 힘으로 캐내지를 못하고 왜 사는지를 모르면서 무작정 살아야 되겠다고 애는 썼는데 평생을 살아도 헛짓이 되어서 결국 죽을 때는 썩어서 죽는 거예요.

죽어서 썩고 살아 있으면서도 썩어가고 있지요. 나이 30대에 가면 그다음부터는 내리막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두뇌 발달이 30대까지는 죽 올라가다가 30대 이후에는 그냥 죽을 때까지 계속 내려가는데 브레이크도 없어요. 그냥 계속 내려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어떤 가수가 말하기를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거예요. 30 넘으면, 서른 살 넘으면 점점 더 내려가는 거예요. “점점 더 멀어져 간다~” 김광석이가 부른 노래 있지요. ‘점점 더 멀어져 가네. 찬란했던 내 정점에서.’ 이것은 어떤 영웅도 말릴 수가 없습니다. 이유를 몰라요. 왜? 숨어 있기 때문에.

그러면 이유를 어떻게 아는가? 그 이유는 예수그리스도의 나타남에서 비로소 전부를 알아요. 전체를 아는 거예요. 내막을 아는 겁니다. 그 썩는다는 것, 죽는다는 말이에요, 썩는다는 말도 있고 사망이라는 말도 10절에 나와 있어요.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라고 되어 있으니까 썩는다는 것, 같은 말로 죽는다는 것, 그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선악과 이야기부터, 과거에 있는 아담이 선악과 따먹는 그때부터 해서 지금 우리에게 적용을 시키는 겁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해서 우리의 과거는 우리의 과거가 아니고 주님의 과거라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나의 과거는 애초부터 없었어요. 전부 다 주님의 과거였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이지 내가 과거에 한 일은 나의 과거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라면 살아가면서 제발 과거는 잊어주세요. 과거는 그냥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연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과거라는 것은 없습니다. 주께서 하신 주의 일이었지 나의 일은 아닙니다.

과거 때문에 현재를 망치는, 현재를 우울하게 지내는 그런 바보 같은 짓은 그만 해야돼요. 이 말은 여러분이 기억이 있을 것이니 과거가 있더라도 과거를 이렇게 덮어주는 게 뭐냐? 지금의 주님이 우리 자신의 과거를 “실은 나의 일이었어.” 하고 덮어주는 거예요. 오므라이스 생각하면 됩니다. 오므라이스 만들 때 밥 볶아놓고 노란 계란을 막으로 덮어놓고 지그재그로 케첩 막 뿌리잖아요. 그러고 위에서 보게 되면 우리의 과거가 노란 계란 막으로 덮여 있어요. 쉽게 해서 주의 일을 파먹으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주의 나타나실 때 그냥 빈손으로 나타난 게 아니에요. 썩어짐을 들춰낼 때는 그 들춰내는 근거가 10절에 보게 되면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여기에 같은 말이 두 개라서 이해하기 힘드니까 ‘드러났으니’ 이렇게 합시다. 같은 말이지만, ‘예수님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숨어 있던 것들이 드러났으니, 몰랐던 것이, 나도 몰랐던 것이 이제는 공개되었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생명이라 하는 것은 그냥 생명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썩은 것을 들춰내는 활동력으로 비로소 사망이 드러나는 겁니다. “너는 썩었어.”라는 말을 해줄 때 생명이 찾아오신 줄 아시기 바랍니다.

“너 썩었어. 너는 죽는 거야. 너 때문에 아니야. 네 행동 때문이 아니야. 행동을 나쁘게 해서 그런 게 아니야. 개차반처럼 행동해서가 아니야. 너는 처음부터 썩은 채로 태어났어.”라고 이야기해 주는 그분이 바로 생명이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쓸데없이 걱정한다는 것은 왜 걱정하느냐? 여전히 주님이 와서 모든 것을 들춰주심에도 불구하고 “저리 가!” 하고 주님을 내쫓고 내 선에서 해결하려 하니까 우리가 헛된 몸부림을 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이 주님 보시기에, 성경에 나와 있으니까요, 인간은 주님 보시기에 무엇을 관리 못 하느냐 하면, 선악과 지식을 따먹었는데 이 선악과 지식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주어지면서 선과 악의 지식을 감당을 못해요.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막대기가 있는데 막대기의 이쪽에는 선, 그 반대쪽에는 악이 있다면 이런 막대기가 얼마나 모순되겠습니까? 어떻게 선과 악이 한 막대기에 같이 있겠습니까? 선을 아는 나무 따로 있고 악을 아는 나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선과 악을 아는 나무가 한 과일에 다 있다는 것, 이것은 인간이 감당하지 못하고 인간이 먹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선과 악은 심판용이기 때문에 심판자가 아닌 자가, 선과 악을 자기가 갖고 있으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만들 때는 심판의 대상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리는 겁니다. 먹지 말라고. 심판의 대상은 따로 있는 거예요. 악마가 심판의 대상이지 인간은 심판의 대상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악마가 나만 죽을 수 없다, 이래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아닌 이 인간을 인질로 삼아버린 거예요. 유혹을 해가지고. 하나님은 “너 그쪽에 가면 죽어.” 쉽게 말해서 “악마하고 한패 먹으면 악마가 현재 선악에 의한 심판대상이 되었는데 왜 거기에 가담해?” 그쪽이 뭐가 좋다고 그쪽에 가담하느냐 그 말이지요. 인간은 심판의 대상이 아닌데 악마와 한통속이 되어버리면 졸지에 인간은 그때부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린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선과 악에 대해서 인간은 균형 있게 그것을 행사를 할 수 있는 균형점이 없다는 거예요. 선과 악, 선과 악을 양쪽을 다 봐야 돼요. 눈이 사시가 될 정도예요. 인간은 선과 악 그걸 감당을 못해서 기껏 한다는 것이 뭐냐?

그 중간지점에 균형을 맞추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선과 악, 그 균형. 인간이 아는 선과 인간이 아는 악, 그 균형점에 있는 본인이 선과 악을 둘 다를 알아야 된다는 부담을 갖고 있기 때문에요. ‘이것은 악이야, 이것은 선이야.’ 이 둘 다를 알고 있어야 되는데 그런데 인간이 쓸데없이 그걸 왜 알고 있어야 됩니까? 자기가 심판주도 아니면 그걸 알 필요도 없는데 괜히 인간이 그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악을 뭐라고 보느냐? 나에게 불리한 것을 악이라고 보고 나한테 유리한 것은 선으로 간주해서 항상 조절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중간쯤에 있는 우리는 살려고 시도하고요.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내가 사는 것이 선이라고 이미 규정을 해놓은 이상 나를 살리는데 힘들게 하는 적들은 무조건 악한 자가 되고 내가 사는데 도움 되는 자는 그자가 누구든지 무조건 나에게는 선한 자로 내가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말도 안 되는 해석을 내려버립니다.

아까 예배 전에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어떤 한 인물 때문에 주변 사람들 다섯 명이 자살을 했다는 말이지요. 다섯 명이 자살을 했을 때 앞으로 그 사람 때문에 몇 명이 더 자살할지 모른다, 그럴 때 사람들은 그 중심에 있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을 하는데 이재명한테 물어보세요. “당신은 왜 그렇게 하느냐?” 살려고 하는 거예요, 살려고. 그러면 이재명 보고 욕하는 우리는 안 살려고 합니까? 우리가 살려고 하잖아요. 둘 다 똑같잖아요. 누가 누굴 보고 욕합니까?

내가 사는 게 선이에요, 내가 사는 게! 군소리하지 말라는 거예요. 무슨 군소리가 필요합니까? 내가 사는 게, 살아남는 게 남는 건데 무슨 군소리가 더 필요합니까? 교회 와서 기도한다. 왜 기도합니까? 살려고. 하나님은 죽으라고 했는데 우리는 살려고 하는 거예요. 사는 게 정의고, 사는 게 공의고, 사는 게 이게 덕이고, 사는 게 진리가 되어버렸어요.

이런 나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인간들이 다 그렇잖아요. 교회 와서 성경공부 하는 것, 그것은 구색입니다, 구색. 그것은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거예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루 더 사느냐가 중요한 문제 아닙니까? 그것도 아슬아슬하게 사는 것이 아니고 풍부하게, 풍요하게. 그것도 어떻게? 남에게 칭찬받아 가면서. 그것도 어떻게? 여유롭게 권세까지 누리면서.

예수님께서 마귀에서 시험받을 때 제공된 시험이 세 가지 아닙니까? 풍요하게 넉넉하게, 인기 많으면서 권력도 쥐고, 이게 딱 우리 모습이라는 거예요, 딱 우리 모습. 내가 아프면 나쁜 것이고 내가 건강하면 좋은 것이고, 이미 우리는 결정 났어요. 우리는 우리 중심이 되기를.

인간은 어떤 의미에서 선과 악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보게 되면, 서기 500년 중반입니다, 동로마제국이라는 나라가 있어요. 지금의 터키, 그리스 쪽 나라인데 거기에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483-565)라는 왕이 있었어요. 서기 550년이나 560년경입니다. 법전을 만들었어요.

이 사람의 법전의 내용을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제1조, 법이란 신성한 것이고 인간에 대한 지식이다. 그리고 정의와 불의에 대한 지식이다. 제3조, 법의 원칙은 정직하게 사는 것, 아무도 해치지 않는 것, 모두에게 자신의 몫을 주는 것이다. 법전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사람에 의하면 “자연법에 의해서 공기, 강물, 바다, 해변은 개인이 아닌 공동의 소유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바다에 나가서 그물을 던질 수 있다. 들짐승, 새, 물고기, 바다와 공중에 사는 모든 것을 잡을 수 있고 잡는 자가 소유주가 된다. 물론 타인의 땅에 있는 것은 잡을 수 없다. 길가에서 나뭇가지를 자를 때는 지나가는 행인에게 주의하라고 해야 된다. 만약에 경고를 하지 않아서 행인이 다치면 자르는 자에게 책임이 있다. 병사가 훈련 중에 창술을 연습하다 타인을 상해했으면 병사는 면책 된다. 그러나 병영이 아닌 부적합한 장소에서 무기를 다뤘으면 이는 병사의 잘못이다. 성전은 거룩한 곳이므로 어느 누구든지 그 물건이나 땅을 함부로 팔 수 없다. 그러나 노예를 되찾기 위해서 자선 행위를 하는 것은 성전의 물건이라도 기부할 수 있다.”

자 이런 이야기가 굉장히 상식적이지요. 이런 상식적인 것, 정의롭고 누구나 공통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데 이 나라, 망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장한 왕, 썩었습니다. 상식적인데 왜 죽습니까? 상식적인데, 상식적으로 옳은데 왜 망합니까? 여기에 대해서 인류의 역사는 아무런 해답을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의인인데 왜 악인에게 지느냐? 그 해답, 인류는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방금 이야기한 거예요. 옳은 이야기 다 하고, 상식적이고 수긍되는 이야기를 다 했는데 뭘 모르느냐? 본인을 몰라요. 본인 자체가, 내가 정의롭다는 것부터 출발한 자체가 이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 인간에게 유통되던 정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옳다는 것, 내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숱한 사람이 나로 인하여 박살나야 되고, 욕 얻어먹어야 되고, 고생고생을 해야 되는지 사람들은 몰라요. 자식은 자기가 알아서 큰 줄 알지요. 부모가 나 키우기 위해서 얼마나 희생했는지를 몰라요. 이게 모르게 되어 있어요. 왜? 처음부터 인간은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들은 선과 악, 나에게 이익되면 선이고 자기에게 손실되면 악이라 해서 자꾸 균형을 맞추는 거예요, 균형을. 양쪽을 눈치 보면서.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그 선악을 아는 인간이 아무리 선과악을 안다 할지라도 해결 될 수 없는 문제점이 등장합니다. 창세기 3장 7절에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만든 자기 몸을 감당을 못해요.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게 있습니다. 그게 부끄러움과 수치였습니다.

이것은 선과 악을 아는 자식이 해결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선악과 따먹었다는 티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걸 티를 냈어야 됩니다. 그게 뭐냐?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거예요. 겨우 땜빵한 거예요.

그런데 그 선악과를 따먹기 전, 따먹기 전에는 벌거벗었어도 상관없었거든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문제가 생긴 새로운 인위적인 조작, 그것은 치마 옷을 입는 거예요. 창세기 3장 20, 21절에 보면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기서 가죽옷을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지어 입혔습니다. 이 가죽옷이 뭐냐? 벌써 예수님의 행동이, 활동이 아담과 하와부터 벌써 개시가 되었다는 겁니다. 개시가 되는데 개시되는 그 장소가 인간이 스스로 선악과 따먹어서 어떤 감당 못 하는 그런 부끄러움, 해결책이 없는 그 현장에 예수님의 행위가 거기에 찾아가는 거예요.

찾아가서 주님께서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조치를 인간이 자기의 선악과 따먹은 어떤 증세, 어떤 징후 어떤 문제가 터졌다는 그 징후의 증거가 있는 그 옷에다, 치마에다 노리고 가죽옷을 거기에 결합을 시키는 거예요. 인간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곳에, 그러니까 인간이 선과 악을 아는 지식과 이성으로 해결 못 하는 그 지점에 무엇이 주어지느냐?

하나님의 생명이 찾아와서 공격을 하고 그 지점에다 딱 갖다 붙이는 거예요. 가죽옷은 일단 패치 또는 파스 같은 겁니다. 그걸 붙여놓게 되면 거기서부터 ‘나니아(Narnia) 세계’가 펼쳐집니다, 나니아 세계. 모르시네요. 나니아 세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옷장에 들어가게 되면, 컴컴한 옷장에 들어가자마자 어디로 빠지냐? 눈덮힌 신세계가 열리는 거예요. 그 세계가 나니아 세계입니다. 만화영화에 나오는 거예요, 만화영화.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넘어가는데 애들이 장난치다가 컴컴한 옷장에 들어가니까 갑자기 여기는 완전히 북극의 세계처럼 흰 눈 덮인 새로운 신세계가 나타나는 것처럼 가죽옷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생의 세계로 이끄시는 거예요. 그 지점이 뭐냐?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양심으로서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그 지점에 패치가, 파스가 붙어 있는 거예요. 가죽옷이 붙어 있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가 거기에 붙어 있는 겁니다.

근원적으로 우리보고 “제발 너의 윤리와 도덕과 모든 행동과 상식과 이성과 판단과 논리를 부끄러워할 줄 알아라.” 그 말이지요. “스스로 살려고 하는 그 행동 자체가 부끄러운 줄 알아라.” 그 말입니다. 썩는 인간이 뭘 열심히 한다고 안 썩는 것이 아니거든요. 성경 전체가 이렇게 일관되게 선악과의 지식을 알고 있는 인간을 겨냥해서, 인간이 선악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부분을 찾아내서 그 찾아낸 그것을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로 사용하시는 방식, 그것이 영생으로 활동하는 주의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요나 4장 2, 3절에 보면, 요나가 니느웨 성이 망할 줄로 알고 자기는 뒷산에 올라가서 그 성이 망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자, 내 할 일 다 했으니 못된 니느웨성 망하기만 하면 된다.’ 하고 자기는 그냥 관람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는가? 니느웨성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나게 해버렸어요. 니느웨성 사람이 한 명도 안 죽었습니다. 가축도 안 죽었어요.

그러니까 요나 4장 1절에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누구에게 대드는가? 하나님께 대듭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왜 고국에 있을 때 말 다르고 지금에 나타난 결과가 다릅니까? 그래 알지요. 저는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내가 크셔서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자~알……”, ‘잘’ 이걸 길게 해야 돼요, “내가 자~~알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잘 하세요. 나는 이제 죽으렵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그래요, 하나님, 아주 자~알 하셨습니다, 하나님! 그래요. 내가 죽을게요, 그래!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인 내가 이렇게 생각이 달라서 무슨 재미로 일을 합니까? 그러면 내가 죽으면 되겠네요.” 하고 삐져서 3절에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이렇게 자살을 시도합니다.

이 말은 뭐냐? 인간이 주의 일에 장애물로 작동하는지를 알아야 돼요. 자아가,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일에 방해물로 등장시키는 이 과정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우리 내부가 영생으로 통하는 그런 비밀의 구멍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사실은 그 안에 내가 구멍이 나지 않기를, 내가 건재하기를 바라는 이 심보, 이게 뭐냐 하면, 선악을 아는 것, 이것 어떻게 조치를 해야 되는데 조치가 안 되니까 ‘그냥 선악을 아는 체로 천국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우기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선과 악이라는 막대기의 그 기준점, 주님께서 거기에 쳐들어와 버려요. 그러면 선과 악은, 인간으로서는 감당되지 않는 선과 악이라는 막대기 하나가 서로 이어지는 것처럼 착각해서 이렇게 있지만 주님께서는 선은 선대로 악은 악대로 중간에 그것을 잇지 못하고 떨어지게 만들어 버려요, 선과 악이.

선과 악이 떨어지면서, 우리가 있던 그 지점을 침으로써 떨어지면서 그다음부터는 선과 악에 대해서 우리로 하여금 판정 못 하게 만들어요. 선에 대해서 악에 대해서 전혀 우리와 무관한 일이 되게 만들어요. 이게 해방입니다, 이게! 선악과로부터의 자유에요. 선과 악에 대해서 자유입니다.

그걸 자르는 방법은 어떻게 자르는가? 주님께서 시간을 통해서 잘라버립니다. 인간은 자기 과거부터 내려온 기억 속에 있습니다. 기억 속에 있어봤자 이것은 수평적 흐름이에요. 수평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과거-현재-미래, 모든 인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서 미래로 나아가는 수평적 시간관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시간적으로 봐서 1차원 인간 존재지요.

그런데 주님께서의 시간은 뭐냐? 인간의 시계는 과거, 현재, 미래를 알려주는 기계가 시계에요. “채깍, 채깍, 채깍, 채깍……” 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시간은 뭐냐 하면, 이게 수평적 시계가 아니고 수직적 시계에요. 하늘로부터 땅에서 내려오는 시간이에요. 주님이 와서 주님으로 돌아가는 그 코스가 주님의 시간입니다. 그 수직적 시간과 수평적 시간이 만나서 수평적 시간관을 중간에 토막을 내버려요. 과거로부터 우리를 매일같이 끊어서 단절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말씀드릴 때 우리가 과거를 잊으라는 말이 그런 뜻이에요. 수직적으로 시간이 주어지는 거예요. 수직적으로 시간이 주어져 버리면 우리가 생각하는 기억 속에 있는 나의 과거의 어릴 때가 내 시간이 아니고 주의 과거지요. 주께서 일으킨 과거 일들이었어요. 내가 일으킨 나의 과거 일이 아니고 주께서 일으킨 거예요.

오늘 집에 가서 학창 시절 앨범 찾아보세요. 주께서 그렇게 교복 입고 수학여행 가게 하고, 다 주께서 일으킨 일들입니다, 주께서. 그리고 앞으로 하루를 살고 내일 되어서 오늘을 돌아보세요. 주께서 일으킨 사건입니다. 수평적인 시간은 없고 이제 주님이 와서 그 썩어질 우리를 영생으로 생산시키는 거예요.

썩어진 것을 소재로, 재료로 가져와서 그것이 썩어지지 않고 영생하도록 영생을 생산하는 재료로 우리의 몸을, 우리의 과거를 사용하신 거예요. 그게 뭐냐? 가죽옷이에요. 가죽옷이 우리에게 패치로 붙어 있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그 선악의, 균형 잡힌 선악의 심판자리에 전에는 우리들이 있었지만 그 자리에, 예수님이 그 자리에 있어서 선이고 악이건 내가 관여할 테니 네가 관여하지 마라, 네가 상관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당부하는 겁니다.

이게 오늘 본문이거든요.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게 뭐냐? 9절 끝에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 은혜가 뭐냐?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이게 은혜라는 말이지요.

은혜가 나타나게 되면 예수님이 은혜 안에서 나타나서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과거사, 우리가 몰랐던 내가 죽는 이유, 썩어질 이유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걸 드러내시는데 그냥 드러내시는 게 아니고 이미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드러내신다는 겁니다. 영생을 위하여.

참, 이게 얼마나 고귀한 이야기입니까? 이 이야기가 이게 9시 뉴스에 나올 이야기가 아니지요. 그 시시한 조선일보에 날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세상은 전부 다 과거사로 가득 차 있지요, 과거사로. ‘과거에 어떤 왕이 위대했고, 과거에 어떤 대통령이 훌륭했다.’ 훌륭했는데 그 인간이 왜 죽습니까?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이 훌륭했으면 왜 죽어요? 세종 대왕, 세종대왕이 그렇게 훌륭했는데 왜 죽습니까?

세종대왕을 훌륭하게 본다는 것은 아직도 조선 시대 제4대 왕 세종을 지금도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익이 되는 것을 인간은 뭐로 보느냐? 선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런 선에서 우리가 상관없는 존재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세종대왕 한글 만든 것, 주께서 만들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우리하고 상관하지 맙시다. 우리는 썩을 인간이고 우리는 죽을 인간인데 왜 아직도 우리가 선에 미련을 갖고 있고 악한 자가 아닌 것처럼 행세하느냐 그 말이지요.

로마서 7장에 보게 되면 그 원칙에 대해서 나와요. 사람들은, 선과 악을 아는 인간들의 주장이 이거예요. 뭐든지 원칙대로 살아야 된다. 그러면 교회 왔다. 교회 오면 말씀듣고 성경 보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 채 설교 듣고 말씀 보게 되면 어떤 것이 마음에 딱 오느냐 하면, ‘원칙대로 살자. 원칙대로,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되고 목사님 말씀대로 사는 것, 이게 성도의 바른 도리다.’ 이게 딱 있는 거예요.

그러나 여기 로마서 7장에 보면 그게 틀렸어요. 원칙대로 사는 게 아니고 원칙 안에서 살아야 돼요, 원칙 안에서. 그게 왜 그러냐? 로마서 7장 8, 9 절에보면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이 말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일은 계명을 줌으로써 계명이 살아나고 나를 죽게 만드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 관심사도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이 살아나요. 율법이 살아나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칙이 살아나고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살아나야 돼요. 우리는 애초부터 죽어 있었다는 사실이 내가 인정하기 싫지만 감추어진 진리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어 있었던 거예요. 내가 살아난 게 아니고 죽음이 살아난 거예요. 전에는 죽음 안에서 죽음이 살아 있었는데 지금은 주님의 영생이 살아 있는 거지요. 어쨌거나저쨌거나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아니에요. 죄가 있을 때도 죄가 살아났지 내가 살아난 게 아니고 생명이 있을 때도 생명이 살아나지 내가 살아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선악을 조정해서 내가 살려고 시도했잖아요. ‘열심히 살아야지. 바르게 살면 살려주겠지.’ 이거 다 사기입니다. 이거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사기에요.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사기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이 살아나야 되지 내가 살아나면 안 돼요. 우리는 제발 죽어 있어야 돼요. 계속해서 죽어 있어야 돼요.

그러면 죽는 방법이 뭐냐? 과거를 삭제하면 되지요. “네 과거 이랬잖아. 뭐 언제 네가 지난 여름밤에 한 짓을 아는데?” “음, 그거 내 일 아닌데?” “그러면 누가 했는데?” “주께서 하신 주의 일인데?” “이 뻔뻔스러운……” “뻔뻔하든 말든 어제부로 내가 죽었다고.”

어제부로 나의 과거는 죽은 과거에요. 예수 그리스도 몰랐을 때 했던 것은 다 죽은 일이었어요. 그리고 그걸 죽게 한 일은 주의 일이었습니다. “너 몇 년 살았어?” 물으면 “예, 제 나이가 40입니다.” 그러면 40년 동안 죽음이 살아 있었고, 40년 동안 죽음이 살아 있도록 주께서 일하신 기간이 40년이었습니다.

송 해가 96세에 죽었잖아요. 송해 이야기 한 두 번 한 게 아닙니다. 송 해 96년 동안 죽어 있었어요. 죽은 자가 “전국~노래자랑!” 이거 사회 봤다고요. 그런데 송 해보고 “저 죽은 자가 왜 사회 보지?”라고 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송 해는 좋겠다 죽을 때까지 돈 벌고.’ 이런 것만 생각했다고요. 왜? 자기도 돈 벌어서 살고 싶으니까, 흉내 내고 싶으니까. 누굴 욕해요?

마태복음 4장 19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보고 “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했어요. 이건 뭐냐? 베드로가 영생 얻고 난 뒤에 다시 남의 과거 속에 주님의 이름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당신의 과거는 주님의 과거입니다.” 그 이야기해서 그 사람이 나의 과거로부터 그 사람은 수평적 시간에서 수직적 시간으로 끄집어내는 작업을 베드로가 성령 받고 난 뒤에 해야 될 일입니다.

사실은 그 일을 벌써부터 복음 전하는 자들이 이 한국 땅에 했었어요. 오늘날 우리에게 했었습니다. 과거 없는 영생에 속한 자가 아직도 과거 속에서 못 벗어난 우리에게 와서 주님의 영생의 복음을 전하니까 그 영생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정체가 나의 과거라는 게 없고, 나의 선도 없고, 나의 죄도 악도 없고, 모조리 다 죄가 하는 짓이고, 악마가 하는 짓이었고, 주께서는 그 악마로부터 악마를 폐하시고 우리를 생명의 세계로 건져주시 기 위해서 영생의 패치로 우리 중앙에 찾아왔다는 거예요.

내가 선하게 중앙에 있는 나를 빈 공간으로 잘라버린 거예요. 선과 악이라는 상식을 그 중간을 잘라버린 거예요. 이 선과 악의 이어짐에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선은 악이 되지 못하고 악은 선이 되지 못하고 중간에 끊어져 버렸어요. 선과 악을 한꺼번에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자리에 내가 없는 겁니다.

중간에 이렇게 끊는 작업이 마태복음 17장 27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갈 때 어떤 관리들이 시비 걸었던 겁니다. “예수여, 그리고 당신 일행들이 성전세 왜 안냅니까?” 성전세 왜 안 내냐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4절에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하니까 베드로가 “낼게, 낼게!” 이랬던 모양이지요. “그래, 아이고, 더러워라! 낼게!” 하고 집에 들어가니까, ‘예수님이 먼저 가라사대’ 예수님은 벌써 알았어요.

마태복음 17장 25, 26절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지금 세금 내라고 하는 그 세금쟁이들은 시간이 선악 선과 악의 노선에 있어요. 수평적 시간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수직적 시간이에요. 시계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해서 위로 올라가는 순환하는 시간, 매 순간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달리( Salvador Dalí, 1904-1989)라는 화가가 지은 그림에 보면 시계를 그려놨는데 테이블 위에, 나뭇가지 위에 시계가 축 늘어져 있어요. 그런 그림이 달리의 그림에 있어요.

기억의 영속(The Persistence of Memory, 1931)이라는 이름의 그림입니다. 어떤 괴물체 속에 시계가 축 늘어져서 대낮에 녹아버린 것처럼, 시계 자체가 축 늘어져 있듯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성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는 것인데 자기 아들은 성전세에서 면제되는 것이 상식이다.’라고 하시면서 ‘아들은 성전세를 낼 필요 없다.’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라는 말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고.

마태복음 17장 27절에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지금 성전세 베드로보고 내라 하거든요. 베드로 반 세겔, 예수님 반 세겔, 합해서 한 세겔.

이 두 사람의 성전세를 주께서 어디서 구하느냐? 인간의 일은 단절되어 있어요. 인간은 과거와 단절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일은 주님이 일으킨 일이에요. 따라서 지금 모든 인간은 과거로부터 생각해서 지금의 자기가 사는 것을 도모하려는 이런 행동 외에는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어요.

그래서 성전세는 줘야되는데 세금 낼 돈은 없고, 베드로가 당황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어떻게 하는가? 고기를 잡으라는 거예요. 고기 잡아서 입 벌리고 보니까 두 세겔도 아니고 열 세겔도 아니고 딱 한 세겔, 딱 한 세겔을 고기가 물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이벤트가 또 없어요. 고기 입 열어서 딱 한 세겔, 너와 나의 한 세겔을 딱 줬습니다.

그래서 이 말을 원인으로 캐게 되면 ‘예수님께서 고기 속에다 한 세겔을 집어넣고 잡히게 했다.’ 이렇게 됩니다. 인간의 상식, 이성에 의하면. 이유에 대해서 언급하면 ‘너는 죄인’이라는 거예요. 베드로, 그리고 저쪽도 죄인이고 예수님 나 빼놓고는 다 죽음이고 생명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예수님만 생명이에요.

자, 생명의 역할은 뭐냐? 너희들의 죄를 까발리는 겁니다. 들춰내는 거예요. 너희들이 지금 살아가는 이것은 너희들이 사는 게 아니고 저주가 살아 있는 것이고, 죽음이 살아 있는 것이고, 저주가 살아 있는 것이고, 악마가 살아 있는 형국을 너희들이 지금 대표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 그걸 영생이 되신 주님의 활동으로 까발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 고기를 잡아서 한 세겔을 준 것은 단절을 의미합니다. ‘선악을 아는 인간이 결코 예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인간의 자기 믿음으로 구원은 성사되지 않는다.’ 인간의 믿음으로 구원이 되지 않고 예수님의 드러남으로 구원이 성사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구원이 되는 거예요. 찾아오실 때 내가 어떠한 존재에 불과한가가 다 밝히 드러나는 겁니다.

오늘 제가 몇 번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언급하면, 여러분의 과거는 여러분의 일이 아닙니다. 양심의 가책, 그런 것 좀 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일이 아니었고 주의 일이었습니다. 좀 많이 뻔뻔하더라도 참아내세요. 좀 뻔뻔하세요. 죽어서 우리 자신과 이별하지 마시고, 세상과 이별하지 마시고, 살아서 과거와 이별하시고, 살아서 이 세상과 이별하셔서 살아 있을 때부터 영생을 얻어야 됩니다. 나와 이별해야 돼요. 우리 자신이.

원칙대로 살지 마세요. ‘원칙 안’에 사세요. 주님의 영생 안에 살아야지 내가 살아서 내가 원칙대로 바르게 살지 마세요. 이것은 마귀의 가르침입니다. 또 마태복음 22장 17-20절을 보겠습니다. 여기서 또 단절이 나와요. 어떤 바리새인들이 또 예수님한테 시비 겁니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 대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그 형상에 시이저(Caesar), 가이사지요, 영어로 하면 시이저, 시이저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1절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게 단절입니다. 선과 악 사이를 끊어버리는 거예요. 선도 네 담당 아니고 악도 네 담당 아니고 그것을 끊어내시는 예수님 담당이거든요. 가죽옷 담당이에요, 가죽옷 담당.

인간은 선악을 안다고 자기 수치까지 해결할 수 없어요. 주께서 찾아와서 선악으로 나의 수치를 해결하려는 그 지점에, 십자가의 은혜가 거기에 충격을 가해서 끊어내 버립니다. 아까 그 동전이벤트도 제자들 사고를 예수님이 고기를 잡게 하는 식으로 끊어내듯이 이 바리새인이 주장하는 세금 내는 문제도 주께서 오셔서 둘을 연결시키는 이 연결의 중간을 끊어내는 거예요.

이것은 곧 상식적인 우리 자신과, 영생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나 자신을 주께서 끊어내는 거예요. 예수를 믿으려는 나와 예수 안에 사는 나와 전혀 별개의 존재라는 겁니다, 별개의 존재. 바르게 살려 하는 나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와 전혀 다른 존재예요.

끝으로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떤 과부가 있는데 이 과부가 자기의 원한이 있어서 원한을 풀기 위해서 재판관을 찾아왔습니다. 4, 5절에 보면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그 재판관이 뭐라고 하느냐? ‘그 과부가 앞으로 나를 계속 귀찮게 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어쩔 수 없이 나간다.’ 그렇게 했습니다. 6절에 이런 표현이 있어요.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불의한 갑자기 이 재판관이 불의한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억울한 일을 당한 이 여자 과부에 의해서 이 세상이 모조리 다 하나님이 심판 앞에서 불의하다는 판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주께서 억울함을 당한 과부를 발생시켜서 불의함의 불의함을 들춰내는 작업입니다. 거기에 이 과부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과부는 자기 억울한 것을 재판에 하소연하기 위해서 재판관을 닦달 내는 거예요. 어쩔 수 없이 닦달, 내가 계속 귀찮게 하고 재판해 달라고 달려드는 이 모습, 이게 오늘날 성도의 모습이라는 거예요. 성도는 뭐냐? 이 세상이 얼마나 불의한지 가만있지 않고 주께서는 성도를 통해서 이 세상을 자꾸 시비 걸고 닦달 내는 삶을 살도록 뒤에서 주께서 부추긴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하는 말이 8절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이 세상은 어차피 마귀의 세상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딴에 욕한다고 욕을 했어요. “지옥이나 가버려!” 하니까 욕 얻어 먹는 사람이 “여기가 벌써 지옥인데요? 여기가 지옥인데 어딜 또 지옥을 가?”

우리는 지옥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옥에서 태어났고요. 우리가 태어나서 살면서 공부하고 가정에서 배운 것은 전부 다 지옥에 적합한 인생으로 살고자 필요한 것들, 그러한 지식과 요령들을 우리는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래놓고 우리는 우리의 본색이 뭔지를 몰랐지요. 몰랐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은혜로, 생명 되시는 주님의 그 십자가의 능력이 찾아올 때 비로소 우리가 깔고 앉은 이 세계, 우리가 몰랐던 이 세계가 우리를 생산했고 우리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게 썩게 되어 있고 이게 사망을 이루어 가도록 모든 면에서 유도되고 있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주께서 오셔서 뽑아낼 때, 이게 시간이거든요, 과거-현재-미래의 시간,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못 버리고, 현재 자기 삶에 대한 애착도 못 버리고, 미래의 성공과 출세에 대한 계획과 목표, 목적도 우리는 못 버리고 있습니다.

그럴 때 주께서 수직적으로 우리에게 영생이 찾아오게 되면 영생이라는 원칙, ‘영생의 원칙대로 살아라.’가 아니라 영생 안에 우리를 이미 거기에 포함시켜 놨기 때문에 영생 안에 사는 사람으로서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버렸어요. 이 선악에서 우왕좌왕하는 우리를 거기서 옴팍 파내서 주님의 영생세계 안에 집어넣어 버렸다는 말이지요.

집어 넣어진 채 우리가 위에서 아래를 보니까 그동안 선과 악에 얼마나 우리가 시달려 왔는지, 얼마나 선과 악에 농락당했는지, ‘선하면 복 받고 악하면 저주받는다.’ 그 논리에, 그 악마의 논리에 우리가 얼마나 놀아났는지요.

이미 영생인데, 이미 다 이뤘는데, 이미 천국인데 왜 아직도 인간들 말에 휘둘리고 ‘이러면 나 손해되는데?’ 혹은 ‘오늘 이익 봤습니다, 하나님.’ 이익과 손해, 선과 악, 이제는 그 선악 구조에서 주의 은혜 된 자는 여기서 벗어난다는 이야기에요.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 이야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과거, 현재, 미래, 다 우리 이야기가 아니고 주의 이야기인데, 주의 활동인데 우리는 너무 주제넘게 우리 활동과 행동과 원칙을 의미 주면서 끼어들었습니다. 주여,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주시고, 주께서 모든 것을 주의 일로 만든 그것만 의미 있음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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