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강-YouTube강의(존재의 뒤편 출애굽기 4:17)20221206-이 근호 목사
제414강, ‘존재의 뒤편’. 존재라는 말은 있다는 뜻이고 나타나있든 사람들 눈앞에 띄고 있고 누가 봐도 거기 있는 것, 그걸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존재가 나타나버리면 사람들은 나타난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뭐가 가리워지느냐 하면 나타남 뒤에 있는 것이 나타남에 의해서 알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나실 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걸 보지 못했어요. 이런 경우는 사울이란 사람도 해당돼요. 사울이란 사람이 하나님 앞에 특심이 있고 열심이 넘쳐서 예수 믿는 것을 이단으로 간주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체포하러 갈 때에, 사울이란 사람은 성도라는 존재만 생각했지 성도의 뒤쪽에 살아계신 주님이 함께 있음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사울이란 사람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죽일 때에 죽여 없애는 것이 합당하다고 사울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스데반 집사를 돌로 죽이는 데에 동의했던 그 사울이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사도가 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상상도 못하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인간이 스스로 그 인간이 어떤 노력으로 그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개과천선하고 바뀔까를 생각하죠. 사울 존재 뒤편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에게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 예수님의 취지는 이거였습니다. “그들을 핍박하는 것은 곧 살아있는 나를, 주님 나를 핍박하는 것이다.” 라고 분명히 언급했어요.
사람들은 눈에 보이면 그 존재의 뒤편을 볼 줄 모르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할 것 같으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했어요 (갈 1:10).
사람을 기쁘게 할까, 라는 마음을 먹는 그 자체부터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게 사람들이잖아요. 그 사람을 기쁘게 할 때 자기한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의 그 말씀(“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 말씀을 옛날 사울이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겠어요? 그렇게 생각 못했죠. 본인 자체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의 존재 뒤편에서 함께 있다는 사실을 사울이란 사람이 예수님 만나기 전까지는 몰랐습니다.
이제 자기가 그런 입장에 있어요. 사울이 복음을 전하고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은 사울이 얼굴 존재 보니까 뭐 별로네, 이런 평을 받았던 거예요. 말은 힘이 있지만 실제로 보니까 별 거 아니네, 이렇게 평을 받았어요. 그 점에 대해서 사울은 충분히 이해하죠. 사울 본인도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인간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 존재란 뭐냐? 하나님이 창조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창조했으면 그다음은 하나님이 일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창조해놓고 창조된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라고 창조된 피조물끼리 자체적인 움직임으로 세상을 움직인다는 그런 이론이 신학에 나와 있어요. 이신론(理神論, deism)이라 하는 겁니다.
일단 만들었으면 만들어진 원리대로 자체적으로 그렇게 움직이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추가해서 창조의 능력을 가미할 이유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서양에서 뉴턴부터 시작해서 과학이 발달할 때 과학도 건져야 되겠고 하나님도 버릴 수 없어가지고 절충안으로 나온 것이 이신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신론이 뭐가 문제가 되겠어요? 눈에 보이는 존재만 연구하고 파악하고 분석하게 되면 세상 돌아가는 원리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럼 뭐를 누락시킨 거죠? 존재의 뒤편. 그걸 누락시킨 겁니다.
이건 서양과학뿐만 아니고 구약에서도 똑같은 인간들이 그런 식으로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양 치고 있을 때 거기에 흔히 보이는 나무가 떨기나무였습니다. 모세 입장에서 떨기나무는 떨기나무죠, 그냥 평범한. 그런데 출애굽기 3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어느 날, 그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다 이 말이죠.
자, 그렇다면 떨기나무가 존재하죠. 불이 붙었다. 그 떨기나무에 불이 존재하죠. 존재의 뒤편은 아닙니다. 그런데 웬 불이 거기 붙지? 벼락 맞았나? 하고 가까이 가보니까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그 떨기나무 불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잖아요. 그럼 그건 모세가 이렇게 본다고 보입니까? 안 보이죠. 존재의 뒤편인 거예요.
그리고 존재의 뒤편 되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계속해서 일을 시키시면서 출애굽기 4장 17절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찌니라” 이렇게 되어있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너의 뒤편에 함께 있음을 알리는 증표로서 모세가 들고 있던 지팡이를 지목합니다. 그럼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가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지팡이가 모세를 종속하고 있다, 이렇게 봐야 돼요. 존재의 뒤편이 지팡이라는 존재의 모습으로 등장해서 모세 곁에 항상 함께 있었던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 지팡이 들고 누구를 만나러가요? 그냥 지팡이 없이 가는 게 아니에요. 지팡이 들고 애굽의 바로 왕을 만나러 갑니다. 세상 사람 같으면 쫄겠죠. 겁나겠죠. 모세한테는 보디가드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군대는 몇 명입니까? 엄청나죠. 말 한번 잘못해서 실례한다든지 예의에 어긋나게 무례히 한다면 뭐 말도 끄집어내기 전에 즉결심판으로 사형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겁이 났겠습니까.
그런데 모세가 당당하게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뭡니까? 눈에 보이는 사람들 눈에 띄는 자기 존재가 전부였던가요? 아니죠. 자기 곁에 뭐가 있습니까? 지팡이 있죠. 나라는 존재의 뒤편. 존재의 뒤편은 그림자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반대로 생각해야 돼요. 내 뒤에 계신 분의 그림자가 사람들 눈에 띄는 나라는 존재. 여러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자꾸 다른 사람하고 경쟁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림자가 경쟁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우리와 함께 있는 주님은 경쟁할 이유를 우리에게 준 적이 없어요. 지금 모세가 지팡이 들고 내 지팡이 길다, 뭐 그거 자랑합니까? 네 지팡이 내놔봐. 우리 어느 지팡이가 더 센지 겨루어보자, 이랬습니까? 아니죠. 그럴 마음조차 생기지 않겠죠. 왜? 지팡이에 종속된 모세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누구한테 종속되어 있습니까? 종속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했잖아요. 뭐 이 말에 어려운 거 있습니까? 없죠. 믿음이 없어서 그렇지 어려운 건 없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때부터 열 가지 재앙을 행하는데 그 재앙을 행할 때마다 등장하는 것이 지팡이. 그 지팡이가 바로 왕에게만 해당된 게 아닙니다. 홍해 건너올 때 홍해를 갈랐죠. 광야에서 반석 칠 때 지팡이 사용했잖아요. 그리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지팡이 들고 승리했잖아요.
모세 앞만 바라보면 안돼요. 모세 뒤에 있는 존재의 뒤편은 모세를 마치 주께서 다루는 지팡이처럼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모세와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을 발견해야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과 하나님 없이 있는 것이 보기에는 똑같은 존재자의 모습이지만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