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강의

속임수

아빠와 함께 2023. 2. 8. 08:11

418강-YouTube강의(속임수 시편 119:118)20230207-이 근호 목사


제418강, ‘속임수’. 진리로 세상을 만들어놨는데 그 진리가 진리답기 위해서는 필히 거기서 속임수가 발생되어야 됩니다. 속임수를 통해서 진리를 파악해야 돼요. 그 방식을 드러내는 과정이 구약과 신약입니다.

일단 구약에서 속임수가 세상을 덮어줘야 돼요, 속임수가. 그리고 신약에 오게 되면 그 속임수에 의해서 피해보는 사람이 발생되어야 돼요, 속임수에 의해서. 제가 이렇게 하면 결국 진리는 언제 나타나느냐? 속임수부리는 자리에서 피해를 보는 그 분이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는 그때 나타나요.

그럼 우리 생각은 어떻습니까? 내가 가만히 있고 누가 진리를 솔솔 가르쳐주게 되면 우리는 꿀떡 꿀떡 그 진리를 받아서 내 안에 진리가 차곡차곡 쌓여 내가 진리의 사람이고자 하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방금 제가 언급한 바에 의하면 뭐가 빠집니까? 피해를 봤다는 요소가 없죠.

그냥 주는 대로 꿀떡 꿀떡 받기만 했기 때문에 바깥에 있는 진리를 내 안의 진리로 받아들이면서 피해보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이게 바로 속임수입니다. ‘피해보지 않고 진리에 접근합니다.’ 이게 바로 속임수에요.

우리가 성경을 보기 전에 우리는 성경 바깥에 있습니다. 성경을 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성경 안에다가 성경을 바라보는 우리 말고 성경 안에 어떤 분을 세웠어요. 그리고 모든 성경말씀은 누구한테 집중되느냐 하면 성경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성경 안에 계시는 그분을 향하여 모든 말씀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성경에서 빼먹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성경 바깥에서 바라보고 있는 우리를 배제합니다. 배제하고 성경말씀은 성경 자체 안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있어요. 이것이 히브리서 10장에 나옵니다. 내가 말씀을 위해서 한 사람을 세웠다. 택한 자를 세웠는데 모든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오는 게 아니고 그분에게 몰려갑니다. 그분에게 다 쏠리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분 혼자 홀로 성경말씀을 다 이루십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성경말씀임과 동시에 성경 구약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통할 수 있는 어떤 등장인물과 겸해서 봐야 됩니다. ‘어? 말씀 있네. 말씀 지켜야지.’ 이래가지고는 안 되고요. 그래서는 안 되거든요. 안 되고. 그건 바리새인들이나 하는 짓이고.

‘성경말씀, 이 말씀 있는데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또 누구 하나 등장했지?’ 이렇게 두 개를 같이 연결시켜서 성경을 봐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따박따박 성경말씀은 옳은 말씀이니까 진리니까 나는 진리 되고 싶고 성경말씀은 진리니까 진리 되고 싶은 내가 성경말씀을 듣고 지키면 그게 진리가 아닌가?’ 안일하게 그렇게 생각이 되죠.

그러면 거기서 뭐가 빠져버렸어요? 성경 자체에서 내세우는 인물이 빠져버리죠. ‘성경말씀은 내가 진리 알아서 진리 안 사람으로서 구원받으면 되지.’라는 이 안일한 생각 속에서 누가 배제됩니까? 예수님이 배제되죠.

그럼 우리 생각에는 ‘아, 예수님이 성경말씀을 잘 지켰단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모델삼아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성경말씀 잘 지키면 되네. 지키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할 경우에도 뭐가 빠졌습니까? ‘예수님께서 성경말씀 지키기 위해서 희생당했다. 어려움을 당했다.’ 그것도 빠져버린 거예요.

그래서 진리를 구성하기 위해서 빠뜨리지 말아야 될 것은, 성경말씀 자체가 어떤 인물을 내세우고 그리고 그다음에 그 인물이 성경말씀 지키는데 엄청 고생을 많이 했다는 거예요. 희생을 많이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착하고 착한, 말씀대로 사실 분을 누가 그렇게 힘들게 했는가? 이런 생각 들겠죠. 누가 힘들게 했는가? 바로 속임수를 부리는 자들이 힘들게 하죠. 속임수의 반대말은 진리입니다. 진리의 반대는 속임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누구한테만 다 몰아세웠다? 예수님께만 몰아세웠다. 그렇다면 우리는 뭐냐? 우리는 어느 편이냐? 진리 편일까요, 속임수 편일까요? 속임수 편에 속하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서 이 말씀이 내가 어떤 식으로 하나님을 속이고 있는가를 들추어내는 말씀으로 봐야 돼요. 이 말씀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말씀은 꿀같이 달다고 하죠. 꿀같이 달면 뭐 초콜릿이나 벌꿀 먹으면 되겠죠. 그러나 꿀같이 달다는 것은 깨어지지 않는 내가 몰랐던 나의 속임수가 속 시원하게 뽑혀져나갈 때 그때 꿀같이 달아요. 아! 내가 말씀 지켜서 구원받는 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 때 꿀같이 단 말씀이 되는 겁니다.

시편 119편 118절에 보면 “주의 율례에서 떠나는 자는 주께서 다 멸시하셨으니 저희 궤사는 허무함이니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다음 119편 119절에 보면, 외우기도 쉬워요, 119 119,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을 찌끼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를 사랑하나이다”

여기서 ‘나’가 누구냐. 시편의 ‘나’는 누구를 의미하느냐 하면 껍질은 다윗이에요. 그러나 그 다윗 안에 누가 들어있어요. 예수님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을 선지자로 미리 예수님보다 먼저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다윗 태어났을 때 다윗은 구원받는 인간의 대표라 할 수 있어요. 그 시대, 다윗 시대에 구원받는 대표는 다윗입니다. 이 말은 뭐냐? 그 시대의 사람들, 하나님의 구원받을 사람의 대표자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안에, 그 대표자를 누가 세웠는가? 예수님이 다윗 안에 들어오신 거예요. 그것을 다윗 언약이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찾아오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에게 오면 이삭의 하나님, 야곱에게 오게 되면 야곱의 하나님.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오늘날 우리 이름이 예수의 이름으로 살게 하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 다윗의 일대기를 보게 되면 다윗은 우리 보통사람하고 똑같아요. 율법도 어느 정도가 아니라 제대로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안 다윗이 율법대로 못 살게 되는 경우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용했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사람이 율법을 어긴 게 아니고, 율법을 아는 다윗이 율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경우의 사람으로 하나님이 세워두셨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약속을 믿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하갈하고 관계해서 이스마엘 낳은 게 약속을 믿지 않았다는 뜻이거든요. 하나님이 약속한 자식이 아닌데. 야곱도 마찬가지고요.

하나님이 누구를 뽑아줄 때는 네가 진리를 행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우리를 선택한 거예요. 그걸 흔히 말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선택했다는 말도 맞는데 구원받기 위한 절차가 있어야 돼요, 그 안에 절차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런 능력과 본질을 갖추지 못했다는 취지로 우리를 건지시는 거예요. 내 힘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구원시킨 겁니다.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악인이 되어야 되는데 다윗은 자기 뜻대로 안되고 자기 성질대로 안 되면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악인이라고, ‘너는 우리 편. 너는 나한테 죽어야 될 사람.’ 이렇게 단정 지으니까 다윗이야말로 율법도 모르면서 속임수를 쓰는 사람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율법 주고 다윗이 율법대로 못 살게 함으로써 다윗은 ‘나는 하나님을 속이는 자’로 들통나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다윗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의 말씀은 꿀처럼 달죠. 예상 밖에 달죠. 예상 밖에 단 거예요.

‘아, 하나님 믿으니까 이렇게 좋다.’ 그걸 능가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비로소 이것은 내 안의 주께서 하신 일이지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그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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