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강-YouTube강의(폭력 창세기 4:23)20221220-이 근호 목사
제417강, ‘폭력’. 폭력의 시초는 가인입니다. 자, 가인이 혼자 섭섭해 하면 그만이지 동생을 왜 죽였을까? 동생을 왜 죽였느냐? 말로 할 수 있는 그 상황을 넘어서서 그래요. 더 쉽게 말해서 사람이 화를 낼 때 화를 낼 수 있잖아요. 말로 하죠. 말로 안 된다. 그럼 폭력이죠. 이 말은 본인의 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이 분노를 지금 본인이 다스리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는 것이 바깥에 폭력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사람이 폭력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폭력을 써서라도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지.’ 그런 경우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경우는 제대로 보지 못한 거예요. 폭력은 내 마음을 내가 주체 못하는 그러한 난감한 지경에 내가 빠져 있습니다, 를 티내는 것이 폭력입니다.
옛날에 연세 많은 부부들 보면 남편들이 평소에는 안 그러다가 일주일에 한 번이나 두 번 술 먹고 들어왔다. 그러면 슬슬 폭력에 시동이 걸립니다. 흔히 여자들이 말하죠. ‘우리 남편은 평소엔 참 착한데 술만 먹으면 저래요. 술이 원수지, 내 남편이 나쁜 건 아닙니다.’ 이렇게 또 남편 변호 못해서 환장하듯이 변호를 해준다고요. 그때 여자의 대처방법은 나 하나만 참으면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평소에 술 안 먹었을 때는 참 순한 양반이고 착한 양반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지금 그 아내 분은 자기 남편에 대해서 어떤 처지에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내 남편을 다스려야지, 나는 내 남편을 감당 못하겠다는 뜻이에요, 그게. ‘남편은 나를 감당해주세요. 하지만 나는 당신을 관리하거나 다스리거나 감당할 의사가 없습니다.’ 이게 옛날 여자들의 자세이고 태도에요. 그래야 지고지순한 착한 여인이라고 칭찬받는 그런 고정관념 속에 놓인 여인들의 일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게 어떤 의미에서는 남자가 스스로 본인에 대해 모르는 것에 대해서 여자 쪽에서, 남자가 아닌 다른 타자인 여자가 제대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어요. 남자는 술만 안 먹으면 착하다고 한다는 것은 자기가 지금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잠재되어 있어요. 인간은 본인이 관리하는 게 아닙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평소에 동생 죽이려고 쫓아다니면서 뭐 무술 연마한 사람입니까? 혼자서 산속에 가가지고 태권도 배우고 이랬습니까? 아니죠. 어느 날 갑자기 본인의 분노가 터져나온 거예요. 이렇게 되면 가인이라는 당사자 말고 가인보다 더 센 게 가인을 지금 다루고 있고 덮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 폭력이라는 것은 인간 말고 다른 게 있다는 겁니다. 폭력을 유발하도록 부추기는 다른 실존적인 어떤 힘의 세력이 있다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 라멕이 나오는데 라멕은 바로 그 가인의 7대 후손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 아내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보세요. 만만한 게 아내에요.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왜 이 이야기를 아내들에게 자랑삼아 이야기하느냐? 그건 24절에 나옵니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지금 라멕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그 중심 되는 의도를 캐내보게 되면 ‘나에게 폭력이 나오는 원천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라는 것을 지금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 ‘나는 남 죽일 수 있는 힘 가졌다. 아, 자랑스러워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사람도 죽일 수 있다. 그런 내가 된 것을 나는 굉장히 뿌듯하게 느낀다. 이 아내들이여, 이런 남편 된 것을 너희 아내들은 내가 나한테 뿌듯한 것처럼 너희들도 같이 존중해줘야 돼.’ 지금 그런 이야기거든요.
이 세계가 뭐냐? 가인의 세계, 당시 인간의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됐을 때 그 도시 내에 형성되는 의식들이에요. 사고방식들이에요. 그럼 도시가 커서 국가가 되죠. 이게 인간의 문명이 되는 겁니다. 철기 문명 등 여러 가지 문명. 인간의 문명을 drive한, 인간의 문명을 끌어나가는 힘은 폭력입니다. 이걸 더 쉽게 말해서 전쟁입니다. 전쟁하지 않는 인간은 발전성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걸 성공한 인간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한번 정리해봅시다. 우리 인간이 세상에서 인정받는 힘은 어디에 있다? ‘나 남에게 폭력행할 수 있는 힘 가졌다. 나 무시하지 마라.’ 이거 가진 자가 영웅이 되고 역사의 승자가 되고 왕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남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유, 이건 어떤 특정 인간, 성질 고약한 인간의 개인적인 성향이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아침 눈떠서부터 해질 때까지 전쟁판이에요. 전쟁이라고 말했지만 그걸 고상하게 순화하면 경쟁입니다. 오늘도 경쟁하러 오셨죠. 경쟁 없는 곳 있습니까? 없습니다. 심지어 교회도 경쟁이에요. 인간이 만나면 보이지 않는 싸움이죠. 네가 빨간 파카 입었나, 내가 빨간 파카 입었나. 누가 더 비싼 거 입었나. 보이지 않는 경쟁, 비교.
이게 뭐냐 하면 ‘나는 너를 미워할 수도 있고 미움보다 더 나아가서 나는 너를 죽였으면 좋겠다는 그러한 의지도 나는 갖고 있다. 여기다 힘만 보태고 상황 적절하면 나는 너를 죽일 수 있다.’ 이게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을 왜 하나님께서 허용하는가? 이걸 아셔야 돼요. 구원은 폭력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입니다. 폭력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폭력에 죽으셨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폭력만 수여받고 살았던 우리가 폭력 없는 세계로의 구원을 받는 겁니다. 폭력 만세. 폭력 만세.
내가 바로 주님을 죽인 원수이고 지금도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나는 내가 가진 힘 가지고 꼴 보기 싫은 자 죽이고 싶은 이런, 주여 이게 바로 주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원수죠? 맞죠? 이게 바로 가인의 후손 맞죠? 자기를 되돌아볼 수 있는 환경을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