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6강-YouTube강의(속임수 열왕기상 13:18)20221220-이 근호 목사
제416강, ‘속임수’. 사람이 사람을 상대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용납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만 있는 세상이 아니거든요. 엄연히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이 친히 관장하는 세계 속에 우리 인간이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실제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먼저 염두에 두어야 되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 자기 본성대로 아담의 본성대로 사는 사람들은 티가 나게 되어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안중에 없어요.
거울 앞에 있는 자기 모습을 보고 자기가 여기 살아있고 여기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그럼 보이는 것이 우선이겠는가, 보이지 않는 분이 우선이겠는가? 이건 말하나 마나죠.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제키고 같이 보이는 인간끼리 상대하는 것, 그러한 짓을 했을 때 성경에서는 이걸 속임수라고 이야기해요. 416강 제목은 ‘속임수’입니다. 그럼 인간들이 속임수 아니고 속이지 않고 나올 수 있는 인간의 행동과 말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인간은 전부 아담의 족속이기 때문에 한시라도 속임수 섞지 않는 태도나 행동과 말을 내뱉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남한테 화를 낼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속고 속는 세상, 너는 나 속이고 나는 너 속이고. 누가 더 능숙하냐, 누가 더 교묘하냐, 누가 더 속이는 기술이 발달되었는가, 잘 안 들키는가 그 차이뿐이죠. 모든 인간은 속이는 것으로 시작해서 속이는 것으로 끝냅니다.
그러면 모든 인간이 다 속고 속이는 거니까 속다가 그냥 지옥가면 그만이겠죠.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왜 속였어?”하고 등장하는 그 타이밍이 있어요. 아, 그거는 정말 복 받은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너 자꾸 사기 칠래?”라고 지적을 받는다는 것, 이것은 정말 땡잡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버림받을 자를 그냥 내어버려두시잖아요. 실컷 속이고 너도 속고 해라. 그런데 딱,하고 하나님이 “너 이건 속임수야.”라고 등장할 때, 꼭 말씀은 그런 식으로 지적하면서 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좋게 등장하는 법이 없어요.
꼭 지적하면서...... 그때는 황공스러워야 되고 감지덕지해야 되고 아주 고마워해야 됩니다. 아, 이 세상에는 나만 살아있는 게 아니구나. 사람들만 계신 게 아니구나. 우리들이 활동하는 것만 있는 게 아니구나. 주께서 친히 활동하시는구나. 그런 것을 접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된 것, 행운아입니다.
그런 경우가 그럼 있는가? 있습니다. 열왕기상 13장 18절, 여기 하나님께서 누구한테 개입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람에게 개입했습니다. 선지자인데 이름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나뉘어졌고 북쪽 왕 이름이 여로보암인데 그 사람한테 가서 선지자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예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서 왕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라.’ 이걸로 이렇게 끝내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부탁한 게 있습니다. 뭐냐 하면 그쪽에서 너한테 사례하겠다고 인심을 베풀 때 절대로 받지 말고 듣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아무 것도 받지 말고 왔던 길로 다시 가지도 말고 내빼라.
그게 13장 9절에 나와요. “이는 곧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10절, “이에 다른 길로 가고 자기가 벧엘에 오던 길로 좇아 돌아가지 아니하니라”
그럼 선지자가 제대로 하나님의 지시대로 따랐잖아요. 그럼 이 선지자에게 아무런 주님의 지적사항이 없죠.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여로보암 너 망해.” 말씀 전했고 주의사항까지 다 제대로 지켰으니까 하자 없죠. 잘못 없습니다.
그런데 발목을 잡는 경우가 발생했어요. 벧엘의 한 늙은 선지자가, 선배입니다, 총신 선배가 와서, 나도 선지자인데 당신만 계시 받았나? 나도 계시 받았다. 나도 계시 받았는데 뭐라고 계시 받았느냐? 18절, “저가 그 사람에게 이르되 나도 그대와 같은 선지자라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그를 네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서 그에게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라 하였느니라 하니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 되어 있어요. 속임수다.
그러니 이 순진한 하나님의 사람은 그 속임수에 넘어갔죠. 자, 이게 이 본문에서 중요한 거예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키는 것은 참 훌륭한 일처럼 느껴지죠. 그러나 조건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으니까 나 훌륭하다.’로 결론 나서는 안돼요. 하나님의 사람의 기능은 그 시대가 얼마나 환경이 악하냐까지 보여줘야 될 기능을 가지고 선지자 된 겁니다.
선지자 본인은 순수하고 늘 말씀에 대해서 지킬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요. 아니, 그런데 그것 가지고는 모자라요. 그 악한 세대가 속이는 그 속임수에 꼼짝없이 속아 넘어가줘야 됩니다. 그리고 속아 넘어간 그 대가로, 하나님 말씀에 그저 순종만 하고자하는 하나님의 선지자 자기 몸에 그 바깥 세상의 악함의 흔적을 옴팍 자기가 뒤집어써야 돼요.
개인적으로 봐서는 굉장히 억울한 일이 벌어진 거예요. 속이려하는데 안 속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자기는 지금 지시대로 왔던 길로 가지도 않고 다른 길로 갔어요. 그런데 딱 그 거짓 선지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와가지고, 나도 같은 선지자인데 계시 받았다.
선지자는 조건 달았죠. 나도 같이 천사로부터 계시 받았다 했죠. 그러면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라고 그 사람을 내칠 수 있는 자격이 우리 인간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아, 그 사람도 선지자이니까 계시 받았겠지. 그럼 그 사람 말 듣는 것은 곧 누구의 말을 듣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니까 나한테는 어떠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겠지.’
지금 선지자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뭐가 문제냐 하면 그 선지자가 의도적으로 나쁜 짓했다, 가 아니라 선지자는 그 선지자의 말씀이 주어지는 그 세대가 얼마나 악한지, 아무리 선지자가 신앙적으로 산다 할지라도 자기의 능력으로 악함의 환경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다는 것까지 보여줘야 될 자가 그 당시 하나님이 선지자를 택해서 보내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 선지자 말 듣고 대우받고 난 뒤에 그다음 24절에 “이에 그 사람이 가더니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그 시체가 길에 버린 바 되니 나귀는 그 곁에 섰고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 그런데 사자는 그 시체를 이상하게 먹지도 않아요. 먹잇감이 아닌 것 같아. (왕상 13:28) 자, 그래서 늙은 선지자가 그 사기 친 선지자가 마음에 양심에 너무 가책이 되어가지고 자기에게 속아 넘어간 선지자를 잘 대우했다.
이 전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홀로 순수하고 홀로 정결하고 홀로 믿음 좋고 그것조차도 이 시대에 탐욕입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 착한 나만 이 세상에 있는 게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주님이 주관하는 그러한 시대입니다.
우리가 악하다, 안 악하다 평가할 것도 없이 주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평가를 본인이 손해가 되더라도 들추어내고 드러내는 것이 그게 선지자의 역할이죠. 이익 봤다, 손해 봤다 성도는 그거 따지는 게 아닙니다. 성도는 그걸 따질 권한이 없어요.
주께서 시키는 대로 하시고 악한 세대에 악한 세대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한다면 감사함으로 사용 당해야죠.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나한테 책임을 묻지 마세요.’라고 그러한 건방진 멘트를 날리면 안돼요. 쓰여질 뿐이지, 내가 바르게 했으니까 구원은 내가 따놓은 당상이다, 그렇게 대가로 보상으로 구원받을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시대가 악하면 같이 악해지는 것도 우리는 당연한 거고 구원은 주님의 소관입니다.